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뭐가 됐든 나만 손해잖아?’‘짜증 나.’온다연은 화가 난 나머지 욕조를 내리쳤다.“나쁜 자식. 생각할수록 열받네?”하지만 그런 기분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온몸이 산산조각 난 듯 아팠고 너무 지쳤다.뜨거운 물에 몸까지 담그고 있으니 점점 더 피곤함이 밀려왔다.결국 욕조에서 나와 침대로 걸어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미가 다가와서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사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도우미는 잠들어 있는 온다연을 바라봤다. 곧이어 시선은 그녀의 목에 난 붉은 자국에 향했고 할 말이 있는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사모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전하실지도 모르니, 옷부터 입으시는 게 어떨까요?”곧이어 도우미는 온다연의 목을 가리켰다.“여기도 가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마지못해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었다.그러다가 자신의 목에 난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어깨는 물론이고 밖으로 드러난 팔뚝까지 보는 사람을 무안하게 할 자국이 가득했다.온다연은 잠깐 어리둥절하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러나 미처 가리기도 전에 안심이 들어왔다.안심은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붉은 자국을 보고선 얼어붙었다.온다연은 얼른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고개를 숙였다.“엄마, 그게... 어젯밤은...”안심은 한숨을 내쉬었다.“알고 있어. 강 대표가 찾아왔거든. 지금 거실에 있어.”온다연은 초조함이 밀려왔다.“어떤 얘기를 하든가요?”안심이 입을 열었다.“결혼 얘기. 네 아빠는 아직도 허락할 생각이 없나 봐.”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서로 만나는 중이니?”온다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솔직히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아니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반응에 안심은 또다시 입을 열었다.“설마 강 대표가 강요했니?”온다연이 답을 하기도 전에 도우미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왔다.“사모님,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이 총을 들고 강 대표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얼른
이권과 경호원들은 어쩔 수 없이 총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경계하며 총을 움켜쥐고 있었다.그들의 시선은 진수현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그가 움직이기만 하면 바로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듯 긴장함을 늦추지 않았다.진수현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참 잘하는 짓이다. 경호원들을 동원했다고 해서 내가 널 못 죽일 것 같아?”유강후가 입을 열었다.“전 싸우러 온 게 아니라 회장님과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그는 몸을 돌려 경호원들을 향해 소리쳤다.“다 나가.”경호원들은 눈치를 살피다가 마지못해 천천히 문 쪽으로 물러섰다.진수현은 피식 웃더니 갑자기 들고 있던 총을 그에게 집어던졌다.“내 딸을 괴롭혀놓고 감히 뻔뻔하게 찾아와서 행패를 부려? 동의를 얻고 싶다고? 안될 건 없지. 다만 조건이 있어.”“첫째, 네 다리를 하나 내놓는다. 둘째, 서른 대의 채찍질을 받는다.”“이걸 할 수 있다면 진지하게 두 사람의 결혼을 고민해 보지.”유강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총구를 자신의 다리에 겨누었다.이를 본 이권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려와 유강후를 감싸안았다.“안 됩니다.”유강후는 그를 뿌리치고 단호하게 말했다.“누가 들어오래? 나가.”이권은 그를 껴안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정말 다리를 쏠 생각입니까?”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마지막 경고야. 계속 내 옆에서 일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물러서.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어?”“도련님, 제가 어떻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겠습니까.”유강후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손을 들어 이권의 목덜미를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눈앞이 캄캄해진 이권은 곧바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데려가.”경호원들이 이권을 데리고 나가자 진수현이 차갑게 말했다.“왜? 이제 와서 겁나?”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총을 꽉 움켜쥐더니 총구를 자신의 왼쪽 다리에 겨누었다.그러고선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진수현은 여전히 눈 하나 깜
손을 들어 올리자 채찍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유강후의 몸에 떨어졌다.탁!둔탁한 소리에 사람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유강후의 옷은 곧바로 찢겨졌고 살갗도 금세 갈라졌다.순식간에 등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보기 흉할 정도로 섬뜩했다.진수현은 차갑게 웃었다.“아파? 이건 시작일 뿐이야. 내 딸을 괴롭힌 대가는 치러야지.”유강후는 주먹을 불끈 쥐고 진수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계속하시죠.”그 말에 진수현은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었다.“죽을 때가 되면 정신을 차리겠지.”말이 끝나는 동시에 날카로운 채찍이 연달아 날아들었다.채찍을 맞으며 유강후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지만 등을 곧게 펴고 조금의 신음도 내지 않았다.진수현은 꺾이지 않는 그의 고집에 화가 난 듯 또다시 몇 차례 채찍질을 했다.이 채찍은 금속으로 특수 제작된 거라 특히나 무게감이 상당했고 일반인은 한 대만 맞아도 뼈가 부러질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세 대를 맞는 순간 의식 잃고 쓰러져 6개월 동안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다.유강후처럼 튼튼한 체격을 가졌더라도 여섯, 일곱 번의 채찍을 맞고 나면 슬슬 한계가 온다.아니나 다를까 그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반쯤 무릎을 꿇었다.입고 있는 옷은 전부 찢겨졌고 살갗은 뒤집혀 피투성이가 되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그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더니 등을 꼿꼿이 세운 뒤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닦으며 말했다.“계속하시죠.”그러자 진수현이 차갑게 말했다.“생각보다 대단하네. 하지만 내가 인정을 베풀 거라는 착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한대도 빠짐없이 때릴 거거든.”말이 끝나기 무섭게 작은 그림자가 뛰어왔다.“아빠, 그만해요.”진수현은 곧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막아.”그러자 경호원들은 즉시 온다연을 막았다.온다연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아빠, 제가 다 설명할게요. 정말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강 대표님은 절 괴롭힌 적이 없어요.”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유강후를 향했고 곧바로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
