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앞으로 다가가 까치발을 들고 배건후의 귓가에 다가갔다.손보미와 안민아의 눈에 이 행동은 무척 야릇해 보였다.배건후는 도아린이 휘청거릴까 봐 손을 들어 그녀의 뒤에 대고 있었다.손보미는 화가 나서 눈이 빨개졌고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안민아에게 잡혔다.만약 도아린이 전남편과 재혼하게 된다면 자신에게서 강재민을 빼앗지 않을 것이다.도아린은 사탕이 발린 폭탄이라는 것을 배건후만 알고 있었다. 먼저 다가와 친밀한 행동을 하고 있지만,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말을 했다.“건후 씨, 월요일은 이혼 숙려 기간의 마지막 날이에요. 그때까지 구청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한테 알릴 거예요. 그해 강재희를 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걸 말이죠.”배건후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는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는 것을 제일 증오했다.전에는 강재희가 손보미와 결혼하라고 협박했고 지금은 도아린이 이혼하려고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 그것도 똑같은 일로 말이다.그는 해명하고 싶었지만 해명할 방법이 없었다.남자의 긴 눈꼬리는 분노로 하여 빨개졌다.도아린은 다시 그와 거리를 두었고 얼굴에는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쇼핑백은 다시 배건후의 손에 돌아갔다.“저는 결벽이 있어서요. 다른 사람의 손을 탔던 물건은 싫어요.”그녀는 배건후를 스쳐 지나갔고 안민아는 빠르게 따라와 배건후를 한번 쳐다보았다.도아린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그녀의 곁에 있는 남자들은 모두 멋있었다.손보미가 천천히 다가왔다.그녀는 도아린이 뭐라고 했는지는 몰랐지만, 배건후가 무척 화가 났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듯했다.“건후 씨...”손보미는 배건후의 소매를 잡았다.배건후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더니 손목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듯 힘을 세게 주었다.너무 아팠다. 손보미는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배건후가 문득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은 날카롭다 못해 한 자루의 칼 같았다.만약 눈빛
도정국은 깜짝 놀라 새된 소리를 질렀다.“그만, 그만! 전화할게요. 돈을 갖고 오라고 할게요!”빚쟁이는 턱을 쳐들며 얼른 전화하라고 눈짓했다.도정국은 강홍련에게 전화를 걸었고 한참이나 지나 전화를 받았는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강홍련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요즘 바빠요. 다 끝나면 당신 보러 갈게요.”강홍련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도정국이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홍련아, 홍련아! 빚쟁이들이 와서 빚을 독촉하고 있어. 조금만 갚아줘. 아니면 이 사람들이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대!”“정국 씨, 그런 거짓말로 저를 속이는 게 재밌어요? 제가 삼촌 집에 있으면서 유준이한테 좋은 혼사를 마련해주느라 얼마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요. 도와줄 수 없다면 저를 귀찮게나 하지 말아요!”강홍련은 전화를 끊었다.“잠깐만요, 잠깐만. 나한테 또 방법이 있어요!”빚쟁이들에게 하는 말 같지만 실은 자신에게 세뇌하는 것이었다.도정국은 중얼거리며 도아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그는 결사의 각오로 뻔뻔하게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건 우정윤이었다. 그가 전화한 이유를 말하자 우정윤이 대답했다.“배 대표님한테 빚을 갚아달라고 할 생각이면 도아린 씨가 배 대표님한테 얘기를 꺼내라고 하세요.”“아린이 전화를 안 받아. 제발 배 대표한테 얘기해줘. 많지 않아. 그저...”그는 고개를 들었고 빚쟁이가 손을 펴 보였다.“1억이면 돼!”빚쟁이가 몽둥이를 들자 도정국은 놀라서 고개를 움츠렸다. 1억이라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나았다.우정윤은 바쁘게 처리하던 일을 다 마치고 나서야 다시 대답했다.“당신을 차단했나 보네요. 사모님의 태도가 이렇게나 명확한데 제가 어찌 감히 거스르겠어요.”전화가 또 끊겼다.도정국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처음 이렇게 꽉 막힌 기분을 느껴보았다.비명이 이어지고 빚쟁이들은 욕을 퍼부으며 떠났다. 