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만나봐.”강재희는 테이블 옆에 있는 강태식의 발을 살짝 건드리며 눈짓했다.한편, 서재를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강태식은 화를 벌컥 냈다. “너까지 왜 그래?”“아버지, 다음 주에 보스를 뽑을 거예요. 일단 재민이를 달래서 주도권을 잡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잖아요.”“재민이가 만약 보스가 된다면 우리 강씨 집안은 더 많은 자원을 누릴 수 있을 거예요. 그때 가서 아버지가 반대한다고 해도 뭐 어쩌겠어요?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고.”“저놈이 쉽게 내 뜻에 따를 놈이더냐?”강태식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대놓고 반대를 했으니 분명 다른 방법을 생각할 거야. 재민이를 속였다가 나중에 알기라도 하면? 눈에 뵈는 게 없는 놈 아니냐?”“하지만 지금은 보스의 자리를 손에 넣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잖아요. 나중에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쩌겠어요? 그렇다고 회사를 제 손으로 망치기야 하겠어요?”문밖에 서 있던 강재민은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다.입가의 사악한 웃음은 더욱 차갑고 매서워졌다. 한참을 서 있던 그가 자기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각, 금방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아린은 강재민한테서 걸려 온 영상통화를 받았다. 통화버튼을 누른 뒤, 그녀는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고 책꽂이로 가서 책을 찾았다.“무슨 일이에요?”“보고 싶어요.”예고도 없이 훅 들어오는 그의 직구가 그녀는 아직도 익숙지가 않았다. 그녀는 책상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손에 쥐었고 영상 속 강재민은 밝은 그레이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 부드러운 잠옷 아래 탄탄한 그의 상체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키가 큰 남자는 창가에 서 있었고 달빛이 그의 조각 같은 옆모습에 내려앉아 더욱 매력적이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그가 흡혈귀가 아닌 늑대인간처럼 보였고 둥근 달이 떠오르면 변신할 것만 같았다. “주작한테서 들었는데 새로운 보스를 뽑는다고 하더라고요. 재민 씨는 관심 없어요?”담담하게 묻는 그녀의 말에 그가 되물었다. “아린 씨는 내가 경선에 나서길
우정윤은 왜 그러는지 물어볼 겨를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남자의 창백한 안색과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고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괜찮으신지...”배건후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30분 후, 배건후는 육청아가 머물고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그녀는 손보미와 한창 뭔가를 축하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손에 와인을 들고 있었다. “건후 씨? 여긴 어쩐 일이야?”손보미는 급히 술잔을 내려놓고 허둥지둥 일어나더니 육청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반면, 육청아는 그녀보다 훨씬 침착해 보였고 미소를 지으며 그한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보미 씨가 기분이 안 좋아서 위로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배 대표님이 오셨으니까 보미 씨의 기분도 많이 좋아졌을 거예요.”옆에 있던 손보미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요즘은 왜 나 찾아오지 않았어? 난 건후 씨가 정말 날 버린 줄 알았잖아.”배건후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스테이크와 와인을 힐끔 쳐다보고는 손보미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나 좀 봐.”말을 마친 그는 바로 서재로 향했다.손보미는 걱정스러운 듯 육청아를 쳐다보았고 걱정하지 말라는 육청아의 눈빛을 보고 나서야 그를 따라 서재로 갔다. “청아 씨 말로는 당신이 다쳤다고 하던데. 몸은 괜찮은 거야?”그녀는 말을 하면서 남자의 가슴팍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배건후는 팔꿈치로 그녀의 손길을 막고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지유한테 네가 차를 빌려줬어?”손보미는 입술을 깨물며 잔뜩 겁먹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지유가 빌려달라고 해서 거절하기 힘들었어. 왼쪽 다리를 다친 것뿐이니 운전에 지장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지유가 사람을 쳤어.”그가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남자의 날카로운 눈빛에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고개를 떨구며 손을 맞잡았다.“그래?”그녀의 반응을 보니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엄청난 압박에 그녀는 식은땀이 났다.
