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아, 그냥 평범한 직원이라고 생각하고 잘해주지 마.”주현정은 겉으로 이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들이었으니 말이다.보던 프로그램이 끝나기도 전에 유민정이 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식탁 위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배건후는 장갑을 낀 채 커다란 냄비를 가져왔다.“매운 거 좋아하잖아. 맛 좀 봐.”그는 냄비를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놓았다.이틀 동안 회사 정리로 정신이 없었던 도아린은 매운 음식이 먹고 싶었지만 밥을 제대로 먹을 시간마저 없었다. 눈앞에 좋아하는 음식이 가득 차려지자 그녀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주현정을 위해 유민정은 따로 다른 음식을 준비했다.“닭백숙인데 도련님께서 직접 만드신 거예요.”유민정은 국 한 그릇을 떠서 주현정 앞에 놓았다.주현정은 그대로 도아린에게 건네고 유민정에게 한 그릇 더 뜨라고 했다.“아린이도 맛 좀 봐.”“감사합니다.”숟가락을 들어 국을 한 모금 마신 도아린은 눈이 번쩍 뜨였다.배건후는 생활력이 없는 게 아니라 단지 누군가의 보살핌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었다.유민정은 도아린의 생각을 읽고 설명했다.“도련님께서 퇴원하시고 요리를 배우셨거든요. 그 과정에서 태워 먹은 닭만 해도 양계장 하나는 될걸요?”배건후의 얼굴에 잠시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맛 평가를 기다렸다.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네요.”괜찮다는 평가에 배건후는 살짝 실망한 듯했지만 도아린이 밥을 먹으러 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더 연습할게.”그는 공용 젓가락을 들었다.“고기부터 먹을래?”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녀 쪽으로 냄비를 밀어줬다. 매운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서 온 방 안에 진한 향이 퍼졌다.주현정은 참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그녀는 저녁을 별로 많이 먹지 않았다. 국 한 그릇과 채소 몇 젓가락을 먹고는 젓가락을 내려놨다.“다 아린 덕이네. 아린이가 아니었으면 30년을 더 기다려도 아들
“아니에요. 오늘은 기온이 떨어져서 이만 가볼게요. 제가 계속 안 가면 어머님께서 계속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을 거니까요.”그녀가 신발을 갈아신자 배건후도 따라서 신발을 갈아신었다. 그는 문을 나서며 도아린을 바래다주겠다고 말했다.“배건후 씨, 그만 포기하세요. 저희는 원래 사이로 돌아갈 수 없어요.”도아린이 차 옆에 멈춰 서서 진지하게 말했다.배건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니, 돌아갈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도아린은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그날 배에서 도아린의 스카프가 바람에 날려 배건후가 있던 배로 넘어갔었다. 그녀는 배건후가 자기 목에 있던 흔적을 봤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말이다.그 어떤 남자도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었다.비록 도아린은 자신이 육하경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확신했지만 그런 흔적은 누구라도 오해하기 마련이었다.배건후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엄격할 뿐만 아니라 상대도 완벽하길 바랐다.‘그런 사람이 내 목에 있던 흔적을 신경 쓰지 않을 리 없지.’도아린이 화해할 생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있다고 해도 그날 일은 배건후의 마음에 가시로 남아 시간이 지나도 갈등이 생길 것이었다.도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배건후는 이미 그녀의 의도를 이해한 듯했다.날카로운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넌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너한테 상처를 입힌 사람이 잘못한 거지.”도아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배건후의 태도가 예상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그녀는 배건후가 차 문을 세게 내리치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추궁이라도 할 줄 알았다. 아니면 참는다고 하더라도 얼굴에는 분노를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 사이로 죄책감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한참 지나서야 배건후가 입을 열었다.“만
