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표정이 일그러졌다.“그래서 뭘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정 안 되면 지훈 씨에게 어울리는 좋은 여자 소개해 줄게요.”“제가 하령 언니와의 결혼은 망친 건 맞아요. 하지만 어쩌면 잘된 일이에요. 하령 언니는 결코 좋은 여자가 아니거든요. 아니, 유씨 가문에는 애초에 좋은 사람이 없어요.”염지훈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유강후도 유씨 가문이잖아. 좋은 사람이 아니란 얘기네?”온다연은 흠칫했다.스스로 줄곧 회피해온 질문을 언급하니 단숨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그쪽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할 말 없으면 먼저 갈게요.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그 말을 끝으로 온다연은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이때 염지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거시경제학과 미세경제학은 앞으로 내가 담당하게 될 거야. 네 학점이 나한테 달려있다는 뜻이지. 이런 태도는 얼마든지 학점에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걸음을 멈추고 빠르게 돌아선 온다연은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염지훈을 쳐다봤다.“미쳤어요? 왜 남의 학교에 와서 행패를 부려요.”염지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2점 더 깎아야겠네.”온다연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미친것도 정도가 있어야지.”염지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4점.”온다연은 그가 한 말의 진위를 판단하려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말없이 관찰했다.염지훈이 박현욱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고 경제학을 강의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하지만 그가 박현욱이라는걸 생각하면 화양대에서 강의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화양대와 경원대는 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에 많은 교수가 두 학교를 오가며 동시에 수업하곤 한다.염지훈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온다연의 모습이 그저 귀여웠고 맑고 투명한 눈망울은 그의 심장을 저격했다.한참을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염지훈은 온다연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앞으로 교수님이라고 불러. 존칭 사용하고. 지금처럼 소리 지르면서 예의 없는 행동하면 바로 학
염지훈은 가장 위에 뜬 메시지를 클릭했다. 확인해 보니 유강후가 다른 여자와 어느 저택을 드나드는 사진 두 장이 담겨있었다.사진 속 여자도 꽤 볼만했는데 섬세하고 부드러운 모습은 온다연과 매우 흡사했다.여자는 유강후의 팔짱을 꼈고 두 사람은 한없이 다정해 보였다.바로 어젯밤 유강후가 호텔 바에서 찍힌 사진이고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바로 사진 속 사람이다.염지훈의 눈에는 사악함이 번뜩였다.‘유강후, 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결혼했다는 사람이 이렇게 행동해? 밖에서 여러 여자를 만날 거면 온다연이랑 왜 결혼한 거야.’‘너 같은 인간은 다연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아.’유강후는 재빨리 타이핑했다.[계속 따라다니면서 지켜봐. 바람피운 것처럼 보이는 사진 위주로 찍어.]‘유강후, 나한테 온다연을 밀어준 게 너잖아? 나도 더 이상은 가만있지 않을 거야.’그 시각 화양대의 입구.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나무 그늘 아래 주차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싸늘하면서도 위엄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마침 수업 끝난 학생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고 다들 남자의 조각 같은 외모에 시선이 집중되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더욱 눈길을 끄는 건 남자의 손에 들린 유모차였는데 안에 있는 아기는 옹알이하며 춤을 췄고 남자는 참을성 있게 돌봐주고 있었다.“잘생긴 것도 모자라 가정적이야. 진짜 완벽하다.”“아기 봤어? 너무 귀여서 깨물고 싶어.”“내가 앞에서 시선을 끌 테니까 기회 봐서 납치해. 아이랑 남자 둘 다.”“뭔가 낯이 익은데... 매일 온다연을 기다리던 그 남자 아니야? 아이가 있네? 설마 결혼했나?”“말도 안 돼. 온다연이랑 낳은 아이라고?”“그건 아니지. 아저씨라고 부르던데? 두 사람 아이일 리가 없잖아.”...온다연은 건물을 나오자마자 입구에서 아이와 함께 기다리고 있는 유강후를 발견했다.처음에는 잠시 놀랐지만 이내 마음이 부드러워졌다.동의 없이 결석 신청하고 학교를 못 가게 막는 유강후와 끝까지 싸우고 싶었지만 아이를 본 순간 그런
