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도아린은 점점 더 밝은 웃음을 띠었다.세 사람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도아린이 먼저 나갔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북이 바로 따라가 배건후가 도아린과 가까워지지 않도록 거리를 두었다.문 앞에 도착하자 일남이 차를 몰고 왔다. 일북은 차 문을 열었고 도아린은 몸을 굽혀 차에 올라탔다.배건후는 몇 걸음 빠르게 다가가 손을 들어 자신의 기사를 호출했고 손보미가 차에 타기 전에 차 문을 닫았다.“너는 혼자 돌아가.”“건후 씨!”배건후의 차는 도아린이 떠나는 방향으로 따라갔다.“앞차를 따라가.”“네, 대표님.”배건후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영상은 네가 찍은 거지?”“하춘녀 씨가 자발적으로 인터뷰를 받겠다고 했어.”육하경의 목소리가 약간 피곤해 보였다.바쁜 와중에 그는 하춘녀를 인터뷰했고 프로그램에 제공된 영상은 일부에 불과했다.배건후가 오늘의 일을 덮고 싶다면 다른 언론에 영상 전체를 보낼 생각이었다.도아린이 어렵게 부탁한 일이니 반드시 제대로 처리해야 했다.“건후야, 손보미 같은 망나니를 위해서 도아린 씨를 버릴 거야? 후회하지 않겠어?”남자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을 하지 않았다.육하경은 그가 후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도 후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부 관계에 불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우정을 버리고 대담하게 도아린에게 마음을 표현했어야 했다.기회가 있을지 없을지는 상관없이 시도는 해봐야만 후회가 남지 않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배건후와의 우정을 생각했고 배지유의 일을 해결하기만 한다면 그들이 부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건후야...”“나는 문제를 피하려는 게 아니야.” 배건후는 그의 말을 끊었다. “하춘녀가 다른 말도 했을 거야. 영상을 전체 다 공개해.”“...”코를 만지고 있던 육하경의 행동이 느려졌다.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가?“손보미가 궁지에 몰리면 손강해과 연락할 거야. 손강해는 손보미의 친
손보미는 방 안에서 던질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던져버렸다.도아린은 정말 자신을 완전히 망가뜨려야만 끝낼 작정인 걸까?그녀는 화가 나서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파래졌다. 그녀는 책상을 짚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손보미는 급히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손보미입니다. 예전에 유전자 검사 부탁하셨죠? 이제 시간이 났네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손보미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비서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예전에 자원봉사자가 연락 와서 율이의 친부모를 찾고 있다고 했지만,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거절했다.지금 도아린이 자신을 망치려 하고 있지만, 만약 율이가 자신의 아이라면 도아린이 함부로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손보미는 피를 뽑고 나서 의사에게 언제 결과가 나오는지 물었다.“삼일 이내에 결과가 나옵니다. 결과가 나오면 전화로 연락드리겠습니다.”“좀 더 빨리할 수 없나요? 딸과 빨리 만나고 싶어요!”“죄송합니다. 절차가 이렇습니다.”배건후가 나서면 절차를 더 빨리 진행할 수 있었을 텐데 손보미는 배건후에게 자신의 비밀을 알리기가 두려웠다.배건후가 변했다. 예전처럼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고 더는 고성만을 언급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심지어 배건후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변해버렸다.손보미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모자를 낮게 눌러 쓰고 병원을 빠져나갔다.차에 다가갔을 때, 그녀는 그만 멈춰 섰다.“누가 이런 거야!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손보미는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차 위에는 여러 봉지의 쓰레기가 던져져 있었고 그 안에는 음식 찌꺼기, 휴지, 그리고 피 묻은 생리대까지 있었다.비서는 급히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지만 막 정리한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쓰레기 봉지가 손보미에게 던져졌다.“인간쓰레기 죽어!”“불륜인 걸 알면서도 내연녀가 되다니, 그런 뻔뻔한 얼굴로 아직도 사랑 쇼를 하고 있어?”등 돌린 팬들이 썩은 과일과 썩은 달걀을 손보미에게 던지며 비난했다.손보미는 옷을
