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나는 강재희가 무엇을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아린이 강씨 가문에 시집가는 것을 막을 방법이라면 반드시 그녀의 명성과 절개에 관련되었을 것이다.오늘 연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소문이 난다면 도아린은 끝이다. 전미나는 도아린보다 힘이 약해서 결국 열쇠를 빼앗겼다. 그녀는 다급하게 도아린의 손을 잡으면서 문을 열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도아린은 그녀에게 웃어 보이고는 단호하게 문을 열었다.손님방이었고 문 앞에 서서 봤을 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지나가는 척하며 사실은 그들을 주시하러 온 손보미는 두 사람이 모두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나쁜 꿍꿍이를 생각했다.손보미는 슬며시 도아린의 뒤로 가서는 그녀를 안으로 밀려고 했다.도아린은 몸을 피했고 손보미를 방안으로 밀어 넣고는 빠르게 문을 닫았다.“도아린! 이 미친년! 문 열어! 당장 문 열라고!”손보미는 당황에서 문을 세게 두드렸다.도아린은 팔짱을 끼고 밖에서 침착하게 지켜보았다.“...”전미나는 방금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어리둥절했다.소란스러운 소리는 빠르게 부근에 있던 강재희의 귀에 들려왔고 그녀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도아린이 문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무슨 일이야?”그녀의 시선은 도아린을 향했지만, 물음은 전미나에게 묻는 것이었다.전미나는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랐다.“손보미 씨가 저를 모함하려다가 저한테 반격을 당했어요.”도아린은 깔끔하게 대답했다.“건방진 것들! 누가 감히 강씨 가문에서 행패를 부려!”강재희는 전미나한테 열쇠가 있다는 것을 분명 알면서도 집사에게 비상용 열쇠를 가지고 와서 문을 열라고 했다.집사는 빠르게 비상용 열쇠를 가지고 왔고 배건후와 강재민도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손보미는 아직도 방안에서 욕을 퍼붓고 있었고 그 욕은 정말 들어줄 수가 없었다.강재민은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배건후의 잘생긴 얼굴은 차갑게 일그러졌다.“문 열어.”강재희의 명령을 듣고 집사가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손보미
“건후 씨, 좀 어떻게 해봐. 오늘은 강 회장님의 생일 축하연인데 도아린이 이렇게 난리를 피우면 배씨 가문의 체면은 어떡해!”배건후는 굳은 얼굴로 강재민이 도아린과 함께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배건후가 뭐라고 얘기하려던 때 도아린이 커튼을 열었다.커튼 뒤의 장면은 현장의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운동복 바지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윗옷은 입지 않은 채 벽에 붙어서 서 있었고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도아린은 다가가서 다른 커튼도 열었고 그 안에는 똑같이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이게 바로 손보미 씨가 나한테 준비한 선물이야?”도아린은 쌀쌀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전미나를 협박한 사람이 손보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지금은 손보미에게 뒤집어씌울 수밖에 없었다.손보미는 아까부터 자신을 따라다녔으니 이 계획을 진작 알고 있었을 것이다.손보미는 주범이 아니라 공범이었다.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손보미를 쳐다보았고 배건후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손보미는 강재희를 쳐다보지 못하고 최대한 말을 돌렸다.“이건 내가 한 게 아니야!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계획하겠어! 도아린, 네가 한 거지? 나를 모함해서 건후 씨가 나를 싫어하게 만들려고 그런 거지?”도아린은 실소를 터뜨렸다.“너랑 저 사람은 아무 사이 아니라면서 싫어할 게 뭐가 있어?”“...”손보미는 침을 삼키고는 억지를 부리며 말했다.“도아린, 내가 건후 씨한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 인정할게. 하지만 너랑 결혼한 후로는 마음을 접었어! 전에 내가 드레스를 고치는 것을 네가 방해하고 내가 후원하는 보육원의 아이를 빼앗았어도 나는 너한테 따지지 않았어. 하지만 내 명예를 더럽히면 안 되잖아!”손보미는 울면서 말했고 가녀린 몸이 흔들렸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는 서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손보미는 화제를 돌리는 것을 제일 잘했다.“나는 그저 손님일 뿐이야. 내가 어떻게 강씨 저택의 열쇠를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숨겨놓을 수 있겠어...”그녀는 일부러
