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급히 시선을 돌린 채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도망치고 싶었다.‘만약 재민 씨가 정말로 청혼을 하는 거라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결혼에 대한 희망을 잃었어요. 당분간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아시다시피 재민 씨 가족과는 어색해 앞으로도 계속 갈등이 생길 것 같아요.’‘어떤 게 좋을까?’“저것 봐봐!”레스토랑에 들어온 한 커플이 공중의 드론을 보고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흥분해서 남자 친구의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너무 예쁘다! 자기도 나한테 청혼할 때 이렇게 해주면 안 돼?”“나한테 시집오기만 하면 내가 하늘의 별이라도 따올 수 있어!”“그럼 가서 별이라도 따와!”두 사람은 웃으며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강재민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하고 싶은 말 없어요?”도아린은 음료컵을 꽉 쥔 채 입을 열었다.“재민 씨. 우리는 아무래도...”그녀는 강재민과 진지하게 시작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들이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게 해주었다.강재민이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유리처럼 맑은 눈동자가 불빛에 비쳐 반짝였지만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스쳤다.“더 이상 안 보면 끝날 텐데요.”“...”“도저히 볼 자신이 없어요?”도아린은 다시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거절을 하더라도 강재민이 준비한 이벤트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공중에 떠 있는 글자를 보고 눈물이 스쳤다.‘행복해야 해.’도아린은 코가 찡해져 눈을 크게 뜬 채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애썼다.드론들이 밤하늘에서 귀여운 파란색 애벌레 모양을 만들더니 천천히 나비로 변하며 쇼는 막을 내렸다.강재민이 도아린에게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애벌레에서 이제는 멋진 나비로 변한 걸 축하해요.”도아린은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강재민이 자신에게 청혼하려는 줄 알았는데 결국 그것은 단지 축복이었다.그 축복은 그녀를 묘하게 울컥하게 했다.“재민 씨, 미안해요
도아린이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작은 상자 안을 내려다보았다.벨벳 상자 안에는 결혼반지가 아닌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현무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현무의 직위를 포기하고 라윤주 자리에 대한 경쟁도 그만두겠다는 건가?’서빙 직원이 음식을 가져오자 강재민은 도아린이 좋아하는 음식을 그녀 앞에 놓았다.권력을 내려놓은 남자는 조금도 아쉬움이 없었고 오히려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식사가 끝나자 강재민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한 뒤, 미안한 듯 말했다.“이따 데려다 줄 수 없을 것 같아요. 바로 공항으로 가야 되거든요.”그는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인연이 닿으면 그때 다시 만나요.”도아린이 일어나서 그의 손을 잡았다.“강재민 씨도 잘 지내요.”강재민은 손을 꽉 쥔 뒤 미소를 지으며 손을 뗐다.도아린을 따라나서던 일북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강재민은 와인잔을 한 모금에 비우고 창밖을 보며 도아린에게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차로 돌아오자 일북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아가씨. 배 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헤어지자고 하는 그런 사람을 위해 슬퍼할 필요 없어요. 어떻게 아가씨를 믿지 않을 수 있죠?”도아린이 고개를 숙인 채, 그 다이아몬드 단추를 바라보았다.그 위로 눈물이 떨어지며 다이아몬드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빛났다.“재민 씨는 나를 믿지 않았던 게 아니야.”“그렇다면 왜... 결국 이별을 말한 건 그 일 때문 아닌가요?”일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강재민은 도아린과 육하경이 몇 날 며칠 같이 배에 있으면서 그들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확신했다.일북의 눈에 강재민은 도아린이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한 거라는 걸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받아들이지 못해 헤어지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었다.도아린이 눈물을 닦으며 단추를 가방에 넣었다.“만약 재민 씨가 정말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내가 건후 씨와 결혼한 뒤에도 건후 씨한테 시비를 걸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이혼
