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 들어서자 배석준은 김지민을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김지민은 고통을 참은 채 죽을 따르고는 냄새를 맡더니 말했다.“이 죽은 가게에서 파는 건데 보기 좋게 하려고 알칼리를 넣었어요. 자주 먹으면 몸에 좋지 않아요. 차라리 제가 직접 끓여서 가져다줄게요.”그녀는 일부러 배지유의 나쁜 점을 말하지 않고 배석준이 자신에게 더 미안해하게 했다.배석준은 천천히 죽을 먹으며 이따금 그녀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갑자기 물었다.“너는 도아린을 어떻게 생각해?”김지민은 그가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라 잠시 놀랐다가 고개를 숙였다.적의 적은 친구다. 잠시 생각을 마친 그녀가 말했다.“저는 도아린과 많이 접촉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도아린이 배 대표님과 이혼한 일에 대해 생각해보면 대표님이 지나친 부분이 있었는데도 그 부분을 빌미 삼아 대표님의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지는 않았잖아요. 이런 면에서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그건 건후가 잘해줬기 때문이야!”배석준은 차갑게 웃으며 계속 죽을 먹었다....진옥경은 돌아온 딸이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을 보고 변슬기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기회가 되면 그 아이를 불러서 밥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외할머니, 손은 괜찮으세요?”안민아는 외할머니 곁에 다가가서 물었다.“의사 말로는 별문제 없다고 해. 아마 말단신경염 같은 거라서 이틀 정도 약을 먹고 지켜보면 된다고 하더라.”“외할머니, 제가 손을 마사지해줄게요.”안민아는 적당한 힘으로 차화영의 팔을 주물러주었고 차화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외손녀가 친손녀보다 훨씬 났다. 그 애는 볼 때마다 자신을 화나게만 한다.“민아야, 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너를 위해 혼수를 많이 받아서 네가 당당하게 강씨 가문에 시집가게 할 거야!”“외할머니, 사실 삼촌, 숙모 그리고 사촌 오빠들은 다 저에게 잘해줘요. 예전에 옷이랑 액세서리도 사주셨고 절대 부족하지 않게 해줬어요.”
차화영은 멈칫했다.안민아가 가진 것을 도아린에게도 똑같이 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진씨 가문이 부유하므로 상관없었다. 도아린과 안민아가 가진 것이 같아야 한다면 혼수도 반드시 같아야 한다.“그게 맞아!” 차화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경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민아가 진씨 가문에서 몇 년 동안 했던 쇼핑 리스트는 제가 다 보관해두었어요. 그 당시 물가랑 비교해서 계산하면 최소 10억 원은 될 거예요.”안민아는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씨 가문의 돈을 이렇게나 많이 썼다고?그녀는 학원을 몇 개 들고 말 두 마리를 키우고 연회를 몇 번 참가하면서 준비물을 샀고... 10억뿐이 아닌 듯했다.하지만 그녀는 배운 게 있었고 쌓게 된 인맥은 금전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설령 도아린에게 10억을 준다 해도 그녀는 손해 보지 않았다.진옥경과 차화영이 반대하지 않자 진경수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희가 투자한 감정은 금액으로 측정할 수 없지만 대충 10억이라고 가정하면 모두 20억을 세은이한테 보상해야 해요.”차화영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20억이라니 차라리 이 돈을 민아의 혼수로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도아린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까운 돈이다.“이건 모두 진씨 가문의 장부예요. 이제 안씨 가문 쪽을 계산해봅시다...” 진경수는 가정부에게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하며 계속 말했다. “안민아의 학비와 생활비는 모두 진씨 가문에서 내줬어요. 안민아는 안씨 가문의 친딸이니까, 고모와 고모부의 감정이 우리보다 깊을 거예요. 그러니 대충 20억이라고 가정합시다. 고모가 이 돈을 세은이한테 준다면 앞으로 우리는 공평하게 대할 것입니다.”“내가 왜 그 애한테 돈을 줘야 해!”진옥경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돈이 있다면 딸한테 주지 왜 그 애한테 주겠는가?진경수는 차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공평하게 한다'는 뜻은 왕가도 똑같이 해야 한다는 거죠. 왜 진씨 가문만 그렇게 하고 안씨 가문은 안 해도 되는 거죠? 지금 화두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요.”“미쳤군!” 차화영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자 안민아는 깜짝 놀랐다.차화영은 서둘러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일은 민아가 물어보기 어려운 일이잖아. 엄마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거야!”안민아는 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차화영은 얼굴을 찡그리고 말했다.“너희는 딸이 민아 하나잖아. 