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라시드의 여자가 대홀 문 밖에서 온다연을 불러 세웠다.그녀는 온다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꽤 예쁘네요. 그러니 우리 주인님께서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한 것도 이상할 게 없어요. 당신 주인이 당신을 우리 주인님에게 줄 생각인 거, 알고 있어요?”온다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 시대에 아직도 누군가를 ‘주인’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그녀는 부드럽지도 강하지도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당신 주인이 누굴 마음에 들어 하든 그건 저랑 상관없어요. 전 주인이 없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주인을 두지 않아요. 그래서 전 저 자신에게만 속하죠.”말은 그렇게 했지만, 방금 전에 유강후가 했던 말들이 떠오르자 속이 싸늘해졌다. 그것들이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려는 말일 뿐이길 바랐다.만약 정말로 그런 일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녀는 그를 죽일지도 모른다.라시드의 여자는 온다연의 속마음을 모른 채 말을 이었다.“그런 일은 너무나 흔해요. 유 대표님 같은 신분 높은 사람 옆에 당신 하나만 있을 리 없죠. 그분이 당신과 놀 만큼 놀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요.”온다연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여자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믿기 어려워요? 난 직접 봤어요. 유 대표님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사진을. 그 여자는 바로 이곳 한옥 중 한 곳에 살고 있어요.”한옥?온다연의 심장이 순간 철렁했다.“사람이 닮을 수도 있는 거죠. 당신이 착각한 걸 수도 있어요.”그러자 여자가 말했다.“라시드 님이 갖고 있는 사진은 절대 가짜가 아니에요.”온다연이 대답할 틈도 없이 여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전 당신을 해치려는 의도가 없어요. 그래서 거짓말할 필요도 없죠. 그냥 당신한테 충고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만약 유 대표님이 정말로 당신을 라시드 님에게 넘기려 한다면 도망쳐요. 절대 중동으로 오지 마요. 라시드 님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에요. 누구와 함께해도 좋으니 절대
“먼저 김씨 가문이 동남아에서 운영 중인 기업을 인수해. 원유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생산량과 수출을 통제해.”“김원도 아버지가 바깥에 두 명의 사생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들을 찾아내서 김씨 가문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해.”...전화를 끊고 유강후는 노트북을 닫으며 이권을 바라보았다.“라시드가 소유한 모든 기업에 대한 희귀 금속 공급을 즉시 중단해. 희토류는 1그램도 팔지 마. 그 인간은 전자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니, 필요한 핵심 금속과 부품 전부 공급을 멈춰.”이권은 놀라며 물었다.“하지만 저희가 그들과 협력 계약을 맺은 상태인데요. 라시드 가문에 대한 금속 공급을 중단하면 위약금으로 수백억 달러를 물어야 합니다.”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내려앉았다.“누가 그 가문 전체에 공급을 중단한다고 했지? 핵심 부품과 희귀 금속을 라시드 동생에게 팔아. 그 동생이 직접 나와서 나와 협상하게 만들어.”이권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 유강후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계약을 체결할 때 라시드 가문과만 계약했지, 라시드 개인과는 계약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군요. 이제 형제들이 각자 사업을 나눠 가졌으니, 둘이 같은 가문 소속이라 해도 저희는 누구에게 공급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라시드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할 겁니다.”유강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아까 곁에 있던 여자가, 예전에 라시드가 오천만 달러를 주고 사들인 그 여자인가?”이권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죠. 라시드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동생이 그 여자를 죽이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입니다. 라시드는 집에 이미 세 명의 아내를 맞았는데, 모두 암살당했어요. 하지만 그 여자는 애완동물 취급을 받으면서도 지금까지 무사합니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에 낀 은빛 반지를 만지작거렸다.“그 소식도 라시드 동생에게 전해.”그리고 덧붙였다.“그 여자 휴대폰 번호를 알아내서 바이러스를 심어. 매일 ‘여성의 독립’을 주제
