“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손보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성형 수술을 한 남궁유민 변호사님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과연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까? 설령 얼굴을 또 바꿨다 해도 DNA까지 바꿀 순 없잖아. 경찰이 수색하고 있으니 곧 잡힐 거야!”“아니야, 아니라고!”손보미는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경찰이 감정을 가라앉히라고 호통쳤지만 손보미는 온몸을 떨며 안절부절못했다.“설마 남궁유민 변호사가 내 약점을 잡고 경찰들을 협박하면 경찰이 널 풀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 딸 율이 말이야... 살 희망이 있었는데도 남궁유민 변호사가 장기 기증 동의서에 서명해서 죽었어!”“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손보미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그녀는 도아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경찰이 재빠르게 그녀를 제압했다.“손보미 씨, 진정하세요!”“율이는 무사할 거야! 절대 무사할 거야... 잘 보살필 거라고 나한테 약속했었다니까? 우리 세 명이서 함께할 거라고 약속했단 말이야! 도아린, 거짓말이지? 맞지?”손보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경찰에게 눌려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볼을 타고 눈물이 쏟아졌다.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율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는 율이를 곁에 두기로 했다.처음엔 율이를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함께 지내면서 율이의 착하고 속 깊은 모습에 점점 정이 들었다.남궁유민이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두를 때, 율이는 따뜻한 물을 받아 그녀더러 목욕을 하라고 했었다. 그럴 때마다 율이는 조심스럽게 연고를 발라 주면서 물었다.“언니를 안 좋아해서 때리는 거예요?”남궁유민이 율이를 떠나보내자고 했을 때, 손보미는 막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병약한 딸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부녀 사이라는 건 변함없었다.생활이 조금 힘들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율이는 보육원에서도 그렇
제복을 입었을 때는 늠름했는데 지금은 치마를 입고 가발까지 써서 그런지 고민성은 유독 우아하게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도아린으로 분장한 고민성은 손을 들어 배건후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고 두 사람 사이의 눈빛은 아주 끈적했다.“나 엄청 기다렸다니까. 이제 빨리 가자.”배건후는 그의 손을 단숨에 쳐내고 도아린의 손에서 차 키를 가져갔다.도아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골반을 흔들면서 걷는 고민성을 보고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경찰이 다가오더니 도아린에게 휴게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휴게실에 막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고 경찰은 차를 따라주겠다며 자리를 비웠다.도아린은 창가 쪽으로 갔다. 그녀는 바깥 상황을 볼 수 있으면서도 공격당하지 않을 만한 위치를 찾아서 전화를 받았다.“말하세요.”“육씨 가문에서 육하경 씨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육하경 씨가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걸 몰랐죠. 육하경 씨는 죽었지만 그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어요.”강재민의 목소리는 경멸스러움과 조소로 가득했다.“그리고 또 하나 신기한 소식이 있어요. 육청아 씨는 애초에 육씨 가문의 먼 친척이 아니라는 거예요. 육청아 씨는 나영옥 어르신이 며느리로 삼으려고 데려온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계속 육청아 씨를 통제할 생각이었는데 육청아 씨가 되려 육하경이 육씨 가문을 반격하는 수단으로 되어버린 거죠.”도아린이 미간을 좁혔다.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유치장 앞 도로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이 남궁유민을 어떻게 체포했는지 알 수 없었다.창문을 열려고 하던 찰나, ‘쿵’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곧이어 유리창에 불길이 일렁이며 비쳤다.“어디예요?”강재민이 다급하게 물었다.도아린은 그의 질문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전화를 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차를 가져다주려던 경찰도 소리를 들었는지 손에 든 종이컵을 꽉 쥐어 구겼고, 뜨거운 물이 손등에 쏟아졌다. 그는 곧장 밖으