도정국은 손을 움켜잡고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손보미는 병원에 돌아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안민아는 입술을 깨물면서 도아린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직 자신을 보고 있자 다시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경쾌한 벨 소리가 들리고 안민아는 표정이 바뀌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면서 말을 더듬었다.“돌, 돌아가요. 경찰서에 안 갈 거예요.”도아린은 그녀가 전화를 끊고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보고 기사에게 떠나라고 지시했다.진씨 가문에서는 윤명희가 정원에서 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도아린이 돌아온 것을 보고 그녀는 가위를 놓고 장갑을 벗었다.“마침 잘 돌아왔어. 녹두떡이 금방 만들어져서 아직 따뜻해.”안민아는 손에 들린 쇼핑백을 흔들었다.“숙모, 언니랑 쇼핑 갔다 왔어요. 넥타이핀이 엄청 비싼데 언니가 세 개나 샀어요!”윤명희의 얼굴에는 화가 난 듯했다. 아무리 친딸이고 잃어버린 지 오래돼서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돈을 함부로 쓰면 무조건 아까울 것이다.윤명희는 화단을 나서서 도아린의 손을 잡고 불만스럽게 얘기했다.“너도 참, 돈이 무슨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야?”도아린한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함부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처음에 안민아는 몇백짜리 넥타이핀이 엄청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도아린이 보고 있던 이 브랜드가 더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작은 넥타이핀을 사려고 돈을 쓰는 것보다는 차를 사는 게 더 보기 좋았다.안민아가 뭐라고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도아린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저한테 옷과 액세서리를 그렇게 많이 사주셨고 인테리어도 새로 해주셨는데 저도 감사 인사를 해야죠.”윤명희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도아린의 등을 다독였다.“주식을 줘도 싫다, 티파니 주얼리를 준다고 해도 싫다, 아빠가 너한테 블랙 카드를 줘도 싫다고 했다며. 너한테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게 쓰는 거야!”안민아는 발아래를 보지 않고 무언가에 걸려서 비틀거리다가 고개를 돌리고 의아하게 물었다.“언니, 본인 돈이에요?”“네 언니는 공헌이 없는데, 돈을 쓰지 않겠다고 아무것도 싫다고 해.”세
이 돈은 진씨 가문한테 빌린 것이다.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다 진씨 가문과 연관된 일이었다.“LY가 정말 그렇게나 대단하다고요?”윤명희는 믿기지 않았다.실제적인 업종에 종사하지 않는 회사, 혹은 조직이 무슨 근거로 사업가들의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리고 강씨 가문의 주요 업종은 주얼리이고 안씨 가문의 주요 업종은 부동산인데 전혀 연결이 없는 상황이었다.안민아는 갑자기 도아린의 옷깃을 잡았고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나도 민아가 억울함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손실이 너무 크고 진씨 가문까지 피해를 보게 되는데 나더러 도대체 어떻게 하라고!”안준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그는 절반 정도 태우고 허리를 숙여서 담뱃재떨이에 손을 뻗으며 빠르게 도아린을 훑었다.도아린은 자신에게로 화제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녹두떡을 들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안준휘는 또 진범준을 한번 보았는데 방금까지도 도와준다고 승낙해놓고는 지금은 말이 없었다.진범준이 모른 척해도 안준휘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민아야, 내일 진씨 가문으로 가.”윤명희는 물을 따라서 도아린에게 건네고 안준휘를 보았다.“민아를 혼자 가게 한다면 그놈이 또 무슨 짓을 할까 봐 걱정되지 않아요?”“제가 어떻게 민아를 혼자 보내겠어요.”안준휘는 드디어 도아린을 보면서 말했다.“네가 민아와 함께 가야겠다. 이번에는 신경을 많이 써줘. 민아가 또 저번처럼 당하게 하지 말고.”녹두떡은 너무 말랑해서 도아린은 하마터면 뱉을 뻔했다.윤명희는 도아린이 목에 걸린 줄 알고 등을 두드려주었다.“천천히 먹어, 천천히. 목에 걸리지 말고...”안준휘는 도아린이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고 안민아를 데리고 떠났다.해남 병원에서 성대호는 병실 안에서 물건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얼른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지유야, 왜 그래! 다리 아파? 의사를 불러올게.”“의사는 필요 없어. 내 다리를 내놔. 내 다리 내놔!”배지유는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을 다 던졌다.
