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져가세요.” 배건후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리고 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배석준은 화가 치밀어 오른 채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네 엄마는 병세가 심해서 사람을 못 알아보는 상태다. 나까지 화병으로 죽게 만들고서야 속이 시원하겠니?”“아버님! 진정하세요. 제가 건후 씨를 잘 설득할게요.”갑자기 뒤에서 손보미가 나타나더니 전화에 대고 말했다.배건후는 즉시 전화를 끊고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건후 씨, 이러지 마. 재희 씨한테 예전 일을 말한 건 아니야. 그냥 내가 건후 씨를 많이 좋아한다고만 했어. 재희 씨가 나랑 마음이 잘 맞아서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뿐이야.”손보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아련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엠파이어 빌딩의 고객들을 전부 스카이 빌딩에 빼앗겼잖아. 만약 그 땅마저 강씨 가문에 넘어가면 강재민이 건후 씨 위에 올라설 거야. 그때면 아린 씨는...”그녀는 일부러 말을 멈추며 배건후가 스스로 생각하게 했다. 강재민이 더 많은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도아린이 누구를 선택할지 말이다.“아린 씨를 다시 찾고 싶다면 그 땅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해. 우선 나랑 약혼하자. 그 땅을 차지하고 배씨 그룹이 다시 돌아오면 아린 씨를 붙잡는 것도 가능할 거야. 그리고 건후 씨가 다시 아린 씨를 잡으면 우리의 약혼은 무효로 해도 괜찮아.”배건후는 그녀의 진심 어린 듯한 눈빛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입꼬리 끝에 비웃음을 걸쳤다.“...”손보미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식은땀이 흐르다 못해 다리마저 떨려왔다.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손보미는 급히 소파를 잡고 일어섰다.검은색 세단 한 대가 문 앞에서 멈췄다. 강재민은 얼른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그는 커다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손바닥으로 차 천장을 받치며 조심스레 보호했다.도아린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인 채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강재민에게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표했다.거의 동시에 조수석 문이 열리며 일북이 차에서 내리더
“누가 누구를 불렀는지는 CCTV를 확인하면 알 수 있죠.”강재민은 줄곧 도아린의 곁에 서 있었다.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의 의사에 대해 물었다.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강홍련은 급히 강재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제 손님이 그렇게 많았는데 혹시라도 누가 귓속말이라도 한 게 찍혔으면 어쩌려고. CCTV를 보는 건 곤란해!”“재민아.” 강재희가 입을 열었다.그녀는 강홍련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도아린을 겨냥한 자신의 음모를 들킬까 두려웠다.“누가 누구를 불렀든 상관없어요. 아무리 약혼이 되어 있다고 해도 여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강압적인 겁니다.”강재희는 단호하게 말했다.“만약 민아 씨가 동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결혼을 강요할 수 없어요. 아린 씨가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고소 여부는 아린 씨 마음대로 하세요.”강재민은 큰누나의 처리 방식이 불만스러웠는지 냉소적으로 비꼬았다.“집안 CCTV를 못 본다면 바깥 CCTV를 보면 되겠네.”그는 도아린에게 고갯짓하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도아린이 대문 밖에 나오자마자 차 문 옆에 서 있는 배건후가 눈에 들어왔다.그한테서는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도아린과 강재민이 나란히 걸어나오는 모습을 본 배건후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도아린, 너랑 할 말 있어.”그는 손을 뻗어 도아린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피해버렸다.“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하세요.”배건후는 강재민을 의식한 듯 그를 힐끗 쳐다봤다.강재민은 전혀 피해줄 생각 없이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건후 씨, 아버님께서 비행기에 타셨어...”손보미는 마치 이제야 도아린을 본 것처럼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버님께서 좋아하시는 요리가 있으시면 미리 준비해 달라고 할까?”강재민은 흥미롭다는 듯 일을 더 크게 만들었다.“건후 씨는 약혼 얘기를 전하러 오신 거예요?”배건후는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강재민을 때리고 싶은 마음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그는 원래 도
