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유강후가 들어왔다. 그는 온다연이 창가에 앉아 넋을 잃고 밖을 내다보는 모습을 발견했다.이렇게 시끌벅적하고 으리으리한 곳에서 그녀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의 떠들썩함은 그녀와 무관한 것 같았다. 아무리 좋다 해도 그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유강후는 온다연에게서 젊은 여자아이가 가져야 할 패기를 본 적이 없고 우울하고 걱정이 많다는 느낌만 받았다.유강후는 천천히 걸어가 온다연의 손을 잡았더니 차가운 손바닥에 땀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또 속이 안 좋아?”온다연은 정신을 차리고 유강후의 친구를 훑어보았다. 마치 그들이 자기를 보는 것이 두려운 것처럼 말이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친구들이 담화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내 친구들이니 무서워하지 마.”온다연은 고개를 푹 떨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너무 답답한데 나가서 산책이나 하고 싶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하지 않았다. 온다연은 아침에 인사도 없이 떠난 일 때문에 자기가 유강후 앞에서 신임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녀는 유리창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는 곳에 물고기가 사는 것 같아요.”유강후가 거절할까 봐 온다연은 말을 덧붙였다.“여기서 보면 제가 보일 거예요.”그녀는 모처럼 단숨에 이렇게 많은 말을 했다.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부드럽게 말했다.“너무 멀리 가지 마. 사람을 시켜 약을 가져다 달라고 할게.”갇힌 곳에서 풀려난 듯한 온다연은 눈을 빤짝이더니 가방을 들고 옆문으로 재빨리 걸어 나갔다.경원시의 저녁은 시원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실내보다 훨씬 편안했다. 온다연은 외진 곳을 골라 앉았다. 비록 여전히 눈에 띄겠지만 적어도 유강후와 그의 친구를 직접 대면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온다연은 가져온 케이트를 조금씩 물고기에게 주었고 산들바람이 불자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졌다.2분도 되지 않았는데 듣기 거북한
아픔을 느낀 온다연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도로 힘껏 당기면서 말했다.“우리 이모는 내연녀가 아니야. 이모가 시집왔을 때 유하령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어.”고유정은 온다연이 말대꾸하는 것을 보자 화를 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도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천한 년, 3년 전부터 강후 삼촌이 네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던데 감히 강후 삼촌을 꼬셔? 이게 네가 할 짓이야? 이것만으로도 너를 죽을 때까지 괴롭힐 수 있어.”그리고 고유정은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그녀를 어두운 쪽으로 끌어당기자 온다연은 고유정의 팔을 잡고 세게 물었다.고유정은 고통을 호소하면서 이내 온다연을 뿌리쳤다. 고유정은 화가 나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온다연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지금의 온다연은 마치 복수를 꿈꾸는 어린 짐승 같았다.“이 계집애가 감히 나를 물어?”고유정은 달려들어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이를 갈았다.“주한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하령이가 널 괴롭히려고 남자들을 불렀어. 그런데 그 자식이 너를 살려달래. 결국 널 대신해서 남자 세 명을 모시면서 잠자리했지. 세 남자가 주한이를 사정없이 갖고 놀았어. 그리고 동영상도 찍었지. 주한이 바지가 온통 피투성이로 될 만큼 말이야. 그리고 그걸 인터넷에 올리려고 했는데 주한이가 거절했지 뭐야.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뛰어내려 자살했지. 너는 모르지. 네년 때문에 주한이가 죽었어. 너를 위해 사정하지 않았더라면 세 남자한테 이렇게 놀림을 당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뛰어내려 자살하지도 않았겠지? 남자한테 놀아나는 동영상이 아직도 내 핸드폰에 있는데 한번 볼래?”...온다연은 몸을 심하게 떨었고 숨이 막혀왔다. 그녀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솟아올랐고 이 악당들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주한, 주한,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주한이가 이렇게 죽었다니.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비참한 고통을 겪으면서 죽었다니.주한이가 그렇게 죽었는데 이 나쁜 놈들은 왜 아직도 살아 있지?왜!!!온다연은 머릿