강재민은 굳어진 채 손에 든 와인잔을 응시했다. 와인에 갈색 눈동자가 비춰 일렁이었다.“오늘 구치소에 아린 씨를 데리러 갔다가 두 사람을 봤거든?”강재민이 도착했을 때 주변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배건후와 고성민이 범인을 잡는 과정을 목격했고도아린이 소화기를 들고 사람을 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배건후가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을 무릅쓰고 도아린을 위해 달려가는 장면도 목격했다.강재민은 순간 자신에게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알아챘다.도아린의 마음속에 배건후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래. 건후를 깊이 사랑한 게 아니라면 그 3년 동안 그렇게 참고 견디지 않았겠지.’배건후는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그의 희생과 ‘죽음’으로 도아린에게 사죄한 셈이었다.도아린이 당장에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른 남자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게다가 강재민은 배건후의 가정을 망친 장본인이였고 도아린이 배건후를 용서하는 그날, 바로 그와 도아린은 적이 될 게 뻔했다.그는 도아린이 이별을 고할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그는 완전한 실패자가 될 테니까.그래서 그는 도아린의 잘못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들어 결말이 없는 연애를 끝내며 남아 있는 자존심이라도 지키려 했다.처음으로 좌절하는 동생의 모습을 마주하고 강재희는 몇 마디 잔소리를 덧붙인 후, 동생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세 병의 와인이 다 비워지자 강재민은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드려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강재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어 동행한 경호원을 불러 그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일주일 후, LY 고위 회의에서 라윤주 자리를 놓고 논의가 시작됐다.서대은은 여전히 여성 복장을 한 채 현재의 라윤주를 지지한다고 밝혔고 청룡도 마찬가지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백호는 다시 한번 경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현무는 자리에 없었기에 혼자 고립된 느낌이었다.“라윤주를 다시 뽑을 생각이 없다면 각자 왕이 되겠다는
“네!”도아린의 시선이 청룡에게로 향하자 청룡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다.그는 자신에게도 명령 내릴 줄 알았지만 도아린은 그저 그를 한 번 쳐다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윤주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조직 내에서 급속히 퍼졌고 주작의 조사 작업도 예상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과거에는 상황 탓에 입을 열지 못했던 이들이 이제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신고를 해왔고, 그 덕분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불법을 저지른 이들은 모두 정리되었다.조직의 인원은 절반 이상이 줄어들었지만 도아린은 더 이상 인원을 영입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이 조직이 서서히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도아린이 연성에 돌아온 건 일주일 후였다.강재민은 연성의 프로젝트를 자발적으로 포기했고 배건후는 그 이유를 빠르게 찾아냈다.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그는 바로 기획서를 들고 찾아왔다.“기획서는 옆의 비서팀에 먼저 전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도아린이 코트를 벗으며 옷걸이를 꺼내자 배건후는 그녀의 옷을 받아 정리하여 걸어주었다.“당신과 할 얘기도 있어서.”도아린은 책상 뒤로 가 앉은 뒤, 그의 기획서를 펼쳐 꼼꼼히 살펴보았다.“이 프로젝트에서 그만 손을 떼세요.”“왜?”도아린은 기획서를 내려놓고 내선 전화를 들었다.“윤 비서. 잠깐 와봐요.”방에 들어온 윤가인은 배건후를 보고 잠시 놀랐지만 그래도 책상 앞에 갔다.“대표님, 부르셨나요?”도아린이 문서를 건네며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고유리 씨에게 넘겨요.”“고유리 씨는 신 대표의 비서야!”배건후의 말에 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이 프로젝트는 원래 신 대표 거였고 이제 주인을 찾아가야죠. 배건후 씨는 그냥 기획에 참여한 것뿐이에요. 정말 배건후 씨 본인이 이 프로젝트 담당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배건후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남궁유민을 잡던 날, 그는 도아린이 아직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는 도아린이 자신을 바로 용서할 거라는 기
