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 씨, 죄송하지만 한 번 오셔서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경찰의 목소리는 공손했지만 거절할 수 없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도아린은 온몸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굴 뻔했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눈물이 흐르지 않게 애썼다.“그 사람의 부모님은요?”“양부모라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없습니다.”도아린의 가슴이 순간 욱신거렸다.‘그렇다고 해도, 자기 아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있지 않을까? 나한테 요청한 거라면 하경 씨가 이미...’“알겠습니다.”도아린이 떨리는 목소리를 참으며 말했다.“내일 연성으로 돌아가면, 직접 가서 확인하겠습니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모건 그룹으로 향했다.모두들 도아린이 이번 납치 사건 이후로 지치고 피곤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그녀는 비서들을 이끌고 당당히 회사에 들어섰다.“각 부서에 알리세요. 15분 후 3번 회의실에서 회의 시작합니다.”도아린은 프론트에서 간단히 말한 뒤,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그녀는 몸에 꼭 맞는 빨간색 세미 정장을 입고 예전의 긴 머리는 갈색 단발로 변해 있었다. 돌아서는 순간,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휘날리며 귀에 박힌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반짝였다.도아린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세 명의 비서도 이내 따라 탔다.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3분 뒤 회의실에 도착했다.한유미는 문 앞에서 대기하다 도아린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도 대표님. 회의 안건을 알려주시면 제가 바로 자료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도아린은 한유미를 지나쳐서 사무실로 향했고 한유미는 할 수 없이 급히 따라가서 사무실 문을 열어줬다.도아린과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도 연달아 사무실에 들어갔고 한유미만 문밖에 남겨졌다.그녀는 급히 신지훈에게 보고했다.“화려한 복귀라.”신지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구경하러나 가지.”회의실에 도착한 임원들은 모두 도아린의 복귀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다.예전 같으면 도아린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로 전용
“네. 알겠습니다!”세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창태훈과 유한수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말이 우리를 도와주는 거지, 이건 우리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거잖아! 도아린 이 여자가 감히 어떻게 이런 짓을...’두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지훈을 바라봤다. 배건후가 깨어난 후에도 신지훈은 여전히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그가 도아린이 이렇게 떠드는 걸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전 다른 의견 없습니다.”두 사람의 예상을 깨고 신지훈이 손을 들어 말했다.“고유리 씨로 할게요.”고유리는 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큰 걸음으로 신지훈에게 다가갔다.“고유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신지훈입니다. 잘 부탁합니다.”신지훈이 고유리의 손을 맞잡았다. 창태훈과 유한수는 마음속으로 불만이 있었지만 신지훈이 앞장서니 쉽게 딴소리하지 못했다.“저도 의견 없어요.”창태훈이 아무 사람 하나 고른 뒤 말했다.안소연과 가도윤은 각자 다가가 자기소개를 했다.창태훈이 테이블 아래에서 옆 사람의 다리를 살짝 차자 그 사람은 바로 손을 들고 일어섰다.“도 대표님! 아마 아직 모르실 텐데, 배 대표님께서 이미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현재는 집에서 요양 중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향했다. 바로 자신이 예상한 대로 가장 먼저 반기를 들 인물, 운영부의 부장 손영민이었다.“그래서요?”도아린이 반문했다.운영부 부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모건 그룹은 누가 뭐래도 배씨 가문의 회사입니다. 배 대표님도 거의 완쾌되었고, 최대한 빨리 그룹을 다시 관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경영권이 누구한테 가야 회사에 가장 좋은 일인지 여기 앉아계신 모든 사람들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도아린이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그래서 이제 모건 그룹의 이름을 바꾸려고 합니다.”그녀의 한마디에 회의장은 삽시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도 대표 미친 거 아니야?’‘회사 이름을 변경하겠다고?’‘무슨 배짱으로 저런 어처구니없는 말을...’도아린이