“제가 왜 안 그러고 싶겠어요! 지금 마음으로는 도아린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요!”배지유는 울면서 곁에 있는 이불을 내리쳤고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납작해진 이불을 쳐다보았다.“저는 지금 생리현상도 누군가가 보살펴주지 않으면 스스로 못하는데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겠어요! 다 성대호 때문이에요. 쓰레기 같은 놈, 저를 돕지 못할망정 저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려 놨어요!”“...”성대호가 문밖에서 듣고 있었다.그는 훔쳐 들을 생각이 없었지만, 배지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담뱃불을 붙이려던 성대호는 부들부들 떨면서 담배를 부러뜨려 버렸다. 손보미는 배지유의 멀쩡한 다리를 다독였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목소리를 깔고 얘기했다.“남자는 네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나무가 아니라 네가 위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야. 사다리가 부실하다면 바꾸면 돼.”배지유는 점점 울음을 멈췄고 빨갛게 부은 눈에는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손보미가 말했다.“나랑 네 오빠의 혼사는 강씨 가문에서 추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성사되지 않았어. 차라리 강씨 가문에 신경을 많이 써. 밖에 있는 저 쓸데없는 놈은 버리고.”배지유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하지만 배지유는 또 생각에 잠겼다가 움츠러든 표정을 했다.“만약 제 다리가 아직 멀쩡하다면 반드시 강씨 가문 도련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지금... 그 사람은 아마 저를 보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강씨 가문에는 남자가 또 있어.”손보미는 강홍련 모자와 강씨 가문의 관계를 얘기했고 배지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안돼요! 제가 어떻게 도아린의 사생아 동생한테 좋은 일을 시키는 꼴을 봐요!”손보미는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작게 얘기를 했고 배지유는 분노하던 표정이 점차 사그라지더니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잠시 후, 배지유는 이불을 움켜쥐고 사악한 눈빛을 했다.“보미 언니,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사람은 언니밖에 없어요!”“바보야, 나는 네 새언니야. 내가 너를 생각해주지 않으면
“지유야, 나는 너를 여동생처럼 생각하니 보살피는 건 당연한 일이야. 뭘 하고 싶으면 직접 말해도 돼. 민망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오빠는 괜찮다고 해도 내가 불편해!”배지유는 짜증 내며 얘기했다.“오빠가 나를 안아서 이리저리 옮기는데 내가 앞으로 어떻게 시집을 갈 수 있겠어!”성대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배지유는 손보미한테 나쁜 물이 들었다.“지유야, 내 말 좀 들어봐...”“안 들을래. 나 피곤해. 쉬고 싶어!”배지유는 그를 밀어냈다.“여기서 나한테 매달리지 말고 얼른 가서 성씨 가문을 다시 일으킬 생각이나 해. 만약 파산한다면 오빠는 빈털터리가 되잖아!”성대호의 눈빛에는 증오의 빛이 서렸다.그는 배지유를 위해 연성을 떠났고 가문에게 등을 돌렸다.결렬한 것은 집안의 일이기 때문에 성씨 가문은 대외적으로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하여 예전에 성씨 가문과 협력했던 사람들이 성대호의 체면을 봐주고 있었다.그러므로 성대호는 배지유를 보살피면서도 조금씩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만약 성씨 가문이 정말 파산한다면 그는 빈털터리가 될 것이고 배지유도 그를 외면할 것이다.“지유야, 걱정하지 마!”성대호는 힘을 주어 배지유의 손을 잡았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얘기했다.“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거야!”배지유는 마음속으로 무척 불쾌해했다.그때 오빠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씨 가문은 절대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지금 오빠에게 버림받은 마당에 그는 무슨 수로 성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좋은 말로 무마했다.“그래. 얼른 가서 일으켜 세워. 오빠가 성과를 낸다면 아빠랑 오빠도 오빠를 다시 보게 될 거야!”배지유는 성대호와 함께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소리를 했다.성대호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 길로 연성으로 돌아갔다....이튿날 아침, 안민아는 일부러 도아린의 앞에서 알짱거렸다.도아린은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듯 조깅을 하고 뒷마당에서 넓은 곳을 찾아 운동했다.
