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마요. 결국엔 다 해결될 거예요.”육하경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천천히 움켜쥐며 몸이 굳어졌다.도아린은 긴장하는 그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율이의 생모 외에 또 무슨 일이 하경 씨를 이렇게 긴장하게 하죠?”“건후 씨랑 보미 씨가... 약혼했어요.”육하경은 망설이며 말했다.“알고 있어요.”육하경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자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좌석에 기댄 채 축 처졌다.배씨 가문은 어제 세인트존스 호텔에서 약혼식을 열었고 배건후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배석준은 그의 친구들과 기자들을 초대했다.소문에 따르면 손보미는 강씨 가문의 큰딸과 의자매를 맺었고 강씨 가문에서도 두 사람의 혼사를 지지하며 스스로 땅 입찰 경쟁을 포기했다고 한다.이 소식은 순식간에 상업계에 퍼지면서 원래 배씨 가문과 경쟁하려던 상대들은 경계심을 가졌고 전에 협력을 취소했던 이들도 관계를 회복하기에 바빴다.그 결과, 배씨 그룹의 주가는 하룻밤에 안정되었다.“전 건후가 보미 씨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육하경은 담배를 꺼내 피우려다 도아린을 흘겨보더니 다시 집어넣었다.“상관없어요.”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연성 상업계의 상징적인 건물인 엠파이어 빌딩의 대형 스크린에는 손보미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거리가 멀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표정으로 봐서는 엄청 행복해 보였다.배씨 저택에 도착하자 육하경이 먼저 문을 두드렸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문을 연 사람은 손보미였다.그녀는 육하경을 보고 잠시 멍해 있더니 뒤따라온 도아린을 발견하고 어느새 눈에 혐오가 차올랐다.“아린 씨, 난 네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어. 그래서 어제 약혼식에도 초대하지 않았어.”“도아린?”곧이어 강홍련이 나오더니 비웃으며 말했다.“그날 신경 쓰지 않는다더니, 뭐야? 안달이 나서 연성까지 따라온 거야?”강홍련은 강씨 가문의 신분으로 돌아왔고 말로는
도아린의 눈빛은 사늘하게 식어버렸다.“무슨 짓을 한 거죠?”“내가 뭘 했겠어? 내 아들이 한 거지."강홍련은 우쭐하며 말했다.“모든 걸 잃거나 아니면 우리 외손자랑 결혼해서 강씨 가문의 인맥을 함께 누리거나 둘 중 하나지. 그러나 안씨 가문 사람들은 너보다 훨씬 똑똑하더라.”도아린의 얼굴은 굳어지다 못해 잔뜩 일그러졌다.육하경은 전화를 끊고 나서 도아린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여기서 이렇게 소리치며 난리를 피우면 사모님께 방해되지 않겠어요?”“그 병약한 사람이 무슨 방해를 받는다고...”강홍련은 무언가 잘못된 것을 눈치채고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보미야, 얼른 답례품 사러 가자. 배 대표님께서 곧 이혼 수속을 끝내면 너희도 결혼식을 올리게 될 거야.”“당신도 수속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으면 지금 아린 씨가 여전히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는 것도 알겠네요.”육하경은 단호하게 말했다.강홍련은 참지 못하고 비웃음을 흘렸다.“배 대표님께서 도아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이혼하지도 않았겠죠. 결국 도아린이 문제에요. 3년 동안 애 하나도 못 낳고.”“그러게요.”도아린은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줌마가 대단하죠. 결혼도 안 한 채 도유준같은 종자를 낳다니.”“도아린! 그 입 다물지 못해?”강홍련은 미친 듯이 화를 내며 도아린에게 달려들었다.그러나 일북에게 단숨에 제압당했다.손보미는 강홍련이 곁에서 오히려 방해된다고 생각했지만 강재희의 체면을 생각해 어쩔 수 없이 참았다.“그만하세요.”“도아린이 사람을 너무 괴롭히잖아요!”“이게 괴롭히는 거예요?”도아린은 강홍련이 발광하는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며 말했다.“언젠가는 도유준을 보지 못하게 될 거예요.”“너 따위가 감히?”이들의 다툼 속에서 아무도 배씨 가문의 대문이 열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건후야!”육하경이 소리쳤다.“...”강홍련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손보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배건후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뒤 도아린이 무사한 것을 확인
“금방 잠들었어요.”배지유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요즘 많이 바빴어요? 오랜만에 얼굴 보네요.”그러면서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아줌마, 전복 상자 좀 가져오세요... 제가 특별히 하경 오빠를 위해 산 거예요.”“아주머니는 그만뒀어요.”손보미는 아까 말했던 이유를 다시 반복했다.배지유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아까까지만 해도 저한테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왜 그만둔 거예요?”손보미는 어색하게 입을 비틀며 말했다.“내가 해줄게.”배지유는 굳이 그녀와 격식을 차리지 않고 단번에 알겠다고 했다.순간, 도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가서 사모님 좀 보고 올게요.”