강재민은 실소를 터뜨리고는 두 명의 경호원을 불렀다.“솔직하게 말해. 누가 지시한 거야. 똑바로 얘기한다면 목숨은 살려줄게. 말하지 않으면 죽일 거야.”두 사람은 연달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그게... 손보미 씨가 시킨 일입니다.”“말도 안 되는 소리!”손보미는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배건후에게 손목이 잡혔다. 그녀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정말 나 아니야. 건후 씨, 나 믿어줘!”강재민이 계속 물었다.“손보미 씨가 뭐 하라고 했어.”두 경호원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저희한테 저 여자를 취하라고 했습니다.”이때면 손보미가 어떻게 열쇠를 가지고 어떻게 도아린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죄명이 손보미에게 단단히 씌워졌기 때문이다.“이 사람을 끊어내!”강재희는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명령했다.손보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미친 듯이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욕하는 것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손보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눈이 뒤집히며 정신을 잃었고 그제야 이 사태가 일단락되었다.강재희는 자리를 떠날 때 의미심장하게 도아린을 쳐다보았다.저 여자는 과연 계략이 많은 여자다. 그녀를 강씨 가문에 들이지 못하게 하려면 아마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이다.연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자리를 뜨자 도아린은 그제야 안민아가 안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재민은 민망한 듯 코를 만졌다.“제가 울렸어요. 아마 먼저 갔을 거예요.”그네를 탈 때 안민아는 그가 팔찌를 끼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마음을 받아준 줄로 생각하고 먼저 마음을 고백했다.사실 그녀는 진작에 강재민을 좋아했고 매년 삼촌 집에 가는 것도 강재민과 가까이 지내기 위함이었다.강재민은 팔찌가 도아린이 만든 것으로 생각해서 착용했다고 솔직하게 말했고 바로 풀어서 안민아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은 그녀에게 호감이 없고 안민아가 설렜다는 그 순간들
“오늘 밤에 진짜 유성이 떨어질까?”소유정은 매트 위에 누운 채 풀잎을 입에 물고 있었다. 내일 녹화해야 할 예능 프로그램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그녀를 위해 유진혁이 기분 전환 삼아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기다려 봐. 보자마자 아무 말도 못 할걸.”유진혁은 손에 든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소유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다가갔다. 자동차 문 옆으로 다리가 보였다.“저 사람...”유진혁은 재빠르게 소유정의 입을 막더니 그녀의 눈까지 가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괜히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소유정은 그의 손가락을 살짝 벌리더니 낮게 속삭였다.“옆에 봐봐.”누가 야외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다른 사람이 찍도록 부탁하겠는가?유진혁도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카메라를 소유정에게 건넸다.“혹시 모르니까 넌 여기서 찍고 있어. 내가 가볼게.”안민아는 의식을 잃은 상태라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차 안의 공간도 좁다 보니 도유준은 구도를 잡느라 바빴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뭐 하는 놈이야!”깜짝 놀란 도유준은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차에서 내리더니 험악한 표정으로 유진혁을 노려보며 말했다.“내 여자 친구랑 놀고 있는데 네가 뭔 상관이야?”“근데...” 유진혁은 고개를 돌리자 촬영하던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당신 여자 친구는 그렇게 즐거운 것 같진 않은데.”“다시 한번만 떠들어 봐. 네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릴 줄 알아!”도유준은 트렁크에서 커다란 렌치를 꺼내 들고 유진혁을 향해 걸어갔다.유진혁은 황급히 두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여긴 캠핑장이야. 친구가 여기서 환송회를 하고 있거든? 지금 장소를 옮기는 게 좋을 텐데, 아니면 또 분위기 망칠걸.”도유준은 표정이 복잡해졌다.안민아가 깨어나면 난리 날 테니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안전하겠다 싶었다.도유준은 코웃음을 치고
도아린은 옷으로 안민아를 감싸안으며 그녀가 정신 차리도록 애썼다.“민아야, 나야, 아린이.”“...”안민아는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고 도아린을 보자 잠시 멍하니 있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짐승보다 못한 새끼.”강재민은 도유준을 향해 한 번 더 걷어찼다.그는 이내 피하려다 다리에 갑자기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작은외삼촌, 안민아가 먼저 저를 찾아온 거라고요! 우린 서로 원했어요!”차 밖에 서 있는 강재민을 본 안민아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더욱 오열했다.도아린은 그녀를 꼭 안으며 등을 쓰다듬었다.“신고해서 감옥에 처넣을까? 아니면 사적으로 해결할래?”안민아는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명문가의 자녀들은 자유롭게 연애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가문 간의 이익을 위한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다.