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딸뿐만 아니라 배에 있는 다른 두 아이의 수술도 모두 성공적이었죠.”순간 도아린의 머리가 멍해졌다.‘그럴 리가!’‘고 형사가 분명히 장기 이식 수술을 막았다고 했는데, 경찰서에서도 율이를 만났잖아... 왜 수술이 성공적이라고 말하는 걸까?’“정말 도 대표가 그 수술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구현성이 비웃으며 말했다.“율이의 아버지가 후견인으로서 장기 기증에 동의했어요. 율이는 아직 아이지만 그 아이의 아량이 당신보다 훨씬 넓더라고요. 그 아이도 자신의 장기를 기꺼이 기증하겠다고 했죠.”도아린은 더 이상 구현성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마치 바다 깊이 가라앉는 듯한 절망감이 그녀를 덮쳤다.그때 택시 한 대가 도로 옆에 멈췄고 육하경의 양부모가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구현성은 전화를 끊고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인사한 후, 함께 경찰서로 들어갔다.“아가씨, 괜찮으세요?”일남이 괴로워하는 도아린을 보고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그 사람들의 개소리에 휘둘리지 마세요! 저놈들은 이득을 본 사람들이라 당연히 육하경을 좋게 말할 거예요. 만약 저들이 희생자의 가족들이었다면 여전히 그렇게 관대할 수 있을까요?”“일남이 말이 맞아요.”무뚝뚝하던 일북도 위로의 말을 했다.“아가씨는 올바른 일을 하고 있어요! 만약 장기가 마음대로 거래된다면 생명은 그저 권력가들의 게임이 되어버려요. 평범한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도 잃게 되는 거라고요.”“아가씨, 육하경이 장기를 팔고 한 일은 권력자들의 약점을 잡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일 뿐 자신의 고상한 신념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그가 했던 입에 바른 소리도 그저 본인의 잔인함을 숨기기 위한 가면에 불과한 거예요!”“일북 말이 맞아요!”도아린이 손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구현성의 말 때문에 육하경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서 괴로운 게 아니었다.도아린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경찰서에서 율이를 만난 것이 결국 그 아이와의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이었다.율이는 육하경
아린 초등학교의 수금 영수증은 이틀 동안 도아린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문서를 하나 검토할 때마다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곤 했다.‘만약 그때 배 위에서 좀 더 강압적으로 나섰다면, 하경 씨한테 물이라도 뿌렸더라면 하경 씨가 정신을 차렸을까?’그녀는 육하경이 한 짓은 이해할 수 없었다.‘잔혹한 장기 밀매를 저지르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돈을 아린 초등학교에 기부했다니...’예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확인해 보니 전국에는 총 7개의 ‘아린 초등학교’가 존재했다. 모두 외진 빈곤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그 기부금은 육하경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였다. 만약 구현성이 그녀에게 영수증을 주지 않았더라면, 도아린이 육하경의 등에 새겨진 ‘아린’이라는 두 글자를 본 적 없었더라면 그가 기부한 돈이라는 걸 확인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도 대표님.”윤가인이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도아린은 영수증을 서랍에 넣으며 말했다.“들어오세요.”윤가인은 책상 앞까지 와서 보고했다.“육씨 가문이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육하경 씨는 세인트존스 호텔 사무실 서랍의 이중 바닥에 육씨 가문의 불법 운영, 탈세, 부정 경쟁의 증거를 숨겨두고 있었다고 하네요.”“이번 기회로 강 대표님은 최저가로 세인트존스 호텔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육씨 가문의 다른 사업들도 주가가 3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하는 중입니다.”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도아린은 생각에 잠겼다.육하경은 본인이 망한다고 하더라도 육씨 가문과 함께 무너지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동안 육씨 가문은 여러 차례 부정적인 뉴스에 휘말렸지만 증거가 없었기에 매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파장이 너무 컸기에 육씨 가문은 집중적으로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할머니 화 많이 나셨겠네...’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영옥의 전화가 걸려 왔다.“아린아, 민재와의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이번 위기를 넘길 수만 있다면 내가 나서서 너랑 민재의 결혼을 성