“둘이 정말 약혼하나 봐요.”차가 강씨 가문을 떠난 후에야 강재민은 도아린과 거리를 조금 벌렸다.그는 조용히 도아린을 바라보며 미세한 표정 변화조차 놓치지 않았다.“속상하면 울어도 돼요.”“제가 왜 울죠?”도아린의 눈에는 슬픔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전 기뻐 죽겠는데요.”그녀는 되레 이혼 숙려기간이 지난 뒤 배건후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손보미와 약혼하게 되었으니 그녀는 진정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도아린은 백미러를 힐끗 보며 물었다.“강씨 가문의 차들은 모두 원격 조종이 가능하다던데요?”강재민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따라오던 차는 멈춰 섰다.배건후는 화가 나서 핸들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는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린 뒤 근처에 삼각대를 설치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다시 차로 돌아왔을 때 차는 다시 작동했다.다만 강재민의 차는 이미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강재민은 도아린을 바라보며 물었다.“제가 어디서 증거를 가져왔는지는 왜 묻지 않아요?”“재민 씨가 말하는 게 도유준의 증거에요? 아니면 배지유의 증거에요?”도아린이 되묻자 강재민은 잠시 멍해 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강씨 가문의 차들은 모두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어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까지 녹화되었다.그는 메모리 카드를 꺼내 도아린에게 건넸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받았다.30분 뒤 강씨 가문의 차는 해남 병원에 도착했다. 도아린과 강재민은 약국을 하나씩 방문하며 찾아다녔다.비록 그들은 CCTV를 마음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문제도 아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배지유가 약을 샀던 약국을 찾아냈다.“이 약은 어떤 용도의 약인가요?”도아린은 같은 약병을 들고 물었다.“이건 우울증 치료제입니다.”새로 출시된 약으로 효
“우리 딸이랑 결혼할 거야?”“...”진옥경은 급히 남편의 손을 붙들며 진정시키려 했다.진씨 가문과 강씨 가문은 오랜 세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고 이런 일이 생기기를 누구도 바라지 않았다.강씨 가문의 배려가 부족했던 건 맞지만 진씨 가문도 딸을 연회에 데리고 와서 신경 쓰지 못한 책임이 있었다.양쪽 모두 책임이 있었지만 모든 걸 강재민에게 떠넘길 순 없었다.강재민은 진심 어린 태도로 말했다.“죄송합니다. 전 민아 씨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민아 씨와 결혼해도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경제적인 보상을 하겠습니다만...”“네 돈 따위 필요 없어!” 안준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분노에 차 소리쳤다.“난 정의를 원해!”도아린은 가방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더니 안준휘 앞으로 건넸다.“모든 게 기록되어 있을 거예요.”도아린은 잠시 멈췄다가 계속해서 말했다.“민아가 고소를 원한다면 반드시 돕겠습니다. 만약 민아가 추궁하고 싶지 않다면 제가 제대로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다만 도유준과 결혼하는 것은 신중하게 결정하셨으면 합니다. 도유준은 허영심 많고 탐욕스러운 인간이라 좋은 배우자가 아닙니다.”안준휘는 메모리 카드를 노려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진옥경은 망설이며 카드를 집어 들고 말했다.“이 일은 민아에게 맡기도록 하죠.”그녀는 2층으로 올라가며 강재민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만약 안민아가 강재민과 결혼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진범준은 안준휘와 단둘이 이야기하겠다고 도아린에게 눈짓했다.그녀는 핑계를 대고 강재민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이건 뭐예요?”강재민은 책상 위에 놓인 자수 손수건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도아린은 그의 손을 세게 쳐냈다.“만지지 마세요!”“...”강재민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도아린은 서둘러 손수건을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저 연성으로 돌아가고 싶어요.”“사모님을 구하러?”“네.” 도아린이
조직의 규율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그래서 도아린은 두 후보의 제안을 거절하고 디자인 업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도아린은 머리를 간단히 틀어 올리고 비녀로 고정한 뒤 거울을 통해 강재민을 바라봤다.“재민 씨의 스카이 빌딩에서 라윤주를 위해 작업실을 하나 준비했다면서요?”“준비했죠.”강재민은 애정 어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만 디자이너분께서 받아들일지 모르겠네요.”“만약 재민 씨가 라윤주를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 걸 알게 된다면 저주라도 걸지 않을까요?”강재민은 크게 웃으며 뒤돌아 아까 서랍을 가리켰다.“이런 거요?”도아린이 부정하려던 찰나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안민아의 방에서 울려 퍼진 것 같았다.도아린과 강재민은 빠르게 안민아의 방으로 향했고 그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도아린 혼자 방에 들어갔다.그녀는 침대에 엎드린 채 목 놓아 울고 있었고 진옥경은 손에 플레이어를 들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들은 이미 메모리 카드에 담긴 내용을 들은 듯했다.진옥경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봤다.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그 내용, 너는 들어봤니?”“아니요.” 도아린이 고개를 저었다. 안민아의 허락 없이는 듣지 않았다.“그래.” 진옥경은 헤드셋을 벗으며 결심한 듯 말했다.“민아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게.”“...”도아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진옥경은 한참 만에야 안민아를 진정시킨 뒤 함께 일 층으로 내려왔다.집을 나설 때, 안민아는 강재민을 한 번 쳐다봤다.진범준이 안준휘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표정이 아까보다는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아내와 딸이 내려오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진옥경은 딸의 손을 꼭 잡은 채 복잡한 표정으로 진범준을 바라보며 말했다.“민아는 내가 데려갈게. 그리고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게.”그녀는 안준휘에게 그만 떠나자고 눈짓했고 그의 분위기가 단번에 바뀌었다.안씨 가문은 해남에서 거주하지 않았기에 매번 해남에 오면 진씨 가문에서 머물렀고 진