고유정의 비명에 금방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강제적으로 온다연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고유정의 목덜미를 있는 힘껏 깨문 그녀는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정말 살점이라도 뜯어낼 기세였다.고유정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온다연을 때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입을 놓지 않았고, 고유정이 힘이 풀릴 때까지 고집을 부렸다.유강후가 달려갈 때까지도 온다연은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고유정의 목덜미를 물고 있었다. 눈빛도 평소와 달리 쑥스러움 하나 없이 독기가 서렸다.고유정은 욕설을 내뱉으며 온다연을 때렸다. 곁에서 한 사람은 있는 힘껏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런데도 그녀는 느껴지는 것이 없는 듯 치아에 힘을 풀지 않았다.인파를 뚫고 들어가 온다연의 손을 잡은 유강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다연아... 온다연...”차갑지만 힘 있는 손의 촉감과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온다연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댔다. 그리고 천천히 고유정을 놓아줬다.초점 없이 흐릿하던 눈빛이 다시 또렷해지고 유강후의 얼굴이 보였다. 차가운 인상의 유강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얼려버릴 정도의 차가움이었다.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숙인 온다연은 바닥에 쓰러진 고유정을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는 피범벅이 되었고, 말할 힘도 없는 듯 겁먹은 눈빛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온다연은 몸을 흠칫 떨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경찰차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아무래도 누군가 신고한 모양이다. 이 지역은 시내에 속해 있어서 경찰이 빠르게 출동할 수 있었다.온다연은 놀란 눈빛으로 경찰차를 바라봤다. 하도 당황한 탓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어느 순간 그녀는 어머니를 죽기 직전까지 때리고 경찰에게 잡혀갔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때도 경찰차는 이런 소리를 내며 다가왔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창문으로 몸을 던져 피떡이 된 채 숨을 거뒀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때 가로수 아래에 있던 온다연이 약간 꿈틀거리더니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머리 한 번 돌리지 않고 비틀비틀 인행도로 걸어갔다.인파 속에서 그녀는 금방 자취를 감췄다. 경찰과 경비는 그 구역을 세 번이나 샅샅이 뒤져보고 CCTV까지 확인했는데도 그녀를 찾지 못했다.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 다친 채로 증발해 버린 것이다.고씨 가문에서는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소중한 딸이 머리에는 피멍이 들고 곳곳에 살점이 뜯겨 나갔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녀가 얻어맞는 영상은 빠르게 인터넷에서 퍼져가고 있었다.심하게 다친 고유정은 아직도 입원해 있었다. 뼈까지 다쳐서 수술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체면이야 어찌 됐든 회사 주식이 흔들린 것이 가장 용서할 수 없는 큰 문제였다.그들이 조사한 바로 온다연은 유자성의 재혼 상대의 조카에 불과했다. 어릴 적부터 유하령과 유민준에게 괴롭힘당한 건 물론이고, 부모도 없어서 늘 왕따를 당하고는 했다. 아무리 유씨 가문에서 자랐다고 해도 그녀의 명성은 도우미만도 못했다.그래도 고승철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자성에게 전화를 걸어 당시의 상황을 물었다. 유자성은 노발대발하면서 심미진을 탓하더니, 온다연은 유씨 가문과 일절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했다.고씨 가문은 이제야 시름을 놓고 경찰을 닦달했다. 3일 안에 온다연을 잡지 못하면 경찰까지 고소하겠다면서 말했다. 그들은 또 온다연을 잡은 사람에게 1억 원의 현상금을 준다고 했다.덕분에 온다연은 경원 전체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유씨 가문의 내연녀 심미진이 데려온 조카가 멋모르고 고유정을 건드렸다가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고 말이다.동시에 더 듣기 안 좋은 버전의 소문도 있었다. 온다연의 어머니도 사실은 내연녀였고, 남의 가정에 간섭했다가 버림받고 자살했다는 소문이었다.이런 소문이 생기자마자 여러 집안의 사모들이 입을 보탰다. 그들은 정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다연의 어머니가 어떻게 남의 가정에 간섭했을지 추측했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유강후의 표정은 한결같이 차가웠다. 그러나 어두운 눈빛이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긴장할 것 없어요. 이 치마를 어떻게 얻었는지만 알려줘요.”말투에서부터 느껴지는 위압감에 사장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치마를 건네면서 말했다.“어제저녁 10시쯤에 고등학생 정도 되는 것 같은 여자애가 이 치마를 팔러왔어요. 4000만 원 정도 하는 신상인데 회수할 수 있냐고요. 저는 본 적 없는 디자인이라 당연히 가짜라고 생각하고 쫓아내려고 했죠. 