배건후가 차에 타려 했을 때, 일북이 시간을 맞춰 도착했다.“아가씨!”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일남이 뛰어내리더니 앞으로 달려갔다.차는 배건후의 차 앞 1미터 거리에서 멈췄다.도아린이 재빨리 차에서 내렸고 배건후도 따라서 차에서 내렸다.“아린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그냥 널 데리고 가서 몇 가지 보여주려고 그런 거야.”도아린은 일남 뒤에 서서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갑자기 변한 배건후의 태도에 그녀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혹시라도 그녀가 가지 않으려 할까 봐 배건후가 다시 말했다.“아린 초등학교에 관한 거야.”도아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약간 떨리는 손을 꼭 쥐었다.“길 안내해요. 전 제 차로 갈게요.”일남은 도아린이 차로 돌아가는 걸 확인한 후에야 빠르게 조수석에 올랐다.일북은 뒤로 후진하며 배건후에게 공간을 내줬다.배건후의 예상대로는 아니었지만 도아린이 함께 가기로 한 것만으로도 최선의 결과였다. 그는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저택을 빠져나갔고 일북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갔다.“아가씨, 괜찮으세요?”일남이 뒤돌아서 뮫자 도아린은 고개를 저었다.순간, 그녀는 배건후가 또다시 예전처럼 미쳐 날뛸까 봐 겁이 났다.“모건 그룹은 배건후 씨가 자진해서 아가씨께 넘긴 거예요.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배건후 씨가 입원해 있는 동안 모건 그룹은 이미 난장판이 됐을 거예요. 아가씨는 배건후 씨에게 빚진 게 없어요. 그냥 배씨 가문과 완전히 연을 끊을 수는 없나요?”일남이 억울해하며 말했다.일북이 일남를 한번 흘겨보며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일남은 입술을 깨물고 분한 듯 창밖을 바라봤다.“난 건후 씨에게 빚졌다고 생각하지 않아.”도아린이 천천히 말했다.“어머님이 말 너무 진심으로 대해 주셔. 그 마음을 난 무시할 수는 없어. 건후 씨가 회사에 들어오고 싶어 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불이익을 받을 각오만 하고 들어온다면 말이지.”“뭐라고요? 배건후 씨가 회사에 들어오려 한다고요?”일남은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사진도 초등학교가 설립된 후 1기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상세한 장부 기록, 기부금의 사용처, 고용된 교사들의 자격,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이건...”도아린이 배건후를 올려다보았다.배건후는 그녀의 손에서 사진 한 장을 빼앗았다. 그 사진에는 모든 교사와 학생의 이름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은 날짜까지 적혀 있었다.“우리가 결혼하고 나서 내가 처음으로 기부한 초등학교야.”도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더 크게 떠졌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건후 씨가 기부한 학교라고? 하경 씨가 한 게 아니라?’배건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고 그 말은 도아린을 더욱 충격에 빠뜨렸다.“우리가 결혼한 3년 동안 난 매번 결혼기념일마다 두 곳의 학교를 기부를 했어. 모든 돈의 출처도 기록되다 있거든. 믿기지 않으면 직접 가서 확인해 봐.”영수증을 쥐고 있는 도아린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하지만 하경 씨가...”“하경이는 워낙 오랫동안 남쪽 변방 지역을 돌아다녀서 교육 자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 이 초등학교도 하경이가 도움을 줘서 설립된 거야.”배건후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한 손으로 화장대를 짚고 다른 손으로 학교의 영수증을 꼭 쥐었다.한 장은 원본 영수증 다른 한 장은 복사본이었다.아래쪽에는 그의 사인이 적혀 있었는데 ‘배건후’라는 세 글자는 아주 세련되고 힘 있는 필체로 쓰여 있었다.도아린은 급히 다른 영수증들을 찾아 시간 순서대로 나열했다. 확인한 결과, 배건후가 말한 대로 매년 기부한 날짜는 모두 그들의 결혼기념일이었다.그들의 결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그들이 언제 혼인신고를 했는지 몰랐다.배건후는 도아린에게서 영수증을 빼앗아 다시 꺼내 놓고 비교했다.육하경이 초등학교에 기부한 날짜는 지난번 경매 행사 때였다. 그가 직접 나서서 기부한 것이 아니라서 사인도 없었다.전국에 있는 7개의 아린 초등학교가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을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밀어냈다.“하경 씨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제가 건후 씨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예요. 영안실에 있는 건 분명 육하경이에요. 그 문신, 반은 제가 제 손으로 새긴 거니까요.”시간이 촉박해서 조작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어쩌면 육하경이 정말 미리 계획을 세우고 죽은 척 사라지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육하경을 돕던 사람이 그를 배신하고 그 계획을 이용해 육하경을 완전히 보내버렸을지도 모른다.배건후는 도아린의 눈에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냈다.“육하경이 죽었는지 아닌지는 경찰이 조사할 거야. 나는 단지 네가 남의 잘못을 스스로 짊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야. 네 선택은 언제나 옳았어.”도아린은 순간 코끝이 찡했다.율이의 죽음은 그녀에게 놓고 말해서 평생 짐으로 될만한 일이었다.‘그때 율이의 아버지와 양육권을 두고 다퉜더라면 괜찮았을까? 비록 이길 가능성은 적다고 해도 시도라도 해봤다면 율이가 죽는 걸 막을 수 있었을까? 