“빨리 도망가요!”고민성이 큰 소리로 외치자 도아린은 뒤돌아서서 하얀 카옌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갑자기 차 문에 검은색 코트가 끼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오자 도아린은 멈칫했다.“건후 씨!”도아린은 급히 뛰어 돌아가 차 문을 힘껏 당겼다. 그러나 차 문은 이미 충격에 의해 휘어져 있었고, 밴에서 새어 나오는 검은 연기가 차 안을 가득 채워 내부 상황을 알 수 없었다.펑!차창이 다시 폭발하며 유리가 공중으로 튕겨 나갔고 불길은 삽시간에 마치 차를 삼키려는 듯 거세졌다. 도아린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쪼그려 앉았다. 유리 조각이 튀었지만 다행히 상처는 입지 않았다.그녀가 다시 일어나 차 문을 잡으려 할 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뛰어!”도아린은 상대방의 손에 이끌려 몇 미터를 달리다가, 뒤에서 또 한 번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뜨거운 열기에 두 사람은 뒤로 튕겨 나갔다.도아린은 본능적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예상한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도아린을 꼭 껴안으며 그녀를 모든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폭발음과 함께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의 손이 그녀의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손끝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배건후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지만 도아린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뭐라고요?”도아린이 크게 외쳤다.배건후도 마치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도아린을 안전한 곳으로 끌고 간 뒤, 그녀의 팔과 다리를 움켜잡았다. 도아린은 그가 방금 자신이 다쳤는지 물어본 것임을 깨달았다.“난 괜찮아요!”도아린이 입을 크게 벌려 대답하며 배건후를 가리켰다.“당신은 괜찮아요?”배건후의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먼 곳에서 비친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상처가 없었지만 연한 색의 터틀넥 스웨터에는 약간의 피가 묻어 있었다. 그 피는 심장 근처에 있었다.도아린이 놀라 급히 그의 가슴을 만지며 갈비뼈
강재민이 어느새 다가와 말을 걸었다.그는 배건후의 경계 어린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도아린의 옆으로 다가갔다.“마침 근처에 있다가 폭발 소리를 듣고 열혈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할 생각에 달려왔는데 아린 씨가 여기 있는 줄은 몰랐네요. 우리 참 인연이 깊은 거 아니에요?”도아린은 그를 흘깃 쳐다봤다. 그 말을 믿겠냐는 눈치였다.강재민은 개의치 않게 웃으며 도아린의 어깨를 감싸안았다.“형사님, 이제 제 여자 친구 데려가도 되죠?”“...”고민성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배건후를 향했다.‘제발 시끄럽게 주먹질하고 그러지 마.’그는 자신의 경찰서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걸 원치 않았다.특히 경찰서 앞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만으로도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충분했다.“물론이죠!”고민성이 정중하게 말했다.“도아린 씨, 나중에 차량 구매 영수증만 경찰서로 보내주세요.”도아린은 사실 남궁유민의 상황이 궁금했지만 지금은 적절한 시점이 아니었다.“알겠어요.”도아린은 배건후의 간절한 눈빛을 무시하고 여유롭게 강재민의 차에 올라탔다.강재민은 창문을 내리고 도발적인 휘파람을 불며 차를 몰고 떠났다.고민성이 배건후의 옆으로 다가가며 혀를 차며 말했다.“아린 씨가 너를 그렇게 걱정하는 걸 보고 난 또 네가 기회가 있을 줄 알았지. 지금 보니... 에잇!”“차 보상은 경찰서에서 직접 책임져.”배건후가 고민성을 지나쳐 구치소로 걸어갔다.“야,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고민성이 서둘러 그를 따라가며 불평을 늘어놓았다.“우리 경찰서 예산 알잖아! 이 사건도 네가 지원해 줬으니 해결할 수 있었던 거 알면서! 경찰서에 너를 위해 현수막도 걸겠다고 약속했어!”배건후가 걸음을 멈추었다.“그런 건 당연히 나라에서 보상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는 무표정하게 고민성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난 당신들 계획에 참여하느라 내 아내까지 잃었어. 그것도 보상해 줘야 해.”고민성이 단칼에 거절하려다 그가 경비를 다시 거둬들일까 두려워 결국 대답을 피했다.그리고
앞에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자 강재민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차를 멈췄다.그는 옆에 앉은 도아린을 곁눈질로 바라보았고 그의 눈빛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도아린은 그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재민 씨에게 라윤주의 자리를 차지하라고 한 건 육청아 본인의 계획을 위해서였겠죠. 재민 씨가 보스가 되면 그 여자는 재민 씨 다음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조직을 육하경에게 넘겨줄 수 있고, 문제가 생기면 재민 씨를 희생양으로 쓸 수도 있을 테니까요.”강재민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육청아의 속셈은 그렇게 잘 꿰뚫어 봤으면서 내 마음은 못 읽어요?”도아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쳤다.그 순간,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고 강재민은 시선을 돌려 다시 차를 운전했다.도아린은 미처 그의 눈동자에 스친 쓸쓸함을 보지 못했다.집에 도착한 도아린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래층으로 향했다.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게임을 하고 있던 강재민은 그녀의 발소리가 들리자 고개도 돌리지 않고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그만할게, 여자 친구랑 나가야 돼.”