근데 그 여자애가 끝까지 신상이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짝퉁 같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본 적 없는 건 사실이니까 기부하는 셈으로 20만 원을 주고 팔았죠. 후에 다시 찾아보고 아직 판매하지 않은 다음 시즌 신상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단추에서 도련님이 남긴 흔적을 발견해 에이전시에 연락한 거예요.”말을 마친 사장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면서 유강후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유강후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의 밥그릇이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다.유강후는 치맛자락을 매만지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여자 어때 보였어요?”사장은 기억을 되짚으며 대답했다.“어디 아픈지 안색이 좋지 않았어요. CCTV에 찍혔을 텐데 확인하시겠어요?”이때 이권이 밖에서 들어오면서 말했다.“찾았습니다. 근처의 오래된 아파트에 있는 모양입니다.”유강후의 어두운 표정은 저승사자를 연상케 했다. 이권도 감히 그를 직시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너무 오래된 아파트라 기초 시설이 전혀 안 되어 있습니다. CCTV도 없어서 인공위성으로 겨우 찾아냈습니다.”“앞장서.”이곳은 경원 최초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 적어도 40년의 역사는 있을 것이다. 그런 곳이 이제는 빈민가가 되어 거의 만 명의 되는 가구가 살고 있다.멀지 않은 곳에서 보이는 신형 아파트와 이곳은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골목길도 엄청 좁아서 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차를 골목에 세우고 20분 정도 걸어 유
문을 열자마자 심각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그래도 조금 청소한 티는 났다.소파는 20년 전에 유행하던 목제 소파이다. 위에는 원래 모습을 알 수 없는 누런 천이 덮여 있었다. 나무 바닥은 전부 갈라져 있었는데, 한 발짝 옮길 때마다 기괴한 삐걱 소리가 났다.낡은 테이블에는 보온병, 종이컵, 그리고 두 개의 컵라면이 있었다. 덜렁거리는 창문 사이로는 계속 바람이 새어 들어왔고 공기 속에는 선명한 피비린내가 있었다.유강후는 점점 어두워지는 눈빛으로 온다연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몇 번 더 불렀는데도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도 없었다.이권은 황급히 말했다.“제가 경비한테 물어봤는데 최근 외출한 적 없다고 합니다. 아마 방에 있을 것 같습니다.”자그마한 집에는 방 두 개가 있었다. 유강후는 오른쪽 방을 힐끗 보더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방 중앙의 침대 위에는 백옥같이 희고 작은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큰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가느다란 팔다리는 보라색 침대 시트 위에 완전히 드러났다.햇빛은 낡은 창을 통해 얼룩덜룩 그녀의 몸을 비추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머리카락은 침대 위에 마구 흩어졌고, 입술 색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보였다.입술 가장자리에서 목까지는 마르지 않은 검붉은색 핏자국이 있었다. 유강후는 그런 온다연을 보자마자 안색이 변했다.“다연아!”온다연은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강후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코에 손가락을 대보았고, 따듯한 숨결을 느낀 다음에야 한시름 놓았다.위험천만한 사고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던 유강후의 눈빛은 마치 심연에 빠진 것처럼 어둡고 차가웠다. 그는 손을 올려 온다연의 티셔츠를 벗겼다. 가슴과 복부 전체에 멍이 들어 있었고, 긁히면서 생긴 핏자국은 아직 마르지도 않았다.유강후의 손은 약간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잠긴 목소리로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다연아.”여전히 반응이 없자 유강후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그
유강후는 온다연의 차가운 손을 잡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그래, 병원에 가지 말고 집에 가자.”그는 이권이 건네는 담요를 침대에 깔고 온다연의 몸에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리고 최대한 누운 자세 그대로 안고 아래층에 내려갔다.그의 아우라에 경비는 왜 사람을 이런 식으로 안고 나가는지조차 묻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 병원에 가지 않고 한 한의원으로 향했다.노련한 한의사는 온다연의 상태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진찰을 시작했다.“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습니다. 내장이 손상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상태로 봤을 때 감염이 확실한 것 같군요.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합니다.”