“저 먼저 돌아갈게요. 소식 있으면 바로 알려줘요.”도아린은 강재민을 배웅하자마자 대문 앞에서 배건후와 마주쳤다.그는 자동차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발치에는 담배꽁초가 여러 개 떨어져 있었고 꽤 오래전부터 와 있었던 것 같았다.발소리가 들리자 배건후는 고개를 돌려 강재민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조명 아래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강렬한 압박감이 느껴졌다.배건후는 몸을 일으키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강재민을 내려다보았다.강재민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이 시간에 공항에 있어야 할 텐데 웬 일로? 호텔이라도 예약해 드릴까요?”“필요 없어요.”강재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아린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그가 떠난 뒤 도아린도 그만 들어가려는 순간 배건후는 성큼 다가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난 손보미랑 결혼하지 않을 거야.”“그게 뭐가 중요하죠?”배건후의 검은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너 분명히 신경 쓰고 있잖아. 왜 인정하지 않는 거야?”도아린은 두 걸음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예전엔 신경 썼었죠. 하지만 제 감정 따윈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이제는 당신이 손보미랑 결혼하든 누구랑 결혼하든 신경 안 써요. 근데 왜 이제 와서 못 받아들이는 것처럼 구는 거죠?”“...”배건후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가슴이 조여왔다.한참 동안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배씨 그룹이 땅 하나를 입찰하고 있어. 강씨 가문에서 도와주겠다고 했고, 손보미와 약혼은 임시방편일 뿐이야. 땅을 얻으면 그 자리에서 약혼을 깰 거야.”도아린은 가볍게 비웃음을 흘렸다.“건후 씨가 성공하고 싶든, 누구의 도움을 얻고 싶든 간에 건후 씨의 선택이에요. 강씨 가문은 그 땅을 포기하면서까지 건후 씨와 손보미를 이어주려는 걸 보면 손보미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건후 씨도 알겠죠. 전 더 이상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지 않아요.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저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요.
이틀 후,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왔다.진경수는 원래 동행할 예정이었으나 강재민이 이른 아침부터 그녀를 데리러 왔다.그는 진경수에게 한정판 시계를 선물하며 즉시 호감을 얻었다.연성에 도착한 후, 두 사람은 먼저 지희와 율이를 만나러 갔다.율이는 도아린 옆에 또 다른 멋진 아저씨가 나타난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그는 육하경의 우아한 분위기와도 진경수의 매혹적인 분위기와도 달랐다.냉랭하고 말수가 적었지만 유독 도아린을 바라볼 때만 강재민의 눈에는 온화한 빛이 스쳤다.“이제 멋진 아저씨를 버린 거예요?”율이는 도아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도아린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웃으며 설명했다.“네 보미 언니가 곧 멋진 아저씨와 결혼할 거야. 그러니까 이제 언니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율이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그녀는 전보다 조금 살이 올랐고 얼굴색도 훨씬 좋아졌다.도아린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좋은 소식 하나 알려줄게.”율이는 강재민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삐죽였다.“저 아저씨랑 결혼하려고요?”강재민은 그 한마디에 고개를 돌렸다.그의 맑은 눈동자에는 온화한 빛이 가득했지만 율이는 조금 겁이 난 듯 본능적으로 도아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결혼 안 해. 지금은 누구하고도 결혼 안 할 거야.” 도아린이 말했다.“지금은 누구하고도 결혼 안 한대.”강재민은 지금이라는 두 글자를 강조하며 말했다.“만약 언젠가 결혼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나를 고려하겠지.”“그럼 다른 언니랑 만날 거예요?”율이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어른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아린 씨 외에는 누구하고도 만나지 않을 거야.”율이는 눈을 깜빡이며 작은 손가락을 내밀었다.“약속해요! 만약 아린 언니를 괴롭히면 내가 귀신이 돼서라도... 으읍!”도아린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누가 그런 말 가르쳤어!”율이는 도아린의 진지한 표정에 겁먹은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재민은 두 사람이 서로를
“걱정마요. 결국엔 다 해결될 거예요.”육하경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천천히 움켜쥐며 몸이 굳어졌다.도아린은 긴장하는 그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율이의 생모 외에 또 무슨 일이 하경 씨를 이렇게 긴장하게 하죠?”“건후 씨랑 보미 씨가... 약혼했어요.”육하경은 망설이며 말했다.“알고 있어요.”육하경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자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좌석에 기댄 채 축 처졌다.배씨 가문은 어제 세인트존스 호텔에서 약혼식을 열었고 배건후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배석준은 그의 친구들과 기자들을 초대했다.소문에 따르면 손보미는 강씨 가문의 큰딸과 의자매를 맺었고 강씨 가문에서도 두 사람의 혼사를 지지하며 스스로 땅 입찰 경쟁을 포기했다고 한다.이 소식은 순식간에 상업계에 퍼지면서 원래 배씨 가문과 경쟁하려던 상대들은 경계심을 가졌고 전에 협력을 취소했던 이들도 관계를 회복하기에 바빴다.그 결과, 배씨 그룹의 주가는 하룻밤에 안정되었다.“전 건후가 보미 씨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육하경은 담배를 꺼내 피우려다 도아린을 흘겨보더니 다시 집어넣었다.