한 번에 네 명을 면접 보고 나니 도아린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윤가인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마지막으로 한 명 남았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을 불러들이게 했다.마지막 면접자가 들어오자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본 도아린은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무슨 생각이에요?”“공정하게 면접을 보는 거죠. 저도 요구 조건에 부합되지 않나요?”배건후는 전혀 위축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가운데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도아린을 뚫다져라 바라보는 깊은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도아린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았기에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며 윤가인에게 질문하라고 했다.솔직히 말하면 오늘 면접을 본 면접자들 중에서 배건후의 이력서가 가장 뛰어나고 답변도 굉장히 독창적이었다.마지막으로 윤가인이 도아린의 의견을 물었고 그녀는 그제야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했다.“전에 모건 그룹 대표님이셨잖아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요? 조롱도 당할 거고 귀찮게 구는 사람도 많을 텐데 그래도 입사하고 싶다는 건가요?”“네.”배건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그가 굳이 이렇게까지 하겠다면 도아린도 받아들이기로 했다.“솔직히 말하면 전 건후 씨가 진짜로 일하러 온 건지, 아니면 회사를 망치러 온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다른 직원들보다 인턴 기간을 두 달 더 늘일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신가요?”“전 상관없어요.”배건후의 눈빛은 아주 단호했다.설령 월급을 안 받는다 해도 그는 상관없었다. 모건 그룹에 들어가는 건 도아린 곁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윤가인을 바라봤다.“건후 씨를 데리고 가서 입사 절차를 밟으세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배건후는 단 한 순간도 도아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듯, 그녀에게서 아예 눈을 떼지 못했다.배건후가 운영 부서에 나타나자 직원들은 크게 당황했다. 모두 가시
“아린아, 그냥 평범한 직원이라고 생각하고 잘해주지 마.”주현정은 겉으로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들이었으니 말이다.보던 프로그램이 끝나기도 전에 유민정이 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식탁 위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배건후는 장갑을 낀 채 커다란 냄비를 가져왔다.“매운 거 좋아하잖아. 맛 좀 봐.”그는 냄비를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놓았다.이틀 동안 회사 정리로 정신이 없었던 도아린은 매운 음식이 먹고 싶었지만 밥을 제대로 먹을 시간마저 없었다. 눈앞에 좋아하는 음식이 가득 차려지자 그녀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주현정을 위해 유민정은 따로 다른 음식을 준비했다.“닭백숙인데 도련님께서 직접 만드신 거예요.”유민정은 국 한 그릇을 떠서 주현정 앞에 놓았다.주현정은 그대로 도아린에게 건네고 유민정에게 한 그릇 더 뜨라고 했다.“아린이도 맛 좀 봐.”“감사합니다.”숟가락을 들어 국을 한 모금 마신 도아린은 눈이 번쩍 뜨였다.배건후는 생활력이 없는 게 아니라 단지 누군가의 보살핌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었다.유민정은 도아린의 생각을 읽고 설명했다.“도련님께서 퇴원하시고 요리를 배우셨거든요. 그 과정에서 태워 먹은 닭만 해도 양계장 하나는 될걸요?”배건후의 얼굴에 잠시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맛 평가를 기다렸다.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네요.”괜찮다는 평가에 배건후는 살짝 실망한 듯했지만 도아린이 밥을 먹으러 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더 연습할게.”그는 공용 젓가락을 들었다.“고기부터 먹을래?”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녀 쪽으로 냄비를 밀어줬다. 매운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서 온 방 안에 진한 향이 퍼졌다.주현정은 참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그녀는 저녁을 별로 많이 먹지 않았다. 국 한 그릇과 채소 몇 젓가락을 먹고는 젓가락을 내려놨다.“다 아린 덕이네. 아린이가 아니었으면 30년을 더 기다려도 아들