“건후 씨.”손보미는 급히 배건후의 소매를 붙잡았다.“지유의 일은 내가 다 설명할게.”그녀는 일단 피하라고 급히 육청아에게 눈빛을 보냈다. 신사적인 사람은 아니었어도 여자에게 손을 대는 경우는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육청아에게 찻물을 뿌린 걸 보면 엄청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이런 순간에 그와 해명해 봤자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고 오히려 그를 더 화나게만 할 것이다. 이렇게 모욕당한 적이 없던 육청아는 마음속으로 이 분노를 삼킬 수가 없었지만 아직은 완수하지 못한 임무가 있으니 배건후와 사이가 나빠지면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참으며 입술을 깨물고 돌아섰다. 육청아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손보미는 그를 세재로 끌고 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그의 차가운 시선에 놀라 손을 움츠렸다. “건후 씨, 내 말 좀 들어봐. 어찌 됐든 내가 지유한테 차를 빌려줬으니까 내가 책임질게.”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다친 사람은 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내일 내가 한번 가볼게.”그녀의 손을 뿌리치던 그가 더럽다는 뜻이 소매를 툭툭 털며 차갑게 말했다.“집에 가 있어. 내 허락 없이는 함부로 외출하지 마.”그 말에 손보미는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지금 날 감금하겠다는 건가?무슨 이유로?차 사고를 낸 건 배지유고 난 병원비까지 부담하겠다고 했는데? 왜 날 가두어두겠다는 거야?내키지는 않았지만 뭐라 할 수가 없었고 그녀는 배건후를 따라 육청아의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직접 데려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배건후는 두 명의 경호훤에게 그녀를 맡겼다. 이건 뭐 압송이나 다름없었다.사실 그날 밤 배지유에게 차를 빌려준 건 다른 할 일이 있어서였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태운 차는 갑자기 경찰서로 향했고 아무리 발버둥 치고 소리치고 울고불고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음날, 최지우가 ‘찬란한 인생’을 촬영
“민재야, 도와줘...”“한 번 더 말해 봐!”도아린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잡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뒤에 있는 남자의 싸늘한 이목구비를 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건후 씨? 건후 씨가 왜 여기에...”남자는 안개가 자욱한 유리 벽에 도아린을 밀어붙이더니 그녀의 아래턱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여긴 내 방이야, 누구이길 바라는데? 응?”도아린이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 놓으라고요...”“날 건드렸으면 끝까지 버텨야지.”남자는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마구 더듬었다.“으악...”쿵!도아린은 차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꿈에서 깼다.앞에 교통사고가 일어났는데 버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길가의 배수구에 빠지면서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에는 온통 욕하는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뿐이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3년 전 그날 밤의 사고에 비하면 이번 사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아린은 그 사고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날 밤 그녀는 배건후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배씨 가문 사모님이 되어 위기들을 해결하긴 했지만...“죽고 싶어요? 얼른 밖으로 기어 나와요!”누군가의 재촉에 도아린은 이미 망가진 케이크를 버리고 선루프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구급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도아린은 구급차가 멀지 않은 곳의 아우디 밴 옆에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의료진들이 구급차에서 내려 차 안의 다친 환자를 부축했다. 그때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 상체를 숙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안고 나온 후 구급차에 태웠다.찰나였지만 도아린은 그 남자가 바로 결혼한 지 3년 된 남편이라는 걸 알아봤다. 그리고 남편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는 늘 잊지 못했던 그의 첫사랑이었다. 그는 유학 간 그녀를 줄곧 잊지 못했다.도아린은 팔이 아픈 것도 참아가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 너머로 남자의 싸늘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용건만 간단히.”“오늘 집에 들어와