“젠장! 팀 킬하고 도망가냐...”상대가 욕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는 게임을 끄고 웃으며 일어났다.“가요!”“어디를요?”“밥 먹으러.”그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외투를 도아린에게 건네고 다정하게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그 손길은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진중했다.그들이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일북이 돌아왔다.그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재민을 바라봤고 강재민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차 키를 그에게 던졌다.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북은 그제야 차로 향했다.강재민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도심의 고급 호텔이었다.그는 미리 예약한 창가의 테이블에 다가가 신사적으로 도아린의 의자를 빼주고, 일북을 돌아보았다.“먹고 싶은 걸 골라요. 계산은 내가 할게요.”일북이는 바로 뒤쪽 테이블에 앉은 채 두 사람한테서 시선을 떼
도아린은 급히 시선을 돌린 채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도망치고 싶었다.‘만약 재민 씨가 정말로 청혼을 하는 거라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결혼에 대한 희망을 잃었어요. 당분간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아시다시피 재민 씨 가족과는 어색해 앞으로도 계속 갈등이 생길 것 같아요.’‘어떤 게 좋을까?’“저것 봐봐!”레스토랑에 들어온 한 커플이 공중의 드론을 보고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흥분해서 남자 친구의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너무 예쁘다! 자기도 나한테 청혼할 때 이렇게 해주면 안 돼?”“나한테 시집오기만 하면 내가 하늘의 별이라도 따올 수 있어!”“그럼 가서 별이라도 따와!”두 사람은 웃으며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강재민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하고 싶은 말 없어요?”도아린은 음료컵을 꽉 쥔 채 입을 열었다.“재민 씨. 우리는 아무래도...”그녀는 강재민과 진지하게 시작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들이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게 해주었다.강재민이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유리처럼 맑은 눈동자가 불빛에 비쳐 반짝였지만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스쳤다.“더 이상 안 보면 끝날 텐데요.”“...”“도저히 볼 자신이 없어요?”도아린은 다시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거절을 하더라도 강재민이 준비한 이벤트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공중에 떠 있는 글자를 보고 눈물이 스쳤다.‘행복해야 해.’도아린은 코가 찡해져 눈을 크게 뜬 채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애썼다.드론들이 밤하늘에서 귀여운 파란색 애벌레 모양을 만들더니 천천히 나비로 변하며 쇼는 막을 내렸다.강재민이 도아린에게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애벌레에서 이제는 멋진 나비로 변한 걸 축하해요.”도아린은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강재민이 자신에게 청혼하려는 줄 알았는데 결국 그것은 단지 축복이었다.그 축복은 그녀를 묘하게 울컥하게 했다.“재민 씨, 미안해요
도아린이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작은 상자 안을 내려다보았다.벨벳 상자 안에는 결혼반지가 아닌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현무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현무의 직위를 포기하고 라윤주 자리에 대한 경쟁도 그만두겠다는 건가?’서빙 직원이 음식을 가져오자 강재민은 도아린이 좋아하는 음식을 그녀 앞에 놓았다.권력을 내려놓은 남자는 조금도 아쉬움이 없었고 오히려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식사가 끝나자 강재민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한 뒤, 미안한 듯 말했다.“이따 데려다 줄 수 없을 것 같아요. 바로 공항으로 가야 되거든요.”그는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인연이 닿으면 그때 다시 만나요.”도아린이 일어나서 그의 손을 잡았다.“강재민 씨도 잘 지내요.”강재민은 손을 꽉 쥔 뒤 미소를 지으며 손을 뗐다.도아린을 따라나서던 일북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강재민은 와인잔을 한 모금에 비우고 창밖을 보며 도아린에게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차로 돌아오자 일북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아가씨. 배 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헤어지자고 하는 그런 사람을 위해 슬퍼할 필요 없어요. 어떻게 아가씨를 믿지 않을 수 있죠?”도아린이 고개를 숙인 채, 그 다이아몬드 단추를 바라보았다.그 위로 눈물이 떨어지며 다이아몬드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빛났다.“재민 씨는 나를 믿지 않았던 게 아니야.”“그렇다면 왜... 결국 이별을 말한 건 그 일 때문 아닌가요?”일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강재민은 도아린과 육하경이 몇 날 며칠 같이 배에 있으면서 그들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확신했다.일북의 눈에 강재민은 도아린이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한 거라는 걸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받아들이지 못해 헤어지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었다.도아린이 눈물을 닦으며 단추를 가방에 넣었다.“만약 재민 씨가 정말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내가 건후 씨와 결혼한 뒤에도 건후 씨한테 시비를 걸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이혼
