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싹!”유강후는 순간 멍하니 서서 뺨을 만졌다.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이제 키스 한 번 할 때마다 뺨을 맞아야 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 나름대로 값어치가 있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온다연은 유강후를 힘껏 밀어내고 테이블에서 내려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저를 존중할 생각은 하지 않나요?”또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건가?온다연은 마음 깊은 곳에서 서러움과 실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온다연은 흐르는 눈물을 닦고는 재빨리 방을 뛰쳐나갔다.유강후는 쫓아가지 않고 온다연이 사라진 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온다연은 언제나 향기롭고 사랑스럽게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너무 순하고 부드러운 모습이라 그를 자꾸만 시험에 들게 했다.유강후는 그녀를 겁주려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방금 온다연은 분명히 놀라고 겁먹은 모습이었다.‘이대로는 안 돼.’온다연은 아직 너무 연약했다. 모든 것을 갑자기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서 있다가 천천히 문밖으로 나갔다.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온다연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밖을 보니 어느새 비는 그쳤고 밤하늘은 순수한 벨벳 같은 짙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커다란 보름달이 하늘에 떠 있었고 달빛은 보석처럼 맑고 아름다웠다.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홀에서 나와 갑판으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하지만 온다연이 곁에 없으니, 유강후에게 이 모든 풍경은 빛을 잃은 듯 아무 의미가 없었다.유강후는 친구인 연시온과 건성으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사람들 속에서 온다연을 찾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온다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날 피하는 건가?’만약 온다연이 계속 자신을 피한다면 며칠 동안 온다연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강후는 점점 초조해졌다.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들고 있던 와인 잔을 흔들었다. 그리
“꺼져!”유강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안윤희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두 손을 꽉 쥐었다.“강 대표님, 제 동생에게 마음이 있더라도 저한테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안윤희는 고개를 떨구고 단단히 결심한 듯 말했다.“저는 강 대표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 동생은 이미 약혼한 상태입니다. 두 분은 어울리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강 대표님에게 더 어울리는 사람입니다...”“닥쳐!”유강후는 갑자기 몸을 돌려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안윤희를 노려보았다.“이게 마지막 경고야. 다시 한번 내 앞에서 잔머리 굴리다간 네 인생 끝날 줄 알아.”유강후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위험한 기운을 내뿜었다.“네가 다연의 사촌 언니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리고 오늘 너, 정말 꼴사나웠어.”안윤희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서 있다가 곧 눈물이 차올랐다.“강 대표님, 제가 뭘 했다고 이렇게 심한 말씀을 하세요?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유강후는 냉정하게 대답했다.“내 앞에서 불쌍한 연기는 집어치워. 고작 그 정도 수준의 속임수로 날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유강후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말을 마친 유강후는 안윤희에게 눈길 한 번 더 주지 않고 자리에서 떠났다.안윤희는 분노로 얼굴이 새파래지며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내던지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온다연, 오늘 밤, 이 배에서 네가 얼어 죽는다면 네 주위를 맴돌던 남자들이 어떻게 할지 궁금하네.”갑판 위에서는 유강후의 사람들이 몇 번이나 온다연을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그동안 배에 이착륙한 비행기도 없었으니 온다연은 여전히 이곳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유강후는 점점 더 시끌벅적해지는 현장을 바라보며 점점 속이 탔다.‘왜 나를 이렇게까지 피하는 걸까? 단지 한 번의 키스 때문에 이렇게까지 나를 멀리하는 걸까?’그때 경호원이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온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고 얇은 원피스 하나만 입은 온다연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한참 동안 몸부림치며 버티다가 결국 지쳐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울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처럼 아무도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다.다행히 냉동창고가 워낙 커서 온도는 서서히 떨어졌다. 온다연은 근처에서 비닐을 찾아 몸에 감고 여러 개의 상자를 겹쳐 그 안으로 들어갔다.임시방편으로 약간의 효과는 있었지만 점점 더 내려가는 온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온다연은 추위에 몸을 떨며 서서히 저체온증 상태에 빠져들었다.희미한 의식 속에서 그녀는 부모님의 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닿을 수 없었다.온다연은 과거에 일을 기억할 수 없었지만 부모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부모님은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부모님의 얼굴이 점점 흐려지더니 이내 염지훈의 얼굴로 변해갔다.온다연은 마음속으로 그에게 작별을 고하며 말했다.