유강후는 아이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온다연은 끌어안았다.“작업실로 갈까? 그림 그릴 때 옆에 있어 줄게.”이때 조용하던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온다연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디 불편한 것 같은데요? 제가 안을게요.”장화연은 곧바로 유강후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마지못해 한숨을 내쉰 장화연은 아이를 토닥이며 태연하게 말했다.“아마 배고파서 우는 걸 수도 있어요. 분유 먹은 지 세 시간이 지났거든요. 사모님과 도련님은 작업실로 가세요. 저는 아이랑 같이 먼저 집으로 가보겠습니다.”온다연은 아이의 가냘픈 울음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몹시 괴로웠고 아이를 안기 위해 그의 품에서 안간힘을 썼다.하지만 허리를 잡힌 탓에 아무리 움직여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온다연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아저씨, 이거 놔요. 아이가 울고 있잖아요.”유강후는 장화연에게 눈빛을 보내고선 갑자기 차 문을 열더니 온다연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그 후 곧바로 시동이 걸렸고 온다연은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저씨, 왜 계속 다가가지 못하게 막아요? 강씨 가문의 아이라서 이러는 거예요?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라고요.”유강후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스쳐 갔다.“아이도 얼른 밥 먹어야지. 날씨가 쌀쌀해서 감기 걸릴까 봐 장 집사랑 먼저 집으로 가라고 한 거야.”온다연은 믿지 않은 듯 울먹이며 말했다.“우리의 아이인데 왜 이렇게 싫어해요? 엄마로서 아이를 안는 게 잘못된 행동은 아니잖아요. 왜 매번 뽀뽀하려고 할 때마다 막는 거냐고요.”그녀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유강후의 가슴에 꽂혔다.두 사람의 아이가 살아있다면 왜 굳이 모자를 갈라놓겠는가.“싫어할 리가 없잖아. 나중에 강씨 가문을 책임져야 할 아이라서 이렇게 크는 게 맞아. 다들 이렇게 자랐어. 앞으로 막중한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데 감정에 쉽게 휩쓸리게 키워서는 안 돼. 둘째가 태어나면 우리가 직접 키우자. 응?”온다연은 괴로운
“1등.”“어제 점심에 지도 교수님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전공과 이번에 1등했대. 화양대에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재학 중인지 알지? 그중에서 우리 다연이가 1등 했어.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 넌 대단한 사람이야.”“정말 1등이에요?”유강후는 진지하게 답했다.“이런 걸 굳이 거짓말할 필요가 없잖아? 그리고 네가 1등인지 꼴찌인지 내가 신경 쓸 것 같아?”온다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유강후의 말이 맞다. 사실 성적은 그닥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온다연이 강씨 가문의 장부를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전문 지식을 습득하면 그만이었다.하지만 모비크의 일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모비크님은 아저씨가 모셔 온 게 아니죠?”유강후는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굳이 왜 모셔 와. 몸값만 해도 200억을 넘는 분이야. 네가 유명한 화가가 되는 걸 바라는 것도 아닌데 그 돈을 쓸 리가 없잖아.”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난 다연이가 평생 내 곁에서 나만 바라보고 아무것도 할 줄 몰랐으면 좋겠어. 정말 내가 모셔 왔을까?”온다연은 그 말을 믿었다.유강후는 그녀가 어떤 기술을 갖게 되는 걸 원치않았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단지 그에게 의지하여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다만 강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전문 지식과 관리능력을 갖춰야 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온다연은 한숨을 내쉬며 차가 떠나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고선 화실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어두운 눈빛으로 가볍게 말했다.“가요. 아마 화실에서 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그 시각 유화실.염지훈은 눈앞의 유화를 보며 넋을 잃었다.그의 어머니인 박연화는 명문 집안의 아기씨로 어릴 때부터 문명원과 절친한 친구였다. 문명원이 H 국에 온 것을 알고선 반드시 문명원을 집으로 초대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그래서 이 유화실에 오게 되었고 우연히 그림 한 폭을 마주하게 되었다.그림 속의 소녀는 온다연과 매우 닮았는데 문명원