안민아는 우물쭈물하며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늘 반드시 도아린을 강씨 가문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니면 일이 복잡해진다.방안에서 벨 소리가 울렸고 도아린은 책상으로 가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안민아도 따라 들어갔고 불안하게 손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이유로든 먼저 도아린을 데리고 나가야 했다.“그래요, 알겠어요.”도아린은 전화를 끊고 불안한 모습인 안민아에게 말했다.“강재민 씨가 돌아왔대.”안민아는 멍하니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기대와 환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재민 씨가 우리를 초청했어요?”“나를 초청했어.”도아린은 소파에서 가방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만약 네가 반드시 따라와야겠다면 나도 거절할 수는 없어.”안민아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도아린의 일로 강씨 가문에 갈 수 있다면 목적은 도달한 셈이었다.강씨 가문으로 가는 길에 도아린은 계속 문자를 보냈다.안민아는 도아린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아예 없었다. 그녀는 도아린이 강재민과 메시지를 나누는지 보고 싶었지만, 도아린의 핸드폰에는 사생활 보호 필름이 붙어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강재민은 사전에 집안의 가정부에게 당부했기에 진씨 가문의 차가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열렸다.차창 너머로 강재민이 가정부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 게 보였다.가정부는 고개를 숙인 채 당황한 표정이었다.강재민은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손짓을 했고 가정부는 뒤돌아 자리를 떴다.그는 차로 걸어와서 도아린 쪽의 문을 열었다.“제가 데리러 갔어도 됐었는데요.”“귀찮게 뭐 하러요. 이따가 저도 볼일이 있어서 제 차를 갖고 오는 게 더 편해요.”도아린이 차에서 내린 뒤, 강재민은 차 문을 닫고 안내하는 손짓을 했다. 마치 강씨 가문에 온 손님은 도아린 한 명인 것처럼 행동했다.도아린은 안민아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재민 씨, 안녕하세요.”안민아는 먼저 인사를 건넸고 그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사모하는 마음이 가득했다.강재민은 예의상
강재희는 이 일이 도아린과 연관되었다고 믿지 않았다. 그녀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하지만 주주총회가 끝나고 강재희는 출처가 없는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바로 강태식이 공개적으로 아현에게 사과하라는 내용이었다.아버지는 명망이 높은 인물인데 어떻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할 수 있겠는가!그것도 도아린처럼 명성도 없는 사람에게 사과하게 된다면 훌륭한 제자들의 체면은 어떻게 되겠는가 말이다.강재희는 오해가 있을까 봐 강재민에게 도아린을 집으로 부르라고 해서 탐색해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도아린일 줄은 몰랐다.강재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가 한참이 지나 헛웃음을 터뜨렸다.“도아린 씨, 친구가 많으면 그만큼 가능성도 커지는 겁니다. 그렇게 몰아세울 필요는 없잖아요.”그녀의 시선은 안민아에게로 향했다.“양보하겠다고 하면 도유준한테 안민아 씨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도아린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누나, 도유준을 어떻게 아버지랑 비교하는 거야.”강재민은 주전자를 들어 강재희에게 물을 따랐다.“아니면 내가 사과의 뜻으로 장가를 갈게.”“강재민!”강재희가 소리쳤다.“재민 씨!”안민아가 소리쳤다.강재희는 안민아를 흘겨보았다. 여기는 안민아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배씨 가문에 그 땅을 뺏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네가 나 몰래 땅을 손에 넣은 일에 대해서도 아직 너한테 책임을 묻지 않았어!”강재민은 소파에 기대앉아 몸을 도아린 쪽으로 기울며 느긋하게 말했다.“누나가 약속한 거지, 내가 한 게 아니야.”“너는 강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야?”“데릴사위일 수도 있지.”강재희는 이를 악물고 원수를 보듯 도아린을 노려보았다.이렇게 훌륭한 자신의 동생이 결혼을 한번 했던 여자의 데릴사위로 들어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도대체 자신이 미친 건지, 강재민이 미친 건지 모를 일이다. “재희 씨, 재민 씨 돌아오셨어요.”강홍련이 아들을 데리고 들어오면서 난리를 피우려던 강재희를 저지하게 되었다.강재
