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까지 오는 흰색 치마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얇은 큐빅이 박혔고 허리 쪽에는 태슬 벨트가 있었다. 이 치마에 어울리는 신은 낮은 굽의 회색 구두였다. 흰색 큐빅 핀까지 머리에 꽂으면 순하고 여려 보여 유강후가 선택한 옷과 나름 잘 어울렸다.유강후는 만족스러운 듯 온다연에게 손목시계를 차주면서 자신의 시계도 들어냈다.두 시계는 똑같지만 사이즈가 달랐다.온다연은 유강후가 고의로 커플 시계를 준비했다고 의심했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고 유강후에게 끌려 차고로 갔다.지하 차고는 수백 평에 달했고 매우 넓었다. 온다연은 차에 대해 잘 몰랐기에 모두 똑같은 검은 차로 보였다. 골드 로고를 가진 차가 몇 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유강후가 자주 애용하는 검은색 마이바흐였다.차에 오르자마자 유강후가 물었다.“마음에 드는 게 있어?”온다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유강후는 그녀의 잔머리를 귀 뒤에 넘겨주면서 말했다.“차가 있으면 이동하기 편리할 거야. 하지만 네가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기사를 붙여줄게.”이때 운전하고 있던 이난이 말했다.“괜찮은 코치를 알고 있어요. 인내심도 있고 성격도 좋습니다. 나이가 많아 듬직하기까지 하고요. 제 사촌 여동생이 그곳에서 운전을 배우고 있습니다. 다연 씨가 운전을 배우고 싶다면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매서운 눈빛으로 이난의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잘난 척 다했어? 처리해야 될 서류가 수백 개 있으니 오늘 밤 자지 말고 다 정리해.”그 말을 듣자 이난은 운전대를 꽉 잡았고 감히 반박도 못 하기에 속으로 이불 킥을 했다.가는 길에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차 안의 분위기는 차가웠다. 온다연은 답답해서 창문 쪽으로 몸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면 유강후와 조금 더 멀리 떨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움직이자마자 유강후가 그녀의 허리를 덥석 끌어당겼다.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 앞으로 또 창문 쪽에 붙어 앉을 생각을 하면
이난이 없어지자 차 안의 분위기는 더 차가워졌다. 온다연은 유강후가 숨을 쉬는 것조차 싫었고 숨이 턱턱 막혀오면서 긴장감에 몸이 떨릴 정도였다.밖은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인데 유강후가 또 이상한 행동을 할까 봐 걱정이었다.온다연이 다시 땀을 흘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유강후는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만지려고 했지만 온다연은 피하면서 놀란 두 눈으로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삼촌, 밖에 사람들이...”그러자 유강후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섰고 당황한 온다연의 얼굴을 2초 동안 바라보다가 손을 내렸다.“다연아, 누구도 내가 하려는 일에 참여할 권리가 없어. 난 결과따위를 생각하지 않거든.”유강후는 그렇게 말하고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그러자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유강후의 말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더 무서웠다.아무도 간섭할 수 없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것이다? 가족마저도 그를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일까?비록 미친 사람처럼 보였지만 온다연은 그가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유강후는 열 몇 살 때부터 유씨 기업을 인수하기 시작했고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어머니 강해숙의 사업을 인수했다.유강후는 유씨와 강씨 가문의 절대 권력자이고 진정한 금수저이다. 그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하지만 온다연은 너무 달랐다. 만약 유강후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온다연은 절대 막을 수 없을 것이다.온다연은 단지 고아일 뿐인데 유강후는 왜 이렇게 그녀에게 집착하는 걸까? 어떤 이득 얻으려고 이러는 걸까?나은별과 곧 약혼할 것이고 두 사람도 서로 사랑하는 천생연분인데 왜 계속 이러는 걸까?그러니까 세상 남자들은 다 똑같은 걸까? 자기 여자가 있으면서 또 누군가를 탐내다니.온다연은 그 생각을 하니 손이 떨리고 속이 쓰려왔다.잠시 후, 차는 경원시에서 가장 좋은 호텔 입구에 세워졌다. 유강후는 차를 멈춰 세웠고 온다연도 함께 내렸다. 유강후가 호텔로