배지유가 거절하기도 전에 배건후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가자.”주현정은 전보다 안색이 더 나빠졌고 살도 많이 빠진 상태였다. 식사량도 적고 자주 구토를 했다고 한다.약국 직원이 말한 증상과 일치했다.“먹는 약을 봐야겠어요.”그녀는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부탁이 아니라 통보였다.배지유는 즉시 흥분하며 외쳤다.“도아린! 엄마가 깨어났다고 네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보미 언니가 다 말해줬어. 전에 강씨 가문에서 우리 오빠가 보미 언니랑 결혼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잖아. 지금 와서 무슨 짓이야?”“입 다물어.”배건후가 차갑게 꾸짖었다.“오빠! 지금도 도아린을 옹호하는 거야? 도아린이 이간질하지 않았으면 엄마 아빠는 싸우지 않았을 테고 엄마의 병도 악화되지 않았을 거야!”배지유는 이를 악문 채 소리 질렀다.곁에 있던 육하경은 참다못해 말했다.“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운 건 네 아버지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야. 아린 씨와 아무 상관 없어.”“...”배건후는 이내 육하경을 쳐다봤다.그 역시 아버지와 김지민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하경 오빠, 오빠도 도아린 편이에요? 도대체 도아린이 무슨 마법이라도 부렸어요? 왜 모두 도아린 편을 드는 거냐고!”배지유는 눈가가 촉촉해진 채 입술을 파르르 떨며
배지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하경 오빠, 왜 도아린 대신 사과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혹시 오빠도...”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배건후를 힐끔 쳐다봤다.배지유는 오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비록 오빠가 좋아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소유물에 다른 사람이 손대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배건후의 눈에서 날카로운 살기를 보았지만 그는 육하경을 난처하게 하지 않고 문밖에 있는 도우미에게 말했다.“약 가져와.”“오빠!” 배지유가 놀라서 외쳤다.“만약 가져온 약에 문제가 없다면 도아린이 나한테 사과하는 거예요?”“물론이지.”“그럼 도아린과 완전히 연을 끊고 보미 언니와 결혼할 수 있어요?”“...”배건후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지유는 손보미를 자신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도아린을 매섭게 노려봤다.“만약 도아린이 기회를 틈타지 않았다면 보미 언니가 우리 오빠 와이프가 되었을 거예요. 그랬다면 우리 가족은 아무 일도 없었을 거고 화목했을 거예요! 오빠랑 결혼한 지 3년 동안 약을 그렇게 먹었으면서 아이 하나도 못 가졌잖아요. 이건 하늘이 벌하는 거예요.”손보미는 억울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배지유는 계속해서 말했다.“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는 법이니, 만약 가져온 약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앞으로 도아린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도아린의 눈에는 차가운 비웃음이 번뜩였다.전에 배지유는 배건후를 의식하며 자신에 대한 불만을 억누른 채 얌전한 척 연기했었다.하지만 지금은 연기조차 귀찮은지 본색을 드러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약에 정말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도아린이 3년 동안 임신하지 않은 이유를 배건후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만약 배지유의 말에 휘둘린다면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배건후는 새까만 눈동자로 빤히 응시하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 전에 금방 배씨 그룹을 물려받으면서 모든 게 불안정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를 가지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만약 어머니한테 드린 약에 문제가 없다면 내가 무릎 꿇고 사과할게.”도아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배지유는 화제를 계속 돌렸지만 결국 이 일에 대해 또다시 얘기가 나오자 못마땅하여 이를 악물었다.“오빠, 이건 도아린이 한 말이야! 도아린 괴롭힌다고 나를 탓하지 마!”배지유는 이렇게 말했지만 약을 가지러 가지 않았다.“나랑 같이 가.”육하경은 그녀의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배지유가 육하경을 아주 좋아했어도 그의 이런 태도는 견딜 수 없었다.“하경 오빠, 오빠도 나 의심하는 거야?”“다른 사람이 손을 댔는데 네가 누명을 쓸까 봐 그래.”배지유는 화가 나고 그가 원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돌아가서 약을 도아린에게 건넸다.도아린은 하나씩 대조해보다가 약이 한가지 빠진 것을 발견했다.“그 약은 다 먹었어. 아줌마가 내일 가서 산다고 했는데 있다가 다른 사람을 보낼 생각이야.”배지유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다.“도아린, 사과해.”“그만해. 