한의사는 거의 죽어가는 온다연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저는 한의사라 수술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저희가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다른 병원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그 순간, 온다연이 유강후의 옷깃을 잡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한의사에게 말했다.“이곳에서 수술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술실 좀 빌리겠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원에서 가장 뛰어난 외과 의사가 헬리콥터를 타고 이 작은 한의원에 도착했다. 50대가 되는 최고 전문가도 온다연의 상태에 놀라며 즉시 수술을 결정했다.그러나 그녀의 부상이 심각하고 하도 오래 방치되어서 한의원의 장비와 시설로는 수술을 진행할 수 없었다. 의사는 빨리 큰 병원으로 이송할 것을 권했다.온다연은 여전히 유강후의 옷깃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허약했다. 유강후는 맞은편의 사립 병원을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다연아, 우리 병원에 가는 건 어때?”온다연은 입을 달싹거렸지만 소리를 내지 못했다. 분위기는 최고로 가라앉았고, 공기 중에는 죽음의 냄새가 감돌았다.한의사와 이권은 식은땀을 흘리며 유강후를 주시했다.
유강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말했다.“시세의 두 배를 주고 사들여.”이권은 그가 병원을 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래 그룹에 이미 훨씬 좋은 병원이 있기 때문이다.이 병원은 그저 일시적으로 빌려 쓰는 것에 불과했다. 병원을 사들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는 말이다.“이 병원은 투자할 가치가 없습니다. 규모가 너무 작고 장비도 뒤떨어져요. 전문가도 전부 외부에서 초빙해야 하는데...”“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유강후의 목소리는 매섭고 냉랭했다.“당장 가서 협상하지 않고 뭐해?”이권은 더 이상 말할 용기가 없어서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7시간이 지나고 온다연은 수술실에서 나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유강후는 그녀를 볼 수조차 없었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 중 한 명인 임교수는 유강후에게 익숙한 인물이었다. 그는 수술실에서 나와 고개를 흔들었다.“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가 최근 몇 년 동안 해본 수술 중 가장 어려운 수술이었어요. 사고가 나자마자 바로 이송되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감염이 너무 심해서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두어 번 빨고는 바로 비벼서 껐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교수님, 저한테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 잘 부탁드립니다. 꼭 문제없이 회복되어야 합니다.”임교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지금은 환자가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이 며칠을 견뎌내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견디지 못하면...”임교수는 말을 멈추고 화제를 바꿨다.“수술 중 가장 강력한 항생제를 사용했습니다. 아주 드물게 사용하는 특효약입니다. 며칠 동안은 제가 직접 지켜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입니다. 부디 양해해 주세요.”국내 최고의 의사로 불리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유강후는 말을 잇지 않고 감사 인사만 한 후 병실을 나섰다.온다연이 입원해 있는 층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복도는 무섭도
온다연은 꿈속에서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가슴은 누군가에게 심하게 짓눌려 폭발할 것처럼 아팠다.“아니야, 아니야.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었어.”그녀는 필사적으로 변명했지만 아이는 그저 울기만 했다.“엄마도, 아빠 모두 날 원하지 않았어요.”꿈에서 깨어난 후 온다연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베개마저 축축했다.그녀는 아이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무겁고 아팠다.분명 아이가 곁에 있는데 왜 그런 이상한 꿈을 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아이가 눈을 떴다. 검고 깊은 눈동자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가끔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 미소에 텅 빈 마음이 서서히 채워지는 기분이었다.온다연은 아이를 꼭 안으며 그것이 단지 꿈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오후에 그녀는 한옥에 물건을 가지러 갔다. 그러나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늘 끼고 있던 팔찌가 끊어져 버렸다.바닥에 흩어진 구슬을 바라보던 온다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그 팔찌는 유강후가 꼭 착용하라고 해서 그녀가 항상 끼고 있던 것이었다. 