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진범준은 컵을 들고 있었는데 들고 있는 게, 마치 폭탄 같았다.아들의 말이 맞았다. 진옥경은 돌아올 때 정말 자신에게 마실 것을 사다 주었다.다음으로 동생이 자기한테 할 일을 생각한 진범준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어서 깊게 숨을 들이쉬고 얘기했다.“옥경아, 우리 어릴 때...”“우리 어릴 때 정말 고생했지.”진옥경은 드디어 화제를 찾았다.“오빠가 입어서 무릎이 해진 바지를 엄마가 잘라 내 바지로 만들어서 내가 입었잖아.”“바지?”“민소매도 있어. 오빠 민소매를 나는 치마로 입을 수 있었어.”“네가 내 민소매도 입었었어?”진범준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앞으로 발생할 일을 저지해서 동생이 잘못된 길로 가는 걸 막고 싶었다. 하지만 동생이 그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본인이 먼저 얘기를 꺼낸다면 만약 동생이 그런 생각이 아니었다면 정말 어색해지는 것이다. 진옥경은 어릴 때 얘기를 할 때 얼굴에 웃음이 피었고 눈도 빛이 났다.추억에 잠긴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진범준은 차를 마시기로 했다. 이따가 동생이 다음 행동을 할 때 바로 제지하면 될 것이다.진범준은 컵을 들고 크게 한 모금 빨고 삼키는 척했다.진옥경은 그의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마시는 것을 확인했고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풀려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그래도 남매로 지내왔는데 결국에는...”“어지러워!”진범준은 눈이 뒤집히더니 침대에 쓰러졌다.“어지러워...”“오빠? 오빠!”진옥경은 다가가서 살짝 그를 밀었다.“오빠? 왜 그래?”아까도 한 모금을 마셨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가 이번에도 한 모금을 마셨는데 바로 정신을 잃는다고?“...”진범준은 말이 없었다.자세히 관찰해본다면 그의 호흡이 평소보다 급해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평소보다 폭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진옥경은 다음으로 넘어가기 급급해서 두 번 정도 부르다가 진범준이 말이 없으니 정신을 잃었다고 확신했다.“민아야, 네 삼촌이 정신을 잃었어! 이제 어떡해야
도유준은 도아린의 전화를 받고 바로 옥린 호텔로 갔다.그는 돈을 가지지 않았다.도아린이 만나자고 한 곳은 호텔 객실이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이 그녀와 자신이 연락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였고 그렇다면 당연히 경호원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 테니 그는 절대적인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도아린이 그를 함정에 빠뜨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 도울 디저트의 사장일 것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게 두 개를 가지고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다.그는 도아린을 얕잡아봤다. 예전에 그녀가 배건후의 앞에서 보여주던 부드럽고 연약한 모습을 보고 그녀가 어리숙한 여자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가 도정국까지 함께 함정에 빠트릴 줄은 몰랐다. 도씨 가문의 가게와 부동산은 결국 도지현 그 쓸모없는 자식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그는 불만이 가득했다.도아린은 자신이 천국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녀를 지옥으로 끌어내려서 제대로 짓밟아줄 것이다.여자는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손해를 봐도 어디 가서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그녀의 오명이 퍼지게 되면 강씨 가문에 시집가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고 다른 재벌가들도 다 역겨워할 것이다.도유준의 머릿속에는 도아린이 자신 앞에서 무릎 꿇고 애원하는 장면이 그려졌고 기분이 좋아진 그는 차에 속도를 가했다.위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그는 약을 한 알 먹었다.1306번 방의 문은 반쯤 열려있었고 어떤 여자가 그를 등지고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민소매에 짧은 치마를 입고 목을 주무르고 있었다.도유준은 살며시 문을 닫고 빠르게 여자의 뒤로 다가갔다.“기다리는 게 지루했어?”“당신...읍!”여자는 피할 새도 없이 당했고 상대방이 누군지 제대로 보기도 전에 옷이 벗겨졌다.“엄마, 삼촌 체력이 정말 대단하네요...”안민아는 곁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귀가 무척 빨개졌다.여자의 신음이 전체 복도에 울려 퍼졌다.진옥경은 이마를 짚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오빠를 함정에 빠뜨린다면 오빠가 깨어났을 때는
