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눈짓 한 번에 우정윤은 바로 앞으로 다가가 김지민을 캠핑카에서 끌어냈다. 그런 상황에도 김지민은 발버둥을 쳤고 결국 따귀를 맞았다.“어디서 굴러온 돌이 여기서 행패를 부리고 있어!”“...”김지민은 얼굴을 움켜잡고 서럽게 배석준을 쳐다보았다.배석준은 우정윤이 오지랖을 부린다고 화가 났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기에 김지민에게 손보미를 따라 자리를 피하라고 손짓했다.배건후는 차에 올라탄 후 차 문을 닫고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여 천천히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없었고 주현정도 말을 하지 않았다.배석준은 모두가 자신을 배신하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며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너 도아린을 만났잖아. 합의서는 언제 써주겠다고 해?”배건후는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은 배석준의 머릿속을 뚫고 들어가 모든 생각을 읽은 것 같았다.“아버지가 대회 결과를 조작했기 때문에 이번 내기는 없던 일입니다.”배석준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표정이 일그러졌다.“도아린이 아현의 작품으로 대회에 참가했기에 먼저 규칙을 어긴 거야. 나는 받은 대로 돌려준 것뿐이지.”“도아린이 바로 아현이에요.”주현정은 아들을 흘겨보고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배건후는 엄마의 태도에 얼굴이 창백해졌고 담배를 들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서 핏줄이 선명해졌다.엄마도 도아린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오직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배석준은 아내를 한번 보고 또 배건후를 한번 보더니 더 화가 났다.“너희들 도아린의 신분을 알면서도 일부러 나를 속인 거야? 너희 두 사람, 한 명은 지유의 친오빠고 한 명은 친엄마인데 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다른 사람의 편을 들고 지유는 안에서 고통받게 하고 있어! 내가 빨리 발견해서 강태식한테 신세를 갚으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지유는 진작에 너희들 때문에 망가졌을 거야!”“강태식이 빚진 사람은 건후인데 당신이 뭔데 대신해서 신세를 갚으라 말라 하는 거예요?”아까 주현정은 한참을 캐물었지만, 배석준은 자
계속 도아린과 같은 편에 서 있던 주현정이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자 도아린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에는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지만 애써 입술을 깨물었다.도아린은 주현정이 또 병이 발작해서 쓰러졌다가 깨어난 후에 그날의 기억을 잃은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주현정의 눈빛은 아주 또렷했다.주현정은 도아린의 손을 꼭 잡고 힘없이 말했다.“저들은 너무 지독한 사람들이야. 너는 이길 수가 없어. 나는 네가 괴로운 일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아.”“어머님...”도아린은 주현정의 마음을 알고 서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주현정은 흘러내린 도아린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고 눈물이 속절없이 떨어졌다.몇 분 후, 병실 문이 열렸다.도아린은 들고나온 종이를 들었다.“이건 배지유와의 합의서입니다. 줄 수 있지만, 조건이 있어요.”“나는 동의 안 해.”배건후는 바로 거절했다. 배석준은 도아린의 앞으로 가서 받으려고 했지만, 도아린이 뒤로 물러섰다.“동의하지 않는다면 배지유를 고소하겠습니다. 이미 변호사도 다 찾아봤고 배지유가 지은 죄의 증거들을 다 수집했어요. 최소 징역 10년일 것입니다.”“네가 합의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다 들어줄게!”배석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를 악물고 내뱉는 배건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동의 안 해요.”“너는 지유를 꼭 궁지에 몰아넣어야 하겠어?”배석준은 화를 내고는 도아린을 쳐다보았다.“말해. 조건이 뭐야! 이 집에서는 아직 내가 내린 결정을 따라야 해!”배건후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도아린의 혀를 도려내서라도 그녀가 더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건후의 마음과 달리 도아린은 평온한 모습으로 담담하게 말했다.“이혼하겠습니다.”“...”병실 안팎이 순간 조용해졌다.배석준은 멍하니 있다가 비웃음을 지었다. 도아린이 드디어 숨겨둔 속셈을 들어냈다고 생각했다.“얼마를 원해?”도아린이 배건후한테 시집을 온 것은 돈 때문이었으니 이
