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 지났는지도 모르고 그녀는 괴로움이 사그라진 다음에야 욕실에서 나왔다.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창가 옆의 소파에 앉아있는 유강후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유독 날카롭고 차가웠다. 온다연은 그 시선이 자신의 모든 생각을 다 꿰뚫어 보는 듯한 착각이 들어 몸 둘 바를 몰랐고 소름이 끼쳐 뒤로 작게 물러섰다.처음부터 지금까지 유강후는 그녀의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두려웠다. 이 두려움은 뼛속까지 스며든 것이고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것인 듯 유강후 앞에서의 온다연은 모든 것을 드러내놓는 벌거숭이가 된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마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몸을 숨길 곳이 없는 사람처럼 무력했다.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등 뒤로 숨겼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저씨, 일 얘기를 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얘기가 다 끝난 거예요?”그녀의 손에 머무른 유강후의 시선은 더 침울해졌고 그는 얼음이 맺힐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누가 네 방에 들어왔었어?”온다연은 깜짝 놀라 몸을 퍼뜩 떨었고 등 뒤에 숨긴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아저씨가 다 알게 된 건가? 아니면 염지훈 씨가 뭐라고 얘기를 한 건가?’하지만 그녀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온다연은 고개를 젓고는 살짝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요!”유강후는 온다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이를 꽉 물고 있어 아래턱에 힘이 들어갔고 주변의 공기조차 냉랭한 기운을 띠고 있는 듯했다. 이것은 유강후가 화를 낸다는 전조였다. 온다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위험한 기운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졌고 등골이 오싹해지기 시작했다.“이리 와!”유강후는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또 거짓말을 하고 있어!’방금 염씨 가문의 둘째가 30분 정도 외출하고 돌아왔을 때 유강후는 그의 몸에서 익숙한 냄새를
유강후는 말없이 온다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유강후가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온다연은 그의 기분을 느낄 수 있어 그의 행동과 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뚫어지게 쳐다만 보고 있을 때는 무척 사람을 두렵게 만들었다.유강후가 말하지 않을 때면 마치 조금의 숨결도 들키지 않은 채로 어두운 은신처에 숨어있지만, 행동을 개시했을 때는 신속하게 덮쳐와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야수와 같다고 온다연은 생각했다. 유강후의 이런 모습이 온다연을 두렵게 했다.온다연은 어떻게 해야 유강후의 마음속에 있는 의심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 몰랐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유강후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뿐이었다. 잠깐 생각하던 온다연은 쭈뼛쭈뼛 고개를 들고 유강후를 보더니 다가가 천천히 그의 무릎에 앉았다.온다연은 그의 목에 손을 두르고 그를 보고 있었다. 지금 유강후의 얼굴은 냉랭하고 단단한 가면을 쓰고 있는 듯했고 얇은 입술까지도 견고한 막을 친 것 같았다.온다연은 어찌할 줄 몰라 몸을 움직이다가 눈을 감고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맞췄다. 그녀는 어떻게 입을 맞추는지 몰랐고 그저 그가 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가볍게 그의 입술을 머금고 조심스레 더듬었다. 하지만 유강후는 꿈쩍하지 않았고 몸이 살짝 굳은 것 빼고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참 입을 맞추다가 유강후가 여전히 반응이 없자 온다연은 두려운 마음이 더 커졌다. 어쩔수 없이 입을 떼어낸 온다연은 고개를 숙였고 작은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하면 문제가 해결되리라 생각해?”그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온다연, 설명할 기회를 줄게. 만약 한마디라도 함부로 한다면 그 결과는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할 거야.”유강후는 한 글자 한 글자에 짙은 분노를 눌러 담아 내뱉었고 이를 들은 온다연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거짓말 한 적 없어요.”그녀는 잘못을
온다연은 가슴이 철렁하였지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없어요.”유강후는 꼼짝 않고 온다연을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눈빛은 그녀의 생각을 모두 꿰뚫기라도 하듯 한참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진짜 없어?”온다연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서러움이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는 왜 자꾸 저랑 염지훈 씨를 함께 엮는 거예요? 제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잠깐 멈췄다가 그녀는 계속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염지훈 씨는 하령의 남자친구잖아요.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할 일은 없어요.”유강후의 시선이 더 차가워졌다.“어디 한번 좋아해 봐!”유강후는 온다연의 턱을 들어 올리며 차갑게 물었다.“온다연, 네가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걸 언젠가 내가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너도 잘 알 거야.”그 말속에는 엄중한 경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고 온다연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아저씨, 그럴 일은 없어요.”유강후의 시선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머리는 왜 또 안 말린 거야?”문득 그는 빨갛게 부어오른 온다연의 손목을 보고 눈빛이 변했다.“손은 왜 그래?”온다연은 손을 한번 보았다. 방금 염지훈이 잡았던 곳을 그녀가 세게 문지른 탓에 껍질이 살짝 벗겨져 있었다.“방금 구월이한테 긁혔어요.”유강후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서 침대에 앉힌 뒤 드라이기를 꺼내와서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은은한 로즈 향이 밀폐된 공간에서 퍼져 두 사람의 코끝을 맴돌았고 분위기도 점점 더 야릇해졌다. 지금 이 야릇한 느낌은 시작에 불과했다.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보름 사이에 겨울이 서서히 다가왔다. 경원시의 겨울은 몹시 추웠지만, 유강후의 집은 아주 따뜻했는데 꽃방에까지 보일러를 설치했다. 며칠 전에 온다연은 스치듯 해바라기와 붓꽃을 주문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자 이튿날에 바로 열몇 개나 되는 최상급의 해바라기와 붓꽃 화분이 배송되었고 이들은
