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의 흰 셔츠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온다연은 피가 솟구치는 느낌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유강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아저씨...”그러나 유강후는 주저 없이 옆으로 밀어내며 버럭 소리쳤다.“꺼져.”그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졌고 빨갛게 충혈된 눈을 보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온다연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 너무 괴롭고 아팠지만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아저씨, 저 다연이에요.”“나 좀 봐봐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연이라고요.”다연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 유강후는 정신을 차린 듯 중얼거렸다.“다연... 정말 너야? 다연아...”너무 괴로워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온다연은 재빨리 유강후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갔다.“만져봐요. 나잖아요. 아저씨의 다연이.” 유강후는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말했다.“하... 또 환각이네. 너 그 여자잖아. 당장 꺼져.”곧이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꺼지라고!”환각이 보였다고 착각한 유강후는 칫솔을 집어 들더니 다시 허벅지를 세게 찔렀다.극심한 고통에 경련까지 일어나자 그나마 시야가 또렷해졌다.“다연이네...”그런 그를 보며 온다연은 수만 가지의 감정이 오갔지만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권을 보며 말했다.“병원으로 이송해요. 지금 당장.”경호원 몇 명이 황급히 달려와 유강후을 일으켰다.유강후는 온몸이 피로 물들었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잠깐만요.”온다연은 재빨리 유강후의 옷장에서 옷 한 벌을 꺼내 경호원에게 갈아입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그러다가 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꺼져.”장지현은 그제야 꿈에서 깬 듯 벌벌 떨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왜 자해를 할지언정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지 몸소 깨달았다.온다연은 너무 아름다웠다. 화려한 이목구비와 우아한 분위기는 동화 속에서 뛰어나온 인물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장지현은
강해숙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화를 내며 버럭 호통쳤다.“천박한 X. 네가 없었다면 강후가 이렇게 됐을까? 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강후를 꼬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내 말을 잘 들었을 거야. 유씨 가문의 일에 신경도 안 쓰고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게 다 너 때문이잖아.”오늘 이 일을 겪으면서 온다연은 강해숙에 대한 마지막 인내심까지 잃었다.온다연은 수년 전 집안 도우미에게 들었던 소문들을 언급하며 반박했다.“내연녀를 가장 싫어한다고 늘 말씀하셨죠? 왜요? 바람피운 남편한테 버림받는 신세 되어서 그런가요? 혐오하고 원망하는 그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나 봐요?”이 말은 의심할 바 없이 강해숙의 상처를 드러내는 의도가 다분했다. 사람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수십 년 동안 감히 아무도 언급하지 못했다.그 말을 들은 강해숙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고 온다연은 가리키며 몸을 떨었다.유자성도 추악한 얼굴로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야, 말을 함부로 하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온다연이 반박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이권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다연 씨, 상대하지 말고 얼른 가요. 도련님 건강이 가장 중요하잖아요.”온다연이 답했다.“곧 따라갈 테니까 아저씨랑 먼저 가요.”말을 마친 온다연은 극도로 차가운 표정으로 뒤돌아 유자성을 바라봤다.“유씨 가문의 가장 아픈 곳을 찔러서 화를 내는 거예요? 아니면 강후 씨가 치료받지 못하게 시간을 끄는 건가? 강후 씨가 잘못돼서 혼자 유씨 가문의 모든 걸 상속받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죠?”유자성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지나가던 개한테도 괴롭힘당하던 어린 고아 소녀가 지금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말대꾸를 하고 있으니 더욱 분노를 참지 못했다.“우리 형제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작정했나 봐?”온다연은 피식 웃었다.“갈라놓을 공간이 있었어요? 동생한테 하는 짓을 봐서는 그렇게 각별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유재성을 바라봤다.“저분도 회장님 아들이지만 강후 씨도 회장님 아들이잖아요. 이 일은 강후