“대표님!”배건후의 차를 알고 있는 경비원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대표님, 아린 씨도 자주 농땡이 치는 건 아니에요. 근데 다른 도우미로 바꾸고 싶다면 소개해드릴게요...”관리사무소 팀장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배씨 가문의 도우미들은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썼다. 게다가 월급이 높을 뿐만 아니라 재벌 2세를 만날 기회가 많기에 도아린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많았다.배건후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마는 모두를 압도해 버렸다.환하게 웃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연성의 7월은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지만 사람들은 마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1분 후, 유리창이 서서히 내려오면서 배건후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할 일 다 하고 여기서 수다질이야?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꺼져.”관리사무소 팀장은 놀란 나머지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고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배건후의 언행은 상업계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가 관리사무소를 내쫓는다면 관리사무소는 연성에서 더는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배건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도아린에게 머물렀다.“타.”“난 할 일이 있어서요...”그러자 배건후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배건후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차 문 쪽에 최대한 붙어 앉았다.마이바흐가 맨션을 나간 후 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싸늘하게 말했다.“평소에는 기고만장하다가 침대 위에서는 힘 한 번 쓰지 못하는 남자?”“...”도아린은 시선을 내리깔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를 다 피운 배건후가 서류를 툭툭 두드렸다.“이거 무슨 뜻이야?”도아린이 힐끔 쳐다보니 그녀가 작성한 이혼 합의서였다.“이혼하고 싶어요.”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숨 막힐 듯이 답답해졌다.운전기사 조수현은 당장이라도 도망
전화를 받으면서 도아린을 쳐다보는 배건후의 두 눈에 경멸과 조롱이 가득했다. 관리사무소 사람마저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데 무슨 자격으로 이혼 얘기를 꺼내겠는가?도아린은 배건후가 보는 앞에서 더러운 장갑을 팀장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팀장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노트와 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관리사무소 팀장으로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요! 날 내쫓는다고 해도 당신은 에이트 맨션에 못 들어가요. 배건후 씨는 여우같이 교활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당신도 여우 같긴 한데 나이가 너무 많아요!”어차피 곧 떠날 거라 참고 싶지 않았고 이참에 배건후를 한 방 먹이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배건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도아린은 집 안으로 들어가 물을 따라 마셨다. 방문이 열려있었는데 무언가가 현관의 거치대에 놓여있었다.짐 정리를 다 마치고 나와서야 거치대에 놓여있는 물건이 그녀의 휴대전화라는 걸 알았다.‘내가 휴대전화를 건후 씨 차에 떨어뜨려서 다시 들어온 건가?’이번에 도아린은 약삭빠르게 차고에 있던 카이엔을 몰고 나갔다.카이엔은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배건후가 준 예물 중 하나였다. 평소 그녀는 별로 외출하지 않았고 또 연성에 차가 막혀 계속 차고에 가만히 세워두기만 했다.배건후의 재산을 나눠 가지진 못하더라도 이 차는 혼전 재산이라 그녀의 것이었다. 무뚝뚝하고 매정한 남자를 곧 떠날 거란 생각만 하면 도아린은 기분이 너무 좋아 액셀을 미친 듯이 밟았다.운전하는 중에 절친 소유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를 보고 걱정돼서 전화한 것이었다. 도아린이 힘들어할까 봐 기분도 풀 겸 술 먹으러 가자고 하자 도아린은 모든 걸 정리한 다음에 다시 축하하자면서 거절했다.아파트 청소를 마치긴 했지만 도아린은 처음 자는 침대에 눕기 전에 침구청소기로 청소하는 버릇이 있었다. 침대 위에서 청소기를 돌리는데 부동산 중개인이 갑자기 들어왔다.“문 한참이나 두드렸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문 열고 들어왔어요.”도
