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돈은 진씨 가문한테 빌린 것이다.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다 진씨 가문과 연관된 일이었다.“LY가 정말 그렇게나 대단하다고요?”윤명희는 믿기지 않았다.실제적인 업종에 종사하지 않는 회사, 혹은 조직이 무슨 근거로 사업가들의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리고 강씨 가문의 주요 업종은 주얼리이고 안씨 가문의 주요 업종은 부동산인데 전혀 연결이 없는 상황이었다.안민아는 갑자기 도아린의 옷깃을 잡았고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나도 민아가 억울함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손실이 너무 크고 진씨 가문까지 피해를 보게 되는데 나더러 도대체 어떻게 하라고!”안준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그는 절반 정도 태우고 허리를 숙여서 담뱃재떨이에 손을 뻗으며 빠르게 도아린을 훑었다.도아린은 자신에게로 화제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녹두떡을 들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안준휘는 또 진범준을 한번 보았는데 방금까지도 도와준다고 승낙해놓고는 지금은 말이 없었다.진범준이 모른 척해도 안준휘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민아야, 내일 진씨 가문으로 가.”윤명희는 물을 따라서 도아린에게 건네고 안준휘를 보았다.“민아를 혼자 가게 한다면 그놈이 또 무슨 짓을 할까 봐 걱정되지 않아요?”“제가 어떻게 민아를 혼자 보내겠어요.”안준휘는 드디어 도아린을 보면서 말했다.“네가 민아와 함께 가야겠다. 이번에는 신경을 많이 써줘. 민아가 또 저번처럼 당하게 하지 말고.”녹두떡은 너무 말랑해서 도아린은 하마터면 뱉을 뻔했다.윤명희는 도아린이 목에 걸린 줄 알고 등을 두드려주었다.“천천히 먹어, 천천히. 목에 걸리지 말고...”안준휘는 도아린이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고 안민아를 데리고 떠났다.해남 병원에서 성대호는 병실 안에서 물건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얼른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지유야, 왜 그래! 다리 아파? 의사를 불러올게.”“의사는 필요 없어. 내 다리를 내놔. 내 다리 내놔!”배지유는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을 다 던졌다.
“제가 왜 안 그러고 싶겠어요! 지금 마음으로는 도아린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요!”배지유는 울면서 곁에 있는 이불을 내리쳤고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납작해진 이불을 쳐다보았다.“저는 지금 생리현상도 누군가가 보살펴주지 않으면 스스로 못하는데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겠어요! 다 성대호 때문이에요. 쓰레기 같은 놈, 저를 돕지 못할망정 저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려 놨어요!”“...”성대호가 문밖에서 듣고 있었다.그는 훔쳐 들을 생각이 없었지만, 배지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담뱃불을 붙이려던 성대호는 부들부들 떨면서 담배를 부러뜨려 버렸다. 손보미는 배지유의 멀쩡한 다리를 다독였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목소리를 깔고 얘기했다.“남자는 네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나무가 아니라 네가 위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야. 사다리가 부실하다면 바꾸면 돼.”배지유는 점점 울음을 멈췄고 빨갛게 부은 눈에는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손보미가 말했다.“나랑 네 오빠의 혼사는 강씨 가문에서 추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성사되지 않았어. 차라리 강씨 가문에 신경을 많이 써. 밖에 있는 저 쓸데없는 놈은 버리고.”배지유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하지만 배지유는 또 생각에 잠겼다가 움츠러든 표정을 했다.“만약 제 다리가 아직 멀쩡하다면 반드시 강씨 가문 도련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지금... 그 사람은 아마 저를 보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강씨 가문에는 남자가 또 있어.”손보미는 강홍련 모자와 강씨 가문의 관계를 얘기했고 배지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안돼요! 제가 어떻게 도아린의 사생아 동생한테 좋은 일을 시키는 꼴을 봐요!”손보미는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작게 얘기를 했고 배지유는 분노하던 표정이 점차 사그라지더니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잠시 후, 배지유는 이불을 움켜쥐고 사악한 눈빛을 했다.“보미 언니,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사람은 언니밖에 없어요!”“바보야, 나는 네 새언니야. 내가 너를 생각해주지 않으면