JS 픽처스의 고위인사는 배석준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배 대표님, 또 해외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현정이의 몸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좀 더 머물다가 가려고 합니다.”배석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평소에 연회에 거의 참가하지 않는 연예인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주현정이 JS 픽처스에서 지위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각종 이유를 찾아 함께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를 거부했지만, 약속이나 한 듯 카메라 앞에서는 활짝 웃었다. 그들은 모두 주현정 덕분에 잘 되었기에 체면은 반드시 살려주어야 했다.“크흠.”배지유는 배석준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헛기침을 했다.“아, 우리 딸이 마침 해남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데리고 왔습니다.”배석준을 둘러싼 고위인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주현정은 배지유가 연예계의 나쁜 물을 먹을까 봐 현역일 적에 절대 배지유를 데리고 활동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위인사들도 그저 주현정에게 딸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본 적은 없었다.반응이 빠른 누군가가 술잔을 들며 공손하게 말했다.“따님은 주 대표님과 배 대표님의 우수한 점을 다 닮으셔서 단정하고 청초하십니다. 우리가 올해 새로 영입한 신인보다 예쁘신 것 같습니다.”“맞아요. 해남대학교의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시니 예쁘시고 학식도 많으시네요. 지금 업계에서는 이렇게 완벽한 인재를 제일 좋아합니다!”배지유는 칭찬을 듣고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팔걸이를 잡고 살짝 몸을 앞으로 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삐끗해서 일어서서 인사를 올리지 못하겠네요.”“별말씀을요. 발을 삐끗하면 잘 치료해야 해요. 젊고 예쁘신데 후유증을 남기면 안 되죠.”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지만 배지유의 마음속에서는 저주로 들렸다.그녀는 발 한쪽을 다친 게 아니라 다리 하나를 잃었다. 나머지 생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배석준은 배지유의 성격을 알기에 그녀가 난리를 피울까 봐 얼른 다른 곳으로
주현정은 말투가 가라앉았고 표정이 엄숙했다.“남자의 내연녀로 이십몇 년을 있다가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어른이 화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나. 도아린의 양아버지는 양어머니의 혼수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위협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딸의 효도를 받을 자격 없어!”현장에는 여자 연예인들도 많았다.같은 딸의 마음으로 이렇게 심란한 일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도아린이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아린이 양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했다고 여겼다.강홍련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도아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방금 자신의 말이 강씨 가문에게 영향을 줄까 봐 두려웠다.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도아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강씨 어르신은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복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씨 어르신께서 좋은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주었는데 당신은 밖에서 어르신의 명성이나 흐리고 다니면 안 되죠. 농부와 뱀의 이야기를 재희 씨도 들어봤을 거로 생각해요.”도아린은 강씨 어르신의 편에 섰는데 강재희는 반박할 수 없었다.여론에서 아버지의 대회에 흑막이 있다는 일로 들끓던 것이 금방 사그라들었는데 강홍련 저 멍청이 때문에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주현정은 도아린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제 딸이고 JS 픽처스의 후계자예요. 강씨 가문에서 이렇게 제 딸을 치욕스럽게 하다니, 저희 협력은 앞으로 계속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재희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는 도아린이 연회에 참가한 것은 단지 주현정과 예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주현정이 도아린을 딸로 삼고 JS 픽처스의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만약 도아린과 모순이 격화된다면 앞으로의 협력에는 장애가 생길 것이다.“강홍련 씨, 사과해요!”강홍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재희는 지금 자신을
도아린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진열대에 있는 다이아몬드의 빛이 꺾이어 그녀의 눈동자를 비춰 유독 눈부셨다.강홍련은 그녀의 앞으로 가서 섰다.강홍련은 도아린보다 머리 하나쯤 작아서 고개를 들어 도아린을 바라보았는데 도도한 척하는 모습이 광대 같았다.“네가 JS 픽처스에게 ‘봉황의 시대’를 광고하도록 넘겼는데 강씨 가문의 고급 주얼리들은 모두 JS 픽처스의 연예인들이 광고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어. ‘봉황의 시대’와 JS 픽처스의 연예인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당연하게 ‘봉황의 시대’가 강씨 가문의 것으로 생각하게 될 테지.”이게 바로 연예인을 찾아 광고하는 이유였다.예를 들어 어떤 톱스타가 운동화의 모델이 되었다면 그가 나타났을 때 팬들은 어떤 브랜드의 신발을 신었는지 알게 된다. 