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있는 유강후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과 겉으로 드러난 피부는 비정상적인 홍조를 띠고 있었다.게다가 필사적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핏줄이 선명하게 튀어 오른 걸 보니 여전히 고통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런 그를 보며 온다연은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너무 힘들어 보이네요. 고통을 덜어줄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의사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대표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거죠?”곧이어 의사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대표님에게 투여된 약은 성 호르몬제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부부관계를 갖는 거죠. 이렇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온다연은 어리둥절하더니 금세 얼굴이 새빨개져 말을 더듬었다.“최선의 방법인가요?”의사가 답했다.“네.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귀까지 빨개진 온다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일단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자 온다연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문을 나서 장화연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인 후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장화연이 돌아왔고 온다연은 그녀에게서 알파벳이 적힌 박스를 건네받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집사님,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세요.”장화연이 떠난 후 온다연은 유강후에게 물을 건네며 그의 손을 잡았다.“괜찮아졌어요?”유강후는 의식을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고 몸이 뜨거웠다.온다연을 만지기는커녕 그녀의 향기만 느껴져도 주체할 수 없는 욕구가 밀려왔다.유강후는 침착하게 그녀의 손을 피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여기 있지 말고 얼른 나가.”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분명히 자제력을 잃기 십상이니 안 그래도 몸이 약한 온다연이 그런 고통에 시달리기를 원하지 않았다.온다연은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안 갈 거예요.”가뜩이나 활활 타오르는 몸에 온다연의 손길이 닿자 마치 경유 한 통을 부은듯 급속도로 불길이 거세졌고 금방이라도 재가될 듯한 느낌이었다.이미 빨갛게 충
유강후는 인생 최대의 자제력을 발휘했다.“내려가.”온다연은 주저 없이 팔을 뻗어 그의 벨트를 풀었고 두 손을 그의 허리에 얹었다.“싫어요. 안 내려갈 거예요. 난 아저씨의 여자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밀어내요?”온다연의 손길에 유강후의 몸은 더욱 활활 불타올랐지만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참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나 지금 이상해. 시작하면 절대 자제하지 못할 거야. 네가 다치게 될 수도...”온다연은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췄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손에는 하얀 박스가 들려있었고 유강후를 바라보며 말했다.“안에 여덟 개 들어있어요. 능력 있으면 오늘 다 써보든가.”박력 있게 말했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더불어 어느새 그녀의 목도 핑크빛으로 물들었다.어쩌면 이번 생에 한 일 중에서 가장 상식을 벗어난 터무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비로소 유강후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이제는 온다연을 내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유강후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목을 잡았다.“다연아, 너 다칠 수도 있어.”온다연은 차마 그의 시선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괜찮아요. 두렵지 않거든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온다연은 번쩍 안았고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다.유강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재빨리 박스를 뜯더니 난폭하게 안에서 하나를 꺼내고선 온다연의 입가로 가져갔다.“뜯어. 나한테 끼워줘.”온다연은 조금의 반항도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움직였다.완전히 자제력을 잃기 전 유강후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다연아, 예전처럼 부드럽게 못 할 수도 있어. 정말 아프거나 견디기 힘들면 나 때리고 밀쳐내.”사실 온다연도 조금 겁이 났지만 물러서지 않고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참지 마요. 왜 시작하기도 전에 겁부터 먹어요? 자신 없어서 그러는 건가?”그 말은 유강후의 이성을 완전히 잃게 했다.공기 중에는 므흣한 분위기가 흘렀고 곧이어 침대가 부딪치는 소