그때 경찰서에서 율이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육하경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었을까?’하지만 아무리 가설을 한다고 해도 이미 일어난 일이었기에 달라지는 건 없었다.도아린은 갑자기 피로감이 밀려오는 듯했다. 요즘 모건 그룹과 JS 픽처스의 업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제대로 된 잠을 잔 적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외로움과 털어놓을 곳 없는 이 막막함은 늪과 같이 그녀를 점점 깊은 곳으로 끌어당겼다. 밤이 깊어질수록 이런 복잡한 감정의 응어리들은 그녀를 괴롭히기만 했다.도아린은 이제 배건후를 완전히 놓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해준 위로는 그 어떤 말보다도 효과가 있었다. 약간 서러워질 정도로 말이다.배건후는 그녀의 감정이 조금 누그러진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다독이려 했다.“아가씨!”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일북이 아래층에서 소리쳤다.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도아린은 재빨리 배건후의 손을 피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배건후는 몸을 돌려 차 키를 집어 들고는 빠르게 차에 시동을 걸었다.유태희는 도아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저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 좀 무서워서...”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다시 진통이 시작되었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았다.도아린은 아무 말도 없이 뒷좌석에 올랐다.일북이 그녀의 지시를 기다리자 도아린은 서류 가방을 그에게 넘기며 뒤따라오라고 했다. 혹시라도 무언가 들어올려야 할 일이 생기면 사람이 많을수록 편하니까 말이다.민호준은 원래 아내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도아린에게 더 의지하는 것 같았기에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배 대표님, 이 은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오늘 일은 제가 꼭 기억하고 있을게요!”“별일 아닙니다.”배건후는 핸들을 꽉 잡으며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민호준은 병원에 전화를 걸어 미리 조치를 취했다. 그들이 예약한 병원에서는 산후조리까지 포함된 서비스를 제공했기에 연락을 받은 후, 수술실과 조리원 모두 즉시 준비 태세를 갖췄다.유태희가 너무 긴장하지 않도록 도아린은 그녀의 허리를 마사지해 주며 가벼운 대화를 이어갔다.민호준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아내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고 두 눈엔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도아린은 제일 긴장하고 있는 건 배건후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차가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의료진이 숙련된 손길로 유태희를 눕히고 수술실로 향했다.한 시간 정도 지나자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오더니 말했다.“제왕절개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그 말을 들은 민호준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사인을 하는 손마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그는 마치 뜨거운 불가마 위 개미처럼 제자리에서 맴돌았다.주차를 하러 간 배건후가 올라오지 않자 도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 너머로 한쪽에 기대어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도아린은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배건후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그의 초점이 도아린의 얼굴에 맞춰졌다가 이내 흐려졌다.복도에서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배건후의 눈빛이 점차 맑아졌다.도아린은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고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렸다.“다 지나갔어요. 재희 씨가 겪은 일은 그저 예기치 못한 사고였을 뿐이에요.”배건후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도아린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가요. 태희 씨 아이 보러.”배건후는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도아린이 살짝 힘을 줘서 그를 안으로 이끌었다.민호준은 그들을 보자마자 눈물을 머금고 다가와 말했다.“감사합니다, 배 대표님. 아린 씨도 감사해요. 제 아내와 딸 모두 무사하대요! 전...”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음을 터뜨릴 뿐이었다.“태희 씨는 아주 강한 분이세요.”도아린이 위로를 건넸다.“태희 씨가 먹을 수 있는 거라도 준비해 놓읍시다.”“네.”민호준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이미 산후조리원에 연락해 두었어요. 