“지유야, 나는 너를 여동생처럼 생각하니 보살피는 건 당연한 일이야. 뭘 하고 싶으면 직접 말해도 돼. 민망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오빠는 괜찮다고 해도 내가 불편해!”배지유는 짜증 내며 얘기했다.“오빠가 나를 안아서 이리저리 옮기는데 내가 앞으로 어떻게 시집을 갈 수 있겠어!”성대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배지유는 손보미한테 나쁜 물이 들었다.“지유야, 내 말 좀 들어봐...”“안 들을래. 나 피곤해. 쉬고 싶어!”배지유는 그를 밀어냈다.“여기서 나한테 매달리지 말고 얼른 가서 성씨 가문을 다시 일으킬 생각이나 해. 만약 파산한다면 오빠는 빈털터리가 되잖아!”성대호의 눈빛에는 증오의 빛이 서렸다.그는 배지유를 위해 연성을 떠났고 가문에게 등을 돌렸다.결렬한 것은 집안의 일이기 때문에 성씨 가문은 대외적으로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하여 예전에 성씨 가문과 협력했던 사람들이 성대호의 체면을 봐주고 있었다.그러므로 성대호는 배지유를 보살피면서도 조금씩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만약 성씨 가문이 정말 파산한다면 그는 빈털터리가 될 것이고 배지유도 그를 외면할 것이다.“지유야, 걱정하지 마!”성대호는 힘을 주어 배지유의 손을 잡았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얘기했다.“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거야!”배지유는 마음속으로 무척 불쾌해했다.그때 오빠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씨 가문은 절대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지금 오빠에게 버림받은 마당에 그는 무슨 수로 성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좋은 말로 무마했다.“그래. 얼른 가서 일으켜 세워. 오빠가 성과를 낸다면 아빠랑 오빠도 오빠를 다시 보게 될 거야!”배지유는 성대호와 함께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소리를 했다.성대호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 길로 연성으로 돌아갔다....이튿날 아침, 안민아는 일부러 도아린의 앞에서 알짱거렸다.도아린은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듯 조깅을 하고 뒷마당에서 넓은 곳을 찾아 운동했다.
안민아는 우물쭈물하며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늘 반드시 도아린을 강씨 가문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니면 일이 복잡해진다.방안에서 벨 소리가 울렸고 도아린은 책상으로 가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안민아도 따라 들어갔고 불안하게 손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이유로든 먼저 도아린을 데리고 나가야 했다.“그래요, 알겠어요.”도아린은 전화를 끊고 불안한 모습인 안민아에게 말했다.“강재민 씨가 돌아왔대.”안민아는 멍하니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기대와 환희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재민 씨가 우리를 초청했어요?”“나를 초청했어.”도아린은 소파에서 가방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만약 네가 반드시 따라와야겠다면 나도 거절할 수는 없어.”안민아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도아린의 일로 강씨 가문에 갈 수 있다면 목적은 도달한 셈이었다.강씨 가문으로 가는 길에 도아린은 계속 문자를 보냈다.안민아는 도아린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아예 없었다. 그녀는 도아린이 강재민과 메시지를 나누는지 보고 싶었지만, 도아린의 핸드폰에는 사생활 보호 필름이 붙어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강재민은 사전에 집안의 가정부에게 당부했기에 진씨 가문의 차가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열렸다.차창 너머로 강재민이 가정부에게 무슨 얘기를 하는 게 보였다.가정부는 고개를 숙인 채 당황한 표정이었다.강재민은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손짓을 했고 가정부는 뒤돌아 자리를 떴다.그는 차로 걸어와서 도아린 쪽의 문을 열었다.“제가 데리러 갔어도 됐었는데요.”“귀찮게 뭐 하러요. 이따가 저도 볼일이 있어서 제 차를 갖고 오는 게 더 편해요.”도아린이 차에서 내린 뒤, 강재민은 차 문을 닫고 안내하는 손짓을 했다. 마치 강씨 가문에 온 손님은 도아린 한 명인 것처럼 행동했다.도아린은 안민아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재민 씨, 안녕하세요.”안민아는 먼저 인사를 건넸고 그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사모하는 마음이 가득했다.강재민은 예의상