고개를 숙인 온다연은 착잡한 눈빛이었다.곧이어 장화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큰 도련님이 어젯밤부터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일단 올라오지 못하게 저희가 경호원을 대동해 막았습니다.”온다연의 눈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절대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요. 아저씨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장화연이 답했다.“알겠어요.”잠시 후 온다연은 아이 방으로 향했다.아이는 이미 7개월이 넘은 상태였고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여전히 인큐베이터에 있었다.아이는 온다연의 소리에 반응한 듯 손발을 움직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온다연은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쥐고 뽀뽀를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우림아, 엄마 왔어.”아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큰다지만 상상보다 훨씬 빠른 성장 속도는 볼 때마다 경이로웠다.이제는 정상적인 피부로 돌아왔고 이목구비도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다만 아쉬운 점은 아직까지는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래도 아이를 지켜냈다는 현실에 온다연은 이미 매우 만족했다.그녀는 아이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우림아, 우리 며칠만 더 있다가 집으로 가자.”“앞으로 우림이는 엄마랑 같이 지내는 거야. 알겠지?”...방에서 나온 온다연은 핸드폰을 꺼냈다.영상을 올린 이후로 핸드폰을 만지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어제 오후와 저녁이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기에 분명히 반응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을 켜자마자 엄청난 양의 게시물과 댓글이 쏟아져 나왔다.게다가 어제 올린 영상은 백만 번이나 리트윗되었다.하지만 실검에는 오르지 못했다.분명히 누군가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다른 수단을 동원한 게 틀림없다.모든 영상에는 수백만 개의 좋아요와 수십만 개의 댓글이 달렸고 하룻밤 사이에 새 계정의 팔로워가 300만에 달했다.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훨씬 뜨거웠다.온다연은 심호흡을 하고 댓글 창을 눌렀다.[세상에나. 가해자가 피해자로 된 거네? 이게 실화
온다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내려가서 상황 좀 볼게요.”온다연이 손해 볼까 봐 걱정됐던 장화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경호원 수십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으니 절대 여기까지 못 올라올 거예요.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겨요.”장화연이 누굴 욕하는 걸 처음 들은 온다연은 웃음이 나왔다.하지만 유씨 가문 사람들을 생각하면 웃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분노에 찬 강해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유강후는 내 손자야. 손자 보러 왔는데 너희들이 뭔데 허락하나 마나야.”“당장 비켜.”“어르신, 대표님께서 유씨 가문은 아무도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저희도 이게 직업이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르신이 들어가는 순간 저희는 직장을 잃을지도 모릅니다.”“강후는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분명히 그 미친 X이 옆에서 시켰을 거야. 우리 강후가 지금 저렇게 된 게 다 걔때문이잖아.”...온다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며 말했다.“욕쟁이 할머니가 따로 없네요. 입 안 아파요?”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단호함과 조롱이 배어 있었다.강해숙은 온다연을 보자마자 어제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무례한 말들이 떠올랐다. 게다가 오늘은 경호원들에게 저지당해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으니 이번 생에 가장 면목 없는 순간이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강해숙은 이 모든 것을 초래한 원인이 온다연이라고 확신했다.온다연이 아니었다면 유하령은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유민준도 갑자기 사생아를 낳지 않았을 것이다.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그들과 동등한 가문의 아가씨들은 감히 아무도 유씨 가문에 시집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시집오자마자 새엄마가 되는 신세인데 누가 그걸 원하겠는가?강해숙은 온다연이 유씨 가문의 사모님 자리에 앉으려고 유강후를 꼬셨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유강후가 가족들과 멀어진 가장 큰 원인이 온다연이라고 확신했다.유
