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아윤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진주는 전날 밤 두 사람이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윤에게 캐묻지 않았다. 대신 이진주는 아침 식사로 보양식을 내왔다. 아윤은 이진주가 묻지 않아서 안도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께름칙했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이 숨김없이 낱낱이 드러나고, 감추고 싶은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듯한 느낌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윤은 마치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보양식을 다 마신 뒤, 그녀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저 학교 가볼게요.” 최근에 휴학계를 냈던 그녀는 오늘 다시 학교에 나가기로 했었다. “그래, 잘 다녀와.” 이진주는 아윤에게 특별히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윤도 더 이상 말없이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학교로 향하면서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는 ‘도운’이라는 이름이 저장된 번호가 떠 있었다. 그 번호는 어젯밤, 도운이 아윤의 핸드폰에 저장한 번호였고, ‘연락하기 편하도록’이라는 말과 함께 그녀에게 말했다. 아윤은 손끝으로 핸드폰 화면을 누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학교에서는 오늘 ‘생활 스포츠’라는 교양 수업이 있었다. 아윤은 운동장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강사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트랙을 돌았다. 평소 체력이 꽤 괜찮았던 아윤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조금 뛰었을 뿐인데 숨이 가빠지고, 온몸에 힘이 빠져 도저히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겨우 뛰기를 마치자 강사가 호루라기를 불며 자유 시간을 선언했다. 친구 하민지는 아윤을 따라잡아 옆에 다가와 물었다. “너 정말 태오랑 헤어진 거야?” 아윤은 태오의 이름조차 듣고 싶지 않았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하지만 민지는 아윤의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아윤아.” 아윤은 어쩔 수 없이 멈춰 서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근데 이유가 있어야지. 태오 집안이 별로라서 그런 거야?” 아윤은 고개를 저었
민지의 아버지 하창만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한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 딸이 친구 하나 데리고 온다고 해서, 오는 길에 조금 늦었습니다. 괜찮으시죠?” 도운은 하창만의 말에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대범하게 말했다. “젊은 사람이 몇 없어서 오늘 대화가 너무 진지하고 재미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잘됐네요. 분위기가 조금 더 활발해지겠어요.” 그리고 그는 갑자기 아윤이 있는 쪽을 보며 말했다. “아윤아, 이리 와.” 아윤은 원탁의 반대편에서 걸음을 멈추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운 오빠.” 하창만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도운은 묵묵히 아윤이 다가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빛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자리에서, 도운의 표정은 여유롭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하창만이 의아한 눈길로 도운을 바라보자, 도운은 테이블에 함께 앉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소개를 건넸다.“최아윤 씨입니다. 최시아 씨 여동생이에요.” “최시아 씨?”“한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 아닌가?” 순간 모든 사람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창만은 이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윤이가 최시아의 여동생이라고? 그럼 아윤이도 한도운과 연관 있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지금 아윤이는 태오의 여자 친구고...’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한 대표님, 제가 아윤이 자리도 마련할까요?” 도운은 손에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고 짧게 대답했다. “네.” 하창만은 즉시 직원에게 자리를 준비하라고 지시하며 아윤의 자리를 태오 옆으로 배치했다. 도운의 비서는 옆에서 보스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도운은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집어 들고 손을 닦으려다 문득 하창만의 배치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하창만은 도운의 작은 행동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이렇게 괜찮으십니까?” 도운은 하창만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습니다.” 그는 냅킨을
