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뭐예요? 동정이에요? 보상이에요?”도아린의 눈에서는 더는 따뜻함이 없었고 비꼬는 차가움만이 가득했다.그녀는 뭐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빠르게 다가오는 여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건후 씨...”손보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회장님과 사모님께서 다투고 계셔. 건후 씨가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배건후는 짧게 대답했지만, 시선은 계속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다.“언제 돌아갈래? 우 비서한테 항공편을 예약하라고 할게.”손보미는 도아린을 보고 도발하려는 눈빛이 스치더니 일부러 불쌍한 척하면서 말했다.“도아린, 합의서 쓸 거지?”도아린은 그녀를 흘겨보았다.“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손보미는 가슴 아픈 척하며 말했다.“지유는 어렸을 때부터 곱게 자란 아이야. 그 안에서 그 고생을 감당할 수가 없어.”“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손보미는 화가 나서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말했다.“건후 씨, 도아린은 티파니 주얼리를 대표해서 참가하기는 했지만, 당신 아내잖아. 도씨 가문에서 괴롭히지 않게 보상을 많이 해줘.”손보미는 도아린을 위해 좋은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을 배건후의 안사람으로 보고 하는 말이었다.배건후는 불쾌하게 미간을 찡그렸다.“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손보미는 그대로 굳었다. 그 사건이 있고 난 뒤로부터 배건후가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손보미는 당황한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불쌍한 얼굴을 했다.도아린은 두 사람이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아 뒤돌아 캠핑카로 들어갔다.캠핑카는 천천히 움직였고 배건후도 자리를 떴다. 손보미는 배건후의 뒤를 따라갔다.“아현 선생은 수선 대가신데 도아린은 어떻게 감히 아현 선생의 이름으로 대회에 참가한 거야!”배건후의 표정을 슬그머니 살펴보던 손보미는 그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계속 말했다.“송 감독님이 아현 선생에게 디자인, 메이크업과 도구의 총감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그의 눈짓 한 번에 우정윤은 바로 앞으로 다가가 김지민을 캠핑카에서 끌어냈다. 그런 상황에도 김지민은 발버둥을 쳤고 결국 따귀를 맞았다.“어디서 굴러온 돌이 여기서 행패를 부리고 있어!”“...”김지민은 얼굴을 움켜잡고 서럽게 배석준을 쳐다보았다.배석준은 우정윤이 오지랖을 부린다고 화가 났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기에 김지민에게 손보미를 따라 자리를 피하라고 손짓했다.배건후는 차에 올라탄 후 차 문을 닫고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여 천천히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없었고 주현정도 말을 하지 않았다.배석준은 모두가 자신을 배신하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며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너 도아린을 만났잖아. 합의서는 언제 써주겠다고 해?”배건후는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은 배석준의 머릿속을 뚫고 들어가 모든 생각을 읽은 것 같았다.“아버지가 대회 결과를 조작했기 때문에 이번 내기는 없던 일입니다.”배석준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표정이 일그러졌다.“도아린이 아현의 작품으로 대회에 참가했기에 먼저 규칙을 어긴 거야. 나는 받은 대로 돌려준 것뿐이지.”“도아린이 바로 아현이에요.”주현정은 아들을 흘겨보고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배건후는 엄마의 태도에 얼굴이 창백해졌고 담배를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서 핏줄이 선명해졌다.엄마도 도아린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오직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배석준은 아내를 한번 보고 또 배건후를 한번 보더니 더 화가 났다.“너희들 도아린의 신분을 알면서도 일부러 나를 속인 거야? 너희 두 사람, 한 명은 지유의 친오빠고 한 명은 친엄마인데 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다른 사람의 편을 들고 지유는 안에서 고통받게 하고 있어! 내가 빨리 발견해서 강태식한테 신세를 갚으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지유는 진작에 너희들 때문에 망가졌을 거야!”“강태식이 빚진 사람은 건후인데 당신이 뭔데 대신해서 신세를 갚으라 말라 하는 거예요?”아까 주현정은 한참을 캐물었지만, 배석준은 자