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낮게 말해. 얘가 겁이 많단 말이야.”“어머. 챙기는 것 좀 봐. 이렇게 긴장하다니. 미성년자는 아니겠지?”그러자 온다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20살이에요. 대학 다니고 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부드러웠고 남자들만 있는 회식 자리에서 유난히 주의를 끌었다.몇 사람은 먼저 어리둥절해하더니 곧 다시 웃기 시작했다.그러자 온다연은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으며 작고 하얀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조명 때문에 그의 얼굴은 더 하얗게 빛났지만 귀는 빨갛게 타올랐다.유강후는 그 모습을 보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차갑게 말했다.“밥 먹을 거야 말 거야? 먹지 않을 거면 꺼져.”그러자 웃음소리가 금세 그쳤다. 이때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성격 여전하네. 3년이 지났는데도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자자자. 음식을 올리라고 해. 신구시에서 모셔 운 특급 주방장이야. 조상이 임금님에게 음식을 해줬고 대대로 그 솜씨를 이어오고 있어.”이제 곧 음식이 나올 시간이다.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떠들고 있었다. 온다연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주식, 정책, 부동산에 관한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비록 유강후는 말이 적고 가끔 몇 마디를 하지만 늘 새로운 화제와 대화의 흐름을 이끌고 갔다.이곳에서도 그가 주인공처럼 말이다.온다연은 음식을 먹으면서 몇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다섯 명 중 세 명은 아는 사이였다. 한 명은 경원시 가장 젊은 부시장 송지원이다. 그는 30대 초반으로 능력이 뛰어나고 가문 세력도 대단했다.한 명은 아시가 갑부의 아들 한이준이다. 그는 바람둥이로 소문이 자자하고 연예기사에 자주 등장했다. 사귄 여자 연예인이 부지기수이고 Z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낯이 익어 생각해 보니 바로 어제 뉴스에 나온 인물인데 젊고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나머지 두 명은 누군지 잘 몰랐지만 이 세 명의 신분으로 볼 때 그 두 명도 보통
유강후는 온다연이 음식을 별로 먹지 않은 것을 보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물었다.“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그러자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강후는 웨이터를 불러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 하더니 웨이터는 공손하게 온다연을 옆으로 안내했다.잠시 후 웨이터가 과일과 다양한 견과류 및 유제품을 들고 나타났다.온다연은 푹신한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기도 하고 창밖의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그는 유강후가 왜 그녀를 이런 곳에 데려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불편했고 특히 소이섭이 온 후 혐오감이 극에 달했다. 속이 쓰릴 정도였다.회식이 언제 끝났는지도 그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소이섭이 그녀 곁에 다가온 줄도 몰랐다.“다연 씨, 여기서 뵙게 돌 줄을 몰랐네요.”소이섭은 점잖게 생겼지만 온다연은 별로 소이섭에게 호감이 가지 않았다. 원인을 따지자면 그녀는 유강후의 모든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고 유씨 가문과 관련된 모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소이섭이 눈앞에 서 있기 때문에 그녀는 억지로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실내를 둘러보았다.유강후는 어디에 있을까?온다연의 생각을 꿰뚫은 소이섭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강후는 전화 받으러 나갔어요.”그러자 온다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빨대로 요구르트를 쿡쿡 찔렀다.그러자 소이섭의 눈빛은 수상하게 변했다.“강후와 은별이가 곧 결혼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온다연은 대답을 하지 않고 더 힘을 주며 뚜껑을 뚫었다. 그리고 소이섭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저랑 무슨 상관이에요?”소이섭은 눈을 가늘게 뜨고 경멸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듣기로는 네 엄마가 내연녀 때문에 죽었다고 하던데.”그러자 온다연은 손을 떨면서 요구르트를 땅에 떨구었다. 그 말을 듣자 강력한 펀치에 가슴을 맞은 것처럼 아파졌다. 그녀는 소이섭을 당황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소이섭은 미소를 지으면 안경을 바로 썼고 부드럽게 말
잠시 후 유강후가 들어왔다. 그는 온다연이 창가에 앉아 넋을 잃고 밖을 내다보는 모습을 발견했다.이렇게 시끌벅적하고 으리으리한 곳에서 그녀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의 떠들썩함은 그녀와 무관한 것 같았다. 아무리 좋다 해도 그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유강후는 온다연에게서 젊은 여자아이가 가져야 할 패기를 본 적이 없고 우울하고 걱정이 많다는 느낌만 받았다.유강후는 천천히 걸어가 온다연의 손을 잡았더니 차가운 손바닥에 땀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또 속이 안 좋아?”온다연은 정신을 차리고 유강후의 친구를 훑어보았다. 마치 그들이 자기를 보는 것이 두려운 것처럼 말이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친구들이 담화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내 친구들이니 무서워하지 마.”