신지훈이 잠시 멈칫하다 한숨을 내쉬곤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자신의 사무실에 돌아와서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배건후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뒤, 탁자 위에 식어버린 커피를 단번에 들이켰다.“내가 예전에 청룡 계정을 너한테 줬잖아. 도 대표가 그걸 알았어.”신지훈은 내선 전화를 눌러 한유미에게 중요한 서류를 가져오라고 지시한 뒤 소파에 앉았다.“강재민은 라윤주에게 자신의 권한을 넘겼고 나도 아마 정보 유출로 직위가 정지될 거야. 지금은 조직 내에서 라윤주가 완전히 독주하고 있으니까 LY에서 그녀의 자리는 건들지 않을 거고.”한유미가 문을 두드린 후 들어와서 서류를 건넸다. 신지훈은 서류를 받고 한유미를 내보낸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보니까 도 대표가 너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너도 갈 길이 멀 거야.”그는 서류를 배건후에게 건넸다.“이건 내가 최근 조사한 내용이야. 회사에서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 다 여기에 있어. 이번 달 말에 내가 퇴사할 거니까 어떻게 처리할지는 네가 알아서 해.”배건후는 서류를 몇 장 훑어봤다. 몇몇은 그가 예상했던 대로였다.“고마워.”“고마워할 건 없어.”신지훈이 손을 내저으며 비웃었다.“도 대표는 더 이상 네가 맘대로 다룰 수 있는 토끼가 아니야. 아마 예전에 온순했던 건 너에게만 해당한 거였나 봐. 다만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더 이상 너에게도 예전의 특혜는 없을 거야.”배건후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 도아린에게 더 이상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고유리 그 비서, 어떻게 생각해?”“능력은 괜찮고 술도 잘 마셔. 만약 남자였다면 충분히 큰 인물이 됐을 거야!”갑자기 한유미가 문을 두드렸다.“신 대표님. 고 비서님이 기획안에 관해 논의하고 싶다고 해요.”신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배건후는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고 그러다 들어오는 고유리와 마주쳤다.고유리는 배건후에게 예의 바르면서도 거리를 두
“주문하신 생강차 도착했습니다. 회사 정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데 직접 내려서 받으실 건가요? 아니면 제가 경비실에 두고 갈까요?”“생강차요? 주문한 적이 없는데요. 전화 잘못 주신 것 같아요.”도아린이 전화를 받으며 어리둥절했다.“도 사장님 맞으세요?”“...네.”“그럼 맞아요. 혹시 남자 친구분이 주문한 게 아닐까요?”도아린이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자 윤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럼 경비실에 맡겨주세요. 제가 사람 보내서 가져가게 할게요.”전화를 끊고 도아린은 계속해서 비서들과 함께 배건후의 기획안을 어떻게 실행할지 논의했다.윤가인이 보온 가방을 들고 올라왔을 때, 배건후의 메시지도 도착했다.[곧 생리 기간이잖아. 날씨도 추워지고 해서 따뜻한 걸 시켰어.]도아린이 다이어리를 확인하니 정말로 생리 날짜가 이틀 남았다.결혼 3년 동안 배건후는 한 번도 이런 걸 신경 쓴 적이 없었다.‘남자란... 결국 놓치고 나서야 그리워지는 법이구나.’“좀 뜨거워요.”윤가인이 생강차를 건네며 주의했다.도아린은 대충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회의를 이어갔다.메시지를 받은 배건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한참을 논의한 끝에 고유리는 내일 바로 프로젝트 책임자와 만나기로 했다.강재민의 프로젝트를 포기하면서 입찰은 다시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를 노리고 있지만 그걸 독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한경 그룹만이 현재 가장 입찰 가능성이 있는 회사였다.“모두 수고하셨습니다.”도아린은 어두워진 하늘을 보았다.“날씨가 안 좋으니 모두 조심해서 돌아가세요.”비서팀의 직원들과 세 명의 부사장은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었고 전용 운전기사들이 이동을 돕고 있었다.도아린은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들며 외투를 챙겼다. 그리고 빠트린 물건이 없는지 확인한 후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엘리베이터에 타고 가는 순간, 도아린은 갑자기 몸에 이상한 열기를 느꼈다.“으악!”그녀는 급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옷을 가장 가까운 자리 위에 던져놓고 공용 화
도아린을 찾아다니던 일북도 어느새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한 손은 남자의 허리에 한 손은 남자의 얼굴을 받치고 있는 도아린을 발견했다.배건후는 마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차가운 벽에 기대어 그저 도아린을 바라볼 뿐이었다.일북은 순간 멈칫한 채 두 사람을 방해하는 건 아닌지 선뜻 들어가지 못했다.그때 밖에서 신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찾았어요?”도아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일어섰다. 그러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다시 배건후의 품으로 넘어졌다.“눈치 좀 챙겨요.”신지훈이 일북을 끌어내며 떠나기 전에 배건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배건후는 도아린의 허리를 붙잡고 그녀의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그녀의 허리는 매우 가늘어서 그의 한 손으로도 절반 이상을 감쌀 수 있었고 배에는 근육까지 있어 매우 단단했다.‘그래서 아까 그렇게 쉽게 문을 넘어온 거네.’“괜찮아요.”도아린이 급히 배건후의 손을 밀어내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배건후는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요즘 운동해?”“시간 나면 조금씩 해요.”도아린이 대답하며 소매를 정리했다.“그 큰 사고로 살아남았으니까 이제는 몸을 더 아껴야죠.”“그건 그래.”배건후가 고개를 끄덕였다.“게다가 회사 대표까지 됐는데 즐기지도 못하고 죽으면 너무 억울하잖아요.”그 말을 끝내자 그녀는 배건후의 반응을 살폈다.모건 그룹은 이미 한경 그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배씨 가문에서 두 세대가 쌓아온 부와 명성이 이제 완전히 배씨 가문과는 상관없어졌다.‘건후 씨가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하지만 배건후는 마치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 차분했다.두 사람은 사무실 로비에 도착했고 배건후는 먼저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건네려는 것이 아니라 옷을 펼쳐서 도아린이 입도록 하였다.도아린은 거절하지 않은 채 손을 내밀어 옷을 입었다.소매를 입고 나서 배건후가 그녀의 앞에 서서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밖이 추워. 찬바람 맞으면 배가
