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삼촌뻘 원로들은 온다연에게 오아시스 그룹 대표를 좀 소개해달라며 유강후 더러 식사 자리를 마련하라고 짓궂게 장난을 쳤다.이 사람들은 진수현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비서들로서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피땀을 흘려가며 대진 그룹을 성장시켰기에 온다연은 그저 그들의 말에 순순히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온다연이 놀란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온다연이 유강후와의 일에 대해서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먼저 원로들과 저녁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식사 장소는 대진 그룹의 맞은편에 있는 호텔이었다.식사 자리에서 유강후가 원로들을 대하는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유강후는 오아시스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허세를 부리지도, 어린 나이라고 주눅이 들지도 않는 딱 적당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수년간 이 바닥에서 종횡무진으로 활동한 노련한 경력자들도 유강후를 감히 막 대하진 못했다.진중한 사람은 자연히 눈치라는 것을 챙길 줄 알지만 어린 사람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다소 무리인 것 같았다.몇몇 고위간부들은 유강후의 초대를 받고 자신들의 자녀들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하나는 온다연을 만남으로써 미래의 진씨 가문 후계자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혹시라도 오아시스 인터내셔널에 방문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다만 온다연과 유강후가 워낙에 시선을 끄는 타입인지라 뺏겨서는 안 될 마음을 뺏긴 사람들도 있었다.하지만 유강후는 사람들의 마음을 유난히 잘 꿰뚫어 보았고 술자리가 후반으로 넘어갈 때쯤 태도가 변해 사람들은 놀라서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서둘러 식사 자리를 끝냈다.다음 날 대진 그룹은 또 기자회견을 열어 온다연이 미래의 대진 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렸다.저녁에는 당연하게도 연회가 열렸다.유강후는 어제 봤던 고위간부들의 자녀들과 또 마주치게 되는 것이 못마땅했다.유강후가 아무리 온다연을 주의 깊게 지켜본다고 한들 진씨 가문의 호텔에서 열린 연회였기에 온다연은 연회의 절반도 채 버티지
온다연의 눈은 흐릿했고 볼은 비정상적으로 빨갰다.마신 거라곤 과일주 두 잔이 전부였는데 이렇게까지 불편한 게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머리가 어지럽고 몸은 잔뜩 달아올랐으며 그 와중에 어딘가 공허한 느낌마저 들었다.머릿속에는 꿈에서 봤던 야한 장면들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나타났다.게다가 유강후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그렇게도 향기로웠다.온다연은 계속해서 맡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었다.온다연은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고 본인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본능에 따를 뿐이었다.온다연은 생각나는 대로 바로 행동에 옮겼다. 이윽고 온다연은 작은 머리통을 유강후의 가슴팍에 기댄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강 대표님 진짜 향기롭네요...”그리고는 두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온다연의 두 손은 유강후의 셔츠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탄탄한 복근 위를 이리저리 누볐다.“이런 느낌이었군요...”“막 딱딱하진 않네요. 전 이 위에서 빨래라도 빨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네요...”어느새 온다연의 자유로운 손은 유강후의 허리에 다다랐고 당장이라도 바지를 내려버릴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숨을 들이쉬고는 제멋대로인 온다연의 손을 잡고 작게 속삭였다.“몸 좋은 남자들 영상을 얼마나 본 거예요?”온다연은 작은 머리통을 유강후의 가슴팍에 비비며 여전히 이곳저곳을 만지며 대답했다.“그,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아닌데요. 그냥 가끔 좋아요나 누르고...”역시 솔직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얇은 허리를 자기 몸쪽으로 끌어다 딱 붙이고는 속삭였다.“그럼 다른 사람의 복근을 만져본 적은 있어요?”유강후는 말하면서 온다연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만약 온다연이 염지훈의 것을 만져봤다고 하면 오늘 밤 이 허리를 놔주지 않을 작정이었다.온다연은 그 순간 머리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몸속의 끓어오르는 열기는 점점 더 거세짐을 느꼈다.온다연은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어떻게 해야 편안해지는지를 알 수 없었다.그런 와중에 유강후의 몸은 차가웠