“어이, 손보미야, 어디서 굴러온 거지인 줄 알았네. 냄새가 너무 지독해. 거기서 멈춰 있어. 물을 더 뿌려줄 테니 더러운 것들을 묻히고 들어오지 마.”손보미는 그녀의 의도를 알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한걸음 내디디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서는 강재희와 강재민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재희는 깎아놓은 사과를 반으로 나누어 강재민에게 주었다. 강재민은 한 입 베어 물고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지독한 냄새를 느낀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아가씨, 도련님.”손보미는 마치 가족과 상봉한 사람처럼 울먹이며 말했다. “도아린 그 년이 날 함정에 빠뜨렸어요! 제발 복수해 주세요!”강재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과를 자르는 작은 칼을 손에 쥐고 안정감이 있게 돌렸다.손보미는 그녀 앞에 다가가 의자에 앉으려 했는데 강재희가 갑자기 의자를 차서 밀어버렸다. 손보미는 반응할 틈도 없이 뒤로 넘어졌다.그녀는 충격에 빠진 채 강재희를 올려다보았다. 손발을 다 써서 뒤로 물러났지만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아가씨...”강재희는 자리를 잡고 무릎을 굽혀 손보미 앞에 앉았다. 손에는 여전히 과도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칼을 한 바퀴 돌린 후, 그것을 손보미의 얼굴에 대였다.“아이를 유괴해서 팔아?”차가운 칼날이 손보미의 숨통을 끊을 듯했다. 눈을 옆으로 돌린 그녀의 시선에는 칼끝만 들어왔다. 강재희가 조금만 힘을 준다면 그녀의 얼굴에는 상처가 날 것이다.손보미는 몸이 떨려왔지만, 얼굴을 망칠까 두려워 애써 몸을 진정했다.“아가씨,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렸어요. 모두 어머니가 강제로 시킨 일이에요...”강재희는 어렸을 때 유괴당한 적이 있었기에 가장 미워하는 것이 바로 여성과 어린이를 유괴해서 팔아먹는 일이었다.손보미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저질렀다.강재희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손보미를 마치 해충을 보듯 했고 당장이라도 죽일 기세였다.“정말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커서 부모님과 인연을 끊었어요
JS 픽처스 이사 사무실.도아린이 서류를 뒤적거리는데 일남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손보미가 유전자 검사를 하러 병원에 갔습니다.”펜을 꽉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였다. 일남은 손보미의 처지와 손보미가 강씨 가문으로 숨어든 일에 대해 다 얘기해주었다. “수고했어. 손보미 쪽은 계속 주시하고 있어. 벼랑 끝에 몰리게 되면 아버지를 찾아가겠지.”“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후, 30분이 지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곧 임원진 회의가 시작됩니다.”도아린은 마음에 든 시나리오를 몇 개 집어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뜻밖에도 배건후가 연성 지사의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녀는 담담하게 그를 한 번 훑어보고는 곧장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어느 날 갑자기 낙하산으로 이사 자리에 오게 된 도아린을 향해 사람들은 겉으로는 예의 바르게 행동하였지만 사실 뒤로는 여전히 불만이 많았다. 때문에 그녀가 처음 주최하는 회의에 거의 절반이 결석하였다. 그녀는 회의실을 한번 둘러보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희정 씨, 결석자 명단 체크하세요. 회의 시작하죠.”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에도 절반 이상이 도아린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그녀가 웃음거리가 되는 걸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회의가 시작된 후, 사람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전혀 도아린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탁.마이크가 언제 켜졌는지 스피커를 통해 파일이 탁자에 던져지는 소리가 나자 사람들은 몸을 살짝 떨었다. 이때, 배건후가 고개를 들고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이사님, 우리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도아린은 피식 웃었다.“확실합니까? 올해 그쪽이 투자한 예능은 시청률이 모두 다 바닥났어요. 초등학생도 이렇게 손해 보는 선택은 하지 않을 겁니다.”도아린에게 지적당한 사람은 순식간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녀 또한 아직은 확실한 실적이 없기 때문에 더는 뭐라 할 수가 없었다.“당신이 투자한 예능은 반응이