온다연은 극심한 고통에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억지로 버티면서 유강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아파요?”유강후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무릎을 꿇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왜 갑자기 뛰어들었어요? 이건 나랑 회장님 사이의 일인데...”그녀는 유강후의 입가에 맺힌 핏자국을 닦고 싶었지만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시야가 어두워졌고, 결국 유강후의 품에서 의식을 잃었다.이를 본 유강후는 충격에 빠졌다.“유나 씨!”이때 진수현도 정신을 차리고 달려들어 딸을 안으려고 했지만 안심이 그를 붙잡았다.“툭하면 욱하는 성질머리 좀 고쳐요.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유강후가 딸을 안고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에 진수현은 후회가 밀려왔다.“유나가 갑자기 달려들 줄은 몰랐어.”진수현은 다가가 온다연을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안심이 그를 또다시 말렸다.“강 대표한테 맡기죠.”진수현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하지만...”그러자 안심이 입을 열었다.“수현 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그런데 수현 씨도 한때 젊은 시절이 있었으니 잘 알잖아요. 진씨 가문이 예전에 우리를 어떻게 괴롭혔는지.”“우리가 겪었던 고통을 유나도 겪었으면 좋겠어요?”그 말에 이성을 되찾은 진수현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안심과 함께 그들의 뒤를 따랐다.병원에 도착하여 의사에게 직접 온다연을 넘겨주고 나서야 유강후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그의 등, 가슴, 복부 전체에는 이미 멀쩡한 살점이 없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핏자국이 옷과 함께 말라붙었고 옷을 떼어낼 때마다 살갗이 한 겹 벗겨지는 느낌이었다.때마침 눈을 뜬 온다연은 유강후를 만나겠다며 난동을 피웠고, 결국 응급실로 들어가자마자 의사가 피 묻은 옷을 찢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그녀는 서럽게 눈물을 터뜨리며 달려가더니 의사에게 그만하라며 소리쳤다.안심이 강제로 그녀를 끌고가 상처를 치료할 때까지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진수현 역시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하나하나 기억났고, 온다연은 자신이 과거에 정말 유강후를 알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그렇지 않다면 왜 처음 유강후를 보고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토록 가슴이 미어졌겠는가?게다가 그녀는 항상 자신도 모르게 유강후에게 끌렸고 그의 무심한 눈빛만으로도 하루 종일 얼굴을 붉히곤 했다.‘우리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과거가 있었을까?’‘강 대표님은 왜 계속 회피하는 것 같지?’그가 건강을 회복하면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만약 그들의 과거가 아름다웠다면 정식으로 다시 만나도 전혀 무방하지 않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온다연은 그의 침대 옆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그리고 그녀는 긴 악몽을 꿨다.꿈속에는 여전히 피가 가득했다. 유강후는 그녀를 구하려다 여러 번 칼에 찔렸고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거의 숨을 거둔 상태였다.온다연은 울고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게다가 이 일로 유강후의 가족들이 그녀를 증오했다.꿈속에서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하고 험악한 말로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저주했다.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매일 넋이 나간 채 유강후의 병상 옆을 지켰다.나중에 그는 마침내 깨어났지만 온다연이 쓰러지고 말았다.또 한참이 지나 온다연이 의식을 되찾았을 땐 그에게 아이가 생겼다고 말했다.유강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표정에서 깊은 수심이 느껴졌다.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즐겁고 행복하던 나날은 아이가 태어나던 날에 갑작스럽게 끝났다.그날 아이가 떠났다.모든 게 꿈이란걸 알았지만 온다연은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그러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절벽 끝에 서게 되었다.큰 굉음과 함께 그녀는 바닥에 빠졌고 모든 것이 끝을 맺으며 온다연은 악몽에서 깨어났다.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으며 부드럽게 유강후의 손을 잡았다.깨어 있는데
그 말에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표정도 한층 부드러워졌다“괜찮아요. 당연히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죠. 다른 건 나중에 얘기해요.”“미안해요, 지훈 씨.”“미안해. 유나야.”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그리고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그러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염지훈의 등 뒤로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차는 없어요. 아메리카노 가져왔으니까 마시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요.”그 여자는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꽤 늠름해 보였고 염지훈 앞으로 다가오더니 커피 한잔을 무심하게 툭 내려놓았다.그러나 곧이어 커피가 쏟아져 앞에 놓인 서류들을 적셨다.화가 난 염지훈은 여자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권예진, 내가 일할 때 방해하지 말라고 얘기했지? 다시 한번 이러면 그 손목 잘라버린다. 명심해.”권예진이라고 불리는 여자는 아파서 소리를 지르더니 염지훈의 손을 뿌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아빠가 아니었으면 그쪽 비서 같은 건 죽어도 안 해요. 제발 빨리 죽어요.”“꺼져.”그러자 권예진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문이 닫히자 염지훈은 관자놀이를 비비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미안해. 갑자기 욱했네.”온다연은 다소 거친 염지훈의 행동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기억 속의 염지훈은 늘 부드러우며 다정한 사람이었고 소리높여 얘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온다연이 말이 없자 염지훈은 당황한 듯 황급히 입을 열었다.“오해하지 마. 우리 아빠랑 예진이 아빠가 절친이셨거든. 나랑 예진이는 어릴 때 잠깐 알고 지낸 사이였고 그 후로 연락 안 했어. 그런데 며칠 전에 아빠가 갑자기 돌봐달라고 부탁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온다연은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괜찮아요. 나이가 어려 보이던데 화만 내지 말고 잘 타일러요.”염지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돌봐줄 시간이 없어. 여러 가지 사건이 터지다 보니 쟤를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네. 내일 바로 비서한테 넘길 거야.”“아참, 아까 미안하다고 했지? 뭐가?