계속 도아린과 같은 편에 서 있던 주현정이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자 도아린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에는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지만 애써 입술을 깨물었다.도아린은 주현정이 또 병이 발작해서 쓰러졌다가 깨어난 후에 그날의 기억을 잃은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주현정의 눈빛은 아주 또렷했다.주현정은 도아린의 손을 꼭 잡고 힘없이 말했다.“저들은 너무 지독한 사람들이야. 너는 이길 수가 없어. 나는 네가 괴로운 일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아.”“어머님...”도아린은 주현정의 마음을 알고 서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주현정은 흘러내린 도아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고 눈물이 속절없이 떨어졌다.몇 분 후, 병실 문이 열렸다.도아린은 들고나온 종이를 들었다.“이건 배지유와의 합의서입니다. 줄 수 있지만, 조건이 있어요.”“나는 동의 안 해.”배건후는 바로 거절했다. 배석준은 도아린의 앞으로 가서 받으려고 했지만, 도아린이 뒤로 물러섰다.“동의하지 않는다면 배지유를 고소하겠습니다. 이미 변호사도 다 찾아봤고 배지유가 지은 죄의 증거들을 다 수집했어요. 최소 징역 10년일 것입니다.”“네가 합의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다 들어줄게!”배석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를 악물고 내뱉는 배건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동의 안 해요.”“너는 지유를 꼭 궁지에 몰아넣어야 하겠어?”배석준은 화를 내고는 도아린을 쳐다보았다.“말해. 조건이 뭐야! 이 집에서는 아직 내가 내린 결정을 따라야 해!”배건후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도아린의 혀를 도려내서라도 그녀가 더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건후의 마음과 달리 도아린은 평온한 모습으로 담담하게 말했다.“이혼하겠습니다.”“...”병실 안팎이 순간 조용해졌다.배석준은 멍하니 있다가 비웃음을 지었다. 도아린이 드디어 숨겨둔 속셈을 들어냈다고 생각했다.“얼마를 원해?”도아린이 배건후한테 시집을 온 것은 돈 때문이었으니 이
하지만 도아린은 배건후가 사인을 해주기만 한다면 다 상관없었다.배석준이 재촉하자 배건후는 사인했고 도아린도 합의서를 건넸다.주현정은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는 도아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가득 느껴졌다. 도아린은 바로 떠나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합의이혼서를 접어서 가방 안에 넣은 도아린은 홀가분해진 기분을 느꼈다.그러나 배건후는 마치 방금 마라톤을 마치고 온 사람처럼 피곤한 기색으로 의자에 앉아 침울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석준의 그 앞에서 서성이며 성대호에게 전화해서 경찰서로 배지유를 데리러 가라고 했다. 합의서를 팩스로 보냈으니 배지유는 드디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다.3시간 후, 주현정이 수술실에서 나왔다. 의사는 수술이 아주 성공적이라고 했다. 종양은 떼어내서 조직검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양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김지민은 두 번 전화를 걸어 배석준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배석준은 모두 거절했다. 그는 주현정의 손을 꼭 잡고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우정윤은 처리할 문건들을 모두 배건후의 앞에 내밀었다. 이제 오후밖에 되지 않았는데 상사의 얼굴에는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올라오는 것 같았고 싸늘한 눈빛이 소름 돋게 했다.“내일 돌아가는 항공권을 예약할까요? 사모님도 돌아가십니까?”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배건후는 사인펜을 부러뜨렸고 눈을 가늘게 떴다....도아린이 자리를 떠난 후, 진씨 가문의 사람들은 레스토랑의 음식들을 진씨 가문의 별장으로 옮겼다. 도아린이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 축하파티를 계속했다.도아린은 자신의 이혼 소식을 덤덤하게 말했고 윤명희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너는 그 사람과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어서 보상을 바라지 않았지만, 우리 진씨 가문에서는 절대로 그 사람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내 동생을 괴롭혔으니 배건후의 동생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진경수가 말했다.소유정은 벌써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를 정도였는데 또 눈물