유강후는 바로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 뚜껑을 열어서 온다연의 입에 대주었다.그러는 동시에 이권에게 전화를 걸었다.“권아, 건물 아래에 깔린 진씨 가문 경호원들을 다 돌려보내고 오늘 밤 유나 씨한테 술을 준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찾아, 내일 아침에는 누군지 반드시 알아야겠으니까!”말을 마친 유강후는 전화를 끊고 계속해서 온다연에게 물을 먹였다.찬물을 마신 온다연은 그래도 어느 정도 시원한 감각이 드는 것 같았다.하지만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속이 끓는 듯한 홧홧한 열감은 점점 더 심해졌다.오직 눈앞의 이 남자만 차가웠다. 게다가 좋은 향기까지 나니 그에게 가까이 붙지 않을 수 없었다.온다연은 유강후에게 찰싹 붙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향기로워...”이미 제어할 수 없는 두 손은 여전히 유강후의 허리춤을 매만지기에 여념이 없었고 이는 유강후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지게 만들었다.곧이어 온다연은 아예 유강후에게 달라붙어 매달리기까지 했다. 온다연은 까치발을 들어 유강후의 목을 감쌌고 부드러운 입술로 그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너무 좋아, 향기로워... 강 대표님, 저 좀 이상해요...”유강후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온다연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낮게 중얼거렸다.“어떤 놈이 유나 씨한테 이딴 걸 먹인 거죠?”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강후는 온다연을 자신의 품에 가두고 고개를 숙여 정처 없이 방황하는 작은 입술을 감쳐 물었다.온다연의 입안에 남아있던 달달한 과일주의 향은 최음제라도 되는 것처럼 유강후의 봉인되었던 3년간의 욕망에 불을 지폈다.유강후가 온다연에게 제일 흠뻑 빠져 살던 시점에 온다연은 바람에 날려가 버린 눈처럼 유강후의 세상에서 사라졌었다. 그리고 유강후가 온다연에 대한 절절한 사랑도 그때 그 순간에 영원히 봉인되어버린 것이다.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온다연이 다시 유강후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유강후의 죽어가던 욕망도 다시금 들끓기 시작했다.온다연의 입술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입안의 달달한
온다연은 흥분감이 참을 수 없이 몰려왔다.“못 참겠어요, 터져버릴 것만 같아요...”온다연은 유강후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에 얹어주며 말했다.“만져봐요, 엄청 뜨거워요...”손에 들어차는 말랑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유강후도 참을 수 없이 흥분감이 몰려왔고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금방 괜찮아지게 해줄게요. 유나 씨가 원하는 걸 말해줄래요?”온다연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고 본능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모르겠어요, 이상해요...”온다연은 유강후의 손으로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짚어주었다.“여기, 그리고 여기, 다 이상해요...”그리고 눈 깜빡할 새에 온다연은 유강후에 의해 푹신한 침대로 던져졌다.온다연은 유강후의 건장한 덩치에 다 가려지고도 남았다.두 사람 모두 이성을 잃어갈 때 유강후가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온다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이건 유나 씨가 먼저 원한 거예요, 맞나요?”온다연은 온몸을 지배한 열감에 당장이라도 타버릴 것만 같아 이성적인 사고 따위는 불가능했다.“맞아요, 도와줘요...”유강후는 온다연의 하얀 귓불을 깨물고는 말했다.“그럼 오늘 이 일이 벌어지고 나서도 날 책임지겠다고 약속해줘요.”온다연은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아 색색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책임질게요, 강 대표님이 원하는 건 모두 다 들어줄게요...”쫘악!온다연의 몸을 감고 있던 마지막 천 쪼가리가 그렇게 찢어졌다. 유강후는 눈에 안광이 돌았다.“분명 유나 씨가 말한 거예요!”서로를 완전히 가졌다는 그 느낌이 주는 전율은 감히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이 짜릿했다.3년의 공백이 마침내 메꿔지는 순간이었고 잃어버렸던 갈비뼈를 찾아 다시금 완전한 몸이 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3년이라는 시간은 둘을 기다려주지 않았고 둘은 매정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왔다.머리로는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몸과 무의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날아가 버린 이성 속에서 남은 한 줄기 본능에 의해 끊임없이 서로를 탐했다.밤에 시작