온다연은 고개를 푹 떨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너무 답답한데 나가서 산책이나 하고 싶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하지 않았다. 온다연은 아침에 인사도 없이 떠난 일 때문에 자기가 유강후 앞에서 신임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녀는 유리창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는 곳에 물고기가 사는 것 같아요.”유강후가 거절할까 봐 온다연은 말을 덧붙였다.“여기서 보면 제가 보일 거예요.”그녀는 모처럼 단숨에 이렇게 많은 말을 했다.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부드럽게 말했다.“너무 멀리 가지 마. 사람을 시켜 약을 가져다 달라고 할게.”갇힌 곳에서 풀려난 듯한 온다연은 눈을 빤짝이더니 가방을 들고 옆문으로 재빨리 걸어 나갔다.경원시의 저녁은 시원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실내보다 훨씬 편안했다. 온다연은 외진 곳을 골라 앉았다. 비록 여전히 눈에 띄겠지만 적어도 유강후와 그의 친구를 직접 대면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온다연은 가져온 케이트를 조금씩 물고기에게 주었고 산들바람이 불자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졌다.2분도 되지 않았는데 듣기 거북한
아픔을 느낀 온다연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도로 힘껏 당기면서 말했다.“우리 이모는 내연녀가 아니야. 이모가 시집왔을 때 유하령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어.”고유정은 온다연이 말대꾸하는 것을 보자 화를 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도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천한 년, 3년 전부터 강후 삼촌이 네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던데 감히 강후 삼촌을 꼬셔? 이게 네가 할 짓이야? 이것만으로도 너를 죽을 때까지 괴롭힐 수 있어.”그리고 고유정은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그녀를 어두운 쪽으로 끌어당기자 온다연은 고유정의 팔을 잡고 세게 물었다.고유정은 고통을 호소하면서 이내 온다연을 뿌리쳤다. 고유정은 화가 나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온다연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지금의 온다연은 마치 복수를 꿈꾸는 어린 짐승 같았다.“이 계집애가 감히 나를 물어?”고유정은 달려들어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이를 갈았다.“주한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하령이가 널 괴롭히려고 남자들을 불렀어. 그런데 그 자식이 너를 살려달래. 결국 널 대신해서 남자 세 명을 모시면서 잠자리했지. 세 남자가 주한이를 사정없이 갖고 놀았어. 그리고 동영상도 찍었지. 주한이 바지가 온통 피투성이로 될 만큼 말이야. 그리고 그걸 인터넷에 올리려고 했는데 주한이가 거절했지 뭐야.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뛰어내려 자살했지. 너는 모르지. 네년 때문에 주한이가 죽었어. 너를 위해 사정하지 않았더라면 세 남자한테 이렇게 놀림을 당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뛰어내려 자살하지도 않았겠지? 남자한테 놀아나는 동영상이 아직도 내 핸드폰에 있는데 한번 볼래?”...온다연은 몸을 심하게 떨었고 숨이 막혀왔다. 그녀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솟아올랐고 이 악당들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주한, 주한,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주한이가 이렇게 죽었다니.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비참한 고통을 겪으면서 죽었다니.주한이가 그렇게 죽었는데 이 나쁜 놈들은 왜 아직도 살아 있지?왜!!!온다연은 머릿
고유정의 비명에 금방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강제적으로 온다연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고유정의 목덜미를 있는 힘껏 깨문 그녀는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정말 살점이라도 뜯어낼 기세였다.고유정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온다연을 때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입을 놓지 않았고, 고유정이 힘이 풀릴 때까지 고집을 부렸다.유강후가 달려갈 때까지도 온다연은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고유정의 목덜미를 물고 있었다. 눈빛도 평소와 달리 쑥스러움 하나 없이 독기가 서렸다.고유정은 욕설을 내뱉으며 온다연을 때렸다. 곁에서 한 사람은 있는 힘껏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런데도 그녀는 느껴지는 것이 없는 듯 치아에 힘을 풀지 않았다.인파를 뚫고 들어가 온다연의 손을 잡은 유강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다연아... 온다연...”차갑지만 힘 있는 손의 촉감과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온다연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댔다. 