“창 이사와 유 이사가 제 의견을 당신들에게 전달하지 않았나 봐요? 모건 그룹의 대표는 이제 도아린 씨입니다. 그러니 회사 이름을 바꾸든, 직원을 해고하든 모두 도 대표의 권리입니다.”“도 대표가 뭘 하든 그건 그분의 자유이며 나는 이미 모건 그룹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한번만 더 내 이름을 팔아 도 대표의 일을 방해하면 변호사와 얘기할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전화가 끊기자 손영민은 얼굴이 창백해져 유한수를 바라보았다. 유한수는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쥔 채 책상을 내려쳤다.‘배건후가 우리를 이렇게 불구덩이에 밀어 넣을 줄이야!’“배 대표님의 의견이 그러시다면...”유한수가 억지로 웃으며 일어서자 도아린이 그에게 다시 앉으라고 손짓했다.“배 대표가 말씀한 것처럼 저에게는 임원을 고용하고 해고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분은...”도아린이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명패를 바라보았다.“손영민 부장, 인사부로 가서 퇴직 절차 밟으세요.”“유 이사님.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손영민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유한수와 창태훈 두 사람을 위해 나섰던 것은 도아린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지, 자신이 해고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모건 그룹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운영부 부장으로 있을 수 있었던 건 전에 배건후의 라인에 섰기 때문이었고 배석준의 눈에 별로였던 프로젝트를 그가 성공시켰기에 특별히 승진이 가능했던 일이었다.이제 모건 그룹을 떠난다면 이런 좋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유한수와 창태훈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아린은 오늘 단단히 칼을 갈고 나온 듯했다. 그녀는 회사에 복귀하자마자 바로 회의를 열어, 세 개의 중요한 직책에 자신의 비서를 배치했고 이를 통해 관리층을 대대적으로 정리할 계획임을 분명히 했다.손영민은 마침 재수 없게 그녀의 눈에 띄었고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로 해석되었다.
기존 비서 사무실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인사팀 사람들은 책상과 의자를 옮기며 분주히 움직였다.직원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우리도 쫓겨나는 건가?’“여러분에게 3개월의 평가 기간을 줄 거예요. 평가에서 합격한 사람은 남고 나머지는 다른 부서로 옮길 겁니다. 만약 다른 부서로 이동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둬도 됩니다.”도아린이 한마디 남기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새 비서팀의 윤가인이 급히 따라나섰다.“대표님.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일북이만 있으면 돼요.”도아린이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그리고 운영부 부장 자리에 대해 채용 공고를 내도록 하세요.”윤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일북은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도아린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아가씨, 죄송합니다! 대표님을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그때 상황에서 나는 갈 수밖에 없었어.”도아린이 차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일남을 발견했다.그는 햇볕에 검게 그을려 있었고 하얀 이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도아린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놀렸다.“둘째 오빠가 아프리카로 유배 보냈나 보네.”일남이 어색하게 목뒤를 긁으며 빠르게 일북을 힐끗 쳐다봤다.“차에 타. 너희 둘이 내 옆에 있으니 더욱 든든하네.”도아린이 뒷자리에 앉고 일남이 운전하려 했지만 일북이 그를 잡아당겼다. 그는 불만이 섞인 얼굴로 보조석에 앉았다.경찰서 앞에 도착하자 누군가 도아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인을 마친 후, 도아린은 부검실로 향했다.“도아린 씨, 마음 준비를 잘하세요. 육하경 씨의 시신은 바닷물에 잠겨 있었고 물고기들에 의해 일부가 훼손되어 식별이 어렵습니다. 육하경 씨의 부모님은 이미 확인했지만 육하경 본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상대방이 도아린에게 미리 경고하는 동안, 관리자가 번호를 확인하고 큰 냉장실 서랍을 열었다.서랍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쏟아져 나오며 하얀 김이 섞
도아린은 고민성의 날카로운 시선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만약 고 형사님께서 이 사진들이 사망자의 몸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확신하신다면요.”고민성은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날카롭게 도아린의 표정을 살폈다.“도아린 씨, 혹시 육하경 씨가 왜 갑자기 문신을 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어쩌면 그가 배에 타기 전에 이미 이 모든 걸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도아린도 천천히 의자에 기대며 고민성과 거리를 두었다.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는 형언할 수 없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감정이 없는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만약 당신들이 총을 쏘지 않았다면 지금쯤 더 많은 답을 들을 기회가 있었겠죠.”