도아린은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이 업계를 떠나게 된 이유에는 앞에 있는 이 사람의 지분이 많았다.도아린은 가녀린 몸을 꼿꼿하게 세웠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내미는 순간 그녀는 일부러 뒤로 물러섰다.남자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진수혁을 보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미안. 내가 네 동생을 놀라게 했나 봐.”진수혁은 아무 표정이 없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고 평온한 시선으로 도아린을 보고 있었다.“그 바람둥이 같은 얼굴을 보고 놀란 거야.”진경수는 도아린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유정 씨랑 쇼핑가려던 거 아니야?”도아린은 둘째 오빠가 지금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빠르게 소유정을 끌고 나갔다.유진혁도 당연히 따라갔지만, 그는 도아린이 소유정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부러 거리를 두고 걸었다.“아까 저 남자를 알고 있어?”소유정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세 사람은 진씨 가문의 차를 타고 해남의 쇼핑 거리로 갔다.“환자를 보살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여기 보신탕을 좀 드세요.”병원의 복도에서는 김지민이 보온통을 배석준의 앞에 내밀었다.배석준은 환자를 돌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하룻밤을 보살폈는데 벌써 온몸이 시큰거렸다. 그는 보신탕을 단숨에 다 마셨고 속이 따뜻하니 피로가 더 몰려왔다.배석준이 눈을 감고 있자 김지민은 앞으로 가서 머리를 안마해주었다.“대표님이랑 도아린 씨는 정말 이혼한 거예요?”배석준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주현정은 어리석은 일을 많이 했지만 유일하게 옳은 일은 배건후에게 이혼을 하라고 강요한 것이다.도아린은 고집이 너무 세다. 일반 사람과 결혼을 했다면 그 고집을 내세워 집안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겠지만 배 씨 가문에게는 이런 여자가 필요 없었다.그들이 필요한 사람은 집안의 사소한 일들을 잘 해낼 수 있는 순종적인 사람일 뿐이다.“대표님의 몸값이 얼
김지민은 도발적으로 주현정을 쳐다보았다. ‘이것 봐. 분명 당신이 더 심하게 아픈데 회장님은 나를 더 걱정하고 있어.’주현정은 그런 김지민이 가소로웠고 실랑이를 벌일 생각이 없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녀는 배석준이 김지민을 데리고 약을 바르러 간호사한테 간다는 것을 들었다.도아린이 병실로 들어왔을 때는 엉망이 된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주현정이 아직 깨지 않은 줄로 알고 최대한 조용히 걸레를 들고 청소를 했고 주현정은 익숙한 향기를 맡고 눈을 떴다.“아린아.”“어머님, 깨셨어요?”도아린은 얼른 걸레를 곁에 두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바로 의사를 불러올게요.”주현정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아마 양성일 거야. 괜찮아.”도아린은 그녀의 입술이 마른 것을 보고 물을 따랐다. 도아린은 컵 두 개를 번갈아 가면서 물을 식혔고 물이 뜨겁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주현정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빨대를 꺼내 컵에 꽂고는 주현정의 입가에 내밀었다.“천천히 드세요.”주현정은 뿌듯한 미소를 짓고는 물을 두 모금 정도 마시니 마르던 목구멍이 편안해졌다.“네 예진 이모가 대회를 보고 업계에서 네 디자인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고 해. 팔 생각이 있으면 연락해줄 수 있어.”도아린은 강태식이 200억을 내어 사고 싶어 했지만, 자신이 거절한 얘기를 했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당연히 작품을 고가에 팔고 싶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인품에 문제가 있는 사람한테는 절대 팔지 않을 것이다.주현정은 강태식이 진 빚이 있다는 게 생각났지만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지 않았다.“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 회장님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저녁에 야식을 갖고 올게요.”김지민이 복도에서 말하고 있었다. 도아린은 주현정을 보았고 그녀의 눈에 비친 비웃음을 보았다.배석준은 문을 열고 들어왔고 순간 표정을 굳혔다.“건후가 네 조건을 다 들어줬잖아. 여기는 왜 또 왔어?”“아린이는 당신이 아니라 나를 보러 온
“회장님?”김지민은 병실 앞에서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고 답이 없자 살며시 문을 열었다.주현정은 잠이 들었고 병실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김지민은 의아하게 문을 닫고는 핸드폰을 꺼내 배석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석준이 전화를 받지 않자 손보미에게 걸었다.“회장님께서 대표님이랑 있어?”“회장님은 병원에서 사모님을 돌보고 있잖아?”“아, 알겠어.”“왜 그래, 설마 멀쩡한 사람 하나 간수 못 하는 거야?”김지민은 손보미가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것을 듣기 싫어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낮은 소리로 비웃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여자랑 한편이 되다니, 어디 팔려가도 좋다고 굽신거릴 모양이네.”퍼뜩 고개를 돌린 김지민은 도아린을 째려보았다.자신과 손보미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다니, 어림없다.김지민은 계속 앞으로 갔고 도아린은 계속해서 말했다.“손보미가 주목받기 시작한 그 뮤비, 감독님이 원했던 배우는 당신이었어. 