“걔가 작정하고 접근하지만 않았어도 오빠는 걔랑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배지유가 화를 내며 말했다.“엄마가 아무리 좋은 한약을 먹여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오빠는 그 여자랑 애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는데.”손을 닦으면서 나오던 도아린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다시 뒷걸음질 쳤다.“오빠, 난 친구들 만나도 오빠가 결혼했다는 얘기를 못 하겠어요. 저런 여자라는 게 알려지면 오히려 망신이에요. 보미 언니 이젠 톱스타가 됐으니까 엄마도 더는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오빠가 말만 하면 내가 엄마한테 말해줄게요.”“보미 지금 한창 일할 때야...”배건후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이혼을 동의하지 않은 건 손보미가 내연녀라는 욕을 먹을까 봐서였다. 배건후는 언제든지 항상 손보미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도아린은 코끝이 찡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녀의 존엄 따위는 이미 배건후에게 짓밟혀서 가루가 되고 말았다. 지금 이대로 나간다면 체면마저 모두 잃을 것 같았다.“으악!”차를 내오던 도우미가 도아린과 부딪히고 말았다. 도우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사모님, 손이...”“괜찮아요.”도아린의 손이 뜨거운 물에 데어 시뻘겋게 됐다.그때 배건후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주방으로 끌고 가서 찬물로 헹궜다.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았던 배건후는 도아린이 데고도 찍소리도 하지 않자 더 답답하고 화가 났다.“내가 널 터치하지 않는다는 걸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어?”“...”도아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사실 그녀는 말한 적이 없었다. 배지유가 에이트 맨션에 갔을 때마다 배건후가 없는 걸 보고 배건후가 도아린과 함께 살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것이었다.거의 사실이나 다름없었기에 도아린은 아니라고 설명하지도 않았다.“내 말이 틀렸나요?”“난 너한테 관심이 없어.”“관심이 없으면서 왜 이혼 안 하는데요?”아무렇지 않은 도아린의 태도에 배건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담배를 꽉 쥐어 손등에 핏줄이 다 튀어
다들 잠이 든 시간이라 복도부터 문 앞까지 어슴푸레한 등이 두 개만 켜져 있었다.배건후가 현관 앞으로 나온 그때 거실 불이 갑자기 켜졌다.“이 늦은 밤에 어딜 가?”주현정이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무슨 급한 일이길래 아린이까지 버리고 가?”“...”배건후는 불편한 몸을 참으며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주현정은 주부로 살아왔어도 사리 분별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회사 일로 핑계를 댔더라면 말리진 않았을 것이다.“그게...”배건후가 얘기하려는데 도아린이 다급하게 내려왔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도아린은 하도 급하게 내려오는 바람에 계단을 헛디딜 뻔했다. 내려오면서 머리를 매다가 주현정을 보고서야 발걸음을 늦추었다.“어머님, 제 동생 상태가 안 좋아서 병원에서 오라고 해서요.”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 주현정이 다급하게 말했다.“그래? 그럼 얼른 가봐. 건후야, 운전 조심하고.”도아린은 그제야 문 앞에 서 있는 배건후를 발견했다. 그녀가 까발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는지 얼굴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배건후가 망신당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녀는 망신당하기 싫었다.“얼른 가.”주현정이 문 앞까지 나온 바람에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배건후의 차에 탔다.“건후 씨랑 같이 갈 생각 없으니까 저 앞에서 내려주면 돼요.”“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친동생을 저주해?”배건후는 그녀가 한밤중에 집을 나오려고 핑계를 댄 거라고 생각했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너무도 피곤했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녀의 남동생에게 진짜 무슨 일이 생겨도 배건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의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으니까.가는 길 내내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도아린은 택시를 잡기 쉬운 곳에서 내린 후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갔다.“제 동생 어떤가요?”“환자분 의식 없이 3년이나 누워있어서 이젠 몸의 장기도 기능을 잃어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도아린은 몸