강재민은 굳어진 채 손에 든 와인잔을 응시했다. 와인에 갈색 눈동자가 비춰 일렁이었다.“오늘 구치소에 아린 씨를 데리러 갔다가 두 사람을 봤거든?”강재민이 도착했을 때 주변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배건후와 고성민이 범인을 잡는 과정을 목격했고도아린이 소화기를 들고 사람을 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배건후가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을 무릅쓰고 도아린을 위해 달려가는 장면도 목격했다.강재민은 순간 자신에게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알아챘다.도아린의 마음속에 배건후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래. 건후를 깊이 사랑한 게 아니라면 그 3년 동안 그렇게 참고 견디지 않았겠지.’배건후는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그의 희생과 ‘죽음’으로 도아린에게 사죄한 셈이었다.도아린이 당장에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른 남자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게다가 강재민은 배건후의 가정을 망친 장본인이였고 도아린이 배건후를 용서하는 그날, 바로 그와 도아린은 적이 될 게 뻔했다.그는 도아린이 이별을 고할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그는 완전한 실패자가 될 테니까.그래서 그는 도아린의 잘못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들어 결말이 없는 연애를 끝내며 남아 있는 자존심이라도 지키려 했다.처음으로 좌절하는 동생의 모습을 마주하고 강재희는 몇 마디 잔소리를 덧붙인 후, 동생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세 병의 와인이 다 비워지자 강재민은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드려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강재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어 동행한 경호원을 불러 그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일주일 후, LY 고위 회의에서 라윤주 자리를 놓고 논의가 시작됐다.서대은은 여전히 여성 복장을 한 채 현재의 라윤주를 지지한다고 밝혔고 청룡도 마찬가지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백호는 다시 한번 경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현무는 자리에 없었기에 혼자 고립된 느낌이었다.“라윤주를 다시 뽑을 생각이 없다면 각자 왕이 되겠다는
연남시 프로젝트의 인수인계 절차가 마무리되자 감독 기관 측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도로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이미 사라져 있었고 도로 한가운데 남아 있던 핏자국도 청소 차량에 의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배석준을 감시하던 사람이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도아린에게 보고했다.배석준이 죽었고 아내인 김지민이 몇 번이나 실신할 정도로 오열했다고 말이다.그의 말에 의하면 김지민이 의심을 받기는커녕, 경찰이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고 사고 차량의 운전자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CCTV를 확인한 결과, 배석준이 스스로 도로로 걸어 들어갔기에 주된 책임은 배석준에게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김지민이 이 마지막 돈벌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하며 난리를 쳤다.자전거를 탄 할아버지도 보상금을 내기가 두려워서 김지민보다 더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며 병원에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도아린은 배석준와 김지민이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말이다.퇴근 후, 도아린은 배건후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그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내가 직접 우린 거야. 한번 마셔봐.”차를 받아 든 도아린은 그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그녀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눈치챈 배건후는 순간 긴장하기 시작했다.배석준이 연성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내뱉은 모욕적인 말들도 마찬가지였다.배건후도 도아린에게 이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배석준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게 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아린아, 걱정 마. 한경 그룹은 네 거야. 아무도 빼앗을 수 없어.”“아니, 그게 아니라... 아버님이...”도아린은 어떻게 말하면 배건후에게 상처가 덜 될지 고민했다.배석준이 아무리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에게는