유강후 본인도 늘 팔찌를 차고 다녔다.가끔 그녀가 잊고 착용하지 않으면 유강후가 직접 손수 채워주곤 했다.“이 팔찌는 내가 대사님한테서 직접 구한 거야. 너를 평생 무사히 지켜줄 거야.”그가 이렇게 말했었다.그러나 지금의 그녀와 유강후 사이에는 더 이상 ‘무사함’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허리를 숙여 구슬 하나를 주웠다.검은 흑요석은 아직 그녀의 체온을 머금고 있었다.매끄럽게 다듬어진 구슬은 사실 흔한 재질로 특별할 것 없는 물건이었다.하지만 그중 하나, 호박 구슬만은 조금 달라 보였다.온다연은 호박 구슬을 들어 세심히 살펴보았다.손끝이 구슬을 스칠 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묵직한 아픔이 밀려왔다.가슴이 누군가의 손에 짓이겨질 것처럼 아팠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다.그 순간, 어젯밤 꿈이 떠올랐다.“왜 날 버린 거예요!”“여기 너무 추워요!”...꿈속의 아이가 했던 말들이 생
이 비즈니스 제국은 마치 유강후 본인처럼 강력하면서도 사람을 불길 속으로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녔다.이 순간, 그녀는 마치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녀는 그림자 속에 숨어, 화려한 불빛 속에 서 있는 유강후를 바라보았었다.그 소년은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단 한 번의 눈길을 주었을 뿐인데, 그 후로 그는 그녀의 꿈속 단골이 되고 말았다.웅장한 건물들 옆을 지나는 차는 유독 작아 보였다. 그녀가 그의 앞에 서 있을 때와 꼭 같았다. 그토록 연약하고 하찮게.그러나 아무리 미약하고 저렴해 보이는 장난감일지라도, 그 자체의 존엄성은 있는 법.이제 그녀는 지쳤다.과거의 모든 것들은 이미 지나갔고, 앞으로 남은 인생은 새로운 시작이었다.온다연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기사님, 조금 더 빨리 가주세요.”병원에 돌아와, 온다연은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아이의 침대 옆에 잠시 앉아 있자, 장화연이 돌아왔다.온다연이 병실에 있는 걸 보자 마치 안도한 듯, 그녀는 다시 나갔다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그녀는 온다연에게 전화기를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도련님께서 요즘 바쁘셔서 돌아올 수 없으세요. 한번 통화해 보세요.”온다연은 차분하게 전화를 받아들었다.유강후의 익숙한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들려왔다.“다연아, 요즘 내가...”온다연은 그의 말을 끊어버리며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아요!”그녀는 휴대전화를 꽉 쥐며 속으로 말았다. “당신이 바쁜 거 알아요. 괜찮아요.”아프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하지만 그 아픔이 뭐가 중요할까?지금 그가 나오지 못한다는 건 차치하고, 설령 나올 수 있다 해도 그가 이 아이 곁으로 돌아올 리가 없었다.본처의 아이도 아프니 그는 원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유강후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천천히 말했다.“다연아, 나 보고 싶었어?”온다연은 잠시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보고 싶었어요.”유강후는
하지만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뒤쫓아온 경찰이 그를 붙잡았다.“대표님, 함부로 행동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도 곤란해집니다!”장화연과 로운도 따라왔다.“도련님, 왜 그러세요?”유강후는 차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얼굴이 창백해졌다.“장 집사, 다연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장화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사모님은 병원에 계세요. 우림 도련님이 아프셔서 병실을 떠나지 않으려고 해요. 잠잘 때도 우림 도련님 곁을 지키고 계세요.”유강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여전히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온다연이 아이에게 얼마나 깊이 마음을 쏟고 있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을까?그는 아까 온다연이 그 차에 타고 있다고 느꼈었다!“장 집사 휴대폰으로 다연이에게 전화해 봐.”장화연은 곧장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유강후의 얼굴이 굳어졌다.“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거지?”장화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사모님께서 핸드폰을 두고 화장실에 가셨을 거예요. 병원은 우리 사람들만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림 도련님께서 아프시니 사모님께서 어디로 갈 리 없으세요.”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경호팀에 연락해.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라고 해.”장화연은 말없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제 핸드폰도 아마 도청당할 수 있어요. 혹시 불안하시다면, 바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의 전화로 사모님과 연락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유강후는 주먹을 꽉 쥐며 속으로 다짐했다.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고통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났다.“장 집사,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두 사람 잘 부탁해.”장화연은 고개를 숙여 말했다.“제가 해야 할 입니다.”그녀는 말을 마친 후, 차로 돌아갔다.그 차가 멀어져 사라지기까지, 유강후는 잠시 그 자리