도아린이 육민재에게 다시 전화를 걸자, 육민재는 전화기 너머에서 친구와 호텔에서 프로젝트를 논의할 예정이라며 도아린도 관심이 있다면 만나러 오라고 말했다.도아린은 바로 얼굴을 씻고 육민재가 알려준 호텔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밀크티 한 잔을 사서 울렁거리는 속을 달랬다.그렇게 그날, 도아린은 우연히 배건후의 방으로 잘못 찾아갔었다.“감기 걸릴라.”배건후가 티슈를 건넸다. 도아린은 창밖으로 내밀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며 티슈를 받았다.“건후 씨.”도아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날 내가 방에 잘못 들어갔을 때... 건후 씨는 그 호텔에 왜 간 거예요?”‘육민재가 말한 투자자가 건후 씨였을까?’배건후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대시보드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 한 개를 입에 물고 담뱃갑을 다시 던져놓고 라이터를 찾으려 하자 도아린이 그의 입에서 담배를 빼앗았다.배건후는 잠시 멈칫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그날, 나는 육민재와 프로젝트를 논의하러 간 거였어.”육민재는 그가 가진 프로젝트 중 하나에 투자하고 싶다고 했다.배건후는 그가 도아린을 자신의 앞에 불러오기만 한다면 육민재에게도 한몫 챙겨주겠다고 했다.그런데 뜻밖에도 배지유가 그곳에 따라가서 배건후의 술에 약을 타 그와 손보미를 이어주려 했던 것이다.배건후는 술을 마신 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미리 방으로 돌아가 찬물로 샤워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그리고 마침 그때 도아린이 그의 방에 들어온 것이었다.그는 약 때문에 이미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고 도아린이 들어오자마자 육민재의 이름을 부르자 질투심에 결국 제어하지 못한 채 폭발했다.그 이후로 배건후는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난 술이나 음료를 절대 마시지 않았고 도아린이 밀크티를 마시는 것조차 막았다.그의 설명을 듣고 도아린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댔다.‘오해는 이렇게 시작된 걸까?’그 오해의 시작은 결국 서로가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만약 육민재가 그녀에게 투자자가 배건후라는 사실을
연남시 프로젝트의 인수인계 절차가 마무리되자 감독 기관 측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도로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이미 사라져 있었고 도로 한가운데 남아 있던 핏자국도 청소 차량에 의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배석준을 감시하던 사람이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도아린에게 보고했다.배석준이 죽었고 아내인 김지민이 몇 번이나 실신할 정도로 오열했다고 말이다.그의 말에 의하면 김지민이 의심을 받기는커녕, 경찰이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고 사고 차량의 운전자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CCTV를 확인한 결과, 배석준이 스스로 도로로 걸어 들어갔기에 주된 책임은 배석준에게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김지민이 이 마지막 돈벌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하며 난리를 쳤다.자전거를 탄 할아버지도 보상금을 내기가 두려워서 김지민보다 더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며 병원에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도아린은 배석준와 김지민이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말이다.퇴근 후, 도아린은 배건후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그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내가 직접 우린 거야. 한번 마셔봐.”차를 받아 든 도아린은 그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그녀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눈치챈 배건후는 순간 긴장하기 시작했다.배석준이 연성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내뱉은 모욕적인 말들도 마찬가지였다.배건후도 도아린에게 이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배석준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게 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아린아, 걱정 마. 한경 그룹은 네 거야. 아무도 빼앗을 수 없어.”“아니, 그게 아니라... 아버님이...”도아린은 어떻게 말하면 배건후에게 상처가 덜 될지 고민했다.배석준이 아무리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에게는