준비가 다 되면 곧 데리러 올 거예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산후조리원에서 유태희를 데려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도아린과 배건후는 자리를 떠났다.“운전할 수 있겠어요? 제가 일북을 시켜서 데려다주라고 할까요?”눈치가 빠른 일북이 일남을 꼬집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일남은 아마 반대 의견을 냈을 것이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일북과 일남의 표정을 살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건후 씨 좀 데려다주고 올게. 물어볼 게 좀 있어서 말이야.”배건후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차 열쇠를 도아린에게 건네며 조수석에 앉았다.할 말이 있다고 했지만 도아린은 차 안에서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거의 도착했을 때, 배건후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으며왠지 모를 쓰라린 감정을 담고 있었다.“내가 재희 씨를 찾았을 때 말이야. 재희 씨는 창고에 있었어.”그는 두 손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태아는 이미 숨이 끊어진 채로 끌려 나왔다.간단하게 처리하고 나서 고성만이 강재희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마을 사람들은 개를 풀어서 그들을 추격했고 고성만은 배건후에게 강재희를 데리고 먼저 가라고 했다. 그는 온몸이 강재희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기에 이를 이용해 마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유인하며 시간을 벌어주려 했다.도아린은 에이트 맨션 앞에 차를 앞에 세웠다. 배건후가 얘기를 끝낸 후에도 그녀의 가슴속에 엉켜있는 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그 마을 사람들은 단지 가문의 대를 잇겠다는 이유로 여자를 사들였고 그녀의 생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지하고 잔인하며 폭력적인 사람들이었다.배건후는 손을 꽉 쥐었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나는 네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도아린은 배건후의 생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 작전에 대해 말할 수 없었고 강재희의 사생활도 지켜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심리적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배건후가 얻은 결론은 바로 도아린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가 임신을 하지 않으면 강재희처럼 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도아린은 그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뒤통수를 맞자 배건후는 순간 멍해졌다. 그는 당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바보 아니에요? 임신이 걱정되면 피임을 하면 되잖아요! 약을 먹을 수도 있고 수술을 해도 되고... 그런데 왜!”‘그런 얘기를 할 수 없었다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었잖아!’하지만 배건후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강아지가 주인에게 혼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도아린은 비웃듯이 말했다.“건후 씨, 그럼 예전에 제가 먼저 유혹했을 때 말이에요. 절 모질게 대하면서 거절했잖아요. 게다가 막말까지 했고요. 사실 속으론 엄청 기뻤죠?”배건후의 귀가 붉어졌다. 그는 도아린의 시선을 피해 창밖을 내
강재민은 굳어진 채 손에 든 와인잔을 응시했다. 와인에 갈색 눈동자가 비춰 일렁이었다.“오늘 구치소에 아린 씨를 데리러 갔다가 두 사람을 봤거든?”강재민이 도착했을 때 주변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배건후와 고성민이 범인을 잡는 과정을 목격했고도아린이 소화기를 들고 사람을 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배건후가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을 무릅쓰고 도아린을 위해 달려가는 장면도 목격했다.강재민은 순간 자신에게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알아챘다.도아린의 마음속에 배건후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래. 건후를 깊이 사랑한 게 아니라면 그 3년 동안 그렇게 참고 견디지 않았겠지.’배건후는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그의 희생과 ‘죽음’으로 도아린에게 사죄한 셈이었다.도아린이 당장에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른 남자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게다가 강재민은 배건후의 가정을 망친 장본인이였고 도아린이 배건후를 용서하는 그날, 바로 그와 도아린은 적이 될 게 뻔했다.그는 도아린이 이별을 고할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그는 완전한 실패자가 될 테니까.그래서 그는 도아린의 잘못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들어 결말이 없는 연애를 끝내며 남아 있는 자존심이라도 지키려 했다.