도아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예를 들면요? 꽃보다 남자의 F4 같은 거요? 그건 명백한 집단 왕따라고요.”정상적인 사람이면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온갖 굴욕과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결국 상대방을 사랑하게 된다고?머리에 문제가 있거나 상대방의 돈이 탐나서 그런 거겠지.내가 널 좋아하는 걸 영광으로 여겨라 뭐 이런 건가? 이건 가스라이팅이잖아.도아린은 상대방의 손에 들려 있는 대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그 시나리오는 누군가의 평범한 삶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오랫동안 주변 사람들의 괴롭힘에 상처투성이가 된 주인공이 결국은 모든 걸 깨닫고 진정한 자신을 되찾아가는 스토리예요. 전 이런 스토리를 사람들한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은 구속을 받고 있어요.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여론을 위해...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격앙된 연설에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프로젝트를 받은 사람들은 또 감히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녀는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내 그녀는 또 다른 시나리오와 예능의 관전 포인트를 자세히 얘기했다.회의가 끝나갈 무렵, 주진모가 눈을 떴다. 왜 아직도 회의가 끝나지 않았냐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도 이사가 이제 막 이 업계에 들어왔으니 열정적인 건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시장의 수요도 고려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투표를 하는 게 어떠한가요? 이 프로젝트를 동의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손을 들어주시죠.”말을 마친 그가 빙그레 웃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그가 손을 들지 않으면 그의 사람들도 분명히 손을 들지 않을 것이다.한편, 그녀에게 설득당한 사람들도 다들 손을 들지 않는 것을 보고 감히 손을 들지 못하였다. 한 바퀴 둘러보니 손을 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그녀는 천천히 사인펜을 꽉 움켜쥐었다.“난 동의합니다.”오른편에 앉아 있던 배건후가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JS 픽처스는 지난 2년 동안
도아린이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비서가 와서 문을 두드렸다.“배 대표님께서 오셨습니다.”거절할 틈도 없이 그가 바로 안으로 들어와 손에 있던 서류를 들어 올렸다. “공적인 일이야.”그녀도 억지를 부리지 않고 그한테 앉으라고 손짓했다.“이 연예인들은 새 프로젝트에 적합한 사람들이니 참고해.”그는 서류를 그녀의 앞에 밀어놓고서야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그의 그런 모습에 도아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배건후가 건넨 리스트 중 절반 이상이 그녀가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이미 직원들을 시켜 섭외를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오늘 회의에서 금방 프로젝트에 대해 발표한 것인데 그가 회의 중에 이리 섭외 리스트를 뽑아낼 줄은 몰랐다. 업무 능력 하나는 진짜 끝내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비록 익숙한 사업은 아니었지만 그는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충분히 공부를 한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영화의 여주인공은...서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그가 입을 열었다.“최지우는 이혼 후 삶이 완전히 바닥으로 추락했어. 몸매도 망가지고 우울증에도 시달리고 있지.”말을 멈추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를 향해 그녀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나한테 하는 말인가?이혼 후, 큰 타격을 받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여자들이 많았다. 비굴해지고 나약해지고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 성장한 한 여자의 삶을 표현하고 싶다면 최지우를 선택해. 지금 그녀의 상태는 극 중 캐릭터와 잘 어울릴 거야. 시청자들한테 최지우가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걸 보여주는 게 특수 분장보다 훨씬 더 믿음직한 일이니까.”말을 하던 그의 눈빛에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만약 최지우의 의지가 부족하다면 체중 감량이 잘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럼 성형수술의 힘을 빌려야 할 거야.”“필요 없어요.”그녀는 서류를 덮으며 입을 열었다.“최지우보다 이 기회를 소중히 여길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남자들은 우리 여자들한테 필수품이 아니에요.