강재민의 거절은 그녀가 사랑과 결혼을 동시에 이루려던 꿈을 산산조각 냈다.만약 경찰에 신고하면 그녀의 명성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고 다른 가문은 더 이상 그녀와 정략결혼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 안민아의 태도에 도유준은 더욱 뻔뻔하게 나왔다.“외삼촌, 전 민아와 결혼할 의향이 있어요.”찰싹!도아린은 그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너 같은 놈은 자격 없어!”도유준은 화를 내려다 이내 강재민을 의식하며 억울함을 삼켰다. 그는 얼굴을 감싼 채 실망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누나, 민아가 날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 아마 욕구를 풀고 싶었던 거겠지. 난 원래 민아를 데리고 가서 깨끗하게 씻긴 뒤 집에 데려다주려고 했어. 그러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할 수 있었어. 근데 지금 누나가 여기까지 외삼촌을 데려와선 민아를 나한테 시집보내려 하지도 않잖아. 민아 명성을 망치기라도 하려는 거야?”안민아는 순식간에 몸이 굳었다. 그녀는 앞 유리를 통해 도아린을 바라봤다.그녀는 한쪽 얼굴이 부은 채 놀라움과 혼란이 섞인 표정이었다.그리고 고개를 돌려 무표정인 강재민을 보았다. 그는 반팔 티셔츠만 입고 있었고 자신이 걸
도아린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도유준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었다.진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안민아를 둘러싸고 있었다. 진경수가 가장 먼저 도아린의 기분을 눈치챘다.“풀려났어.”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도아린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진경수는 냉소적으로 말했다.“기다려, 내일쯤 찾아올 거야.”예상대로, 다음 날 강씨 가문에서 찾아왔다.강홍련은 선물을 들고 청혼하러 왔다.진범준과 진수혁 모두 집에 없자 진경수는 아예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강홍련은 문밖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다가 결국 돌아갔다.오후가 되어 도아린은 서대은한테서 소식을 받았다.누군가 캠핑장에서 촬영한 영상을 유출했다는 것이다.비록 안민아의 얼굴은 찍히지 않았지만 자극적인 카테고리가 문제였다.[삼촌에게 고백했다 거절당한 뒤 조카와 야외에서 사랑을 나누다]서대은은 급하게 영상을 막았지만 이미 대규모로 퍼졌다면 되돌리기 힘들었다.이 영상을 누가 유출했는지는 뻔한 일이었다.그들은 안민아와 도유준을 결혼시키려 했다.도아린은 가만히 방관할 수 없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준비시킨 뒤 강씨 가문으로 갈 준비를 하던 중 육하경의 전화를 받았다.유은서가 중요한 정보를 자백했다고 한다.보육원에서 선택된 여자아이들이 만약 임신하게 되면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남긴다는 것이다.재산을 물려줄 아들이 필요한 경우 고가에 팔리게 되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팔려 간다. 그리고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보육원에 남겨져 정부 보조금을 받게 된다.지금 보육원에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모두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도아린은 심장이 순간적으로 조여왔다.“그럼 율이는...”“DNA를 추출해 생모를 찾고 있어요.” 육하경은 부드럽게 말했다.“율이의 친엄마를 찾게 되면 신장 이식 가능성이 높아질 거예요.”하지만 도아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율이가 말한 지희와 지수의 생일로 추측하건대 율이의 어머니는 현재 스물네 살에서 스물다섯 살 정도일 가능성이 높았다.인생에서 가장
배건후는 우정윤한테서 성공적으로 구매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재희 씨, 계속 말씀하시죠.” 그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강재희는 커피를 한 모금을 마신 뒤 도우미가 응접실에서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배씨 그룹이 입찰 중인 그 땅은 알짜배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리고 있어요. 현재 배씨 그룹의 상황으로는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배건후는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돌리며 입술을 오므렸다.강씨 가문과 한 외국계 기업 모두 그 땅을 노리고 있었다.반년 전이라면 배씨 그룹이 압도적인 우위로 낙찰받았겠지만 최근 프로젝트들을 연이어 빼앗기면서 업계에서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심지어 배씨 그룹이 곧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에서 은혜를 보답할 수 없다면 강씨 가문 또한 은혜를 베풀지 말아야겠죠.”싸늘하게 식은 공기가 주위를 무겁게 감싸고 돌았다.“스카이 빌딩은 재민 씨 소유에요. 제 고객을 빼앗는 건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는 행위죠.”강재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재민이가 유산을 물려받으려 하지 않고 독립을 고집합니다. 어쩌면 건후 씨를 겨냥한 목적이 있겠지만 아버지께서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겁니다.”