약욕의 물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작은 물결을 일으켰고, 온다연은 작은 배처럼 그에게 매달려 흔들렸다.한참이 지나서야 모든 것이 끝났다.유강후는 지친 온다연을 안고 라운지체어에 앉았다.그녀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싫어하는 것을 보고, 그는 우유를 가져와 직접 먹여 주었다.부드러운 수건으로 그녀를 감싸 눕힌 뒤, 헤어드라이어로 한 가닥씩 정성스럽게 머리를 말렸다.온다연은 내내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그대로 있었다.유강후는 그녀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여자는 지금 화가 나 있다.유강후는 드라이어를 내려놓고 그녀를 안아 자신의 몸 위로 눕혔다.반쯤 마른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기며 낮고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뭘 들었어?”온다연의 몸이 살짝 굳었다.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유강후가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고 차갑게 말했다.“그대로 있어. 움직이면 나중에 더 혼날 줄 알아.”“날씨도 아직 제대로 풀리지 않았는데, 누가 너더러 그렇게 얇게 입고 나가라고 했어?”치마는 겨우 무릎까지 내려왔고 위에는 헐렁한 넓은 목의 니트 하나만 입고 있었다. 심지어 외투도 걸치지 않았다.도우미들을 다 내쫓아야 할까 보다!그는 그녀의 통통한 발목을 꽉 쥐며 말했다.“겨우 몸 상태가 조금 좋아졌는데, 또 건강을 망치려고? 계속 약만 먹고 싶어? 이러다간 대체 언제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온다연은 그의 손을 밀어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당신이 나를 남한테 넘길 거라면서요. 그런데 대체 누구 아이를 낳으라는 건데요?”그러고는 벌떡 일어나려 했다.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눌렀다.그러자 그녀는 순순히 그의 가슴에 다시 몸을 맡겼다.“괜한 소리 하지 마. 응?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거야?”온다연은 여전히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요.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거짓말하려고 하지 마요.”유강후는 그녀의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안고 있었다. 잠시 후, 유강후가 말했다.“그 하루코, 기억나?”온다연은 고개만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평생 잊을 수 없었다.그 여자는 유강후의 눈길 한 번이라도 받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박을 했지만, 결국 패배했다.유강후는 그녀에게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온다연에게는 달랐다.큰 잘못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그녀에게 맞춰주었고, 심지어 주한의 사건이 들통났을 때조차 그녀를 책망하지 않았다.그리고 세상을 떠난 유연서에 대해서는 유독 애틋하게 그리워했다.순간, 온다연은 유강후가 과연 냉정하고 무정한 사람인지, 아니면 깊은 사랑을 가진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문제를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녀와 유강후 사이에는 이미 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고, 유연서가 유강후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성장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하루코, 유연서, 그리고 나은별 같은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아이만 그녀 곁에 있다면 유강후가 그어 놓은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것도 괜찮았다. 때때로 그가 요구하는 무리한 부탁조차 순순히 따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이의 아버지였으니까.그녀가 어릴 적에 가지지 못했던 것을, 그녀의 아이만큼은 반드시 누리게 하고 싶었다.온다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강후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 하루코의 오빠, 이다 이치로가 H국에 왔어. 하루코의 죽음을 내 탓으로 여기고, 내가 하루코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복수를 원하는 것 같아.”잠시 말을 멈춘 그는 일부러 무심한 어조로 덧붙였다.“그 사람, 성격이 좀 과격해. 너한테도 조금 화풀이를 할지도 모르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다만 조심하는 건 나쁠 게 없지.”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당분간 학교에 못 가게 되는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