다정한 그의 손길이 익숙지가 않아서 그녀는 급히 머릿결을 정리했다. “아주머니가 지현이를 잘 챙겨줬었어요.”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내비게이션을 켜고 위치를 검색하여 강재민에게 보여줬다. 약간 흥분된 그녀는 안전벨트를 당겼다가 유리창을 찔러보았다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였다.그녀의 모습에 강재민은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도아린이 도지현을 위해 마련한 집은 번화가에 위치하지는 않았지만 근처에 큰 슈퍼마켓이 있어 장보기가 매우 편리하였다.차가 막 멈추자 도아린은 안전벨트를 풀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지현아.”“누나? 누나?”방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이서가 문을 여는데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진 도아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아린 씨, 얼른 지현이 한번 봐 봐요.”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현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그녀는 가방을 버리고 집안 곳곳을 뒤졌다. 이때, 도지현이 재활실에서 나오며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나 여기 있어.”그 자리에서 굳어진 그녀는 우뚝 솟은 도지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너...”심장이 두근거리고 손가락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앞으로 다가온 그녀는 감히 그를 만지지 못하였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한 번 만지면 깨질 것만 같은 꿈일까 봐.도지현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들었고 이내 차가운 빛이 도는 금속 골격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도지현은 천천히 두 발짝 내딛다가 그녀의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너무 마음에 들어. 아직은 적응이 잘 안되지만 나중에 익숙해지면 뛸 수도 있을 거야.”도아린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남동생은 늘 밝고 씩씩한 사람이었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늘 긍정적이었다.그가 이 기계 다리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지현이라면 분명 어떻게 해서든 더 잘해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거봐요. 누나가 날 보면 운다고 했잖아요.”울컥한 목소리로 말을 하던 그가 도아린의 뒤를 쳐다보았
강재민은 그녀의 손에서 귤을 낚아챘다. 한 조각 먹더니 시큼한 귤 맛에 얼굴을 찡그리며 귤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전에 아린 씨 학교에 가서 농구 친선 경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린 씨는 상대 팀 선수들만 쳐다보더라고요.”도아린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두 사람이 이렇게 오래전부터 만난 사이라니...“그... 그래요?”“5월 7일. 여름방학 전이었죠.”정확한 날짜를 말하는 강재민의 말을 듣고 찻잔을 들려고 손을 뻗던 그녀는 허공에서 손이 굳어져 버렸다. 0507, 배건후가 그녀에게 선물한 차 번호였다. 그녀와 처음 만난 기념일이라면서 배건후가 그 번호판을 선물해 줬었다. 강재민이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당황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한 듯 강재민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아린 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리턴슛도 했는데 당신은 전혀 나한테 관심이 없더라고요. 경기가 끝나고 일부러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학교 도서관의 위치까지 물어봤었는데...”전혀 기억이 없던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목을 쓰다듬었다. “누나, 재민이 형 진짜 농구 잘해. 형이 나한테 상체 운동도 가르쳐주고 슛하는 법도 알려주고 장애인 친구들도 소개해 준 거야. 누나한테 말하지 않았던 건 형이 누나한테 깜짝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다고 해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건물에서 추락하게 된 후 더는 도아린에게 말할 기회가 없게 되었고 깨어나서는 강재민을 다시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강재민이 병실에 나타나 도아린 대신 그를 해남으로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그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도지현은 강재민을 좋아했고 인생의 멘토처럼 그를 따랐다. 두 사람 사이의 화제는 곧 농구로 이어졌고 잘 알아듣지 못했던 도아린은 잠시 앉아 있다가 아주머니를 도와 음식 정리를 하러 주방으로 향했다. “아주머니 동의도 없이 이곳으로 데려와서 죄송해요. 혹시 불편하지는 않으신지...”“아