강재민이 누구를 노리고 있는지는 배건후도 잘 알고 있었다.다만 그가 이해하지 못한 건 강재민이 어떻게 도아린과 연관되었는가였다.강씨 가문에서 도아린과 강재민을 반대한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야 배건후는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재희 씨, 솔직히 말씀하시죠.”강재희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느긋하게 소파에 기댄 채 말했다.“강씨 가문은 입찰에서 물러날 수도 있고 건후 씨를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단 건후 씨가 예전에 약속하신 것을 이행한다면 말이죠.”배건후는 라이터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가했다.차가운 시선은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보미에게 고정되었다.손보미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머뭇거리더니 배건후 앞으로 걸어갔다.“건후 씨, 어제 일을 보고도 모
“가져가세요.” 배건후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리고 잔에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배석준은 화가 치밀어 오른 채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네 엄마는 병세가 심해서 사람을 못 알아보는 상태다. 나까지 화병으로 죽게 만들고서야 속이 시원하겠니?”“아버님! 진정하세요. 제가 건후 씨를 잘 설득할게요.”갑자기 뒤에서 손보미가 나타나더니 전화에 대고 말했다.배건후는 즉시 전화를 끊고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건후 씨, 이러지 마. 재희 씨한테 예전 일을 말한 건 아니야. 그냥 내가 건후 씨를 많이 좋아한다고만 했어. 재희 씨가 나랑 마음이 잘 맞아서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뿐이야.”손보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아련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엠파이어 빌딩의 고객들을 전부 스카이 빌딩에 빼앗겼잖아. 만약 그 땅마저 강씨 가문에 넘어가면 강재민이 건후 씨 위에 올라설 거야. 그때면 아린 씨는...”그녀는 일부러 말을 멈추며 배건후가 스스로 생각하게 했다. 강재민이 더 많은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도아린이 누구를 선택할지 말이다.“아린 씨를 다시 찾고 싶다면 그 땅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해. 우선 나랑 약혼하자. 그 땅을 차지하고 배씨 그룹이 다시 돌아오면 아린 씨를 붙잡는 것도 가능할 거야. 그리고 건후 씨가 다시 아린 씨를 잡으면 우리의 약혼은 무효로 해도 괜찮아.”배건후는 그녀의 진심 어린 듯한 눈빛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입꼬리 끝에 비웃음을 걸쳤다.“...”손보미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식은땀이 흐르다 못해 다리마저 떨려왔다.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손보미는 급히 소파를 잡고 일어섰다.검은색 세단 한 대가 문 앞에서 멈췄다. 강재민은 얼른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그는 커다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손바닥으로 차 천장을 받치며 조심스레 보호했다.도아린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인 채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강재민에게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표했다.거의 동시에 조수석 문이 열리며 일북이 차에서 내리더
JS 픽처스의 고위인사는 배석준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배 대표님, 또 해외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현정이의 몸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좀 더 머물다가 가려고 합니다.”배석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평소에 연회에 거의 참가하지 않는 연예인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주현정이 JS 픽처스에서 지위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각종 이유를 찾아 함께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를 거부했지만, 약속이나 한 듯 카메라 앞에서는 활짝 웃었다. 그들은 모두 주현정 덕분에 잘 되었기에 체면은 반드시 살려주어야 했다.“크흠.”배지유는 배석준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헛기침을 했다.“아, 우리 딸이 마침 해남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데리고 왔습니다.”배석준을 둘러싼 고위인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주현정은 배지유가 연예계의 나쁜 물을 먹을까 봐 현역일 적에 절대 배지유를 데리고 활동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위인사들도 그저 주현정에게 딸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본 적은 없었다.반응이 빠른 누군가가 술잔을 들며 공손하게 말했다.