“당장 멈춰.”안민아는 다짜고짜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간 진옥경은 망측한 그 광경에 다시 한발 물러났다. 방을 나오면서 화장실 안쪽을 들여다보니 진범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디 간 거지?이때, 도유준이 안민아의 팔을 잡고는 그녀를 침대에 내동댕이쳤다. “뭐가 이리 급해? 다음은 네 차례인데.”“도유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너 때문에 난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있는데. 넌 밖에서 여자랑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안민아는 외삼촌을 해치려 했던 일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평소에 자신과 했던 스킨십을 그가 똑같이 다른 여자에게 하는 것을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도유준을 더 자극했고 그는 이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절정에 달했다. 그의 품에 안긴 여인은 온몸에 울긋불긋한 자국이 선명했고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도유준은 이불을 젖히고 그 여인을 안아 침대에 눕혔다. “너 도아린을 제일 미워하잖아. 내가 너 대신 혼내줬으니까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가 안민아의 턱을 쥐고 한마디 내뱉었다.“언니? 아린 언니랑 무슨 상관이야?”안민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도아린이 먼저 만나자고 했는데 내가 어떻게 모른 척하겠냐?”그가 안민아의 머리카락을 잡고 아래로 누르자 안민아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아니야, 이건 아니라고.”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예상하고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 방은 분명히 외삼촌을 해치려고 준비한 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방에서 도아린과 도유준이 만나기로 한 건지?뭐라 변명하고 싶었지만 입이 막혀버렸다.약 때문에 한껏 흥분된 상태인 도유준은 들끓는 욕망을 풀어낼 생각밖에 없었다. 한편, 경찰차는 이미 아래층에 주차되어 있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1306호 방문을 두드릴 때까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오빠.”어두운 진범준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다리에 힘에 빠져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오빠, 그런 게 아니야. 내 말 좀 들어봐...”“진옥경, 정말 너한테 실망이야.”진옥경?오빠가 나한테 진옥경이라고 한 거야? 왜 이렇게 서먹하게 불러?설마 나랑 연을 끊으려는 걸까?안돼, 절대 그럴 수는 없어.진범준이 그녀한테 힘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안씨 가문에서 그녀가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오빠.”그를 향해 팔을 뻗는데 진범준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역겨운 표정을 지었다.“방금 그 여자, 아빠한테 꼬리치라고 고모가 시킨 거죠. 아빠가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게 하려고요. 내가 직접 봤는데 그래도 변명할 거예요?”도아린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옥경을 쳐다보았다. “어른이 말하는데 네가 왜 끼어들어?”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자 진옥경은 모든 것을 도아린의 탓으로 돌렸다. 도아린이 도유준을 불러내지 않았다면 경찰들이 딸과 사위를 한꺼번에 잡아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진범준의 약점을 잡아 도움을 강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 모든 건 도아린의 탓이었다. “오빠, 일단 들어와. 내가 다 설명할게.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민아한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어. 나도 마찬가지고...”진범준은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고 방에 들어가는 것도 거절했다.“내 눈으로 직접 봤고 내 귀로 직접 들었어. 민아와 도유준이 내 딸을 노리고 있다는걸. 그리고 어떻게 감히 날 상대로 그런 짓을 꾸며?”진범준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처음 본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오빠, 민아가 잡혀갔어. 오빠가 대신 돈 안 갚아주면 우리 민아 정말 감옥에 갈지도 몰라. 민아는 나한테 하나뿐인 딸이야. 제발 부탁이야 오빠, 이번 한 번만 나 좀 도와줘.”말을 하면서 그녀는 무릎을 꿇었고 진경수는 도아린을 끌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진옥경