“상관없어요.”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연성 상업계의 상징적인 건물인 엠파이어 빌딩의 대형 스크린에는 손보미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거리가 멀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표정으로 봐서는 엄청 행복해 보였다.배씨 저택에 도착하자 육하경이 먼저 문을 두드렸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문을 연 사람은 손보미였다.그녀는 육하경을 보고 잠시 멍해 있더니 뒤따라온 도아린을 발견하고 어느새 눈에 혐오가 차올랐다.“아린 씨, 난 네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그래서 어제 약혼식에도 초대하지 않았어.”“도아린?”곧이어 강홍련이 나오더니 비웃으며 말했다.“그날 신경 쓰지 않는다더니, 뭐야? 안달이 나서 연성까지 따라온 거야?”강홍련은 강씨 가문의 신분으로 돌아왔고 말로는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건 분명히 도아린과 관련이 있었고 아버지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상 도아린을 달래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강재민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하지만 막 1층에 도착하자 머리 위에서 강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했을 때 넌 바로 달려가지 않았어. 이미 기회를 놓친 거야. 지금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참인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 주얼리 매장에 심각한 타격을 줄 거라고.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생각이야?”강재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는 순간적으로 욕지거리가 나갔지만 결국 방향을 바꿔 다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강재희를 지나칠 때, 차갑게 말했다.“누나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아? 내 사람한테 그럴 생각은 접어.”강재희가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정말 여자를 모르네!’한편, 도아린이 장수현을 찾아갔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드디어 절 찾아왔군요!”두 사람이 악수할 때 심지어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그가 유자차를 한 잔 내밀었지만 도아린은 차를 바라보며 손을 대지 않았다.“배 대표님이 알려주신 거예요. 아린 씨가 오면 유자차를 타 드리라고 하셨죠.”장수현은 배건후의 말을 떠올리며 덧붙였다.“따뜻한 물로 우려내고 레몬즙 두 방울 추가했어요. 한 번 맛보세요.”도아린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작은 컵이었지만 그녀는 손이 떨려 쉽게 들지 못했고 장수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손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나요?”“그런게 아니라...”말을 마친 후 도아린이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분명 그녀가 좋아하는 맛이었지만 갑자기 코끝이 시큰했다.“배 대표의 사건은요?”“그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가진 증거만으로도 배 대표님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어요.”장수현은 서랍에서 두 개의 서류봉투를 꺼냈다.“이 두 개의 문서는 도아린 씨의 협조가 필요합니다.”“저요?”도아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찻잔
다음 날, 배지유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경호원은 그녀를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의사를 이용할 방법을 생각했다.“아이고!”의사가 병실에서 나오자 그녀는 일부러 다리를 움켜잡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 다리가 너무 아파요! 다시 감염된 거 아닐까요? 유 쌤,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유승호가 다가가려 하자 경호원이 막아섰다.“저희 대표님 돌보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가씨는 저희가 병원에 모셔가겠습니다.”“유 쌤! 제발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배지유가 손을 뻗어 유승호의 가운을 붙잡으려 했지만 유승호는 경호원과 함께 그녀를 지나쳐 가버렸고 더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말했다.“아가씨, 저희가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배지유는 악에 받쳐 어금니를 꽉 물었다.“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경호원은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바로 주현정에게 보고했다.주현정이 비웃으며 말했다.“이제 그놈들도 슬슬 초조해지는군. 조급하면 조급할수록 약점을 드러내기 마련이지.”“어디 나갈 거야?”진경수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도아린을 보고 급히 다가갔다.“지우 씨의 촬영이 거의 끝나가요. 가서 봐야겠어요.”“일남이 하고 일북이 보호하고 있으니 별일 없을 거야. 그러니 너도...”진경수가 그녀의 가방을 잡으며 말렸지만 도아린이 피했다.“오빠, 이렇게 날 집에 가둬놓는 건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들에게 숨 돌릴 기회를 주는 거야.”“가둬놓다니...”진경수가 눈을 피하며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인간성이 없어! 위험한 일은 우리가 할 테니, 너는 그냥 부모님 곁에서 안전하게 있어 주면 안 되겠어?”“오빠, 솔직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진씨 가문의 사업에는 영향이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오빠나 큰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예요.”도아린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배 대표가 사