온다연은 얼굴이 빨갛게 타오르다 못해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아, 아니에요, 제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 전 그냥 과일주를 마셨을 뿐인데 어떻게...”유강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바지를 올리는 걸 보니 인정하기 싫은가 봐요? 유나 씨 이런 행동이 날 먹고 버리는 거랑 뭐가 다르죠?”그리고는 일어나 앉아서 온다연을 등지고 말했다.“그럼 그냥 가요. 전 그냥 유나 씨 어장관리에 걸려든 물고기였나 보죠. 유나 씨라면 다를 줄 알았는데 바로 다음 날이 되니 시치미를 뗄 줄은 생각 못 했어요. 어젯밤에 분명 책임진다고 해놓고 아침에는 발뺌하네요. 제가 아무리 증거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을 테니까 가도 돼요.”온다연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어딘가 잘못된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가 잘못됐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결국 온다연은 망설인 끝에 사과했다.“미, 미안해요!”유강후는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미안해도 무슨 소용이 있나요. 전 생각보다 더 고지식한 사람이라 이미 유나 씨한테 그렇게 놀아난 이상 앞으로의 인생과 감정에 대한 흥미를 제대로 잃었는걸요. 처음부터 유나 씨처럼 무책임한 사람을 만났으니 앞으로는 어떤 사람도 만날 마음이 생기지 않아요.”온다연은 다소 놀랐다.“강 대표님, 처음이에요?”유강후는 퉁명스레 대답했다.“그럼 내가 그렇게 쉬운 사람인 줄 알았어요? 여자라면 다 좋다고 달려들어 잠자리를 가질 것 같았나요?”온다연은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전, 전 어젯밤에 취한 상태였는걸요...”유강후가 여전히 냉랭한 태도로 대답했다.“다 큰 성인이 술을 마셨다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나요? 그럼 음주운전도 술을 마시고 난 뒤에 생긴 사고니까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겠네요? 술에 취했다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치면 이 세상에 모든 범죄는 모두 음주라는 핑계로 빠져나갈 수 있겠네요.”온다연은 유강후의 논리에 말문이 제대로 막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저, 전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어요...”유강후는 차가운 태도로 물었다.“박씨 가문의 박현욱인가요?”온다연은 입술을 깨물고는 대답했다.“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 사람과도 안 되겠네요...”유강후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단지 결혼을 약속한 것이지 약혼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결혼은 더구나 하지 않았고요. 오직 말로 오고 간 약속일 뿐이네요. 이런 일은 두 집안이 의논해서 그쪽 집안에 적당한 보상을 해주면 돼요. 그 보상은 제가 할게요. 박씨 가문에서 어떤 요구를 제기해도 제가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유나 씨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온다연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전 지금 머릿속이 많이 복잡해요. 이 일은 제가 돌아가서 다시 잘 생각해볼게요. 책임은 무조건 질 거에요, 단지 지금 덥석 강 대표님의 제안을 수락하기 힘들어서 그래요...”유강후가 얼른 물었다.“생각할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데요? 열흘, 보름? 아니면 반년, 일 년?”온다연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기껏해서 이틀에서 사흘 정도면 돼요.”유강후는 코웃음을 쳤다.“참 오래도 생각하네요. 책임지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요. 그렇게 오래 끌 필요 없어요.”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지나서야 온다연은 입을 열었다.“전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어젯밤에 집에 들어가지 않아서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거예요.”그러고는 옷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가 처참히 찢어져 바닥을 뒹구는 드레스를 발견하고는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제가 입을 옷이 없어서 그런데 사람을 시켜서 옷 한 벌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하면 안 될까요?”유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다연을 안아다 드레스룸으로 데려다주었다.넓디넓은 드레스룸에는 젊은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스타일의 옷들이 꽤 많이 걸려있었다.온다연은 기분이 약간 가라앉아 눈알을 도로록 굴렸다.‘여자 옷이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여기에 다른 여자도 살고 있나?’유강후는 상앗빛 원피스 하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뭐가 됐든 나만 손해잖아?’‘짜증 나.’온다연은 화가 난 나머지 욕조를 내리쳤다.“나쁜 자식. 생각할수록 열받네?”하지만 그런 기분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온몸이 산산조각 난 듯 아팠고 너무 지쳤다.