집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사실대로 말했다.“접니다. 시간이 늦은 것 같아 좀 더 편안한 옷을 준비해 드리려고 보냈습니다.”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월급 계산하고 떠나.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집사는 깜짝 놀라며 급히 무릎을 꿇었다.“대표님, 제발 저를 해고하지 말아 주세요! 제 아들이 아직 학업 중이라 이 직장을 잃을 수 없습니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해고만은 피해 주세요!”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온다연을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과도한 학업 스트레스에 더해 전날 밤 겪었던 고생 탓인지, 온다연은 단잠에 빠져 다음 날 아침까지 푹 잤다.몽롱한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새로 온 집사가 데운 우유를 내밀며 공손하게 말했다.“사모님,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가서 드시죠.”온다연이 우유를 받자 집사는 미리 준비해 둔 숄을 그녀에게 걸쳐주었다.온다연이 습관적으로 맨발인 것을 보고는 급히 슬리퍼를 가져다주었다.온다연은 이런 섬세한 배려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어제 보던 직원들과 오늘의 직원들이 다르다는 것만 느꼈다.그녀는 조심스레 죽 한 숟가락을 떠먹으며 물었다.“어제 따라왔던 이 집사님은요? 집에 일이 생긴 건가요?”집사는 공손하게 대답했다.“이 집사님은 업무 미숙으로 어젯밤에 찻잔을 깨뜨리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께서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온다연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유강후는 직원들에게 엄격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단순히 찻잔 하나 때문에 사람을 해고했을 리 없었다.“강후 씨는요? 서재에 있나요? 와서 저랑 같이 아침 먹으라고 전해주세요.”집사는 잠시 망설이다 사실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대표님께서는 옆방에서 회의를 하고 계십니다. 30분 전에 이 비서님이 몇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셨는데 굉장히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그때 옆방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평범한
유준석의 눈은 핏발이 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알고 있긴 해? 내 할아버지가 강씨 가문에 공을 세운 걸! 그런데 왜 중요한 자리는 나한테 주지 않았어? 내가 분명 관리자가 될 수 있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 맡긴 거야?”유강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네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냐? 실력 있는 사람이 위로 올라가는 거야. 네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충성스럽지 않았다면 너는 강씨 가문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을 거야!”유준석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유강후! 네가 날 무시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널 배신하겠어? 그들이 나한테 뭘 약속했는지 알아?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준다고 했다고!”유강후의 눈에 분노가 번뜩였다. 그는 단숨에 유준석의 배를 걷어차며 말했다.“변명은 그만해.”“감옥에 집어넣어. 평생 나오지 못하게 해!”유준석은 몸부림치며 소리쳤다.“안 돼! 나를 감옥에 보낼 순 없어! 감옥에 가긴 싫다고!”유강후는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지체하지 말고 당장 끌고 나가. 다시는 이놈 이름조차 듣고 싶지 않으니까.”그 순간, 유준석은 갑자기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유강후, 네가 이런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속박을 풀어내고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그것은 칠흑 같은 총이었다. 그는 그 총구를 유강후에게 겨눴다.탕!총성이 울리고, 유강후 뒤에 있던 방탄유리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그러나 총알은 유강후를 맞히지 못했다.유준석이 총을 꺼내는 순간, 유강후는 그의 행동을 예측하고 가볍게 피했다.다음 순간, 유준석은 눈을 크게 뜨며 바닥에 쓰러졌다.그의 가슴에는 커다란 피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이권의 손에 들려 있던 총구에서는 아직도 열기가 피어올랐다.이권은 총을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괜찮으십니까?”유강후의 얼굴은 유난히 어두웠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유준석을 매섭게 응시했다.그는
온다연은 유강후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를 안았다.마치 평소 그가 자신을 다정히 안으며 달래주던 것처럼, 그녀는 그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힘껏 감싸 안았다.“저 왔어요, 강후 씨. 저 여기 있어요.”그가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아주 작고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떨림이었지만, 온다연은 분명히 느꼈다.그 순간, 그녀의 가슴이 예고 없이 아파왔다.‘강후 씨도 이렇게 약해질 때가 있구나!’그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었다.이 사실을 깨닫자 온다연은 더 강하게 그를 껴안았다.그때 이권이 다가와 말했다.“사모님, 여긴 상황이 복잡합니다. 