세상에 비슷한 사람이 존재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이 그림은 도플갱어를 넘어설 만큼 너무 닮았다.문명원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정말 사려고? 훌륭한 그림인 건 맞지만 사실 이건 복제품이야. 원본은 진씨 가문에 있어.”“솔직히 말하면 소장 가치가 없는 그림이라 구매를 권장하고 싶지 않아. 작가가 본인만의 사랑을 담은 작품이거든.”“저랑 인연이 있는 그림인 것 같네요. 얼마를 원하는지 한번 여쭤볼 수 있을까요?”“처음에 정한 타깃은 7,000만 원이야. 그런데 이 그림은 아마 아무도...”“제가 7억에 살게요.”염지훈은 그의 말을 잘랐다.“7억에 산다고 작가한테 얘기해주세요. 전시든 경매든 필요 없으니까 바로 제 손에 들어오게끔요.”“7억?”문명원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하지만...”그러자 염지훈은 비서에게 수표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 위에 숫자를 적은 후 문명원에게 건넸다.“받으시죠.”문명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일단 그림 작가한테 한번 물어볼게.”“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작가님이 저한테 팔 거라고 믿어요. 일단 이 수표는 갖고 계세요. 금액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면 이 돈은 제가 전액 지불한 것으로 간주하고, 만에 하나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면 계약금으로 생각해 주세요.”문명원이 거절하기도 전에 염지훈이 말을 이었다.“바쁘신 것 같아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저녁 잊지 말고 꼭 오십시오. 엄마가 신국을 떠난 지 꽤 되어 옛친구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습니다.”“알겠네.”염지훈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다연과 유강후가 화실에 도착했다.모비크는 그들에게 매우 열정적이었다.수염이 덥수룩한 이 예술가는 20대에 이미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고 한때 유강후 어머니의 개인 과외 선생이기도 했다.지금은 유강후의 덕분에 화양대의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니 유강후에게 친절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수년 전 유강후 어머니와의 추억을 언급하며 거리감을 좁혔다.유강후도 그를 매우 존경했다. 서로 이야기를 주
모비크가 답했다.“제 친구의 지인이 사 갔습니다. 그림 속 인물과는 인연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7억짜리 수표를 주며 꼭 이 작품을 사고 싶다고 하더군요. 제 친구가 작가님한테 연락했고 7억에 이 그림을 팔겠다는 의사를 밝히셨어요. 그래서 이제 이 작품 그분 소유입니다.”유강후는 그림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분한테 연락해서 이 그림을 팔 의향은 없는지 여쭤봐 주시겠어요? 얼마든 상관없습니다.”“그건 곤란할 것 같네요. 그 신사분도 돈이 부족한 사람 같지는 않았거든요.”작품에 꽂힌 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돈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어요. 일단 연락해 주세요.”모비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답했다.“알겠습니다.”온다연의 유화 수업은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유강후는 그림에 집중하는 온다연을 바라보며 묵묵히 곁을 지켰다.그러던 그때 이권에게 전화가 걸려 왔고 유강후는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통화가 연결되니 핸드폰 너머로 이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김원도 그 미친X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대범한지 윤 비서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서 납치했습니다. 저희가 사람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윤 비서는 진작에...”유강후의 말투는 싸늘했다.“윤 비서를 온다연으로 확신했나 보네?”이권이 답했다.“전에는 그런 낌새가 없었는데 갑자기 납치한 걸 보면 윤 비서를 다연 씨로 착각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그리고 저희 중에 스파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원도가 어르신이 시청 부근에 남긴 한옥 저택에 대해 알고 있더라고요. 심지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다연 씨라고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핸드폰을 움켜쥐며 사악한 눈빛을 드러냈다.“내가 한옥에 살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러니까 철저하게 조사해 봐. 윤 비서한테는 돈 더 챙겨줘. 대신 연기를 완벽하게 해야 돼.”이권은 쓴웃음을 지었다.“윤 비서가 이번 일로 많이 놀랐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안 한다고 하네요.”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심미진은 버럭 화를 냈다.“온준용, 미쳤어? 이거 놔.”온준용은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네 언니 있을 땐 날 꼬시지 못해 안달이었잖아. 나랑 자고 싶어서 언니 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사람이 웬 내숭이야? 이제는 사모님 되어서 내가 안중에도 없는 건가?”“유자성? 그 사람 너보다 열 살이나 많다며? 만족할 리가 없을 텐데?”심미진은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예전 일은 뭐 하러 꺼내. 