따로 브랜드를 찾아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도아린은 도덕과 재능을 겸비한다는 말로 강씨 가문에게 치욕을 안겨주었지만 결국은 강씨 가문이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강씨 가문에서 이득을 보는 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도아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는 강씨 가문의 사촌이야!”강홍련은 불쑥 얘기했다.“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밀어준다면 배건후와 결혼할 수 있어. 강씨 가문에서 안씨 가문을 지지한다면 내 아들은 안씨 가문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거야!”“그래서요.”강홍련은 도아린이 모른 척할 줄 몰랐고 그녀의 코에 대고 얘기했다.“그래서 나한테 잘하라고. 그러면 강씨 가문에서는 네가 해남에서 살아나갈 기회라도 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대회 성적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너를 디자인 업계에서 쫓아내는 것도 일이 아니지. 내 삼촌 강태식은 이 바닥을 꽉 잡고 있어. 내 삼촌이 뭐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너의 ‘봉황의 시대’도 잘난 척할 거 없어. 언론에서 만들어준 것뿐이야. 만약 삼촌의 학생들이 다 그게 별로라고 얘기한다면 너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거야!”많은 손님이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강홍련의 지나친 말에 시선을 두
“아빠가 방법을 대서 가볼게. 너는 오지 마.”배석준은 배지유가 걱정되었다. 지난번에 배지유가 밖으로 나갔다 왔을 때도 돌아와서 다리가 아파 잠이 들지 못했다.배지유는 붉어진 눈으로 애원했다.“제 친구들은 제가 아직 안에 갇혀있는 줄 알아요! 아빠랑 제가 함께 엄마의 연회에 간다면 매체에서는 저희 세 식구의 화목한 모습을 찍게 될 것이고 소문들은 자연스레 사그라질 거예요!”배석준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딸의 명성은 도아린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돌이킬 방법을 계속 찾지 않는다면 배지유가 해남대학교로 돌아갔을 때 반드시 동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조롱당할 것이다.“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메이크업과 코디를 해줄게.”배석준이 데리고 온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김지민이었다.김지민은 연예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 참석하는 연예인들이 무슨 브랜드를 입었는지 알아냈다. 배지유는 똑같은 옷을 입으면 안 됐고 다리의 흉터를 가릴 수 있으면서 예쁘고 매력적이어야 했다.이 부분에서 김지민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배지유는 만족스럽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그녀의 치마를 들지 않는 이상 그녀가 다리 하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발을 삐끗해서 휠체어를 탔다고 하면 될 것이다.이런 장소에 김지민은 절대 나타나서는 안 되므로 부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연회장의 중심에는 도아린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고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는 현장에 있는 연예인들의 시선을 끌었다.이 여자의 아름다움이 너무 지나쳤다.연예계의 스타들은 자주 레드카펫을 밟고 시상식에 참가하므로 어떻게 분위기를 휘어잡는지를 잘 알고 자신이 어느 각도에서 가장 예쁘게 찍히는지도 알고 있었다.도아린은 처음 보는 얼굴이고 업계에 대해 영향력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다 자신감이 넘쳤다.그녀가 스크린 앞으로 가서 사인할 때 스크린에는 ‘봉황의 시대’의
도아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은 ‘라윤주’의 이름을 듣고 초점을 잃었다.“뭐라고요?”“...”육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가 육하경이 말을 이었다.“향 주머니로 화를 면한 것은 우연이에요. 정말 저를 도왔던 것은 세인트존스 호텔의 책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죠.”육하경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어르신들을 3일이나 괴롭혀서야 알아냈어요. LY에서 저를 후임자로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육하경의 학업은 각 부분에서 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육씨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빽빽이 필요했다.육민재를 예로 들어보면 능력은 가장 뛰어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맏아들의 장손 혈통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최고로 좋은 자원과 경험을 쌓을 기회들을 누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육씨 가문의 후계자일 것이다.다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려면 모든 게 알맞게 부합되어야 한다.육하경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었고 육씨 가문의 산업에 기대를 두지 않아 오랜 시간 밖에서 떠돌며 공부를 했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세인트존스 호텔의 관리 권한이 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쁘기도 놀랍기도 했다.