먼저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 놀라실까 걱정이 돼서...”“거기 누구 없어요?”온다연이 갑자기 말했다.“홍차 한 주전자 가져와요. 당장!”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했다. 이 집안의 안주인답게 침착하고 결단력이 있었다.“이 비서님, 저 사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요. 아직 살아 있으니 살릴 수 있는지 확인하고, 안 된다면 평소 하던 대로 처리하세요. 깨끗하게 끝내야 합니다.”이권이 놀란 듯 굳어 있자, 온다연은 목소리를 높였다.단호하고 날카로운 톤이었다.“어서 가서 처리하세요!”이권은 정신을 차리고 즉시 대답했다.“네, 사모님!”몇 분도 지나지 않아 유준석은 끌려 나갔고, 바닥의 핏자국도 흔적 없이 정리되었다.방 안에 진동하던 짙은 피비린내만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방금 전까지 극도의 위기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알 방법이 없었다.곧 누군가 홍차를 우려 가져왔다.온다연은 그것을 옆 테이블에 두게 하고 창문을 열도록 지시했다.이른 아침 경원시의 날씨는 아직도 매섭게 추웠고,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면서 피비린내를 날려버렸다.방 안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온다연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캐시미어 숄을 풀어 유강후의 등 위에 덮어주었다.그리고 홍차를 따라 적당한 온도를 확인한 뒤 그의 입가에 내밀며 말했다.“조금 마셔요.”유강후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온다연은
온다연이 대답할 새도 없이,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아 홱 끌어당기며 그녀를 품 안에 가뒀다.온다연이 들고 있던 찻잔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유강후는 조각난 잔을 한 번 흘겨보더니 그녀의 신발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그리고 몸을 숙여 그녀의 신발을 벗겨내어 한쪽으로 던지곤, 그녀를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그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다연아, 앞으로도 이런 일을 겪을 수 있어. 무섭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가슴에 기대어 부드럽게 대답했다.“무섭죠.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강후 씨,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에겐 내가 있고, 우림이가 있어요. 우리가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유강후의 마음속은 거센 물결처럼 흔들렸고, 그의 눈동자 속 감정은 서서히 넘쳐흘렀다.“다연아, 너 영원하다는 말이 뭔지 알아?”온다연은 조용히 말했다.“알아요. 이생 동안 당신 곁을 지키는 거요.”유강후는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맹세해. 어떤 일이 있어도, 정말 어떤 일이 있어도 날 떠나지 않겠다고.”온다연은 그를 힘껏 안으며 대답했다.“맹세할게요.”유강후는 낮고 강렬한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씩 말했다.“오늘 네가 한 말을 꼭 기억해. 어떤 일이 있어도 날 떠나지 않겠다고.”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이제 차를 마실 수 있겠어요?”유강후는 찻잔을 받아 단숨에 비웠다.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강렬하게 덮쳤다.차의 은은한 향기가 입술과 입술 사이를 스쳐갔다. 키스는 여전히 강압적이고 거칠었지만, 온다연은 이번만큼은 그의 키스에 욕망이 아닌 다른 감정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응답했다.그 키스는 사실 완벽하지 않았다. 공기 중엔 여전히 피 냄새가 가득했고, 그녀는 방금 전까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이것이 유강후와 나눈 키스 중 가장 특별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것이 변할 거라
“부인이 지금 임신 3주차인데, 아직은 배아 상태라 약 1cm에 불과하고 상태가 좀 불안정합니다.”온다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유강후는 너무 큰 기쁨에 심장이 마구 뛰고 정신이 혼미했다.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온다연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최소 1~2년은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고작 3~4개월 만에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그런데 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지난번 온다연의 유산 사건이 기억에 생생한 유강후는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건 무슨 뜻이죠?”임수진이 약간 당황하며 설명했다.“대표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조금만 상태가 나빠져도 유산 징후가 나타날 수 있어요.”“별문제는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배아 발육 상태가 양호하고 태아 심음도 정상입니다.”“쌍둥이라고요?”유강후는 귀를 의심했다.