주현정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무표정한 얼굴로 딸의 연기를 지켜보았다.배지유는 몇 번 울먹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모든 책임을 남궁유민에게 떠넘기려고 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강요한 것이었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했다.“오빠가 남궁 변호사한테 내 교통사고 소송을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 변호사가, 글쎄, 나한테 오히려 오빠를 모함하라고 했어요.”“나는 오빠가 얼마나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인지 잘 알거든요. 오빠가 절대 회사 자금을 횡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겉으로는 남궁유민의 협박에 따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오빠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길 바랐어요! 오빠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주현정은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딸이 이렇게 교활하고 악독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을 이렇게 고상한 이유로 정당화하려는 모습에 실망감이 몰려왔다.배지유는 눈물이 나지 않자 점점 더 통곡하며 눈물 연기를 했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눈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내가 처음에 약을 바꾼 것도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지 않게 하려고 그랬던 거예요. 엄마 목숨을 위협하려던 게 아니라 엄마가 좀 더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다고요!”“게다가 내가 왜 오빠를 해치려 하겠어요? 난 미끼로 자처해서 남궁유민 그 배신자를 까발리려고 그랬던 거예요!”“엄마!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두 분이 이혼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계속 같이 살았을 거고 아빠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나도 남궁유민에게 협박당하지 않았을 거고,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회사 일을 아빠가 처리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에요! 내 말이 틀렸어요?”주현정은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딸에게 짜증이 나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남궁유민이 널 협박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무슨 수로 널 협박할 수 있겠어?”“그게...”배지유는 급하게 머리를 굴리며 고개를 숙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 몰랐다.잠시 고민하던 배지유는 사실대로 말
“누구...?”“너무 팬이에요! 저 ‘화성의 별빛’이에요!”“아, 안녕하세요!”도지현은 그녀를 바로 기억해 냈다.이 팬은 그가 방송을 시작한 날부터 채팅방에 있었고 팬 단톡방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이었다.도지현의 스태프가 그녀에게 팬카페 관리자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며 대신, 팬으로 남아 계속 응원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예의상 가볍게 악수를 나눴고 전미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기... 부탁드릴 게 있는데, 저분한테 잘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보험사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수리비는 제가 전액 부담할게요.”도지현은 강재민을 바라보며 말했다.“형...”강재민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그냥 가세요. 괜찮습니다. 너도 얼른 차 타.”“정말 고맙습니다!”전미나는 연신 인사를 하며 빠르게 자신의 차로 돌아갔고 강재민은 명함을 휙 차 안으로 던지고 시동을 걸었다.명함이 미끄러져 내려가 도지현의 발밑에 떨어졌다.“전미나?”‘티파니 주얼리의 수석 디자이너... 거긴 진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보석 브랜드잖아?’도지현은 누나가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를 떠올리며 강재민에게 물었다.“형, 이 명함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저 팬분인데, 팬카페 관리자로 모시고 싶어서요.”“가져가.”강재민은 애초에 전미나에게 차 수리비를 받을 생각이 없었고 단지 티파니 주얼리의 꼬투리를 잡고 싶었을 뿐이였다.그는 도지현을 집 앞에 내려준 후, 바로 차를 수리하러 갔다.도지현은 도아린의 부탁대로 그날 사고 이후 모건 그룹의 동향과 배건후의 근황을 검색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그날 사고 이후, 주현정은 모건 그룹의 고위 부사장을 지명해 그룹 운영을 대리하게 했다.한편, 배건후가 입원한 사립 병원은 철저한 경비 속에 통제되고 있었고 경호원들이 출입을 관리하고 있어 의료진 외에는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뿐만 아니라, 그의
