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이 대기실에서 나오자마자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회가 끝난 후 주최 측에서는 각 참가자의 회사와 신상정보를 공개했다.도아린, 업계에서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이 명백하게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최종 6위에 머물렀다.도아린은 대회에서 우승은 놓쳤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강 대표님과 사적인 원한이 있으십니까? 강 대표님께서 왜 제일 낮은 점수를 드렸다고 생각하십니까?”“도아린 씨는 모건 그룹 배 대표님의 아내인데 왜 모건 그룹을 대표하지 않고 티파니 주얼리를 대표해서 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입니까?”“모건 그룹을 대표해서 대회에 참가한 손보미 씨는 연예계의 핫한 여배우이고 또 배 대표님과 다정한 일상이 자주 손보미 씨의 인스타에서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도아린은 손사래를 치며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담담하게 말했다.“사람마다 취향이 있죠.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뿐입니다.”도아린의 작품은 아주 훌륭했지만, 강 대표의 취향이 아니었다. 도아린은 인품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아쉽게도 배건후는 손보미라는 꽃을 더 좋아했다.두 가지 물음에 대해 한마디 말로 대답한 것이다.소유정과 진경수의 비서가 몰려든 사람들을 통제하고 도아린이 마침 자리를 뜨려고 할 때 도정국과 도유준이 앞으로 다가왔다.“누나! 아빠의 가게에 문제가 생겼어. 요즘 누나가 대회준비를 해서 얘기를 못 했는데 이제 대회가 끝났잖아. 누나가 꼭 도와줘야 해!”“아린아, 네가 골라준 가게 위치가 정말 좋긴 해. 그런데 비용이 너무 많아. 디저트 가게를 하면서는 부담하기 어려워.”“누나, 앞으로는 내가 아빠를 모시고 절대 누나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 부탁이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와줘!”도정국은 일부러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도유준의 두 손은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약자는 동정을 얻기 쉬운 법이다.주위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도아린을 보고 있었다.작품이 훌륭한데도 제일 낮은 점수를 받은 이유가
“당신은 아내랑 결혼하고 나서 3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 연성의 병원으로 갔는데 거기서 아이를 입양하면 자식이 생긴다는 소문을 들었죠. 하지만 당신은 입양이라는 일반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기회를 타서 금방 돌을 맞이한 옆방의 갓난아이를 훔치는 방법을 선택했죠.”도아린은 가슴이 철렁해서 당황하고 놀란 얼굴로 진경수를 바라보았다.도정국은 등골이 오싹했고 도유준이 부축하지 않았더라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함부로 말하지 마!”도정국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나는 아이를 훔친 적이 없어. 도아린은 내 친딸이야!”진경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저는 여자아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어찌 아린이라고 단정하는 거예요?”“...”도정국은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고 입술은 달달 떨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도유준은 도정국의 팔을 잡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주위에 둘러싸인 사람들이 너무 많아 도망갈 기회가 없었다.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진씨 가문의 오랜 아픔을 알고 있었다.“진씨 가문에서 잃어버린 여자아이의 나이를 계산해보면 도아린과 비슷해.”이 말을 들은 도정국은 덜덜 떨며 겁먹은 표정으로 도아린을 왔다가 또 진경수를 보았다.진경수는 카메라를 보면서 다시금 고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얼마 전, 제 부모님께서 친구분을 뵈러 연성으로 가셨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 생겼을 때 도아린 씨가 구해주었어요. 저희 어머니께서는 도아린 씨를 보고 마치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처럼 느껴져서 도아린 씨를 수양딸로 삼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저희 부모님께서 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불쌍히 여겨 꿈에서 셋째 동생이 바로 곁에 있다고 귀띔해주었고 저희 어머니께서는 도아린 씨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가서 친자확인을 해봤어요. 그 결과 도아린 씨가 바로 저희 진씨 가문에서 잃어버린 딸이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진경수는 도아린을 쳐다보면서 두 팔을 벌렸다.“동생아, 집에 돌아온 걸 축하해.”“...”도아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곁에 있던 소유정