본론부터 얘기할게.”과거에 그나마 볼만하던 온준용도 세월의 풍파를 겪고 나니 폭삭 늙었다.50도 안 되는 나이에 벌써 백발이 가득한데 심미진이 흔들릴 리가 없다.온준용은 본인과 달리 고급 명품을 입고 손목에 여덟 자리 금액의 고가 시계를 찬 심미진을 보며 욕망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왜? 이제는 내가 싫어? 예전에 침대에서 울부짖을 땐 이런 반응이 아니었잖아.”그렇게 말하며 온준용은 다시 심미진을 만지기 시작했다.그럭저럭 잘나가던 얼굴에 주름이 많이 지고 옷차림도 형편없는 그를 바라보며 심미진은 역겹다는 듯이 손을 내리치며 말했다.“예전 일은 이제 그만 언급해. 당신이 형부라는 걸 잊지 마. 아무래도 거리를 좀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온준용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거리? 무슨 거리? 너 어차피 유자성한테 만족 못 하잖아. 내가 그걸 해준다니까?”심미진은 짜증을 내며 그를 밀었다.“이 집 가질 거야 말 거야.”“곧 철거 예정인데 배상금이 경원에서 제일 비싼 금액이래. 심지어 새집 두 채까지 더 준다고 하니까 적어도 40억을 버는 거지.”온준용의 눈에는 탐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X발. 이렇게 돈 되는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돌아왔지.”“사람 인기척도 없는 구석탱이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냈는지 알아? 그래도 경원이 최고네.”심미진은 비꼬는듯한 웃음을 지었다.“확실히 값어치가 있는 집인 건 맞아. 하지만 온다연 그 X이 지금 가진 것에 비하면 멀었어.”온다연을 언급하자 온준용의 탐욕이 더욱 뚜렷해졌다.“얼마 전에 봤는데 유강후가 옆에 찰싹
“유강후가 경원시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부동산을 온전히 온다연 명의로 돌려놨다고?”온준용은 그 말을 듣자마자 탐욕스러운 눈빛을 드러냈다.“걔는 지금 집에서 매일 진수성찬에, 금은보화에 고급 차까지 타고 다닌다는데, 나는 매일 개처럼 살고 있어. 이제 슬슬 찾아가서 뭘 좀 받아내야겠군!”“그리고 내 아들, 그러니까 다연이가 남동생도 책임져야지. 그 집들 전부 다 남동생 건데, 여자애 주제에 자기 동생을 안 도와? 이게 말이 돼?”심미진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 아들이 아직 살아있긴 해?”온준용이 침을 뱉으며 말했다.“당연히 살아 있지. 멀쩡하게 잘 살고 있어. 그때 바다에서 사고 난 건 그냥 우연이었어. 내가 죽은 척하지 않았으면 진씨 가문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고.”그는 지난 몇 년 동안의 비참한 생활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었다.“진수현 그 미친놈, 자기 딸이 죽는 걸 직접 눈으로 봤고, 화장까지 지켜봤으면서도 아직도 딸이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지금까지도 계속 사람을 찾아다닌다니까. 진짜 미친놈이지. 벌써 20년이나 지났는데도 포기하지 않다니. 다행히 내가 눈치 빠르게 움직여서 배 사고로 죽은 척한 거야. 아니었으면 벌써 들통났을 거라고!”심미진이 경고하듯 말했다.“조심해. 진씨 가문한테 들키면 끝장나는 거야. 진수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그 수단이 어마어마하잖아. 네가 그 사람 딸을 바꿔치기한 걸 알면 너는 뼛조차 못 찾을걸!”온준용은 여유롭게 말했다.“나는 그냥 돈 받고 일한 것뿐인데 뭐가 대수야? 게다가 동남아시아 전체가 그놈 딸이 자기 손에 죽었다고 알고 있어. 무서울 게 뭐야?”“게다가 지금 그놈이 주요하게 수색하는 곳은 아시아가 아니야. 북미 쪽에 집중하고 있어. 안심해.”“오히려 문제는 온다연이지. 이제 그 애한테서 돈 좀 받아내야지. 아버지인 나한테 효도할 때가 된 것 같아!”심미진이 덧붙였다.“첫째, 그 집들부터 내놓게 해야 하고, 둘째, 유강후가 준 것들도 전부 우리한테 넘겨야 해. 오늘 그 애를
“부인이 지금 임신 3주차인데, 아직은 배아 상태라 약 1cm에 불과하고 상태가 좀 불안정합니다.”온다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유강후는 너무 큰 기쁨에 심장이 마구 뛰고 정신이 혼미했다.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온다연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최소 1~2년은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고작 3~4개월 만에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그런데 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지난번 온다연의 유산 사건이 기억에 생생한 유강후는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건 무슨 뜻이죠?”임수진이 약간 당황하며 설명했다.“대표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조금만 상태가 나빠져도 유산 징후가 나타날 수 있어요.”“별문제는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배아 발육 상태가 양호하고 태아 심음도 정상입니다.”“쌍둥이라고요?”유강후는 귀를 의심했다.그는 문득 곽혜진이 준 약이 생각났다. 자기도 쌍둥이였다는 사실과 겹치자, 다시 기분이 황홀해져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그는 임수진의 손목을 꽉 잡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박사님, 그게 정말입니까?”임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손을 좀 놓고 얘기해요.”