데릴사위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은 진심을 다 보여야지!”“알겠어요.”진옥경은 도아린을 쏘아보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때 가정부가 와서 저녁이 준비되었다고 말하자 가족들은 각자 다른 생각에 잠긴 채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했다.다음 날, 손보미는 예능 인터뷰 프로그램 팀에 일찍 도착했다. 그녀는 백스테이지에서 화장을 받으면서 비서에게 진행자와 인터뷰할 내용을 맞혀보라고 말했다.비서가 돌아와서 회사에서 그녀를 위해 준비한 매니저와 이미 맞춰보았다고 전달했다.“김지민이 감히 날 무시하고 내 전화를 안 받다니!” 손보미가 화를 내며 말했다.매번 그녀가 프로그램에 나갈 때마다 김지민은 프로그램 팀에 어떤 질문은 절대 하지 말고 어떤 질문은 간접적으로 하여도 된다고 귀띔을 해준다.시청률을 위해 진행자는 기본적으로 팬들이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해 물어보고는 한다. 설사 배건후를 이름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팬들이 그를 대입해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송민혁에게 사극 드라마에서 쫓겨난 이후, 그녀는 일자리를 잃었고 회사는 그녀를 숨기고 있었다.이번에 임시로 배정된 매니저는 그녀가 무엇을 홍보하고 싶어 하고 무엇을 피하고 싶어 하는지 알 리가 없다!“악, 내 머리카락을 당겼잖아!”손보미가 갑자기 밀치자 화장품이 떨어져 바닥에 뒹굴었다.손보미는 빠르게 발을 빼며 말했다.“내 구두를 더럽히지 마! 브랜드 측에서 협찬을 취소하면 너한테 책임을 물을 거야!”메이크업 스태프는 애써 서러움을 참으며 여러 번 사과하고 계속해서 메이크업을 해주었다.손보미는 이 프로그램이 시청률이 높은 걸 알았기에 계
“성장 과정에 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나요? 어린 시절부터 보육원에서 자라게 된 건가요, 아니면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셨나요?”손보미는 비서 쪽을 바라보았다.비서는 서둘러 작은 화이트보드를 들어 진행자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다른 질문을 해 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진행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질문을 바꿨다.“보미 씨는 한때 한 보육원을 위해 홍보를 했었죠. 그 후, 그 보육원이 수속절차가 부족했고 불법 운영 혐의로 폐쇄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팬들이 보육원을 위해 많은 자선 활동을 했었는데 팬들과 텔레비전 앞의 시청자들에게 할 말이 있나요?”손보미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할 뻔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비서를 바라보았다.비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화이트보드를 들어 올렸지만, 이번에는 진행자가 질문을 바꾸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손보미는 시선을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에서 비웃음을 보아낼 수 있었다.이 모든 건 그녀의 계획이었다.그녀는 자신이 망가진 모습을 보려는 것이었다.손보미는 주먹을 꽉 쥐었고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느껴지는 통증에 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혔다.“저는 그 비를 맞아본 사람으로서 그 아이들에게 우산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그 아이들이 너무 안타깝고 아이들의 삶에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확인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 부분은 제 불찰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한 번 실수했다고 해서 선행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조금씩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그 아이들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 믿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도아린을 향해 턱을 살짝 들어 보였다.보육원에서 일어난 더러운 일은 그녀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면 꿈을 깨는 게 좋을 것이다.진행자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질문을 이어갔지만, 치명적인 질문은 아니었고 손보미는 중요한 부분을 피하며 답을 잘 해냈다.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진행자는 카드를 내려놓았다.“오늘은 아마