배석준은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내 선택을 존중한다는 건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도아린을 위해서라면 내 생사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야?’한참이 지나서야 숨을 고른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그가 전화를 건 사람은 주현정이었다. 그는 주현정이 자신과 같은 생각일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전화가 연결되기도 전에 전에 휠체어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배석준이 급히 뒤를 돌아보자 김지민이 서 있는 것이었다.“너 왜 여기 있어?”그녀는 배석준과 함께 산 고급 브랜드 옷을 입고 있었다.김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석준 씨가 제 남편이잖아요. 석준 씨가 어디 있으면 저도 옆에 있어야죠.”“이거 놔!”배석준은 뒤로 돌아보려 했지만 김지민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난 이미 소송을 제기했어. 우리 이제 곧 부부가 아니야!”김지민은 휠체어를 밀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재판 날 석준 씨가 참석하지 않으면 법원에서도 판결 안 날 거예요.”“뭐라고?”배석준은 화가 났다.“또 나를 감금하려고 그래?”김지민은 몸을 굽혀 그의 옷을 정리해 주고는 웃으면서 말했다.“부부니까 싸울 때도 있고 그렇죠. 석준 씨도 결혼 중에 한 번 불륜을 저질렀으니까 이제 서로 미안할 것 없네요. 앞으로 잘살아 봐요.”배석준은 깜짝 놀라며 휠체어에서 일어섰다.그동안의 재활 덕분에 그는 조금씩 걸을 수 있었다. 좀 더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배석준은 변함없는 김지민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나서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여보! 여보!”김지민은 휠체어를 잠그고 그를 쫓아갔다.“천천히 가요!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요?”배석준은 그녀의 가식적인 모습에 신경 쓰지 않고, 힘껏 앞을 향해 걸어갔다.순간, 어떤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할아버지는 배석준이 자기를 양보해 줄 거라 생각했고 행동거지가 불편한 배석준은 할아버지가 양보해
소리를 따라 화장실로 찾아간 우정윤은 창백한 얼굴로 구역질을 하고 있는 배건후를 보았다.“대표님, 의사 선생님께서 위에 자극을 주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많이 마시면 안 된다니까요?”먹었던 와인을 전부 토해낸 배건후는 현기증 때문에 비틀거렸다. 위가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는 입을 헹구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침대 끝 쪽에 있는 인형을 끌어안았다.진수혁은 그보다 더 취해 있었는데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변슬기가 돌아왔을 때, 송 비서가 따뜻한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대표님,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술 깨는 약 좀 사 올게요.”“제가 사 왔어요!”변슬기는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서 진수혁에게 건넸다.진수혁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변슬기의 품에 쓰러졌다.집으로 돌아온 도아린은 변슬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일북이한테 슬기 씨 데리러 가라고 하려는데 괜찮으면 답장 줘요.]하지만 변슬기는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다.잠시 생각에 잠긴 도아린은 송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연결되었고 송 비서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지만 목소리엔 약간의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도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혹시 슬기 씨 아직 거기에 있나요?”“네. 대표님이 너무 취하시는 바람에 술 깨는 약 사러 갔어요.”비록 도아린은 변슬기에게 잘해주었고 변슬기를 데려오라고 제안한 것도 그녀였지만 도아린이 어디까지 용납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송 비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그럼 송 비서님이 슬기 씨를 잘 챙겨주세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 주시고요.”“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송 비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호텔 프런트에 자신의 신분증을 건넸다.“방 하나 주세요.”다음 날.이번 회의에 참석한 건 도시 정비국의 새 책임자였다. 그는 공손한 태도로 진수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증거는 없었지만 누구든 다 알고 있었다. 진우석이 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는지 말이다.