유강후는 급히 손을 풀어주었다. 흥분해서 목소리까지 떨리기는 평생 처음이다.“죄송합니다, 박사님. 정말 쌍둥이예요?”임수진이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정말이죠. 제가 30년간 의사로 일하면서 몇 번 실수한 적은 있지만, 쌍둥이를 잘못 판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유강후는 너무 흥분해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애써 진정하고 한참 후에야 나지막이 말했다.“감사합니다, 박사님. 제 아내는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까요?”임수진은 아직도 혼수 상태인 온다연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몸에 특별한 이상은 없어서 지금쯤 깨어나야 하는데...”“제 아내는 이전에 최면 당한 적이 있는데, 그로 인해 과거의 대부분 기
온다연은 얼굴이 창백했고, 몸이 물에서 막 건져낸 것처럼 식은땀에 젖어있었다.강씨 가문의 새 안주인임을 즉각 알아본 그들은 삽시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방금 그들이 한 뒷담화를 온다연이 다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온다연이 극심한 통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의사, 의사를 불러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그녀는 길고 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경원시에 사는 동안 겪었던 고난들이 오래된 영화처럼 기억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길고 아팠다.최면 당한 이후로 종종 나타나는 신경성 통증보다는 마음속 고통이 훨씬 더 컸다.그녀가 양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모습, 평생 그녀를 지켜주던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수단으로 괴롭힘당하는 모습, 결국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이 영화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그녀가 유하령에게 짓밟히는 모습도 보였다. 수도 없는 모욕을 당하며 찜통 같은 물탱크에 갇히고, 영하 20℃ 이하의 혹한에 밖으로 내쫓기는 날들이 이어졌다. 젖은 옷이 살갗에 얼어붙어 떼려고 하면 피부가 뜯겨 나갔다.광기 어린 유민준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낮이면 유하령을 도와 그녀를 유린하고 밤이면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며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그녀는 또다른 자신의 모습도 보았다.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유강후를 훔쳐보고 노트북에 그의 이름을 가득 쓰고,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유씨 저택의 대나무 숲에 파묻는 모습이었다.너무 춥고 고통스러운 그 기나긴 나날을 그녀는 하수구의 쥐처럼 연명하며 살았다.그러던 어느 날, 유강후가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아프면 울고 싫으면 거절하고 괴롭히는 자에게는 백배 천배로 갚아주라고 말했다.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없었고, 유강후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듯했지만 나은별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그녀가 임신했다가 유산하는 모습, 나은별과 바꾸기 위해 끌려가는 장면도
그녀가 자리에 앉기 바쁘게 한국계 여성 손님 세 명이 들어왔다. 구석진 창가에 앉은 온다연을 발견하지 못한 세 사람은 거침없이 뒷담화를 하기 시작했다.“이상하네. 유강후의 친부가 오지 않았어. 강 대표님이 이혼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장인어른 생신날에 사위가 왜 오지 않았을까? 이건 좀 말이 안 되는데.”“내가 국내에서 생활한 기간이 길어서 그에 관해 들은 바가 있어.”“어떻게 된 건지 어서 말해봐.”“유강후의 부친은 H국에서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쥔 고위급 정계 인사이고 유강후의 친형도 정계에 몸담고 있었는데, 3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외진 지역으로 발령 났고, 직급이 말단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낮아졌대.”“그리고 그 형에게 딸이 한 명 있는데,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한쪽 다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갇혀서 지금까지도 출소하지 못하고 있대.”“어떻게 그런 일이... 아버지가 그렇게 큰 권력을 가졌는데, 왜 아들과 손녀를 구하지 않지?”“그건 모르는 소리야. 듣기로는, 유강후가 친형과의 갈등 때문에 뒤에서 훼방을 놓았고, 아주 큰 힘을 들여서 부친의 권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게 만들었대.”“쯧쯧, 진짜 잔인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뒤에서 유강후를 ‘살아있는 저승사자’라고 부르나 봐. 자기 친형도 봐주지 않을 정도이니.”“또 하나 있어. 유강후는 경원시에 있을 때 약혼녀가 있었어. 