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비슷한 사람이 존재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이 그림은 도플갱어를 넘어설 만큼 너무 닮았다.문명원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정말 사려고? 훌륭한 그림인 건 맞지만 사실 이건 복제품이야. 원본은 진씨 가문에 있어.”“솔직히 말하면 소장 가치가 없는 그림이라 구매를 권장하고 싶지 않아. 작가가 본인만의 사랑을 담은 작품이거든.”“저랑 인연이 있는 그림인 것 같네요. 얼마를 원하는지 한번 여쭤볼 수 있을까요?”“처음에 정한 타깃은 7,000만 원이야. 그런데 이 그림은 아마 아무도...”“제가 7억에 살게요.”염지훈은 그의 말을 잘랐다.“7억에 산다고 작가한테 얘기해주세요. 전시든 경매든 필요 없으니까 바로 제 손에 들어오게끔요.”“7억?”문명원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하지만...”그러자 염지훈은 비서에게 수표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 위에 숫자를 적은 후 문명원에게 건넸다.“받으시죠.”문명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일단 그림 작가한테 한번 물어볼게.”“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전 작가님이 저한테 팔 거라고 믿어요. 일단 이 수표는 갖고 계세요. 금액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면 이 돈은 제가 전액 지불한 것으로 간주하고, 만에 하나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면 계약금으로 생각해 주세요.”문명원이 거절하기도 전에 염지훈이 말을 이었다.“바쁘신 것 같아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저녁 잊지 말고 꼭 오십시오. 엄마가 신국을 떠난 지 꽤 되어 옛친구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습니다.”“알겠네.”염지훈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다연과 유강후가 화실에 도착했다.모비크는 그들에게 매우 열정적이었다.수염이 덥수룩한 이 예술가는 20대에 이미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고 한때 유강후 어머니의 개인 과외 선생이기도 했다.지금은 유강후의 덕분에 화양대의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니 유강후에게 친절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수년 전 유강후 어머니와의 추억을 언급하며 거리감을 좁혔다.유강후도 그를 매우 존경했다. 서로 이야기를 주
모비크가 답했다.“제 친구의 지인이 사 갔습니다. 그림 속 인물과는 인연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7억짜리 수표를 주며 꼭 이 작품을 사고 싶다고 하더군요. 제 친구가 작가님한테 연락했고 7억에 이 그림을 팔겠다는 의사를 밝히셨어요. 그래서 이제 이 작품 그분 소유입니다.”유강후는 그림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분한테 연락해서 이 그림을 팔 의향은 없는지 여쭤봐 주시겠어요? 얼마든 상관없습니다.”“그건 곤란할 것 같네요. 그 신사분도 돈이 부족한 사람 같지는 않았거든요.”작품에 꽂힌 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돈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어요. 일단 연락해 주세요.”모비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답했다.“알겠습니다.”온다연의 유화 수업은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유강후는 그림에 집중하는 온다연을 바라보며 묵묵히 곁을 지켰다.그러던 그때 이권에게 전화가 걸려 왔고 유강후는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통화가 연결되니 핸드폰 너머로 이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김원도 그 미친X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대범한지 윤 비서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서 납치했습니다. 저희가 사람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윤 비서는 진작에...”유강후의 말투는 싸늘했다.“윤 비서를 온다연으로 확신했나 보네?”이권이 답했다.“전에는 그런 낌새가 없었는데 갑자기 납치한 걸 보면 윤 비서를 다연 씨로 착각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그리고 저희 중에 스파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원도가 어르신이 시청 부근에 남긴 한옥 저택에 대해 알고 있더라고요. 심지어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다연 씨라고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핸드폰을 움켜쥐며 사악한 눈빛을 드러냈다.