“도아린! 당신이 사람을 시켜 내 어머니를 사칭하게 해서 내 명예를 훼손하려는 거지!”도아린은 무대와 몇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고 손보미가 그녀를 향해 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가려고 하자 직원들이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붙잡았다.손보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의자에 제압당했고 현장의 관객들과 함께 대형 스크린을 계속 보게 되었다.“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기술도 없고 아르바이트로는 전혀 돈을 벌 수 없었죠. 두 번의 도박으로 다 날려버렸어요. 그러다 보미의 곁에 아이들이 잘 모인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아이들을 사탕으로 유인해서 팔았죠. 남자아이는 2000만 원이고 여자아이는 별로 값이 가지 않아 많이 받아봤자 400만 원 정도였어요. 그 후 보미가 자라서 아이들을 유인할 수 없게 되자 저는 보미를 보육원 앞에 버렸어요. 보미는 영리한 아이였기에 만약 돈 많은 사람이 입양하게 되면 우리도 같이 잘 살 수 있었을 거예요... 그 율이라는 아이를 되찾아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잘살고 있었을 거예요!”손보미는 입술을 물어뜯어 피가 나기 시작했다.그녀는 눈을 부라리며 대형 스크린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았다. 죽도록 하춘녀의 입을 막고 싶었다.그녀는 하춘녀에게 밖으로 꺼내줄 테니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인제 와서 왜 옛날이야기들을 끄집어내서 이런 난리를 치는 건가? 목숨을 다 내놓은 건가 말이다. 하춘녀는 화면 밖의 손보미가 거의 미칠 지경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녀는 그저 빨리 해방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하춘녀는 방에서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소처럼 일했고 돼지보다도 못 먹고 지냈다.‘자백하면 형량을 줄여준다’라는 말을 듣고 그녀는 모든 것을 탈탈 털어놨다.손보미는 사람들을 잘 다루는 성격이라 보육원에 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입양되었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작은 일로 집에서 쫓겨났고 그때 입양해 갔던 집의 오빠는 정이 많은 사람이라서 계속해서 손보미를 학교에 보내 주었으나 그녀가 대학에 다닐 무렵 세상을 떠났다.“당신은 손보미 씨
배지유는 배건후에게 김지민을 내쫓으라면서 아버지가 또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녀는 손보미한테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가겠다고 했다.프로그램은 중단되었고 손보미는 접견실에 앉아있었다.그녀는 차가운 손발을 붙잡고 진정하려 애썼지만, 몸이 떨려서 통제할 수 없었다.하춘녀가 자신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자신은 절대 감옥에 가선 안 된다. 절대!곧 배건후와 결혼해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모님이 되고 부유한 가문에서 풍족한 삶을 살게 될 텐데 한순간에 이 모든 걸 잃을 순 없다.손보미는 하춘녀가 무엇을 말했는지 하나하나 되새겨봤다. 무슨 말을 해야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당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엉망이 되어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다.아! 손보미는 자신의 머리를 세게 쳤고 손가락을 물면서 자신을 진정시켰다.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손보미는 바로 몸에 긴장을 불어넣으며 기대를 품고 그쪽을 바라봤다.배건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건후 씨!” 손보미가 울먹이며 달려가서 그에게 안기려 했다.“도아린은 너무 악랄해.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걸 원하지 않으면 직접 말했어야지. 내 어머니를 사칭해서 나를 모함하고 내 출신까지 꾸며냈어!”배건후는 손에 담배를 쥐고 팔꿈치를 굽혀서 그녀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다.손보미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밖에는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고 모두 그 장면을 목격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문을 닫았다.“건후 씨, 내가 도아린이 날 괴롭힌다고 했잖아. 아직도 안 믿어? 도아린이 나를 망가뜨리려고 일부러 이 프로그램을 계획한 거야! 내 계약서 가져와. 난 더는 도아린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싶지 않아.”배건후는 소파에 앉으며 재떨이를 당겨 담배 재를 털어냈다.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담담했다. “내가 말했잖아. 도아린이랑 엮이지 말라고.”“내가 도아린을 괴롭혔어? 내가 도아린을 괴롭힌 거야?”손보미는 점점 더 큰 목소리로 말하다가 밖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까 봐