그리고 천천히 고유정을 놓아줬다.초점 없이 흐릿하던 눈빛이 다시 또렷해지고 유강후의 얼굴이 보였다. 차가운 인상의 유강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얼려버릴 정도의 차가움이었다.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숙인 온다연은 바닥에 쓰러진 고유정을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는 피범벅이 되었고, 말할 힘도 없는 듯 겁먹은 눈빛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온다연은 몸을 흠칫 떨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경찰차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아무래도 누군가 신고한 모양이다. 이 지역은 시내에 속해 있어서 경찰이 빠르게 출동할 수 있었다.온다연은 놀란 눈빛으로 경찰차를 바라봤다. 하도 당황한 탓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어느 순간 그녀는 어머니를 죽기 직전까지 때리고 경찰에게 잡혀갔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때도 경찰차는 이런 소리를 내며 다가왔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창문으로 몸을 던져 피떡이 된 채 숨을 거뒀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때 가로수 아래에 있던 온다연이 약간 꿈틀거리더니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머리 한 번 돌리지 않고 비틀비틀 인행도로 걸어갔다.인파 속에서 그녀는 금방 자취를 감췄다. 경찰과 경비는 그 구역을 세 번이나 샅샅이 뒤져보고 CCTV까지 확인했는데도 그녀를 찾지 못했다.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 다친 채로 증발해 버린 것이다.고씨 가문에서는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소중한 딸이 머리에는 피멍이 들고 곳곳에 살점이 뜯겨 나갔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녀가 얻어맞는 영상은 빠르게 인터넷에서 퍼져가고 있었다.심하게 다친 고유정은 아직도 입원해 있었다. 뼈까지 다쳐서 수술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체면이야 어찌 됐든 회사 주식이 흔들린 것이 가장 용서할 수 없는 큰 문제였다.그들이 조사한 바로 온다연은 유자성의 재혼 상대의 조카에 불과했다. 어릴 적부터 유하령과 유민준에게 괴롭힘당한 건 물론이고, 부모도 없어서 늘 왕따를 당하고는 했다. 아무리 유씨 가문에서 자랐다고 해도 그녀의 명성은 도우미만도 못했다.그래도 고승철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자성에게 전화를 걸어 당시의 상황을 물었다. 유자성은 노발대발하면서 심미진을 탓하더니, 온다연은 유씨 가문과 일절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했다.고씨 가문은 이제야 시름을 놓고 경찰을 닦달했다. 3일 안에 온다연을 잡지 못하면 경찰까지 고소하겠다면서 말했다. 그들은 또 온다연을 잡은 사람에게 1억 원의 현상금을 준다고 했다.덕분에 온다연은 경원 전체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유씨 가문의 내연녀 심미진이 데려온 조카가 멋모르고 고유정을 건드렸다가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고 말이다.동시에 더 듣기 안 좋은 버전의 소문도 있었다. 온다연의 어머니도 사실은 내연녀였고, 남의 가정에 간섭했다가 버림받고 자살했다는 소문이었다.이런 소문이 생기자마자 여러 집안의 사모들이 입을 보탰다. 그들은 정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다연의 어머니가 어떻게 남의 가정에 간섭했을지 추측했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경호원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틈을 타 유강후가 이어서 말했다.“이번 일은 다들 아무 말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게 제일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손해를 입는 건 당신들이니까요!”말을 마친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곧장 병실로 올라갔다.온다연은 점심때쯤에야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깬 온다연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안심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과일을 깎고 있는 모습이었다.안심의 눈가가 빨갛게 부은 걸 발견한 온다연은 그녀가 울었을까 봐 놀란 마음에 다급히 일어나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안심을 손에 쥐고 있던 사과를 내려놓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젯밤 윤희가 사고가 났어. 윤희가 새 차를 몰고 해안가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다가 차랑 같이 바다에 빠졌어. 그리고 윤희를 찾았을 땐, 이미 몸이 차게 굳은 후였지. 근데 윤희 몸에 구타와 모욕의 흔적이 있었다고 하더라...”안심은 목이 멨다.“얘가 대체 누굴 건드렸길래 이렇게 처참하게 가게 됐는지 모르겠어.”