놀란 마음으로 육하경은 전임자를 찾아갔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야 LY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육씨 가문 뿐만 아니라 많은 명문가가 LY와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인재를 추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도와주었기에 자연스레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육하경은 그때 손에 향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전임자가 이상해하며 무늬를 찍어서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추천서’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경 씨가 말하는 그 이야기에도 관심 없습니다.”도아린은 책을 육하경에게 돌려주고는 차 문을 열었다.“도아린 씨!”육하경은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손을 허공에 멈추고 결국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육하경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보게 된 것은 싫증뿐이었다.도아린은 힘을 주어 방심하고 있던 배건후를 밀어냈고 뒤돌아 걸어갔다.배건후는 빠르게 따라가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도아린, 나한테 시간을 줘.”배건후가 잡은 손목의 위치가 마침 도아린이 떨어질 뻔했을 때 배건후에게 잡힌 위치였다. 도아린은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배건후의 손을 때렸다.“이거 놔!”“친구 사귀지 마.”배건후의 목소리가 떨렸다.“서둘러 친구 사귈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시간을 줘.”도아린은 배건후에게 발길질을 했고 배건후는 피하지 않았다. 바지에는 발자국이 하나 생겼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이거 안 놓으면 사람 부를 거예요. 육씨 가문에서는 당신이 함부로 하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배건후의 힘이 조금 빠진 틈을 타서 도아린은 빠르게 손을 빼내고 자리를 떴다.나영옥은 도아린이 손목이 빨갛게 된 채로 한참이 지나 돌아온 것을 보고 묻지 않았고 가정부에게 도아린한테 식사를 올려달라고 했다.배건후가 돌아왔을 때, 육하경이 작은 숟가락으로 게살을 발라서 도아린의 앞에 놓아주는 것을 보았다.“내일 하경 오빠가 아린 씨와 함께 봉사활동을 간다고 하는데 저희도 함께 가요.”육청아은 갈비를 하나 집어 배건후의 접시에 놓았다.배건후는 가정부를 불러 접시를 바꿔 달라고 했다.“...”식사를 마친 후, 육하경은 도아린을 자신의 차에 태우려고 했다.배건후는 펑 하고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았다.“아린이 지금 사는 곳은 외부인에게 발설하기 불편해.”도아린은 자신의 주소를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 게 맞지만, 배건후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배건후가 미쳐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하경 씨는 외부인이 아니에요.”도아린은 차를 빙 돌아가더니 반대편으로 올랐다.육하경은 바로 얼굴에 웃음을 띠었고 배건후의 어깨를 툭툭치고는 운전석에 올랐다.육씨 가문을 떠나 시 중심에 들어서자 도아린이 갑자기 말했다.“앞에
“아!”육청아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는 다 젖었고 찻물이 그녀의 치마를 적셨다.“죄송해요.”배건후는 주전자를 놓고 자신의 냅킨으로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를 닦았다.육청아는 도아린을 흘겨보고는 치마를 정리하러 갔다.작은 소란이 일었어도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나영옥이 잔소리를 했다.“나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저렇게 칠칠치 못한 거야. 단정하지 못해.”도아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웃음을 짓던 두 눈은 어리둥절했다.“천사 보육원이 압류당했는데 세인트존스 호텔의 수선 계획은 계속할 거야?”배건후는 육하경과 도아린의 대회를 끊었다.그는 소매를 말아 올렸고 손목에는 빨간 끈이 드러났다. 그의 행동이 나른하고 관능적이었다. 도아린은 그게 눈에 거슬렸다. 이혼한 마당에 이런 물건으로 그녀를 치욕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가서 손을 씻고 올게요.”도아린은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육하경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며 배건후의 말에 대답했다.“수선 계획은 변하지 않아. 우리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찾아 전적으로 책임지게 할 거야...”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건후도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객실의 화장실은 세면대가 밖에 있었는데 도아린이 수도꼭지를 틀려고 할 때 여자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가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상대방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 도아린은 ‘배건후’와 ‘네티즌을 산다’라는 얘기를 어렴풋하게 듣게 되었다.도아린이 화장실의 문을 열자 육청아은 빠르게 핸드폰을 막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칸막이가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밖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도아린은 변기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물을 내렸다.