“내가 한옥에 살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러니까 철저하게 조사해 봐. 윤 비서한테는 돈 더 챙겨줘. 대신 연기를 완벽하게 해야 돼.”이권은 쓴웃음을 지었다.“윤 비서가 이번 일로 많이 놀랐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안 한다고 하네요.”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심미진은 버럭 화를 냈다.“온준용, 미쳤어? 이거 놔.”온준용은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네 언니 있을 땐 날 꼬시지 못해 안달이었잖아. 나랑 자고 싶어서 언니 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사람이 웬 내숭이야? 이제는 사모님 되어서 내가 안중에도 없는 건가?”“유자성? 그 사람 너보다 열 살이나 많다며? 만족할 리가 없을 텐데?”심미진은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예전 일은 뭐 하러 꺼내. 본론부터 얘기할게.”과거에 그나마 볼만하던 온준용도 세월의 풍파를 겪고 나니 폭삭 늙었다.50도 안 되는 나이에 벌써 백발이 가득한데 심미진이 흔들릴 리가 없다.온준용은 본인과 달리 고급 명품을 입고 손목에 여덟 자리 금액의 고가 시계를 찬 심미진을 보며 욕망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왜? 이제는 내가 싫어? 예전에 침대에서 울부짖을 땐 이런 반응이 아니었잖아.”그렇게 말하며 온준용은 다시 심미진을 만지기 시작했다.그럭저럭 잘나가던 얼굴에 주름이 많이 지고 옷차림도 형편없는 그를 바라보며 심미진은 역겹다는 듯이 손을 내리치며 말했다.“예전 일은 이제 그만 언급해. 당신이 형부라는 걸 잊지 마. 아무래도 거리를 좀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온준용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거리? 무슨 거리? 너 어차피 유자성한테 만족 못 하잖아. 내가 그걸 해준다니까?”심미진은 짜증을 내며 그를 밀었다.“이 집 가질 거야 말 거야.”“곧 철거 예정인데 배상금이 경원에서 제일 비싼 금액이래. 심지어 새집 두 채까지 더 준다고 하니까 적어도 40억을 버는 거지.”온준용의 눈에는 탐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X발. 이렇게 돈 되는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돌아왔지.”“사람 인기척도 없는 구석탱이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지냈는지 알아? 그래도 경원이 최고네.”심미진은 비꼬는듯한 웃음을 지었다.“확실히 값어치가 있는 집인 건 맞아. 하지만 온다연 그 X이 지금 가진 것에 비하면 멀었어.”온다연을 언급하자 온준용의 탐욕이 더욱 뚜렷해졌다.“얼마 전에 봤는데 유강후가 옆에 찰싹
“유강후가 경원시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부동산을 온전히 온다연 명의로 돌려놨다고?”온준용은 그 말을 듣자마자 탐욕스러운 눈빛을 드러냈다.“걔는 지금 집에서 매일 진수성찬에, 금은보화에 고급 차까지 타고 다닌다는데, 나는 매일 개처럼 살고 있어. 이제 슬슬 찾아가서 뭘 좀 받아내야겠군!”“그리고 내 아들, 그러니까 다연이가 남동생도 책임져야지. 그 집들 전부 다 남동생 건데, 여자애 주제에 자기 동생을 안 도와? 이게 말이 돼?”심미진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 아들이 아직 살아있긴 해?”온준용이 침을 뱉으며 말했다.“당연히 살아 있지. 멀쩡하게 잘 살고 있어. 그때 바다에서 사고 난 건 그냥 우연이었어. 내가 죽은 척하지 않았으면 진씨 가문의 추적을 피할 수 없었다고.”그는 지난 몇 년 동안의 비참한 생활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었다.“진수현 그 미친놈, 자기 딸이 죽는 걸 직접 눈으로 봤고, 화장까지 지켜봤으면서도 아직도 딸이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지금까지도 계속 사람을 찾아다닌다니까. 진짜 미친놈이지. 벌써 20년이나 지났는데도 포기하지 않다니. 다행히 내가 눈치 빠르게 움직여서 배 사고로 죽은 척한 거야. 아니었으면 벌써 들통났을 거라고!”심미진이 경고하듯 말했다.“조심해. 진씨 가문한테 들키면 끝장나는 거야. 진수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그 수단이 어마어마하잖아. 네가 그 사람 딸을 바꿔치기한 걸 알면 너는 뼛조차 못 찾을걸!”온준용은 여유롭게 말했다.“나는 그냥 돈 받고 일한 것뿐인데 뭐가 대수야? 게다가 동남아시아 전체가 그놈 딸이 자기 손에 죽었다고 알고 있어. 무서울 게 뭐야?”“게다가 지금 그놈이 주요하게 수색하는 곳은 아시아가 아니야. 북미 쪽에 집중하고 있어. 안심해.”“오히려 문제는 온다연이지. 이제 그 애한테서 돈 좀 받아내야지. 아버지인 나한테 효도할 때가 된 것 같아!”심미진이 덧붙였다.“첫째, 그 집들부터 내놓게 해야 하고, 둘째, 유강후가 준 것들도 전부 우리한테 넘겨야 해. 오늘 그 애를