안윤희는 안씨 가문의 장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데릴사위로 안씨 가문에 들어갔고 어머니는 조용하고 집안일에 그다지 능하지 않았기에 안윤희는 어릴 때부터 안심의 손에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비록 안윤희가 후에 많이 엇나갔다고 해도 자신이 직접 키운 아이가 그토록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만큼은 안심을 가슴 아프게 했다.온다연도 충격을 받았지만 그보다도 안심이 더욱 걱정됐다.온다연이 안심을 오랫동안 위로한 끝에 안심은 겨우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안심은 온다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사실 나도 윤희가 많이 변한 건 알고 있었어. 오늘 아침 정보를 입수했는데 걔가 글쎄 테러조직의 작은 두목이었다는 거야. 그 과정에서 악행도 적지 않게 저질렀고 말이야. 그래서 예측하건대 원수에게 죽임을 당해 그런 지경까지 이른 것 같아.”“안씨 가문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 두고 다들 추측이 난무하는 중이야. 어떤 사람은 진씨 가문에서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을 건드려서 윤희가 잔혹하
유강후는 맞잡은 손에 힘을 줘서 온다연을 단단히 업은 채 작게 속삭였다.“전에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아프잖아요. 유나 씨, 우리 다시 시작해요.”온다연은 점점 더 피곤해져 유강후의 등에 업힌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는 몽롱하게 중얼거렸다.“우린 같이 있은 적이 없는데 왜 다시 시작하자는 거예요? 빨리 알려줘요, 우리 전에 대체 무슨 사이였어요...”유강후는 대답하지 못했다.한참 지나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리 둘 사이에 작은 오해가 있었어요. 그리고 많은 일이 있었죠. 그다지 좋은 일들은 아니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오히려 좋은 거예요.”온다연은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유강후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온다연의 손이 맥없이 툭 떨어졌다.유강후는 다른 한 손으로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 너무나도 부드러웠다.온다연은 그렇게 유강후의 등에서 잠들어버렸다.유강후는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쉬며 고개를 돌린 순간 쇼윈도에 비친 자신과 온다연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온다연은 조용히 유강후의 등에 업혀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그 순간, 유강후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유강후는 3년 전의 그날 밤이 떠올랐다. 그날 밤에도 온다연은 지금처럼 얌전히 유강후의 등에 업혀 잠들었었다. 유강후는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고요하고 편안하게 둘이서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줄만 알았다.하지만 이후에 유강후는 그 화면이 생각나는 많은 밤낮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그리고 오늘, 그때 그 화면이 또다시 재생되었다. 이는 어쩌면 길고 길었던 고통의 시간이 끝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유강후는 유리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속삭였다.“다연아, 넌 계속 우리가 예전에 무슨 사이였는지를 궁금해했었지? 지금 알려줄게, 넌 내 아내야.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따뜻하고 축축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저 바다도 눈물겨운 사랑의 맹세를 알아주기라도 하듯 그의 절절한 약속을 바닷바람에 실어 흩날려 보낸다.
유강후는 온다연이 너무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결국 유강후는 보기에 그리 매워 보이지 않는 것들을 골라 양념을 반쯤 덜어내고 온다연의 접시에 놔주었다.온다연은 매워서 입술이 빨갛게 퉁퉁 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만 먹었다.절반쯤 먹었을 때, 둘의 테이블 앞에 누군가가 멈춰 섰다.“온다연?”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유난히 말끔한 얼굴을 마주했다.눈앞의 그 사람은 깔끔한 생김새에 눈꼬리에는 눈물점을 매달고 있었다.온다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머릿속이 무언가에 의해 뒤죽박죽이 되면서 또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눈앞의 익숙한 듯 낯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누구신데 제 예전 이름을 알고 계시죠?”그 사람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에 유강후가 일어나 온다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사람 잘못 보셨습니다.”그 사람은 유강후를 보고는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제, 제가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그 사람은 말을 하면서도 온다연을 힐긋 보았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처음 본다는 눈빛 자길 바라보고 있었다.유강후는 한껏 차가운 태도로 그 사람을 제지했다.“안 갑니까?”그 사람은 황급히 대답했다.