하지만 도아린은 배건후가 사인을 해주기만 한다면 다 상관없었다.배석준이 재촉하자 배건후는 사인했고 도아린도 합의서를 건넸다.주현정은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 도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는 도아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가득 느껴졌다. 도아린은 바로 떠나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합의이혼서를 접어서 가방 안에 넣은 도아린은 홀가분해진 기분을 느꼈다.그러나 배건후는 마치 방금 마라톤을 마치고 온 사람처럼 피곤한 기색으로 의자에 앉아 침울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석준의 그 앞에서 서성이며 성대호에게 전화해서 경찰서로 배지유를 데리러 가라고 했다. 합의서를 팩스로 보냈으니 배지유는 드디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다.3시간 후, 주현정이 수술실에서 나왔다. 의사는 수술이 아주 성공적이라고 했다. 종양은 떼어내서 조직검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양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김지민은 두 번 전화를 걸어 배석준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배석준은 모두 거절했다. 그는 주현정의 손을 꼭 잡고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우정윤은 처리할 문건들을 모두 배건후의 앞에 내밀었다. 이제 오후밖에 되지 않았는데 상사의 얼굴에는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올라오는 것 같았고 싸늘한 눈빛이 소름 돋게 했다.“내일 돌아가는 항공권을 예약할까요? 사모님도 돌아가십니까?”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배건후는 사인펜을 부러뜨렸고 눈을 가늘게 떴다....도아린이 자리를 떠난 후, 진씨 가문의 사람들은 레스토랑의 음식들을 진씨 가문의 별장으로 옮겼다. 도아린이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 축하파티를 계속했다.도아린은 자신의 이혼 소식을 덤덤하게 말했고 윤명희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너는 그 사람과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어서 보상을 바라지 않았지만, 우리 진씨 가문에서는 절대로 그 사람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내 동생을 괴롭혔으니 배건후의 동생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진경수가 말했다.소유정은 벌써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를 정도였는데 또 눈물
도아린은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이 업계를 떠나게 된 이유에는 앞에 있는 이 사람의 지분이 많았다.도아린은 가녀린 몸을 꼿꼿하게 세웠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내미는 순간 그녀는 일부러 뒤로 물러섰다.남자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진수혁을 보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미안. 내가 네 동생을 놀라게 했나 봐.”진수혁은 아무 표정이 없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고 평온한 시선으로 도아린을 보고 있었다.“그 바람둥이 같은 얼굴을 보고 놀란 거야.”진경수는 도아린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유정 씨랑 쇼핑가려던 거 아니야?”도아린은 둘째 오빠가 지금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빠르게 소유정을 끌고 나갔다.유진혁도 당연히 따라갔지만, 그는 도아린이 소유정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부러 거리를 두고 걸었다.“아까 저 남자를 알고 있어?”소유정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세 사람은 진씨 가문의 차를 타고 해남의 쇼핑 거리로 갔다.“환자를 보살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여기 보신탕을 좀 드세요.”병원의 복도에서는 김지민이 보온통을 배석준의 앞에 내밀었다.배석준은 환자를 돌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하룻밤을 보살폈는데 벌써 온몸이 시큰거렸다. 그는 보신탕을 단숨에 다 마셨고 속이 따뜻하니 피로가 더 몰려왔다.배석준이 눈을 감고 있자 김지민은 앞으로 가서 머리를 안마해주었다.“대표님이랑 도아린 씨는 정말 이혼한 거예요?”배석준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주현정은 어리석은 일을 많이 했지만 유일하게 옳은 일은 배건후에게 이혼을 하라고 강요한 것이다.도아린은 고집이 너무 세다. 일반 사람과 결혼을 했다면 그 고집을 내세워 집안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겠지만 배 씨 가문에게는 이런 여자가 필요 없었다.그들이 필요한 사람은 집안의 사소한 일들을 잘 해낼 수 있는 순종적인 사람일 뿐이다.“대표님의 몸값이 얼