“아니에요. 오늘은 기온이 떨어져서 이만 가볼게요. 제가 계속 안 가면 어머님께서 계속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을 거니까요.”그녀가 신발을 갈아신자 배건후도 따라서 신발을 갈아신었다. 그는 문을 나서며 도아린을 바래다주겠다고 말했다.“배건후 씨, 그만 포기하세요. 저희는 원래 사이로 돌아갈 수 없어요.”도아린이 차 옆에 멈춰 서서 진지하게 말했다.배건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니, 돌아갈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도아린은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그날 배에서 도아린의 스카프가 바람에 날려 배건후가 있던 배로 넘어갔었다. 그녀는 배건후가 자기 목에 있던 흔적을 봤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말이다.그 어떤 남자도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었다.비록 도아린은 자신이 육하경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확신했지만 그런 흔적은 누구라도 오해하기 마련이었다.배건후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엄격할 뿐만 아니라 상대도 완벽하길 바랐다.‘그런 사람이 내 목에 있던 흔적을 신경 쓰지 않을 리 없지.’도아린이 화해할 생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있다고 해도 그날 일은 배건후의 마음에 가시로 남아 시간이 지나도 갈등이 생길 것이었다.도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배건후는 이미 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듯했다.날카로운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넌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너한테 상처를 입힌 사람이 잘못한 거지.”도아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배건후의 태도가 예상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그녀는 배건후가 차 문을 세게 내리치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추궁이라도 할 줄 알았다. 아니면 참는다고 하더라도 얼굴에는 분노를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 사이로 죄책감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한참 지나서야 배건후가 입을 열었다.“만
배건후가 차에 타려 했을 때, 일북이 시간을 맞춰 도착했다.“아가씨!”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일남이 뛰어내리더니 앞으로 달려갔다.차는 배건후의 차 앞 1미터 거리에서 멈췄다.도아린이 재빨리 차에서 내렸고 배건후도 따라서 차에서 내렸다.“아린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그냥 널 데리고 가서 몇 가지 보여주려고 그런 거야.”도아린은 일남 뒤에 서서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갑자기 변한 배건후의 태도에 그녀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혹시라도 그녀가 가지 않으려 할까 봐 배건후가 다시 말했다.“아린 초등학교에 관한 거야.”도아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약간 떨리는 손을 꼭 쥐었다.“길 안내해요. 전 제 차로 갈게요.”일남은 도아린이 차로 돌아가는 걸 확인한 후에야 빠르게 조수석에 올랐다.일북은 뒤로 후진하며 배건후에게 공간을 내줬다.배건후의 예상대로는 아니었지만 도아린이 함께 가기로 한 것만으로도 최선의 결과였다. 그는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저택을 빠져나갔고 일북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갔다.“아가씨, 괜찮으세요?”일남이 뒤돌아서 뮫자 도아린은 고개를 저었다.순간, 그녀는 배건후가 또다시 예전처럼 미쳐 날뛸까 봐 겁이 났다.“모건 그룹은 배건후 씨가 자진해서 아가씨께 넘긴 거예요.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배건후 씨가 입원해 있는 동안 모건 그룹은 이미 난장판이 됐을 거예요. 아가씨는 배건후 씨에게 빚진 게 없어요. 그냥 배씨 가문과 완전히 연을 끊을 수는 없나요?”일남이 억울해하며 말했다.일북이 일남를 한번 흘겨보며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일남은 입술을 깨물고 분한 듯 창밖을 바라봤다.“난 건후 씨에게 빚졌다고 생각하지 않아.”도아린이 천천히 말했다.“어머님이 말 너무 진심으로 대해 주셔. 그 마음을 난 무시할 수는 없어. 건후 씨가 회사에 들어오고 싶어 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불이익을 받을 각오만 하고 들어온다면 말이지.”“뭐라고요? 배건후 씨가 회사에 들어오려 한다고요?”일남은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사진도 초등학교가 설립된 후 1기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상세한 장부 기록, 기부금의 사용처, 고용된 교사들의 자격,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이건...”도아린이 배건후를 올려다보았다.배건후는 그녀의 손에서 사진 한 장을 빼앗았다. 그 사진에는 모든 교사와 학생의 이름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은 날짜까지 적혀 있었다.“우리가 결혼하고 나서 내가 처음으로 기부한 초등학교야.”도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더 크게 떠졌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건후 씨가 기부한 학교라고? 하경 씨가 한 게 아니라?’