아윤은 답답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태오를 도와준 거예요?” 그녀가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나때문에 태오를 도와준 거예요? 동정이에요? 배려인 척 고개를 숙여준 거냐고요?” “태오가 오빠 앞에서 허리를 숙였을 때, 오빠가 마치 구세주라도 된 듯, 태오에게 은혜라도 베푸는 느낌이 들었어요?” “전 그런 도움 필요 없어요. 그건 태오에게 모욕을 준 거라고요.” 도운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순진한 어린 양 같았던 아윤이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고양이로 변한 모습을 보고 살짝 놀랐다. 아윤의 돌발적인 변화를 예상하지 못했던 도운은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도운은 아윤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불쾌감이 들어 운전기사에게 차를 길가에 세우라고 지시했다. 차가 멈추고 둘만 남자, 그는 차 안의 모든 칸막이를 내렸다. 공간이 밀폐되자 내부는 즉각적으로 사적인 대화 공간이 되었다. 아윤은 좁은 공간에서 도운의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붉어진 얼굴을 금세 그에게 들켰다. 도운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려 했지만, 아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나 도운은 곧 아윤의 턱을 붙잡아 고개를 자신 쪽으로 돌렸다. 아윤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손안에 고요히 있었다. 눈가가 붉게 물들었고, 그전의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다시 연약한 한 마리 새 같았다. 조금 전까지 분노로 폭발했던 그녀는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운이 빠져 있었다. “태오를 생각하니 속상한 거야?” 도운은 물었다. 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오 때문에 억울한 거야?” 그녀는 여전히 침묵했다. “지금 우리 관계 때문에 일어난 문제들로 내가 태오에게 보상하고 싶었다면?” 도운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아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윤은 그의 손길을 피하려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윤의 손이 도운의 손에 잡히자, 아윤은
아윤은 지금 이 상황에서 도운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여전히 그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아윤은 도운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도운은 그녀가 쥐고 있던 손을 가벼이 감싸며 옷깃에서 떼어냈고, 곧 아윤의 손등을 부드럽게 덮었다. 도운은 아윤의 입술에서 살짝 떨어져 조용히 숨을 고른 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아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도운이 조심스럽게 옷깃에서 그녀의 손을 떼어내자, 아윤의 긴장된 몸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운은 다시금 그녀의 입술로 천천히 다가갔다. 입맞춤이 점점 깊어지자, 아윤은 당황한 기색으로 허공 속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붙잡으려 애썼다.하지만 도운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이번에는 열 손가락을 깍지 끼듯 단단히 맞잡았다. 아윤은 가슴이 뛰고 몸이 떨렸지만,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도운의 체온은 왠지 모르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그저 도운의 리듬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차 안에서 약 10분가량 서로의 숨결을 나누었다. 잠시 후, 운전기사와 비서가 조용히 차에 올라타자 두 사람은 자연스레 자리에 몸을 되돌렸다. 겉보기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해 보였지만, 아윤의 얼굴은 선명한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기사와 비서는 눈치 빠르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차 안의 고요를 깨며 기사가 물었다. “대표님, 아윤 아가씨는 지금 어디로 모실까요?” 아윤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도운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학교로 돌아갈 거야?”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약간의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윤은 작게 대답했다. “네...” 도운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 말했다. “농장이 하나 있지? 한번 가보는 게 어떨까. 겸사겸사 업무도 볼 겸.” 기사는 예상하지 못한 목적지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농장은 한씨 가문에서 이
비록 그 팀장 자리는 단순히 농장 프로젝트 하나를 관리하는 일에 불과했지만, 이 결정은 지금껏 전례가 없었던 파격적인 인사였다.비서는 당황한 듯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건 조금 부적절하지 않을까요...?”아윤 역시 도운이 이런 지시를 내릴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숨이 턱 막힌 듯 가슴이 조여왔다.그러나 도운은 흔들림 없는 태도로 비서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태오에게 연락해봐.”그의 말투는 무심하고 가벼웠다. 비서는 이미 그 ‘우태오’라는 학생에 대해 조사를 해둔 상태였다. 솔직히 말해, 딱히 내놓을 만한 배경도 없는 사람이었다. 시골 출신에 학창 시절 성적이 우수했다고는 하지만, 그런 이가 곧장 HP 그룹의 팀장 자리에 앉는 것은 누가 봐도 낙하산 소리를 들을 만했다. “대표님...” 비서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도운의 시선이 아윤을 스쳐 지나갔다. 도운의 눈빛을 본 비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윤은 도운이 태오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도운이 아윤을 한 번 바라보면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아윤이 속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아윤의 마음에 강렬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태오...” 도운이 그녀를 바라봤다. 아윤은 입술을 단단히 다문 채, 끝내 하고 싶었던 말을 삼켜버렸다.