강재희는 이 일이 도아린과 연관되었다고 믿지 않았다. 그녀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하지만 주주총회가 끝나고 강재희는 출처가 없는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바로 강태식이 공개적으로 아현에게 사과하라는 내용이었다.아버지는 명망이 높은 인물인데 어떻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할 수 있겠는가!그것도 도아린처럼 명성도 없는 사람에게 사과하게 된다면 훌륭한 제자들의 체면은 어떻게 되겠는가 말이다.강재희는 오해가 있을까 봐 강재민에게 도아린을 집으로 부르라고 해서 탐색해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도아린일 줄은 몰랐다.강재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가 한참이 지나 헛웃음을 터뜨렸다.“도아린 씨, 친구가 많으면 그만큼 가능성도 커지는 겁니다. 그렇게 몰아세울 필요는 없잖아요.”그녀의 시선은 안민아에게로 향했다.“양보하겠다고 하면 도유준한테 안민아 씨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도아린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누나, 도유준을 어떻게 아버지랑 비교하는 거야.”강재민은 주전자를 들어 강재희에게 물을 따랐다.“아니면 내가 사과의 뜻으로 장가를 갈게.”“강재민!”강재희가 소리쳤다.“재민 씨!”안민아가 소리쳤다.강재희는 안민아를 흘겨보았다. 여기는 안민아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배씨 가문에 그 땅을 뺏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네가 나 몰래 땅을 손에 넣은 일에 대해서도 아직 너한테 책임을 묻지 않았어!”강재민은 소파에 기대앉아 몸을 도아린 쪽으로 기울며 느긋하게 말했다.“누나가 약속한 거지, 내가 한 게 아니야.”“너는 강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야?”“데릴사위일 수도 있지.”강재희는 이를 악물고 원수를 보듯 도아린을 노려보았다.이렇게 훌륭한 자신의 동생이 결혼을 한번 했던 여자의 데릴사위로 들어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도대체 자신이 미친 건지, 강재민이 미친 건지 모를 일이다. “재희 씨, 재민 씨 돌아오셨어요.”강홍련이 아들을 데리고 들어오면서 난리를 피우려던 강재희를 저지하게 되었다.강재
“도아린, 강씨 가문의 사람들이 말하는데 끼어들지 마!”강홍련은 화를 냈다. 당장 주머니에 들어올 돈이 날아 나서는 절대 안 된다.“네가 도정국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가씨가 준 돈도 손을 대지 마!”강홍련은 당당하게 말했다.“나는 정국 씨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지만, 아들을 낳아줬고 십몇 년을 함께 살았기에 사실혼 사이야. 아가씨가 준 돈은 반드시 내가 관리해야 해!”도아린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에 강홍련은 소름이 끼쳤다.그녀는 못마땅하게 도아린을 째려보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강홍련을 쳐다보았다.“아가씨, 정국 씨는 도아린의 함정에 빠져 빚을 지게 된 거예요. 정국 씨에게 새로 시작할 기회를 준다면 반드시 아가씨의 은혜에 보답할 거예요!”강재희는 강홍련이 멍청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방금 자신이 도아린의 의견을 묻는 것을 못 봤다는 말인가? 강홍련은 강재희가 불쾌해하는 것이 도아린 때문인 줄 알고 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도아린, 진씨 가문에서는 네가 허영에 눈이 먼 속물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그때가 돼서 진씨 가문에서 쫓겨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찾아올 생각은 하지 마!”강재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도아린을 보며 물었다.“합의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도아린은 찻잔을 들었다. 강재희는 한참을 기다려도 도아린이 대답하지 않자 불쾌함이 더 증가했다.체면을 봐주니까 더 허세를 부리고 있는 모양이다.“강씨 가문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는데 도씨 성을 가진 사람한테 물어서 뭐해?”강재민이 느긋하게 말했다.강재희는 강재민을 흘겨보고는 강홍련을 쳐다보았다.“당신과 도정국 씨가 사실혼 관계라면 그 사람의 채무도 두 사람의 공동채무가 되는 거죠. 당신과 도정국 씨가 함께 갚아요.”강홍련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아가씨, 방금 한 얘기는...”“제가 도아린 씨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끼어들지 마세요.”강홍련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이었지만 강재희가 왜 도아린을 감
문으로 가정부들이 드나들면서 강씨 가문의 전체 사람들이 그들의 추태를 보게 되었고 앞으로 강씨 가문에는 그들의 지위가 사라지게 된 셈이다도아린이 아버지가 공개 사과를 하게 억지를 부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강홍련 같은 먼 친척 한 명쯤은 체면이 깎여도 상관없었다.강씨 가문의 뒤뜰에는 아카시아 꽃을 넓게 심었고 작은 꽃봉오리가 꽃을 피워 공기 속에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안민아는 일부러 늦게 걸으면서 셀카를 몇 장 찍었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때 위치까지 설정했다.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도아린과 강재민은 멀리 가 있었다.도아린은 오늘 옅은 색의 몸에 딱 붙는 셔츠에 진한 색의 청바지를 입었고 가방을 가로 메고 있었다. 뒤에서 봤을 때 허리가 유독 가늘어 보였고 힙업이 돋보였다.안민아는 자신의 허리를 만져보았다. 그녀는 도아린보다 살집이 적었지만, 몸매가 좋지는 않았다.남자가 아닌 자신이 봐도 도아린의 몸매가 탐이 났다.강재민은 안민아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사촌 동생은 아직 마음을 접지 않았나 봐요.”도아린은 허리를 숙여 꽃을 하나 따고는 천천히 말했다.“일을 좀 깔끔하게 처리해요. 저를 방패막이로 삼지 말고 재희 씨를 오해하게 만들지도 말아요. 우리는 함께 할 수 없어요.”강재민은 그녀의 손에서 꽃을 건네받고는 중지로 그것을 으깼다.“이혼 숙려 기간이 곧 끝나가요. 아린 씨도 깔끔하게 처리했으면 좋겠어요.”“...”도아린은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강재민은 눈썹 뼈가 튀어나왔고 눈이 깊었는데 어머니의 유전이었다.입체적인 오관은 도도한 느낌을 주었고 도아린을 쳐다볼 때 더 단호한 눈빛이었다.“엠파이어 빌딩의 고객 자료는 배지유가 준 거죠.”도아린이 말했다.“재민 씨는 진작에 배건후를 노렸던 거예요. 일부러 저에게 관심이 많은 척하는 건 배건후의 화를 돋우는 수단일 뿐이죠. 건후 씨의 사업을 빼앗고 여자까지 빼앗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다 충격을 주려는 거죠.”강재민은 한참 침묵하더니 갑자