배석준은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내 선택을 존중한다는 건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도아린을 위해서라면 내 생사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야?’한참이 지나서야 숨을 고른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그가 전화를 건 사람은 주현정이었다. 그는 주현정이 자신과 같은 생각일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전화가 연결되기도 전에 전에 휠체어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배석준이 급히 뒤를 돌아보자 김지민이 서 있는 것이었다.“너 왜 여기 있어?”그녀는 배석준과 함께 산 고급 브랜드 옷을 입고 있었다.김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석준 씨가 제 남편이잖아요. 석준 씨가 어디 있으면 저도 옆에 있어야죠.”“이거 놔!”배석준은 뒤로 돌아보려 했지만 김지민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난 이미 소송을 제기했어. 우리 이제 곧 부부가 아니야!”김지민은 휠체어를 밀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재판 날 석준 씨가 참석하지 않으면 법원에서도 판결 안 날 거예요.”“뭐라고?”배석준은 화가 났다.“또 나를 감금하려고 그래?”김지민은 몸을 굽혀 그의 옷을 정리해 주고는 웃으면서 말했다.“부부니까 싸울 때도 있고 그렇죠. 석준 씨도 결혼 중에 한 번 불륜을 저질렀으니까 이제 서로 미안할 것 없네요. 앞으로 잘살아 봐요.”배석준은 깜짝 놀라며 휠체어에서 일어섰다.그동안의 재활 덕분에 그는 조금씩 걸을 수 있었다. 좀 더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배석준은 변함없는 김지민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나서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여보! 여보!”김지민은 휠체어를 잠그고 그를 쫓아갔다.“천천히 가요!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요?”배석준은 그녀의 가식적인 모습에 신경 쓰지 않고, 힘껏 앞을 향해 걸어갔다.순간, 어떤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할아버지는 배석준이 자기를 양보해 줄 거라 생각했고 행동거지가 불편한 배석준은 할아버지가 양보해
소리를 따라 화장실로 찾아간 우정윤은 창백한 얼굴로 구역질을 하고 있는 배건후를 보았다.“대표님, 의사 선생님께서 위에 자극을 주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많이 마시면 안 된다니까요?”먹었던 와인을 전부 토해낸 배건후는 현기증 때문에 비틀거렸다. 위가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는 입을 헹구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침대 끝 쪽에 있는 인형을 끌어안았다.진수혁은 그보다 더 취해 있었는데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변슬기가 돌아왔을 때, 송 비서가 따뜻한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대표님,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술 깨는 약 좀 사 올게요.”“제가 사 왔어요!”변슬기는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서 진수혁에게 건넸다.진수혁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변슬기의 품에 쓰러졌다.집으로 돌아온 도아린은 변슬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일북이한테 슬기 씨 데리러 가라고 하려는데 괜찮으면 답장 줘요.]하지만 변슬기는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다.잠시 생각에 잠긴 도아린은 송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연결되었고 송 비서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지만 목소리엔 약간의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도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혹시 슬기 씨 아직 거기에 있나요?”“네. 대표님이 너무 취하시는 바람에 술 깨는 약 사러 갔어요.”비록 도아린은 변슬기에게 잘해주었고 변슬기를 데려오라고 제안한 것도 그녀였지만 도아린이 어디까지 용납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송 비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그럼 송 비서님이 슬기 씨를 잘 챙겨주세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 주시고요.”“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송 비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호텔 프런트에 자신의 신분증을 건넸다.“방 하나 주세요.”다음 날.이번 회의에 참석한 건 도시 정비국의 새 책임자였다. 그는 공손한 태도로 진수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증거는 없었지만 누구든 다 알고 있었다. 진우석이 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는지 말이다.