사실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태오에게 그런 자리는 필요 없다고, 그런 도움 없이도 태오는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태오에게는 그 자리가, 그 기회가 절실했다. 그리고 아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태오에게는 도운 오빠의 도움이 필요해... 만약 이번 기회로 태오가 더 나은 기회가 열린다면...’도운은 아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다 입었어요.” 아윤의 말이 떨어지자, 차 안의 조명이 마침내 켜졌다. 그녀는 여전히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앉아 있었고, 얼굴은 약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도운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꺾어 끄더니 아윤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집으로 데려다줄게.” 최씨 저택까지는 아직 30분 정도의 거리였다. 아윤의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도운과 좁은 공간에서 단 한순간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갑자기 문을 열어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도운은 그녀가 지금 내리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급히 손을 뻗어 아윤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 “무슨 짓이야?” 아윤은 담담히 말했다. “혼자 갈게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를 타고 가도 30분이나 더 가야해.” 아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택시 부를게요.” 도운은 찌푸린 표정을 지었지만, 다음 순간 아윤은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윤아!!” 도운이 차 안에서 그녀를 불렀지만, 아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던 택시를 세웠다.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그녀는 서둘러 떠나버렸다. 도운은 뒤따라 내리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아윤은 최씨 저택의 대문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적막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여 이진주를 마주칠까 두려워, 아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힘껏 닫은 후, 문에 몸을 기대어 서 있었다. 아윤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머릿속에는 어젯밤 도운과 서로를 끌어안았던 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처음에 아윤은 자기 마음이 도운에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그녀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 이진주는 아윤이 언제 집에 돌아왔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
아윤은 대낮에, 그것도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도운이 이렇게 사적인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윤도 도운이 자신을 걱정해서 이러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도운의 행동은 너무나도 뜬금없고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아윤은 걸음을 옮겨야 할지, 약을 받아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오랜 침묵 끝에 아윤의 얼굴은 불타오르듯 붉게 달아올랐다. 그 붉은 기운은 얼굴에서 시작해 귓불 뒤까지 퍼져갔다. 도운은 그녀의 머뭇거림을 눈치채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평범한 약이야.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그의 말에 아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재빨리 손을 뻗어 약을 그의 손에서 받아들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술을 뗐다.“저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도운은 손을 거두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다녀와.” 아윤은 손에 들린 약을 마치 뜨거운 감자라도 된 듯 쥔 채 서 있었다. 버릴 수도, 그렇다고 그냥 들고 있자니 어색하기만 했다.도운이 병실로 돌아갔을 때, 시아는 부모님과 함께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아는 어릴 적부터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병에 걸려 화장은 하지 않았지만, 환자복을 입었으면서도 여전히 단정하게 꾸민 상태였다. 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해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시아와 비교하면, 아윤은 늘 조용하고 존재감이 미미했다. 도운은 시아의 이복동생인 아윤의 존재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윤이 시아와는 달리 최씨 집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생아라는 것까지... 도운이 시아와 약혼했던 날, 그는 최씨 저택을 방문했다. 그때 아윤은 아직 어렸고, 멀찌감치 서서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그저 먼 발치에서 조용히 있었다. 그 이후 그도 몇 번 더 아윤을 마주쳤지만, 아윤은 항상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시아가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윤은 집안에서 투명 인간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도운의 기억 속 아윤은 언제나 가냘프고 창백한 모습이었다.그녀