그는 문득 곽혜진이 준 약이 생각났다. 자기도 쌍둥이였다는 사실과 겹치자, 다시 기분이 황홀해져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그는 임수진의 손목을 꽉 잡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박사님, 그게 정말입니까?”임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손을 좀 놓고 얘기해요.”유강후는 급히 손을 풀어주었다. 흥분해서 목소리까지 떨리기는 평생 처음이다.“죄송합니다, 박사님. 정말 쌍둥이예요?”임수진이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정말이죠. 제가 30년간 의사로 일하면서 몇 번 실수한 적은 있지만, 쌍둥이를 잘못 판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유강후는 너무 흥분해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애써 진정하고 한참 후에야 나지막이 말했다.“감사합니다, 박사님. 제 아내는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까요?”임수진은 아직도 혼수 상태인 온다연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몸에 특별한 이상은 없어서 지금쯤 깨어나야 하는데...”“제 아내는 이전에 최면 당한 적이 있는데, 그로 인해 과거의 대부분 기
온다연은 얼굴이 창백했고, 몸이 물에서 막 건져낸 것처럼 식은땀에 젖어있었다.강씨 가문의 새 안주인임을 즉각 알아본 그들은 삽시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방금 그들이 한 뒷담화를 온다연이 다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온다연이 극심한 통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의사, 의사를 불러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그녀는 길고 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경원시에 사는 동안 겪었던 고난들이 오래된 영화처럼 기억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길고 아팠다.최면 당한 이후로 종종 나타나는 신경성 통증보다는 마음속 고통이 훨씬 더 컸다.그녀가 양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모습, 평생 그녀를 지켜주던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수단으로 괴롭힘당하는 모습, 결국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이 영화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그녀가 유하령에게 짓밟히는 모습도 보였다. 수도 없는 모욕을 당하며 찜통 같은 물탱크에 갇히고, 영하 20℃ 이하의 혹한에 밖으로 내쫓기는 날들이 이어졌다. 젖은 옷이 살갗에 얼어붙어 떼려고 하면 피부가 뜯겨 나갔다.광기 어린 유민준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낮이면 유하령을 도와 그녀를 유린하고 밤이면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며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그녀는 또다른 자신의 모습도 보았다.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유강후를 훔쳐보고 노트북에 그의 이름을 가득 쓰고,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유씨 저택의 대나무 숲에 파묻는 모습이었다.너무 춥고 고통스러운 그 기나긴 나날을 그녀는 하수구의 쥐처럼 연명하며 살았다.그러던 어느 날, 유강후가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아프면 울고 싫으면 거절하고 괴롭히는 자에게는 백배 천배로 갚아주라고 말했다.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없었고, 유강후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듯했지만 나은별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그녀가 임신했다가 유산하는 모습, 나은별과 바꾸기 위해 끌려가는 장면도
그녀가 자리에 앉기 바쁘게 한국계 여성 손님 세 명이 들어왔다. 구석진 창가에 앉은 온다연을 발견하지 못한 세 사람은 거침없이 뒷담화를 하기 시작했다.“이상하네. 유강후의 친부가 오지 않았어. 강 대표님이 이혼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장인어른 생신날에 사위가 왜 오지 않았을까? 이건 좀 말이 안 되는데.”“내가 국내에서 생활한 기간이 길어서 그에 관해 들은 바가 있어.”“어떻게 된 건지 어서 말해봐.”“유강후의 부친은 H국에서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쥔 고위급 정계 인사이고 유강후의 친형도 정계에 몸담고 있었는데, 3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외진 지역으로 발령 났고, 직급이 말단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낮아졌대.”“그리고 그 형에게 딸이 한 명 있는데,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한쪽 다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갇혀서 지금까지도 출소하지 못하고 있대.”“어떻게 그런 일이... 아버지가 그렇게 큰 권력을 가졌는데, 왜 아들과 손녀를 구하지 않지?”“그건 모르는 소리야. 듣기로는, 유강후가 친형과의 갈등 때문에 뒤에서 훼방을 놓았고, 아주 큰 힘을 들여서 부친의 권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게 만들었대.”