“허튼소리 하지 마. 지금 나와 정국 씨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야?”바닥에서 일어난 강홍련은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있던 탓에 다리가 저려 비틀거리다가 다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도씨 가문으로 들어온 후, 엄마는 몇 번이나 임신한 적 있었죠. 그러나 뱃속의 아이가 여자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도정국은 엄마한테 아이를 지우길 강요했었어요. 그러다가 엄마가 지현이를 임신하였고 도정국은 임산부한테 좋다는 이유로 대량의 보양식을 엄마한테 먹게 하였고 결국 뱃속의 아이가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많이 컸었죠.”“출산 당일,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에도 도정국은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거부하였고 결국 최적의 치료 시간을 놓친 탓에 엄마는 양수색전증으로 사망하게 되었어요.”도아린은 싸늘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 그녀의 말에 강홍련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이 도정국한테 시킨 거죠?”강홍련이 아니라면 남자인 도정국이 어찌 아이를 낳는 위험에 대해 이리 잘 알 수가 있었겠는가? 두 사람은 정은채를 죽이고 정은채의 재산을 가로챈 것도 모자라 정은채의 하나뿐인 아들마저 잘 키우려 하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지던 강홍련은 계단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혔고 순식간에 피가 흘러나왔다. 힘겹게 일어서는데 핏방울이 얼굴을 타고 눈 속으로 흘러 들어가 참기 힘들 정도로 따끔거렸다.이때, 도유준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하면서 도아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증거가 있어 이러는 거야?”도아린의 차가운 시선이 강홍련에게서 도유준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를 치켜들고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하더니. 지현의 다리가 어떻게 부러졌는지 지현이가 왜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도유준 넌 잘 알고 있잖아.”손에 힘이 풀리는 탓에 강홍련은 또 바닥에 주저앉았고 계단에 머리를 부딪히게 되었다. 오른쪽과 왼쪽 이마에 상처가 생겼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도아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은 ‘라윤주’의 이름을 듣고 초점을 잃었다.“뭐라고요?”“...”육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가 육하경이 말을 이었다.“향 주머니로 화를 면한 것은 우연이에요. 정말 저를 도왔던 것은 세인트존스 호텔의 책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죠.”육하경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어르신들을 3일이나 괴롭혀서야 알아냈어요. LY에서 저를 후임자로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육하경의 학업은 각 부분에서 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육씨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빽빽이 필요했다.육민재를 예로 들어보면 능력은 가장 뛰어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맏아들의 장손 혈통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최고로 좋은 자원과 경험을 쌓을 기회들을 누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육씨 가문의 후계자일 것이다.다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려면 모든 게 알맞게 부합되어야 한다.육하경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었고 육씨 가문의 산업에 기대를 두지 않아 오랜 시간 밖에서 떠돌며 공부를 했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세인트존스 호텔의 관리 권한이 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쁘기도 놀랍기도 했다.