네가 얼굴을 비추는 걸 원치 않는다고 손보미가 감독님한테 얘기한 거야. 그러고 나서 손보미가 감독님의 비위를 맞춰주니까 따내게 된 거야.”“...”김지민은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녀가 금방 손보미의 업무를 맡았을 때 뮤직비디오 캐스팅을 접하게 되었는데 감독님은 이력서를 보지도 않고 동의했었다.그때 김지민은 손보미의 뒤에 있는 스폰서가 손을 쓴 거로 생각했는데 지금 도아린이 언급하는 내용을 듣자니 촬영이 끝나고 나서 감독님이 아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던 게 생각났다.보온통의 손잡이를 잡은 김지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도아린은 벽에 기대서 계속 말했다.“5년 동안 사귀고 갑자기 헤어졌던 너의 그 남자친구는 너를 항상 많이 사랑했어.”“허튼 소리하지 마!”김지민은 뒤돌아 소리쳤고 눈가에는 상처가 스쳤다. 그녀는 바로 웃음을 지으며 마치도 우스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말했다.“도아린, 나랑 보미 사이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지어낸 이야기는 너무 터무니
“너한테 초대장을 보내지는 않았어. 요즘 네가 해남에서 바쁘게 보내고 있으니 너를 신경 쓰이게 하지 말라고 네 친구가 얘기하더라.”김지민은 이에 대해 해명하려고 했지만, 전화에서 여자가 남자한테 분유를 타 달라고 부탁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는 대충 한마디 건네고는 전화를 끊었다.김지민은 상대방에게 도아린이 말한 것처럼 그랬었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1개월 축하파티만 놓고 봐도 손보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도아린은 병실로 돌아왔다. 주현정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물을 마시려 하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얼른 컵에 뜨거운 물을 받고는 적절한 물 온도 맞춰서 주현정에게 건넸다.“천천히 드세요.”“네가 수고가 많아.”“아니에요.”도아린이 밖에서 한 얘기들을 주현정은 다 듣고 있었다. 그녀는 도아린이 그것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무척 궁금했다.이 사실들은 도아린이 배석준에게 질척거리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서대은에게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서대은은 대외적으로 드레스 디자이너지만 공개되지 않게 거대한 관계망을 운영하고 있었다. 만약 서대은이 도아린을 도와 종적을 감추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쉽게 지난 3년을 숨어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것들을 도아린은 주현정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저 그녀에게 몸조리를 잘하라고 당부했다.주현정은 오후에 죽을 한 그릇 정도밖에 먹지 않았기에 허기가 느껴졌다. 도아린은 아래층에 편의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 내려가서 오트밀을 사서 왔다. 돌아왔을 때는 병실에 두 사람이 와있었다.배건후와 금방 풀려난 배지유였다.배지유는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새로 했고 진한 메이크업으로 눈 밑에 생긴 시퍼런 자국을 감췄다.보름 정도 안에 있다가 나온 그녀는 피골이 상접했다.“도아린! 여기가 어디라고 와. 꼭 그렇게 엄마의 화를 돋워야 속이 시원해?”배지유는 달려가서 도아린을 잡으려고 했지만, 배건후한테 손목이 잡혔다.“나랑 약속한 거 잊었어?”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면
도아린은 SNS에 새가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였다. 잠시 후, 음식을 배달시켜려고 하는데 문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신선한 재료와 과일들로 가득했다. 큰오빠의 배려에 감동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인데 연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걱정돼서 이리 모든 것을 준비해 주다니...진수혁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려는 그때, 육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성에 돌아온 거야?”“네.”“할머니가 아린 씨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잠깐 들렀다 갈래?”“위치 보내줘. 내가 데리러 갈게.”이번에 연성을 떠나면 중요한 일이 없는 이상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대표님, 사모님... 아니 아린 씨가 집을 나섰습니다.”그에게 물병을 건네던 유정윤은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가 물병을 건네받으며 약을 입에 넣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이 파래졌다. 잠시 후, 통증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따라가.”“네.”고개를 끄덕이던 우정윤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오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사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회사로 끌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모건 그룹의 다음 계획에 대해 대책을 세우라고 그를 닦달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는 재빨리 구청으로 달려갔고 마침 배석준이 도아린에게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한 탓에 위가 또 말썽인 듯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후, 위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진통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그의 눈빛이