처음으로 좌절하는 동생의 모습을 마주하고 강재희는 몇 마디 잔소리를 덧붙인 후, 동생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세 병의 와인이 다 비워지자 강재민은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드려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강재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어 동행한 경호원을 불러 그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일주일 후, LY 고위 회의에서 라윤주 자리를 놓고 논의가 시작됐다.서대은은 여전히 여성 복장을 한 채 현재의 라윤주를 지지한다고 밝혔고 청룡도 마찬가지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백호는 다시 한번 경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지만 현무는 자리에 없었기에 혼자 고립된 느낌이었다.“라윤주를 다시 뽑을 생각이 없다면 각자 왕이 되겠다는
도아린이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작은 상자 안을 내려다보았다.벨벳 상자 안에는 결혼반지가 아닌 다이아몬드 커프스단추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현무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현무의 직위를 포기하고 라윤주 자리에 대한 경쟁도 그만두겠다는 건가?’서빙 직원이 음식을 가져오자 강재민은 도아린이 좋아하는 음식을 그녀 앞에 놓았다.권력을 내려놓은 남자는 조금도 아쉬움이 없었고 오히려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식사가 끝나자 강재민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한 뒤, 미안한 듯 말했다.“이따 데려다 줄 수 없을 것 같아요. 바로 공항으로 가야 되거든요.”그는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인연이 닿으면 그때 다시 만나요.”도아린이 일어나서 그의 손을 잡았다.“강재민 씨도 잘 지내요.”강재민은 손을 꽉 쥔 뒤 미소를 지으며 손을 뗐다.도아린을 따라나서던 일북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강재민은 와인잔을 한 모금에 비우고 창밖을 보며 도아린에게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차로 돌아오자 일북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아가씨. 배 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헤어지자고 하는 그런 사람을 위해 슬퍼할 필요 없어요. 어떻게 아가씨를 믿지 않을 수 있죠?”도아린이 고개를 숙인 채, 그 다이아몬드 단추를 바라보았다.그 위로 눈물이 떨어지며 다이아몬드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빛났다.“재민 씨는 나를 믿지 않았던 게 아니야.”“그렇다면 왜... 결국 이별을 말한 건 그 일 때문 아닌가요?”일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강재민은 도아린과 육하경이 몇 날 며칠 같이 배에 있으면서 그들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확신했다.일북의 눈에 강재민은 도아린이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한 거라는 걸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받아들이지 못해 헤어지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었다.도아린이 눈물을 닦으며 단추를 가방에 넣었다.“만약 재민 씨가 정말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내가 건후 씨와 결혼한 뒤에도 건후 씨한테 시비를 걸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이혼
도아린은 급히 시선을 돌린 채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도망치고 싶었다.‘만약 재민 씨가 정말로 청혼을 하는 거라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결혼에 대한 희망을 잃었어요. 당분간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아시다시피 재민 씨 가족과는 어색해 앞으로도 계속 갈등이 생길 것 같아요.’‘어떤 게 좋을까?’“저것 봐봐!”레스토랑에 들어온 한 커플이 공중의 드론을 보고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흥분해서 남자 친구의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너무 예쁘다! 자기도 나한테 청혼할 때 이렇게 해주면 안 돼?”“나한테 시집오기만 하면 내가 하늘의 별이라도 따올 수 있어!”“그럼 가서 별이라도 따와!”두 사람은 웃으며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강재민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하고 싶은 말 없어요?”도아린은 음료컵을 꽉 쥔 채 입을 열었다.“재민 씨. 우리는 아무래도...”그녀는 강재민과 진지하게 시작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들이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게 해주었다.강재민이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유리처럼 맑은 눈동자가 불빛에 비쳐 반짝였지만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스쳤다.