하지만 이젠 길가에서 어묵을 먹으면서 옷이 더러워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이때 명문 가문 아가씨가 지나갔다면 자기가 헛것을 봤다며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뜨끈한 꼬치를 먹어서 그런지 공복에 술을 마신 탓에 조금씩 아파져 오던 위가 좀 나아지는 듯했다. 오늘 먹은 어묵이 그동안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인 것 같았다. 물론 도아린이 사준 거라서 더욱 그랬다.등에서 그녀의 손길이 간간이 느껴졌다. 그 부드러운 손길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차단 풀어주면 안 돼?”배건후는 마지막 한 꼬치를 먹으며 물었다.도아린은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말했다.“건후 씨,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건후 씨라면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잖아요. 전...”“내가 원하는 건 너뿐이야. 너도 알잖아...”배건후는 그녀의 말을 끊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 앞에 섰다.그는 자기를 올려다보는 도아린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순 없을까?”도아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외투 호주머니에 넣은 손가락 사이에는 이미 땀이 배어 있었다.배건후는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마음속에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저번 결혼 생활이 그녀로 하여금 기대를 내려놓게 했다.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도아린이 입을 열었다.“건후 씨,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요. 건후 씨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건후 씨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저를 사랑해 주는 가족과 함께 있고 싶어요. 온전히 제 능력으로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어요.”“난 전처럼 돌아가려는 게 아니야.”배건후는 단호했다.“네가 사업을 하고 싶다면 나도 온 힘을 다해서 도울 거야. 네가 가족과 함께 있고 싶다면 나도 네 가족이 되면 되잖아...”“도아린, 난 네가 예전에 보여줬던 따뜻한 모습을 바라는 게 아니야.
“대표님, 내일도 스케줄이 있으시잖아요. 이만...”변슬기는 시험 삼아 말을 꺼냈지만 진수혁의 눈빛에 제지당했다.그녀는 당황한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려줄 수 있길 바랐다. 도아린이 시선을 진수혁에게 돌렸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안심해도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배건후도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스치면서 자기도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도아린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자 또 하나의 와인병이 금세 비었다. 배건후는 초점이 흐려진 듯했고 진수혁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도아린이 눈치를 주자 송 비서가 나서서 진수혁을 침실로 데려갔다.그녀는 배건후를 바라보며 물었다.“괜찮은 거 맞아요?”“응.”배건후는 힘껏 고개를 끄덕얐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도아린은 변슬기와 함께 테이블을 정리하고 배건후를 데리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던 중, 변슬기가 갑자기 말했다.“두고 온 게 있는 것 같아요. 먼저 가세요. 전 나중에 택시 타고 가면 돼요.”말을 그렇게 했지만 도아린은 그녀가 진수혁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제가 집에 도착하면 일북이한테 슬기 씨 데리러 가라고 할게요.”변슬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아린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위로 올라갔다.앞으로 걸어가던 도아린은 배건후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마치 먹이를 주면 자꾸 따라오는 강아지처럼 말이다.“대리기사 불러줄까요?”그녀가 멈춰 서자 배건후도 제자리에 섰다. 그에게서 우드 향과 술 냄새가 섞인 향이 났다.밤바람이 차가웠기에 배건후는 손을 들어 도아린의 옷깃을 여몄다.그는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배건후의 깊은 눈동자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도아린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려와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배건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묵 먹고 싶은데 같이 먹을래?”도아린은 오늘 밤 배건후