“이건 뭐예요? 동정이에요? 보상이에요?”도아린의 눈에서는 더는 따뜻함이 없었고 비꼬는 차가움만이 가득했다.그녀는 뭐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빠르게 다가오는 여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건후 씨...”손보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회장님과 사모님께서 다투고 계셔. 건후 씨가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배건후는 짧게 대답했지만, 시선은 계속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다.“언제 돌아갈래? 우 비서한테 항공편을 예약하라고 할게.”손보미는 도아린을 보고 도발하려는 눈빛이 스치더니 일부러 불쌍한 척하면서 말했다.“도아린, 합의서 쓸 거지?”도아린은 그녀를 흘겨보았다.“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손보미는 가슴 아픈 척하며 말했다.“지유는 어렸을 때부터 곱게 자란 아이야. 그 안에서 그 고생을 감당할 수가 없어.”“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손보미는 화가 나서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말했다.“건후 씨, 도아린은 티파니 주얼리를 대표해서 참가하기는 했지만, 당신 아내잖아. 도씨 가문에서 괴롭히지 않게 보상을 많이 해줘.”손보미는 도아린을 위해 좋은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을 배건후의 안사람으로 보고 하는 말이었다.배건후는 불쾌하게 미간을 찡그렸다.“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손보미는 그대로 굳었다. 그 사건이 있고 난 뒤로부터 배건후가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손보미는 당황한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불쌍한 얼굴을 했다.도아린은 두 사람이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아 뒤돌아 캠핑카로 들어갔다.캠핑카는 천천히 움직였고 배건후도 자리를 떴다. 손보미는 배건후의 뒤를 따라갔다.“아현 선생은 수선 대가신데 도아린은 어떻게 감히 아현 선생의 이름으로 대회에 참가한 거야!”배건후의 표정을 슬그머니 살펴보던 손보미는 그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계속 말했다.“송 감독님이 아현 선생에게 디자인, 메이크업과 도구의 총감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그의 눈짓 한 번에 우정윤은 바로 앞으로 다가가 김지민을 캠핑카에서 끌어냈다. 그런 상황에도 김지민은 발버둥을 쳤고 결국 따귀를 맞았다.“어디서 굴러온 돌이 여기서 행패를 부리고 있어!”“...”김지민은 얼굴을 움켜잡고 서럽게 배석준을 쳐다보았다.배석준은 우정윤이 오지랖을 부린다고 화가 났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기에 김지민에게 손보미를 따라 자리를 피하라고 손짓했다.배건후는 차에 올라탄 후 차 문을 닫고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여 천천히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없었고 주현정도 말을 하지 않았다.배석준은 모두가 자신을 배신하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며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너 도아린을 만났잖아. 합의서는 언제 써주겠다고 해?”배건후는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은 배석준의 머릿속을 뚫고 들어가 모든 생각을 읽은 것 같았다.“아버지가 대회 결과를 조작했기 때문에 이번 내기는 없던 일입니다.”배석준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표정이 일그러졌다.“도아린이 아현의 작품으로 대회에 참가했기에 먼저 규칙을 어긴 거야. 나는 받은 대로 돌려준 것뿐이지.”“도아린이 바로 아현이에요.”주현정은 아들을 흘겨보고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배건후는 엄마의 태도에 얼굴이 창백해졌고 담배를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서 핏줄이 선명해졌다.엄마도 도아린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오직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배석준은 아내를 한번 보고 또 배건후를 한번 보더니 더 화가 났다.“너희들 도아린의 신분을 알면서도 일부러 나를 속인 거야? 너희 두 사람, 한 명은 지유의 친오빠고 한 명은 친엄마인데 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다른 사람의 편을 들고 지유는 안에서 고통받게 하고 있어! 내가 빨리 발견해서 강태식한테 신세를 갚으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지유는 진작에 너희들 때문에 망가졌을 거야!”“강태식이 빚진 사람은 건후인데 당신이 뭔데 대신해서 신세를 갚으라 말라 하는 거예요?”아까 주현정은 한참을 캐물었지만, 배석준은 자