온다연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가세요.”장화연이 떠나자, 온다연은 곧바로 일어섰다.장화연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유강후는 회사에 아예 없었다.설령 회사에 있었다 해도, 그런 서류를 장화연이 가져갈 리는 없었다.직감적으로 장화연을 따라가면 그녀가 알고 싶은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냥 나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온다연은 병원에서 간단히 간호사복으로 갈아입고, 가볍게 병원을 빠져나왔다.서교 파출소 앞까지 따라갔을 때, 온다연은 그가 뭔가 큰일에 휘말린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새벽의 사무실은 여전히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문 앞에는 경찰차들이 가득했다.장화연이 파출소에 도착한 순간, 유강후는 그곳에서 걸어 나왔다.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하얀 셔츠 하나만 입고, 손목에는 은색 수갑이 뚜렷하게 빛났다.그리고 그의 옆에는 경찰 두 명이 서서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온다연의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녀는 택시 문에 손을 얹고 몸을 일으켰다.그때, 로운과 진시현이 다른 차에서 내렸다.온다연은 잠시 멈칫하며, 손을 천천히 문에서 떼었다.차가운 봄바람이 그녀의 뼈까지 시리게 만들었다.차창을 반쯤 열었지만 그 바람은 온몸을 휘감았는데 마치 그녀의 마음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파서 외치고 싶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택시 안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택시는 어둠 속에 숨겨져 있어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그때 로운이 멀리서 보이는 검은색 파사트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김원도 그 미친놈은 아직도 포기할 기미가 없네요. 대표님, 좀 더 연기해 주세요. 이제 그들이 시현이 신분을 의심하지 않게 될 거예요.”유강후는 검은 차를 오래도록 응시한 후,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진시현의 머리를 스쳤다.진시현은 낮게 속삭였다.“실례하겠습니다, 대표님.”말을 마친 그녀는 유강후를 부드럽게 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아이가 오늘 열이 났어요. 빨리 나와요. 네? 저 혼자 집에 있으면 너무 무섭다고
김원도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여기는 경원시야!”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게 뭐 어때서? 다시 나를 건드리면, 경원시에서도 너를 죽일 수 있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총을 던지고는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차가 장원을 떠날 때까지 김원도는 여전히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송지원은 냉정하게 말했다.“김원도 씨, 내가 당신이라면 당장 경원시를 떠날 겁니다. 여기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떠나는 유강후의 차를 예리하게 응시하던 김원도의 눈빛은 더욱더 악의에 차올랐다.송지원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로운에게 말했다.“이 사람들 다 처치해, 서둘러!”한 시간 전, 고위층은 긴급회의를 열었다.그들은 미래 그룹이 비상 무기를 사용하고, 저격수들을 동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비록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바로 경원시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들은 강경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조사 결과, 상부에서는 엄중히 경고했고 만약 30분 안에 모든 일이 정리되지 않으면 무력 진압이 불가피하다고 했다.그때에는 누구도, 설령 신선이라 해도 유강후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이 소식을 접해듣고 송지원은 급히 달려왔다.그는 유강후가 경원시에서 무력을 사용할 정도로 미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제시간에 도착했으니 다행이지, 만약 10분만 늦었어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헬리콥터들이 점차 멀어져 가자, 송지원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새벽 2시, 서교 파출소 안에서 유강후는 진술서를 마친 뒤,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이번 일은 너무 큰 소란을 일으켜 상위층에까지 긴급 연락이 갔고, 필요한 절차들을 다 밟아야 했다.