“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몇 걸음 가서 참지 못하고 또 돌아보았을 때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유강후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유강후의 눈에는 경고의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히 서려 있었다.그는 그곳에 더 머무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른 길로 재빠르게 빠져나갔다.그가 자리를 뜨자 온다연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저 사람은 그냥 사람을 잘못 봤을 뿐인데 그렇게 사납게 굴어서 뭐해요. 언성은 왜 또 그렇게 높여요?”유강후는 자리에 앉아서 계속해서 양념을 덜어내며 물었다.“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온다연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조금요. 저 사람은 진짜 절 알까요?”“그럴리가요. 유나 씨는 전에 계속 H 국에서 살았었잖아요. 근데 이곳에 어
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이제 가요, 이 정도면 둘이 먹기에도 충분하죠?”온다연은 입을 삐죽이고는 대답했다.“당연하죠, 저 많이도 못 먹어요.”온다연은 마르다 만 유강후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일단 옷부터 사러 갈래요? 좀만 더 입고 있다간 냄새나겠어요.”비록 거리가 크고 가게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먹자골목이었던지라 쇼핑몰과 달리 고를 수 있는 옷가게도 없었다. 게다가 유강후는 키도 크고 덩치도 있어서 젊은이들의 튀는 스타일과는 영 맞지 않았다.결국 온다연은 근처 노점에서 아무 티셔츠와 반바지 하나를 샀다.유강후도 딱히 거절하는 내색 없이 옷을 갈아입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 또 한 번 얼굴이 붉어졌다.사실 온다연은 콧대 높은 도련님인 유강후에 노점에서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옷을 입혀 놀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두 합쳐 2만 원도 넘지 않는 옷도 그렇듯 멋들어지게 소화를 할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싸구려 옷도 유강후가 입으니 더할 나위 없이 고급스럽고 비싸 보였다.심지어 2000원도 채 되지 않는 신발도 유강후가 신으니 명품 같아 보였다.온다연이 넋이 나간 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한 유강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본인 자신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많이 이상해요?”온다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귀가 빨개진 채 애꿎은 돈만 꾹 쥐고 유강후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이제 가요.”비록 이미 새벽이었지만 야시장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시간대야말로 하루의 시작이었다.잠시 후, 점점 더 많은 노점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열기로 가득한 거리에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흥분했다.최근 3년 동안 온다연은 늘 집에서 건강을 회복하느라 집 밖을 나서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외출한다고 해도 진수현 부부와 함께 고급지고 사적인 장소에 가는 게 다였다.음식도 늘 영양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만든 음식들만 먹어왔을 뿐,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지저분한 음식은 입에도 댈 수 없었다.그래서 이런 곳
유강후는 온다연을 심각하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둘은 그렇게 한참 동안 대치상태를 유지했고 방안은 그야말로 물 뿌린 듯 고요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어느새 밖은 비가 다 그치고 밝은 달이 떠올랐다.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덕분에 방안에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그제야 유강후는 몸을 움직여 걸어두었던 옷을 다시 입고 온다연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럼 갈게요.”그 시각, 온다연은 화가 어느 정도 누그러들었고 아까 했던 모진 말들이 혹시나 유강후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걱정되었지만 또다시 이미 뱉은 말을 번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저 선 자리에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유강후는 밖을 한번 내다보고는 창문을 열었다.그리고는 갑자기 손을 뻗어 온다연을 당겨다 품에 안고 날렵한 치타처럼 순식간에 창가로 뛰어올랐다.온다연은 깜짝 놀라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유강후는 낮게 속삭였다.“절 꽉 잡아요.”온다연은 밖을 내다보았고 벽에는 언제 설치했는지 모를 줄사다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깜깜한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선명해졌다.