온다연은 말 한마디로 심미진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아니나 다를까 심미진은 발끈하며 화를 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나는 네 이모야. 내가 없었다면 넌 진작에 길바닥에서 굶어 죽을 운명이었어.”온다연은 어이가 없었다.“참 고맙네요. 덕분에 유씨 가문에서 10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거든요. 유하령한테 잘 보이려고 날 욕하고 괴롭히며 모욕하던 사람이 그쪽 아닌가? 날 방패로 삼았던 모든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가증스러운 가면은 이제 벗어던지시죠?”심미진은 표정이 돌변하더니 비통한 심정으로 말했다.“다연아, 다 너를 위한 행동인데 왜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몰라주는 거니? 하령이가 성격이 제멋대로인 건 맞지만 절대 나쁜 아이는 아니야. 욕 몇 마디하고 때렸다해서 네가 죽은 건 아니잖아. 버젓이 살아있는데 왜 그때의 일을 아직까지 물고 늘어지는지 난 정말 모르겠다.”“그리고 민준이는 네 오빠야. 어떻게 오빠를 꼬실 수가 있어?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강후한테 손을 댄 거니?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심미진은 착잡한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그렇게 착하던 애가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지?”온다연은 기가 막혔지만 더 이상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말했다.“강후 씨는 절대 당신들을 만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계속 소란 피우시면 경호원에게 쫓아내라고 부탁할 겁니다.”강해숙은 호통을 쳤다.“여긴 강후 명의로 된 병원이야.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아들 하나 낳았다고 유씨 가문에서 널 인정해 줄 것 같아?”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 단호하게 말했다.“똑바로 들으세요. 제 아들의 이름은 강우림이에요. 유씨 가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당연히 인정 따윈 필요 없겠죠? 강씨 가문에서 사랑받으며 자랄 아이예요. 그러니까 제발 신경 끄세요.”온다연이 또박또박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강해숙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강씨 가문과 비하면 그쪽 집안
온다연은 싸늘하게 웃었다.“강후 씨한테 약을 주사할 때는 걱정이 안 됐나 봐요?”“형제라는 핑계로 감성팔이 하지 마요. 어차피 나한테는 그런 게 안 먹히니까.”이때 아주 미세한 ‘딩’소리가 들려왔다.그러나 너무 경미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유자성에게 다가가 혐오스러운 말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당신은 내가 지금껏 본 사람 중에 가장 역겹고 가증스러운 인간이야.”“회장님한테는 당신 같은 아들이 있다는 게 제일 큰 오점이야.”“물론 당신 딸과 아들도 마찬가지야. 똑같이 역겹고 이기적이거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법까지 어겼으니 유씨 가문이 무너지게 된다면 가장 큰 원인이 그쪽일지도?”“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집에서 놀고먹는 백수래. 능력 있는 강후 씨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신세잖아? 게다가 철없고 멍청한 자식들까지 있으니 말 다 했지. 당신 자식들은 강후 씨 돈 쓰는 것밖에 할 줄 모르잖아?”온다연은 의도적으로 유자성의 화를 불러일으켰다.그 결과는 성공했다.늘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해왔던 유자성은 온다연의 말에 분노가 타올랐다.결국 온다연의 뺨을 때렸고 온다연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싸가지 없는 천박한 X.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하면 너 같은 건 바로 죽여버려.”온다연이 내뱉은 말은 그의 가장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아버지인 유재성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라에서 인정해 주는 최고의 인재 중 한 명이다.동생인 유강후는 아버지 유재성을 능가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고 업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그러니 어느 순간부터 중간에 끼어 볼품없는 신세가 됐다.정치적 안목이 탁월하고 전략을 잘 세우는 아버지에 비해 능력이 뒤떨어졌고 금융 천재인 동생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지난 몇 년 동안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못 들은 척 웃어넘겼다.그런데 하필이면 보잘 것 없는 온다연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으니 바로 뚜껑이 열렸고 오늘 온다연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