“건후 씨.”손보미는 급히 배건후의 소매를 붙잡았다.“지유의 일은 내가 다 설명할게.”그녀는 일단 피하라고 급히 육청아에게 눈빛을 보냈다. 신사적인 사람은 아니었어도 여자에게 손을 대는 경우는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육청아에게 찻물을 뿌린 걸 보면 엄청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이런 순간에 그와 해명해 봤자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고 오히려 그를 더 화나게만 할 것이다. 이렇게 모욕당한 적이 없던 육청아는 마음속으로 이 분노를 삼킬 수가 없었지만 아직은 완수하지 못한 임무가 있으니 배건후와 사이가 나빠지면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참으며 입술을 깨물고 돌아섰다. 육청아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손보미는 그를 세재로 끌고 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그의 차가운 시선에 놀라 손을 움츠렸다. “건후 씨, 내 말 좀 들어봐. 어찌 됐든 내가 지유한테 차를 빌려줬으니까 내가 책임질게.”그녀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다친 사람은 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내일 내가 한번 가볼게.”그녀의 손을 뿌리치던 그가 더럽다는 뜻이 소매를 툭툭 털며 차갑게 말했다.“집에 가 있어. 내 허락 없이는 함부로 외출하지 마.”그 말에 손보미는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지금 날 감금하겠다는 건가?무슨 이유로?차 사고를 낸 건 배지유고 난 병원비까지 부담하겠다고 했는데? 왜 날 가두어두겠다는 거야?내키지는 않았지만 뭐라 할 수가 없었고 그녀는 배건후를 따라 육청아의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직접 데려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배건후는 두 명의 경호훤에게 그녀를 맡겼다. 이건 뭐 압송이나 다름없었다.사실 그날 밤 배지유에게 차를 빌려준 건 다른 할 일이 있어서였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태운 차는 갑자기 경찰서로 향했고 아무리 발버둥 치고 소리치고 울고불고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음날, 최지우가 ‘찬란한 인생’을 촬영
우정윤은 왜 그러는지 물어볼 겨를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남자의 창백한 안색과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고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괜찮으신지...”배건후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30분 후, 배건후는 육청아가 머물고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그녀는 손보미와 한창 뭔가를 축하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손에 와인을 들고 있었다. “건후 씨? 여긴 어쩐 일이야?”손보미는 급히 술잔을 내려놓고 허둥지둥 일어나더니 육청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반면, 육청아는 그녀보다 훨씬 침착해 보였고 미소를 지으며 그한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보미 씨가 기분이 안 좋아서 위로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배 대표님이 오셨으니까 보미 씨의 기분도 많이 좋아졌을 거예요.”옆에 있던 손보미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요즘은 왜 나 찾아오지 않았어? 난 건후 씨가 정말 날 버린 줄 알았잖아.”배건후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스테이크와 와인을 힐끔 쳐다보고는 손보미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나 좀 봐.”말을 마친 그는 바로 서재로 향했다.손보미는 걱정스러운 듯 육청아를 쳐다보았고 걱정하지 말라는 육청아의 눈빛을 보고 나서야 그를 따라 서재로 갔다. “청아 씨 말로는 당신이 다쳤다고 하던데. 몸은 괜찮은 거야?”그녀는 말을 하면서 남자의 가슴팍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배건후는 팔꿈치로 그녀의 손길을 막고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지유한테 네가 차를 빌려줬어?”손보미는 입술을 깨물며 잔뜩 겁먹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지유가 빌려달라고 해서 거절하기 힘들었어. 왼쪽 다리를 다친 것뿐이니 운전에 지장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지유가 사람을 쳤어.”그가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남자의 날카로운 눈빛에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고개를 떨구며 손을 맞잡았다.“그래?”그녀의 반응을 보니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엄청난 압박에 그녀는 식은땀이 났다.