온다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이건 언제 한 거예요?”유강후는 여전히 작게 속삭일 뿐이었다.“손 떼지 말아요. 제 목 꽉 잡아요.”말을 마친 유강후는 한쪽 팔로 온다연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고는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비록 2층밖에 되지 않는 높이였지만 온다연은 조금 긴장이 돼 재빨리 유강후의 목을 단단하게 끌어안았다.2층밖에 되지 않는 높이였던지라 유강후는 한 손으로 온다연을 안고 한 손으론 줄사다리를 잡고 순식간에 땅으로 내려왔다.온다연이 아직 반응하지 못한 틈을 타 유강후는 온다연을 조심스레 정원의 계단 위에 내려주었다.유강후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작게 속삭였다.“빨리 가요, 여긴 10분에 한 번씩 순찰해요!”곧이어 유강후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온다연을 가볍게 둘러업고 재빨리 병원의 정원을 떠났다.병원 근
하지만 이번엔 이미 늦었다. 유강후가 너무 강력한 나머지 온다연이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어떤 수를 써도 먹히지 않았다.그러나 온다연은 절대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단지 부끄러운 것뿐만이 아니라 촌수도 망가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온다연의 대답을 듣지 못한 안심은 다시 한번 물었다.“다연아?”온다연은 허겁지겁 대답했다.“금방 나가요!”말을 마친 온다연은 유강후의 손을 꽉 깨물며 낮게 말했다.“비켜요, 나가야 하니까. 엄마가 진짜 들어와서 강 대표님이 여기 있는 걸 보기라도 한다면 그땐 강 대표님이 저희 아빠한테 맞아 죽을 거예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또 한 번 입맞춤으로 온다연의 입을 막았다.휘몰아치는 폭풍 같은 키스는 온다연의 속이 뒤틀리게 했고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은 몸으로 전해져 덜덜 떨기까지 했다.온다연은 쉴 새 없이 반항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고 유강후의 속박만이 더 심해질 뿐이었다.온다연이 대답이 없자 문밖에서는 안심이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다연아, 문 열어! 안 열면 사람 불러서 문 딸 거니까 그렇게 알아!”온다연은 너무 급해 난 나머지 땀까지 삐질삐질 새 나왔으나 유강후는 여전히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온다연은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밖에서 문손잡이를 돌리는 것을 발견한 온다연은 타오를 것 같은 얼굴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는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가냘픈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아저씨.”유강후는 그제야 온다연을 놓아주었다.온다연은 얼른 세면대에서 내려와 머리를 정리하고는 문을 열었다.문밖에 있던 안심은 한눈에 온다연이 어딘가 다름을 알아챘고 막 입을 열려던 찰나에 에어컨 아래에 걸려 있는 남자 셔츠와 정장 바지를 발견했다.그 순간, 안심은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안심의 눈빛은 딸의 묘하게 흐트러진 머리와 살짝 부은듯한 입술에 몇 초간 머물렀다.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 나긋나긋하게 말했다.“별일 없으면 됐어. 어서 가서 씻어, 엄마는
하지만 유강후를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기 전에 온다연은 그의 품속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유강후는 자신의 품으로 넘어진 온다연과 함께 화장실로 들어갔다.그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안심이 도착한 게 틀림없었다.온다연은 급한 마음에 짜증을 내며 말했다.“이거 놔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온다연의 손을 잡고는 화장실 문을 발로 차 닫아버렸다.그리고는 온다연을 벽에 세우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온다연은 먹혀들어 가는 소리를 내며 유강후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이거 놔요, 읍...”유강후는 숨이 딸린 듯 온다연을 놓아주고는 잔뜩 불퉁해진 말투로 물었다.“아까 말하던 거 계속 말해봐요, 저번에 염 뭐라고요? 염지훈이 유나 씨 방에 왔다 갔나요?”온다연은 온 신경이 문밖에 쏠린 채 작게 말했다.“놔요, 엄마가 왔다니까요!”하지만 쉽게 놔줄 유강후가 아니었다. 유강후는 온다연은 번쩍 들어 올려 세면대 위에 앉히고는 망설임 없이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그때, 이미 병실 안으로 들어온 안심은 딸이 보이지 않자 화장실로 향했다.“다연아?”온다연은 급해 나서 훌쩍이며 애를 써보았지만 손과 허리가 모두 유강후에 꽉 잡힌 상태라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 없었다.안심은 걱정되어 다가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다연아?”유강후는 그제야 온다연을 놓아주었다.온다연은 안심이 당장이라도 들어올까 봐 겁에 질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작게 속삭이기 바빴다.“엄마, 저 안에 있어요.”안심은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다연아 어디가 불편한 거니?”온다연은 황급히 둘러댔다.“아니요, 저 괜찮아요.”안심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원래 비가 금방 내리기 시작할 때 오려고 했는데 네 사촌 언니한테 일이 좀 생겨서 지금에야 왔어. 아까 천둥소리에 놀랐지?”온다연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대답했다.“아니요... 읍...”유강후가 이번에는 더 격렬하게 입을 맞춰왔다.온다연은 숨이 딸려 기를 쓰고 유강후를 밀어