“아린아, 나 찾았어? 의사랑 지유 상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거든... 무슨 일이야?”신지훈은 유리 너머로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바로 떠나지 않았다.도아린은 코를 긁는 손짓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물었다.“어머님, 건후 씨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갔어요?”“난 안 갔어...”주현정은 후회와 죄책감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와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을 때 주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배건후의 장례식은 이미 끝나 있었다.우정윤은 배건후가 누명을 썼다는 것과 회사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주현정에게 모두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배건후의 사망 소식을 일단 숨기고 회사를 안정시킨 후에 발표하자고 조언했다.주현정은 아들의 마지막을 보내주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수술로 다소 복구되었지만 사망 후에는 변형이 심해져서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그래서 대부분 우정윤이 나서서 처리했다.“그 말은...”도아린은 깊은숨을 쉬며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말인즉 주현정도 배건후의 시체가 온전한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우 실장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도아린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현정이 물었다.“아린아, 하고 싶은 말이 뭔데?”그녀는 조금이라도 진정하려고 다리를 움켜잡으며 말투를 조절했다.“제가 확인한 후에 말씀드릴게요.”“아린아,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스스로 잘 챙겨야 해...”“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도아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더 이상 전화를 끊지 않으면 더 이상 감정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신지훈은 차기 차 쪽으로 돌아가며 계속해서 돌아보았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쇼핑백을 안쪽으로 던졌다.차를 몰고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누가 그를 부른 것만 같이 발걸음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신지훈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차 안을 둘러
하지만 서대은은 계획한 것대로 말하지 않았다. 청룡과 주작이 반대했기 때문에 현무와 백호의 의견이 일치하더라도 상황을 바꾸기는 어려웠다.그래서 강재민은 그냥 순순히 동의하는 척하면서 더 기다려보자는 선택을 했다.서대은 때문에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서대은은 발밑에 있는 유리컵을 한번 훑어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육청아 씨, 저랑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세요?”육청아는 손에 위스키 한 잔을 들고 의자에서 내려왔다.잔을 흔들릴 때마다 얼음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아린 씨가 대은 씨를 믿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쪽 아버지 병이 갑자기 나았다는 걸 아린 씨가 알면 어떻게 될 거 같으세요?”서대은은 시선을 내리며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었다.“제 아버지의 몸으로 협박할 생각 마세요!”육청아는 혀를 차며 서대은의 모습을 비웃었다.“대은 씨 아버지가 받은 장기가 누구 것인지 알아요? 그쪽은 모르겠지만 제가 살짝 입을 열기만 해도 아린 씨는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뭐라는 거죠?”서대은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기고는 펜던트를 티셔츠 안에 숨겼다.서대은은 도청 장치를 끈 것이었다. 도아린은 이어폰을 뺐다.‘대은이 아버지가 퇴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기 이식을 받았기 때문이었어? 청아 씨말에 따르면 나랑 연관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그럴 리 없어!’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려 했지만 손끝이 너무 떨려서 그만 놓쳐버렸고 휴드폰은 미끄러져서 틈새로 떨어졌다.도아린이 몸을 숙여 휴대폰을 주울 때,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면서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정말 세상이 넓어서 그런지 별 사람이 있더라고... 상황만 괜찮다면 내가 본때를 보여줄 텐데!”“신 대표님!”도아린의 목소리에 신지훈이 뒤를 돌아보았다.해남시 쇼핑몰 지하 주차장에서 도아린을 만날 줄 몰랐는지 그는 잠시 멈칫하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도아린 대표를 만났어. 다음
꽃 모양으로 된 테이블에 네 개 조직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는 ‘라윤주’의 자리였다.도아린은 서대은의 오른쪽에 앉았고 옆에는 현무 조직의 강재민과 육청아가 있었다.육청아는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가끔 그녀를 힐끗히 쳐다봤다. 마스크를 통해서도 그녀의 질투와 혐오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마주 앉은 청룡과 ‘라윤주’는 오랜 친구였다. 온라인에서의 대화를 나눌 때는 익숙한 패턴이었지만 만나게 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아현’이라는 이름으로 비밀조직 LY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네 명의 최고 책임자들을 만났었다. 그때 청룡은 지금과 다른 느낌이었지만 말이다.청룡은 그녀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 듯했다.“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인데 이제 새로운 책임자를 뽑아야 되지 않나요?”