“따님은 주 대표님과 배 대표님의 우수한 점을 다 닮으셔서 단정하고 청초하십니다. 우리가 올해 새로 영입한 신인보다 예쁘신 것 같습니다.”“맞아요. 해남대학교의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시니 예쁘시고 학식도 많으시네요. 지금 업계에서는 이렇게 완벽한 인재를 제일 좋아합니다!”배지유는 칭찬을 듣고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팔걸이를 잡고 살짝 몸을 앞으로 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삐끗해서 일어서서 인사를 올리지 못하겠네요.”“별말씀을요. 발을 삐끗하면 잘 치료해야 해요. 젊고 예쁘신데 후유증을 남기면 안 되죠.”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지만 배지유의 마음속에서는 저주로 들렸다.그녀는 발 한쪽을 다친 게 아니라 다리 하나를 잃었다. 나머지 생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배석준은 배지유의 성격을 알기에 그녀가 난리를 피울까 봐 얼른 다른 곳으로
주현정은 말투가 가라앉았고 표정이 엄숙했다.“남자의 내연녀로 이십몇 년을 있다가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어른이 화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나. 도아린의 양아버지는 양어머니의 혼수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위협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딸의 효도를 받을 자격 없어!”현장에는 여자 연예인들도 많았다.같은 딸의 마음으로 이렇게 심란한 일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도아린이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아린이 양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했다고 여겼다.강홍련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도아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방금 자신의 말이 강씨 가문에게 영향을 줄까 봐 두려웠다.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도아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강씨 어르신은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복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씨 어르신께서 좋은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주었는데 당신은 밖에서 어르신의 명성이나 흐리고 다니면 안 되죠. 농부와 뱀의 이야기를 재희 씨도 들어봤을 거로 생각해요.”도아린은 강씨 어르신의 편에 섰는데 강재희는 반박할 수 없었다.여론에서 아버지의 대회에 흑막이 있다는 일로 들끓던 것이 금방 사그라들었는데 강홍련 저 멍청이 때문에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주현정은 도아린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제 딸이고 JS 픽처스의 후계자예요. 강씨 가문에서 이렇게 제 딸을 치욕스럽게 하다니, 저희 협력은 앞으로 계속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재희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는 도아린이 연회에 참가한 것은 단지 주현정과 예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주현정이 도아린을 딸로 삼고 JS 픽처스의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만약 도아린과 모순이 격화된다면 앞으로의 협력에는 장애가 생길 것이다.“강홍련 씨, 사과해요!”강홍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재희는 지금 자신을
도아린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진열대에 있는 다이아몬드의 빛이 꺾이어 그녀의 눈동자를 비춰 유독 눈부셨다.강홍련은 그녀의 앞으로 가서 섰다.강홍련은 도아린보다 머리 하나쯤 작아서 고개를 들어 도아린을 바라보았는데 도도한 척하는 모습이 광대 같았다.“네가 JS 픽처스에게 ‘봉황의 시대’를 광고하도록 넘겼는데 강씨 가문의 고급 주얼리들은 모두 JS 픽처스의 연예인들이 광고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어. ‘봉황의 시대’와 JS 픽처스의 연예인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당연하게 ‘봉황의 시대’가 강씨 가문의 것으로 생각하게 될 테지.”이게 바로 연예인을 찾아 광고하는 이유였다.예를 들어 어떤 톱스타가 운동화의 모델이 되었다면 그가 나타났을 때 팬들은 어떤 브랜드의 신발을 신었는지 알게 된다. 따로 브랜드를 찾아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도아린은 도덕과 재능을 겸비한다는 말로 강씨 가문에게 치욕을 안겨주었지만 결국은 강씨 가문이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강씨 가문에서 이득을 보는 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도아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는 강씨 가문의 사촌이야!”강홍련은 불쑥 얘기했다.“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밀어준다면 배건후와 결혼할 수 있어. 강씨 가문에서 안씨 가문을 지지한다면 내 아들은 안씨 가문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거야!”“그래서요.”강홍련은 도아린이 모른 척할 줄 몰랐고 그녀의 코에 대고 얘기했다.“그래서 나한테 잘하라고. 그러면 강씨 가문에서는 네가 해남에서 살아나갈 기회라도 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대회 성적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너를 디자인 업계에서 쫓아내는 것도 일이 아니지. 내 삼촌 강태식은 이 바닥을 꽉 잡고 있어. 내 삼촌이 뭐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너의 ‘봉황의 시대’도 잘난 척할 거 없어. 언론에서 만들어준 것뿐이야. 만약 삼촌의 학생들이 다 그게 별로라고 얘기한다면 너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거야!”많은 손님이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강홍련의 지나친 말에 시선을 두