김지민은 도발적으로 주현정을 쳐다보았다. ‘이것 봐. 분명 당신이 더 심하게 아픈데 회장님은 나를 더 걱정하고 있어.’주현정은 그런 김지민이 가소로웠고 실랑이를 벌일 생각이 없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녀는 배석준이 김지민을 데리고 약을 바르러 간호사한테 간다는 것을 들었다.도아린이 병실로 들어왔을 때는 엉망이 된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주현정이 아직 깨지 않은 줄로 알고 최대한 조용히 걸레를 들고 청소를 했고 주현정은 익숙한 향기를 맡고 눈을 떴다.“아린아.”“어머님, 깨셨어요?”도아린은 얼른 걸레를 곁에 두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바로 의사를 불러올게요.”주현정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아마 양성일 거야. 괜찮아.”도아린은 그녀의 입술이 마른 것을 보고 물을 따랐다. 도아린은 컵 두 개를 번갈아 가면서 물을 식혔고 물이 뜨겁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주현정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빨대를 꺼내 컵에 꽂고는 주현정의 입가에 내밀었다.“천천히 드세요.”주현정은 뿌듯한 미소를 짓고는 물을 두 모금 정도 마시니 마르던 목구멍이 편안해졌다.“네 예진 이모가 대회를 보고 업계에서 네 디자인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고 해. 팔 생각이 있으면 연락해줄 수 있어.”도아린은 강태식이 200억을 내어 사고 싶어 했지만, 자신이 거절한 얘기를 했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당연히 작품을 고가에 팔고 싶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인품에 문제가 있는 사람한테는 절대 팔지 않을 것이다.주현정은 강태식이 진 빚이 있다는 게 생각났지만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지 않았다.“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 회장님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저녁에 야식을 갖고 올게요.”김지민이 복도에서 말하고 있었다. 도아린은 주현정을 보았고 그녀의 눈에 비친 비웃음을 보았다.배석준은 문을 열고 들어왔고 순간 표정을 굳혔다.“건후가 네 조건을 다 들어줬잖아. 여기는 왜 또 왔어?”“아린이는 당신이 아니라 나를 보러 온
“회장님?”김지민은 병실 앞에서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고 답이 없자 살며시 문을 열었다.주현정은 잠이 들었고 병실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김지민은 의아하게 문을 닫고는 핸드폰을 꺼내 배석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석준이 전화를 받지 않자 손보미에게 걸었다.“회장님께서 대표님이랑 있어?”“회장님은 병원에서 사모님을 돌보고 있잖아?”“아, 알겠어.”“왜 그래, 설마 멀쩡한 사람 하나 간수 못 하는 거야?”김지민은 손보미가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것을 듣기 싫어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낮은 소리로 비웃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여자랑 한편이 되다니, 어디 팔려가도 좋다고 굽신거릴 모양이네.”퍼뜩 고개를 돌린 김지민은 도아린을 째려보았다.자신과 손보미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다니, 어림없다.김지민은 계속 앞으로 갔고 도아린은 계속해서 말했다.“손보미가 주목받기 시작한 그 뮤비, 감독님이 원했던 배우는 당신이었어. 네가 얼굴을 비추는 걸 원치 않는다고 손보미가 감독님한테 얘기한 거야. 그러고 나서 손보미가 감독님의 비위를 맞춰주니까 따내게 된 거야.”“...”김지민은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녀가 금방 손보미의 업무를 맡았을 때 뮤직비디오 캐스팅을 접하게 되었는데 감독님은 이력서를 보지도 않고 동의했었다.그때 김지민은 손보미의 뒤에 있는 스폰서가 손을 쓴 거로 생각했는데 지금 도아린이 언급하는 내용을 듣자니 촬영이 끝나고 나서 감독님이 아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던 게 생각났다.보온통의 손잡이를 잡은 김지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도아린은 벽에 기대서 계속 말했다.“5년 동안 사귀고 갑자기 헤어졌던 너의 그 남자친구는 너를 항상 많이 사랑했어.”“허튼 소리하지 마!”김지민은 뒤돌아 소리쳤고 눈가에는 상처가 스쳤다. 그녀는 바로 웃음을 지으며 마치도 우스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말했다.“도아린, 나랑 보미 사이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지어낸 이야기는 너무 터무니
