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입었어요.” 아윤의 말이 떨어지자, 차 안의 조명이 마침내 켜졌다. 그녀는 여전히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앉아 있었고, 얼굴은 약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도운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꺾어 끄더니 아윤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집으로 데려다줄게.” 최씨 저택까지는 아직 30분 정도의 거리였다. 아윤의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도운과 좁은 공간에서 단 한순간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갑자기 문을 열어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도운은 그녀가 지금 내리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급히 손을 뻗어 아윤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 “무슨 짓이야?” 아윤은 담담히 말했다. “혼자 갈게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를 타고 가도 30분이나 더 가야해.” 아윤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택시 부를게요.” 도운은 찌푸린 표정을 지었지만, 다음 순간 아윤은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윤아!!” 도운이 차 안에서 그녀를 불렀지만, 아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던 택시를 세웠다.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그녀는 서둘러 떠나버렸다. 도운은 뒤따라 내리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아윤은 최씨 저택의 대문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적막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여 이진주를 마주칠까 두려워, 아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힘껏 닫은 후, 문에 몸을 기대어 서 있었다. 아윤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머릿속에는 어젯밤 도운과 서로를 끌어안았던 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처음에 아윤은 자기 마음이 도운에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그녀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 이진주는 아윤이 언제 집에 돌아왔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
아윤은 대낮에, 그것도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도운이 이렇게 사적인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윤도 도운이 자신을 걱정해서 이러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도운의 행동은 너무나도 뜬금없고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아윤은 걸음을 옮겨야 할지, 약을 받아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오랜 침묵 끝에 아윤의 얼굴은 불타오르듯 붉게 달아올랐다. 그 붉은 기운은 얼굴에서 시작해 귓불 뒤까지 퍼져갔다. 도운은 그녀의 머뭇거림을 눈치채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평범한 약이야.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그의 말에 아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재빨리 손을 뻗어 약을 그의 손에서 받아들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술을 뗐다.“저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도운은 손을 거두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다녀와.” 아윤은 손에 들린 약을 마치 뜨거운 감자라도 된 듯 쥔 채 서 있었다. 버릴 수도, 그렇다고 그냥 들고 있자니 어색하기만 했다.도운이 병실로 돌아갔을 때, 시아는 부모님과 함께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아는 어릴 적부터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병에 걸려 화장은 하지 않았지만, 환자복을 입었으면서도 여전히 단정하게 꾸민 상태였다. 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해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시아와 비교하면, 아윤은 늘 조용하고 존재감이 미미했다. 도운은 시아의 이복동생인 아윤의 존재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윤이 시아와는 달리 최씨 집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생아라는 것까지... 도운이 시아와 약혼했던 날, 그는 최씨 저택을 방문했다. 그때 아윤은 아직 어렸고, 멀찌감치 서서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그저 먼 발치에서 조용히 있었다. 그 이후 그도 몇 번 더 아윤을 마주쳤지만, 아윤은 항상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시아가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윤은 집안에서 투명 인간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도운의 기억 속 아윤은 언제나 가냘프고 창백한 모습이었다.그녀