이전까지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유강후는 마치 이 약욕탕에 집착이라도 있는 것처럼, 올 때마다 반드시 그 물속에서 그녀를 쥐락펴락해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그런데 오늘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하지만 온다연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잠시 약욕을 마친 그녀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이 호텔의 요리사는 디저트를 정말 잘 만들었는데, 온다연이 올 때마다 새로운 메뉴를 내놓곤 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다만 오늘은 레스토랑이 굉장히 한산했다. 넓은 공간에 그녀와 다른 여자 한 명만이 식사 중이었다.레스토랑 매니저는 온다연의 신분을 알고 직접 디저트를 가져왔고, 그녀가 좋아하는 몇 가지 요리도 함께 내놓았다.온다연은 매니저를 불러 물었다.“강후 씨는 어디에 있어요? 호텔에 없는 건가요?”매니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유 대표님은 바로 옆 방에 계십니다.”온다연은 텅 빈 레스토랑을 둘러보며 다시 물었다.“요즘 호텔 장사가 잘 안돼요? 왜 이렇게 손님이 없어요? 예전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이제 호텔이 그녀 명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매니저는 웃으며 설명했다.“아닙니다. 장사는 여전히 잘 됩니다. 보통 방을 예약하려면 1~2주 전에 미리 해야 할 정도로요. 다만 오늘 저녁에는 특별히 귀빈이 오셔서 유 대표님께서 장소를 비우도록 지시하셨습니다.”“특별히 귀한 손님이라고요?”온다연은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누구예요?”매니저는 온다연이 실질적인 사장임을 알고 있었기에 숨기지 않고 솔직히 대답했다.“중동의 대부호 라시드 님이십니다.”“그 석유 재벌 말인가요?”“네, 다연 씨.”“알겠습니다. 가보세요.”이해가 갔다. 주말도 아닌데 유강후가 이곳에 온 이유는 중요한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온다연은 디저트를 먹으며 레스토랑에 있던 다른 여자를 힐끔 바라보았다.이미 장소를 비웠다고 했으니, 그 여자는 아마도 라시드의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아마도 중동 부호의 목소리인 듯했다.유강후의 목소리는 약간 나른하게 들렸다.“아이 하나 생기긴 했죠. 하지만 라시드 님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듣자 하니, 아드님이 셋이나 된다고요.”라시드는 호탕하게 웃었다.“유 대표님은 소식이 참 빠르군요. 막내아들이 태어난 지 겨우 사흘이나 나흘밖에 안 됐는데, 벌써 알고 계시다니. 이 소식은 아직 외부에 발표도 안 했는데요.”그는 웃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 본처는 아직 아들을 낳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세 아들은 내 사업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유 대표님의 아드님과는 다르죠. 당신 아들은, 당신들 말로 하자면 적장자니까요. 훗날 유 대표님의 사업을 물려받을 존귀한 후계자죠!”유강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다연은 궁금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든 와인잔을 천천히 흔들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한참 후, 그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라시드 님께서 H국 문화를 꽤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 하나 틀리셨습니다. 그 아이는 적장자가 아닙니다.”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리고 저에겐 정식 부인도 없습니다. 그 아이는 그냥 제가 잠깐 즐기던 애인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일 뿐이에요. 당신의 세 아들과 별반 다를 것 없죠.”온다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강후가 일부러 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어쩐지 불쾌했다.그때 라시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유 대표님은 참 농담도 잘하시네요. 경원시 전체가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특별히 아끼는 여자가 있다는걸요. 그 여성분과 아이도 낳고 결혼까지 계획 중이라던데요. 심지어 그분 때문에 유씨 가문과도 갈등을 빚었다고 들었습니다.”라시드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분 때문에 형님과 인연까지 끊으려고 한다던데요. 유 대표님, 제가 철저히 조사한 내용입니다. 그러니 더는 속이려 하지 마세요.”유강후는 미소를 머금고 와인잔을 살짝 흔들었다.“거짓말입니다. 그저 소문에 불과해요.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떴고, 손에 든 와인잔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갔다.눈동자 깊숙이 깔린 살기는 점점 짙어졌고, 무서우리만치 강렬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다시 차분하고 위엄 있는 표정으로 돌아왔다.