차 앞까지 쫓아온 진옥경은 진범준 쪽의 문고리를 잡고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정말 안 도와줄 거야? 오빠가 모른 척하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어버릴 거야.”그가 차창을 내리고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진옥경, 우리 남매 사이는 네 손으로 망친 거야. 네가 날 상대로 이런 짓까지 벌이지 않았다면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겠지.”“그래서 정말 안 도와줄 거야?”...진범준은 아무 말도 없이 주먹을 불끈 쥐었고 옆에서 보고 있던 진경수는 아버지가 또 마음이 약해질까 봐 걱정되어 단칼에 거절하려고 하였다.그런데 이때, 진범준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나도 방법이 없어.”“그래? 정말 나보고 죽으란 소리네?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진옥경은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전봇대에 부딪히면 큰 상처를 입기는커녕 머리만 아플 것이다. 진범준이 죄책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상처를 입어야 차화영이 아들한테 압력을 가하지 않겠는가?아무리 둘러봐도 근처에 경상을 입을 만한 것이 없었다. 이때,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이내 결심을 내렸다. 진옥경이 뒤돌아서자 진경수는 차에 시동을 걸었고 막 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진옥경이 사거리로 돌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빨간 람보르기니 한 대가 빠르게 달려오는데 그녀가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펑!람보르기니에 부딪힌 진옥경은 높이 날아올라 포물선을 그리며 차량 앞부분에 떨어지더니 차량 지붕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차를 운전하고 있던 자는 아마 누군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들 줄 몰랐던 것 같았다.브레이크를 밟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고 사람을 치고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도로를 질주했다. 진경수는 멀지 않은 곳에 급히 차를 세우고는 지나가는 차량이 진옥경에게 2차 피해를 줄까 봐 바로 119에 신고했다. 한편, 도아린은 빨간 람보르기니가 가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번호판은 잘 보이지가 않았다.그러나 왠지 낯익은 숫자와 차량 모델, 우연의 일치일까?그 차는 바로 손보미의 차량
“할 말이 있어.”어디론가 전화를 건 성대호는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전화기 맞은편, 그의 목소리를 눈치챈 배건후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이젠 안 피해 다녀?”“응, 숨지 않으려고.”성대호는 고개를 들고 웃으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구경 좀 하려고 돌아온 거야. 모두가 부러워하는 연성의 배씨 가문. 너희 아버지는 병들고 네 동생은 불구가 되고 넌 이혼까지 하고... 어떤 기분이냐?”남의 속을 긁으러 온 모양이군.배건후는 기분이 역겨웠다.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의자에 기대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배씨 가문에서 아린이한테 잘못한 거야. 난 최선을 다해 만회할 생각이고.”성대호는 웃음이 터진 듯 깔깔대고 웃었다.“그전에는 네가 그렇게 말하면 믿었겠지만 지금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시간 전이라면 너한테 기회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무슨 뜻이야?”배건후의 목소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가로수길 사거리에서 지유가 차를 몰고 가다가 도아린의 고모를 치고 도망쳤어. 전에도 지유를 감옥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써서 도아린한테 합의서에 사인하도록 강요했었잖아.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닐 거야.”그 순간, 도아린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성대호는 전화를 끊고 돌아서서 구경꾼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배건후, 넌 대단한 인간이잖아. 도아린을 되찾으려는 거 아니야? 어디 한번 두고 봐. 아내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어떻게 만회할 수 있는지...이 세상에서 깨진 거울이 다시 붙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깨졌으면 깨진 거지 원래대로 복구가 되겠어?난 배지유한테 농락당해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 배건후 너만 잘되라는 법 없잖아. 한편, 진옥경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고 수술 동의서에 가족의 사인이 필요했지만 안준휘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윤명희가 차화영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와 수술 동의서에 사인했다. 수술하는 동안 병원 측에 병세가 위급하다는 통보를 두 번이나 받게 되었다