그는 모든 잘못을 배건후 탓으로 돌렸다.계획이 실패하자 고성만은 성형수술을 받았고 손보미와 손잡고 배씨 가문의 자산을 빼앗으려 했다.하지만 육하경과는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가 육하경에게 장기 밀매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는지, 아니면 육하경에게 원래 그런 계획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우연인 건지... 자세한 건 아직 조사하는 중이었다.송 비서는 요리를 잘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다.배건후는 도아린이 손에 쥐고 있는 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가 마지못해 물었다.“먹을래요?”“응.”배건후는 손을 뻗어 그 귤을 받았다.급하게 먹은 것 때문인지 그는 기침을 세게 해댔다.배건후는 사실 신 것도 잘 못 먹는 편이었다. 하지만 도아린이 좋아하는 과일이었기에 그도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도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저를 가지러 갔다.그러자 배건후도 그녀 뒤를 졸졸 따라갔다가 식탁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변슬기가 도아린에게 수상한 행동을 하는 배건후의 의도를 물었다. 그러자 도아린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는 와인 한 병을 꺼냈다.“오늘은 다들 푹 쉬세요. 내일 일을 끝내면 제가 사람을 보내서 연성을 구경시켜 줄게요.”“도 선생님, 주말에는 뭐 하세요? 저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변슬기는 진수혁을 힐끗 쳐다보고 도아린에게 물었다.진수혁은 송 비서와 내일 스캐줄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도아린은 주방에서 작은 그릇을 들고나오는 배건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주말은 저도 쉬는 날이에요. 오랜만이니까 저도 같이 가죠.”배건후는 작은 그릇을 도아린 앞에 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너 주려고 만들었어.”진수혁은 도아린 앞에 놓은 작은 그릇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그릇 안에 담긴 양념을 보고는 다시 테이블에 있는 음식을 둘러보았다.송 비서는 자극적인 음식을 선호하지 않았기에 오늘 저녁 메뉴는 살짝 싱거운 것들이었다. 도아린은 매운 음식을 좋아했기에 테이블 위에 있는
변슬기가 돌아올 때, 배건후도 함께였다.그녀는 도아린에게 배건후를 쫓아낼지 말지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도아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그녀가 들고 있던 물건을 받아 함께 주방으로 갔다.“저녁에는 우리 집으로 가요.”변슬기는 시선을 진수혁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그의 뜻은 어떤지 물으려 했지만 도아린의 말에 깜짝 놀라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남자 친구 생겼어요?”“아, 아니요.”변슬기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봉투 속 재료를 꺼내 냉장고에 넣었다.도아린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그녀 손목에 있는 팔찌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티파니 주얼리에서 올해 밸런타인데이에 많이 팔았던 시리즈거든요.”그녀의 말에 변슬기는 귀가 빨개져서 눈을 피했다.“도 선생님, 오해하셨어요. 전 그냥 예뻐서 산 거예요.”“아, 그렇군요.”그녀 실망한 척하며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나 해서 기뻐했는데...”도아린은 변슬기를 도와 가방 속 물건을 꺼냈고 변슬기는 그것을 냉장고에 넣었다.도아린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이제 곧 인턴 기간이 끝나는 거 아니에요? 회사에 남을 건지, 아니면 대학원으로 진학할 건지 생각해 봤어요? 회사는 어때요? 사내 연애 금지라든가 그런 규칙은 없어요?”변슬기는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아직 고민 중이에요. 아빠는 저한테 패스트푸드 집을 물려주고 싶어 하거든요.”도아린은 변슬기의 속마음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했다.배건후는 진수혁을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우리 여동생이랑 다시 사귀고 싶으세요?”진수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네.”배건후가 대답했다.“사실 건후 씨가 지금까지 한 행동만 보면 사실 저는 반대하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제 동생의 결정을 존중하거든요.”진수혁은 차 한 잔을 배건후 앞에 놓으며 무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건후 씨가 알아둬야 할 게 있어요. 건후 씨가 아린이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다면 우리 가족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배건후는 차를 들려고 했던 손을 다시 내려 무릎 위에 놓았다.그