“뭐 하는 짓이에요?”배건후가 품 안에 그녀를 감싸고 차가운 눈빛으로 배석준을 쏘아보았다. 살짝 당황한 배석준은 해명하려다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고개를 치켜들었다.“네가 제정신이냐? 여자 하나 때문에 대표 이사를 그만둬? 회사가 무슨 소꿉장난도 아니고.”“그건 제 일입니다.”“넌 내 아들이야. 너한테 뭐라 할 자격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배석준은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분노가 차올라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고 눈이 충혈되었다.그러나 배건후는 그를 무시한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다.“다친 데 없어?”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손목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얼른 가서 이혼 신고 마무리해요.”뭔가 말을 하려던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고 배석준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배건후, 너 사인 하기만 해. 그럼 진짜 우리 부자지간도 이젠 끝이야.”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구청 안으로 들어갔다.그들이 다시 나왔을 때, 배석준은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배건후와 도아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젠 다 컸다 이거지? 내가 외국에서 힘들게 회사를 키우는 동안 네 엄마가 널 이렇게 가르쳤어?”그러나 배건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데려다줄게.”거절하려고 했지만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배석준의 사람들 때문에 그녀는 그냥 차에 올라탔다.“고마워요.”차에 탄 후, 그녀는 그에게 주소를 말해주었다. 두 사람이 탄 차량은 뒤따라오던 차들을 따돌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차에서 내린 그가 근처의 건물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여기 살아?”“친구 집이에요. 잠깐 머물고 있어요.”그와 더 이상 자세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내일 해남으로 돌아갈 거예요. 잘 지내요.”그녀가 돌아서려는 그때,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율이 사건에 진전이 있어.”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하경 씨한테서 들었어요.”...그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주주들이 다그치지 않았더라면 도아린을 절대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딸의 다리를 반쯤 부러뜨리고 그와 아내의 사이를 이간질시킨 것도 모라자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게 만든 도아린이 주주들에게는 목숨을 건질 지푸라기 같은 존재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고 태도는 서먹서먹하였다. 이것이 이혼에 필요한 절차라면 그녀는 양보할 수 있었다.“10분 드릴게요.”도아린은 옆 벤치로 가서 앉았다. 심호흡하던 그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네가 우리 집안에 시집온 3년 동안, 우리 집안에서도 할 만큼 했다. 도정국 가게의 비용을 전부 부담했고 네 남동생의 병원비도 건후가 다 책임졌었지. 그동안 네가 입고 먹고 쓰고 한 것도 다 우리 가문의 돈이야.”“건후가 널 소홀히 한 건 다른 여자가 생겨서가 아니었다. 막 회사를 인수했으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겠지. 손보미와의 스캔들은 손보미가 귀국한 후, 언론에서 마구 퍼뜨린 것이야. 두 사람은 전혀 문제가 없었어.”...조용히 듣고 있던 그녀가 한마디 내뱉었다.“3분 남았습니다.”배석준은 마음이 불편했다. 윗사람이 체면을 구기고 호의를 베풀고 있는데 어찌 이리 쌀쌀맞기만 하는 건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전혀 굽힐 생각이 없는 그녀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자가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다. 네가 눈감아 주거라. 어차피 너한테서 건후의 아내 자리를 빼앗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건후의 명성에 금이라도 가면 너한테도 좋을 것이 없어.”배석준은 점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배건후와 닮은 그의 얼굴에 짜증이 한껏 묻어났다. “이렇게 하자. 기자회견을 열 테니 최근의 일은 모두 네가 벌인 자작극이라고 하거라. 너희 두 사람 사이에는 제3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자들한테 말해. 이혼 얘기는 네가 먼저 꺼낸 것이 사실이 아니더냐? 건후는 널 쫓아낼 생각이 단 한 번도 없었어.”그녀는 피식