도아린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아주머니께서 병이 위중하셔서 자신을 지지해주지 못하는 게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손보미는 겉으로는 도아린을 위해 얘기를 해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 배지유의 화를 더 돋우는 것이었다.“지금까지 계속 네가 아주머니를 보살폈잖아. 네가 고생한 걸 모두 다 알고 있어.”“우리 엄마가 걱정되면 나를 모함해도 되는 거예요?”배지유는 배건후를 쳐다보았다.“오빠! 오빠가 외간 여자를 도와 나를 괴롭히는 걸 아빠가 알게 된다면 오빠한테 정말 실망할 거야!”배건후가 약혼식에 참가하지 않은 일 때문에 부자는 한바탕 크게 싸웠고 배석준은 배건후의 대표 직무를 해임하겠다고 얘기했다. 배석준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은 배석준뿐이었다.배건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무 말도 없이 도아린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도아린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이 여전히 쌀쌀하게 날카로운 기세였다.“네가 빼놓은
“도아린, 꼭 나를 그렇게 모함해야 속이 시원하겠어?”배지유는 차갑게 비웃었다.“너는 돌을 들어서 제 발등을 찍고 있네. 엄마는 입원해있는 동안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했는데 영상이고 뭐고 있을 수가 없잖아!”도아린이 설명했다.“이 핸드폰은 어머님이 간호사한테서 산 거야.”핸드폰 안의 데이터는 다 복구되었고 도아린도 그 간호사한테 확인을 마쳤다.“증거가 있다고 하면 재생해봐.”배석준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배지유는 몸을 퍼뜩 떨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앞으로 다가갔다.“아빠...”배석준은 딸의 어깨를 다독이며 배건후를 한번 노려보고는 도아린을 쳐다보았다.“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명예훼손으로 너를 고소할 거야!”도아린이 배지유를 구속당하게 했으니 도아린도 똑같이 당하게 할 것이다.사람들이 거실로 자지를 옮겼다.배건후는 핸드폰을 집에 있는 프로젝터에 연결하여 벽에 화면을 띄웠다.영상들이 배속으로 잇달아 재생되고 배지유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소파에 앉아있었다.그녀는 손가락의 살이 찢어져도 자각하지 못하고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손보미는 사람들이 영상에 집중하는 틈을 타서 성대호에게 문자를 보냈다.약물검사는 일정한 시간이 소요되는 데 배씨 가문이 병원의 입원 건물 한 채를 협찬해줬으니 이러한 작은 요구는 쉽게 만족할 수 있었다.사실 약물검사를 하지 않아도 의사는 약병에 있어야 할 약이 원래 있어야 할 약이 아니라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그래도 빈틈없이 하기 위해 절차대로 진행하였다.결과가 나오자 육하경은 깜짝 놀랐다.원래의 스타틴 약물이 병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우울증약으로 바뀌어있었다. 약을 끊으면 환자는 증상이 서서히 완화되지만, 후유증이 무척 심했다.육하경은 약물검사 보고서를 들고 차에 오르려는 데 누군가가 그를 불러세웠다.“하경아!”성대호는 그의 차 문을 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결과가 나왔어?”“...”육하경은 경계하며 문서를 등 뒤에 숨기고 말했다.“배지유가 너한테 여기로 오라고
육하경은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감을 느꼈지만 그를 벼랑 끝까지 몰아가고 싶지는 않았다.자신의 결심을 증명하기 위해 성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진한 피가 목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육하경은 한숨을 내쉬고 보고서를 집었다. 성대호는 바로 보고서를 빼앗고는 빠르게 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떴다.육하경은 핸들을 꽉 잡고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배 씨 저택에서는 영상이 다 재생되었지만, 배지유가 손을 댄 장면이 나오지는 않았다.뻣뻣하게 굳어있던 배지유는 긴장이 풀려서 울며 배석준의 품에 안겼다.“아빠... 아빠가 오셔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억울해서 죽을 뻔했어요.”딸은 이렇게 서럽게 우는데 도아린은 냉담한 표정이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배석준은 배건후를 쳐다보았다.이렇게 된 마당에 아직도 도아린의 편을 들고 있으니 그는 배건후를 더는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배건후의 긴 손가락이 핸드폰을 만지며 시선은 도아린에게로 향했다.“증거 불충분이야.”도아린은 그가 이렇게 말할 줄 알고 마지막 영상을 재생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여기 시간을 기억하고 다시 여기를 보세요.”그녀는 여러 개 영상을 이어서 재생했다.배지유가 병실을 떠나는 시간에 그녀가 약국으로 가서 약을 구매하는 화면을 이어서 재생하고 그다음은 그녀가 갑자기 병실 침대 옆에 1분가량 서 있다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장면이었다.배지유의 울음소리가 뚝 멈췄고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아린이 자신을 까밝히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증거를 수집했다니. “배지유가 연성에서 약을 구매한 기록을 조사하는 것은 건후 씨한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요...”도아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배건후를 바라보았다.배건후는 핸드폰을 꽉 쥐었고 말투는 전보다 더 차가워졌다.“네가 먼저 인정할래, 아니면 내가 가서 조사할까.”“오빠!”배지유는 마지막 발악을 했다.“제가 약을 사러 간 건 친구의 우울증 때문이에요. 엄마가 왜 이 영상을