계속 도아린과 같은 편에 서 있던 주현정이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자 도아린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에는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지만 애써 입술을 깨물었다.도아린은 주현정이 또 병이 발작해서 쓰러졌다가 깨어난 후에 그날의 기억을 잃은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주현정의 눈빛은 아주 또렷했다.주현정은 도아린의 손을 꼭 잡고 힘없이 말했다.“저들은 너무 지독한 사람들이야. 너는 이길 수가 없어. 나는 네가 괴로운 일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아.”“어머님...”도아린은 주현정의 마음을 알고 서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주현정은 흘러내린 도아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고 눈물이 속절없이 떨어졌다.몇 분 후, 병실 문이 열렸다.도아린은 들고나온 종이를 들었다.“이건 배지유와의 합의서입니다. 줄 수 있지만, 조건이 있어요.”“나는 동의 안 해.”배건후는 바로 거절했다. 배석준은 도아린의 앞으로 가서 받으려고 했지만, 도아린이 뒤로 물러섰다.“동의하지 않는다면 배지유를 고소하겠습니다. 이미 변호사도 다 찾아봤고 배지유가 지은 죄의 증거들을 다 수집했어요. 최소 징역 10년일 것입니다.”“네가 합의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다 들어줄게!”배석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를 악물고 내뱉는 배건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동의 안 해요.”“너는 지유를 꼭 궁지에 몰아넣어야 하겠어?”배석준은 화를 내고는 도아린을 쳐다보았다.“말해. 조건이 뭐야! 이 집에서는 아직 내가 내린 결정을 따라야 해!”배건후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도아린의 혀를 도려내서라도 그녀가 더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건후의 마음과 달리 도아린은 평온한 모습으로 담담하게 말했다.“이혼하겠습니다.”“...”병실 안팎이 순간 조용해졌다.배석준은 멍하니 있다가 비웃음을 지었다. 도아린이 드디어 숨겨둔 속셈을 들어냈다고 생각했다.“얼마를 원해?”도아린이 배건후한테 시집을 온 것은 돈 때문이었으니 이
하지만 도아린은 배건후가 사인을 해주기만 한다면 다 상관없었다.배석준이 재촉하자 배건후는 사인했고 도아린도 합의서를 건넸다.주현정은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는 도아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가득 느껴졌다. 도아린은 바로 떠나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합의이혼서를 접어서 가방 안에 넣은 도아린은 홀가분해진 기분을 느꼈다.그러나 배건후는 마치 방금 마라톤을 마치고 온 사람처럼 피곤한 기색으로 의자에 앉아 침울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석준의 그 앞에서 서성이며 성대호에게 전화해서 경찰서로 배지유를 데리러 가라고 했다. 합의서를 팩스로 보냈으니 배지유는 드디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다.3시간 후, 주현정이 수술실에서 나왔다. 의사는 수술이 아주 성공적이라고 했다. 종양은 떼어내서 조직검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양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김지민은 두 번 전화를 걸어 배석준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배석준은 모두 거절했다. 그는 주현정의 손을 꼭 잡고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우정윤은 처리할 문건들을 모두 배건후의 앞에 내밀었다. 이제 오후밖에 되지 않았는데 상사의 얼굴에는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올라오는 것 같았고 싸늘한 눈빛이 소름 돋게 했다.“내일 돌아가는 항공권을 예약할까요? 사모님도 돌아가십니까?”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배건후는 사인펜을 부러뜨렸고 눈을 가늘게 떴다....도아린이 자리를 떠난 후, 진씨 가문의 사람들은 레스토랑의 음식들을 진씨 가문의 별장으로 옮겼다. 도아린이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 축하파티를 계속했다.도아린은 자신의 이혼 소식을 덤덤하게 말했고 윤명희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너는 그 사람과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어서 보상을 바라지 않았지만, 우리 진씨 가문에서는 절대로 그 사람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내 동생을 괴롭혔으니 배건후의 동생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진경수가 말했다.소유정은 벌써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를 정도였는데 또 눈물
도아린은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이 업계를 떠나게 된 이유에는 앞에 있는 이 사람의 지분이 많았다.도아린은 가녀린 몸을 꼿꼿하게 세웠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내미는 순간 그녀는 일부러 뒤로 물러섰다.남자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진수혁을 보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미안. 내가 네 동생을 놀라게 했나 봐.”진수혁은 아무 표정이 없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고 평온한 시선으로 도아린을 보고 있었다.“그 바람둥이 같은 얼굴을 보고 놀란 거야.”진경수는 도아린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유정 씨랑 쇼핑가려던 거 아니야?”도아린은 둘째 오빠가 지금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빠르게 소유정을 끌고 나갔다.유진혁도 당연히 따라갔지만, 그는 도아린이 소유정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부러 거리를 두고 걸었다.“아까 저 남자를 알고 있어?”소유정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세 사람은 진씨 가문의 차를 타고 해남의 쇼핑 거리로 갔다.