아윤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 도운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놀라 충격을 받은 채, 쟁반을 들고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도운은 아무런 내색 없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최씨 집안의 딸이 이런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윤은 쟁반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숙인 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도운 가까이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도운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시선을 아윤에게서 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차갑고 어두웠다. 아윤은 쟁반을 꽉 잡은 채 억지로 침착한 척하며 룸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다른 남자가 말을 꺼냈다. “이름이 뭐야?” 그가 질문한 대상은 아윤이었다. 아윤은 이 술집의 엄격한 규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손님의 질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안나입니다.” 질문한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나, 이름 참 예쁘네. 여기 와서 술 좀 따라줘.” 아윤은 이 말을 듣고 조용히 도운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쟁반을 들고 그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일이기에, 아무리 등이 따가울 정도로 시선이 느껴져도 애써 무시하며 허리를 숙여 와인 디캔터를 들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하지만 유니폼이 너무 몸에 딱 붙어 있어서 그녀가 몸을 조금만 숙여도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특히 가늘고 잘록한 허리는 남자들의 시선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갑자기 누군가의 뜨거운 손이 아윤의 허리에 닿았다. 아윤은 깜짝 놀라 낮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곧게 세워 손길을 피하면서 놀란 눈으로 옆에 있던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낮은 비명이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도운 역시 앉은 자리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윤은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평소였다면 그녀도 적당히 웃으며 넘길 방법을
이진주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절박하게 말했다. “도운아, 너는 우리 시아를 그렇게 사랑하면서 정말로 시아가 죽는 걸 두 눈으로 지켜보기만 할 거야?” 시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을 보지 못하게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 도운은 시아의 이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속에 쌓인 분노와 울분을 억누르며 한참을 침묵한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술 과정도 길고 시아의 일이긴 하지만, 아윤이의 안전 또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반드시 아윤이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할 겁니다.” 시아는 사실 시험관 시술을 더 희망했다. 그러나 도운이 이 제안을 거절하자, 시아는 도운이 자신을 책망하는 것처럼 느꼈다. 시아의 눈빛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도운은 시아의 감정적인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아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윤아, 네가 선택할 수 있어. 물론 거절할 권리도 있어.” 이진주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아윤을 올려다보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최현식은 더 나이 든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뒤에서 조용히 아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윤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정말로 아윤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선택권은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엄청난 긴장으로 아윤의 몸은 떨려오고 두 주먹은 꼭 쥔 상태였다. 도운은 침착하게 기다리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5분가량 시간이 흘렀다. 아윤은 몸을 움직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말 제가 선택해야 하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단지 아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진주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하며 딸을 살릴 모든 희망을 아윤에게 걸었다. 아윤의 목소리는 떨렸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느꼈다. 시아의 간절한 눈빛과 최현식의 애타는 표정이 아윤을 짓누르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병실 안은 죽음 같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의사와 도운, 그리고 이진주와 최현식이 엄숙한 표정을 짓고 시아의 침상을 둘러서 있었다. 침대에 누운 시아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의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 위기는 겨우 넘겼지만, 이는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환자분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른 시일 내에 골수 이식을 하거나 제대혈을 채취해야 합니다.” 