“아빠가 방법을 대서 가볼게. 너는 오지 마.”배석준은 배지유가 걱정되었다. 지난번에 배지유가 밖으로 나갔다 왔을 때도 돌아와서 다리가 아파 잠이 들지 못했다.배지유는 붉어진 눈으로 애원했다.“제 친구들은 제가 아직 안에 갇혀있는 줄 알아요! 아빠랑 제가 함께 엄마의 연회에 간다면 매체에서는 저희 세 식구의 화목한 모습을 찍게 될 것이고 소문들은 자연스레 사그라질 거예요!”배석준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딸의 명성은 도아린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돌이킬 방법을 계속 찾지 않는다면 배지유가 해남대학교로 돌아갔을 때 반드시 동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조롱당할 것이다.“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메이크업과 코디를 해줄게.”배석준이 데리고 온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김지민이었다.김지민은 연예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 참석하는 연예인들이 무슨 브랜드를 입었는지 알아냈다. 배지유는 똑같은 옷을 입으면 안 됐고 다리의 흉터를 가릴 수 있으면서 예쁘고 매력적이어야 했다.이 부분에서 김지민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배지유는 만족스럽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그녀의 치마를 들지 않는 이상 그녀가 다리 하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발을 삐끗해서 휠체어를 탔다고 하면 될 것이다.이런 장소에 김지민은 절대 나타나서는 안 되므로 부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연회장의 중심에는 도아린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고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는 현장에 있는 연예인들의 시선을 끌었다.이 여자의 아름다움이 너무 지나쳤다.연예계의 스타들은 자주 레드카펫을 밟고 시상식에 참가하므로 어떻게 분위기를 휘어잡는지를 잘 알고 자신이 어느 각도에서 가장 예쁘게 찍히는지도 알고 있었다.도아린은 처음 보는 얼굴이고 업계에 대해 영향력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다 자신감이 넘쳤다.그녀가 스크린 앞으로 가서 사인할 때 스크린에는 ‘봉황의 시대’의
도아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은 ‘라윤주’의 이름을 듣고 초점을 잃었다.“뭐라고요?”“...”육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가 육하경이 말을 이었다.“향 주머니로 화를 면한 것은 우연이에요. 정말 저를 도왔던 것은 세인트존스 호텔의 책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죠.”육하경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어르신들을 3일이나 괴롭혀서야 알아냈어요. LY에서 저를 후임자로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육하경의 학업은 각 부분에서 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육씨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빽빽이 필요했다.육민재를 예로 들어보면 능력은 가장 뛰어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맏아들의 장손 혈통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최고로 좋은 자원과 경험을 쌓을 기회들을 누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육씨 가문의 후계자일 것이다.다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려면 모든 게 알맞게 부합되어야 한다.육하경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었고 육씨 가문의 산업에 기대를 두지 않아 오랜 시간 밖에서 떠돌며 공부를 했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세인트존스 호텔의 관리 권한이 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쁘기도 놀랍기도 했다.놀란 마음으로 육하경은 전임자를 찾아갔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야 LY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육씨 가문 뿐만 아니라 많은 명문가가 LY와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인재를 추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도와주었기에 자연스레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육하경은 그때 손에 향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전임자가 이상해하며 무늬를 찍어서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추천서’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경 씨가 말하는 그 이야기에도 관심 없습니다.”