“환자를 보살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여기 보신탕을 좀 드세요.”병원의 복도에서는 김지민이 보온통을 배석준의 앞에 내밀었다.배석준은 환자를 돌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하룻밤을 보살폈는데 벌써 온몸이 시큰거렸다. 그는 보신탕을 단숨에 다 마셨고 속이 따뜻하니 피로가 더 몰려왔다.배석준이 눈을 감고 있자 김지민은 앞으로 가서 머리를 안마해주었다.“대표님이랑 도아린 씨는 정말 이혼한 거예요?”배석준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주현정은 어리석은 일을 많이 했지만 유일하게 옳은 일은 배건후에게 이혼을 하라고 강요한 것이다.도아린은 고집이 너무 세다. 일반 사람과 결혼을 했다면 그 고집을 내세워 집안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겠지만 배 씨 가문에게는 이런 여자가 필요 없었다.그들이 필요한 사람은 집안의 사소한 일들을 잘 해낼 수 있는 순종적인 사람일 뿐이다.“대표님의 몸값이 얼
김지민은 도발적으로 주현정을 쳐다보았다. ‘이것 봐. 분명 당신이 더 심하게 아픈데 회장님은 나를 더 걱정하고 있어.’주현정은 그런 김지민이 가소로웠고 실랑이를 벌일 생각이 없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녀는 배석준이 김지민을 데리고 약을 바르러 간호사한테 간다는 것을 들었다.도아린이 병실로 들어왔을 때는 엉망이 된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주현정이 아직 깨지 않은 줄로 알고 최대한 조용히 걸레를 들고 청소를 했고 주현정은 익숙한 향기를 맡고 눈을 떴다.“아린아.”“어머님, 깨셨어요?”도아린은 얼른 걸레를 곁에 두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바로 의사를 불러올게요.”주현정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아마 양성일 거야. 괜찮아.”도아린은 그녀의 입술이 마른 것을 보고 물을 따랐다. 도아린은 컵 두 개를 번갈아 가면서 물을 식혔고 물이 뜨겁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주현정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빨대를 꺼내 컵에 꽂고는 주현정의 입가에 내밀었다.“천천히 드세요.”주현정은 뿌듯한 미소를 짓고는 물을 두 모금 정도 마시니 마르던 목구멍이 편안해졌다.“네 예진 이모가 대회를 보고 업계에서 네 디자인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고 해. 팔 생각이 있으면 연락해줄 수 있어.”도아린은 강태식이 200억을 내어 사고 싶어 했지만, 자신이 거절한 얘기를 했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당연히 작품을 고가에 팔고 싶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인품에 문제가 있는 사람한테는 절대 팔지 않을 것이다.주현정은 강태식이 진 빚이 있다는 게 생각났지만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지 않았다.“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 회장님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저녁에 야식을 갖고 올게요.”김지민이 복도에서 말하고 있었다. 도아린은 주현정을 보았고 그녀의 눈에 비친 비웃음을 보았다.배석준은 문을 열고 들어왔고 순간 표정을 굳혔다.“건후가 네 조건을 다 들어줬잖아. 여기는 왜 또 왔어?”“아린이는 당신이 아니라 나를 보러 온
“그리고 나서...”윤명희는 말하다가 진범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하는 걸 허락했다.“그리고 나서 건후는 수술실로 들어갔어.”윤명희는 이런 말을 전하기가 어려운 듯했다.그녀와 도아린은 재회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그녀는 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마음은 분명 요동치고 있을 것이었다.“아린아...”윤명희는 딸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그녀의 반응을 세심히 살폈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그럼 아직 중환자실에 있는 거예요? 아직 위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아니,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어. 현정 씨가 건후를 연성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거든.”윤명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좀 더 회복되면 엄마랑 같이 건후 보러 가자.”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윤명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배건후가 정말 그녀보다 심하게 다쳤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국내 최고 의료 시설을 갖춘 해남 병원을 두고 굳이 그를 연성시에 있는 병원으로 옮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계속 추궁해 봤자 거짓말만 늘어날 뿐이었으니 도아린은 일찍 퇴원 해서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집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은 계속 번갈아 가며 그녀 곁을 지켰다.겉으로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녀가 외부와 연락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도지현이 찾아왔다.그동안의 훈련과 적응 끝에 그는 드디어 의족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도지현은 라이브 방송 계정을 개설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고 팬들에게 자신의 의족을 보여주었다.그러면서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한테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