백호가 청룡을 보며 말했다.“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청룡은 도아린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제안하고 싶어요.”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유럽식 더블브레스트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그는 여전한 옷차림에 여전한 목소리였지만 도아린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3년을 기다렸어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죠?”백호는 주작을 보며 말했다.“그쪽 의견은 어때요?”주작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부드럽게 말했다.“다들 알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당연히 ‘라윤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서대은의 대답은 이전에 육청아와 약속했던 것과 달랐다. 그녀가 살짝 움직이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강재민이 책상 아래서 그녀의 발을 차며 입을 다물게 했다.육청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노려보았다.백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튕기며 강재민을 바라봤다.“현무 쪽 의견은 어때요?”강재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바꾸는 건 명분도 없고 순서도 맞지 않으니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
그녀는 갑자기 육하경이 차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면 집에도 분명히 설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도아린은 급히 일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빌라 안에 핀홀카메라랑 도청 장치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말이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강재민이 문을 두드렸다.“아린 씨, 쉬고 있어요?”“아직이요.”도아린은 문을 열며 잠옷을 들고 있는 손을 보여주었다. 마치 갈아입으려는 모습이었다.“무슨 일이죠?”“육하경 그 자식이 방에 핀홀카메라를 설치했어요.”강재민은 손에 뜯어낸 장비를 들고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제가 방을 확인해 볼게요!”도아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뭐라고요?”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강재민은 핸드폰에 설치되어 있는 앱으로 벽을 점검하고 콘센트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화장실과 드레스룸도 꼼꼼히 점검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며 말했다.“아린 씨 방에는 없어요.”도아린은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처음 하경 씨를 만났을 때, 하경 씨는 도둑 잡는 걸 도와주고 있었는데 제가 하경 씨를 도둑으로 오해했었어요. 하경 씨는 좋은 일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니까 결론은 하경 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그럼 아린 씨는 제가 자작극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강재민은 자신이 육하경에게 속았다고 느꼈다. 일부러 핀홀카메라를 발견하게 내버려두고 도아린에게 고자질하도록 유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도아린에게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냥 재민 씨가 오해한 걸 수도 있다는 거죠.”“저는 오늘 하루 종일 아린 씨와 함께 있었어요. 이런 걸 할 시간이 없었다고요!”강재민의 손에 들린 장비가 증거였다.도아린은 그것을 한 번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그냥 하경 씨가 한 거라고 칩시다. 별일 없으면 저는 샤워하러 가야겠어요.”‘그냥이라니 무슨 뜻이지? 그래도 여전히 내가 의심스러운 건가? 분명히 육하경 그
“미안해요. 주 대표님과 약속을 했어서 말할 수 없어요.”강재민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알겠다고 했다. 그녀의 대답을 받아들인 듯했다.도아린이 휴대폰을 꺼내서 일북에게 연락했다.“일 끝나면 도씨 가문 옛날 본가로 와. 내가 도착하면 위치 보내줄게. 택시 타고 와.”“알겠습니다!”일북은 간단하고 명확하게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육하경에게 다시 연락했다.“옛날 집 말이에요. 열쇠 바꿨어요?”“도어락으로 바꿨고요. 비밀번호는 아린 씨 생일로 했어요.”육하경은 부드럽게 말했다.“간단하게 리모델링했는데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으면 제가 다시 손볼게요!”“괜찮아요. 제가 필요한 건 재민 씨가 해결해 줄 거예요.”그녀는 일부러 육하경 앞에서 강재민을 언급하고 강재민 앞에서 육하경을 칭찬했다.“하경 씨 너무 친절하시네요. 이건 단순히 리모델링이 아니라 완전 새로 꾸민 거잖아요! 가구도 다 바뀌었고... 모두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이전에 도정국이 살던 침실은 도하린의 방으로 리모델링되었고 옆 객실은 벽을 허물어 한쪽은 옷장, 나머지 한쪽은 작업실로 만들었다.옷장 안에는 일상적인 옷, 액세서리, 신발, 가방이 준비되어 있었고 작업실에는 그녀가 필요한 테이블, 모델, 다리미, 다양한 실크들이 벽에 정리되어 있었다.“하경 씨가 세인트존스 호텔만 관리한다는 게 시간이 너무 아깝네요...”도아린은 둘러보며 감탄했다.“하경 씨를 모건 그룹으로 데려오는 건 어때요?”“육씨 가문 사람이에요.”강재민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 뒤를 따랐다.도아린은 뒤를 돌아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육민재 씨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같은데요?”강재민의 눈빛이 위험하게 좁아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육씨 가문 사람들은 너무 야망이 커요. 하경 씨를 모건 그룹에 보내면 회사가 육씨가문한테 먹혀버리지 않겠어요?”“야망이 큰 건 육청아죠.”도아린은 차갑게 웃으며 강재민의 표정이 변하는 걸 봤다. 원래 독하던 눈빛에서 살기 서린 눈빛으