비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불어 들어왔고 온다연은 갑자기 들이닥친 비바람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진짜 가려고요?”유강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작게 대답했다.“저더러 가라면서요?”온다연은 말문이 막혔다.유강후 더러 가라고 한 건 맞지만 아직은 비바람이 거센 데다가 저기로 나갔다가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온다연은 다시 중얼거렸다.“안 가도 되고요...”유강후의 입꼬리가 매끈하게 휘어졌고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아까는 저보고 가라더니, 자금은 또 가지 말라고 그러네요? 그래서 저 가요, 가지 말아요?”온다연은 귀가 빨개진 채 이를 깨물고는 말했다.“선 넘지 마세요. 전 이미 강 대표님을 가지 말라고 말렸어요. 그래도 가고 싶으면 가도 되고요.”말을 끝낸 온다연은 침대에 돌아누운 채 다시는 유강후를 보지 않았다.유강후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일부러 창문을 굳게 잠갔다.그 소리를 들은 온다연은 유강후가 정말 가버린 줄 알고 섬찟해서 얼른 몸을 돌려 정말 그가 가버렸는지 확인했다.하지만 유강후는 창가에 서서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온다연은 순간 유강후에 놀아난 것 같은 기분에 화가 나 고개를 홱 돌려 다시 누워버렸다.유강후는 그런 온다연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유나 씨가 가지 말라고 한 거예요. 나중에 또 절 쫓아내면 그땐 유나 씨 말을 듣지 않고 혼낼 거예요!”온다연은 유강후의 젖은 옷이 떠올라 볼멘소리로 말했다.“젖은 옷이나 갈아입어요!”유강후는 작게 대답했다.“하지만 전 수건 말고는 다른 옷이 없는걸요. 나중에 또 제 행색 보고 뭐라고 하려고요?”온다연은 이를 꽉 깨물고는 귀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른 채로 말했다.“일단 갈아입어요. 젖은 옷을 어떻게 입고 있어요?”유강후는 재빠르게 아까의 차림으로 돌아왔다.고작 수건 하나를 걸친 채로 아무렇지 않게 온다연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온다연은 눈썹을 꿈틀하고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본인이 가지 말라고 잡은 것이니 더 옆으로 가서 앉으라고
온다연은 너무 머쓱한 나머지 유강후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럼 사람을 시켜서 옷을 한 벌 가져오라고 하세요!”유강후는 창밖을 한번 보고는 말했다.“비가 이렇게나 많이 오는데 누구한테 부탁할까요? 문 앞으로 가져오라고 할까요?’온다연은 말문이 막혔다.문 앞에는 온통 아버지가 보낸 경호원들이었고 유강후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 걸 알기라도 하면 유강후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온다연은 유강후의 옷을 가져올 방법만 생각했을 뿐, 유강후를 당장 방에서 내보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고민하는 온다연의 모습을 본 유강후가 말했다.“그만 해요. 전 단지 유나 씨와 함께 있어 주려고 온 것뿐이에요. 비가 그치면 바로 나갈게요. 그러니까 더 고민하지 않아도 돼요.”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갈 때도 그런 꼴로 갈 수는 없잖아요. 옷을 에어컨 밑에 놔두는 건 어때요. 그럼 갈 때쯤이면 마를지도 모르잖아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말을 따랐다.온다연은 옷을 걸어두는 유강후를 보며 작게 말했다.“방금 엄청 이상한 꿈을 꿨어요. 꿈에서 강 대표님을 아저씨라고 불렀어요...”유강후는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고 가슴 한편이 시려왔다.아저씨...온다연이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은 지도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꿈에서 절 아저씨라고 불렀다고요?”“네, 꿈은 정말 이상한 곳 같아요. 온갖 일들이 다 일어나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에요...”온다연은 얼굴을 붉히고는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전통 한옥이 있었는데 중간에 엄청나게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한옥을 거의 다 가릴 정도로 엄청나게 큰 나무였어요. 그리고 집사 한 명이 있었는데 늘 얼굴을 찡그리고...”유강후는 온다연의 말에 몸을 돌렸다.“옛날 일이 생각난 거예요?”“옛날 일이요?”온다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찌푸렸다.“그곳이 제가 살던 곳인가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제 양부모님께서는 모두 평범한 분들이세요. 경원시의 전통 한옥을 찾아봤었는데 엄청 비싸던데요? 얼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