놀란 마음으로 육하경은 전임자를 찾아갔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야 LY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육씨 가문 뿐만 아니라 많은 명문가가 LY와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인재를 추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도와주었기에 자연스레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육하경은 그때 손에 향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전임자가 이상해하며 무늬를 찍어서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추천서’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경 씨가 말하는 그 이야기에도 관심 없습니다.”도아린은 책을 육하경에게 돌려주고는 차 문을 열었다.“도아린 씨!”육하경은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손을 허공에 멈추고 결국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육하경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보게 된 것은 싫증뿐이었다.도아린은 힘을 주어 방심하고 있던 배건후를 밀어냈고 뒤돌아 걸어갔다.배건후는 빠르게 따라가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도아린, 나한테 시간을 줘.”배건후가 잡은 손목의 위치가 마침 도아린이 떨어질 뻔했을 때 배건후에게 잡힌 위치였다. 도아린은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배건후의 손을 때렸다.“이거 놔!”“친구 사귀지 마.”배건후의 목소리가 떨렸다.“서둘러 친구 사귈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시간을 줘.”도아린은 배건후에게 발길질을 했고 배건후는 피하지 않았다. 바지에는 발자국이 하나 생겼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이거 안 놓으면 사람 부를 거예요. 육씨 가문에서는 당신이 함부로 하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배건후의 힘이 조금 빠진 틈을 타서 도아린은 빠르게 손을 빼내고 자리를 떴다.나영옥은 도아린이 손목이 빨갛게 된 채로 한참이 지나 돌아온 것을 보고 묻지 않았고 가정부에게 도아린한테 식사를 올려달라고 했다.배건후가 돌아왔을 때, 육하경이 작은 숟가락으로 게살을 발라서 도아린의 앞에 놓아주는 것을 보았다.“내일 하경 오빠가 아린 씨와 함께 봉사활동을 간다고 하는데 저희도 함께 가요.”육청아은 갈비를 하나 집어 배건후의 접시에 놓았다.배건후는 가정부를 불러 접시를 바꿔 달라고 했다.“...”식사를 마친 후, 육하경은 도아린을 자신의 차에 태우려고 했다.배건후는 펑 하고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았다.“아린이 지금 사는 곳은 외부인에게 발설하기 불편해.”도아린은 자신의 주소를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 게 맞지만, 배건후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배건후가 미쳐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하경 씨는 외부인이 아니에요.”도아린은 차를 빙 돌아가더니 반대편으로 올랐다.육하경은 바로 얼굴에 웃음을 띠었고 배건후의 어깨를 툭툭치고는 운전석에 올랐다.육씨 가문을 떠나 시 중심에 들어서자 도아린이 갑자기 말했다.“앞에
“아!”육청아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는 다 젖었고 찻물이 그녀의 치마를 적셨다.“죄송해요.”배건후는 주전자를 놓고 자신의 냅킨으로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를 닦았다.육청아는 도아린을 흘겨보고는 치마를 정리하러 갔다.작은 소란이 일었어도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나영옥이 잔소리를 했다.“나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저렇게 칠칠치 못한 거야. 단정하지 못해.”도아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웃음을 짓던 두 눈은 어리둥절했다.“천사 보육원이 압류당했는데 세인트존스 호텔의 수선 계획은 계속할 거야?”배건후는 육하경과 도아린의 대회를 끊었다.그는 소매를 말아 올렸고 손목에는 빨간 끈이 드러났다. 그의 행동이 나른하고 관능적이었다. 도아린은 그게 눈에 거슬렸다. 이혼한 마당에 이런 물건으로 그녀를 치욕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가서 손을 씻고 올게요.”도아린은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육하경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며 배건후의 말에 대답했다.“수선 계획은 변하지 않아. 우리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찾아 전적으로 책임지게 할 거야...”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건후도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객실의 화장실은 세면대가 밖에 있었는데 도아린이 수도꼭지를 틀려고 할 때 여자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가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상대방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 도아린은 ‘배건후’와 ‘네티즌을 산다’라는 얘기를 어렴풋하게 듣게 되었다.