하지만 이젠 길가에서 어묵을 먹으면서 옷이 더러워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이때 명문 가문 아가씨가 지나갔다면 자기가 헛것을 봤다며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뜨끈한 꼬치를 먹어서 그런지 공복에 술을 마신 탓에 조금씩 아파져 오던 위가 좀 나아지는 듯했다. 오늘 먹은 어묵이 그동안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인 것 같았다. 물론 도아린이 사준 거라서 더욱 그랬다.등에서 그녀의 손길이 간간이 느껴졌다. 그 부드러운 손길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차단 풀어주면 안 돼?”배건후는 마지막 한 꼬치를 먹으며 물었다.도아린은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말했다.“건후 씨,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건후 씨라면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잖아요. 전...”“내가 원하는 건 너뿐이야. 너도 알잖아...”배건후는 그녀의 말을 끊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 앞에 섰다.그는 자기를 올려다보는 도아린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순 없을까?”도아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외투 호주머니에 넣은 손가락 사이에는 이미 땀이 배어 있었다.배건후는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마음속에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저번 결혼 생활이 그녀로 하여금 기대를 내려놓게 했다.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도아린이 입을 열었다.“건후 씨,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요. 건후 씨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건후 씨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저를 사랑해 주는 가족과 함께 있고 싶어요. 온전히 제 능력으로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어요.”“난 전처럼 돌아가려는 게 아니야.”배건후는 단호했다.“네가 사업을 하고 싶다면 나도 온 힘을 다해서 도울 거야. 네가 가족과 함께 있고 싶다면 나도 네 가족이 되면 되잖아...”“도아린, 난 네가 예전에 보여줬던 따뜻한 모습을 바라는 게 아니야.
“대표님, 내일도 스케줄이 있으시잖아요. 이만...”변슬기는 시험 삼아 말을 꺼냈지만 진수혁의 눈빛에 제지당했다.그녀는 당황한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려줄 수 있길 바랐다. 도아린이 시선을 진수혁에게 돌렸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안심해도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배건후도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스치면서 자기도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도아린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자 또 하나의 와인병이 금세 비었다. 배건후는 초점이 흐려진 듯했고 진수혁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도아린이 눈치를 주자 송 비서가 나서서 진수혁을 침실로 데려갔다.그녀는 배건후를 바라보며 물었다.“괜찮은 거 맞아요?”“응.”배건후는 힘껏 고개를 끄덕얐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도아린은 변슬기와 함께 테이블을 정리하고 배건후를 데리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던 중, 변슬기가 갑자기 말했다.“두고 온 게 있는 것 같아요. 먼저 가세요. 전 나중에 택시 타고 가면 돼요.”말을 그렇게 했지만 도아린은 그녀가 진수혁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제가 집에 도착하면 일북이한테 슬기 씨 데리러 가라고 할게요.”변슬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아린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위로 올라갔다.앞으로 걸어가던 도아린은 배건후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마치 먹이를 주면 자꾸 따라오는 강아지처럼 말이다.“대리기사 불러줄까요?”그녀가 멈춰 서자 배건후도 제자리에 섰다. 그에게서 우드 향과 술 냄새가 섞인 향이 났다.밤바람이 차가웠기에 배건후는 손을 들어 도아린의 옷깃을 여몄다.그는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배건후의 깊은 눈동자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도아린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려와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배건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묵 먹고 싶은데 같이 먹을래?”도아린은 오늘 밤 배건후