염지훈이 수도관을 고치고 욕실에서 나올 때쯤 바이크 슈트를 입은 사람 몇 명이 들어왔다.“유강후 그 사람 정말 미쳤습니다. 경원의 중요한 교차로마다 검사대를 설치했다니까요? 바이크를 탄 사람은 전부 다 면허증을 제공해야 된대요. 우리를 잡으려고 눈이 완전히 뒤집힌 모양이에요.”염지훈은 젖은 옷을 벗어 소파에 내팽개치더니 캐주얼한 옷으로 갈아입었다.“찾으라고 해. 어차피 타 지역 번호판이랑 면허증이라서 못 찾을 거야.”곧이어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하지만 정체가 이미 탄로된 것 같습니다. 유강후가 알아챈 게 틀림없어요. 지호 형님이 저한테 연락이 왔더라고요.”염지훈은 대수롭지 않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여신 그룹 지분은 이미 진작에 포기했어. 이제 염씨 가문이랑 엮인 게 없으니까 어차피 형이 날 찾아도 달라질 건 없어.”“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유강후는 워낙 경원에서 세력이 큰 사람이잖아요. 저희가 아직 맞서 싸울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어떻게 저 자리까지 올라갔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경원에서 그나마 이름을 알린 가문이라면 다 유강후의 투자를 받으려고 목을 매지 않습니까. 돈과 권력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유강후한테 굽신거리니 참...”“심지어 잘나가는 기업에는 무조건 유강후의 지분이 있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유강후를 따라서 투자한다잖아요. 참 빈틈이 없네요.”염지훈은 여전히 신경 쓰지 않았다.“금융 천재? 능력이 좋으면 뭐 해. 온다연은 아직도 벗어나려고 도망치고 있잖아. 유강후는 온다연을 소중히 여길 줄 몰라. 그러니까 애초에 가질 자격이 없는 인간이야.”남자는 온다연이 있는 방을 힐끔 쳐다봤다.“아직 식사 안 하셨죠? 저희도 배고파서 밖에 바비큐 그릴을 설치하는 중인데, 나중에 내려와서 좀 드세요.”그 말을 끝으로 하나둘씩 밖으로 나갔다.염지훈은 소파에 잠시 앉아 있다가 여러 차례 통화를 마치고 온다연이
염지훈을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나중에 개발하려고 여기 동네를 내가 다 샀어. 지금은 내 구역이니까 당분간 안전해.”“그런데 나도 여기 온 지 꽤 되어서 준비한 게 아무것도 없어. 오늘 밤만 버티고 내일은 다른 곳으로 가자.”염지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얼른 가서 씻어. 온몸이 흙투성이네.”보아하니 이곳은 정말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고 욕실도 임시로 청소한 듯 남루하기 그지없었다.낡은 인테리어에 바디워시와 기타 생활용품도 급하게 구입한 듯 모두 익숙한 브랜드였다.친근한 느낌이 밀려온 온다연은 자취방에서 살았던 날들이 떠올랐다.비록 그 시절에는 돈이 없었지만 오히려 지금보다는 마음이 편했다.온다연은 추억 여행을 마치고 온수기를 켰다.어찌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온수기의 수도관이 터져 온몸에 뜨거운 물이 튀었다.그 소리를 들은 염지훈은 부랴부랴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왜 그래?”삐걱거리던 낡은 문은 염지훈의 힘센 주먹질에 저절로 열렸다.문이 열리자 홀딱 젖은 채로 욕실에 서 있는 온다연이 보였는데 얇은 옷이 물에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날렵한 각선미, 잘록한 허리, 늘씬한 다리가 더해진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워낙 얇고 부드러운 소재의 옷이라 젖으면서 반투명해졌고 보일듯말듯한 하얀 피부는 매혹적이었다.어안이 벙벙해진 염지훈은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온다연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기에 재빨리 타올로 몸을 감쌌다.온수기가 터질 줄도 몰랐지만 문이 이렇게 쉽게 열릴 줄은 더더욱 몰랐다.“미안해요. 저도 갑자기 터질 줄은 몰랐어요.”염지훈은 태연하게 답했다.“너무 오래돼서 그런가 봐. 밖에 나가 있어. 내가 할게.”온다연은 민망함을 무릅쓰고 타올을 몸에 걸린 채 재빠르게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염지훈도 온몸이 홀딱 젖은 채로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방에서 공구함을 챙겨 안으로 들어가더니 수도관을 고치기 시작했다.온다연은 명문가 도련님이 이런 일을 하
빛의 속도로 할리데이비슨 바이크가 질주해 왔다.바닥에 있던 낙엽과 먼지는 사방으로 흩날렸고 그들은 조금도 물러설 의사가 없는 듯 유강후와 경호원을 향해 돌진했다.특히 선두에 선 사람은 검은색의 바이크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강풍에 부풀어 올라 왠지 모를 공포감을 조성했다.경호원들은 유강후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나섰다.정말 순식간에 바이크가 다가왔고 온다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이크를 향해 돌진했다.유강후도 표정이 돌변했다.“빨리 잡아.”하지만 이미 늦었다. 선두에 선 남자는 재빨리 달려와 한 손으로 온다연을 붙잡고 끌어당기며 바이크에 앉혔다.곧이어 바이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급커브를 돌며 방향을 틀었다.속도가 워낙 빠른 탓에 경호원이 돌진했을 땐 이미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유강후는 주저 없이 차에 올라탔다.유턴하고 액셀을 밟은 차는 쏜살같이 치고 나갔다.염지훈은 돌진해 오는 제네시스를 돌아보고선 동료가 던진 헬멧을 잡아 온다연에게 넘겼다.“이거 쓰고 날 꽉 잡아.”바이크가 처음이었던 온다연은 모든 게 낯설고 경험이 없었기에 염지훈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고삐 풀린 야생마가 질주하듯 바이크는 멈출 줄 몰랐고 순식간에 제네시스를 한참이나 따돌렸다.유강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경호원이 건네준 총을 잡고 총구를 바이크에 겨눴다.두 차례의 굉음과 함께 바이크 한 대가 펑크나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고 90도 급선회한 뒤 옆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뒤를 돌아온 온다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어떡해요. 타이어를 맞았나 봐요.”염지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신경 쓰지 마. 알아서 잘할 거야. 속도 올릴거니까 꽉 잡아.”거센 바람 소리를 더불어 바이크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이내 제네시스는 시야에서 사라졌다.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바이크는 오래된 단지로 들어갔다.염지훈은 바이크에서 내리며 여유롭게 온다연을 바라봤다.“놀라서 운 건 아니지?”온다연은 헬멧을