나은별이라고, 나씨 가문의 따님이었지. 그때 사람들은 둘이 반드시 결혼할 거라 생각했는데 유강후가 모두의 예상을 깨버렸어. 집에 얹혀살던 여자에게 홀딱 빠져 나은별과 파혼하고 두 가문의 협력 관계마저 무너뜨려 버렸어.”“그 얘기는 나도 들었어. 그 여자는 그 집 양딸이었고 유강후를 아저씨라고 불렀다는데, 어떻게 두 사람이 그런 사이가 됐는지 몰라.”“어머, 대박 사건! 자세히 말해봐...”그들은 최대한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지만 공간이 작다 보니 한 글자도 빠짐없이 온다연의 귀에 들어왔다.그녀는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그 시각 유강후는 로운의 보고 사항을 듣고 있어 그녀를 쫓아가지 못했다.차에 올라서야 온다연의 분노를 알아챈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래요? 요즘 따라 이상하게 화를 자주 내네요?”온다연은 지난 며칠 동안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툭하면 화가 났고 그럴 때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아니나 다를까 이때도 온다연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나중에 우리의 아이한테도 이렇게 대한다면 정말 화날 것 같아요.”유강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히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딸이라면 애지중지 키우는 게 맞지만, 아들이라면 우림처럼 키울 거예요.”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러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기분이 썩 풀리지는 않았다.마음속에 남은 찝찝함 때문에 그녀는 유강후에게서 내려와 차 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러자 유강후가 속삭였다.“생각해 봐요. 우리의 아이는 강씨 가문과 진씨 가문을 책임져야 해요. 어쩌면 유씨 가문까지 물려받을 텐데 현실적으로 밝게 자라는 건 불가능해요. 부모로서 보통 아이처럼 행복하게 자라길 누구보다 바라지만 이런 가문에서 태어나는 순간 사명감을 가져야 해요. 어려서부터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죠.”온다연은 괴로웠다.하지만 유강후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고 그 역시 똑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봐 걱정되었다.온다연은 나지막이 물었다.“강후 씨도 이렇게 자란 거예요?”그는 무덤덤하게 답했다.“비슷했죠. 엄마랑 함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두 시간밖에 없었어요. 때로는 반년 동안 얼굴을 못 볼 때도 많았어요. 열 살 이후에 특수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고 그때부터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어요. 그런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진 거죠.”마음이 괴로웠던 온다연은 그의 손을 잡았다.“미안해요. 화를 내면 안 됐던 건데...”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
실제로 온다연이 서 있는 곳은 에어컨 통풍구 바로 맞은편이었다.온다연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 연예인은 갑자기 선글라스를 벗더니 이곳을 멀리서 바라봤다.유강후는 싸늘한 시선으로 출구를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시끄러우니까 커튼 닫아.”곧 커튼이 닫히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환호성도 밖으로 나가며 점점 사라졌다.환호성이 완전이 사라졌을 때, 이권이 뛰어 들어와서 우림의 비행기가 착륙했다고 말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가요. 우림이가 도착한 것 같네요.”그들이 막 일어났을 때 강양호는 이미 문을 나섰다.“드디어 우리 손자가 왔네. 어찌나 보고 싶던지.”온다연은 나지막이 속삭였다.“할아버지는 아이를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우리가 빨리 아이를 갖길 바랄 거예요. 그래서 우림이를 유독 더 아끼고 친손주처럼 생각하는 거죠.”출구는 바로 휴게실 밖에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보기만 해도 정예로운 일행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로운이었고 그는 우림의 손을 잡고 있었다.멀리서 유강후를 발견한 우림은 로운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달려왔다.유강후 앞에 오자마자 ‘아빠’라고 부르더니 강양호를 보고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할아버지.”강양호는 기쁨에 겨워 허리를 굽히더니 아이를 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우리 손자 왔어? 얼른 할아버지랑 집 가자. 할아버지가 우림이 주려고 선물을 잔뜩 준비했어.”우림은 유강후를 힐끗 쳐다보고선 곧바로 시선을 도려 옆에 있는 온다연에게 머물렀다.“엄마.”온다연은 아이의 얼굴을 꼬집으며 말했다.“얼른 내려와. 할아버지 이제 연세 있으셔서 오래 못 안아.”우림은 온다연을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엄마라고 불렀고 아무리 바로잡고 고치려도 해도 바뀌지 않았다.마치 어려서부터 온다연에게 의존감이 있는 듯 강향호의 품에서 바로 내려와 온다연을 향해 팔을 뻗었다.“엄마. 안아줘요.”온다연이 안아주자 우림은 그녀의