‘미안해요, 정말 노력했지만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어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좋은 여자를 만나길 바라요.’마지막으로 모든 기억이 한 남자의 얼굴로 바뀌었다.그는 온다연을 품에 안고 있었고 얼굴에는 온 세상을 잃은 듯한 고통과 혼란이 가득했다.그 모습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웠다. 평소 강압적이고 완벽해 보이던 그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니 온다연의 가슴이 아파왔다.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고 싶었지만 손조차 들 수 없었다. 그렇게 온다연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냉동창고의 문이 열렸을 때, 안에는 흐트러진 냉동 물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분명 누군가 의도적으로 물건들을 망가뜨린 흔적이었다.이 모습을 본 유강후와 그의 일행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고 서둘러 창고 안으로 뛰어들었다.냉동창고는 수백 평에 달하는 큰 공간이었고 그들
진수현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는 유강후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분노로 손을 떨었다.“너만 믿고 다연이를 맡겼는데, 이렇게밖에 못 지켜?”그는 한 대로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몇 대를 연달아 유강후에게 날렸다.유강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냈다.진수현이 지쳐 멈춘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들어 피가 맺힌 입술을 닦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 잘못입니다. 어떻게 저를 때리셔도 할 말 없습니다.”진수현은 분노로 가득 차 외쳤다.“꺼져! 너 같은 인간은 내 딸 옆에 있을 자격 없어!”유강후는 천천히 일어나 복잡한 눈빛으로 온다연이 누워 있는 침대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죽음의 문턱을 넘은 듯한 충격과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혼란, 그리고 뼛속까지 서려 있는 강렬한 냉기가 뒤섞여 있었다.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온다연을 바라보며 마치 얼음 속에서 갓 끌어올려진 사람처럼 싸늘한 기운을 내뿜었다.진수현은 그런 유강후의 모습을 보고 점점 더 화가 치밀어 큰 소리로 말했다.“꺼져!”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진수현을 바라봤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진수현은 본능적으로 섬뜩함에 숨을 들이마셨다.그는 평생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유강후의 눈빛처럼 차갑고 독기 어린 눈은 본 적이 없었다.그 눈빛은 마치 독을 품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냉혹한 사람들이 있지만 유강후처럼 속까지 독을 품은 사람은 대개 큰일을 이루는 자들이었다.진수현은 그런 유강후가 자신을 도발한다고 느끼며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시 주먹을 들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안심이 그의 손을 잡아 멈췄다.“수현 씨, 그만해요!”안심은 유강후를 한 번 쳐다보고 그의 눈에 담긴 깊은 고통을 읽어냈다.안심은 과거에 진수현과 함께했던 고난의 시간을 떠올리며 잠시 그에게 연민의 마음을 품었다.“강 대표님이 실수한 건 맞지만 강 대표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다연이를 해치려던 사람이 따로 있었고 지킨다고 지킬 수 있었던
그때, 이권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고 손에는 두 병의 약을 들고 있었다.그 약은 며칠 전, 곽혜진이 준 것이었지만 유강후는 온다연에게 줄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유강후는 약을 받아 한 병에서 한 알을 꺼내 직접 입에 넣고 삼켰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이 약은 다연이를 위한 겁니다. 다연이의 몸이 회복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일정 기간 복용하면 건강이 많이 좋아질 거고 지금 복용시키면 더 빨리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진수현은 화를 내며 말했다.“네가 준 물건 받지 않아. 당장 나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진 회장님, 혹시 곽 의사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지금 이 근처 섬에서 비밀 실험을 진행 중인 분입니다.”“이 약은 곽 의사가 직접 준 겁니다. 온다연을 위해 특별히 지은 약이고 매우 귀한 약입니다.”진수현은 잠시 분노를 억누르고 두 병의 약을 노려보며 말했다.“그 약이 진짜라는 걸 누가 증명하지? 다른 사람들은 이 약 한 알을 구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인데, 어떻게 두 병이나 구했지?”유강후는 사실대로 말했다.“우리 가문의 어르신께서 곽 의사 가문과 오래된 인연이 있으십니다. 저 역시 곽 의사의 남편과 약간의 교분이 있고 마침 이 근처에 머물고 있다고 하셔서 이렇게 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유강후는 약을 안심에게 건네며 말했다.“진 사모님, 이 약을 한 알씩 다연이에게 복용시켜 주시길 바랍니다.”진수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안심이 그를 막았다.“이 약에는 문제가 없어요. 방금 강 대표님께서도 우리 앞에서 직접 복용하셨잖아요. 곽 의사의 약은 정말 구하기 힘든데, 강 대표님이 이런 약으로 우리를 속일 리는 없다고 생각해요.”안심은 약병에서 두 알을 꺼내 냄새를 맡아보았다.약에서는 은은하고 깊은 향이 풍겼으며 어딘가 신비롭고 오래된 느낌이 담겨 있었다.안심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 온다연에게 약을 먹였다.유강후는 옆에서 안심이 온다연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