배건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고 그 말은 도아린을 더욱 충격에 빠뜨렸다.“우리가 결혼한 3년 동안 난 매번 결혼기념일마다 두 곳의 학교를 기부를 했어. 모든 돈의 출처도 기록되다 있거든. 믿기지 않으면 직접 가서 확인해 봐.”영수증을 쥐고 있는 도아린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하지만 하경 씨가...”“하경이는 워낙 오랫동안 남쪽 변방 지역을 돌아다녀서 교육 자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 이 초등학교도 하경이가 도움을 줘서 설립된 거야.”배건후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한 손으로 화장대를 짚고 다른 손으로 학교의 영수증을 꼭 쥐었다.한 장은 원본 영수증 다른 한 장은 복사본이었다.아래쪽에는 그의 사인이 적혀 있었는데 ‘배건후’라는 세 글자는 아주 세련되고 힘 있는 필체로 쓰여 있었다.도아린은 급히 다른 영수증들을 찾아 시간 순서대로 나열했다. 확인한 결과, 배건후가 말한 대로 매년 기부한 날짜는 모두 그들의 결혼기념일이었다.그들의 결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그들이 언제 혼인신고를 했는지 몰랐다.배건후는 도아린에게서 영수증을 빼앗아 다시 꺼내 놓고 비교했다.육하경이 초등학교에 기부한 날짜는 지난번 경매 행사 때였다. 그가 직접 나서서 기부한 것이 아니라서 사인도 없었다.전국에 있는 7개의 아린 초등학교가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을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밀어냈다.“하경 씨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제가 건후 씨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예요. 영안실에 있는 건 분명 육하경이에요. 그 문신, 반은 제가 제 손으로 새긴 거니까요.”시간이 촉박해서 조작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어쩌면 육하경이 정말 미리 계획을 세우고 죽은 척 사라지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육하경을 돕던 사람이 그를 배신하고 그 계획을 이용해 육하경을 완전히 보내버렸을지도 모른다.배건후는 도아린의 눈에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냈다.“육하경이 죽었는지 아닌지는 경찰이 조사할 거야. 나는 단지 네가 남의 잘못을 스스로 짊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야. 네 선택은 언제나 옳았어.”도아린은 순간 코끝이 찡했다.율이의 죽음은 그녀에게 놓고 말해서 평생 짐으로 될만한 일이었다.‘그때 율이의 아버지와 양육권을 두고 다퉜더라면 괜찮았을까? 비록 이길 가능성은 적다고 해도 시도라도 해봤다면 율이가 죽는 걸 막을 수 있었을까? 그때 경찰서에서 율이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육하경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었을까?’하지만 아무리 가설을 한다고 해도 이미 일어난 일이었기에 달라지는 건 없었다.도아린은 갑자기 피로감이 밀려오는 듯했다. 요즘 모건 그룹과 JS 픽처스의 업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제대로 된 잠을 잔 적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외로움과 털어놓을 곳 없는 이 막막함은 늪과 같이 그녀를 점점 깊은 곳으로 끌어당겼다. 밤이 깊어질수록 이런 복잡한 감정의 응어리들은 그녀를 괴롭히기만 했다.도아린은 이제 배건후를 완전히 놓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해준 위로는 그 어떤 말보다도 효과가 있었다. 약간 서러워질 정도로 말이다.배건후는 그녀의 감정이 조금 누그러진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다독이려 했다.“아가씨!”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일북이 아래층에서 소리쳤다.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도아린은 재빨리 배건후의 손을 피했다.
“...누가 그래요?”강재민이 고개를 들었다.눈은 약간 충혈돼 있었지만 그 안엔 또렷한 이성이 빛나고 있었다.그는 말없이 와인 병을 따 다시 잔을 채웠다.자기 잔에 먼저, 그리고 신지훈의 잔에도 조용히 와인을 따랐다.“신 대표님의 사업장은 전부 항성에 있는 걸로 아는데요.”그가 비릿하게 웃었다.“그런 분이 굳이 연성까지 와서 배건후 뒷수습을 한다? 이렇게 자꾸 밖으로 나돌면 사모님이 딴 남자랑 바람이라도 피우면 어쩌시려고요?”신지훈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말은 없었지만 눈빛만으로도 경멸이 가득했다.“듣자 하니, 사모님한테 붙어 다니던 소꿉친구가 있다던데요?”강재민은 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지난달 동창회에서 우연히 재회했다더군요. 요즘은 매일 붙어 다닌다던데... 그거 알고는 계셨어요?”신지훈이 들고 있던 잔이 허공에 멈췄다.그의 표정이 서서히 식어가며 냉기 어린 침묵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강재민 씨.”신지훈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에게 쓰던 방식 나한테는 안 통해요. 난 내 아내와 모든 걸 공유하고 있거든요.”“그래요?”강재민이 비웃듯 웃으며 휴대폰을 꺼냈다.사진 한 장을 꺼내 화면을 신지훈 쪽으로 내밀었다.그 사진 속엔 신지훈의 아내가 그 소꿉친구의 팔에 팔짱을 끼고 웃고 있었다.그리고 쇼케이스 너머 사파이어 커프스단추가 눈에 띄게 전시돼 있었다.“이 커프스단추...”강재민이 화면을 확대하며 말했다.“신 대표님은 받아보셨나요?”신지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탕!잔이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와인잔 바닥이 깨졌다.하지만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냅킨을 들고 천천히 입가를 닦았다.“아린 씨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전부 조사하는 게 내 원칙이에요.”강재민은 무심하게 말했다.“누가, 어떤 꿍꿍이로 다가오는지 모르니까. 게다가...”그가 시선을 치켜들었다.“신 대표가 굳이 항성의 가족과 사업 다 제쳐두고 연성까지 와서 배건후를 돕는 이유가 순수한 우정이라는 말, 난 죽어도 못 믿겠거든