그녀는 날카로운 말투로 배건후의 약점을 계속 찔렀다.매번 고성만을 언급할 때면 배건후는 그녀를 용서해주곤 했고 언제나 효과적이었다.하지만 이번에 소파에 앉아있는 배건후는 표정이 어두웠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아니, 그는 반응했다.담배가 다 타버려 손가락을 태우고 나서야 남자의 눈빛이 움직였다.“고성만은 네 방패가 아니야.”“하지만 그 사람은 내 오빠야!” 손보미는 울먹이며 말했다.“내 양부모는 아들이 한 명뿐이었어. 당신이 계획대로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성만 오빠는 신분을 드러내게 된 거야! 당신은 성만 오빠한테 목숨을 빚졌어!”손보미는 배건후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고 고개를 들어 애정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건후 씨, 당신 상처에 소금을 뿌리려는 게 아니야. 당신이 나를 감옥에 가는 일을 피하게만 도와준다면 나는 이후로 당신 말만 듣고 다시는 당신한테 결혼하자고 강요하지 않을게. 나를 한 번만 도와줘, 성만 오빠를 봐서라도...”그녀는 배건후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손끝이 닿기 전에 배건후가 손을 뺐다.“한 번만 시도해볼 수 있어. 만약 경찰서에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나는 당신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손보미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사람을 보내서 엄마한테 말을 전할 거야. 엄마한테 그 말을 부인하라고 하고 그냥 관심을 끌려고 거짓말했다고 말하라고 할 거야!”배건후는 육청아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에게 인맥을 통해 손보미를 먼저 빼내도록 부탁했다.30분 후,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스태프들이 모두 떠났다.손보미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배건후가 고성만에게 죄책감을 느끼기만 한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그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두 사람이 사무실 구역으로 갔을 때, 멀리서 도아린이 진행자와 감독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평소처럼 차분했고 당당했고 움직일 때마다 강한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배건후는 눈을 떼지 못했다.이번 프로그램은 형편없게 되어 사과의 표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도아린은 점점 더 밝은 웃음을 띠었다.세 사람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도아린이 먼저 나갔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북이 바로 따라가 배건후가 도아린과 가까워지지 않도록 거리를 두었다.문 앞에 도착하자 일남이 차를 몰고 왔다. 일북은 차 문을 열었고 도아린은 몸을 굽혀 차에 올라탔다.배건후는 몇 걸음 빠르게 다가가 손을 들어 자신의 기사를 호출했고 손보미가 차에 타기 전에 차 문을 닫았다.“너는 혼자 돌아가.”“건후 씨!”배건후의 차는 도아린이 떠나는 방향으로 따라갔다.“앞차를 따라가.”“네, 대표님.”배건후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영상은 네가 찍은 거지?”“하춘녀 씨가 자발적으로 인터뷰를 받겠다고 했어.”육하경의 목소리가 약간 피곤해 보였다.바쁜 와중에 그는 하춘녀를 인터뷰했고 프로그램에 제공된 영상은 일부에 불과했다.배건후가 오늘의 일을 덮고 싶다면 다른 언론에 영상 전체를 보낼 생각이었다.도아린이 어렵게 부탁한 일이니 반드시 제대로 처리해야 했다.“건후야, 손보미 같은 망나니를 위해서 도아린 씨를 버릴 거야? 후회하지 않겠어?”남자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을 하지 않았다.육하경은 그가 후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도 후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부 관계에 불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우정을 버리고 대담하게 도아린에게 마음을 표현했어야 했다.기회가 있을지 없을지는 상관없이 시도는 해봐야만 후회가 남지 않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배건후와의 우정을 생각했고 배지유의 일을 해결하기만 한다면 그들이 부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건후야...”“나는 문제를 피하려는 게 아니야.” 배건후는 그의 말을 끊었다. “하춘녀가 다른 말도 했을 거야. 영상을 전체 다 공개해.”“...”코를 만지고 있던 육하경의 행동이 느려졌다.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가?“손보미가 궁지에 몰리면 손강해과 연락할 거야. 손강해는 손보미의 친
“아린아, 나 찾았어? 의사랑 지유 상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거든... 무슨 일이야?”신지훈은 유리 너머로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바로 떠나지 않았다.도아린은 코를 긁는 손짓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물었다.“어머님, 건후 씨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갔어요?”“난 안 갔어...”주현정은 후회와 죄책감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와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을 때 주현정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배건후의 장례식은 이미 끝나 있었다.우정윤은 배건후가 누명을 썼다는 것과 회사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주현정에게 모두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배건후의 사망 소식을 일단 숨기고 회사를 안정시킨 후에 발표하자고 조언했다.주현정은 아들의 마지막을 보내주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수술로 다소 복구되었지만 사망 후에는 변형이 심해져서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그래서 대부분 우정윤이 나서서 처리했다.