물론 온다연도 예쁜 편이지만 이 세상에는 예쁜 여자가 너무나 많다. 게다가 유강후의 외모, 재산, 권력으로 봤을 때 그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다.솔직히 말해서 온다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은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유는 없어요. 그냥 유나 씨면 돼요.”역시나 아무도 온다연을 대체할 수 없었다.운명의 실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엮여 있었고 그들은 평생 얽히게 될 운명이었다.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조용히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한참 후에야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H국에는 언제쯤 갈 거예요?”“날씨가 좀 시원해지면 갈까요? 경원은 여름보다 가을이 더 예뻐요.”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원을 그리며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혜린의 아이가 너무 귀여워요. 안고 있으면 폭신하고 볼살도 가득해서...”그녀는 어제 아이를 더 오래 껴안지 못한 게 아쉬운 듯 유강후의 아랫배를 쓰다듬더니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우리도 아이가 있으면 좋을텐데...”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생길 거예요.”유강후는 그 꿈을 기억했고 곧 아이가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생겼다.이때 온다연이 말했다.“꿈에 종종 아이가 나타나는데 왜 자기를 버렸냐며 저한테 물어봐요. 꿈이라서 얼굴조차 선명하게 보지 못하니까 마음이 너무 괴로웠어요.”“그런데 최근에는 꿈속에서 아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남자 아이였는데 강후 씨랑 많이 닮았어요.”“예전에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예요.”유강후의 눈에는 고통이 스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의 손을 꽉 감쌌다.이곳은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공항 입구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이 입구에 모여들어 좁은 통로를 막고 있었다.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곧 기사가 돌아왔다.“대표님, 잠시 후 연예인 한 명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
다음 날 새벽, 유강후는 공항으로 떠나려고 했다.인기척을 느낀 온다연은 잠결에 옷을 움켜쥐며 말했다.“왜 안 깨웠어요?”유강후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너무 깊이 잠든 것 같아서 안 깨웠어요. 혼자 가도 되니까 더 자요.”확실히 지난 이틀 동안 잠이 늘었다. 어제 저녁에는 야식도 먹지 않고 집에 오자마자 잠들었다.유강후는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온다연을 보며 며칠간 너무 무리했다는 생각에 어젯밤에는 그녀를 껴안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공항이랑 가까워요.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이미 집에 돌아왔을걸요?”온다연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십 분만 기다려요.”그녀는 캐주얼한 옷을 갈아입고선 가볍게 화장을 한 후 10분 만에 준비를 마쳤다.밖으로 나가보니 강양호가 이미 차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우림이는 아직 애잖아요. 할아버지가 직접 마중 가실 필요는 없어요.”강양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말투가 그게 뭐니? 내가 우리 증손자 데리러 가겠다는 데 불만 있어?”“그게 아니라 아직 6시밖에 안 된 이른 시간이잖아요. 그냥 편히 집에서 쉬세요. 이번에는 우림이도 오래 있다가 갈 거니까 충분히 같이 있을 수 있어요.”강양호는 심기가 불편했다.“우리 집안 독자인데 당연히 직접 마중가야지. 너희가 아이를 여러 명 낳았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하겠니?”유강후는 인내심 있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지금 적극적으로 임신 준비 중이잖아요.”강양호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생일에 내 친구들도 많이 올 거다. 다들 자식과 손주가 있고 증손자까지 여러 명이란다. 나만 우림이 하나잖니.”“내 체면은 우림이가 받쳐주는 거야. 넌 믿을 구석이 없구나.”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속에 숨긴 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온다연은 단번에 강양호가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하는 걸 알 수 있었다.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서둘러 뒤에 있는 차로 걸어갔다.차량 행렬이 빠르게 저택을 빠