아윤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 도운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놀라 충격을 받은 채, 쟁반을 들고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도운은 아무런 내색 없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최씨 집안의 딸이 이런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윤은 쟁반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숙인 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도운 가까이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도운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시선을 아윤에게서 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차갑고 어두웠다. 아윤은 쟁반을 꽉 잡은 채 억지로 침착한 척하며 룸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다른 남자가 말을 꺼냈다. “이름이 뭐야?” 그가 질문한 대상은 아윤이었다. 아윤은 이 술집의 엄격한 규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손님의 질문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안나입니다.” 질문한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나, 이름 참 예쁘네. 여기 와서 술 좀 따라줘.” 아윤은 이 말을 듣고 조용히 도운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쟁반을 들고 그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일이기에, 아무리 등이 따가울 정도로 시선이 느껴져도 애써 무시하며 허리를 숙여 와인 디캔터를 들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하지만 유니폼이 너무 몸에 딱 붙어 있어서 그녀가 몸을 조금만 숙여도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특히 가늘고 잘록한 허리는 남자들의 시선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갑자기 누군가의 뜨거운 손이 아윤의 허리에 닿았다. 아윤은 깜짝 놀라 낮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곧게 세워 손길을 피하면서 놀란 눈으로 옆에 있던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낮은 비명이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도운 역시 앉은 자리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윤은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평소였다면 그녀도 적당히 웃으며 넘길 방법을
아윤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왜 돈이 필요한지 도운에게 말할 수 없었다. 도운은 남의 비밀을 캐묻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윤을 내려다보았다. 한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선 채로 서 있었다. 조명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도운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퇴근하고 나면 주차장에서 기다려.” 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운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뒤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그림자도 아윤에게서 서서히 멀어졌다. 아윤은 그제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아윤은 6시에 퇴근했고, 도운은 6시 30분에 룸에서 나왔다. 도운은 주위 사람들을 다 물리치고 혼자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아윤의 모습을 보았다. 도운은 그녀를 한 번 흘끗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지나쳤다. 그는 어깨에 외투를 걸친 채 주차된 자신의 차 쪽으로 우아하게 걸어갔다. 아윤은 도운이 아무 말 없이 앞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도운은 차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아윤은 차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며 서 있었다. 올라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 안의 도운은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30초도 되지 않아, 아윤은 결국 차에 올라탔다. 차 안은 물론 주차장도 고요했다. 이때 도운이 불쑥 말했다. “얼마나 더 필요한데?” 아윤은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라, 본능적으로 도운을 바라봤다. 도운도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며 다시 물었다. “돈이 부족하다며. 얼마나 필요한데?” 아윤은 손을 꽉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운의 목소리는 느리고 차분했다. “넌 시아의 동생이니까 나에게도 동생이나 다름없어. 부족한 돈이 있다면 나한테 말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덧붙였다. “얼마가 필요
도운은 방 안에서 아윤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의 얼굴에서 부딪쳤다. 도운은 천천히 아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키스는 너무 가깝고, 너무 깊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오랫동안 서로를 탐닉했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을 때, 둘의 숨결은 여전히 얽혀 있었다. 그날 밤 아윤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이진주는 밤에 두 번이나 깼다. 새벽 1시 한 번, 새벽 4시 한 번, 그러나 아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도운의 차가 호텔을 나섰다. 그는 아윤을 바로 학교로 데려다주었다. 학교 정문에 차가 멈추자, 아윤은 차에서 내리려 했다. 그 순간, 도운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아윤은 움찔하며 몸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문자 보내.” 아윤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도운이 덧붙였다. “옷 몇 벌 사러 가자.” 