“더 이상 안 보면 끝날 텐데요.”“...”“도저히 볼 자신이 없어요?”도아린은 다시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거절을 하더라도 강재민이 준비한 이벤트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공중에 떠 있는 글자를 보고 눈물이 스쳤다.‘행복해야 해.’도아린은 코가 찡해져 눈을 크게 뜬 채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애썼다.드론들이 밤하늘에서 귀여운 파란색 애벌레 모양을 만들더니 천천히 나비로 변하며 쇼는 막을 내렸다.강재민이 도아린에게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애벌레에서 이제는 멋진 나비로 변한 걸 축하해요.”도아린은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강재민이 자신에게 청혼하려는 줄 알았는데 결국 그것은 단지 축복이었다.그 축복은 그녀를 묘하게 울컥하게 했다.“재민 씨, 미안해요
앞에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자 강재민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차를 멈췄다.그는 옆에 앉은 도아린을 곁눈질로 바라보았고 그의 눈빛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도아린은 그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재민 씨에게 라윤주의 자리를 차지하라고 한 건 육청아 본인의 계획을 위해서였겠죠. 재민 씨가 보스가 되면 그 여자는 재민 씨 다음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조직을 육하경에게 넘겨줄 수 있고, 문제가 생기면 재민 씨를 희생양으로 쓸 수도 있을 테니까요.”강재민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육청아의 속셈은 그렇게 잘 꿰뚫어 봤으면서 내 마음은 못 읽어요?”도아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쳤다.그 순간,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고 강재민은 시선을 돌려 다시 차를 운전했다.도아린은 미처 그의 눈동자에 스친 쓸쓸함을 보지 못했다.집에 도착한 도아린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래층으로 향했다.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게임을 하고 있던 강재민은 그녀의 발소리가 들리자 고개도 돌리지 않고 휴대폰에 대고 말했다.“그만할게, 여자 친구랑 나가야 돼.”“젠장! 팀 킬하고 도망가냐...”상대가 욕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는 게임을 끄고 웃으며 일어났다.“가요!”“어디를요?”“밥 먹으러.”그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외투를 도아린에게 건네고 다정하게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그 손길은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진중했다.그들이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일북이 돌아왔다.그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재민을 바라봤고 강재민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차 키를 그에게 던졌다.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북은 그제야 차로 향했다.강재민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도심의 고급 호텔이었다.그는 미리 예약한 창가의 테이블에 다가가 신사적으로 도아린의 의자를 빼주고, 일북을 돌아보았다.“먹고 싶은 걸 골라요. 계산은 내가 할게요.”일북이는 바로 뒤쪽 테이블에 앉은 채 두 사람한테서 시선을 떼
강재민이 어느새 다가와 말을 걸었다.그는 배건후의 경계 어린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도아린의 옆으로 다가갔다.“마침 근처에 있다가 폭발 소리를 듣고 열혈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할 생각에 달려왔는데 아린 씨가 여기 있는 줄은 몰랐네요. 우리 참 인연이 깊은 거 아니에요?”도아린은 그를 흘깃 쳐다봤다. 그 말을 믿겠냐는 눈치였다.강재민은 개의치 않게 웃으며 도아린의 어깨를 감싸안았다.“형사님, 이제 제 여자 친구 데려가도 되죠?”“...”고민성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배건후를 향했다.‘제발 시끄럽게 주먹질하고 그러지 마.’그는 자신의 경찰서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걸 원치 않았다.특히 경찰서 앞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만으로도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충분했다.“물론이죠!”고민성이 정중하게 말했다.“도아린 씨, 나중에 차량 구매 영수증만 경찰서로 보내주세요.”도아린은 사실 남궁유민의 상황이 궁금했지만 지금은 적절한 시점이 아니었다.“알겠어요.”도아린은 배건후의 간절한 눈빛을 무시하고 여유롭게 강재민의 차에 올라탔다.강재민은 창문을 내리고 도발적인 휘파람을 불며 차를 몰고 떠났다.고민성이 배건후의 옆으로 다가가며 혀를 차며 말했다.“아린 씨가 너를 그렇게 걱정하는 걸 보고 난 또 네가 기회가 있을 줄 알았지. 지금 보니... 에잇!”“차 보상은 경찰서에서 직접 책임져.”배건후가 고민성을 지나쳐 구치소로 걸어갔다.“야,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고민성이 서둘러 그를 따라가며 불평을 늘어놓았다.“우리 경찰서 예산 알잖아! 이 사건도 네가 지원해 줬으니 해결할 수 있었던 거 알면서! 경찰서에 너를 위해 현수막도 걸겠다고 약속했어!”배건후가 걸음을 멈추었다.“그런 건 당연히 나라에서 보상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는 무표정하게 고민성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난 당신들 계획에 참여하느라 내 아내까지 잃었어. 그것도 보상해 줘야 해.”고민성이 단칼에 거절하려다 그가 경비를 다시 거둬들일까 두려워 결국 대답을 피했다.그리고