“그 말은...”도아린은 깊은숨을 쉬며 점점 더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말인즉 주현정도 배건후의 시체가 온전한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우 실장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도아린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현정이 물었다.“아린아, 하고 싶은 말이 뭔데?”그녀는 조금이라도 진정하려고 다리를 움켜잡으며 말투를 조절했다.“제가 확인한 후에 말씀드릴게요.”“아린아,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스스로 잘 챙겨야 해...”“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도아린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더 이상 전화를 끊지 않으면 더 이상 감정을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신지훈은 차기 차 쪽으로 돌아가며 계속해서 돌아보았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쇼핑백을 안쪽으로 던졌다.차를 몰고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누가 그를 부른 것만 같이 발걸음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신지훈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차 안을 둘러
하지만 서대은은 계획한 것대로 말하지 않았다. 청룡과 주작이 반대했기 때문에 현무와 백호의 의견이 일치하더라도 상황을 바꾸기는 어려웠다.그래서 강재민은 그냥 순순히 동의하는 척하면서 더 기다려보자는 선택을 했다.서대은 때문에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서대은은 발밑에 있는 유리컵을 한번 훑어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육청아 씨, 저랑 정면으로 싸울 생각이세요?”육청아는 손에 위스키 한 잔을 들고 의자에서 내려왔다.잔을 흔들릴 때마다 얼음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아린 씨가 대은 씨를 믿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쪽 아버지 병이 갑자기 나았다는 걸 아린 씨가 알면 어떻게 될 거 같으세요?”서대은은 시선을 내리며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었다.“제 아버지의 몸으로 협박할 생각 마세요!”육청아는 혀를 차며 서대은의 모습을 비웃었다.“대은 씨 아버지가 받은 장기가 누구 것인지 알아요? 그쪽은 모르겠지만 제가 살짝 입을 열기만 해도 아린 씨는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뭐라는 거죠?”서대은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기고는 펜던트를 티셔츠 안에 숨겼다.서대은은 도청 장치를 끈 것이었다. 도아린은 이어폰을 뺐다.‘대은이 아버지가 퇴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기 이식을 받았기 때문이었어? 청아 씨말에 따르면 나랑 연관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왔다.‘그럴 리 없어!’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려 했지만 손끝이 너무 떨려서 그만 놓쳐버렸고 휴드폰은 미끄러져서 틈새로 떨어졌다.도아린이 몸을 숙여 휴대폰을 주울 때, 누군가가 전화를 받으면서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정말 세상이 넓어서 그런지 별 사람이 있더라고... 상황만 괜찮다면 내가 본때를 보여줄 텐데!”“신 대표님!”도아린의 목소리에 신지훈이 뒤를 돌아보았다.해남시 쇼핑몰 지하 주차장에서 도아린을 만날 줄 몰랐는지 그는 잠시 멈칫하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도아린 대표를 만났어. 다음
꽃 모양으로 된 테이블에 네 개 조직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는 ‘라윤주’의 자리였다.도아린은 서대은의 오른쪽에 앉았고 옆에는 현무 조직의 강재민과 육청아가 있었다.육청아는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가끔 그녀를 힐끗히 쳐다봤다. 마스크를 통해서도 그녀의 질투와 혐오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마주 앉은 청룡과 ‘라윤주’는 오랜 친구였다. 온라인에서의 대화를 나눌 때는 익숙한 패턴이었지만 만나게 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아현’이라는 이름으로 비밀조직 LY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네 명의 최고 책임자들을 만났었다. 그때 청룡은 지금과 다른 느낌이었지만 말이다.청룡은 그녀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는 듯했다.“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상태인데 이제 새로운 책임자를 뽑아야 되지 않나요?”백호가 청룡을 보며 말했다.“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청룡은 도아린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제안하고 싶어요.”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유럽식 더블브레스트 코트를 입고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그는 여전한 옷차림에 여전한 목소리였지만 도아린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3년을 기다렸어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거죠?”