도아린은 일의 자초지종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안민아와 손보미가 손을 잡고 벌인 짓이라는 걸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사실 안민아가 계속해서 강씨 가문으로 가자고 할 때부터 그녀는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보니 안민아와 손보미가 손을 잡았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지난번 백화점에서 안민아는 손보미를 싫어했고 경멸했다. 그러나 이번에 강씨 가문에서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서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엄마, 내일 연성에 좀 다녀올게요.”“뭐 하러?”“내일이 이혼 숙려기간의 마지막 날이에요. 건후 씨와 깨끗이 정리하려고요.”또한 도지현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도정국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윤명희는 그녀를 껴안으며 입을 열었다.“시집가기 싫으면 평생 엄마랑 같이 살아. 엄마가 너 평생 보살펴줄 테니까.”“고마워요.”“또 한 번 고맙다고 하면 엄마 진짜 화낼 거야.”도아린의 어깨를 살짝 내리치면서 피식 웃었다.“둘째 오빠랑 같이 갔다 와. 배건후가 후회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지니까.”“그럴 리 없어요.”그녀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그날 저녁, 욕조에 누워 마사지를 즐기고 있는데 옆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배건후였다.그녀는 다시 핸드폰을 옆에 두고 눈을 감았다.전화가 한번 끊기더니 다시 또 울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울리던 벨 소리가 잠잠해지고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잠시 후,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운 그녀는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 답장을 보냈다. [강재민: 강홍련이 도유준이 성을 바꾸는 걸 동의했어요. 내일 예단을 준비해서 찾아갈 생각인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서대은: 안준휘와 계약을 취소한 두 회사는 모두 손보미가 강재희라는 이름으로 접근한 회사들이야. 나중에 계약을 이행하라고 했을 때, 상대 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어.][소유정: 며칠 쉬러 갔다 올게. 전화기는 꺼둘 거야. 그러니
억울했던 안민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떨며 차마 말을 하지 못하였다.도아린이 통화 내용을 들을까 봐 일부러 물을 틀어놓았는데 어떻게 이리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아직도 도유준 편을 들고 싶어?”도아린은 그녀의 주머니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도유준한테 전화한 거 맞잖아.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또 도유준한테 속아 넘어간 거야?”안민아는 괴성을 지르며 급히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통화기록을 절대 도아린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핸드폰 뺏지 말아요.”“도유준 그 자식이 또 널 속인 거지? 걱정하지 마. 내가 단단히 혼내줄게.”겉으로는 안민아를 걱정하고 있는 척했지만 사실 도아린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그러나 핸드폰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안민아가 한사코 그녀를 막았다.당황스러운 얼굴의 안민아는 안준휘에게 몇 번이나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이때, 안준휘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끊고는 언짢은 얼굴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강요하지 말거라. 말하기 싫다는 애를 왜 그리...”“왜요?”손을 놓던 도아린은 시선을 안민아에게 돌리더니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했다.“설마 강재민 씨야?”“아니에요. 누구와도 약속한 적 없었어요.”“통화 기록은 양측한테 다 있는 거잖아.”이때, 윤명희가 갑자기 현관에 나타났다. 마트를 다녀온 윤명희는 식재료를 하인에게 건네주고는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으며 안민아를 향해 걸어왔다. “민아야, 통화 기록은 양측한테 다 있는 기록이야. 나중에 도유준이 기록이라도 내세워 네가 먼저 만나자고 했다면 그땐 어떡할 거니? 차라리 지금 사실대로 털어놓거라. 그래야 우리도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안 그래?”