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라시드를 향해 미소 같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라시드 님, 당신을 능력 있는 사람으로 존경했는데 어쩌다 이런 저급한 장난을 즐기십니까?”라시드는 웃으며 대꾸했다.“아까워서 그러는 거군요.”라시드는 오랜 세월 상업계에서 명성을 쌓아온 노련한 인물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온다연에게 관심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알고 싶었던 것은 유강후의 태도였다.유강후와 김원도의 갈등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어느 편도 들 생각이 없었다. 누가 더 강한지에 따라 협력할 파트너가 달라질 뿐이었다.현재 상황으로는 유강후가 더 우세해 보였기에, 오늘 이렇게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김원도를 완전히 배척할 생각은 없었기에, 온다연이 유강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이것이 훗날 김원도가 우세해질 경우 다시 협상할 수 있는 중요한 카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라시드는 다시 입을 열었다.“유 대표님, 제 곁에 있는 이 여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아니, 중동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 여자와 당신의 애인을 바꾸자는 제안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룸 안의 조명이 밝지 않아, 유강후의 이마 위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드리워졌다.순간적으로 라시드는 그가 화를 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유강후는 웃으며 말했다.“라시드 님, 제겐 한 가지 습관이 있습니다. 제가 사용한 물건은, 필요 없어져도 남에게 주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잠시 말을 멈춘 뒤, 차가운 기운이 살짝 묻어난 어조로 덧붙였다.“하지만 라시드 님께서 정말 남이 쓰던 물건을 좋아하신다면, 드리죠.”문밖에서 그 말을 듣던 온다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은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라시드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귀엽군요. 유 대표님, 이런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어디서 데려온 겁니까?”“지금까지 저한테 그렇게 대든 여자는 없었어요. 정말 흥미롭군요. 유 대표님, 아까 그 여자를 넘긴다는 말, 진심입니까?”유강후는 온다연이 떠나는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며, 차갑게 라시드를 바라보았다.같은 남자로서 그는 라시드가 방금 한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라시드 님, 방금 말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연인을 서로 교환하는 그런 유희가 유행하지 않습니다. 아까 저 사람이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잖습니까.”“전 여자를 강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설령 제가 그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졌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지는 않을 겁니다.”“하지만 라시드 님이 그런 유형의 여자를 좋아하신다면 제가 적당한 사람을 많이 소개해 드릴 수 있습니다.”라시드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H국에 이런 말이 있죠. ‘아름다운 외모는 흔하지만, 흥미로운 영혼은 드물다.’ 그 아가씨가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면 다른 사람으로는 의미가 없죠.”그는 문밖을 한 번 쓱 바라보며 오늘의 첫 진심을 털어놓았다.“유 대표님, 당신의 그 애인은 이미 아시아 전역의 지하 조직에서 암살 리스트에 올라 있습니다. 알고 있었습니까?”유강후의 손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고, 들고 있던 와인잔을 거의 부술 뻔했다.“라시드 님의 정보력은 대단하군요. 이렇게 빨리 아시아 채널의 소식을 파악하다니요.”사실 그는 한 시간 전에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로운이 직접 전화를 걸어 누군가가 거액을 들여 온다연을 생포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그 금액은 어마어마하게 높아서 순식간에 수십 명의 암살자들이 그 의뢰를 수락했다.로운이 동남아시아 절반의 지하 조직을 장악하고 있긴 하지만, 어느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야생 암살자들이 많아 온다연의 상황은 극도로 위험했다.라시드는 옆에 앉은 여자의 어깨를 두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