도아린은 진심으로 기뻤다.처음 대기업 대표 자리에 앉았을 때 그녀는 뚜렷한 목표도 없이 그저 기존 계획을 무난히 이어가기에도 벅찼다.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사업 기회를 읽고 판단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성장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성장의 곁에는 늘 배건후가 있었다.그의 빠르고 날카로운 사업 감각은 언제나 도아린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차가 멈췄을 때도 도아린은 여전히 기분 좋은 여운에 젖어 있었다.배건후가 조심스럽게 안전벨트를 풀어주고 도아린을 이끌어 차에서 내려 조용한 샤부샤부 가게로 향했다.배건후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로 주문했다.도아린은 익숙한 손길로 주문서를 다시 확인하며 그의 입맛에 맞는 메뉴도 꼼꼼히 포함시켰다.“오늘은 신 대표의 송별회였잖아요. 전화 한 통쯤은 해야겠어요.”도아린이 핸드폰을 꺼내려는 순간 배건후가 슬쩍 그것을 가로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굳이 안 해도 돼. 알아서 챙길 테니까.”“...혹시 신 대표랑 짜고 날 불러낸 거예요?”도아린이 피식 웃었다.그녀는 이미 눈치챘다.그가 건넨 봉투 안엔 이미 준비 완료된 서류가 가득했고 내용상 급한 것도 아니었다.‘굳이 지금 불러낸 이유는 아마 강재민에게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배건후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번 일, 마음에 들었다면... 나 보상 하나 받아도 돼?”도아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휴대폰을 들어 톡톡 두드렸다.“이미 친구 수락했어요.”그는 그렇게 많은 친구 요청을 보내놓고도 정작 친구로 추가되자마자 딱 한 문장만 보냈다.‘잘 자.’그게 정말 단순한 인사였는지 아니면 그녀를 낚기 위한 계산된 한 수였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도아린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배건후가 조용히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크고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가락을 단단하게 감쌌다.음식이 나왔지만 그는 좀처럼 손을 놓지 않았다.그러다 도아린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그제야 아쉬운 듯 그녀
“결혼한다면 나한테도 청첩장 줄 거예요?”강재민이 다시 물었다.짙은 파란색 머리카락에, 몇 가닥 밝은색이 섞여 더욱 도도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도아린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먼저 입꼬리를 올렸다.“...근데, 만약 청첩장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신랑이라서 청첩장이 필요 없단 뜻이겠죠?”그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신지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강재민은 신지훈의 반응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도아린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아린 씨. 그날 이후로 많이 후회했어요.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도아린은 말없이 손을 들어 그를 밀어냈고 곧장 웨이터를 불렀다.“여기 수저 하나만 더 주세요.”신지훈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이건 제 송별식입니다.”그러나 강재민은 무심한 얼굴로 도아린의 의자 등받이에 손을 올렸다.“아린 씨는 술을 못 마시니까, 내가 대신 송별주를 한잔하죠.”“강재민 씨.”신지훈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해외에 오래 계셔서 그런가 봐요. 우리말 속뜻을 잘 이해 못 하시는 것 같은데요.”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기류가 흐르던 그때, 웨이터가 요청한 식기와 와인을 가져왔다. 그 순간, 도아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배건후의 메시지였다.[할 얘기 있어. 만나서 얘기해.]도아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신지훈에게 향했다.그는 ‘걱정 마요’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화장실 좀 다녀올게요.”“나도 같이 갈게요.”강재민이 뒤따르려 하자 신지훈이 잔을 들어 말했다.“강재민 씨, 아까 송별주 같이 하기로 했잖아요?”강재민의 눈빛에 불쾌한 기색이 스치더니 그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좋아요. 한 잔 마셔보죠.”복도를 빠져나온 도아린은 바로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코이지 하우스에서 신 대표 송별회 중이에요. 건후 씨도 와요.”“나 아래서 기다리고 있을게.”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도아린은 길가에 정차한 차를 발견했다.차 안에서 내린 배건후가 경적을 울리며