온다연의 눈은 희미하게 충혈되었고 눈 밑에는 검푸른 다크써클도 내려왔다.딱 봐도 제대로 쉬지 못한 사람의 모양이었다.유강후가 깨어나자 그녀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드디어 깼네요.”“물 마실래요?”그러더니 따뜻한 물을 한 잔 부어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따라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뒤돌아봐요. 상처 좀 보게.”유강후는 상반신 전체가 거즈로 감겨 있어 움직임이 불편했고 조금만 움직여도 찢어진 피부에 심한 통증이 찾아왔다.아주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눈앞이 어두워졌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온다연의 상처가 제일 먼저 걱정되었다.온다연은 순순히 돌아서서 등에 걸친 옷을 들어 올렸다.눈처럼 새하얀 그녀의 등에는 흉측한 상처가 있었다. 워낙 피부가 하얗고 부드러운 탓인지 유난히 흉터가 더 돋보였고 다소 충격적이었다.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아직도 아파요?”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곽 의사님이 보내준 약을 발랐더니 많이 좋아졌어요.”“우리 아빠가 어떤 성격인지 잘 알면서 도대체 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한 거예요? 숨겼어도 됐잖아요.”유강후는 그녀를 옆에 앉히고선 천천히 옷을 내려주며 말했다.“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잖아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않겠어요?”온다연은 유강후의 몸을 감싼 거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더니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흉터가 많이 남을텐데...”그러자 유강후는 무덤덤하게 말했다.“남자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런데 유나 씨가 보기 흉하다고 하면 피부 이식받을게요.”그 한마디에 온다연은 몸 둘 바를 몰랐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바라보며 말했다.“보기 흉하다고 한 적은 없는데...”유강후는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하얀 목을 보더니 가슴이 간질거렸다.오랫동안 고생만 하다가 이제야 두 사람의 관계가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하
마음이 약해진 온다연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속삭였다.“책임 안 진다고 한 적은 없는데...”“무조건 책임져야죠. 전 이미 진씨 가문에 얘기했고 유나 씨는 이제 우리 집안 며느리가 될 사람이에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다연은 몸을 일으켜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이제 그만 얘기해요.”부드러운 입술이 얼굴에 닿자 유강후는 순간 눈앞이 맑아졌다.예전에 온다연은 매일 아침 이렇게 그에게 입을 맞추곤 했다.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녀의 입맞춤을 얻으려면 살갗이 찢겨지는 고통과 바꾸어야 한다.유강후는 씁쓸한 마음에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움켜쥐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이렇게 해야죠. 볼에 한 건 무효.”온다연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있음에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유강후가 걱정되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밀어냈다.“강 대표님, 정말...”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유강후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눈을 감는 그의 모습이 보였고 거즈에 묻은 피는 점점 더 커져서 퍼지기 시작했다.온다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상처가 터진 거죠? 제가 가서 의사 선생님 모셔 올게요.”그러자 유강후는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가지 마요.”온다연은 그의 가슴에 묻은 엄청난 양의 피를 보며 몹시 걱정되었다.“안가 요.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온다니까요?”유강후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괜찮으니까 안 불러도 돼요. 유나 씨는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옆에 있어 줘요. 그럼 안 아파요.”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말을 듣고 온다연은 눈물이 차올랐다.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우리 예전에...”“예전에...”유강후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나쁜 여자가 있었는데, 약속을 어기고 3년 동안 아무 소식도 없이 떠났어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마치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고 그 안에는 파란만장한 시간과 감정이 담겨있었다.하지만 온다연은 그가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