하지만 이 일을 벌이기 전, 그는 그 후폭풍도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그의 개인 변호사, 미래 그룹의 수석 법무팀장인 허윤재는 이미 그에게 이번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 며칠간 이곳에 머물러야 할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그때, 큰 파도가 몰려오며 유람선이 흔들리더니 갑판 위의 여자와 아이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김원도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달려가려 했지만, 누군가가 그를 가로막았다.그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그는 냉혹하게 말했다.“유강후, 네 여자가 죽는 게 두렵지 않냐?”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가더니, 바로 뒤에 있는 기둥에 박혔다.그와 함께 김원도의 머리카락 일부가 잘리며 떨어졌다.하지만 김원도는 그저 미동도 없이, 여유를 부리며 웃었다.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유강후, 이 정도로 나를 겁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렇게 한다고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이럴수록 네가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어. 영상 속의 모자로 나를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어림없는 소리!”“나한테 아들이 하나뿐인 줄 알아? 그 애가 죽을 운명이면, 죽게 두면 되는 거지!”“유강후, 넌 여자 몇 명을 만나고 있어?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여자가 누구야?”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며, 서늘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노려보았다.“맞춰볼까? 가장 사랑하는 여자, 온다연 맞지?”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죽일 듯 노려보며 손을 천천히 들었다. 순간, 검은 총구가 김원도를 겨누었다.김원도는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쏴, 내가 겁낼 줄 알아? 이곳은 경원시야. 법도가 있는 곳이지. 네 아버지가 아무리 대단해도 널 지킬 수 없어!”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무 대답 없이, 손가락을 천천히 방아쇠에 올렸다.김원도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고, 그 순간 검은색 한 대가 급히 달려왔다.순간, 송지원이 차에서 뛰어내렸다.그는 달려와서 유강후의 팔을 붙잡았다.“유강후, 너 미쳤어?”유강후는 여전히 김원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로운, 네가 이 녀석을 부른 건가?”송지원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백 명이 넘
“로운! 당장 저격수를 배치하고, 김원도의 은신처를 알아내!”로운은 유강후의 손을 잡아 제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아직 때가 아닙니다. 성급하게 움직이면 그동안 쌓아온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자는 이제 막다른 길에 몰렸습니다. 한 달, 길어야 한 달이면 끝장날 겁니다.”유강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끈 튀어나오며, 차갑게 일갈했다.“닥쳐! 이해 못 했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로운은 그의 분노에 기세가 눌려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바로 실행하겠습니다!”밤 12시, 수십 대의 대형 헬리콥터가 외곽의 한 산속 저택을 향해 돌진했다.개조된 수백 대의 허머 차량은 전투 차량처럼 산길의 아스팔트를 짓밟으며 저택 앞에 도착했다.저택은 희미한 불빛만 비추고 있었고, 헬리콥터들은 저공에서 낮게 맴돌며 마치 죽음의 전조처럼 낮은 굉음을 울렸다.아무도 문을 열러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곧 단단했던 철문은 허머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고, 전투 장비를 갖춘 저격수 수백 명이 중무장을 한 채 저택 안으로 돌진했다.차량과 사람들은 동양국 건축 양식의 저택을 완전히 포위하며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남기지 않았다.중앙에 멈춘 검은색 차량의 문이 열리고, 유강후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검은 롱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차량과 한 몸이 된 듯 보였다.산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휘날렸고 저택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 아래, 그의 눈에 스친 날카로운 살기가 바람에 흩어졌다.입구에 선 집사는 이런 압도적인 기세를 본 적이 없는지 다리가 풀려 주저앉더니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저택의 정문은 반쯤 열린 상태였지만 내부 상황은 알 수 없었다.유강후가 말문을 열기도 전에 로운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곧이어 무겁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정문이 강제로 부서졌고,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다급히 걸어 나왔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잠옷 차림의 김원도였다.그는 유강후를 보자마자 눈을