짝하는 소리와 함께 배지유는 뺨을 맞고 바닥에 넘어졌다.“너 이렇게 한 이유가 뭐야?”배지유는 귀가 먹먹해져서 배석준의 말을 듣지 못했다.고개를 든 배지유는 분노로 일그러진 배석준이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뭐라고 얘기하는 것만 보였다.손보미는 달려와서 그녀를 안아주었고 그녀의 편을 들어주려는 것 같았지만 배석준과 배건후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웠다.육하경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이마에는 반창고가 붙어있었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았다.“의사가 얘기하길 약을 끊으면 점점 회복된다고 해요.”후유증이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지금 배지유의 처지가 좋지 않은데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는 싶지 않았다.경호원이 들어와서 손보미를 떼어내고는 배지유를 끌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잠깐만요.”도아린이 입을 열었다.“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내가 이미 혼냈잖아. 너는 더 어떻게 할 생각이야?”배석준의 화는 도아린에게로 향했고 눈빛이 사나웠다.“배씨 가문의 일은 네가 이래라저래라할 자격이 없어!”도아린은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이미 예상하였다. 빈 수레처럼 소리만 컸다. 고작 뺨 한번 맞는 거로 배지유의 악행을 덮어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어머님은 이미 이혼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부녀 사이인 두 분이 어머님의 재산을 손에 넣고 싶어서 함께 어머님을 해치려 했다고 의심합니다.”“도아린!”배석준은 두 눈이 충혈되었고 손찌검을 하려고 했지만, 배건후가 앞을 막았다.배석준은 그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오늘 네 팔이 밖으로 굽는다면 앞으로 너는 더는 내 아들이 아니야!”“지유가 엄마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그대로 묵인한다면 저도 더는 당신 같은 아버지 없습니다.”배건후가 차갑게 말했다.“엄마를 모셔갈 겁니다. 엄마가 회복되면 당신들을 고소할 건지 아닌지를 결정할 것이고 그전까지 지유는 반드시 감금당해야 할 것입니다.”“네가 감히!”배건후는 손짓을 했고 경호원은 빠르게 배지유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배지유는 먹먹하던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건 분명히 도아린과 관련이 있었고 아버지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상 도아린을 달래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강재민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하지만 막 1층에 도착하자 머리 위에서 강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했을 때 넌 바로 달려가지 않았어. 이미 기회를 놓친 거야. 지금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참인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 주얼리 매장에 심각한 타격을 줄 거라고.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생각이야?”강재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는 순간적으로 욕지거리가 나갔지만 결국 방향을 바꿔 다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강재희를 지나칠 때, 차갑게 말했다.“누나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아? 내 사람한테 그럴 생각은 접어.”강재희가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정말 여자를 모르네!’한편, 도아린이 장수현을 찾아갔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드디어 절 찾아왔군요!”두 사람이 악수할 때 심지어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그가 유자차를 한 잔 내밀었지만 도아린은 차를 바라보며 손을 대지 않았다.“배 대표님이 알려주신 거예요. 아린 씨가 오면 유자차를 타 드리라고 하셨죠.”장수현은 배건후의 말을 떠올리며 덧붙였다.“따뜻한 물로 우려내고 레몬즙 두 방울 추가했어요. 한 번 맛보세요.”도아린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작은 컵이었지만 그녀는 손이 떨려 쉽게 들지 못했고 장수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손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나요?”“그런게 아니라...”말을 마친 후 도아린이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분명 그녀가 좋아하는 맛이었지만 갑자기 코끝이 시큰했다.“배 대표의 사건은요?”“그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가진 증거만으로도 배 대표님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어요.”장수현은 서랍에서 두 개의 서류봉투를 꺼냈다.“이 두 개의 문서는 도아린 씨의 협조가 필요합니다.”“저요?”도아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찻잔