아윤은 입술을 꽉 다문 채 자신이 입고 있는 치맛자락을 바라보았다. 어제 입었던 옷은 그녀의 몸을 겨우 가리는 정도였다. 그녀는 책가방을 끌어안고, 도운의 말에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도운은 그녀의 팔을 놓았다. 아윤은 차에서 내려 빠르게 학교로 걸어갔다. 그 시각, 도운 역시 어제와 똑같은 셔츠와 바지를 입은 채로 차에 타고 있었다. 옷에는 약간의 주름이 져 있었고, 평소 깔끔하고 단정한 그의 모습과는 달리 다소 흐트러져 보였다. 아윤이 학교에 도착한 뒤, 핸드폰으로 한 통의 입금 알림이 도착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확인했는데, 익명 계좌에서 꽤 큰 금액이 입금되어 있었다. 아윤은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다. 지금 이 돈이 간절히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저 업소에서 자신이 아르바이트한다는 사실을 도운이 가족에게 알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잠시 화면을 들여다본 후, 그녀는 그 돈을 일단 받기로 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학교
매장 직원이 아윤을 피팅룸으로 안내했고, 도운은 매장 휴게공간에 앉아 조용히 아윤을 기다렸다. 직원이 아윤의 옷을 벗기면서도,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자기 몸에 맞지도 않는 속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에 약간 놀랐다. 속옷을 벗긴 뒤 아윤에게 새 속옷을 입혀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속옷은 꼭 제대로 고르셔야 해요. 몸에 맞는 치수를 입어야 하고, 소재도 중요해요. 이건 어때요? 편해요?” 아윤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남자 친구분 안목이 정말 높으시네요. 이거 입으니까 가슴 라인이 너무 예뻐요. 또렷하고 탄탄하네요. 젊음이란 참 좋은 거잖아요.” 직원은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덧붙였다. “게다가 이 디자인, 사람을 더 하얗고 매력적으로 보여줘요. 저도 같은 여자지만 보기만 해도 심쿵하네요. 남자 친구분은 더하시겠죠?” 아윤은 누군가 자기 몸을 이렇게 관찰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불편했다. 다행히 그녀가 금세 옷을 다 입고 밖으로 나왔고, 도운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잘 맞는 속옷 덕분인지 아윤의 자세가 한결 당당해져 있었고, 움츠리고 있던 어깨도 펴져 있었다. 도운은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 간단히 말했다. “괜찮네.” 아윤은 가슴 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도운과 함께 이런 곳에서 속옷을 고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직원이 센스 있게 몇 가지 속옷을 더 가져오며 말했다. “이 소재 한번 만져보세요. 정말 부드럽고 가벼워서 입으면 아주 쾌적하고 편하답니다.” 아윤은 직원이 도운에게 속옷 소재를 만져보라고 하는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두 손으로 도운의 팔을 붙잡으며 급히 말했다.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더 안 사도 돼요.”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도운의 팔을 붙잡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미 손은 그의 손목을 꽉 쥐고 있었고,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아윤은 몹시 당황했다.
아윤이 학교로 돌아왔을 때, 밖에는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창밖의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빗줄기처럼 아윤의 마음도 무거웠다. 도운이 사준 옷은,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학교 기숙사에 남겨 두었다. 세탁한 순백의 속옷은 기숙사 베란다에 걸려 비바람에 젖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한편, 도운은 병원을 떠나 집으로 가는 길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차를 몰다 말고 길가의 큰 나무 아래 차를 세웠다. 창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차창은 모두 닫혀 있었다. 그는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담배 연기가 차 안을 가득 채웠고, 그 연기 속에서 그는 무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도운의 머릿속에는 어젯밤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비가 거세게 내리는 가운데, 그는 담배를 거칠게 피웠다. 마지막 담배를 꺼내 물고는 그것마저 재떨이에 비벼 끄며 한숨을 쉬었다. 도운의 몸도, 마음도, 이 폭우에 갇혀버린 듯했다. ...아윤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마디만 적어 메시지를 보냈다. [고마워요.] 메시지를 보내는 순간, 아윤의 심장은 쿵쾅거리며 뛰었다. 입술을 꽉 다문 채 그녀는 조용히 창밖의 빗소리를 들었다. 그 폭우는 한밤중까지 계속되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야 겨우 잦아들었다. 아침이 되자, 아윤은 도운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고마워할 것 없어.]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제가 밥 한번 살게요. 태오 일 도와주신 거 고마워서요.]메시지를 보내고 나서도 아윤은 마음이 불안했다. 그녀의 메시지에 대한 답장은 한참 뒤인 점심 이후에 왔다. [그러면 저녁에 보자. 내가 데리러 갈게.] 아윤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그 메시지를 읽는 순간, 마음이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가 금방 절벽 아래로 툭 떨어질 것 같았다. 손에 든 핸드폰을 꽉 쥔 채 그녀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네.]저녁 6시, 도운의 차가 학