지금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었다. 아무리 그 추론이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지더라도 그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었고 죽은 육하경의 입을 통해 확실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고민성은 더 이상 도아린에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고 결국 그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도아린은 차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일남이 생수 한 병을 따서 건네자 도아린은 받자마자 한 번에 들이켰다. 너무 급히 마신 탓에 물이 입가에서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일남은 눈빛으로 일북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일북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며 도아린이 혼자 천천히 진정하기를 기다렸다.도아린은 육하경이 왜 갑자기 문신을 했는지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그가 실탄이 없는 빈 총을 이용해 경찰을 쏘도록 유도하고 그 뒤 바다에 빠져 도망쳤다고? 하지만 그런 방법이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부상을 입지 않았다고 해도 넓은 바다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세 발의 총알을 맞았고 그 총알들은 모두 정확히 그의 가슴에 박혔다.자상훈이 그의 몸에 문신한 도아린의 이름은 미리 조작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새긴 입술 자국 문신은 위조할 수 없었다.육하경은 도아린의 이빨 자국을 문신으로 새기려 했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서
“저희 딸뿐만 아니라 배에 있는 다른 두 아이의 수술도 모두 성공적이었죠.”순간 도아린의 머리가 멍해졌다.‘그럴 리가!’‘고 형사가 분명히 장기 이식 수술을 막았다고 했는데, 경찰서에서도 율이를 만났잖아... 왜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말하는 걸까?’“정말 도 대표가 그 수술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구현성이 비웃으며 말했다.“율이의 아버지가 후견인으로서 장기 기증에 동의했어요. 율이는 아직 아이지만 그 아이의 아량이 당신보다 훨씬 넓더라고요. 그 아이도 자신의 장기를 기꺼이 기증하겠다고 했죠.”도아린은 더 이상 구현성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마치 바다 깊이 가라앉는 듯한 절망감이 그녀를 덮쳤다.그때 택시 한 대가 도로 옆에 멈췄고 육하경의 양부모가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구현성은 전화를 끊고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인사한 후, 함께 경찰서로 들어갔다.“아가씨, 괜찮으세요?”일남이 괴로워하는 도아린을 보고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그 사람들의 개소리에 휘둘리지 마세요! 저놈들은 이득을 본 사람들이라 당연히 육하경을 좋게 말할 거예요. 만약 저들이 희생자의 가족들이었다면 여전히 그렇게 관대할 수 있을까요?”“일남이 말이 맞아요.”무뚝뚝하던 일북도 위로의 말을 했다.“아가씨는 올바른 일을 하고 있어요! 만약 장기가 마음대로 거래된다면 생명은 그저 권력가들의 게임이 되어버려요. 평범한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도 잃게 되는 거라고요.”“아가씨, 육하경이 장기를 팔고 한 일은 권력자들의 약점을 잡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일 뿐 자신의 고상한 신념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그가 했던 입에 바른 소리도 그저 본인의 잔인함을 숨기기 위한 가면에 불과한 거예요!”“일북 말이 맞아요!”도아린이 손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구현성의 말 때문에 육하경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서 괴로운 게 아니었다.도아린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경찰서에서 율이를 만난 것이 결국 그 아이와의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이었다.율이는 육하경
아린 초등학교의 수금 영수증은 이틀 동안 도아린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문서를 하나 검토할 때마다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곤 했다.‘만약 그때 배 위에서 좀 더 강압적으로 나섰다면, 하경 씨한테 물이라도 뿌렸더라면 하경 씨가 정신을 차렸을까?’그녀는 육하경이 한 짓은 이해할 수 없었다.‘잔혹한 장기 밀매를 저지르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돈을 아린 초등학교에 기부했다니...’예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확인해 보니 전국에는 총 7개의 ‘아린 초등학교’가 존재했다. 모두 외진 빈곤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그 기부금은 육하경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였다. 만약 구현성이 그녀에게 영수증을 주지 않았더라면, 도아린이 육하경의 등에 새겨진 ‘아린’이라는 두 글자를 본 적 없었더라면 그가 기부한 돈이라는 걸 확인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도 대표님.”