도아린은 책을 육하경에게 돌려주고는 차 문을 열었다.“도아린 씨!”육하경은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손을 허공에 멈추고 결국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육하경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보게 된 것은 싫증뿐이었다.도아린은 힘을 주어 방심하고 있던 배건후를 밀어냈고 뒤돌아 걸어갔다.배건후는 빠르게 따라가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도아린, 나한테 시간을 줘.”배건후가 잡은 손목의 위치가 마침 도아린이 떨어질 뻔했을 때 배건후에게 잡힌 위치였다. 도아린은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배건후의 손을 때렸다.“이거 놔!”“친구 사귀지 마.”배건후의 목소리가 떨렸다.“서둘러 친구 사귈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시간을 줘.”도아린은 배건후에게 발길질을 했고 배건후는 피하지 않았다. 바지에는 발자국이 하나 생겼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이거 안 놓으면 사람 부를 거예요. 육씨 가문에서는 당신이 함부로 하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배건후의 힘이 조금 빠진 틈을 타서 도아린은 빠르게 손을 빼내고 자리를 떴다.나영옥은 도아린이 손목이 빨갛게 된 채로 한참이 지나 돌아온 것을 보고 묻지 않았고 가정부에게 도아린한테 식사를 올려달라고 했다.배건후가 돌아왔을 때, 육하경이 작은 숟가락으로 게살을 발라서 도아린의 앞에 놓아주는 것을 보았다.“내일 하경 오빠가 아린 씨와 함께 봉사활동을 간다고 하는데 저희도 함께 가요.”육청아은 갈비를 하나 집어 배건후의 접시에 놓았다.배건후는 가정부를 불러 접시를 바꿔 달라고 했다.“...”식사를 마친 후, 육하경은 도아린을 자신의 차에 태우려고 했다.배건후는 펑 하고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았다.“아린이 지금 사는 곳은 외부인에게 발설하기 불편해.”도아린은 자신의 주소를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 게 맞지만, 배건후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배건후가 미쳐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하경 씨는 외부인이 아니에요.”도아린은 차를 빙 돌아가더니 반대편으로 올랐다.육하경은 바로 얼굴에 웃음을 띠었고 배건후의 어깨를 툭툭치고는 운전석에 올랐다.육씨 가문을 떠나 시 중심에 들어서자 도아린이 갑자기 말했다.“앞에
“아!”육청아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는 다 젖었고 찻물이 그녀의 치마를 적셨다.“죄송해요.”배건후는 주전자를 놓고 자신의 냅킨으로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를 닦았다.육청아는 도아린을 흘겨보고는 치마를 정리하러 갔다.작은 소란이 일었어도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나영옥이 잔소리를 했다.“나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저렇게 칠칠치 못한 거야. 단정하지 못해.”도아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웃음을 짓던 두 눈은 어리둥절했다.“천사 보육원이 압류당했는데 세인트존스 호텔의 수선 계획은 계속할 거야?”배건후는 육하경과 도아린의 대회를 끊었다.그는 소매를 말아 올렸고 손목에는 빨간 끈이 드러났다. 그의 행동이 나른하고 관능적이었다. 도아린은 그게 눈에 거슬렸다. 이혼한 마당에 이런 물건으로 그녀를 치욕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가서 손을 씻고 올게요.”도아린은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육하경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며 배건후의 말에 대답했다.“수선 계획은 변하지 않아. 우리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찾아 전적으로 책임지게 할 거야...”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건후도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객실의 화장실은 세면대가 밖에 있었는데 도아린이 수도꼭지를 틀려고 할 때 여자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가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상대방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 도아린은 ‘배건후’와 ‘네티즌을 산다’라는 얘기를 어렴풋하게 듣게 되었다.도아린이 화장실의 문을 열자 육청아은 빠르게 핸드폰을 막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칸막이가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밖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도아린은 변기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물을 내렸다.문을 열자마자 역시 육청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도아린 씨.”