도운은 메뉴를 덮고 직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일단 이 정도로. 그리고 와인 한 병 추가.” 아윤은 그의 말을 듣고 살짝 놀랐다. ‘둘이 함께 마신다고? 또 술을?’ 그녀는 조심스레 도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또... 술을 마셔야 해요?” 도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윤은 어제까지는 괜찮았던 도운의 태도가 오늘은 왜 이렇게 차가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직원이 와인을 가져와 두 사람의 잔에 따라주었다. 아윤은 술을 잘 못 마시는 편이라, 잔에 담긴 와인을 그저 바라볼 뿐 손이 가지 않았다. 도운은 와인 잔을 손에 들고 천천히 잔을 흔들며 그녀를 바라봤다. 아윤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 긴장한 듯 치맛자락을 꼭 쥐었고, 결국 조용히 말했다. “저 술 잘 못 마셔요.” 도운의 대답은 단 한마디였다. “편할 대로.” 아윤은 도운이 어딘가 화가 나 있는 것 같아, 한참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오빠, 오늘 사실 돈을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그녀는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천천히 도운의 앞에 밀었다. 도운은 그녀가 내민 카드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하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오빠 돈을 이렇게 받을 수 없어요.” 아윤은 단호하게 말했다. 도운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 가볍게 얹혔다. 그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알겠어.” 도운은 카드를 들어 한 번 보고는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선택 존중할게.” 그는 여전히 와인 잔을 손에 들고 흔들었지만,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도운은 젓가락조차 들지 않았고, 아윤은 이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 조심스럽게 자신의 접시에서 몇 번 젓가락질만 했다. 그러다 도운이 물었다. “다 먹었어?” 아윤은 급히 입안의 음식을 삼키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네, 다 먹었어
이진주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절박하게 말했다. “도운아, 너는 우리 시아를 그렇게 사랑하면서 정말로 시아가 죽는 걸 두 눈으로 지켜보기만 할 거야?” 시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을 보지 못하게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 도운은 시아의 이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속에 쌓인 분노와 울분을 억누르며 한참을 침묵한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술 과정도 길고 시아의 일이긴 하지만, 아윤이의 안전 또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반드시 아윤이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할 겁니다.” 시아는 사실 시험관 시술을 더 희망했다. 그러나 도운이 이 제안을 거절하자, 시아는 도운이 자신을 책망하는 것처럼 느꼈다. 시아의 눈빛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도운은 시아의 감정적인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아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윤아, 네가 선택할 수 있어. 물론 거절할 권리도 있어.” 이진주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아윤을 올려다보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최현식은 더 나이 든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뒤에서 조용히 아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윤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정말로 아윤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선택권은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엄청난 긴장으로 아윤의 몸은 떨려오고 두 주먹은 꼭 쥔 상태였다. 도운은 침착하게 기다리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5분가량 시간이 흘렀다. 아윤은 몸을 움직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말 제가 선택해야 하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단지 아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진주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하며 딸을 살릴 모든 희망을 아윤에게 걸었다. 아윤의 목소리는 떨렸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느꼈다. 시아의 간절한 눈빛과 최현식의 애타는 표정이 아윤을 짓누르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병실 안은 죽음 같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의사와 도운, 그리고 이진주와 최현식이 엄숙한 표정을 짓고 시아의 침상을 둘러서 있었다. 침대에 누운 시아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절망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의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 위기는 겨우 넘겼지만, 이는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환자분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른 시일 내에 골수 이식을 하거나 제대혈을 채취해야 합니다.” 도운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가보세요.” 