도운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가보세요.” 의사는 더 머물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문밖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아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슨 일이에요?” 아윤의 목소리가 병실에 울리자, 도운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아윤은 잠깐 도운의 눈을 마주쳤지만 병실 안 누구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무의식적으로 발을 옮겼다. 하지만 시아의 침대 옆에 다가선 순간, 이진주가 갑자기 아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진주는 절규하듯 울부짖으며 말했다. “아윤아!! 네가 언니를 구해줘야 해!” 이진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도운은 그런 이진주의 행동을 냉정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진주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아윤의 옷을 붙잡고 간청했다. “너희 언니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시험관 시술이 고통스럽다는 걸 알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야.” 침대 위의 시아가 소리쳤다. “엄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아윤이는 내 대체품이 아니에요. 이렇게 대하면 안 돼요!” 하지만 이진주는 눈물을 흘리며 아윤의 옷자락을 더 세게 붙잡았다. “의사 말로는, 아기가 생기기만 하면 그 탯줄의 제대혈로도 가능하대. 아윤아, 제발 부탁이야!” 이진주의 손에 흔들리는 아윤의 몸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천 조각 같았다. 아윤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아는 계속 외쳤다. “엄마!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아윤은 병원에서 조용히 요양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아는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몸 상태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시아의 병실은 부모님의 사랑과 도운의 세심한 보살핌 덕분에 따뜻하고 화목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어느 날 시아는 문득 떠올린 듯 물었다. “엄마, 아빠, 아윤이는요?” 이진주와 최현식은 딸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아윤을 떠올렸다. 이진주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윤이는 괜찮아. 너만 그냥 조용히 요양하면 돼.” 하지만 시아는 부모님이 계속 자신 곁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빠, 엄마, 아윤이 좀 더 챙겨주세요. 만약 이번에 아윤이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요.” 도운은 시아의 말을 들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간병인에게 병실 공기청정기를 켜라고 지시했다. 최현식은 환한 얼굴로 시아에게 말했다. “알겠다. 이따가 네 엄마랑 같이 갈게.” 이진주도 시아를 달래며 말했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윤이는 괜찮아.” 시아는 부모님을 보며 다그쳤다. “그러면 지금 가세요.” 이진주와 최현식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그녀의 성화에 병실을 떠났다. 부모님이 떠난 뒤 시아는 도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우리 부모님더러 아윤이에게 가보라고 말하지 않았어? 부모님이 계속 나한테만 신경 쓰니까 아윤이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겠어.” 도운은 간병인에게 마지막으로 지시를 한 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병상 앞에 앉았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아윤이는 네 동생이잖아.” 시아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부족한 것이 없었다. 지금처럼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 했다. 도운은 부드럽게 그녀의 눈높이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너부터 네 건강을 잘 챙겨야지. 다른 사람은 그다음이야.” 시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자기까지 왜 이래.” 그녀는
도운은 이마를 찌푸린 채 손으로 시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알았지?” 시아는 그의 말을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운은 손을 그녀의 머리 위에 얹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때 도운이 최현식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아윤이는 저 뒤에 있어요.” 최현식은 그제야 뒤쪽에 누워 있는 아윤을 바라보며 반응했다. 최현식도 곧 아윤에게 다가가 딸의 상태를 살폈지만, 시아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는 도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시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물었다. “도운아, 이번에 아윤이가 나에게 수혈해 준 거야?” 도운은 아윤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응. 네 혈액형이 특이해서 다른 피를 구할 수 없었어.” 시아는 피곤한 듯 눈을 감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윤이 고생했네.” 도운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일단 조금 자둬.”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시아는 병실로 옮겨졌고, 아윤은 여전히 이동식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다. 최현식과 이진주는 아윤에게 짧게 관심을 보였지만, 곧 두 사람의 모든 관심은 시아에게로 쏠렸다. 아윤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실망과 슬픔이 가득했다. 도운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아윤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시선을 떼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 드리운 창백함도 눈에 들어왔다. 최현식과 이진주의 마음은 이미 아윤에게서 떠나 시아에게로 가 있었다. 시아가 방금 수술실에서 나온 만큼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도운을 바라보았다. 도운은 그들 쪽으로 걸어가 조용히 말했다. “시아는 병실로 옮겨졌습니다. 위험은 넘겼으니 당분간은 큰 문제 없을 겁니다.” 이진주가 안도하며 말했다. “그러면 우리 먼저 시아를 보러 가요.” 도운은 아무 말도