안민아는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만약 손보미와 손을 잡고 도아린을 음해한 사실을 진씨 가문에서 알게 된다면 결혼을 물론 사업도 물 건너가고 원수가 되고 말 것이다. 고민 끝에 안민아는 결국 자신이 도유준에게 전화를 걸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람으로 인해 깜짝 놀란 강홍련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하려 하였다.오늘의 일은 네 몫도 있는데 여기서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고.그러나 문 뒤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를 보니 온몸의 피가 차가워지는 듯했다. “배 대표님이 여긴 어떻게...”그녀는 재빨리 도정국의 뒤에 몸을 숨기며 극구 변명했다.“오해하지 말아요. 난 그런 적 없으니까. 손보미 씨가 한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안민아가 그런 거예요. 내 아들과 결혼하고 싶어서 꾸민 짓이고 그걸 도아린한테 뒤집어씌운 거라고요.”옆에 있던 손보미가 그녀를 노려보며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걸 배건후는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도정국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눈빛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들이 합심하여 도아린을 모해하려고 일을 꾸몄다가 오히려 도아린에게 당한 것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금속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배건후가 차가운 눈빛으로 도정국을 쳐다보았다. “도아린이 도유준의 성을 내일 당장 바꾸겠다고 했어요.”거절하려는 도정국을 보며 손보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도유준까지 시궁창에 끌어들이지 말아요. 강씨 가문의 사람이 되면 그래도 명문 가문의 도련님으로 인정받는 거니까. 다른 사람은 꿈도 못 꾸는 일이죠.”그녀는 필사적으로 강홍련에게 눈짓을 했고 강홍련도 따라서 도정국을 설득하기 시작했다.화가 치밀어 입술이 파랗게 질렸지만 도정국은 타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잠시 후, 손보미와 배건후가 자리를 뜬 뒤, 그가 강홍련을 발로 차서 바닥에 넘어뜨렸다.“이게 다 당신 탓이야. 이 여편네가 생각이 있는 건지.”문득 도아린의 말이 생각났다. 그동안 도정국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걸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 내가 강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죠? 정은채 그 여자의 모든 것을 다 빼앗고도 한편으로 달콤한 말로 날 속이고 훗날 날 이용해 강씨 가문의 덕을 보려고 한 거 아니에요?”“그게 무슨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불안해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가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차가운 남자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또 도아린 괴롭히러 간 거야?”“아니. 그런 거 아니야.”손보미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우리도 강씨 가문에 가서야 아린 씨가 있는 걸 알게 되었어. 그리고 지유가 아린 씨한테 사과도 했고.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은 다 잊기로 했어. 안 그래? 지유야.”“맞아요. 도아린 씨가 나한테 꽃까지 줬어요. 휠체어에 있는 꽃잎이 바로 그 꽃이에요. 우리 화해했어요.”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누르며 차가운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원한을 다 풀었다면 도아린이 준 꽃을 이리 으스러뜨렸을까?그의 어두운 눈빛이 쇠 방망이처럼 배지유의 가슴을 두드렸고 그녀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오빠, 보미 언니. 나 다리가 너무 아파요...”그 말에 손보미는 급히 의사를 찾아갔다. 그녀가 병실을 나간 뒤, 배지유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배건후를 쳐다보았다. “오빠, 이제 곧 보미 언니랑 결혼할 거잖아요.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언니가 많이 상처받을 거예요. 내 기분 풀어주려고 언니가 날 강씨 가문에 데리고 간 거예요. 재민 씨가 도아린 씨를 초대할 줄은 우리도 정말 몰랐어요.”“도아린 씨가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버린 남자를 언니가 주워가는 거라고. 그래도 보미 언니는 화 한번 내지 않았어요. 정말 도아린 씨 괴롭히려고 간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내가 지금 이런 꼴인데 누구를 괴롭혀요?”잠시 후, 손보미는 의사를 데리고 들어왔고 의사가 배지유 다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연성에서 오느라고 수고했어. 얼른 가서 쉬어. 지유도 푹 쉬라고 해야지.”손보미가 그의 팔짱을 끼려고 하는데 그가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얌전히 병원에 있어. 