도아린이 화장실의 문을 열자 육청아은 빠르게 핸드폰을 막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칸막이가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밖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도아린은 변기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물을 내렸다.문을 열자마자 역시 육청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도아린 씨.”육청아은 계속 웃는 표정이었지만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라 도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웃음이었다.“당신이 배지유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그녀는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눈빛이었다.도아린은 그녀가 배건후한테 정말 진심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육청아가 이상하게 그녀를 경계하는 느낌을 받았다.나영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희들은 다 나가 있어. 아린이랑 할 얘기가 있어.”육청아는 육민재와 함께 문 앞까지 갔다가 뒤돌아 도아린을 한번 보더니 핑계를 대서 육민재와 갈라졌다.나영옥은 도아린에게 어쩔 예정인지 물었다. 요즘 모건 그룹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연성에서의 지위는 쉽게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만약 도아린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배씨 가문에서는 도울 수 있지만, 배건후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재벌의 관계는 오래된 나무의 뿌리처럼 가닥이 많고 복잡해서 하나를 건드리면 모든 게 흔들리게 된다.“진씨 가문의 부모님은 너한테 잘해줘?”나영옥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저한테 엄청 잘해주세요. 두 오빠도 잘해줘요.”“그럼 다행이야. 청아의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경솔하게 행동하는 면이 있었어. 기어코 바위에 부딪히려 하거든 가라고 해. 손해를 봐야 정신을 차리지.”도아린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영옥은 또 그녀와 친한 친구를 언급하였는데 해남에 사는 여씨 어르신이었다.“시간이 나면 나 대신에 가서 만나서 안부를 전해줘.”나영옥은 편지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주었고 전해달라고 했다.도아린은 조심스레 편지를 넣어두고 꼭 찾아뵙겠다고 얘기했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밖에서는 말소리가 들렸고 육청아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나영옥의 표정에서는 불쾌한 기색이 보였지만 꾸짖지 않았고 도아린을 배웅하기 위해 가정부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다.도아린이 나영옥을 부축하고 나왔을 때 정자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배건후의 잘생긴 얼굴은 차가웠고 넥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는 살짝 열고 있었다. 꾸민 듯 안 꾸민듯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다.육청아는 그의 곁에 서서 고개를 들
도아린은 SNS에 새가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였다. 잠시 후, 음식을 배달시켜려고 하는데 문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신선한 재료와 과일들로 가득했다. 큰오빠의 배려에 감동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인데 연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걱정돼서 이리 모든 것을 준비해 주다니...진수혁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려는 그때, 육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성에 돌아온 거야?”“네.”“할머니가 아린 씨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잠깐 들렀다 갈래?”“위치 보내줘. 내가 데리러 갈게.”이번에 연성을 떠나면 중요한 일이 없는 이상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대표님, 사모님... 아니 아린 씨가 집을 나섰습니다.”그에게 물병을 건네던 유정윤은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가 물병을 건네받으며 약을 입에 넣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이 파래졌다. 잠시 후, 통증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따라가.”“네.”고개를 끄덕이던 우정윤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오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사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회사로 끌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모건 그룹의 다음 계획에 대해 대책을 세우라고 그를 닦달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는 재빨리 구청으로 달려갔고 마침 배석준이 도아린에게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한 탓에 위가 또 말썽인 듯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후, 위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진통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그의 눈빛이