유강후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안심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유강후의 대답은 온다연과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다.안심은 자신의 직감이 이렇게 정확할 줄은 몰랐다.안심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갑게 굳어졌다.“3년 전, 다연이가 발견됐을 때 온몸에 상처투성이였고 폐 감염이 심각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병원에서 한 달을 누워있다 깨어났죠. 하지만 다연이의 몸과 마음은 심하게 망가져 있는 상태였어요. 말을 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특히 밤이 되면 상태가 매우 나빠져 여러 차례 자해를 시도하기도 했죠.”안심은 온다연이 처음 돌아왔던 모습을 떠올리며 울컥했다.“다연이는 우리의 진심에 대해서 여러 번 물으며 의심했어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죠.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해도 대답 대신 눈물만 흘리며 모든 감정은 거짓이라고 되풀이했어요. 염지훈의 설명에 따르면, 양부모의 학대로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요. 그 집안은 남아선호 사상이 강해서 다연이가 큰 상처를 받았죠. 결국 전문 심리치료사의 도움으로 상담을 진행하고 최면을 통해 과거를 조금씩 잊게 하면서 다연이가 지금처럼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을 수 있었어요.”“강 대표님, 우리는 다연이가 H국에서 겪은 일을 조사해 보려고 했지만 동남아가 아닌 그곳은 우리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라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했어요.”“지금 우리는 그저 다연이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양부모가 다연이에게 준 상처는 우리가 평생을 바쳐도 다 회복시키지 못할 만큼 크니까요. 그래서 저는 다연이가 과거를 떠올리지 않길 간절히 바라요.”안심은 유강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강 대표님이 정말 다연이의 과거를 알고 있는 연인이나 친구였다면, 다연이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왜 바다에 빠진 겁니까?”“왜 과거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렇게 고통스러워서
유강후는 침묵했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온다연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들은 시간이 상처를 치유한다고 말하지만, 유강후는 시간이 모든 진실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어떤 일이 닥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하지만 단 한 가지, 온다연을 절대 놓을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안심은 유강후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더는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기로 했다.“다연이가 깨어났어요. 한 번 가서 봐주세요. 강 대표님이 준 약 효과가 대단했나 봐요. 꾸준히 복용하면 건강이 훨씬 좋아질 것 같아요.”잠시 말을 멈췄던 안심이 다시 입을 열었다.“다연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제가 쉽게 넘어갈 수 없어요. 지금 강 대표님이 다연이를 만나는 걸 허락하는 건, 강 대표님이 다연이를 진심으로 아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다연이를 상처 준 적이 있다면, 제 딸이 그런 사람과 함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유강후는 눈에 깊은 어둠을 띤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진 사모님, 진 씨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두 분께도 젊은 시절이 열렬히 사랑했던 순간들이 있었다고요. 결국 두 분은 함께하시게 됐잖아요. 저와 다연이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평생을 바쳐 다연이에게 보상할 겁니다. 저는 절대 다연이를 놓지 않을 겁니다.”말을 마친 유강후는 병실로 들어갔다.온다연은 침대 머리에 기대고 있다가 문소리가 들리자 엄마인 줄 알고 부드럽게 말했다.“엄마, 밤새 저 돌보시느라 눈이 빨개지셨잖아요. 얼른 가서 쉬세요. 그러다 예뻐지지 못하면 어쩌려고요.”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다가가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기운이 좋아 보여요. 약 효과가 정말 뛰어난 것 같네요.”유강후는 곽혜진이 준비한 약이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다. 보통 이런 상태에서 6~7일은 회복이 어려울 만도 한데 온다연은 하룻밤 만에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
“꿈에서 제가 얼어붙을 듯한 방에 갇혀 있었어요. 너무 추워서 거의 죽을 뻔했는데 대표님이 나타나 저를 구해 주셨어요. 그리고 낯선 남자와 할머니가 저를 때리려 했는데 정말 무섭고 무자비했어요.”온다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유강후를 쳐다봤다.“강 대표님은 대체 제게 어떤 사람이었나요? 왜 제 꿈에 자꾸 대표님이 나오는 거죠? 그것도 전부 나쁜 일들에서만요.”유강후는 속이 쓰린 듯 온다연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네 남편이었다고 하면 믿을래?”온다연은 얼굴이 순간 빨개지더니 곧장 베개를 들어 유강후를 향해 던지며 화를 냈다.“정말 너무 싫어요! 그런 농담 하나도 안 웃기거든요!”유강후는 아침에 안심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이 서서히 무거워졌다.그는 온다연을 배신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가 입은 상처 대부분이 자신과 얽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유하령은 감옥에 갔고 유자성은 척박한 사막으로 발령이 났으며 강혜숙은 분노 끝에 중풍에 걸렸다. 하지만 그것으로 온다연이 받은 상처가 치유될 리 없었다.그리고 자신 또한 유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며 그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어떻게 해야 온다연이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어쩌면 온다연의 기억 상실은 하늘이 준 새로운 기회일지도 몰랐다.유강후는 떨어진 베개를 주워 온다연의 등 뒤에 놓으며 낮게 말했다.“농담이었어. 하지만 우리가 전에 알던 사이였던 건 사실이야. 사실을 난 예전에 당신 팬이었거든.”그는 온다연의 침대 옆에 앉아 과거를 떠올리며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처음 너를 알게 됐을 때, 너는 아직 어린 소녀였어. 나는 너보다 여덟 살이나 많았지. 너에게 다가갈 수 없어서 마음을 억누르며 매일 네가 빨리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렸어.”온다연은 그의 말을 듣고 멍해졌다.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고 목까지 붉게 물들었다.온다연은 말을 더듬으며 겨우 말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에 흐트러진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