백호는 주작을 보며 말했다.“그쪽 의견은 어때요?”주작은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부드럽게 말했다.“다들 알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당연히 ‘라윤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서대은의 대답은 이전에 육청아와 약속했던 것과 달랐다. 그녀가 살짝 움직이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강재민이 책상 아래서 그녀의 발을 차며 입을 다물게 했다.육청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노려보았다.백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손가락을 책상 위에서 튕기며 강재민을 바라봤다.“현무 쪽 의견은 어때요?”강재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바꾸는 건 명분도 없고 순서도 맞지 않으니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
그녀는 갑자기 육하경이 차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면 집에도 분명히 설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도아린은 급히 일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빌라 안에 핀홀카메라랑 도청 장치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말이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강재민이 문을 두드렸다.“아린 씨, 쉬고 있어요?”“아직이요.”도아린은 문을 열며 잠옷을 들고 있는 손을 보여주었다. 마치 갈아입으려는 모습이었다.“무슨 일이죠?”“육하경 그 자식이 방에 핀홀카메라를 설치했어요.”강재민은 손에 뜯어낸 장비를 들고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제가 방을 확인해 볼게요!”도아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뭐라고요?”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강재민은 핸드폰에 설치되어 있는 앱으로 벽을 점검하고 콘센트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화장실과 드레스룸도 꼼꼼히 점검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며 말했다.“아린 씨 방에는 없어요.”도아린은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처음 하경 씨를 만났을 때, 하경 씨는 도둑 잡는 걸 도와주고 있었는데 제가 하경 씨를 도둑으로 오해했었어요. 하경 씨는 좋은 일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니까 결론은 하경 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그럼 아린 씨는 제가 자작극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강재민은 자신이 육하경에게 속았다고 느꼈다. 일부러 핀홀카메라를 발견하게 내버려두고 도아린에게 고자질하도록 유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도아린에게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냥 재민 씨가 오해한 걸 수도 있다는 거죠.”“저는 오늘 하루 종일 아린 씨와 함께 있었어요. 이런 걸 할 시간이 없었다고요!”강재민의 손에 들린 장비가 증거였다.도아린은 그것을 한 번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그냥 하경 씨가 한 거라고 칩시다. 별일 없으면 저는 샤워하러 가야겠어요.”‘그냥이라니 무슨 뜻이지? 그래도 여전히 내가 의심스러운 건가? 분명히 육하경 그
“미안해요. 주 대표님과 약속을 했어서 말할 수 없어요.”강재민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알겠다고 했다. 그녀의 대답을 받아들인 듯했다.도아린이 휴대폰을 꺼내서 일북에게 연락했다.“일 끝나면 도씨 가문 옛날 본가로 와. 내가 도착하면 위치 보내줄게. 택시 타고 와.”“알겠습니다!”일북은 간단하고 명확하게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육하경에게 다시 연락했다.“옛날 집 말이에요. 열쇠 바꿨어요?”“도어락으로 바꿨고요. 비밀번호는 아린 씨 생일로 했어요.”육하경은 부드럽게 말했다.“간단하게 리모델링했는데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으면 제가 다시 손볼게요!”“괜찮아요. 제가 필요한 건 재민 씨가 해결해 줄 거예요.”그녀는 일부러 육하경 앞에서 강재민을 언급하고 강재민 앞에서 육하경을 칭찬했다.“하경 씨 너무 친절하시네요. 이건 단순히 리모델링이 아니라 완전 새로 꾸민 거잖아요! 가구도 다 바뀌었고... 모두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이전에 도정국이 살던 침실은 도하린의 방으로 리모델링되었고 옆 객실은 벽을 허물어 한쪽은 옷장, 나머지 한쪽은 작업실로 만들었다.옷장 안에는 일상적인 옷, 액세서리, 신발, 가방이 준비되어 있었고 작업실에는 그녀가 필요한 테이블, 모델, 다리미, 다양한 실크들이 벽에 정리되어 있었다.“하경 씨가 세인트존스 호텔만 관리한다는 게 시간이 너무 아깝네요...”도아린은 둘러보며 감탄했다.“하경 씨를 모건 그룹으로 데려오는 건 어때요?”“육씨 가문 사람이에요.”강재민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 뒤를 따랐다.도아린은 뒤를 돌아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육민재 씨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같은데요?”강재민의 눈빛이 위험하게 좁아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육씨 가문 사람들은 너무 야망이 커요. 하경 씨를 모건 그룹에 보내면 회사가 육씨가문한테 먹혀버리지 않겠어요?”“야망이 큰 건 육청아죠.”도아린은 차갑게 웃으며 강재민의 표정이 변하는 걸 봤다. 원래 독하던 눈빛에서 살기 서린 눈빛으