다음 날, 배지유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경호원은 그녀를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의사를 이용할 방법을 생각했다.“아이고!”의사가 병실에서 나오자 그녀는 일부러 다리를 움켜잡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 다리가 너무 아파요! 다시 감염된 거 아닐까요? 유 쌤,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유승호가 다가가려 하자 경호원이 막아섰다.“저희 대표님 돌보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가씨는 저희가 병원에 모셔가겠습니다.”“유 쌤! 제발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배지유가 손을 뻗어 유승호의 가운을 붙잡으려 했지만 유승호는 경호원과 함께 그녀를 지나쳐 가버렸고 더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말했다.“아가씨, 저희가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배지유는 악에 받쳐 어금니를 꽉 물었다.“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경호원은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바로 주현정에게 보고했다.주현정이 비웃으며 말했다.“이제 그놈들도 슬슬 초조해지는군. 조급하면 조급할수록 약점을 드러내기 마련이지.”“어디 나갈 거야?”진경수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도아린을 보고 급히 다가갔다.“지우 씨의 촬영이 거의 끝나가요. 가서 봐야겠어요.”“일남이 하고 일북이 보호하고 있으니 별일 없을 거야. 그러니 너도...”진경수가 그녀의 가방을 잡으며 말렸지만 도아린이 피했다.“오빠, 이렇게 날 집에 가둬놓는 건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들에게 숨 돌릴 기회를 주는 거야.”“가둬놓다니...”진경수가 눈을 피하며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인간성이 없어! 위험한 일은 우리가 할 테니, 너는 그냥 부모님 곁에서 안전하게 있어 주면 안 되겠어?”“오빠, 솔직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진씨 가문의 사업에는 영향이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오빠나 큰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예요.”도아린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배 대표가 사
주현정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무표정한 얼굴로 딸의 연기를 지켜보았다.배지유는 몇 번 울먹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모든 책임을 남궁유민에게 떠넘기려고 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강요한 것이었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했다.“오빠가 남궁 변호사한테 내 교통사고 소송을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 변호사가, 글쎄, 나한테 오히려 오빠를 모함하라고 했어요.”“나는 오빠가 얼마나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인지 잘 알거든요. 오빠가 절대 회사 자금을 횡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겉으로는 남궁유민의 협박에 따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오빠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길 바랐어요! 오빠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주현정은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딸이 이렇게 교활하고 악독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을 이렇게 고상한 이유로 정당화하려는 모습에 실망감이 몰려왔다.배지유는 눈물이 나지 않자 점점 더 통곡하며 눈물 연기를 했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눈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내가 처음에 약을 바꾼 것도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지 않게 하려고 그랬던 거예요. 엄마 목숨을 위협하려던 게 아니라 엄마가 좀 더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다고요!”“게다가 내가 왜 오빠를 해치려 하겠어요? 난 미끼로 자처해서 남궁유민 그 배신자를 까발리려고 그랬던 거예요!”“엄마!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두 분이 이혼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계속 같이 살았을 거고 아빠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나도 남궁유민에게 협박당하지 않았을 거고,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회사 일을 아빠가 처리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에요! 내 말이 틀렸어요?”주현정은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딸에게 짜증이 나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남궁유민이 널 협박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무슨 수로 널 협박할 수 있겠어?”“그게...”배지유는 급하게 머리를 굴리며 고개를 숙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 몰랐다.잠시 고민하던 배지유는 사실대로 말