그는 모든 잘못을 배건후 탓으로 돌렸다.계획이 실패하자 고성만은 성형수술을 받았고 손보미와 손잡고 배씨 가문의 자산을 빼앗으려 했다.하지만 육하경과는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가 육하경에게 장기 밀매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는지, 아니면 육하경에게 원래 그런 계획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우연인 건지... 자세한 건 아직 조사하는 중이었다.송 비서는 요리를 잘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다.배건후는 도아린이 손에 쥐고 있는 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가 마지못해 물었다.“먹을래요?”“응.”배건후는 손을 뻗어 그 귤을 받았다.급하게 먹은 것 때문인지 그는 기침을 세게 해댔다.배건후는 사실 신 것도 잘 못 먹는 편이었다. 하지만 도아린이 좋아하는 과일이었기에 그도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도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저를 가지러 갔다.그러자 배건후도 그녀 뒤를 졸졸 따라갔다가 식탁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변슬기가 도아린에게 수상한 행동을 하는 배건후의 의도를 물었다. 그러자 도아린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는 와인 한 병을 꺼냈다.“오늘은 다들 푹 쉬세요. 내일 일을 끝내면 제가 사람을 보내서 연성을 구경시켜 줄게요.”“도 선생님, 주말에는 뭐 하세요? 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변슬기는 진수혁을 힐끗 쳐다보고 도아린에게 물었다.진수혁은 송 비서와 내일 스캐줄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도아린은 주방에서 작은 그릇을 들고나오는 배건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주말은 저도 쉬는 날이에요. 오랜만이니까 저도 같이 가죠.”배건후는 작은 그릇을 도아린 앞에 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너 주려고 만들었어.”진수혁은 도아린 앞에 놓은 작은 그릇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그릇 안에 담긴 양념을 보고는 다시 테이블에 있는 음식을 둘러보았다.송 비서는 자극적인 음식을 선호하지 않았기에 오늘 저녁 메뉴는 살짝 싱거운 것들이었다. 도아린은 매운 음식을 좋아했기에 테이블 위에 있는
변슬기가 돌아올 때, 배건후도 함께였다.그녀는 도아린에게 배건후를 쫓아낼지 말지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도아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그녀가 들고 있던 물건을 받아 함께 주방으로 갔다.“저녁에는 우리 집으로 가요.”변슬기는 시선을 진수혁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그의 뜻은 어떤지 물으려 했지만 도아린의 말에 깜짝 놀라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남자 친구 생겼어요?”“아, 아니요.”변슬기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봉투 속 재료를 꺼내 냉장고에 넣었다.도아린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그녀 손목에 있는 팔찌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티파니 주얼리에서 올해 밸런타인데이에 많이 팔았던 시리즈거든요.”그녀의 말에 변슬기는 귀가 빨개져서 눈을 피했다.“도 선생님, 오해하셨어요. 전 그냥 예뻐서 산 거예요.”“아, 그렇군요.”그녀 실망한 척하며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나 해서 기뻐했는데...”도아린은 변슬기를 도와 가방 속 물건을 꺼냈고 변슬기는 그것을 냉장고에 넣었다.도아린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이제 곧 인턴 기간이 끝나는 거 아니에요? 회사에 남을 건지, 아니면 대학원으로 진학할 건지 생각해 봤어요? 회사는 어때요? 사내 연애 금지라든가 그런 규칙은 없어요?”변슬기는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아직 고민 중이에요. 아빠는 저한테 패스트푸드 집을 물려주고 싶어 하거든요.”도아린은 변슬기의 속마음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했다.배건후는 진수혁을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우리 여동생이랑 다시 사귀고 싶으세요?”진수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네.”배건후가 대답했다.“사실 건후 씨가 지금까지 한 행동만 보면 사실 저는 반대하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제 동생의 결정을 존중하거든요.”진수혁은 차 한 잔을 배건후 앞에 놓으며 무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건후 씨가 알아둬야 할 게 있어요. 건후 씨가 아린이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다면 우리 가족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배건후는 차를 들려고 했던 손을 다시 내려 무릎 위에 놓았다.그