아윤은 도운의 말을 듣고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다시 도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도운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여전히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 끝에 그는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봐.” 이번에는 아윤도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또다시 간호사에게 이끌려 앞으로 갔다. 이진주는 수술실 문 앞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최현식은 아내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의 얼굴에도 초조함이 가득했다. 도운 역시 시아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한 사람, 즉 아윤의 몸을 희생해서 시아를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때문에 도운은 아윤에게 거듭 잘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아의 부모들, 특히 아윤의 아버지이기도 한 최현식은 그 문제를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도운은 그 점이 이상하게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 아윤은 간호사에게 이끌려 검사실로 들어갔다. 간호사가 물었다. “평소 빈혈 있으신가요?” 아윤은 자신도 몰랐다. 그녀는 몸 상태를 신경 써 본 적이 없어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없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일단 검사부터 진행할게요.” 피를 뽑아 검사하는 동안, 아윤은 주삿바늘이 자기 정맥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고통에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간호사가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를 마친 뒤, 아윤은 수술실로 이동했다. 수술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윤은 침대에 누워 있는 시아를 보았다. 시아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입술에도 혈색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아윤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아윤은 별다른 말 없이 지정된 침대에 드러누워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언니가 무사하길...’ 아윤은 얼마나 많은 양의 피를 시아에게 수혈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점점 머리
“위험하지 않을까요?” “일단 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도운의 표정은 한층 더 차갑고 어두워졌다. 그때, 최현식과 이진주가 허겁지겁 병원에 도착했다. 이진주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이미 의사와 도운의 대화를 들은 듯 그녀는 곧장 의사에게 달려가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선생님, 시아 동생도 곧 도착할 겁니다. 동생이 오면 바로 수혈을 시작해주세요.” 최현식도 말했다. “그래요. 시아 동생이 오는 중이에요.” 도운은 짧게 물었다. “아윤이와 상의는 해보셨습니까?” 이진주는 즉시 답했다. “그럴 필요 없지. 아윤이도 분명 불쌍한 제 언니에게 수혈해줄 거야.” 최현식도 거들었다. “지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시아를 구하는 게 우선이야. 위험을 감수하는 게 목숨을 잃는 것보다 낫지.”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다만 이번 수혈은 상당한 양의 혈액이 필요할 겁니다.” 이진주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괜찮아요. 일단 수혈부터 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합시다.” 도운은 최현식 부부의 태도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마침내 아윤이 병원에 도착했다. 멀리서 이진주와 최현식, 그리고 도운이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급히 달려가면서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는 괜찮은 거죠?” 이진주는 아윤을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울먹이며 말했다. “아윤아, 네 언니가 지금 수혈이 필요해. 혈액이 부족해서 네 도움이 절실해!” 아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의사가 아윤에게 물었다. “수혈에 동의하시겠습니까? 필요한 혈액량이 많아 몸에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아윤은 잠시 멈칫하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 도운이 나지막이 말했다. “잘 생각해봐.” 아윤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단호히 대답했다. “제가 할게요.” 도운은 그녀가 이렇게 빠르게 대답할 줄 몰랐다. 그의 얼굴에는 아윤에 대한 약간의 염려가 드러났다.