“일단 만나봐.”강재희는 테이블 옆에 있는 강태식의 발을 살짝 건드리며 눈짓했다.한편, 서재를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강태식은 화를 벌컥 냈다. “너까지 왜 그래?”“아버지, 다음 주에 보스를 뽑을 거예요. 일단 재민이를 달래서 주도권을 잡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잖아요.”“재민이가 만약 보스가 된다면 우리 강씨 집안은 더 많은 자원을 누릴 수 있을 거예요. 그때 가서 아버지가 반대한다고 해도 뭐 어쩌겠어요?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고.”“저놈이 쉽게 내 뜻에 따를 놈이더냐?”강태식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대놓고 반대를 했으니 분명 다른 방법을 생각할 거야. 재민이를 속였다가 나중에 알기라도 하면? 눈에 뵈는 게 없는 놈 아니냐?”“하지만 지금은 보스의 자리를 손에 넣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잖아요. 나중에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쩌겠어요? 그렇다고 회사를 제 손으로 망치기야 하겠어요?”문밖에 서 있던 강재민은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다.입가의 사악한 웃음은 더욱 차갑고 매서워졌다. 한참을 서 있던 그가 자기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각, 금방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아린은 강재민한테서 걸려 온 영상통화를 받았다. 통화버튼을 누른 뒤, 그녀는 핸드폰을 책상에 내려놓고 책꽂이로 가서 책을 찾았다.“무슨 일이에요?”“보고 싶어요.”예고도 없이 훅 들어오는 그의 직구가 그녀는 아직도 익숙지가 않았다. 그녀는 책상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손에 쥐었고 영상 속 강재민은 밝은 그레이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 부드러운 잠옷 아래 탄탄한 그의 상체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키가 큰 남자는 창가에 서 있었고 달빛이 그의 조각 같은 옆모습에 내려앉아 더욱 매력적이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그가 흡혈귀가 아닌 늑대인간처럼 보였고 둥근 달이 떠오르면 변신할 것만 같았다. “주작한테서 들었는데 새로운 보스를 뽑는다고 하더라고요. 재민 씨는 관심 없어요?”담담하게 묻는 그녀의 말에 그가 되물었다. “아린 씨는 내가 경선에 나서길
“난 반대야.”강태식은 찻잔을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놓으며 말했다.한편, 강재희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강재민을 쳐다보았다.나른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그는 하찮은 표정을 지으며 강태식이 화를 내는 모습에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유나 들어보자. 왜 싫은 건데?”강태식과 강재희는 LY조직에서 강재민의 지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다음 주에 새로운 보스를 뽑는다는 걸 알고 기뻐했다.강재민의 능력으로 만약 그가 새로운 보스로 선택된다면 강씨 가문에는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강재민은 그 자리를 쟁취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강재민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검은 보석의 단추만 쳐다보며 이리저리 만져보았다.“원한다면 쟁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요. 아린 씨와의 결혼을 허락해 주세요.”“그건 안돼.”강태식은 화를 벌컥 내며 고집을 부리는 아들을 노려보았다.“너만 원한다면 좋은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 왜 하필 그 여자야?”이 일에 대해 강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타협한 게 아니라 강재민이 강태식의 허락을 받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난리를 피워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강재민은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그저 나른하게 소파에 앉아 다리를 접었다. “그런 저도 못합니다.”“네가 지금 날 협박하는 것이냐?”“협박은 아니고요. 연성의 프로젝트는 이미 중단되었고 LY조직의 사람들이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결국 주인이 바뀌게 될 겁니다. 해외에 있는 제 회사들은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강씨 가문의 국내 자원은 분명 영향을 받게 되겠죠.”그가 담담한 얼굴로 강태식을 힐끗 쳐다보았다.“아버지가 전에 하신 일들에 대해 제가 다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만약 누가 그 일들을 끄집어내기라도 한다면 아버지의 명성에 큰 오점이 남게 되겠죠.”“너 이 자식...”강태식은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이게 협박이 아니면 뭐라 말인가..