윤가인이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도아린은 영수증을 서랍에 넣으며 말했다.“들어오세요.”윤가인은 책상 앞까지 와서 보고했다.“육씨 가문이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육하경 씨는 세인트존스 호텔 사무실 서랍의 이중 바닥에 육씨 가문의 불법 운영, 탈세, 부정 경쟁의 증거를 숨겨두고 있었다고 하네요.”“이번 기회로 강 대표님은 최저가로 세인트존스 호텔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육씨 가문의 다른 사업들도 주가가 3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하는 중입니다.”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도아린은 생각에 잠겼다.육하경은 본인이 망한다고 하더라도 육씨 가문과 함께 무너지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동안 육씨 가문은 여러 차례 부정적인 뉴스에 휘말렸지만 증거가 없었기에 매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파장이 너무 컸기에 육씨 가문은 집중적으로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할머니 화 많이 나셨겠네...’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영옥의 전화가 걸려 왔다.“아린아, 민재와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이번 위기를 넘길 수만 있다면 내가 나서서 너랑 민재의 결혼을 성
한 번에 네 명을 면접 보고 나니 도아린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윤가인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마지막으로 한 명 남았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을 불러들이게 했다.마지막 면접자가 들어오자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본 도아린은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무슨 생각이에요?”“공정하게 면접을 보는 거죠. 저도 요구 조건에 부합되지 않나요?”배건후는 전혀 위축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가운데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도아린을 뚫다져라 바라보는 깊은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도아린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았기에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며 윤가인에게 질문하라고 했다.솔직히 말하면 오늘 면접을 본 면접자들 중에서 배건후의 이력서가 가장 뛰어나고 답변도 굉장히 독창적이었다.마지막으로 윤가인이 도아린의 의견을 물었고 그녀는 그제야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했다.“전에 모건 그룹 대표님이셨잖아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요? 조롱도 당할 거고 귀찮게 구는 사람도 많을 텐데 그래도 입사하고 싶다는 건가요?”“네.”배건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그가 굳이 이렇게까지 하겠다면 도아린도 받아들이기로 했다.“솔직히 말하면 전 건후 씨가 진짜로 일하러 온 건지, 아니면 회사를 망치러 온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다른 직원들보다 인턴 기간을 두 달 더 늘일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신가요?”“전 상관없어요.”배건후의 눈빛은 아주 단호했다.설령 월급을 안 받는다 해도 그는 상관없었다. 모건 그룹에 들어가는 건 도아린 곁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윤가인을 바라봤다.“건후 씨를 데리고 가서 입사 절차를 밟으세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배건후는 단 한 순간도 도아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듯, 그녀에게서 아예 눈을 떼지 못했다.배건후가 운영 부서에 나타나자 직원들은 크게 당황했다. 모두 가시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
진수혁은 찻잔을 들어 살짝 한 모금 마시더니 배건후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요." "내가 먼저 도아린과 결혼하면, 당신은 유럽 유학 기회를 나에게 넘겨요. 당신이 먼저 변슬기와 결혼하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칩 기술을 두 손으로 받칠게요."진수혁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찻잔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고, 손등에는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배건후의 깊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매력적인 눈은 도아린을 향할 때면 온통 비위를 맞추고 약한 척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매처럼 날카롭게, 거스를 수 없는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수혁은 눈에 띄지 않게 눈썹을 찌푸렸다. 배건후가 그동안 도아린에게 온갖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보고 진수혁은 배건후가 이미 자존심과 투지를 잃고 오직 결혼 생활을 되돌리려고만 한다고 오해했다. 이제야 배건후는 여전히 그 배건후라는 것을 알았다. 전 부인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포기한 적도 없었다.