헤드라이트다.익숙한 차의 헤드라이트!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를 보니 유강후의 제네시스가 틀림없다.소스라치게 놀란 온다연은 재빨리 등을 돌려 옆 광고판에 몸을 찰싹 붙였다.때마침 제네시스 한 대가 그녀의 뒤쪽에 있는 도로를 쏜살같이 지나갔다.온다연은 행여나 유강후에게 들킬까 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그래서 차가 멀리 가기도 전에 발을 빼며 도망쳤다.그런데 이때 차에 있던 이권이 길가에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차 속도가 워낙 빨라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낯익은 듯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스쳐지났다.“밤길에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인데 웬 여자가 돌아다니고 있네요.”이권의 백미러에는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비쳤고 뭔가 이상함을 깨달은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저 사람... 다연 씨 아니에요?”유강후의 표정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차 돌려. 얼른 따라가.”그 시각 활짝 열린 별장에서 경호원 7,8 명이 달려왔다.유강후의 차를 본 그들은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한눈판 틈을 타 사모님이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렸습니다.”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쓸모없는 것들. 이런 일도 제대로 못 해? 얼른 쫓아가지 않고 뭐 하는 거야.”경호원 몇 명이 서둘러 쫓아갔다.그 시각 온다연은 여전히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몇 분 만에 차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강에 가까워지자 온다연은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러자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는 경호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들의 뒤에 있는 건 유강후의 제네시스였다.다리를 지나 강 건너편으로 넘어가 차에 오르기까지 적어도 10분은 걸린다.그러나 유강후는 불과 200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다.절망이 밀물처럼 밀려들었고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질식감이 온몸을 뒤덮였다.도망칠 당시 슬리퍼 한 켤레만 신고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벗겨져 맨발인 상태였다.하얗고 부드러운 한 쌍의 발은 어느새 잔뜩 닳아 핏자
전부 임정아에 관한 기사였다.온다연은 재빨리 연예계 카테고리를 눌렀고 순식간에 임정아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나왔다.[대세 여배우 임정아, 영화 오디션 탈락이라니?][임정아, 앰버서더에서 물러나다? L사와 B사에서 돌연 계약 해지한 이유는?][드라마 대박 난 임정아, 정말 촬영장에서 텃세 부리며 조연을 괴롭혔나? 여주인공 전격 교체?][유명 여배우 임정아가 열애설에 휩싸인 내연녀라는 목격자의 증언이 잇달아...][사실 임씨 가문의 딸이 아니다? 임정아의 신분은...][임정아, 그동안 숨겨왔던 추악한 면모가 드러나자 팬들도 등을 돌려...]...기사를 본 온다연은 손발이 차가워졌다.임정아는 집안 배경이 탄탄하고 스스로 프로듀서와 감독할 만큼 능력이 뛰어났기에 아무리 구설수에 휩싸인다 한들 이렇게 한순간에 나락가지는 않을 것이다.이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진 이유는 단 하나,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온다연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유강후뿐이었다.유선전화기로 걸어간 온다연은 유강후에게 왜 그랬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수화기를 들자마자 다시 내려놓았다. 왜냐하면 유강후와의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였으니까.한참을 생각한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그곳에는 저녁 식사 재료를 준비하는 도우미 여러 명이 있었다.온다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모두들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멀지 않은 테이블 위에 핸드폰 여러 대가 놓여있는 걸 발견한 온다연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저녁 메뉴가 뭔지 궁금해서 온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하세요.”잠시 후, 부엌에서 나온 온다연의 손에는 핸드폰 하나가 들려있었다.다행히 비밀번호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온다연은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 임정아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온다연의 전화를 받은 임정아는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가득 담겨있었다.그녀의 말투에서는 유강후에 대한 원망이 느껴졌다.온다연은 이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직접 끝내고 싶었다.그러