“어젯밤 교통사고 현장 CCTV 영상 찾아서 보내줘.”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도아린은 서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나도 할 얘기가 있어. 만나서 얘기해.”두 사람은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차에 올라탄 후 그녀는 진씨 가문의 하인에게 전화를 걸어 진옥경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당부했다.진씨 가문의 하인이 병실 밖에서 지키고 있는 걸 사실 차화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아린에게 남아서 간호를 하라고 강요했다. 딸의 사고가 당한 건 모두 도아린의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페에 도착한 도아린 씨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10분 뒤 서대은이 도착하였다. 그의 옷차림은 여전히 대학생과 같았고 이번에는 머리를 옅은 그레이 컬러로 염색하였다. 그가 다가와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어때?”그가 머리를 살짝 흔들며 핸드폰을 도아린에게 건넸다.“성숙해 보여.”그녀는 그의 머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영상을 확인했다. 영상 속, 빨간 람보르기는 과속한 상태로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고 신호등을 지나칠 때 차에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반복해서 영상을 살펴보았지만 운전자가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긴 머리를 보니 분명 여자였다. “빛이 나는 곳을 나도 자세히 봤는데 옷 장식인 것 같아.”커피 두 잔을 주문한 서대은은 자신의 컵에 설탕 두 개를 넣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여전히 달지 않아서 설탕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도아린은 그를 올려다보며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전에는 단 거 안 좋아했었잖아.”그 말에 눈빛이 변하던 그는 뭐라 설명하지 않았다.“뒤에 봐봐. 그 차가 도주한 후의 영상을 하나 더 찾았어.”그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보고 그녀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계속해서 영상을 쳐다보았다. 사고 현장을 떠난 람보르기니는 CCTV가 없는 구간을 지나 다시 나타났을 때는 이미 운전자가 바뀌어있는 상태였다. 앞 유리가 깨져서
진옥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고 그 눈빛 속에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가득 찼다. “내가 진씨 가문으로 돌아온 게 싫고 민아의 모든 것을 내가 빼앗아 갔다고 생각했으면 나한테 복수를 했었어야죠. 내 가족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이에요. 당신들이 진씨 가문에 가져간 모든 걸 다 되찾아 올 생각이에요.”진옥경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고 원망의 눈빛은 점차 애원의 눈빛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도아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거 알아요? 당신이 사고가 나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당신 남편은 병원비조차 부담할 생각이 없었어요. 당신의 목숨은 우리 진씨 가문에서 구해온 거예요. 그러니까 악착같이 살아요. 가족에게 못된 짓을 한 대가가 어떤 건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이때, 기계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도아린은 급히 벨을 누르고 의사들을 찾아갔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야 합니다.”중환자실을 나서자 차화영이 눈물을 훔치며 달려왔다. 진옥경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던 그녀는 도아린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병원비 내러 왔어요.”순식간에 말문이 막힌 차화영은 병실에서 의사가 응급처치를 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옥경이는 어떻게 됐어?”“아직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의사 선생님께는 돈이 문제가 아니니 최선을 다해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그 말에 안색이 조금 밝아진 차화영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진작에 돈을 빌려줬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야. 결국은 이 모든 게...”도아린의 매서운 눈빛을 눈치챈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차화영은 진옥경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빌린 일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전화를 해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진옥경이 살해당했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려하자 진범준은 그제야 그녀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중환자실 침대에 누워있는 딸의 모습을 보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우리 딸, 옥경아.”“전 일이 있어서 이만...”“
성대호는 그녀의 반응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할 때, 그가 그녀를 놓아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모든 건 다 나한테 맡겨.”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꾹 누르며 애틋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잘해주는 건 오빠밖에 없어.“일단 밥부터 먹자. 이 일은 친구한테 부탁해 볼게.”그는 도시락을 그녀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안의 반찬들을 본 순간 그녀는 눈빛이 달라졌다.대학 다닐 때 학교 식당에서도 먹지 않았던 반찬들이다. 청경채 볶음, 야채 고기볶음, 고기볶음은 거의 기름진 고기뿐이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걸 보면 생활이 이렇게 궁핍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오빠의 도움이 없는 서씨 집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 어울릴 수가 있겠는가?다행히 주제 파악은 되는 건지 키스는 하지 않았네...배지유는 이런 음식을 거들떠보기도 싫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거의 한 끼도 먹지 않아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다. 