합병증이라도 생기면 그땐 정말 다시 일어설 수 없을 테니까.”그가 차갑게 배지유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이불을 움켜쥐고 고개를 떨구고 있던 배지유의 눈빛에 원망이 가득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그녀의 눈은 여전히 부어 있었지만 눈빛은 매우 날카로웠다.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는 그녀의 얼굴에 조롱이 깃들여 있었다. “여동생의 일은 양가 어르신들께서 결정할 문제예요. ‘봉황의 시대’는 덕과 재능을 겸비한 사람을 찾아 관리할 생각입니다.”그 말에 강태식의 안색이 굳어졌다. 나한테는 덕이 없다는 뜻인가?늦게 결혼하고 늦게 아이를 가진 그는 얼마 전에 일흔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아직까지 혈기 왕성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검버섯과 주름살이 가득했다. 늘어진 눈꺼풀이 날카로운 시선을 감추었고 그가 도아린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린 계집애가 복수를 위해 강씨 가문까지 이용하려 들다니...침착하고 생각이 깊은 계집애군. 그러나 이런 사람은 양날의 검이었다.“배건후와 이혼했다는 소문은 들었네. 괜찮은 젊은 친구들을 내가 좀 알고 있는데 소개해 줄까? 우리 재민이는 외국에서 자라서 성격이 방탕하고 좋은 남자가 아닐세.”“아버지. 어떻게 아들을 그리 비하할 수 있어요?”“널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도아린 양한테는 네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그의 태도는 명확했다. 도아린을 강씨 가문의 며느리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도아린도 피식 웃었다. “어르신, 제 결혼은 저희 부모님께서 신경 써주실 거예요. 그리고 여자가 꼭 시집을 잘 가야 잘 살 수 있다고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안 그래요? 강재희 씨.”차를 마시던 강재희는 흠칫했다. 짙은 속눈썹을 드리운 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태식은 단목구슬을 꽉 움켜쥐었다. 아주 빈틈이 없구나. 네가 강씨 가문의 주가를 통제할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해남병원. 병실 문을 들어오던 배지유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오빠? 오후에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어요?”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 손보미를 쳐다보았다. 서둘러 돌아온다고 했는데 결국 한발 늦은 것이다. 그는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창문이 반쯤 열려있었고 창턱의 재떨이
“그건 안돼.”강홍련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안민아 씨, 전에도 하마터면 우리 아들의 명예를 망가뜨릴 뻔했었죠. 그런데 오늘 또 똑같은 수법을 쓰는 거예요? 손보미와 배지유는 소리를 듣고 문을 두드린 거예요. 원하지 않았다면 왜 처음부터 도움을 청하지 않은 건가요?”“숨어 있으면서 도아린이 찾는 데도 잠자코 있었죠. 그런데 뭐예요? 우리 아들한테 책임질 일까지 해놓고 모른 척하는 거예요? 사람들한테 들켰다고 지금 우리 아들한테 다 뒤집어씌우냐 말이에요?”강홍련의 말솜씨에 안민아는 할 말이 없어졌다. 한편, 안준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손에 든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양측이 심하게 다툴 때, 강재희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정국의 빚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거예요?”거실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날뛰던 강홍련은 갑자기 얼굴이 굳어진 채 눈빛이 흔들리면서 안절부절못하였다.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던 안준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당신들 지금 내 딸한테 그 빚을 갚으라고 할 생각인 거야? 이러고도 우리 안씨 가문을 모해하지 않았다니...”강홍련이 뭐라 변명하려 할 때 강재희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아섰다. “도유준이 성을 바꾼다면 도정국의 채무는 그와 무관해요. 그리고 언니가 이리 결혼도 안 한 신분으로 성이 다른 아들을 데리고 있는 건 보기에도 안 좋아요.”현재 강씨 가문은 강태식과 그의 자식들이 절대적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강재희가 딸이긴 해도 맏이로서 이미 회사 일을 많이 인계받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강재희의 뜻이 곧 강태식의 뜻이기도 했다. 강홍련은 내키지 않았지만 도유준은 내심 기뻤다.도정국의 빚을 갚을 필요가 없게 되었고 또한 강씨 가문의 도련님이 되었으니 남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강씨 가문에서 준비한 예단도 받을 수 있고 안민아를 괴롭히고 도아린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난 좋아요.”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로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