배건후의 숨결이 갑자기 거칠어지더니 날카로운 눈매에 번뜩이는 불꽃이 일었다.순간, 그는 마치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도아린을 힘껏 끌어안았다.그때 마침, 윤명희와 주현정이 서재 문을 열고 나왔다.“시간 되면 우리랑 같이 여행 갈래요?”윤명희가 환한 웃음과 함께 말을 건넸다.“여행이 정말 기분 전환에 좋더라고요!”주현정도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저야 좋죠. 다만 제가 방해되진 않을지 걱정이네요.”“무슨 말이에요. 우리 아린이의 대모잖아요.”윤명희가 단호하게 말했다.“우린 이제 한 가족이에요.”잠시 정적이 흐르자 윤명희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그러니 말인데요, 누가 우리 딸을 괴롭히면 우리 같이 혼내줘요.”주현정은 옆에 있는 아들을 슬쩍 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당연하죠. 아, 그리고...”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가 도아린을 바라봤다.“아린아. 너희 부모님도 연성에 오셨다면서? 킹캐슬에서 며칠 머무는 건 어때? 가을 단풍이 지금 제일 예쁘거든.”윤명희는 애써 무심한 척했지만 눈빛엔 기대가 가득 담겨 있었다.사실 그녀 자신도 단풍을 보고 싶었지만 도아린의 일정을 방해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다.‘생각해 보니 1년 가까이 못 갔네. 부모님도 오셨고 오빠들도 함께라면 충분히 괜찮겠지.’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도아린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그럼 근처도 좀 구경하고, 단풍도 같이 보러 가요. 그 전에 청소 좀 시켜야겠네요. 어머님도 함께 가시죠.”그녀는 혼자 남을 주현정을 염려해 일부러 함께 가자고 했다.“좋지!”주현정이 기쁘게 대답했다.다음 날.도아린은 브레인 팀과 회의를 진행하던 중, 배건후가 아직 연남 신도시 프로텍트를 맡고 있다는 말을 듣고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연남 신도시에 육원그룹 인수까지? 건후 씨가 그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고유리가 따뜻한 차를 건넸다.“대표님, 잠시 쉬실까요?”“괜찮아요.”도아린은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었다.“
배건후의 뜨거운 시선이 도아린의 얼굴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흘렀고 그 뜻밖의 눈빛에 도아린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순간, 그녀의 손끝이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닿았고 그곳에서 전해진 강한 심장 박동은 마치 전류처럼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배건후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에서 멈췄다.거친 숨결이 고요한 밤공기처럼 그녀를 감쌌다.“...키스해도 될까?”예전의 배건후였다면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는 늘 먼저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가져다 댔던 사람이다.그런 그가, 지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예의 바른 말투가 낯설어 도아린은 순간 말을 잃었다.“...안 돼요.”거절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 배건후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그녀는 그의 익숙한 나무 향기와 담배 냄새에 휩싸였다.그 향기는 그의 존재 자체처럼 깊숙이 그녀 안으로 스며들었다.가슴속에서 거세게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가 터져 나왔다.급히 고개를 돌리는 그녀에게 배건후는 조용히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미안. 나도 모르게...”도아린의 심장은 격하게 뛰었다.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육씨 가문 사업 일부가 한경 그룹과 겹쳐. 기회를 잡아서 인수하는 게 좋겠어.”그 한 마디에 도아린의 가슴 속 소용돌이가 조금씩 가라앉았다.공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감정을 뒤로 미루게 했다.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육민재가 회사를 지킬 수 없다면 우리가 뺏어야지. 실력으로.”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육원 그룹은 육하경의 고발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몇몇 프로젝트는 좌초됐고 고위층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며 실체가 하나둘 드러났다.홍보팀이 온 힘을 다해 수습했지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상업 전쟁은 언제나 무혈이었다.하지만 누군가 무너지면 그 자리를 다른 이가 채웠다.다만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