의사는 더 머물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문밖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아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슨 일이에요?” 아윤의 목소리가 병실에 울리자, 도운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아윤은 잠깐 도운의 눈을 마주쳤지만 병실 안 누구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무의식적으로 발을 옮겼다. 하지만 시아의 침대 옆에 다가선 순간, 이진주가 갑자기 아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진주는 절규하듯 울부짖으며 말했다. “아윤아!! 네가 언니를 구해줘야 해!” 이진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윤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도운은 그런 이진주의 행동을 냉정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진주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아윤의 옷을 붙잡고 간청했다. “너희 언니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시험관 시술이 고통스럽다는 걸 알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야.” 침대 위의 시아가 소리쳤다. “엄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아윤이는 내 대체품이 아니에요. 이렇게 대하면 안 돼요!” 하지만 이진주는 눈물을 흘리며 아윤의 옷자락을 더 세게 붙잡았다. “의사 말로는, 아기가 생기기만 하면 그 탯줄의 제대혈로도 가능하대. 아윤아, 제발 부탁이야!” 이진주의 손에 흔들리는 아윤의 몸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천 조각 같았다. 아윤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아는 계속 외쳤다. “엄마!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아윤은 병원에서 조용히 요양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아는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몸 상태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시아의 병실은 부모님의 사랑과 도운의 세심한 보살핌 덕분에 따뜻하고 화목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어느 날 시아는 문득 떠올린 듯 물었다. “엄마, 아빠, 아윤이는요?” 이진주와 최현식은 딸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아윤을 떠올렸다. 이진주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윤이는 괜찮아. 너만 그냥 조용히 요양하면 돼.” 하지만 시아는 부모님이 계속 자신 곁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빠, 엄마, 아윤이 좀 더 챙겨주세요. 만약 이번에 아윤이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요.” 도운은 시아의 말을 들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간병인에게 병실 공기청정기를 켜라고 지시했다. 최현식은 환한 얼굴로 시아에게 말했다. “알겠다. 이따가 네 엄마랑 같이 갈게.” 이진주도 시아를 달래며 말했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윤이는 괜찮아.” 시아는 부모님을 보며 다그쳤다. “그러면 지금 가세요.” 이진주와 최현식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그녀의 성화에 병실을 떠났다. 부모님이 떠난 뒤 시아는 도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우리 부모님더러 아윤이에게 가보라고 말하지 않았어? 부모님이 계속 나한테만 신경 쓰니까 아윤이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겠어.” 도운은 간병인에게 마지막으로 지시를 한 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병상 앞에 앉았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아윤이는 네 동생이잖아.” 시아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부족한 것이 없었다. 지금처럼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 했다. 도운은 부드럽게 그녀의 눈높이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너부터 네 건강을 잘 챙겨야지. 다른 사람은 그다음이야.” 시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자기까지 왜 이래.” 그녀는
도운은 이마를 찌푸린 채 손으로 시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알았지?” 시아는 그의 말을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운은 손을 그녀의 머리 위에 얹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때 도운이 최현식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아윤이는 저 뒤에 있어요.” 최현식은 그제야 뒤쪽에 누워 있는 아윤을 바라보며 반응했다. 최현식도 곧 아윤에게 다가가 딸의 상태를 살폈지만, 시아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는 도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시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물었다. “도운아, 이번에 아윤이가 나에게 수혈해 준 거야?” 도운은 아윤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응. 네 혈액형이 특이해서 다른 피를 구할 수 없었어.” 시아는 피곤한 듯 눈을 감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윤이 고생했네.” 도운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일단 조금 자둬.”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시아는 병실로 옮겨졌고, 아윤은 여전히 이동식 간이침대에 누워 있었다. 최현식과 이진주는 아윤에게 짧게 관심을 보였지만, 곧 두 사람의 모든 관심은 시아에게로 쏠렸다. 아윤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실망과 슬픔이 가득했다. 도운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아윤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시선을 떼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속눈썹 아래로 드리운 창백함도 눈에 들어왔다. 최현식과 이진주의 마음은 이미 아윤에게서 떠나 시아에게로 가 있었다. 시아가 방금 수술실에서 나온 만큼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도운을 바라보았다. 도운은 그들 쪽으로 걸어가 조용히 말했다. “시아는 병실로 옮겨졌습니다. 위험은 넘겼으니 당분간은 큰 문제 없을 겁니다.” 이진주가 안도하며 말했다. “그러면 우리 먼저 시아를 보러 가요.” 도운은 아무 말도