“빨리 도망가요!”고민성이 큰 소리로 외치자 도아린은 뒤돌아서서 하얀 카옌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갑자기 차 문에 검은색 코트가 끼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오자 도아린은 멈칫했다.“건후 씨!”도아린은 급히 뛰어 돌아가 차 문을 힘껏 당겼다. 그러나 차 문은 이미 충격에 의해 휘어져 있었고, 밴에서 새어 나오는 검은 연기가 차 안을 가득 채워 내부 상황을 알 수 없었다.펑!차창이 다시 폭발하며 유리가 공중으로 튕겨 나갔고 불길은 삽시간에 마치 차를 삼키려는 듯 거세졌다. 도아린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쪼그려 앉았다. 유리 조각이 튀었지만 다행히 상처는 입지 않았다.그녀가 다시 일어나 차 문을 잡으려 할 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뛰어!”도아린은 상대방의 손에 이끌려 몇 미터를 달리다가, 뒤에서 또 한 번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뜨거운 열기에 두 사람은 뒤로 튕겨 나갔다.도아린은 본능적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예상한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도아린을 꼭 껴안으며 그녀를 모든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폭발음과 함께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의 손이 그녀의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손끝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배건후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지만 도아린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뭐라고요?”도아린이 크게 외쳤다.배건후도 마치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도아린을 안전한 곳으로 끌고 간 뒤, 그녀의 팔과 다리를 움켜잡았다. 도아린은 그가 방금 자신이 다쳤는지 물어본 것임을 깨달았다.“난 괜찮아요!”도아린이 입을 크게 벌려 대답하며 배건후를 가리켰다.“당신은 괜찮아요?”배건후의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먼 곳에서 비친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상처가 없었지만 연한 색의 터틀넥 스웨터에는 약간의 피가 묻어 있었다. 그 피는 심장 근처에 있었다.도아린이 놀라 급히 그의 가슴을 만지며 갈비뼈
제복을 입었을 때는 늠름했는데 지금은 치마를 입고 가발까지 써서 그런지 고민성은 유독 우아하게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도아린으로 분장한 고민성은 손을 들어 배건후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고 두 사람 사이의 눈빛은 아주 끈적했다.“나 엄청 기다렸다니까. 이제 빨리 가자.”배건후는 그의 손을 단숨에 쳐내고 도아린의 손에서 차 키를 가져갔다.도아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골반을 흔들면서 걷는 고민성을 보고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경찰이 다가오더니 도아린에게 휴게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휴게실에 막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고 경찰은 차를 따라주겠다며 자리를 비웠다.도아린은 창가 쪽으로 갔다. 그녀는 바깥 상황을 볼 수 있으면서도 공격당하지 않을 만한 위치를 찾아서 전화를 받았다.“말하세요.”“육씨 가문에서 육하경 씨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육하경 씨가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걸 몰랐죠. 육하경 씨는 죽었지만 그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어요.”강재민의 목소리는 경멸스러움과 조소로 가득했다.“그리고 또 하나 신기한 소식이 있어요. 육청아 씨는 애초에 육씨 가문의 먼 친척이 아니라는 거예요. 육청아 씨는 나영옥 어르신이 며느리로 삼으려고 데려온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계속 육청아 씨를 통제할 생각이었는데 육청아 씨가 되려 육하경이 육씨 가문을 반격하는 수단으로 되어버린 거죠.”도아린이 미간을 좁혔다.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유치장 앞 도로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이 남궁유민을 어떻게 체포했는지 알 수 없었다.창문을 열려고 하던 찰나, ‘쿵’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곧이어 유리창에 불길이 일렁이며 비쳤다.“어디예요?”강재민이 다급하게 물었다.