“뭐 하는 짓이에요?”배건후가 품 안에 그녀를 감싸고 차가운 눈빛으로 배석준을 쏘아보았다. 살짝 당황한 배석준은 해명하려다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고개를 치켜들었다.“네가 제정신이냐? 여자 하나 때문에 대표 이사를 그만둬? 회사가 무슨 소꿉장난도 아니고.”“그건 제 일입니다.”“넌 내 아들이야. 너한테 뭐라 할 자격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배석준은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분노가 차올라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고 눈이 충혈되었다.그러나 배건후는 그를 무시한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다.“다친 데 없어?”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손목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얼른 가서 이혼 신고 마무리해요.”뭔가 말을 하려던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고 배석준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배건후, 너 사인 하기만 해. 그럼 진짜 우리 부자지간도 이젠 끝이야.”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구청 안으로 들어갔다.그들이 다시 나왔을 때, 배석준은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배건후와 도아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젠 다 컸다 이거지? 내가 외국에서 힘들게 회사를 키우는 동안 네 엄마가 널 이렇게 가르쳤어?”그러나 배건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데려다줄게.”거절하려고 했지만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배석준의 사람들 때문에 그녀는 그냥 차에 올라탔다.“고마워요.”차에 탄 후, 그녀는 그에게 주소를 말해주었다. 두 사람이 탄 차량은 뒤따라오던 차들을 따돌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차에서 내린 그가 근처의 건물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여기 살아?”“친구 집이에요. 잠깐 머물고 있어요.”그와 더 이상 자세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내일 해남으로 돌아갈 거예요. 잘 지내요.”그녀가 돌아서려는 그때,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율이 사건에 진전이 있어.”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하경 씨한테서 들었어요.”...그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주주들이 다그치지 않았더라면 도아린을 절대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딸의 다리를 반쯤 부러뜨리고 그와 아내의 사이를 이간질시킨 것도 모라자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게 만든 도아린이 주주들에게는 목숨을 건질 지푸라기 같은 존재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고 태도는 서먹서먹하였다. 이것이 이혼에 필요한 절차라면 그녀는 양보할 수 있었다.“10분 드릴게요.”도아린은 옆 벤치로 가서 앉았다. 심호흡하던 그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네가 우리 집안에 시집온 3년 동안, 우리 집안에서도 할 만큼 했다. 도정국 가게의 비용을 전부 부담했고 네 남동생의 병원비도 건후가 다 책임졌었지. 그동안 네가 입고 먹고 쓰고 한 것도 다 우리 가문의 돈이야.”“건후가 널 소홀히 한 건 다른 여자가 생겨서가 아니었다. 막 회사를 인수했으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겠지. 손보미와의 스캔들은 손보미가 귀국한 후, 언론에서 마구 퍼뜨린 것이야. 두 사람은 전혀 문제가 없었어.”...조용히 듣고 있던 그녀가 한마디 내뱉었다.“3분 남았습니다.”배석준은 마음이 불편했다. 윗사람이 체면을 구기고 호의를 베풀고 있는데 어찌 이리 쌀쌀맞기만 하는 건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전혀 굽힐 생각이 없는 그녀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자가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다. 네가 눈감아 주거라. 어차피 너한테서 건후의 아내 자리를 빼앗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건후의 명성에 금이라도 가면 너한테도 좋을 것이 없어.”배석준은 점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배건후와 닮은 그의 얼굴에 짜증이 한껏 묻어났다. “이렇게 하자. 기자회견을 열 테니 최근의 일은 모두 네가 벌인 자작극이라고 하거라. 너희 두 사람 사이에는 제3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자들한테 말해. 이혼 얘기는 네가 먼저 꺼낸 것이 사실이 아니더냐? 건후는 널 쫓아낼 생각이 단 한 번도 없었어.”그녀는 피식