“누나, 어디 불편한 데 없어?”“손이 아직 불편하고 가끔 머리가 어지러운 것 빼고는 괜찮아.”도아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동생이 이렇게 강한데 누나가 이런 일로 무너지면 창피하지 않겠어?”“그래도 상황 봐가면서 해야지! 누나가 다치면 나는 더 이상 의지할 사람도 없다고!”“이번엔 지현이 말이 맞아요.”강재민이 두 사람에게 물을 따라주며 도아린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런 일이 있었으면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요? 만약에...”그는 말을 삼키며 씁쓸하게 웃었다.만약 그녀가 먼저 연락했더라면 그는 최대한 그녀가 그 사람들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고 아마 그 차 사고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한 후, 진씨 가문은 외부인의 병문안을 철저히 차단하며 그녀를 완벽하게 보호했다.강재민은 진수혁과의 친분 덕분에 그가 있을 때 잠깐 들어와 도아린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다.혼수 상태였던 도아린은 계속 배건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배건후가 그녀를 구한 일만으로 그의 모든 잘못이 사라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쉽게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원래부터 미묘하고 어색했던 강재민과 도아린의 관계는 이제 배건후까지 다시 끼어들면서 더욱 복잡해졌다.“지현아, 네 핸드폰 좀 써도 될까?”도아린이 손을 내밀자, 도지현은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누나, 내가 새 핸드폰 사줄까? 이제 방송해서 돈도 버는데!”“누나도 핸드폰은 있어.”도아린은 단지 남동생의 핸드폰도 집에서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진수혁이 새 핸드폰을 사주긴 했지이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사용 시간을 제한해 놓았다.밤중에 몰래 핸드폰을 켜봤지만 항상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았다.반면, 도지현의 핸드폰은 인터넷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사용은 가능했다.이는 집 인터넷의 제한 속도 때문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차단기를 작동시켰을 가능성도 있었다.“계정이 뭐야? 나중에 방송 챙겨볼게.”도아린이
“그리고 나서...”윤명희는 말하다가 진범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하는 걸 허락했다.“그리고 나서 건후는 수술실로 들어갔어.”윤명희는 이런 말을 전하기가 어려운 듯했다.그녀와 도아린은 재회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그녀는 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마음은 분명 요동치고 있을 것이었다.“아린아...”윤명희는 딸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그녀의 반응을 세심히 살폈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그럼 아직 중환자실에 있는 거예요? 아직 위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아니,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어. 현정 씨가 건후를 연성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거든.”윤명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좀 더 회복되면 엄마랑 같이 건후 보러 가자.”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윤명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배건후가 정말 그녀보다 심하게 다쳤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국내 최고 의료 시설을 갖춘 해남 병원을 두고 굳이 그를 연성시에 있는 병원으로 옮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계속 추궁해 봤자 거짓말만 늘어날 뿐이었으니 도아린은 일찍 퇴원 해서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집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은 계속 번갈아 가며 그녀 곁을 지켰다.겉으로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녀가 외부와 연락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도지현이 찾아왔다.그동안의 훈련과 적응 끝에 그는 드디어 의족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도지현은 라이브 방송 계정을 개설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고 팬들에게 자신의 의족을 보여주었다.그러면서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한테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
“오빠, 제 휴대폰 어디갔는지 알아요?”“너 휴대폰 고장 났더라고. 내일 새로 바꿔 줄게.”진수혁은 다시 소파로 돌아가 업무를 이어갔다.도아린은 심심해서 소파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였다. 그 안에는 세탁된 옷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진수혁은 도아린의 병실에 머물며 그녀 곁만 지키고 있었다.“오빠, 저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쉬어요.”도아린이 말했다.“이제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저를 건드리진 않을 거니까요.”“그럴 가능성이 작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야.”진수혁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는데 손가락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휴식뿐이야. 몸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사흘 후, 도아린은 바닥에 발을 딛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오빠, 저 건후 씨 보러 가고 싶어요. 과거 일은 제쳐둔다고 해도 이번에는 건후 씨가 절 구해준 거잖아요.”“건후 씨는 이 병원에 없어.”진수혁은 도시락을 열고는 그녀에게 숟가락을 건넸다.도아린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제 기억엔 건후 씨도 손과 다리가 골절됐고 이마에도 상처가 있었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기로 교통 사고는 겉으로 보면 얼마 안 다친 것 같지만 심하게 다친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진수혁은 부주의로 숟가락을 바닥에 떨구고 몸을 숙여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이거 씻고 올게.”병실 안에도 세면대가 있었지만 진수혁은 굳이 숟가락을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도아린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설마, 내 말이 맞았던 걸까?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걸까?’그녀는 당시 배건후의 상태를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사고 이후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 알 수 없었다.‘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면 혹시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건가?’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윤명희와 진범준이 들어왔다.“퇴원 준비 끝냈어. 밥을 다 먹으면 바로 퇴원하자.”윤명희는 남편을 힐끗 본 후 도아린에게 말했다.“아린