“뭐 하는 겁니까?”진경수가 안준휘의 손목을 잡고 힘껏 뿌리쳤다.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는 안준휘는 몇 걸음 비틀거리다가 겨우 자리를 잡았다. 그는 두 눈이 새빨갛게 변한 채 진씨 가문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위선 떨지 마. 옥경이가 잘못되면 당신들 용서 안 해.”“안 서방. 옥경이는 내 딸이야. 딸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울음은 그친 차화영이 눈을 붉히며 따져 물었다.“쓸모가 있을 때만 딸인 겁니까? 정말 딸로 생각한다면 죽는 걸 그냥 지켜보지만은 않았겠죠.”안준휘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난... 그게...”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차화영은 윤명희를 쳐다보았다. 윤명희가 자신을 모른 척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들을 쳐다보았고 아들도 그녀를 무시했다.“내가 왜 옥경이를 도와주지 않았나? 옥경이 때문에 난 범준이네와 사이가 틀어질 뻔했어.”“그래요. 장모님한테는 아들밖에 없잖아요.”“안 서방,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범준이가 사준 해남의 집도 자네들이 원하자 난 두말없이 넘겨주었네. 돈이 모자라다고 해서 난 아들한테 거짓말까지 하며 돈을 구해줬는데. 도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 건가?”차화영은 그동안 비밀에 부쳤던 일들을 다 털어놓았다. 아들한테서 돈을 뜯어내어 딸한테 보태준 사실들을 다 말하자 안준휘는 어두운 얼굴을 한 채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태도를 보니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 차화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분풀이를 하려면 옥경이를 치고 달아난 그 사람한테 가서 해. 우리한테 이러지 말고. 옥경이가 이 지경이 되어 병원에 누워있는데 자네는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연락은 왜 안 되는데? 자네가 이 나라 대통령보다 더 바쁜 사람인가?”사나운 그의 눈빛에 놀란 차화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무의식적으로 윤명희에게 기대었다. “사고를 낸 사람은 제가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도 책
무뢰한 인간.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던 진경수는 안준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교통사고부터 처리하시고 경찰서로 가서 사기 사건도 처리하시죠. 깜짝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뭐?”벌컥 화를 내는 사위의 모습에 차화영은 엉겁결에 몸을 피하다가 문에 팔꿈치를 부딪쳤고 너무 아파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가까스로 떨지 않던 그녀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어미야. 내 손이...”윤명희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부딪힌 곳을 주물러주고는 그녀를 부축하여 먼저 병실을 나섰다. 진경수도 도아린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같은 시각, 발걸음을 옮기던 진범준은 복잡한 눈빛으로 안준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집에 돌아온 뒤, 진범준은 아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어깨에서 전해진 따뜻한 기운에 윤명희는 손을 뻗어 남편을 감싸안았다. 오랜 시간 부부로 살았으니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남편이 여동생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모양이다. ...한편, 배지유는 차를 성대호에게 수리를 맡긴 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배석준이 김지민에게 아파트를 마련해준 것을 알게 된 이후, 그녀는 퇴원하고 나서부터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빠가 사는 곳에서 함께 살 생각이었고 아무도 그녀를 쫓아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는 배건후를 보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피했다.그러나 생각해 보니 오빠는 교통사고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으니 겁부터 먹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심호흡하던 그녀는 떨리는 손을 애써 통제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오빠, 아빠 보러 왔어요? 왜 여기 있어요? 같이 올라가요.”배건후는 소파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깊은 눈동자를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속마음을 들킨 줄 안 그녀는 등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조금 덥네요.”“다리를 다쳤는데도 운전을 하는 거야?”“왼쪽 다리를 다친 것뿐이에요. 그리고 자동 기어는 왼쪽 다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