게다가 도아린을 위해 회사의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그의 결심에 소유정은 더욱 놀랐다.만약 윤명희 부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배건후가 이혼 후 도아린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과 회사를 넘겨줬다고 말했으면, 소유정은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도아린이 책상을 정리한 후에야, 소유정은 자리에 앉았다.“옛말에 개과천선이 있잖아. 그런데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도 있지.”도아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모순되긴 하지만 말이야.”소유정이 턱을 만지며 대답했다.“마음 가는 대로 해.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난 항상 지지할 거야.”역시 가장 친한 친구들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법이다.“진혁 씨랑은 어떻게 됐어?”도아린의 말에 소유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CD 플레이어를 꺼내며 말했다.“내 데모 한번 들어봐.”유진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듯한 소유정의 태도에 도아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응원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소유정이 만든 데모는 도아린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했다.도아린은 바로 감독에게 연락했고, 감독도 OST를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약속을 받았다.소유정은 그날 바로 해남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한편, 윤명희는 연성에 도착하자마자 주현정을 찾아갔다.다만, 윤명희는 남편을 데려가지 않았다.최근 진범준이 아내에게 더 집착을 보였기에 그를 데려가면 위로의 의미보다는 애정을 과시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윤명희와 주현정은 서재로 향했고 거실에는 도아린과 배건후만 남았다.“희망초등학교 일은 내가 오해한 거였어요.”도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나도 당신한테 숨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그 틈을 파고들게 만든 거지.”배건후는 귤을 하나 집어 들고 껍질을 벗겨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이 힐긋 보고 말했다.“위에 흰 실.”배건후는 귀찮아하지 않고 오히려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그녀는 그의 부속품이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에게 말할
도아린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그날 아침,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마친 후, 배건후는 그녀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다.명함에는 에이트 맨션 출입을 위한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배건후는 출장이 있어 3일 후에 돌아온다고 했고 도아린은 생각끝에 소유정의 집으로 향했다.혼인 신고 소식에 소유정은 망고 케이크를 주문해 축하해 주었고 두 사람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다음 날, 소유정은 중요한 녹음 테스트를 놓쳐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가씨.”일북이 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일남이 돌아왔습니다.”도아린이 세수하러 가던 중, 소유정의 웃음소리가 들렸다.나가 보니, 일남도 단 며칠 만에 햇볕에 타서 까무잡잡한 피부가 되었다.다만 까무잡잡한 피부는 오히려 일남에게 더 강인한 남성미와 야성미를 더해주었다.“미안해요, 참을 수가 없었어요.”소유정은 키득키득 웃으며 안마의자에서 일어났다.그녀는 화장실로 향하다가 도아린을 발견하고 어깨동무하며 말했다.“미안, 저 갑자기 저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하하하!”도아린은 못 말린다는 듯 그녀를 한 번 쳐다보다 일남과 일북을 서재로 불렀다.일남은 몇 개의 봉투를 꺼내서 건넸다.“아린 희망학교의 자료예요. 이건 현재 계획 중인 자료입니다.”일남이 조사한 자료는 배건후가 가진 증거와 일치했다.배건후는 학교에 기부할 때 명예나 이익을 바라고 하지 않았고 학교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하지만 배건후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그가 기부한 학교는 모두 도아린을 위해 준비한 결혼기념일 선물이었다.학교에 그림 재능을 가진 아이들은 무료로 지도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성과가 나오면 학교는 전폭적으로 지원했다.마지막 학교는 구현성이 기부한 돈으로 세운 것이었으나 아직 위치도 정해지지 않았고 공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첫 번째 학교는 육하경이 도와서 세운 거라, 구현성은 그걸 따라 했을 거예요.”일남이 설명했다.“하지만 배 대표가 현장 조사를 갔다는 사실이나 전문 재단을