도아린이 말을 마치자 강재민은 금세 기뻐하며 억누를 수 없이 즐거운 표정을 드러냈다.반면 맞은편에 있던 신지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주먹을 쥐고 손가락 마디를 소리 나게 꺾으며 한층 차가워진 목소리로 직원에게 말했다.“들으셨잖아요? 빨리 처리해 주세요.”그의 차가운 포스에 겁을 먹은 직원은 알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집으로 가려던 길에 강재민은 한술 더 떠서 말했다.“아린 씨, 저 호텔에서 자기 싫어요. 집에 가서 지낼 생각이면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 겸사겸사 아린 씨가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도 보고 싶고요.”“그건 좀 어렵지 않을까요?”“경호원분도 집에서 자잖아요. 저도 절대 규칙 어기지 않을게요.”“도 대표님.”신지훈이 뒤에서 따라오며, 다소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비록 이혼했다고 해도 배 대표님은 본인 명의의 지분과 자산을 전부 도 대표님에게 넘긴 사람이에요. 감정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배 대표님이 병에 걸린 와중에 배 대표님이 준 돈으로 다른 남자를 먹여 살리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그 말에 도아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그녀는 신지훈을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신 대표님, 그 말은 틀린 것 같네요. 건후 씨가 지분과 자산을 저한테 준 건 자발적인 결정이에요. 제게 준 이상 제가 어떻게 쓰든 제 권리고요. 게다가 사고 나기 전부터 건후 씨는 제가 재민 씨와 사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전부 제게 줬다는 건 제가 재민 씨와 잘 지내지 못할까 봐 걱정됐던 거겠죠. 이렇게까지 저를 아껴주는데 저도 건후 씨가 편히 요양할 수 있도록 재민 씨와 행복하게 살아야죠!”도아린에게 반박당하자 신지훈은 가슴이 답답해졌다.그는 턱을 꽉 깨물고 강재민을 조롱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보아하니 강재민 씨는 남의 돈으로 사는 게 익숙한 사람이군요. 실례했습니다!”강재민은 원래 반박하려 했지만 신지훈의 기색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오히려 능청스럽게 말했다.“제 외모가 아린 씨 이상형이라서
“집을 남겨둔 게 맞는 선택이었네요!”도아린이 반응하기도 전에 육하경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자기 집에서 사는 게 호텔보다 편하고 안전하잖아요.”순간, 도아린은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애초에 이런 날이 올 걸 예상하고 있어서 집과 차를 남겨뒀다는 건가? 오늘 있었던 모든 일까지 다 계획한 것이었을까?’에스컬레이터에 손을 올려둔 도아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고 심장도 조여드는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육하경에게 말했다.“그것도 맞네요. 그러니까 제 차도 돌려줘요. 괜히 새로 사면 해남으로 돌아갈 때 다시 팔아야 되잖아요..”고개를 돌려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본 강재민의 눈빛에는 질투가 가득했다.마침 에스컬레이터를 다 내려왔고 그는 다시 도아린을 품 안에 가뒀다.“육하경 씨, 그럼 우린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육하경은 도아린을 향해 옅게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주말에 차량 정비 예약해 놨어요. 그때 다시 연락해요.”“그래요.”도아린이 차 키를 받아들였다.강재민은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도아린이 자신의 손을 살짝 쥐는 걸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육하경의 모습이 쇼핑몰 안으로 사라지자 강재민은 불만스럽게 말했다.“제가 차 사줄게요. 해남으로 돌아갈 때면 사람을 시켜서 가져가게 하면 돼요.”“괜찮아요.”“괜찮긴 뭐가 괜찮아요.”강재민이 단호하게 말했다.“내 여자는 남이 베푸는 거 받을 필요 없거든요.”그 말을 들은 도아린은 그저 코를 문지를 뿐, 별다른 해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강재민에게 이끌려 옷 몇 벌을 사고 나왔다.“이 차를 회사로 몰고 가세요. 전 아린 씨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다가 올게요.”강재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북에게 차를 가져가라는 신호를 줬다.일북은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절하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그녀는 차 키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차는 전에 육하경 씨가 타던 거야.