도아린이 말을 마치자 강재민은 금세 기뻐하며 억누를 수 없이 즐거운 표정을 드러냈다.반면 맞은편에 있던 신지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주먹을 쥐고 손가락 마디를 소리 나게 꺾으며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로 직원에게 말했다.“들으셨잖아요? 빨리 처리해 주세요.”그의 차가운 포스에 겁을 먹은 직원은 알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집으로 가려던 길에 강재민은 한술 더 떠서 말했다.“아린 씨, 저 호텔에서 자기 싫어요. 집에 가서 지낼 생각이면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 겸사겸사 아린 씨가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도 보고 싶고요.”“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경호원분도 집에서 자잖아요. 저도 절대 규칙 어기지 않을게요.”“도 대표님.”신지훈이 뒤에서 따라오며, 다소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비록 이혼했다고 해도 배 대표님은 본인 명의의 지분과 자산을 전부 도 대표님에게 넘긴 사람이에요. 감정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배 대표님이 병에 걸린 와중에 배 대표님이 준 돈으로 다른 남자를 먹여 살리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그 말에 도아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그녀는 신지훈을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신 대표님,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 건후 씨가 지분과 자산을 저한테 준 건 자발적인 결정이에요. 제게 준 이상 제가 어떻게 쓰든 제 권리고요. 게다가 사고 나기 전부터 건후 씨는 제가 재민 씨와 사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전부 제게 줬다는 건 제가 재민 씨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걱정됐던 거겠죠. 이렇게까지 저를 아껴주는데 저도 건후 씨가 편히 요양할 수 있도록 재민 씨와 행복하게 살아야죠!”도아린에게 반박당하자 신지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는 턱을 꽉 깨물고 강재민을 조롱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보아하니 강재민 씨는 남의 돈으로 사는 게 익숙한 사람이군요. 실례했습니다!”강재민은 원래 반박하려 했지만 신지훈의 기색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오히려 능청스럽게 말했다.“제 외모가 아린 씨 이상형이라서
“집을 남겨둔 게 맞는 선택이었네요!”도아린이 반응하기도 전에 육하경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자기 집에서 사는 게 호텔보다 편하고 안전하잖아요.”순간, 도아린은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애초에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하고 있어서 집과 차를 남겨뒀다는 건가? 오늘 있었던 모든 일까지 다 계획한 것이었을까?’에스컬레이터에 손을 올려둔 도아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심장도 조여드는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육하경에게 말했다.“그것도 맞네요. 그러니까 제 차도 돌려줘요. 괜히 새로 사면 해남으로 돌아갈 때 다시 팔아야 되잖아요..”고개를 돌려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본 강재민의 눈빛에는 질투가 가득했다.마침 에스컬레이터를 다 내려왔고 그는 다시 도아린을 품 안에 가뒀다.“육하경 씨, 그럼 우린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육하경은 도아린을 향해 옅게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주말에 차량 정비 예약해 놨어요. 그때 다시 연락해요.”“그래요.”도아린이 차 키를 받아들였다.강재민은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도아린이 자신의 손을 살짝 쥐는 걸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육하경의 모습이 쇼핑몰 안으로 사라지자 강재민은 불만스럽게 말했다.“제가 차 사줄게요. 해남으로 돌아갈 때면 사람을 시켜서 가져가게 하면 돼요.”“괜찮아요.”“괜찮긴 뭐가 괜찮아요.”강재민이 단호하게 말했다.“내 여자는 남이 베푸는 거 받을 필요 없거든요.”그 말을 들은 도아린은 그저 코를 문지를 뿐, 별다른 해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강재민에게 이끌려 옷 몇 벌을 사고 나왔다.“이 차를 회사로 몰고 가세요. 전 아린 씨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다가 올게요.”강재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북에게 차를 가져가라는 신호를 줬다.일북은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절하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그녀는 차 키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차는 전에 육하경 씨가 타던 거야.
