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는 방 안에서 던질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던져버렸다.도아린은 정말 자신을 완전히 망가뜨려야만 끝낼 작정인 걸까?그녀는 화가 나서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파래졌다. 그녀는 책상을 짚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손보미는 급히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손보미입니다. 예전에 유전자 검사 부탁하셨죠? 이제 시간이 났네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손보미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비서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예전에 자원봉사자가 연락 와서 율이의 친부모를 찾고 있다고 했지만,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거절했다.지금 도아린이 자신을 망치려 하고 있지만, 만약 율이가 자신의 아이라면 도아린이 함부로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손보미는 피를 뽑고 나서 의사에게 언제 결과가 나오는지 물었다.“삼일 이내에 결과가 나옵니다. 결과가 나오면 전화로 연락드리겠습니다.”“좀 더 빨리할 수 없나요? 딸과 빨리 만나고 싶어요!”“죄송합니다. 절차가 이렇습니다.”배건후가 나서면 절차를 더 빨리 진행할 수 있었을 텐데 손보미는 배건후에게 자신의 비밀을 알리기가 두려웠다.배건후가 변했다. 예전처럼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고 더는 고성만을 언급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심지어 배건후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변해버렸다.손보미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모자를 낮게 눌러 쓰고 병원을 빠져나갔다.차에 다가갔을 때, 그녀는 그만 멈춰 섰다.“누가 이런 거야!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손보미는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차 위에는 여러 봉지의 쓰레기가 던져져 있었고 그 안에는 음식 찌꺼기, 휴지, 그리고 피 묻은 생리대까지 있었다.비서는 급히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지만 막 정리한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쓰레기 봉지가 손보미에게 던져졌다.“인간쓰레기 죽어!”“불륜인 걸 알면서도 내연녀가 되다니, 그런 뻔뻔한 얼굴로 아직도 사랑 쇼를 하고 있어?”등 돌린 팬들이 썩은 과일과 썩은 달걀을 손보미에게 던지며 비난했다.손보미는 옷을
“어이, 손보미야, 어디서 굴러온 거지인 줄 알았네. 냄새가 너무 지독해. 거기서 멈춰 있어. 물을 더 뿌려줄 테니 더러운 것들을 묻히고 들어오지 마.”손보미는 그녀의 의도를 알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한걸음 내디디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서는 강재희와 강재민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재희는 깎아놓은 사과를 반으로 나누어 강재민에게 주었다. 강재민은 한 입 베어 물고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지독한 냄새를 느낀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아가씨, 도련님.”손보미는 마치 가족과 상봉한 사람처럼 울먹이며 말했다. “도아린 그 년이 날 함정에 빠뜨렸어요! 제발 복수해 주세요!”강재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과를 자르는 작은 칼을 손에 쥐고 안정감이 있게 돌렸다.손보미는 그녀 앞에 다가가 의자에 앉으려 했는데 강재희가 갑자기 의자를 차서 밀어버렸다. 손보미는 반응할 틈도 없이 뒤로 넘어졌다.그녀는 충격에 빠진 채 강재희를 올려다보았다. 손발을 다 써서 뒤로 물러났지만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아가씨...”강재희는 자리를 잡고 무릎을 굽혀 손보미 앞에 앉았다. 손에는 여전히 과도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칼을 한 바퀴 돌린 후, 그것을 손보미의 얼굴에 대였다.“아이를 유괴해서 팔아?”차가운 칼날이 손보미의 숨통을 끊을 듯했다. 눈을 옆으로 돌린 그녀의 시선에는 칼끝만 들어왔다. 강재희가 조금만 힘을 준다면 그녀의 얼굴에는 상처가 날 것이다.손보미는 몸이 떨려왔지만, 얼굴을 망칠까 두려워 애써 몸을 진정했다.“아가씨,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렸어요. 모두 어머니가 강제로 시킨 일이에요...”강재희는 어렸을 때 유괴당한 적이 있었기에 가장 미워하는 것이 바로 여성과 어린이를 유괴해서 팔아먹는 일이었다.손보미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저질렀다.강재희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손보미를 마치 해충을 보듯 했고 당장이라도 죽일 기세였다.“정말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커서 부모님과 인연을 끊었어요
JS 픽처스 이사 사무실.도아린이 서류를 뒤적거리는데 일남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손보미가 유전자 검사를 하러 병원에 갔습니다.”펜을 꽉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였다. 일남은 손보미의 처지와 손보미가 강씨 가문으로 숨어든 일에 대해 다 얘기해주었다. “수고했어. 손보미 쪽은 계속 주시하고 있어. 벼랑 끝에 몰리게 되면 아버지를 찾아가겠지.”“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후, 30분이 지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곧 임원진 회의가 시작됩니다.”도아린은 마음에 든 시나리오를 몇 개 집어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뜻밖에도 배건후가 연성 지사의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녀는 담담하게 그를 한 번 훑어보고는 곧장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어느 날 갑자기 낙하산으로 이사 자리에 오게 된 도아린을 향해 사람들은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행동하였지만 사실 뒤로는 여전히 불만이 많았다. 때문에 그녀가 처음 주최하는 회의에 거의 절반이 결석하였다. 그녀는 회의실을 한번 둘러보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희정 씨, 결석자 명단 체크하세요. 회의 시작하죠.”