온다연의 말투는 한없이 싸늘했다.“그래요? 전 그냥 감시 같은데요? 사람을 가두고 내보내지 않는 게 사랑이라면 차라리 큰 새장을 만들어서 언제든지 옮기며 곁에 두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요? 항상 감시할 수 있잖아요.”집사는 발끈한 온다연의 모습을 보고선 감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무슨 말을 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만 골라서 먹었다.유강후 쪽에서 점심이 배달되었다.매우 단출한 식사여서 그런지 지금 온다연이 먹고 있는 음식과 매우 대비되었다.예전이라면 가슴이 미어졌을 텐데 이제는 그를 쳐다보고 싶은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그들 사이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가로막혔고 이제는 돌이킬 방법이 남아있지 않았다.유씨 가문, 아이, 나은별, 바깥의 여자들까지 모두 넘을 수 없는 큰 장벽이다. 유강후가 이유를 대며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한들 깨진 그릇을 다시 붙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온준휘의 죽음과 허한의 부러진 손은 깨진 그릇을 붙이려는 희망마저 잃게 만들었다.게다가 유강후는 온다연의 기분과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유강후의 강요로부터 시작된 관계는 유강후로 인해 끝나게 되었다.물론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그동안 받은 상처를 회복하기에는 쉽지 않다.겉모습이 아무리 좋아도 천성적으로 악한 사람은 강탈과 협박에 익숙해져 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그런 사람일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어쩌면 연민의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수도 있다.이제는 모든 걸 끝내야만 한다.식사를 마친 온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곧바로 유강후의 목소리가 들려왓다.“오후에 붙임머리 해주는 사람이 올 거야. 말 잘 들어.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네가 예전의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온다연은 사방에서 옥죄는 느낌에 숨이 턱턱 막혔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가운 어조로 답했다.“내 머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네요? 우리 사이에 더 이상 희망이란 없잖아요. 제발 강후 씨에 대한 좋은 기억 좀 남겨줄 수는 없어요?”유강
집사는 솔직하게 답했다.“대표님께서 핸드폰은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통화하려면 거실에 있는 유선전화기로 하면 됩니다.”역시나 예상대로다.온다연의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의 분노를 억눌렀다.“강후 씨는요?”집사는 정중하게 말했다.“대표님은 급한 일이 있으셔서 아침 일찍 회사로 나가셨습니다. 저녁쯤에 돌아온다고 하셨고 보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연락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이 별장 안에서는 사모님이 하고 싶으신 대로 자유롭게 행동해도 됩니다. 아참, 그림 그리고 싶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도구는 준비되었으니 원하시면 바로 화실을 정리하겠습니다.”“괜찮아요.”누가 봐도 감금하는 상황인데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았으니 어이가 없었다.‘이딴 것도 자유라고 하는 거야? 지하실에 갇혀있어야 감금이라고 생각하나 보네.’“컴퓨터는 있어요?”온다연의 질문에 집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대표님 서재에 있기는 한데 다만...”“다만 뭐요?”온다연의 집사의 말을 잘랐다.“인터넷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하던가요?”집사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그건 아닙니다.”집사는 이곳에 온 지 하루 만에 온다연이 유강후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라는 걸 눈치챘다.말은 감시라고 했지만 오늘 아침 회사로 가기 전 유강후는 아주 작은 세부 사항까지 명확하게 지시하며 신신당부했다.회사에 급한 일이 없었다면 하루 종일 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유강후는 별장을 나설 때 핸드폰을 사용하면 안 되고 외부와 연락을 하면 안 된다고만 지시했지, 컴퓨터를 사용하지 말라고 강조하지는 않았다.게다가 온다연이 컴퓨터를 사용할 때 옆에서 어떤 걸 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참을 생각하다가 답했다.“외부와 연락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는 없었으니 다른 도우미분들에게 서재에서 뭘 하려는 건지 말씀 안 하신다면 별일 없을 것 같습니다.”말을 마친 집사는 고개를 들어 온다연을 바라봤다.표정이 전보다 조금 풀린 듯한