“너한테 초대장을 보내지는 않았어. 요즘 네가 해남에서 바쁘게 보내고 있으니 너를 신경 쓰이게 하지 말라고 네 친구가 얘기하더라.”김지민은 이에 대해 해명하려고 했지만, 전화에서 여자가 남자한테 분유를 타 달라고 부탁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는 대충 한마디 건네고는 전화를 끊었다.김지민은 상대방에게 도아린이 말한 것처럼 그랬었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1개월 축하파티만 놓고 봐도 손보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도아린은 병실로 돌아왔다. 주현정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물을 마시려 하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얼른 컵에 뜨거운 물을 받고는 적절한 물 온도 맞춰서 주현정에게 건넸다.“천천히 드세요.”“네가 수고가 많아.”“아니에요.”도아린이 밖에서 한 얘기들을 주현정은 다 듣고 있었다. 그녀는 도아린이 그것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무척 궁금했다.이 사실들은 도아린이 배석준에게 질척거리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서대은에게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서대은은 대외적으로 드레스 디자이너지만 공개되지 않게 거대한 관계망을 운영하고 있었다. 만약 서대은이 도아린을 도와 종적을 감추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쉽게 지난 3년을 숨어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것들을 도아린은 주현정에게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저 그녀에게 몸조리를 잘하라고 당부했다.주현정은 오후에 죽을 한 그릇 정도밖에 먹지 않았기에 허기가 느껴졌다. 도아린은 아래층에 편의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 내려가서 오트밀을 사서 왔다. 돌아왔을 때는 병실에 두 사람이 와있었다.배건후와 금방 풀려난 배지유였다.배지유는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새로 했고 진한 메이크업으로 눈 밑에 생긴 시퍼런 자국을 감췄다.보름 정도 안에 있다가 나온 그녀는 피골이 상접했다.“도아린! 여기가 어디라고 와. 꼭 그렇게 엄마의 화를 돋워야 속이 시원해?”배지유는 달려가서 도아린을 잡으려고 했지만, 배건후한테 손목이 잡혔다.“나랑 약속한 거 잊었어?”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면
“건후 씨, 좀 남자답게 굴면 안 돼요?”“내가 남자인지 아닌지는 네가 잘 알고 있잖아!”배건후의 단단한 몸은 산처럼 도아린의 앞을 막고 있었다.그는 도아린을 비추는 모든 빛을 막았고 그림자는 도아린의 비웃는 표정도 삼켜버렸다.배건후의 몸에서는 연초와 박하 향이 섞인 냄새가 났다. 도아린은 예전에 이 냄새가 좋다고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역겹기 그지없었다.도아린은 갑자기 실소를 터뜨렸다.배건후는 손보미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출국한 후에 바로 자신과 결혼했고 손보미가 돌아오니 또 좋다고 그녀를 따라다녔다.자신과 결혼하고 나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으면서 지금 이혼하려는 마당에 자신의 안전에 책임을 진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남자들은 왜 이렇게 멍청한 것일까. 손에 넣었을 때는 찌꺼기 대하듯 하더니 잃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히 대하고 있다.물론 배건후라면 그녀를 보물처럼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단지 이혼을 당하면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할 뿐이다.“건후 씨, 지금 인터넷에서는 손보미가 분명 자신이 불륜녀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륜을 저지른다고 욕먹고 있어요. 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보미 씨의 이미지를 위해서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내가 왜 그 사람을 도와줘야 해?”이게 지금 사람이 할 말인가, 손보미가 인터넷에서 애정행각을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더니 문제가 생긴 다음에는 모르는 체하고 있다.“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도아린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을 터뜨렸다.배건후는 굳은 얼굴로 부정했다.“그런 적 없어.”“당신 정말 답이 없는 쓰레기네요.”도아린은 이렇게 말하고 뒤돌아 떠나려고 했지만, 배건후는 그녀를 당겨서 품에 안았다. 도아린은 순간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배건후, 당신 뭐 하는 거야!”“나는 네 남편이야!”“우리는 이혼했어!”“아직 이혼 절차 안 끝났어!”두 사람이 싸우려는 기미가 보이자 우정윤이 다급하게 말했다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