유럽에는 강연이 하나 있는데, 입문 조건이 주요 재벌 그룹의 실력자 또는 후계자이며, 배건후의 현재 자산으로는 강연을 들을 수 없었다. 진수혁은 그 자격이 있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유럽으로 가서 칩 기술을 연구하는 천재를 찾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건후는 굳이 그와 도박을 걸려고 했다. "당신이 이길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죠." 진수혁이 말했다. "두고 보시죠." 배건후가 말했다. 두 남자는 악수하며 조용히 내기를 정했다. 저녁 식사 때, 진수혁 부부는 주범금도 데려왔고, 내일을 위해 준비했던 몇 가지 요리가 오늘 식탁에 올랐다. 모두 즐겁게 식사했고, 주범금의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녀는 도아린에게 자신이 구매한 전리품을 자랑하기도 했고, 밤늦게서야 떠났다. 진수혁은 도아린을 데려다줄 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럽에 칩 분야 천재가 있다는 거
변환에 성공하는 순간, 동생은 깨어났고,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귀속되었다. 시스템은 남자 주인공에게 도아린의 진심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고 알렸다.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이 믿지 않았지만, 도아린과 이혼한 후 자신의 사업 제국이 날마다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도아린의 좋았던 점들을 떠올렸다...도아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이 남자 주인공은 정말 쓰레기네!""나도 그렇게 생각해." 배건후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아린의 좋은 점을 떠올린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도아린은 그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에는 ‘그러니 당신도 그와 똑같은 부류겠지’라고 쓰여 있었다."나는 아니야." 배건후는 도아린의 손을 잡고 심장 부위에 가져다 댔다. “나는 줄곧 당신만을 사랑했어. 다만 임무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야. 나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에게 줄 수 있어."도아린은 손을 빼서 그의 옷에 쓱 닦았다."당신은 나를 소유하고 싶을 뿐이야. 나를 소유하는 것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녀는 일어나 테라스로 향했다.배건후는 따라가서 말했다. "우리는 공정하게 할 수 있어! 결혼 전후를 막론하고 모든 자산은 당신 거야!"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도 당신 거고."라고 덧붙였다.도아린은 깊어가는 가을의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고 침묵했다.배건후는 말없이 그녀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주인이‘놀러 가자’라고 한마디만 하면 즉시 꼬리를 흔들며 기뻐할 준비가 된 듯이.한참 후, 도아린은 그를 돌아보았다."당신 우정윤에게 후원한 적 있어?"배건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후원한 건 독자들이 남자 주인공을 가장 심하게 욕하는 챕터였어.""……" 그리고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도아린은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 나오
"내가 무슨 바람이 있다고 그래요?"예전에 그녀가 먼저 다가간 건, 배건후랑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였다.남녀를 불문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당신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여러 수단을 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랑 없이는 못 산다는 건 아니에요.내가 엄청나게 목마른 사람처럼 말하네요.배건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건후가 잘못 말했어요. 배건후가 원해요.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나를 총애해주길 기다릴게요."퉤!도아린은 씹던 멜론을 배건후의 몸에 그대로 뿜어버렸다.가슴을 치며 화도 나고 웃음도 나왔다.두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배건후는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 몸을 빼앗긴 게 분명하다.겉모습은 그대로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예전의 배건후는 엄격하고 냉정하며 웃음기 하나 없었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면 비웃거나 냉담하게 대하곤 했다. 지금의 배건후는 데릴사위가 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총애’를 받겠다고 자청하기까지 한다.배건후는 몸에 묻은 과일 조각을 닦지 않고 손을 들어 도아린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야 휴지를 꺼내 옷을 닦았다.도아린은 바닥에 떨어진 과일 조각을 치우며 농담처럼 말했다. "배건후, 당신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게 분명해요. 내가 책 속에 살고 있는 건가? 당신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내가 강해져서 당신에게 복수할 거라는 걸 알고 미리 납작 엎드리는 건가?"배건후는 옷을 다 닦고 도아린을 소파로 끌어당겼다."빙의가 아니라 공략이에요.""..."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공략해서 당신의 사랑을 얻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어요.""당신 미쳤어요?" 도아린은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미쳤어요. 당신은 유일한 약이에요."도아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온몸을 떨며 웃었다. "그렇게 뻔한 사랑 고백은 우종이 가르쳐준 거죠