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에도 절반 이상이 도아린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그녀가 웃음거리가 되는 걸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회의가 시작된 후, 사람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전혀 도아린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탁.마이크가 언제 켜졌는지 스피커를 통해 파일이 탁자에 던져지는 소리가 나자 사람들은 몸을 살짝 떨었다. 이때, 배건후가 고개를 들고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이사님, 우리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도아린은 피식 웃었다.“확실합니까? 올해 그쪽이 투자한 예능은 시청률이 모두 다 바닥났어요. 초등학생도 이렇게 손해 보는 선택은 하지 않을 겁니다.”도아린에게 지적당한 사람은 순식간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녀 또한 아직은 확실한 실적이 없기 때문에 더는 뭐라 할 수가 없었다.“당신이 투자한 예능은 반응이
도아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예를 들면요? 꽃보다 남자의 F4 같은 거요? 그건 명백한 집단 왕따라고요.”정상적인 사람이면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온갖 굴욕과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결국 상대방을 사랑하게 된다고?머리에 문제가 있거나 상대방의 돈이 탐나서 그런 거겠지.내가 널 좋아하는 걸 영광으로 여겨라 뭐 이런 건가? 이건 가스라이팅이잖아.도아린은 상대방의 손에 들려 있는 대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그 시나리오는 누군가의 평범한 삶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오랫동안 주변 사람들의 괴롭힘에 상처투성이가 된 주인공이 결국은 모든 걸 깨닫고 진정한 자신을 되찾아가는 스토리예요. 전 이런 스토리를 사람들한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은 구속을 받고 있어요.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여론을 위해...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격앙된 연설에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프로젝트를 받은 사람들은 또 감히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녀는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내 그녀는 또 다른 시나리오와 예능의 관전 포인트를 자세히 얘기했다.회의가 끝나갈 무렵, 주진모가 눈을 떴다. 왜 아직도 회의가 끝나지 않았냐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도 이사가 이제 막 이 업계에 들어왔으니 열정적인 건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시장의 수요도 고려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투표를 하는 게 어떠한가요? 이 프로젝트를 동의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손을 들어주시죠.”말을 마친 그가 빙그레 웃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그가 손을 들지 않으면 그의 사람들도 분명히 손을 들지 않을 것이다.한편, 그녀에게 설득당한 사람들도 다들 손을 들지 않는 것을 보고 감히 손을 들지 못하였다. 한 바퀴 둘러보니 손을 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그녀는 천천히 사인펜을 꽉 움켜쥐었다.“난 동의합니다.”오른편에 앉아 있던 배건후가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JS 픽처스는 지난 2년 동안
도아린이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비서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배 대표님께서 오셨습니다.”거절할 틈도 없이 그가 바로 안으로 들어와 손에 있던 서류를 들어 올렸다. “공적인 일이야.”그녀도 억지를 부리지 않고 그한테 앉으라고 손짓했다.“이 연예인들은 새 프로젝트에 적합한 사람들이니 참고해.”그는 서류를 그녀의 앞에 밀어놓고서야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그의 그런 모습에 도아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배건후가 건넨 리스트 중 절반 이상이 그녀가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이미 직원들을 시켜 섭외를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오늘 회의에서 금방 프로젝트에 대해 발표한 것인데 그가 회의 중에 이리 섭외 리스트를 뽑아낼 줄은 몰랐다. 업무 능력 하나는 진짜 끝내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비록 익숙한 사업은 아니었지만 그는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충분히 공부를 한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영화의 여주인공은...서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그가 입을 열었다.“최지우는 이혼 후 삶이 완전히 바닥으로 추락했어. 몸매도 망가지고 우울증에도 시달리고 있지.”말을 멈추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를 향해 그녀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나한테 하는 말인가?이혼 후, 큰 타격을 받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여자들이 많았다. 비굴해지고 나약해지고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 성장한 한 여자의 삶을 표현하고 싶다면 최지우를 선택해. 지금 그녀의 상태는 극 중 캐릭터와 잘 어울릴 거야. 시청자들한테 최지우가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걸 보여주는 게 특수 분장보다 훨씬 더 믿음직한 일이니까.”말을 하던 그의 눈빛에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만약 최지우의 의지가 부족하다면 체중 감량이 잘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럼 성형수술의 힘을 빌려야 할 거야.”“필요 없어요.”그녀는 서류를 덮으며 입을 열었다.“최지우보다 이 기회를 소중히 여길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남자들은 우리 여자들한테 필수품이 아니에요.