집사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 유강후와 온다연의 부부관계가 매우 좋으니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땐 눈치껏 행동하며 함부로 방해하지 말라고 교육을 받았다.그런데 오자마자 온다연의 몸에 키스마크가 가득한 걸 보게 되었으니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좋아한들 피부가 찢겨질 정도로 물어뜯는 건 지나친 행동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잠깐 생각에 잠겼을 뿐인데 곧바로 유강후의 싸늘한 시선을 받았다.“이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잘 감시해. 실수하면 바로 해고야.”집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분명히 사이가 좋다고 했는데 왜 감시하라는 거지?’유강후는 말을 이었다.“음식은 장 집사가 만든 식단표에 맞춰서 하면 돼. 그리고 지금 당장 조치해서 경호원이랑 도우미를 세 배로 늘려.”“알겠습니다. 대표님.”유강후는 온다연은 안고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반쯤 풀린 타올 사이로 그녀의 하얗고 여린 몸이 반쯤 드러났다.단지 쳐다보기만 해도 유강후는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혹시나 열이 나는건가 싶어 온다연의 체온을 재 보았지만 열은 없었다.그런데 웬일인지 평소보다 체온이 높았고 그 덕분에 유강후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게다가 흥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꾹 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괴롭히고 싶은 욕망을 최대로 끌어올려 유강후를 미치게 만들었다.이런 생각을 하자 유강후도 몸이 뜨거워져 참을 수가 없었다.그는 온다연의 타올을 벗기고선 건장한 몸으로 순식간에 덮쳤다.날을 이미 어두워졌지만 그들의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다음날, 온다연이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점심이었다.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던 온다연은 그제야 핸드폰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몸은 이곳저곳 쑤셨고 동시에 광란의 밤이 떠올랐다.처음에는 참을만했다. 유강후가 여보라는 호칭을 듣고 싶어 일부러 유인할 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약기운이 점점 세졌다. 게다가 유강후는 그녀의 예민한 곳을 잘 알고 있었기
그러나 온다연이 입구에 다다르기도 전에 문이 쾅 닫혔다.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는 온다연의 유일한 희망마저 닫아버렸다.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렸지만 밖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개를 돌린 온다연은 자신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오는 유강후를 보게 되었다.그녀는 겁에 질린 채 벽 모퉁이에 숨더니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마치 시간이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유강후가 막 귀국했을 때 온다연은 지금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향기를 맡아도 숨이 막힐 정도였으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이제는 괜찮겠지 싶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두려움은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일지도 모른다.만약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온다연은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리 도망칠 것이다.하지만 이 세상에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어느새 유강후는 그녀의 앞에 도착했다.그는 온다연을 번쩍 안아 올려 다시 의사에 앉혔고 온다연도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그녀는 주삿바늘이 자신의 피부를 찌르는 것 지켜보며 차가운 액체가 몸속으로 들어가는 걸 느꼈다.아프거나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눈앞의 이 남자는 그녀에게 희망을 주고 또 절망을 주었다.남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게 어쩌면 더 현명할 방법일지도 모른다.유강후가 스스로 두 사람의 관계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으니 온다연도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밖에 없다.안정제를 투여한 그녀는 곧바로 진정되었으나 두 눈은 초점이 없었고 공허함만 가득했다.유강후는 기운이 빠진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이 심란해졌다.예전처럼 순해졌지만 그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알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을 뒤로하고 곧바로 이성을 되찾아 정신을 차렸다.이제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온다연의 곁을 지키리라 마음먹었다.그녀에게 나쁜 물에 물들인 임정아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직 고민 중이다.시술은 순식간에 끝났다.입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