그래서 도아린은 진서윤이 했던 더러운 말들이 녹음되고 그녀가 대중 앞에서 사과하는 건 모두 배건후의 수작이었다.도아린은 알고 있었다. 배건후가 이대로 그들을 놔둘 리 없다는 걸 말이다.“네 표정을 보니까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진수혁이 묻자 도아린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몰랐어요. 하지만 건후 씨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건후 씨는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야. 서윤 씨의 도발이 없었더라도 프로젝트에 진 국장님처럼 직권을 남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그럼 아파트 밖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 것도 이상할 거 없다고?”“누가요?”도아린이 뒤를 돌아봤다.진수혁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맞은편 아파트 단지 입구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요즘 연성의 온도는 많이 떨어진 상태였기에 직장인들은 두툼한 외투를 꺼내 입었다.지나가는 젊은이들은 저마다 포장마차에 들렀다.한 커플도 포장마차로 다가갔고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너도 먹을래?”남자는 손을 내저었고 여자는 자기 먹고 싶은 걸로 골랐다.그들이 종이컵을 들고 떠나려 할 때, 남자는 갑자기 그녀가 손에 쥔 어묵을 한입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그러자 그녀는 즉시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까 물어봤을 때는 안 먹는다고 하더니 왜 이제 와서 또 먹겠다는 거야?”여자가 살짝 짜증을 내자 남자는 웃으며 그녀를 꼭 안으면서 달래주었다.아파트 입구에 서 있던 남자는 그 장면을 지켜보며 전에 도아린이 자기에게 어묵을 사줬던 때를 떠올렸다.‘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은 사 먹지 않는 게 좋다고 그랬었지. 아린이한테도 먹지 말라고 했었나?’사실 배건후가 도아린에게 그런 식으로 안 좋게 말한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성대호가 보낸 사진 속에서 다른 남자랑 어묵을 나눠 먹고 있는 도아린을 보고 속이 뒤집혀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었다.배건후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자 커플은 서둘러서 자리를 떴다.그의 시선이 서서히 올라가더니 마침
“배석준 씨가 배건후 씨에게 연락을 해다고 합니다. 회사를 다시 가져갈 방법도 있다고 말이죠.”모건 그룹이 도아린에게 그냥 넘어가는 걸 배석준이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되찾을 방법을 찾고 있을 것이었다.도아린은 배건후의 태도를 묻지 않았다.배석준은 그의 친아버지였기에 배건후가 아버지한테 효도하는 건 그의 권리이자 의무였다.하지만 그녀도 모건 그룹은 절대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그가 어머님을 괴롭히지 않게 감시만 하면 돼.”다음 날, 진수혁이 연성에 도착했다.도아린은 그들을 아파트로 데려가 임시로 머물게 했고 변슬기와 송 비서는 주방에서 필요한 식재료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진수혁이 도아린을 테라스로 불렀다.“너한테 숨긴 게 하나 있어.”그는 난간에 두 손을 올린 채 좌우를 둘러본 후 말했다.“이 아파트는 강재민이 네게 준 거야. 네가 안 받을까 봐 내가 샀다고 하라던데...”도아린은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표정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진 건 사실이었다.“오빠...”진수혁은 그녀에게 일단 끝까지 들어달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계속 말했다.“너희 헤어졌다는 거 알고 내가 강재민한테서 사들였어. 강재민이 손해 본 건 없어.”그제야 도아린은 안도한 듯 가볍게 웃었다.“그러니까 이 집은 네 소유야.”진수혁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도아린은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그녀가 결혼하든 안 하든, 누구와 결혼하든 간에 이 아파트는 그녀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그녀만의 공간이라는 의미였다.“고마워요, 오빠.”진수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도아린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오빠가 웃었다고? 늘 무뚝뚝하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오빠가 이렇게 부드럽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고? 혹시 빙의라도 된 건가? 무슨 충격을 받은 거지?’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방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이 아파트에는 방이 두 개뿐이에요. 오빠랑 송 비서님이 여기서 주무시면 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