“오빠, 제 휴대폰 어디갔는지 알아요?”“너 휴대폰 고장 났더라고. 내일 새로 바꿔 줄게.”진수혁은 다시 소파로 돌아가 업무를 이어갔다.도아린은 심심해서 소파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였다. 그 안에는 세탁된 옷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진수혁은 도아린의 병실에 머물며 그녀 곁만 지키고 있었다.“오빠, 저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쉬어요.”도아린이 말했다.“이제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저를 건드리진 않을 거니까요.”“그럴 가능성이 작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야.”진수혁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는데 손가락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휴식뿐이야. 몸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사흘 후, 도아린은 바닥에 발을 딛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오빠, 저 건후 씨 보러 가고 싶어요. 과거 일은 제쳐둔다고 해도 이번에는 건후 씨가 절 구해준 거잖아요.”“건후 씨는 이 병원에 없어.”진수혁은 도시락을 열고는 그녀에게 숟가락을 건넸다.도아린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제 기억엔 건후 씨도 손과 다리가 골절됐고 이마에도 상처가 있었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기로 교통 사고는 겉으로 보면 얼마 안 다친 것 같지만 심하게 다친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진수혁은 부주의로 숟가락을 바닥에 떨구고 몸을 숙여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이거 씻고 올게.”병실 안에도 세면대가 있었지만 진수혁은 굳이 숟가락을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도아린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설마, 내 말이 맞았던 걸까?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걸까?’그녀는 당시 배건후의 상태를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사고 이후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 알 수 없었다.‘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면 혹시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건가?’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윤명희와 진범준이 들어왔다.“퇴원 준비 끝냈어. 밥을 다 먹으면 바로 퇴원하자.”윤명희는 남편을 힐끗 본 후 도아린에게 말했다.“아린
“너 쉬어야 해.”역시 진수혁은 도아린이 다른 사람과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지금은 잠이 오지 않아요.”도아린은 변슬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말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러자 변슬기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슬기 씨랑 여자끼리 할 얘기가 좀 있어요.”진수혁은 변슬기의 수줍은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힐끗 쳐다봤다.“도 선생님을 오래 방해하지는 않을게요.”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오래 방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아린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진수혁의 반응을 살폈다.“그럼 잠깐만 허락해줄게.”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병실을 나갔다.“도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변슬기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도아린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꿈을 꿀 때마다 자신이 더러운 수술대에 눕혀져 있는 장면이 떠올랐고 깨어 있는 상태인데도 장기를 이식하겠다고 날카로운 수술칼을 들이대는 장면도 아주 소름 끼쳤다.그런 꿈을 꿀 때마다 도아린이 하늘에서 내려와 천사처럼 그녀를 구해 주었다.‘빨리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요!’그렇게 매번 변슬기는 도아린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면 정작 도아린은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변슬기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혹시라도 그 꿈이 현실로 될까 봐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자기를 구해준 대가로 도아린이 나쁜 놈들에게 희생될까 봐 말이다.“울지 마요.”도아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변슬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도 선생님, 제가 너무 멍청했어요. 안민아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도 선생님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텐데...”“피해자를 탓할 필요는 없어요. 안민아가