“쯧쯧, 진짜 잔인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뒤에서 유강후를 ‘살아있는 저승사자’라고 부르나 봐. 자기 친형도 봐주지 않을 정도이니.”“또 하나 있어. 유강후는 경원시에 있을 때 약혼녀가 있었어. 나은별이라고, 나씨 가문의 따님이었지. 그때 사람들은 둘이 반드시 결혼할 거라 생각했는데 유강후가 모두의 예상을 깨버렸어. 집에 얹혀살던 여자에게 홀딱 빠져 나은별과 파혼하고 두 가문의 협력 관계마저 무너뜨려 버렸어.”“그 얘기는 나도 들었어. 그 여자는 그 집 양딸이었고 유강후를 아저씨라고 불렀다는데, 어떻게 두 사람이 그런 사이가 됐는지 몰라.”“어머, 대박 사건! 자세히 말해봐...”그들은 최대한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지만 공간이 작다 보니 한 글자도 빠짐없이 온다연의 귀에 들어왔다.그녀는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그 시각 유강후는 로운의 보고 사항을 듣고 있어 그녀를 쫓아가지 못했다.차에 올라서야 온다연의 분노를 알아챈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래요? 요즘 따라 이상하게 화를 자주 내네요?”온다연은 지난 며칠 동안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툭하면 화가 났고 그럴 때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아니나 다를까 이때도 온다연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나중에 우리의 아이한테도 이렇게 대한다면 정말 화날 것 같아요.”유강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히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딸이라면 애지중지 키우는 게 맞지만, 아들이라면 우림처럼 키울 거예요.”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러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기분이 썩 풀리지는 않았다.마음속에 남은 찝찝함 때문에 그녀는 유강후에게서 내려와 차 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러자 유강후가 속삭였다.“생각해 봐요. 우리의 아이는 강씨 가문과 진씨 가문을 책임져야 해요. 어쩌면 유씨 가문까지 물려받을 텐데 현실적으로 밝게 자라는 건 불가능해요. 부모로서 보통 아이처럼 행복하게 자라길 누구보다 바라지만 이런 가문에서 태어나는 순간 사명감을 가져야 해요. 어려서부터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죠.”온다연은 괴로웠다.하지만 유강후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고 그 역시 똑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봐 걱정되었다.온다연은 나지막이 물었다.“강후 씨도 이렇게 자란 거예요?”그는 무덤덤하게 답했다.“비슷했죠. 엄마랑 함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두 시간밖에 없었어요. 때로는 반년 동안 얼굴을 못 볼 때도 많았어요. 열 살 이후에 특수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고 그때부터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어요. 그런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진 거죠.”마음이 괴로웠던 온다연은 그의 손을 잡았다.“미안해요. 화를 내면 안 됐던 건데...”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
실제로 온다연이 서 있는 곳은 에어컨 통풍구 바로 맞은편이었다.온다연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 연예인은 갑자기 선글라스를 벗더니 이곳을 멀리서 바라봤다.유강후는 싸늘한 시선으로 출구를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시끄러우니까 커튼 닫아.”곧 커튼이 닫히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환호성도 밖으로 나가며 점점 사라졌다.환호성이 완전이 사라졌을 때, 이권이 뛰어 들어와서 우림의 비행기가 착륙했다고 말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가요. 우림이가 도착한 것 같네요.”그들이 막 일어났을 때 강양호는 이미 문을 나섰다.“드디어 우리 손자가 왔네. 어찌나 보고 싶던지.”온다연은 나지막이 속삭였다.“할아버지는 아이를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우리가 빨리 아이를 갖길 바랄 거예요. 그래서 우림이를 유독 더 아끼고 친손주처럼 생각하는 거죠.”출구는 바로 휴게실 밖에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보기만 해도 정예로운 일행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로운이었고 그는 우림의 손을 잡고 있었다.멀리서 유강후를 발견한 우림은 로운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달려왔다.유강후 앞에 오자마자 ‘아빠’라고 부르더니 강양호를 보고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할아버지.”강양호는 기쁨에 겨워 허리를 굽히더니 아이를 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우리 손자 왔어? 얼른 할아버지랑 집 가자. 할아버지가 우림이 주려고 선물을 잔뜩 준비했어.”우림은 유강후를 힐끗 쳐다보고선 곧바로 시선을 도려 옆에 있는 온다연에게 머물렀다.“엄마.”온다연은 아이의 얼굴을 꼬집으며 말했다.“얼른 내려와. 할아버지 이제 연세 있으셔서 오래 못 안아.”우림은 온다연을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엄마라고 불렀고 아무리 바로잡고 고치려도 해도 바뀌지 않았다.마치 어려서부터 온다연에게 의존감이 있는 듯 강향호의 품에서 바로 내려와 온다연을 향해 팔을 뻗었다.“엄마. 안아줘요.”온다연이 안아주자 우림은 그녀의