“누구...?”“너무 팬이에요! 저 ‘화성의 별빛’이에요!”“아, 안녕하세요!”도지현은 그녀를 바로 기억해 냈다.이 팬은 그가 방송을 시작한 날부터 채팅방에 있었고 팬 단톡방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이었다.도지현의 스태프가 그녀에게 팬카페 관리자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며 대신, 팬으로 남아 계속 응원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예의상 가볍게 악수를 나눴고 전미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기... 부탁드릴 게 있는데, 저분한테 잘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보험사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수리비는 제가 전액 부담할게요.”도지현은 강재민을 바라보며 말했다.“형...”강재민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그냥 가세요. 괜찮습니다. 너도 얼른 차 타.”“정말 고맙습니다!”전미나는 연신 인사를 하며 빠르게 자신의 차로 돌아갔고 강재민은 명함을 휙 차 안으로 던지고 시동을 걸었다.명함이 미끄러져 내려가 도지현의 발밑에 떨어졌다.“전미나?”‘티파니 주얼리의 수석 디자이너... 거긴 진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보석 브랜드잖아?’도지현은 누나가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를 떠올리며 강재민에게 물었다.“형, 이 명함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저 팬분인데, 팬카페 관리자로 모시고 싶어서요.”“가져가.”강재민은 애초에 전미나에게 차 수리비를 받을 생각이 없었고 단지 티파니 주얼리의 꼬투리를 잡고 싶었을 뿐이였다.그는 도지현을 집 앞에 내려준 후, 바로 차를 수리하러 갔다.도지현은 도아린의 부탁대로 그날 사고 이후 모건 그룹의 동향과 배건후의 근황을 검색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그날 사고 이후, 주현정은 모건 그룹의 고위 부사장을 지명해 그룹 운영을 대리하게 했다.한편, 배건후가 입원한 사립 병원은 철저한 경비 속에 통제되고 있었고 경호원들이 출입을 관리하고 있어 의료진 외에는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뿐만 아니라, 그의
“누나, 어디 불편한 데 없어?”“손이 아직 불편하고 가끔 머리가 어지러운 것 빼고는 괜찮아.”도아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동생이 이렇게 강한데 누나가 이런 일로 무너지면 창피하지 않겠어?”“그래도 상황 봐가면서 해야지! 누나가 다치면 나는 더 이상 의지할 사람도 없다고!”“이번엔 지현이 말이 맞아요.”강재민이 두 사람에게 물을 따라주며 도아린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런 일이 있었으면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요? 만약에...”그는 말을 삼키며 씁쓸하게 웃었다.만약 그녀가 먼저 연락했더라면 그는 최대한 그녀가 그 사람들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고 아마 그 차 사고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한 후, 진씨 가문은 외부인의 병문안을 철저히 차단하며 그녀를 완벽하게 보호했다.강재민은 진수혁과의 친분 덕분에 그가 있을 때 잠깐 들어와 도아린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다.혼수 상태였던 도아린은 계속 배건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배건후가 그녀를 구한 일만으로 그의 모든 잘못이 사라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쉽게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원래부터 미묘하고 어색했던 강재민과 도아린의 관계는 이제 배건후까지 다시 끼어들면서 더욱 복잡해졌다.“지현아, 네 핸드폰 좀 써도 될까?”도아린이 손을 내밀자, 도지현은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누나, 내가 새 핸드폰 사줄까? 이제 방송해서 돈도 버는데!”“누나도 핸드폰은 있어.”도아린은 단지 남동생의 핸드폰도 집에서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진수혁이 새 핸드폰을 사주긴 했지이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사용 시간을 제한해 놓았다.밤중에 몰래 핸드폰을 켜봤지만 항상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았다.반면, 도지현의 핸드폰은 인터넷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사용은 가능했다.이는 집 인터넷의 제한 속도 때문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차단기를 작동시켰을 가능성도 있었다.“계정이 뭐야? 나중에 방송 챙겨볼게.”도아린이