뜨거운 물에 몸까지 담그고 있으니 점점 더 피곤함이 밀려왔다.결국 욕조에서 나와 침대로 걸어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미가 다가와서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사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도우미는 잠들어 있는 온다연을 바라봤다. 곧이어 시선은 그녀의 목에 난 붉은 자국에 향했고 할 말이 있는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사모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전하실지도 모르니, 옷부터 입으시는 게 어떨까요?”곧이어 도우미는 온다연의 목을 가리켰다.“여기도 가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마지못해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었다.그러다가 자신의 목에 난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어깨는 물론이고 밖으로 드러난 팔뚝까지 보는 사람을 무안하게 할 자국이 가득했다.온다연은 잠깐 어리둥절하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러나 미처 가리기도 전에 안심이 들어왔다.안심은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붉은 자국을 보고선 얼어붙었다.온다연은 얼른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고개를 숙였다.“엄마, 그게... 어젯밤은...”안심은 한숨을 내쉬었다.“알고 있어. 강 대표가 찾아왔거든. 지금 거실에 있어.”온다연은 초조함이 밀려왔다.“어떤 얘기를 하든가요?”안심이 입을 열었다.“결혼 얘기. 네 아빠는 아직도 허락할 생각이 없나 봐.”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서로 만나는 중이니?”온다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솔직히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아니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반응에 안심은 또다시 입을 열었다.“설마 강 대표가 강요했니?”온다연이 답을 하기도 전에 도우미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왔다.“사모님,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이 총을 들고 강 대표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얼른
이권과 경호원들은 어쩔 수 없이 총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경계하며 총을 움켜쥐고 있었다.그들의 시선은 진수현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그가 움직이기만 하면 바로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듯 긴장함을 늦추지 않았다.진수현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참 잘하는 짓이다. 경호원들을 동원했다고 해서 내가 널 못 죽일 것 같아?”유강후가 입을 열었다.“전 싸우러 온 게 아니라 회장님과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그는 몸을 돌려 경호원들을 향해 소리쳤다.“다 나가.”경호원들은 눈치를 살피다가 마지못해 천천히 문 쪽으로 물러섰다.진수현은 피식 웃더니 갑자기 들고 있던 총을 그에게 집어던졌다.“내 딸을 괴롭혀놓고 감히 뻔뻔하게 찾아와서 행패를 부려? 동의를 얻고 싶다고? 안될 건 없지. 다만 조건이 있어.”“첫째, 네 다리를 하나 내놓는다. 둘째, 서른 대의 채찍질을 받는다.”“이걸 할 수 있다면 진지하게 두 사람의 결혼을 고민해 보지.”유강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총구를 자신의 다리에 겨누었다.이를 본 이권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려와 유강후를 감싸안았다.“안 됩니다.”유강후는 그를 뿌리치고 단호하게 말했다.“누가 들어오래? 나가.”이권은 그를 껴안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정말 다리를 쏠 생각입니까?”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마지막 경고야. 계속 내 옆에서 일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물러서.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어?”“도련님, 제가 어떻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겠습니까.”유강후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손을 들어 이권의 목덜미를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눈앞이 캄캄해진 이권은 곧바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데려가.”경호원들이 이권을 데리고 나가자 진수현이 차갑게 말했다.“왜? 이제 와서 겁나?”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총을 꽉 움켜쥐더니 총구를 자신의 왼쪽 다리에 겨누었다.그러고선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진수현은 여전히 눈 하나 깜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