도아린은 그의 질문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전화를 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차를 가져다주려던 경찰도 소리를 들었는지 손에 든 종이컵을 꽉 쥐어 구겼고, 뜨거운 물이 손등에 쏟아졌다. 그는 곧장 밖으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손보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성형 수술을 한 남궁유민 변호사님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과연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까? 설령 얼굴을 또 바꿨다 해도 DNA까지 바꿀 순 없잖아. 경찰이 수색하고 있으니 곧 잡힐 거야!”“아니야, 아니라고!”손보미는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경찰이 감정을 가라앉히라고 호통쳤지만 손보미는 온몸을 떨며 안절부절못했다.“설마 남궁유민 변호사가 내 약점을 잡고 경찰들을 협박하면 경찰이 널 풀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 딸 율이 말이야... 살 희망이 있었는데도 남궁유민 변호사가 장기 기증 동의서에 서명해서 죽었어!”“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손보미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그녀는 도아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경찰이 재빠르게 그녀를 제압했다.“손보미 씨, 진정하세요!”“율이는 무사할 거야! 절대 무사할 거야... 잘 보살필 거라고 나한테 약속했었다니까? 우리 세 명이서 함께할 거라고 약속했단 말이야! 도아린, 거짓말이지? 맞지?”손보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경찰에게 눌려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볼을 타고 눈물이 쏟아졌다.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율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는 율이를 곁에 두기로 했다.처음엔 율이를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함께 지내면서 율이의 착하고 속 깊은 모습에 점점 정이 들었다.남궁유민이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두를 때, 율이는 따뜻한 물을 받아 그녀더러 목욕을 하라고 했었다. 그럴 때마다 율이는 조심스럽게 연고를 발라 주면서 물었다.“언니를 안 좋아해서 때리는 거예요?”남궁유민이 율이를 떠나보내자고 했을 때, 손보미는 막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병약한 딸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부녀 사이라는 건 변함없었다.생활이 조금 힘들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율이는 보육원에서도 그렇
“사실은 말입니다. 손보미 씨가 이미 세 번이나 신청했거든요. 도아린 씨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앞으로 다시는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말이죠.”경찰이 말했다.도아린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온갖 수를 써서 날 찾은 건 분명 그에 따르는 목적이 있을 거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손보미를 만나러 갈 필요는 없었기에 그녀는 회사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하자 윤가인이 이름 후보를 몇 개 가져왔다. 도아린은 ‘레브’라는 이름을 선택했다.도아린은 윤가인에게 최대한 빨리 변경 절차를 밟으라고 했다.“그리고 이 프로젝트 말인데요. 배... 배건후 씨가 맡아서 진행했다고 하더군요.”윤가인이 또 다른 서류를 건네면서 말했다.서류를 펼쳐 본 도아린은 비웃음을 흘렸다.신지훈이 정말이지 온 힘을 다해 배건후를 띄워주고 있었다.도아린이 전에 신지훈더러 조사하라고 했던 강재민이 중단시킨 프로젝트의 건축 자재에 대한 서류였다. 아마도 신지훈이 조사하고 나서 공을 세울 기회를 배건후에게 준 것이었다.“배건후 씨가 맡게 놔두세요.”도아린은 거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 다른 어려움이 없다면 그녀라도 장애물을 놓아야 했다.도아린은 퇴근 직전까지 바쁘게 일했다. 그리고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급한 일이 생겨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전했다.하루 종일 기다린 손보미는 욕설을 퍼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다음 날도 그녀는 계속해서 기다렸지만 도아린은 오지 않았다.사흘이 지나자 손보미는 도아린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거라고 확신했다. 애초부터 만날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라고 말이다.그때, 경찰이 와서 그녀에게 면회 소식을 알렸다.면회실에 들어선 손보미는 도아린을 보자마자 살기를 뿜어냈다.예전의 화사하고 아름다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원래 단정하던 긴 머리는 싹둑 잘라버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건조하고 푸석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시술을 받을 수 없어서인지 얼굴은 점점 변형되었고 콧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