“그리고 나서...”윤명희는 말하다가 진범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하는 걸 허락했다.“그리고 나서 건후는 수술실로 들어갔어.”윤명희는 이런 말을 전하기가 어려운 듯했다.그녀와 도아린은 재회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그녀는 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마음은 분명 요동치고 있을 것이었다.“아린아...”윤명희는 딸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그녀의 반응을 세심히 살폈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그럼 아직 중환자실에 있는 거예요? 아직 위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아니,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어. 현정 씨가 건후를 연성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거든.”윤명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좀 더 회복되면 엄마랑 같이 건후 보러 가자.”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윤명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배건후가 정말 그녀보다 심하게 다쳤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국내 최고 의료 시설을 갖춘 해남 병원을 두고 굳이 그를 연성시에 있는 병원으로 옮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계속 추궁해 봤자 거짓말만 늘어날 뿐이었으니 도아린은 일찍 퇴원 해서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집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은 계속 번갈아 가며 그녀 곁을 지켰다.겉으로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녀가 외부와 연락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도지현이 찾아왔다.그동안의 훈련과 적응 끝에 그는 드디어 의족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도지현은 라이브 방송 계정을 개설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고 팬들에게 자신의 의족을 보여주었다.그러면서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한테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
“오빠, 제 휴대폰 어디갔는지 알아요?”“너 휴대폰 고장 났더라고. 내일 새로 바꿔 줄게.”진수혁은 다시 소파로 돌아가 업무를 이어갔다.도아린은 심심해서 소파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였다. 그 안에는 세탁된 옷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진수혁은 도아린의 병실에 머물며 그녀 곁만 지키고 있었다.“오빠, 저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쉬어요.”도아린이 말했다.“이제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저를 건드리진 않을 거니까요.”“그럴 가능성이 작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야.”진수혁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는데 손가락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휴식뿐이야. 몸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사흘 후, 도아린은 바닥에 발을 딛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오빠, 저 건후 씨 보러 가고 싶어요. 과거 일은 제쳐둔다고 해도 이번에는 건후 씨가 절 구해준 거잖아요.”“건후 씨는 이 병원에 없어.”진수혁은 도시락을 열고는 그녀에게 숟가락을 건넸다.도아린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제 기억엔 건후 씨도 손과 다리가 골절됐고 이마에도 상처가 있었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기로 교통 사고는 겉으로 보면 얼마 안 다친 것 같지만 심하게 다친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진수혁은 부주의로 숟가락을 바닥에 떨구고 몸을 숙여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이거 씻고 올게.”병실 안에도 세면대가 있었지만 진수혁은 굳이 숟가락을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도아린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설마, 내 말이 맞았던 걸까?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걸까?’그녀는 당시 배건후의 상태를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사고 이후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 알 수 없었다.‘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면 혹시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건가?’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윤명희와 진범준이 들어왔다.“퇴원 준비 끝냈어. 밥을 다 먹으면 바로 퇴원하자.”윤명희는 남편을 힐끗 본 후 도아린에게 말했다.“아린