아윤은 도운의 말을 듣고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다시 도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도운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여전히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 끝에 그는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봐.” 이번에는 아윤도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또다시 간호사에게 이끌려 앞으로 갔다. 이진주는 수술실 문 앞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최현식은 아내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의 얼굴에도 초조함이 가득했다. 도운 역시 시아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한 사람, 즉 아윤의 몸을 희생해서 시아를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때문에 도운은 아윤에게 거듭 잘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아의 부모들, 특히 아윤의 아버지이기도 한 최현식은 그 문제를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도운은 그 점이 이상하게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 아윤은 간호사에게 이끌려 검사실로 들어갔다. 간호사가 물었다. “평소 빈혈 있으신가요?” 아윤은 자신도 몰랐다. 그녀는 몸 상태를 신경 써 본 적이 없어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없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일단 검사부터 진행할게요.” 피를 뽑아 검사하는 동안, 아윤은 주삿바늘이 자기 정맥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고통에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간호사가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를 마친 뒤, 아윤은 수술실로 이동했다. 수술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윤은 침대에 누워 있는 시아를 보았다. 시아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입술에도 혈색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아윤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아윤은 별다른 말 없이 지정된 침대에 드러누워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언니가 무사하길...’ 아윤은 얼마나 많은 양의 피를 시아에게 수혈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점점 머리
“위험하지 않을까요?” “일단 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도운의 표정은 한층 더 차갑고 어두워졌다. 그때, 최현식과 이진주가 허겁지겁 병원에 도착했다. 이진주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이미 의사와 도운의 대화를 들은 듯 그녀는 곧장 의사에게 달려가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선생님, 시아 동생도 곧 도착할 겁니다. 동생이 오면 바로 수혈을 시작해주세요.” 최현식도 말했다. “그래요. 시아 동생이 오는 중이에요.” 도운은 짧게 물었다. “아윤이와 상의는 해보셨습니까?” 이진주는 즉시 답했다. “그럴 필요 없지. 아윤이도 분명 불쌍한 제 언니에게 수혈해줄 거야.” 최현식도 거들었다. “지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시아를 구하는 게 우선이야. 위험을 감수하는 게 목숨을 잃는 것보다 낫지.”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다만 이번 수혈은 상당한 양의 혈액이 필요할 겁니다.” 이진주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괜찮아요. 일단 수혈부터 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합시다.” 도운은 최현식 부부의 태도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마침내 아윤이 병원에 도착했다. 멀리서 이진주와 최현식, 그리고 도운이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급히 달려가면서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는 괜찮은 거죠?” 이진주는 아윤을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울먹이며 말했다. “아윤아, 네 언니가 지금 수혈이 필요해. 혈액이 부족해서 네 도움이 절실해!” 아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의사가 아윤에게 물었다. “수혈에 동의하시겠습니까? 필요한 혈액량이 많아 몸에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아윤은 잠시 멈칫하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 도운이 나지막이 말했다. “잘 생각해봐.” 아윤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단호히 대답했다. “제가 할게요.” 도운은 그녀가 이렇게 빠르게 대답할 줄 몰랐다. 그의 얼굴에는 아윤에 대한 약간의 염려가 드러났다.