진수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수술 때문에 다 잘라 버렸어. 금방 자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면 비서한테 가발이라도 사 오라고 할까?”‘그래서 지금 내가 대머리라고?’손을 들어 가까스로 머리를 만져보자 얇은 망 같은 게 씌워져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던 걸 보면 부상이 꽤 심했던 게 분명했다.후유증만 남지 않는다면 머리카락 정도야 대수롭지 않았다.“건후 씨는... 괜찮아요?”그녀는 배건후가 차에서 굴러떨어지고도 절뚝이며 달려오던 모습으로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 도움을 요청하던 것까지, 그리고 구급차 안에서 했던 말마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병원에 도착한 후로부터는 의식이 흐릿했지만 눈을 뜰 때마다 그가 곁에 있는 걸 볼 수 있었다.배건후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버텨야 한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진수혁은 그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휴대폰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일 끝나면 가발 하나 사 와.”그는 병실 문을 닫고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번만 보고 바로 나갈게!”강재민이 진수혁의 제지를 뿌리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도아린이 깨어나 있는 걸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아린 씨, 깨어났어요?”그를 막지 못한 진수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아린이는 휴식이 필요해. 그러니까 용건만 말해.”“나도 알아.”강재민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몸을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도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절... 알아볼 수 있겠어요?”강재민은 순간 긴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누구냐고 묻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당연히 알죠.”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강재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병실 문가에 서 있는 진수혁을 바라보았다.“나 아린 씨랑 단둘이 몇 마디만 하면 안 돼?”“안 돼.”진수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방금 깨
“건후야...”주현정은 깜짝 놀라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무심코 배건후의 상처를 눌러버리자 그는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찌푸렸다.주현정은 급히 손을 놓고 배건후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건후야, 엄마가 의사를 부를 테니까 치료 좀 받아.”배건후는 고개를 돌려 차가운 시선으로 곁에 있던 진씨 가문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여기가 어디죠?”“건후야, 엄마 놀라게 하지 마!”주현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윤명희가 다가와서 그에게 치료를 권하려 했지만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먼저 물었다.“왜 제가 병원에 있는 거죠?”“아린이랑 교통사고를 당했잖아. 너...”진경수는 혹시나 일부러 기억을 잃은 척하는 건 아닌가 해서 그의 눈을 주시했다.그러나 배건후의 눈빛은 완전히 흐려져 있었고 병원에 있는 이유뿐만 아니라 사람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피를 토하고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진경수가 급히 그를 붙잡았다.“배건후!”“의사 선생님, 제발 제 아들 좀 살려 주세요!”...눈을 떴을 때, 도아린은 침대 옆 소파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는 진수혁을 보았다.“오빠...”그녀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도아린이 깨어난 걸 본 진수혁은 노트북을 내려놓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움직이지 마. 내가 물 가져올게.”그는 침대 각도를 살짝 올리고는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는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받쳐 주었다.목이 바짝 말랐던 도아린은 단숨에 물 반 컵을 마셨고 그제야 목 상태가 조금 나아진 듯했다.“그 사람들 말이야...”비록 증거는 없었지만 그녀는 트럭 운전사를 매수한 주범이 장기 매매 조직과 관련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그녀는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진수혁이 말을 끊어 버렸다.“이미 잡았어.”그의 평소 같이 차분한 눈빛에는 왠지 모를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변슬기를 구출한 다음 날, 그는 사람을 시켜 목장 근처의 CCTV 영상을 분석하게 했다. 그리고 도주할 가능성이