“너 쉬어야 해.”역시 진수혁은 도아린이 다른 사람과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지금은 잠이 오지 않아요.”도아린은 변슬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말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러자 변슬기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슬기 씨랑 여자끼리 할 얘기가 좀 있어요.”진수혁은 변슬기의 수줍은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힐끗 쳐다봤다.“도 선생님을 오래 방해하지는 않을게요.”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오래 방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아린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진수혁의 반응을 살폈다.“그럼 잠깐만 허락해줄게.”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병실을 나갔다.“도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변슬기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도아린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꿈을 꿀 때마다 자신이 더러운 수술대에 눕혀져 있는 장면이 떠올랐고 깨어 있는 상태인데도 장기를 이식하겠다고 날카로운 수술칼을 들이대는 장면도 아주 소름 끼쳤다.그런 꿈을 꿀 때마다 도아린이 하늘에서 내려와 천사처럼 그녀를 구해 주었다.‘빨리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요!’그렇게 매번 변슬기는 도아린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면 정작 도아린은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변슬기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혹시라도 그 꿈이 현실로 될까 봐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자기를 구해준 대가로 도아린이 나쁜 놈들에게 희생될까 봐 말이다.“울지 마요.”도아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변슬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도 선생님, 제가 너무 멍청했어요. 안민아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도 선생님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텐데...”“피해자를 탓할 필요는 없어요. 안민아가
진수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수술 때문에 다 잘라 버렸어. 금방 자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면 비서한테 가발이라도 사 오라고 할까?”‘그래서 지금 내가 대머리라고?’손을 들어 가까스로 머리를 만져보자 얇은 망 같은 게 씌워져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던 걸 보면 부상이 꽤 심했던 게 분명했다.후유증만 남지 않는다면 머리카락 정도야 대수롭지 않았다.“건후 씨는... 괜찮아요?”그녀는 배건후가 차에서 굴러떨어지고도 절뚝이며 달려오던 모습으로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 도움을 요청하던 것까지, 그리고 구급차 안에서 했던 말마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병원에 도착한 후로부터는 의식이 흐릿했지만 눈을 뜰 때마다 그가 곁에 있는 걸 볼 수 있었다.배건후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버텨야 한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진수혁은 그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휴대폰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일 끝나면 가발 하나 사 와.”그는 병실 문을 닫고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번만 보고 바로 나갈게!”강재민이 진수혁의 제지를 뿌리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도아린이 깨어나 있는 걸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아린 씨, 깨어났어요?”그를 막지 못한 진수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아린이는 휴식이 필요해. 그러니까 용건만 말해.”“나도 알아.”강재민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몸을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도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절... 알아볼 수 있겠어요?”강재민은 순간 긴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누구냐고 묻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당연히 알죠.”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강재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병실 문가에 서 있는 진수혁을 바라보았다.“나 아린 씨랑 단둘이 몇 마디만 하면 안 돼?”“안 돼.”진수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방금 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