도아린은 일의 자초지종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안민아와 손보미가 손을 잡고 벌인 짓이라는 걸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사실 안민아가 계속해서 강씨 가문으로 가자고 할 때부터 그녀는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보니 안민아와 손보미가 손을 잡았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지난번 백화점에서 안민아는 손보미를 싫어했고 경멸했다. 그러나 이번에 강씨 가문에서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서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엄마, 내일 연성에 좀 다녀올게요.”“뭐 하러?”“내일이 이혼 숙려기간의 마지막 날이에요. 건후 씨와 깨끗이 정리하려고요.”또한 도지현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도정국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윤명희는 그녀를 껴안으며 입을 열었다.“시집가기 싫으면 평생 엄마랑 같이 살아. 엄마가 너 평생 보살펴줄 테니까.”“고마워요.”“또 한 번 고맙다고 하면 엄마 진짜 화낼 거야.”도아린의 어깨를 살짝 내리치면서 피식 웃었다.“둘째 오빠랑 같이 갔다 와. 배건후가 후회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지니까.”“그럴 리 없어요.”그녀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그날 저녁, 욕조에 누워 마사지를 즐기고 있는데 옆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배건후였다.그녀는 다시 핸드폰을 옆에 두고 눈을 감았다.전화가 한번 끊기더니 다시 또 울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울리던 벨 소리가 잠잠해지고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잠시 후,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운 그녀는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 답장을 보냈다. [강재민: 강홍련이 도유준이 성을 바꾸는 걸 동의했어요. 내일 예단을 준비해서 찾아갈 생각인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서대은: 안준휘와 계약을 취소한 두 회사는 모두 손보미가 강재희라는 이름으로 접근한 회사들이야. 나중에 계약을 이행하라고 했을 때, 상대 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어.][소유정: 며칠 쉬러 갔다 올게. 전화기는 꺼둘 거야. 그러니
억울했던 안민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떨며 차마 말을 하지 못하였다.도아린이 통화 내용을 들을까 봐 일부러 물을 틀어놓았는데 어떻게 이리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아직도 도유준 편을 들고 싶어?”도아린은 그녀의 주머니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도유준한테 전화한 거 맞잖아.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또 도유준한테 속아 넘어간 거야?”안민아는 괴성을 지르며 급히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통화기록을 절대 도아린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핸드폰 뺏지 말아요.”“도유준 그 자식이 또 널 속인 거지? 걱정하지 마. 내가 단단히 혼내줄게.”겉으로는 안민아를 걱정하고 있는 척했지만 사실 도아린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그러나 핸드폰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안민아가 한사코 그녀를 막았다.당황스러운 얼굴의 안민아는 안준휘에게 몇 번이나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이때, 안준휘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끊고는 언짢은 얼굴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강요하지 말거라. 말하기 싫다는 애를 왜 그리...”“왜요?”손을 놓던 도아린은 시선을 안민아에게 돌리더니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했다.“설마 강재민 씨야?”“아니에요. 누구와도 약속한 적 없었어요.”“통화 기록은 양측한테 다 있는 거잖아.”이때, 윤명희가 갑자기 현관에 나타났다. 마트를 다녀온 윤명희는 식재료를 하인에게 건네주고는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으며 안민아를 향해 걸어왔다. “민아야, 통화 기록은 양측한테 다 있는 기록이야. 나중에 도유준이 기록이라도 내세워 네가 먼저 만나자고 했다면 그땐 어떡할 거니? 차라리 지금 사실대로 털어놓거라. 그래야 우리도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안 그래?”안민아는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만약 손보미와 손을 잡고 도아린을 음해한 사실을 진씨 가문에서 알게 된다면 결혼을 물론 사업도 물 건너가고 원수가 되고 말 것이다. 고민 끝에 안민아는 결국 자신이 도유준에게 전화를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