의사가 급히 다가와 도아린을 확인하더니 주사를 한 대 더 놓았다. 그리고는 운전기사에게 속도를 빨리라고 재촉했다.“환자의 상태가 매우 위급합니다. 빨리 가주세요!”“도아린, 너 절대 죽으면 안 돼! 나랑 이혼할 때는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이렇게 죽으면 안 되지.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다며? 그럼 지금이 네 대단한 자존심을 보여 줄 때야!”배건후는 점점 더 초조해져서 말을 가리지 않고 마구 내뱉었다. 눈물은 통제할 수 없이 흘러내려 도아린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눈물이 상처에 닿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중상 환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 쪽에서는 미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구급차가 도착하자마자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도아린을 들것에 올리고는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환자분도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한 의사가 배건후를 붙잡았다.“저는 괜찮습니다.”배건후는 의사의 팔을 뿌리치고는 다리를 절뚝이며 따라붙었다.“아내가 괜찮은지 먼저 확인해야 해요!”하지만 그 의사는 끝까지 배건후를 따라가면서 그의 상태를 관찰했다. 그는 팔과 다리에 골절 가능성이 있었고 귀에서 출혈이 있는 걸 봐서 뇌 손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사가 뭐라 하든 배건후는 듣지 않았고 오직 도아린 곁을 지키려 했다.진경수를 비롯한 진씨 가문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도아린의 사고 소식을 접한 윤명희도 서둘러 병원으로 왔다.“배건후, 이 개자식아!”진경수는 배건후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으나 경찰이 막아서며 상황을 설명했다.“건후 씨의 빠른 판단이 없었으면 아린 씨는 더 큰 부상을 입었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사망했을 수도 있고요. 건후 씨가 트럭의 충격을 막아줘서 그나마 다행입니다.”“아린아, 조금만 버텨. 가족들도 다 너 보러 왔어. 아무 일도 없을 거고 무사할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윤명희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도아린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혹여 그녀를 아프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건후야, 너도 치료
어떤 사람은 차 문을 열자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힘을 써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배건후의 간절함에 영향을 받았는지 다들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썼다. 모두가 차 안에 있던 도구를 꺼내 들고 힘을 합쳐 문을 열려고 했다.“하나, 둘, 셋! 하나, 둘, 셋!”“조금만 더 힘내요. 움직이기 시작했어요!”누군가가 이렇게 외치자 다들 이를 악물었고 어떤 이는 손에 들고 있던 도구를 부러뜨릴 정도로 힘을 썼다. 마침내 ‘쾅’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도아린!”문이 열리자마자 배건후는 앞으로 달려가서 안전벨트를 풀어주고 그녀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배건후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고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다쳤어? 어디가 아픈지 말해줘.”힘겹게 눈을 뜬 도아린은 배건후의 부어오른 눈, 갈라진 입술과 멍든 뺨을 바라보았다. 우아하고 단정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배건후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다리가 끼이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그때, 도아린은 그의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며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배건후는 즉시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있으니까 걱정 마! 곧 구급차가 올 거고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배건후는 이렇게 말하며 직접 도아린을 안아 올렸다. 그러나 좌석에서 벗어나자마자 두 사람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다가와서 그들을 도왔다.어떤 이는 차량 뒤쪽에 경고 표지를 설치했고 어떤 이는 경찰에 신고를 했으며 또 어떤 이는 휴지를 찾아서 출혈을 막아주었다.구급차는 경찰차보다 먼저 도착했다.의사는 부상자가 두 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구급차를 한 대 더 부르려 했다.“전 괜찮습니다! 제 아내부터 봐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의사는 배건후가 걸을 수 있고 말도 조리 있게 할 수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함께 태웠다.도아린은 산소마스크를 쓴 채로 몽롱하게 잠에 빠지려 했다.그녀를 살펴본 의사는 표정이 심각