얼마 후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강후 씨, 이 팔찌를 엄청 좋아하네요?”온다연은 이 팔찌에 달린 호박석이 그녀가 잃어버렸던 것과 똑같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처음에는 유강후가 팔찌에 달린 호박석 가져갔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그가 다시 구슬을 꿰어주고 나서야 이 호박석은 처음부터 두 조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온다연은 나지막이 물었다.“우리 커플템이었어요? 똑같아서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어요.”유강후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스치고 지나갔다.“우리한테도 아이가 있었다면...”온다연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아이가 있었다고요?”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에 있는 작은 구슬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를 좋아해요?”“당연하죠. 살이 통통하게 오른 귀여운 아이를 볼 때마다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유강후는 다시 자신의 어깨에 기대라며 손짓하고선 조용히 말했다.“곧 어르신 생신이잖아요. 내일 우림이가 온다는데 같이 마중 나갈래요?”온다연이 답했다.“좋아요.”온다연은 그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함을 느꼈다. 아이를 보자마자 온다연은 그녀와 아이 사이에 끊을 수 없다는 관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처음에는 유강후의 친아들인 줄 알고 기쁘면서도 괴로웠으나 나중에 단지 절친에게 부탁받은 고아라는 걸 알고선 몹시 아쉽고 슬펐다.그녀는 착하고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참 안타까웠다.이를 생각하던 온다연은 한숨을 내쉬었다.“보고 싶네요. 양씨 가문에 간 지도 꽤 됐고 로운 씨가 제사까지 지내게 했으니 자기가 강후 씨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똑똑한데 모를 리가 없잖아요.”유강후가 답했다.“보통 아이와 달리 우림이는 IQ가 180을 넘어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해도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깊이 생각할 수는 없을 거예요.”온다연은 멍을 때리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나중에 양씨 가문으로 돌아갈까요?”유강후는 단호했다.“당연하죠. 전 우림이가 소유해야 할 모든 것을 되찾도록
생리가 끝난 지 이틀밖에 안 됐으니 임신일 리가 없다.유강후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실망하는 듯한 눈빛을 드러냈다.잠시 후 임혜린이 아이와 함께 나왔는데 금방 씻어서인지 아이 특유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임동현은 밝은 노란색 잠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유난히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게다가 조금 졸린 상태였기에 손을 내밀어 도우미 이모가 건넨 젖병을 받아 들고는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보면 볼수록 아이가 너무 귀여웠던 온다연은 참지 못하고 어린 녀석을 품에 안고선 젖병을 잡아주었다.아이는 젖병을 빨며 동그랗고 커다란 눈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치명적인 귀여움이었다.온다연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뽀뽀하며 부드럽게 물었다.“졸려?”아무리 똑똑한들 결국에는 두 살 남짓의 아이였기에 그는 온다연을 잠시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온다연은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에 흠칫했다.문득 그녀에게도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온다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유강후를 바라봤다. 그도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에는 슬픔과 고통이 담겨있었다.온다연은 입을 벙끗했지만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아이가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엄마...”임혜린은 아이가 정말 잠들려고 하자 서둘러 그를 데려갔다.“졸리면 아무한테나 엄마라고 한다니까? 하여튼 나쁜 버릇이 들었어.”온다연은 아이를 선뜻 건네지 않았다.“잠깐 안고있어도 돼?”갑자기 뭔가 떠오른 임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유강후를 힐끗 쳐다봤다.평소 차갑기만 하던 유강후는 제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않고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애정과 사랑이 가득 담겼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것 같았다.임혜린은 순간 그가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절제절레 흔들며 침실로 돌아갔다.유강후는 그렇게 한참 동안 온다연을 바라봤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