"엄마가 당신한테 준대요, 알아서 해요."도아린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래요. 별장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해결합시다."배건후는 몸을 뒤로 돌리면서 주체 못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아 그런지 어떤 부분은 더 확대되어 크게 보였다."전보다 커졌는데요."이상한 말이 도아린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그녀는 화가나 그를 한 눈 째리고 나가서 물건을 정리하였다.도아린은 변슬기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녀를 끌고 단추를 찾는다는 핑계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변슬기는 카펫에 엎드려서 핸드폰 보조등을 켜고 소파 밑을 드려다보았다."찾았어요."그녀는 손을 뻗어 단추를 쥐면서 주절주절 말했다."도 선생님, 이제 기회가 되면 제가 저희집의 메인 메뉴인 만두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도아린은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녀가 건네 준 단추를 만지면서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제일 좋기는 가게 평생 20% 할인 카드 줘요.""작은 가게라 많이 벌지도 못해요."변슬기가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이 오시면 무조건 20% 할인 해들릴게요."진수혁은 다 썰어 놓은 과일을 가지고 밖으로 나오면서 저둘이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무슨 얘기 하세요?"변슬기가 설명해주려 하자 도아린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데릴 사위에 대해 얘기를 했어요. 변슬기의 어머니 아버지는 딸 하나 뿐인데, 앞으로 사위가 있다며 처가에 들어왔으면 해요."변슬기는 진수혁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진수혁의 기분은 별로 파동이 없어 보였고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매우 동의하는 눈치였다."우리집에는 니가 하나뿐인 딸인데.""저는 데릴 사위를 할 생각이 있습니다."진수혁은 도아린한테 손을 닦으라고 뜨거운 손수건을 건네 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슬기는 놀라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도아린과 진수혁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
변슬기는 재빨리 진수혁의 등 뒤로 숨었다.진수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상황을 파악하고 조용히 말했다.“이것 좀 부엌에 가져다줘.”“네!”변슬기는 배건후가 문 앞에 두고 간 봉투를 잽싸게 집어 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부엌으로 사라졌다.도아린의 셔츠 단추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배건후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며 조심스럽게 게스트룸으로 이끌었다.“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차에 여벌로 둔 옷 있어.”도아린은 황급히 배건후의 손을 붙잡고 재킷을 벗어 돌려주었다.“일북이 근처에 있을 거야. 전화해. 밖에 추우니까 이거 입고 나가.”그녀가 팔을 들자 셔츠는 더 크게 벌어졌고 새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가 다시 배건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 번쩍이는 불꽃이 튀었고 그 불씨는 작지만 매섭고 뜨거웠다.도아린은 급히 몸을 옆으로 돌리고 팔로 가슴을 가렸다. “어서 가.”배건후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도아린은 반사적으로 거부하려 했지만 그는 단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번을 고요히 숨쉬더니 결국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발소리는 집 밖이 아니라 욕실로 향했다.변슬기는 부엌에서 머리를 내밀며 확인하려다 진수혁에게 팔을 붙잡혀 다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생각해봤어? 회사에 남을 거야 아니면 돌아가서 가게를 이을 거야?”변슬기는 고개를 숙이고 포도를 씻었다.자신의 집은 해남에 있는 작은 분식집이었다. 일반 가정에게는 소중한 생계 수단일지 몰라도 재벌가인 진씨 가문 한테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였다.부모님은 외동딸인 변슬기가 곁에 있기를 바라며 나중에는 사위를 맞이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수혁은 진성 그룹의 황태자다. 그에겐 집안도 학벌도 모두 어울리는 배우자가 필요했고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떠나는 순간 진수혁과는 더 이상 인연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계속 머무르면 감정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뻔했다.한참 후 변슬기는 낮은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