그래서 도아린은 진서윤이 했던 더러운 말들이 녹음되고 그녀가 대중 앞에서 사과하는 건 모두 배건후의 수작이었다.도아린은 알고 있었다. 배건후가 이대로 그들을 놔둘 리 없다는 걸 말이다.“네 표정을 보니까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진수혁이 묻자 도아린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몰랐어요. 하지만 건후 씨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건후 씨는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야. 서윤 씨의 도발이 없었더라도 프로젝트에 진 국장님처럼 직권을 남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그럼 아파트 밖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 것도 이상할 거 없다고?”“누가요?”도아린이 뒤를 돌아봤다.진수혁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맞은편 아파트 단지 입구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요즘 연성의 온도는 많이 떨어진 상태였기에 직장인들은 두툼한 외투를 꺼내 입었다.지나가는 젊은이들은 저마다 포장마차에 들렀다.한 커플도 포장마차로 다가갔고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너도 먹을래?”남자는 손을 내저었고 여자는 자기 먹고 싶은 걸로 골랐다.그들이 종이컵을 들고 떠나려 할 때, 남자는 갑자기 그녀가 손에 쥔 어묵을 한입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그러자 그녀는 즉시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까 물어봤을 때는 안 먹는다고 하더니 왜 이제 와서 또 먹겠다는 거야?”여자가 살짝 짜증을 내자 남자는 웃으며 그녀를 꼭 안으면서 달래주었다.아파트 입구에 서 있던 남자는 그 장면을 지켜보며 전에 도아린이 자기에게 어묵을 사줬던 때를 떠올렸다.‘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은 사 먹지 않는 게 좋다고 그랬었지. 아린이한테도 먹지 말라고 했었나?’사실 배건후가 도아린에게 그런 식으로 안 좋게 말한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성대호가 보낸 사진 속에서 다른 남자랑 어묵을 나눠 먹고 있는 도아린을 보고 속이 뒤집혀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었다.배건후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자 커플은 서둘러서 자리를 떴다.그의 시선이 서서히 올라가더니 마침
“배석준 씨가 배건후 씨에게 연락을 해다고 합니다. 회사를 다시 가져갈 방법도 있다고 말이죠.”모건 그룹이 도아린에게 그냥 넘어가는 걸 배석준이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되찾을 방법을 찾고 있을 것이었다.도아린은 배건후의 태도를 묻지 않았다.배석준은 그의 친아버지였기에 배건후가 아버지한테 효도하는 건 그의 권리이자 의무였다.하지만 그녀도 모건 그룹은 절대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그가 어머님을 괴롭히지 않게 감시만 하면 돼.”다음 날, 진수혁이 연성에 도착했다.도아린은 그들을 아파트로 데려가 임시로 머물게 했고 변슬기와 송 비서는 주방에서 필요한 식재료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진수혁이 도아린을 테라스로 불렀다.“너한테 숨긴 게 하나 있어.”그는 난간에 두 손을 올린 채 좌우를 둘러본 후 말했다.“이 아파트는 강재민이 네게 준 거야. 네가 안 받을까 봐 내가 샀다고 하라던데...”도아린은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표정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진 건 사실이었다.“오빠...”진수혁은 그녀에게 일단 끝까지 들어달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계속 말했다.“너희 헤어졌다는 거 알고 내가 강재민한테서 사들였어. 강재민이 손해 본 건 없어.”그제야 도아린은 안도한 듯 가볍게 웃었다.“그러니까 이 집은 네 소유야.”진수혁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도아린은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그녀가 결혼하든 안 하든, 누구와 결혼하든 간에 이 아파트는 그녀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그녀만의 공간이라는 의미였다.“고마워요, 오빠.”진수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도아린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오빠가 웃었다고? 늘 무뚝뚝하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오빠가 이렇게 부드럽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고? 혹시 빙의라도 된 건가? 무슨 충격을 받은 거지?’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방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이 아파트에는 방이 두 개뿐이에요. 오빠랑 송 비서님이 여기서 주무시면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