아윤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도운 오빠가 나에게 보이는 이 모든 관심은 결국 시아 언니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거겠지. 그래서 나를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거고...’ ‘아마 이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의 주변까지 사랑하게 된다는 걸까...’“알겠어요... 형... 오빠, 감사해요. 이제 이해했어요...” 아윤은 ‘형부’라는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단 두 글자였지만, 끝내 입술을 떼지 못했다. 도운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윤이가 선택한 호칭을 묵인한 셈이었고, 방금 그녀가 보였던 행동에 대해서도 그저 철없는 아이로 생각했다. 결국 아윤은 태오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대신 태오의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설령 태오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더 신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부모님이 쏟아온 수년간의 정성과 노력까지 저버릴 수는 없을 텐데...’그리고 다음 날, 태오의 부모님이 경찰서를 찾아간 뒤 태오는 마침내 풀려났다. 아윤은 그날 경찰서에 가지 않고 학교에 머물렀다. 태오와 관련된 상황에 대해서도 전혀 묻지 않았으며, 태오 역시 그녀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 후 며칠 동안 아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고, 집으로 돌아가지도, 학교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시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시아는 아윤에게 태오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고, 아윤은 이미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리고 전화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언니와 도운 오빠에게 정말 감사해요.” [고맙긴, 그런 말 하지 마.]시아는 전화를 끊었지만, 어딘지 모를 막막한 기운이 가슴 속에 잔잔히 깔렸다.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마음 한켠을 짓누르는 듯했다. 한편, 간병인은 VIP 병실 내 간이주방에서 대추차를 준비하던 중, 병실 안에서 들려온 낯선 소리에 놀라 급히 뛰쳐나왔다. 그리고 간
도운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아윤이 자기 입술에 닿도록 두었다. 아윤이 갈팡질팡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도운이 낮게 물었다. “지금 나를 유혹하는 거야?” 아윤은 공기 중 산소가 희박해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좁아지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윤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저는 그저... 감사...” 도운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그 친구를 돕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야?” 아윤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불안감과 긴장감으로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도운이 다시 물었다. “만약 지금 그 친구가 너의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 것 같아?” 그 순간, 그의 말은 아윤의 마음속 마지막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녀는 겨우 유지하던 표정을 놓쳐버렸다. 도운은 아윤을 내려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을 유혹하려고 하다니.” 아윤은 크게 눈을 뜨며 한발 물러섰다. 숨 가쁘게 가슴이 오르내리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제가 오빠와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이를 빨리 가지면 더 좋지 않을까 해서요.” 도운은 얼굴에 미묘한 냉기를 띠며 낮게 말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자존심과 이성을 잃는 일은 없어야 해. 네 아버지는 너에게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의 말은 아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바닥에 내던지게 했다. 그녀는 여태껏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 최현식은 늘 멀찍이서 아윤을 바라보는 존재일 뿐, 남자들 앞에서 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늘이 아윤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운은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도운은 아윤이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말이 없을 때, 아윤이 조심스럽게 먼저 말했다. “제가 직접 갈게요.” 도운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대답했다. [주소를 보낼게.] 아윤은 팽팽하게 당겨졌던 마음의 끈이 조금씩 느슨해져 가는 것을 느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건넸다.“네, 알겠습니다.” 도운이 전화를 먼저 끊었고, 1분 후 아윤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 메시지에는 주소가 하나 적혀 있었다. [청운힐스, 별빛 궁전.]아윤은 핸드폰을 꽉 쥔 채로 화면을 응시하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는 택시에 몸을 싣고 ‘청운힐스’라는 이름의 고급 전원주택단지를 향했다.택시가 청운힐스 입구에 다다르자, 아윤은 이 단지가 단순히 크다는 수준을 넘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택시가 안으로 들어가려면 엄격한 검사를 받아야 했고, 안으로 들어가자 단지 한가운데로 호수가 보이고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윤은 왜 많은 사람이 언니 시아가 좋은 결혼을 했다고 말했는지 깨달았다. 한씨 가문은 결코 평범한 집안이 아니었다. 최씨 집안도 나쁘지 않았지만, 한씨 가문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택시는 천천히 ‘별빛 궁전’이라 불리는 웅장한 단독주택의 정문 앞에 멈춰 섰다.아윤은 차에서 내려 금색 실로 조각된 나무 대문으로 걸어갔고, ‘별빛 궁전’의 화려한 거실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도운은 비서와 함께 바 테이블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윤은 입구에 서서 들어가야 할지 망설였다. 이곳은 그녀가 처음 와보는 낯선 곳이었다. 도운은 문쪽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비서와의 대화를 멈췄다. 그는 입구 쪽을 바라보고 아윤을 발견하자, 자신이 그녀를 이곳으로 부른 사실을 떠올렸다. 아윤은 도운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르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서로 꼭 맞잡았다. 그녀의 태도는 어딘가 긴장된 모습이었다. 도운은 비서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