배달 음식을 주문해달라고 말을 하려는 그때, 그가 창가에 서서 전화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난처한 듯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눈빛이 어두웠다.어려운 일인가?능력이 안 되는 건 아니고?교통사고일 뿐이잖아.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 여자가 먼저 스스로 뛰어든 것인데...잠시 후, 성대호가 전화를 끊자 그녀는 급히 물었다.“어떻게 됐어?”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앉던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일반적인 부상이라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사람이 죽었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해. 손보미의 차이긴 하지만 건후는 분명 손보미를 도와 이 일에서 빠져나가게 할 것이고 운전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겠지.”배건후가 손보미는 도와주고 자신을 돕지 않는다는 말에 배지유는 도시락을 식탁에 던져버렸다. “우리 오빠는 정말 여자밖에 모른다니까. 손보미 그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해남은 연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처리를 함에 있어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배지유의 오빠니까 여동생을 찾는 이유로 체크인 정보를 확인할 수는 있었지만 성대호를 조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같은 시각, 낡은 아파트 안.핸드폰을 꽉 쥐고 초조하게 소파에 앉아 있던 배지유는 성대호가 돌아오자 눈을 반짝였다. “어떻게 됐어?”성대호는 포장해 온 음식 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리지 못했대. 이미 죽었어.”“뭐?”그녀는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온몸이 차가워졌다.눈을 감으면 온통 사람을 치던 장면이었다. 청부살인과 달리 직접 사람을 치어 죽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어젯밤 그녀는 밤새도록 악몽을 꿨다. 그 사람이 현장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은 보이지 못하였지만 차에 치이는 순간, 일그러져있던 그 사람의 얼굴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잔뜩 긴장했던 마음은 그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내 잘못이 아니야. 정말 내 탓이 아니라고. 그 여자가 스스로 뛰어든 거야.”배지유는 성대호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던 그의 얼굴에 비아냥거리는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어떤 상황이든 배지유는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지 않았고 늘 상대방에게 잘못을 전가하는 사람이었다. “알아.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그 사람은 결국 죽었고 넌 어젯밤에 도망쳤어. 그러니 뺑소니 사건으로 처리될 거고 넌 최소한 7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게 될 거야.”“나 감옥에 가기 싫어. 싫다고. 감옥에 가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어.”“정말 죽고 싶은 거야?”그 말에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고는 눈물을 닦았다. 성대호는 여전히 예전처럼 그녀를 아끼고 보호했으며 그녀를 위해 배건후의 반대편에 서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하지만 다시 돌아온 그에게서 왠지 모르게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야.”성대호는 다정하게 그녀를 쳐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육청아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라갔다. “도아린 씨. 계단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배 대표님을 보러 온 사실이 가려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재결합을 원하지 않는다면서 왜 배 대표님을 보러 병원에 온 건가요? 배 대표님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건가?”도아린은 그저 뒤에 껌딱지가 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그녀의 모습에 육청아는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재민의 경고와 배건후의 태도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도아린 같이 별 볼 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가 이렇게 훌륭한 두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니. 그것도 모자라 도아린을 차지하기 위해 두 남자는 엄청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그녀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감히 반박하지 못하는 걸 보니 맞나 보네요.”육청아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의 앞길을 막아섰다 .진작에 당신의 속셈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경멸이 가득 찬 얼굴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뒤로 두 걸음 물러선 도아린은 그녀의 손에 도시락통이 들려있는 것을 발견하였다.이 미친 여자가 설마 이걸로 날 때리는 건 아니겠지?두렵지는 않지만 먼저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예요?”“당신 진심이요. 당신 마음속에 아직 배 대표님이 있는 거죠?”한편, 주삿바늘을 뽑고 외투를 걸친 채 병실을 나선 배건후는 모퉁이를 돌다가 육청아와 도아린이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남 얘기를 엿듣는 것이 부도덕하기는 하지만 듣고 싶었다. 도아린의 진심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아니요.”도아린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거짓말하지 말아요.”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육청아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배 대표님한테 마음이 없다면서 왜 배 대표님이 추천한 배우를 쓴 거예요? 마음이 있으니까 배 대표님이 다쳤다는 소식에 이리 병원에 온 거 아닌가요?”“난 그 사람이 다친 줄도 몰랐어요. 알았다고 하더라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