“위층 화장실이 또 막혔다니! 후속 처리가 너무 엉망 아니야?”“그러니까, 요 며칠 내내 아래층까지 내려가야 하니 정말 불편하네.”...두 사람이 자리를 뜬 후에야 온다연은 천천히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유강후가 위층에 있는 걸까?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복도 모퉁이에 다다르자, 온다연은 로운이 한 여자를 부축하며 수술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곧바로 유강후가 그 여자의 붕대를 감은 손을 잡고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거리가 멀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 스친 걱정과 안타까움은 너무나 선명했다.방금까지 마비된 듯했던 마음이 다시금 고통스럽게 저려왔다. 온다연은 숨을 참으며 허리를 숙여 자신의 배를 눌러야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이번에는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이 여자가 바로 진시현인가?’그녀는 깜짝 놀랐다.그 여자는 자신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니 장화연이 ‘대체품' 어쩌고 운운했던 것이다.하지만 실은 자신이 그 대체품이었다. 진시현이야말로 그의 진짜 연인이었다.온다연은 더 이상 보기 힘들어 돌아서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그녀는 두려웠다. 더 보면 자신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달려들어 그를 추궁할까 봐. 그렇게 되면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질 테고, 서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될 거다.그리고 만약 그가 진시현을 위해 아이마저 외면한다면, 아이의 병은 언제 나을지 기약도 없을 것이다.의사가 아까 말했었다.“폐렴 치료는 짧아야 열흘에서 보름, 길면 한두 달은 걸립니다.”온다연은 속으로 다짐했다.‘참자, 아이가 안전해질 때까지만...’온다연이 돌아서는 순간, 로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됐습니다. 연기 그만하셔도 됩니다. 저쪽은 철수했습니다.”유강후는 다른 출구 쪽 문을 바라보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사람을 붙여. 당분간은 모르는 척해.”로운이 즉시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아래층.온다연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중환자
온다연은 영상 속 장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그러다 또 다른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던 장화연을 바라보았다.장화연은 벽에 기대어 있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없이 서 있었다.온다연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다가가 추궁하고 싶었다.‘대체 강후 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숨겨왔어요?’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았다.장화연은 유강후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소리쳐봤자 장화연은 끝까지 그를 감싸기만 할 것이다.온다연은 알고 있었다.만약 장화연이 정말 자신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은 진실을 털어놓기에 충분했을 것이다.하지만 장화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마음속에서 ‘신뢰'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온다연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장화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창백하게 질린 온다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장화연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몸을 움직이려 하자, 온다연이 먼저 일어섰다.“장 집사님, 저 몸이 좀 안 좋아서 화장실에 다녀와야겠어요.”장화연은 그녀가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힘들어하는 줄 알고 조용히 말했다.“우림 도련님은 괜찮을 겁니다. 열이 떨어지기만 하면 곧 그룹 병원으로 옮길 거예요. 그쪽이 장비도 더 좋고, 의사들도 더 뛰어나니까요.”그럴듯한 위로를 들으며, 온다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화장실에 도착한 온다연은 손을 떨며 그 음성 메시지를 재생했다.“이 사람이 제 약혼녀입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근데, 유 대표님이 온다연이랑 이미 혼인신고 했다던데? 어떻게 된 거야?”“혼인신고? 진짜인지 누가 알아? 나도 들은 얘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