“저기 있는 공룡 캐릭터가 가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도아린이 농구대와 가장 가까운 인형뽑기 기계를 바라보았다.“한번 해보죠.”두 사람은 각각 게임 코인을 바꿨다.도아린은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면서 누가 자신을 시험하는 건지 판단하려 했다.강재민이 연성까지 찾아온 것, 그리고 육하경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우연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만약 강재민이 그저 배건후를 없애려 했다면 이렇게까지 큰 판을 짤 필요가 없었다. 3년을 기다려 배건후의 집안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육하경은 그녀의 USB를 몰래 본 적이 있었으니 분명 배건후의 적이었지만 배건후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알 수 없었다.‘반대로 생각해 보면 배건후가 살아 있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지?’‘재민 씨는 내가 건후 씨랑 다시 이어지는 걸 두려워했으니 당연히 원하지 않겠지. 그러면 하경 씨는? 목적을 알 수 없어서 더 무서워.’도아린은 육하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신경이 인형 뽑기 기계에 쏠려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인형을 집었지만 떨어뜨리고 말았다.“하...”육하경이 한숨을 쉬며 다시 게임 코인을 넣었다.“나이스!”그 소리에 도아린은 정신을 차렸다. 강재민을 보자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이었다.그는 빨리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정말 대단해요!”도아린은 강재민 옆으로 가서 그가 들고 있던 농구공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골대에 들어가지 않았다.“이렇게 던져야 해요. 손목에 힘을 주고요.”강재민이 도아린의 뒤에 서서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 쥐고 그녀를 품 안에 가뒀다.“그대로 던져요!”도아린은 그의 말대로 손끝의 힘을 모아 공을 던졌다. 공은 링을 맞고 한 바퀴 돌더니 결국 골대를 통과했다.“들어갔어요! 제가 넣었다고요!”도아린은 흥분해서 소리쳤다.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육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했다.그의
“괜찮으세요?”그 남자의 목소리는 배건후와 똑같았지만 생김새는 전혀 닮지 않았다.도아린의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괜찮아요! 미안해요. 슛 던지는데 제가 방해했네요.”도아린이 쑥스럽게 웃으며 사람들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아린 씨!”육하경이 그녀를 찾아왔다.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그는 주변을 둘러본 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혼자 나왔어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어요?”“아뇨.”도아린은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너무 오래 걸리길래 그냥 나와봤어요.”육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미안해요. 괜히 다툴 게 아니라 그냥 재민 씨가 고른 보호대로 샀을 걸 그랬네요.”“아린 씨!”강재민도 그녀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엉덩이 보호대를 들고 있었다.“괜찮아요?”“괜찮아요. 얼른 스케이트 타러 가요.”도아린은 보호대를 받아 허리에 찼다.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하자 두 남자는 또다시 경쟁을 벌였다.누가 도아린을 가르칠지 다투면서 각자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한 명은 앞으로 돌고, 다른 한 명은 뒤로 돌면서 묘기를 펼쳤다.하지만 도아린은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느라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날 밤 양식장에서 만난 남자, 그리고 방금 만난 남자, 두 사람 모두 체형이 배건후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단순히 체형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같았다. 게다가 농구를 하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될 정도였다.‘건후 씨가 정말 죽었다면 왜 계속해서 날 시험하는 걸까?’다른 사람들은 다들 그녀가 주현정과 함께 병문안을 가서 배건후를 확인한 줄로 알았다.그 병실에 있는 사람이 정말 배건후였다면 도아린이 그를 닮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그렇다면 그들은 그녀의 반응을 통해 배건후가 정말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도아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그녀의 반응으로 인해 상대는 이미 배건후가 병원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