“저기 있는 공룡 캐릭터가 가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도아린이 농구대와 가장 가까운 인형뽑기 기계를 바라보았다.“한번 해보죠.”두 사람은 각각 게임 코인을 바꿨다.도아린은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면서 누가 자신을 시험하는 건지 판단하려 했다.강재민이 연성까지 찾아온 것, 그리고 육하경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우연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만약 강재민이 그저 배건후를 없애려 했다면 이렇게까지 큰 판을 짤 필요가 없었다. 3년을 기다려 배건후의 집안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육하경은 그녀의 USB를 몰래 본 적이 있었으니 분명 배건후의 적이었지만 배건후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알 수 없었다.‘반대로 생각해 보면 배건후가 살아 있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지?’‘재민 씨는 내가 건후 씨랑 다시 이어지는 걸 두려워했으니 당연히 원하지 않겠지. 그러면 하경 씨는? 목적을 알 수 없어서 더 무서워.’도아린은 육하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든 신경이 인형 뽑기 기계에 쏠려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인형을 집었지만 떨어뜨리고 말았다.“하...”육하경이 한숨을 쉬며 다시 게임 코인을 넣었다.“나이스!”그 소리에 도아린은 정신을 차렸다. 강재민을 보자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이었다.그는 빨리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정말 대단해요!”도아린은 강재민 옆으로 가서 그가 들고 있던 농구공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골대에 들어가지 않았다.“이렇게 던져야 해요. 손목에 힘을 주고요.”강재민이 도아린의 뒤에 서서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 쥐고 그녀를 품 안에 가뒀다.“그대로 던져요!”도아린은 그의 말대로 손끝의 힘을 모아 공을 던졌다. 공은 링을 맞고 한 바퀴 돌더니 결국 골대를 통과했다.“들어갔어요! 제가 넣었다고요!”도아린은 흥분해서 소리쳤다.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육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했다.그의
“괜찮으세요?”그 남자의 목소리는 배건후와 똑같았지만 생김새는 전혀 닮지 않았다.도아린의 목소리에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괜찮아요! 미안해요. 슛 던지는데 제가 방해했네요.”도아린이 쑥스럽게 웃으며 사람들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아린 씨!”육하경이 그녀를 찾아왔다.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챈 그는 주변을 둘러본 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혼자 나왔어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어요?”“아뇨.”도아린은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너무 오래 걸리길래 그냥 나와봤어요.”육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미안해요. 괜히 다툴 게 아니라 그냥 재민 씨가 고른 보호대로 샀을 걸 그랬네요.”“아린 씨!”강재민도 그녀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엉덩이 보호대를 들고 있었다.“괜찮아요?”“괜찮아요. 얼른 스케이트 타러 가요.”도아린은 보호대를 받아 허리에 찼다.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하자 두 남자는 또다시 경쟁을 벌였다.누가 도아린을 가르칠지 다투면서 각자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한 명은 앞으로 돌고, 다른 한 명은 뒤로 돌면서 묘기를 펼쳤다.하지만 도아린은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느라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날 밤 양식장에서 만난 남자, 그리고 방금 만난 남자, 두 사람 모두 체형이 배건후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단순히 체형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같았다. 게다가 농구를 하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될 정도였다.‘건후 씨가 정말 죽었다면 왜 계속해서 날 시험하는 걸까?’다른 사람들은 다들 그녀가 주현정과 함께 병문안을 가서 배건후를 확인한 줄로 알았다.그 병실에 있는 사람이 정말 배건후였다면 도아린이 그를 닮은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그렇다면 그들은 그녀의 반응을 통해 배건후가 정말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도아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그녀의 반응으로 인해 상대는 이미 배건후가 병원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