배건후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만든 건 마셔도 돼요.”소유정은 깜짝 놀라며 도아린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너, 건후 씨한테 무슨 짓 한 거야?”도아린은 웃으며 손에 든 밀크티를 반쯤 나눠 그녀에게 건넸다.소유정은 컵을 들고 배건후를 힐끔 보며 도발적인 눈빛을 날렸다.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한 모금 입에 댔다.‘청소 한번, 밥 한 끼 직접 해본 적 없는 재벌가 도련님이 무슨 대단한 밀크티를 만들 수 있겠어. 독만 안 들었으면 다행이지.’그런데 딱 한 모금만으로도 그녀의 눈이 커졌다.소유정은 다시 컵을 들어 꿀꺽꿀꺽 두세 모금 더 마셨다.입에 남는 잔향, 단맛은 과하지 않고 묘하게 쌉쌀한데 부드럽고 따뜻했다.“야, 너도 마셔봐!”소유정이 도아린에게 재촉하며 컵을 흔들었다.도아린은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갸웃했다.“여기... 자몽즙 넣었어요?”배건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눈빛엔 묘하게 따뜻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도아린은 평소 꿀자몽차를 즐겨 마셨던 걸 기억한 배건후가 수십 번의 실험 끝에 완성한 조합이었다.자몽의 향은 살리고 밀크티 특유의 부드러움은 해치지 않는 절묘한 밸런스였다.그 순간 윤명희가 흥미로운 듯 몸을 기울였다.“나도 한 모금만. 궁금해서 미치겠네.”남편 진범준이 말리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뿌리쳤다.윤명희는 요즘 아무 생각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는 듯했지만 도아린과 배건후의 관계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일북이 바로 그녀의 정보원이었다.하지만 그래도 직접 보는 게 가장 확실하다고 판단한 그녀는 그들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확인하고 싶어졌다.배건후는 조용히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고 잠시 후 큰 맥주잔에 밀크티가 가득 담겨 돌아왔다.그는 먼저 도아린의 잔을 가득 채워주고 그다음 윤명희에게 한 잔을 따라 건넸다.그 모습을 보며 소유정도 슬쩍 컵을 들었지만 배건후는 밀크티가 담긴 잔을 회전 테이블에 올려놓고 휙 돌렸다.잔은 진수혁의 앞에 멈췄고 그는 능숙하게 맥주잔을 들어 나머지 밀크티를 변슬기의 잔에 나
“소유정?”도아린의 눈이 놀라움과 의문으로 흔들렸다.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유정이 눈앞에 서 있었다.햇볕에 까맣게 탄 피부와 살이 빠져 까마득히 변한 얼굴.도아린은 거의 못 알아볼 뻔했다.소유정은 한때 ‘곡은 뜨지만 사람은 안 뜨는’ 무명 싱어송라이터였다.햇빛에 탄 듯 거칠어진 볼, 그러나 그 눈은 여전히 맑고 마치 고요한 샘물처럼 맑았다.“너 영화 곧 개봉하잖아. 거기에 어울릴 노래 하나 만들었어.”소유정은 도아린 앞에 다가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낙하산으로 들어가겠다는 건 아니야. 그냥 한 번만, 내 무대를 보여줄 기회만 줘.”그녀의 눈빛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이제 더 이상 방황하는 예술가의 허영도 아닌, 세상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꺾이지 않는 고집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좋아.”도아린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유정이 더 말하려던 찰나,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키 큰 남자를 보곤 무의식적으로 두 걸음 물러섰다.“제가 들게요.”배건후가 진범준의 손에서 카트를 넘겨받았다.진범준은 도아린을 살짝 살폈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손을 놓았다.“수고 좀 해줘.”“별말씀을요.”배건후는 미리 준비해 둔 7인승 밴에 사람들을 태워 호텔로 향했다.한편, 진수혁은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대신 집이 더 편하겠다며 송 비서와 변슬기를 데리고 집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일을 마친 후, 모두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났다.도아린은 변슬기가 눈에 띄게 자신을 피하며 거리를 두는 걸 눈치채고 먼저 그녀를 불렀다.“슬기 씨, 우리랑 같이 식사해요.”“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송 비서님이랑 밖에서 간단히 먹을게요!”변슬기는 다급하게 눈짓을 보내며 송 비서를 향해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고 송 비서도 눈치껏 거들었지만 소용없었다.“송 비서도 같이 앉아요. 오늘은 우리 가족 모임이니까 너무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직원에게 수저를 부탁했다.변슬기가 당황한 눈으로 진수혁을 바라보자 그는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