아윤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도운 오빠가 나에게 보이는 이 모든 관심은 결국 시아 언니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거겠지. 그래서 나를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거고...’ ‘아마 이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의 주변까지 사랑하게 된다는 걸까...’“알겠어요... 형... 오빠, 감사해요. 이제 이해했어요...” 아윤은 ‘형부’라는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단 두 글자였지만, 끝내 입술을 떼지 못했다. 도운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윤이가 선택한 호칭을 묵인한 셈이었고, 방금 그녀가 보였던 행동에 대해서도 그저 철없는 아이로 생각했다. 결국 아윤은 태오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대신 태오의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설령 태오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더 신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부모님이 쏟아온 수년간의 정성과 노력까지 저버릴 수는 없을 텐데...’그리고 다음 날, 태오의 부모님이 경찰서를 찾아간 뒤 태오는 마침내 풀려났다. 아윤은 그날 경찰서에 가지 않고 학교에 머물렀다. 태오와 관련된 상황에 대해서도 전혀 묻지 않았으며, 태오 역시 그녀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 후 며칠 동안 아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학교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시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시아는 아윤에게 태오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고, 아윤은 이미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리고 전화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언니와 도운 오빠에게 정말 감사해요.” [고맙긴, 그런 말 하지 마.]시아는 전화를 끊었지만, 어딘지 모를 막막한 기운이 가슴 속에 잔잔히 깔렸다.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마음 한켠을 짓누르는 듯했다. 한편, 간병인은 VIP 병실 내 간이주방에서 대추차를 준비하던 중, 병실 안에서 들려온 낯선 소리에 놀라 급히 뛰쳐나왔다. 그리고 간
도운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아윤이 자기 입술에 닿도록 두었다. 아윤이 갈팡질팡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도운이 낮게 물었다. “지금 나를 유혹하는 거야?” 아윤은 공기 중 산소가 희박해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좁아지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윤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저는 그저... 감사...” 도운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그 친구를 돕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야?” 아윤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불안감과 긴장감으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도운이 다시 물었다. “만약 지금 그 친구가 너의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 것 같아?” 그 순간, 그의 말은 아윤의 마음속 마지막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녀는 겨우 유지하던 표정을 놓쳐버렸다. 도운은 아윤을 내려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을 유혹하려고 하다니.” 아윤은 크게 눈을 뜨며 한발 물러섰다. 숨 가쁘게 가슴이 오르내리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제가 오빠와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이를 빨리 가지면 더 좋지 않을까 해서요.” 도운은 얼굴에 미묘한 냉기를 띠며 낮게 말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자존심과 이성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해. 네 아버지는 너에게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의 말은 아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바닥에 내던지게 했다. 그녀는 여태껏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 최현식은 늘 멀찍이서 아윤을 바라보는 존재일 뿐, 남자들 앞에서 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늘이 아윤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운은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도운은 아윤이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말이 없을 때, 아윤이 조심스럽게 먼저 말했다. “제가 직접 갈게요.” 도운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대답했다. [주소를 보낼게.] 아윤은 팽팽하게 당겨졌던 마음의 끈이 조금씩 느슨해져 가는 것을 느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건넸다.“네, 알겠습니다.” 도운이 전화를 먼저 끊었고, 1분 후 아윤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 메시지에는 주소가 하나 적혀 있었다. [청운힐스, 별빛 궁전.]아윤은 핸드폰을 꽉 쥔 채로 화면을 응시하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는 택시에 몸을 싣고 ‘청운힐스’라는 이름의 고급 전원주택단지를 향했다.택시가 청운힐스 입구에 다다르자, 아윤은 이 단지가 단순히 크다는 수준을 넘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택시가 안으로 들어가려면 엄격한 검사를 받아야 했고, 안으로 들어가자 단지 한가운데로 호수가 보이고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윤은 왜 많은 사람이 언니 시아가 좋은 결혼을 했다고 말했는지 깨달았다. 한씨 가문은 결코 평범한 집안이 아니었다. 최씨 집안도 나쁘지 않았지만, 한씨 가문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택시는 천천히 ‘별빛 궁전’이라 불리는 웅장한 단독주택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아윤은 차에서 내려 금색 실로 조각된 나무 대문으로 걸어갔고, ‘별빛 궁전’의 화려한 거실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도운은 비서와 함께 바 테이블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윤은 입구에 서서 들어가야 할지 망설였다. 이곳은 그녀가 처음 와보는 낯선 곳이었다. 도운은 문쪽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비서와의 대화를 멈췄다. 그는 입구 쪽을 바라보고 아윤을 발견하자, 자신이 그녀를 이곳으로 부른 사실을 떠올렸다. 아윤은 도운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르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서로 꼭 맞잡았다. 그녀의 태도는 어딘가 긴장된 모습이었다. 도운은 비서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