물론 온다연도 예쁜 편이지만 이 세상에는 예쁜 여자가 너무나 많다. 게다가 유강후의 외모, 재산, 권력으로 봤을 때 그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다.솔직히 말해서 온다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은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유는 없어요. 그냥 유나 씨면 돼요.”역시나 아무도 온다연을 대체할 수 없었다.운명의 실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엮여 있었고 그들은 평생 얽히게 될 운명이었다.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조용히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한참 후에야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H국에는 언제쯤 갈 거예요?”“날씨가 좀 시원해지면 갈까요? 경원은 여름보다 가을이 더 예뻐요.”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원을 그리며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혜린의 아이가 너무 귀여워요. 안고 있으면 폭신하고 볼살도 가득해서...”그녀는 어제 아이를 더 오래 껴안지 못한 게 아쉬운 듯 유강후의 아랫배를 쓰다듬더니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우리도 아이가 있으면 좋을텐데...”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생길 거예요.”유강후는 그 꿈을 기억했고 곧 아이가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생겼다.이때 온다연이 말했다.“꿈에 종종 아이가 나타나는데 왜 자기를 버렸냐며 저한테 물어봐요. 꿈이라서 얼굴조차 선명하게 보지 못하니까 마음이 너무 괴로웠어요.”“그런데 최근에는 꿈속에서 아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남자 아이였는데 강후 씨랑 많이 닮았어요.”“예전에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예요.”유강후의 눈에는 고통이 스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의 손을 꽉 감쌌다.이곳은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공항 입구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이 입구에 모여들어 좁은 통로를 막고 있었다.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곧 기사가 돌아왔다.“대표님, 잠시 후 연예인 한 명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
다음 날 새벽, 유강후는 공항으로 떠나려고 했다.인기척을 느낀 온다연은 잠결에 옷을 움켜쥐며 말했다.“왜 안 깨웠어요?”유강후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너무 깊이 잠든 것 같아서 안 깨웠어요. 혼자 가도 되니까 더 자요.”확실히 지난 이틀 동안 잠이 늘었다. 어제 저녁에는 야식도 먹지 않고 집에 오자마자 잠들었다.유강후는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온다연을 보며 며칠간 너무 무리했다는 생각에 어젯밤에는 그녀를 껴안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공항이랑 가까워요.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이미 집에 돌아왔을걸요?”온다연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십 분만 기다려요.”그녀는 캐주얼한 옷을 갈아입고선 가볍게 화장을 한 후 10분 만에 준비를 마쳤다.밖으로 나가보니 강양호가 이미 차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우림이는 아직 애잖아요. 할아버지가 직접 마중 가실 필요는 없어요.”강양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말투가 그게 뭐니? 내가 우리 증손자 데리러 가겠다는 데 불만 있어?”“그게 아니라 아직 6시밖에 안 된 이른 시간이잖아요. 그냥 편히 집에서 쉬세요. 이번에는 우림이도 오래 있다가 갈 거니까 충분히 같이 있을 수 있어요.”강양호는 심기가 불편했다.“우리 집안 독자인데 당연히 직접 마중가야지. 너희가 아이를 여러 명 낳았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하겠니?”유강후는 인내심 있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지금 적극적으로 임신 준비 중이잖아요.”강양호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생일에 내 친구들도 많이 올 거다. 다들 자식과 손주가 있고 증손자까지 여러 명이란다. 나만 우림이 하나잖니.”“내 체면은 우림이가 받쳐주는 거야. 넌 믿을 구석이 없구나.”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속에 숨긴 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온다연은 단번에 강양호가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하는 걸 알 수 있었다.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서둘러 뒤에 있는 차로 걸어갔다.차량 행렬이 빠르게 저택을 빠