문을 열자마자 역시 육청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도아린 씨.”육청아은 계속 웃는 표정이었지만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라 도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웃음이었다.“당신이 배지유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그녀는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눈빛이었다.도아린은 그녀가 배건후한테 정말 진심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육청아가 이상하게 그녀를 경계하는 느낌을 받았다.나영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희들은 다 나가 있어. 아린이랑 할 얘기가 있어.”육청아는 육민재와 함께 문 앞까지 갔다가 뒤돌아 도아린을 한번 보더니 핑계를 대서 육민재와 갈라졌다.나영옥은 도아린에게 어쩔 예정인지 물었다. 요즘 모건 그룹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연성에서의 지위는 쉽게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만약 도아린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배씨 가문에서는 도울 수 있지만, 배건후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재벌의 관계는 오래된 나무의 뿌리처럼 가닥이 많고 복잡해서 하나를 건드리면 모든 게 흔들리게 된다.“진씨 가문의 부모님은 너한테 잘해줘?”나영옥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저한테 엄청 잘해주세요. 두 오빠도 잘해줘요.”“그럼 다행이야. 청아의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경솔하게 행동하는 면이 있었어. 기어코 바위에 부딪히려 하거든 가라고 해. 손해를 봐야 정신을 차리지.”도아린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영옥은 또 그녀와 친한 친구를 언급하였는데 해남에 사는 여씨 어르신이었다.“시간이 나면 나 대신에 가서 만나서 안부를 전해줘.”나영옥은 편지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주었고 전해달라고 했다.도아린은 조심스레 편지를 넣어두고 꼭 찾아뵙겠다고 얘기했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밖에서는 말소리가 들렸고 육청아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나영옥의 표정에서는 불쾌한 기색이 보였지만 꾸짖지 않았고 도아린을 배웅하기 위해 가정부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다.도아린이 나영옥을 부축하고 나왔을 때 정자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배건후의 잘생긴 얼굴은 차가웠고 넥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는 살짝 열고 있었다. 꾸민 듯 안 꾸민듯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다.육청아는 그의 곁에 서서 고개를 들
도아린은 SNS에 새가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였다. 잠시 후, 음식을 배달시켜려고 하는데 문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신선한 재료와 과일들로 가득했다. 큰오빠의 배려에 감동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인데 연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걱정돼서 이리 모든 것을 준비해 주다니...진수혁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려는 그때, 육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성에 돌아온 거야?”“네.”“할머니가 아린 씨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잠깐 들렀다 갈래?”“위치 보내줘. 내가 데리러 갈게.”이번에 연성을 떠나면 중요한 일이 없는 이상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대표님, 사모님... 아니 아린 씨가 집을 나섰습니다.”그에게 물병을 건네던 유정윤은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가 물병을 건네받으며 약을 입에 넣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이 파래졌다. 잠시 후, 통증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따라가.”“네.”고개를 끄덕이던 우정윤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오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사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회사로 끌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모건 그룹의 다음 계획에 대해 대책을 세우라고 그를 닦달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는 재빨리 구청으로 달려갔고 마침 배석준이 도아린에게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한 탓에 위가 또 말썽인 듯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후, 위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진통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그의 눈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