다정한 그의 손길이 익숙지가 않아서 그녀는 급히 머릿결을 정리했다. “아주머니가 지현이를 잘 챙겨줬었어요.”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내비게이션을 켜고 위치를 검색하여 강재민에게 보여줬다. 약간 흥분된 그녀는 안전벨트를 당겼다가 유리창을 찔러보았다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였다.그녀의 모습에 강재민은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도아린이 도지현을 위해 마련한 집은 번화가에 위치하지는 않았지만 근처에 큰 슈퍼마켓이 있어 장보기가 매우 편리하였다.차가 막 멈추자 도아린은 안전벨트를 풀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지현아.”“누나? 누나?”방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이서가 문을 여는데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진 도아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아린 씨, 얼른 지현이 한번 봐 봐요.”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현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그녀는 가방을 버리고 집안 곳곳을 뒤졌다. 이때, 도지현이 재활실에서 나오며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나 여기 있어.”그 자리에서 굳어진 그녀는 우뚝 솟은 도지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너...”심장이 두근거리고 손가락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앞으로 다가온 그녀는 감히 그를 만지지 못하였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한 번 만지면 깨질 것만 같은 꿈일까 봐.도지현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들었고 이내 차가운 빛이 도는 금속 골격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도지현은 천천히 두 발짝 내딛다가 그녀의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너무 마음에 들어. 아직은 적응이 잘 안되지만 나중에 익숙해지면 뛸 수도 있을 거야.”도아린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남동생은 늘 밝고 씩씩한 사람이었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늘 긍정적이었다.그가 이 기계 다리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지현이라면 분명 어떻게 해서든 더 잘해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거봐요. 누나가 날 보면 운다고 했잖아요.”울컥한 목소리로 말을 하던 그가 도아린의 뒤를 쳐다보았
강재민은 그녀의 손에서 귤을 낚아챘다. 한 조각 먹더니 시큼한 귤 맛에 얼굴을 찡그리며 귤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전에 아린 씨 학교에 가서 농구 친선 경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린 씨는 상대 팀 선수들만 쳐다보더라고요.”도아린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두 사람이 이렇게 오래전부터 만난 사이라니...“그... 그래요?”“5월 7일. 여름방학 전이었죠.”정확한 날짜를 말하는 강재민의 말을 듣고 찻잔을 들려고 손을 뻗던 그녀는 허공에서 손이 굳어져 버렸다. 0507, 배건후가 그녀에게 선물한 차 번호였다. 그녀와 처음 만난 기념일이라면서 배건후가 그 번호판을 선물해 줬었다. 강재민이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당황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한 듯 강재민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아린 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리턴슛도 했는데 당신은 전혀 나한테 관심이 없더라고요. 경기가 끝나고 일부러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학교 도서관의 위치까지 물어봤었는데...”전혀 기억이 없던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목을 쓰다듬었다. “누나, 재민이 형 진짜 농구 잘해. 형이 나한테 상체 운동도 가르쳐주고 슛하는 법도 알려주고 장애인 친구들도 소개해 준 거야. 누나한테 말하지 않았던 건 형이 누나한테 깜짝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다고 해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건물에서 추락하게 된 후 더는 도아린에게 말할 기회가 없게 되었고 깨어나서는 강재민을 다시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강재민이 병실에 나타나 도아린 대신 그를 해남으로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그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도지현은 강재민을 좋아했고 인생의 멘토처럼 그를 따랐다. 두 사람 사이의 화제는 곧 농구로 이어졌고 잘 알아듣지 못했던 도아린은 잠시 앉아 있다가 아주머니를 도와 음식 정리를 하러 주방으로 향했다. “아주머니 동의도 없이 이곳으로 데려와서 죄송해요. 혹시 불편하지는 않으신지...”“아
주현정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진심이야. 앞으로 잘할게. 절대 당신 실망시키는 일 없을 거야.”배석준은 그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일단 일어나요. 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그녀는 재빨리 손을 뺐다. “내가 내 와이프한테 무릎을 꿇는데 뭐 어때서? 프러포즈할 때 무릎 못 꿇었던 거 지금 보상한다고 생각해.”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내가 밖에 나가 소란을 피울까 봐 걱정되는 거라면 계속 아픈 척하고 있을게. 하지만 이 병실은 너무 작고 답답해. 좀 더 큰 곳으로 마련해 줄 수 있어?”“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요.”“고마워.”그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껴안으려 하자 그녀는 이내 그의 손길을 피했다.“지금 바로 전화할게요.”그녀가 병실을 나서자마자 그는 배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일단 음식 사 오지 마. 너희 엄마가 다른 곳을 마련해 주겠대. 이따가 그쪽으로 음식을 보내달라고 해.”통화를 하고 있는데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여보, 벌써 다 된 거야? 네가... 여긴 어떻게?”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졌고 그가 빠른 걸음으로 병실 문 앞에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다행히도 주현정은 이쪽을 등지고 복도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와이프가 와 있어. 얼른 돌아가.”“회장님, 몇 마디만 하고 갈게요.”김지민은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김지민이 난동이라도 부려 주현정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급히 그녀를 안으로 끌어들였다.“빨리 얘기하고 얼른 가.”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억울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회장님께서는 절 버리실 거예요? 전 친구도 없고 직장도 없고 저한테는 이제 회장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회장님도 절 버리실 거예요?”그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전에도 분명히 얘기했지만 난 이혼 같은 거 절대 안 해. 너 스스로 상관없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이게 무슨 소란이야?”“네, 명분 같은 거 신경 쓰지 않아요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