얼마 후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강후 씨, 이 팔찌를 엄청 좋아하네요?”온다연은 이 팔찌에 달린 호박석이 그녀가 잃어버렸던 것과 똑같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처음에는 유강후가 팔찌에 달린 호박석 가져갔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그가 다시 구슬을 꿰어주고 나서야 이 호박석은 처음부터 두 조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온다연은 나지막이 물었다.“우리 커플템이었어요? 똑같아서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어요.”유강후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스치고 지나갔다.“우리한테도 아이가 있었다면...”온다연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아이가 있었다고요?”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에 있는 작은 구슬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를 좋아해요?”“당연하죠. 살이 통통하게 오른 귀여운 아이를 볼 때마다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유강후는 다시 자신의 어깨에 기대라며 손짓하고선 조용히 말했다.“곧 어르신 생신이잖아요. 내일 우림이가 온다는데 같이 마중 나갈래요?”온다연이 답했다.“좋아요.”온다연은 그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함을 느꼈다. 아이를 보자마자 온다연은 그녀와 아이 사이에 끊을 수 없다는 관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처음에는 유강후의 친아들인 줄 알고 기쁘면서도 괴로웠으나 나중에 단지 절친에게 부탁받은 고아라는 걸 알고선 몹시 아쉽고 슬펐다.그녀는 착하고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참 안타까웠다.이를 생각하던 온다연은 한숨을 내쉬었다.“보고 싶네요. 양씨 가문에 간 지도 꽤 됐고 로운 씨가 제사까지 지내게 했으니 자기가 강후 씨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똑똑한데 모를 리가 없잖아요.”유강후가 답했다.“보통 아이와 달리 우림이는 IQ가 180을 넘어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해도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깊이 생각할 수는 없을 거예요.”온다연은 멍을 때리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나중에 양씨 가문으로 돌아갈까요?”유강후는 단호했다.“당연하죠. 전 우림이가 소유해야 할 모든 것을 되찾도록
생리가 끝난 지 이틀밖에 안 됐으니 임신일 리가 없다.유강후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실망하는 듯한 눈빛을 드러냈다.잠시 후 임혜린이 아이와 함께 나왔는데 금방 씻어서인지 아이 특유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임동현은 밝은 노란색 잠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유난히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게다가 조금 졸린 상태였기에 손을 내밀어 도우미 이모가 건넨 젖병을 받아 들고는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보면 볼수록 아이가 너무 귀여웠던 온다연은 참지 못하고 어린 녀석을 품에 안고선 젖병을 잡아주었다.아이는 젖병을 빨며 동그랗고 커다란 눈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치명적인 귀여움이었다.온다연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뽀뽀하며 부드럽게 물었다.“졸려?”아무리 똑똑한들 결국에는 두 살 남짓의 아이였기에 그는 온다연을 잠시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온다연은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에 흠칫했다.문득 그녀에게도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온다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유강후를 바라봤다. 그도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에는 슬픔과 고통이 담겨있었다.온다연은 입을 벙끗했지만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아이가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엄마...”임혜린은 아이가 정말 잠들려고 하자 서둘러 그를 데려갔다.“졸리면 아무한테나 엄마라고 한다니까? 하여튼 나쁜 버릇이 들었어.”온다연은 아이를 선뜻 건네지 않았다.“잠깐 안고있어도 돼?”갑자기 뭔가 떠오른 임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유강후를 힐끗 쳐다봤다.평소 차갑기만 하던 유강후는 제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않고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애정과 사랑이 가득 담겼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것 같았다.임혜린은 순간 그가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절제절레 흔들며 침실로 돌아갔다.유강후는 그렇게 한참 동안 온다연을 바라봤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