육청아은 계속 웃는 표정이었지만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라 도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웃음이었다.“당신이 배지유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그녀는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눈빛이었다.도아린은 그녀가 배건후한테 정말 진심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육청아가 이상하게 그녀를 경계하는 느낌을 받았다.나영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희들은 다 나가 있어. 아린이랑 할 얘기가 있어.”육청아는 육민재와 함께 문 앞까지 갔다가 뒤돌아 도아린을 한번 보더니 핑계를 대서 육민재와 갈라졌다.나영옥은 도아린에게 어쩔 예정인지 물었다. 요즘 모건 그룹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연성에서의 지위는 쉽게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만약 도아린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배씨 가문에서는 도울 수 있지만, 배건후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재벌의 관계는 오래된 나무의 뿌리처럼 가닥이 많고 복잡해서 하나를 건드리면 모든 게 흔들리게 된다.“진씨 가문의 부모님은 너한테 잘해줘?”나영옥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저한테 엄청 잘해주세요. 두 오빠도 잘해줘요.”“그럼 다행이야. 청아의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경솔하게 행동하는 면이 있었어. 기어코 바위에 부딪히려 하거든 가라고 해. 손해를 봐야 정신을 차리지.”도아린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영옥은 또 그녀와 친한 친구를 언급하였는데 해남에 사는 여씨 어르신이었다.“시간이 나면 나 대신에 가서 만나서 안부를 전해줘.”나영옥은 편지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주었고 전해달라고 했다.도아린은 조심스레 편지를 넣어두고 꼭 찾아뵙겠다고 얘기했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밖에서는 말소리가 들렸고 육청아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나영옥의 표정에서는 불쾌한 기색이 보였지만 꾸짖지 않았고 도아린을 배웅하기 위해 가정부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다.도아린이 나영옥을 부축하고 나왔을 때 정자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배건후의 잘생긴 얼굴은 차가웠고 넥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는 살짝 열고 있었다. 꾸민 듯 안 꾸민듯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다.육청아는 그의 곁에 서서 고개를 들
도아린은 SNS에 새가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였다. 잠시 후, 음식을 배달시켜려고 하는데 문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신선한 재료와 과일들로 가득했다. 큰오빠의 배려에 감동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인데 연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걱정돼서 이리 모든 것을 준비해 주다니...진수혁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려는 그때, 육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성에 돌아온 거야?”“네.”“할머니가 아린 씨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잠깐 들렀다 갈래?”“위치 보내줘. 내가 데리러 갈게.”이번에 연성을 떠나면 중요한 일이 없는 이상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대표님, 사모님... 아니 아린 씨가 집을 나섰습니다.”그에게 물병을 건네던 유정윤은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가 물병을 건네받으며 약을 입에 넣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이 파래졌다. 잠시 후, 통증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따라가.”“네.”고개를 끄덕이던 우정윤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오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사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회사로 끌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모건 그룹의 다음 계획에 대해 대책을 세우라고 그를 닦달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는 재빨리 구청으로 달려갔고 마침 배석준이 도아린에게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한 탓에 위가 또 말썽인 듯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후, 위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진통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그의 눈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