급커브를 빠져나가면 피할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급하게 액셀을 밟았다.차량 속도가 너무 빨랐기에 커브를 돌 때 브레이크를 여러 번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칫하면 차가 옆으로 넘어갈 뻔했다.도아린이 막 안도의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맞은편에서 트럭 한 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뒤쪽 트럭도 경적을 울렸고 맞은편의 트럭도 그에 응답하듯 경적을 울렸다.맞은편에서 오는 트럭이 도아린의 차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 왔다. 그녀는 순식간에 온몸의 혈액이 머리로 쏠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계획된 살인이었다.그녀는 필사적으로 침착하려고 했지만 몸은 이미 마비된 상태였다.옆에서는 또 다른 트럭이 밀어붙여서 도망칠 공간이 없었다. 브레이크를 밟거나 정면충돌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그렇다고 속도를 줄이면 뒤에 있는 검은색 밴에 부딪힐까 봐 걱정이었다.‘돌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여자는 정말 남자보다 판단력이 약한 것일까?’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인 듯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검은색 밴이 도아린의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검은색 밴은 급브레이크를 밟더니 도아린의 차와 트럭 사이를 가로막았다.맞은편 트럭 운전사는 이런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어 버렸고 도아린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트럭과 충돌해 버렸다.두 대의 트럭은 세게 부딪히고 나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트럭에 있는 트레일러가 검은색 밴을 세게 들이받았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도아린도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밴에 부딪혀 버렸다. 그 충격에 검은색 밴은 완전히 납작하게 눌려 버렸다.에어백이 터지면서 그녀는 온몸이 쑤셨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시야도 흐릿해졌다.그때, 부서진 검은색 밴의 문이 힘겹게 밀려 열리더니 한 남자가 굴러떨어졌다.배건후였다. 그의 팔은 피투성이였고 새하얀 셔츠도 온통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도아린의 차 앞으로 걸어왔다.“도아린,
배건후는 도아린을 따라 아래층 정원까지 내려왔다.“도아린...”그제서야 입을 열었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끊어버렸다.“지금 소송 문제로 바쁘시잖아요. 더 이상 건후 씨 시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도아린, 우리 제대로 이야기 좀 해.”“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배건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 앞을 막았다.“넌 그놈들의 이익을 건드렸어. 다들 널 가만두려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경찰에게 내가 제공한 정보라고 말해. 그러면 나를 찾아올 거니까.”도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어젯밤 그녀가 변슬기를 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경찰뿐이었다. 경찰 측에서는 피해자의 신변 보호를 위해 도아린과 진수혁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았다.주현정 역시 변슬기가 납치되었다는 사실만 듣고 그녀와 함께 병문안을 온 것이었다.하지만 배건후는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유민 씨가 말해줬어요?”배건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부정하지도 않았고 결코 인정하지도 않았다.그는 왠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배건후는 손을 뻗어 도아린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보고는 허공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거두었다.“도아린, 넌 지금 보호가 필요해.”“보호가 필요하다고 해도 배 대표님의 보호는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그가 건드리지도 않은 어깨를 툭 털어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저희는 감정적으로 얽힌 사이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도 더더욱 아무 관계 없는 사이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제 앞에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그럼 법정에는 왜 간 거야?”그녀가 법정에 온 걸 보고 배건후는 몇 날 며칠 동안 설레발을 쳤다. 하지만 그의 설레는 감정은 결국 바닥에 내팽개쳐져 처참히 짓밟히고 말았다.“법정에 간 건 저희 할머니 소송 때문이에요.”도아린은 그를 지나치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배건후가 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