“너 쉬어야 해.”역시 진수혁은 도아린이 다른 사람과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지금은 잠이 오지 않아요.”도아린은 변슬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말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러자 변슬기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슬기 씨랑 여자끼리 할 얘기가 좀 있어요.”진수혁은 변슬기의 수줍은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힐끗 쳐다봤다.“도 선생님을 오래 방해하지는 않을게요.”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오래 방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아린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진수혁의 반응을 살폈다.“그럼 잠깐만 허락해줄게.”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병실을 나갔다.“도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변슬기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도아린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꿈을 꿀 때마다 자신이 더러운 수술대에 눕혀져 있는 장면이 떠올랐고 깨어 있는 상태인데도 장기를 이식하겠다고 날카로운 수술칼을 들이대는 장면도 아주 소름 끼쳤다.그런 꿈을 꿀 때마다 도아린이 하늘에서 내려와 천사처럼 그녀를 구해 주었다.‘빨리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요!’그렇게 매번 변슬기는 도아린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면 정작 도아린은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변슬기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혹시라도 그 꿈이 현실로 될까 봐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자기를 구해준 대가로 도아린이 나쁜 놈들에게 희생될까 봐 말이다.“울지 마요.”도아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변슬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도 선생님, 제가 너무 멍청했어요. 안민아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도 선생님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텐데...”“피해자를 탓할 필요는 없어요. 안민아가
진수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수술 때문에 다 잘라 버렸어. 금방 자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면 비서한테 가발이라도 사 오라고 할까?”‘그래서 지금 내가 대머리라고?’손을 들어 가까스로 머리를 만져보자 얇은 망 같은 게 씌워져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던 걸 보면 부상이 꽤 심했던 게 분명했다.후유증만 남지 않는다면 머리카락 정도야 대수롭지 않았다.“건후 씨는... 괜찮아요?”그녀는 배건후가 차에서 굴러떨어지고도 절뚝이며 달려오던 모습으로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 도움을 요청하던 것까지, 그리고 구급차 안에서 했던 말마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병원에 도착한 후로부터는 의식이 흐릿했지만 눈을 뜰 때마다 그가 곁에 있는 걸 볼 수 있었다.배건후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버텨야 한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진수혁은 그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휴대폰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일 끝나면 가발 하나 사 와.”그는 병실 문을 닫고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번만 보고 바로 나갈게!”강재민이 진수혁의 제지를 뿌리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도아린이 깨어나 있는 걸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아린 씨, 깨어났어요?”그를 막지 못한 진수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아린이는 휴식이 필요해. 그러니까 용건만 말해.”“나도 알아.”강재민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몸을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도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절... 알아볼 수 있겠어요?”강재민은 순간 긴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누구냐고 묻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당연히 알죠.”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강재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병실 문가에 서 있는 진수혁을 바라보았다.“나 아린 씨랑 단둘이 몇 마디만 하면 안 돼?”“안 돼.”진수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방금 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