무언가 그녀를 일깨워주는 듯한 기분이었다.온다연은 다소 어안이 벙벙했다.그녀는 확실히 유씨 가문으로 한번 다녀오고 싶었다. 그곳에서 챙겨야 할 그녀의 물건도 있었고 심미진을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집사는 멍해진 그녀를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그동안 잘 보살핀 덕에 살이 조금 붙은 모습이었지만 멍을 때리는 시간이 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가끔 이젤 앞에 앉아 두세 시간 멍을 때리기도 했다. 아무런 말도, 그림도 그리지 않고 그저 가만히 멍 때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집사는 온다연이 겉으론 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긴 해도 멘탈은 훨씬 더 나약해졌다고 생각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와 집사가 나직하게 말했다.“도련님께서 돌아오셨네요. 다연 씨, 혹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도련님께 물어보세요.”말을 마친 집사는 꽃병을 들고 거실로 갔다.온다연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고급스러운 마이바흐 한 대가 대문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고 기세가 남다른 남자가 내렸다.남자는 재질이 아주 좋은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도 키가 커 보이고 차가운 분위기도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들어 꽃방이 있는 곳을 힐끗 보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온다연은 펜을 내려놓고 유리문을 열어 그대로 달려나갔다.몇 걸음 만에 그녀는 유강후의 품에 안겼다.집안은 아주 따듯했고 그녀는 품이 좀 너른 편안한 흰색 홈웨어를 입고 있었다. 조금 얇은 옷감이었던 탓에 추운 한기가 그대로 옷을 뚫고 들어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추위에 몸을 덜덜 떨게 되었다.유강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품으로 안긴 그녀를 보더니 단번에 들어 올려 성큼성큼 꽃방으로 들어왔다.그녀를 커다란 책상 위로 내려놓은 뒤 다소 언짢은 어투로 말했다.“이렇게 얇게 입고 밖으로 달려 나온 거야? 네 몸 상태가 어떤지 정말 몰라서 그래?”온다연은 이미 그의 환심을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바로 팔을 뻗어 그의 목에 감으면서 나긋나긋 말했다.
역시나 그가 꽉 끌어안았던 곳에 빨간 손자국이 나 있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빨간 손자국을 보았다.“피부가 이렇게나 연약해서야. 또 붉어졌네.”온다연은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기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얌전한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또 욕구가 들끓기 시작했다.가느다랗고 보드라운 그녀의 허리를 만지며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허리도 작고, 정말 부러뜨리고 싶게 만드네.”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차가워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온다연은 그가 정말로 자신의 허리를 부러뜨릴 것만 같아 작게 중얼거렸다.“아저씨는 하나도 다정하지 않아요.”나른한 목소리에 유강후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눈빛마저 변했다.“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지?”두 사람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온다연은 더는 그를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저씨라고 부르거나 가끔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평소에 아저씨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들으니 묘하게 욕구가 끓어올라 그녀를 삼켜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생겨났다.온다연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작게 말했다.“아저씨, 유강후 씨.”유강후는 살짝 코웃음을 쳤다.“겁도 없이.”하지만 목소리엔 다정함이 가득 묻어나 있었고 그녀를 혼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사실 지금 이런 순간에 온다연도 무감각한 것은 아니었다.유강후는 예전에 그녀가 제일 힘들었을 때 빛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그때 그는 그녀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고 이름만 들어도 감격스러웠다.그의 이름은 그때 그 시절 그녀에게 엄청난 희망을 안겨주었다.만약 두 눈으로 직접 어린 시절의 유강후를 만나보지 않았더라면 그녀 같은 사람은 절대 이 세상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흐르는 사람이 존재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피라미드의 정상에 앉았을 뿐 아니라 외모도 훌륭하고 능력도 아주 좋았다.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이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알 수 있었다.반면 그녀는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반인이었다. 이런 사람
그녀는 예전에 유강후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만났는지 모른다. 지금도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왔을 수도 있고, 그가 다른 여자를 어떻게 대하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녀는 유강후가 자신을 아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주한이 세상을 떠난 뒤로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온다연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작게 말했다.“아저씨, 유씨 가문 본가에 내 물건이 있어요. 그걸 가져오고 싶어요.”유강후는 자신에게 안겨 붙은 그녀의 모습을 아주 좋아했다.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가느다란 발목을 만지작거렸다.“그래, 오늘 저녁에 마침 본가에 갈 일이 있었거든.”온다연은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비비적거렸다.“고마워요, 아저씨.”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어투가 다소 차가워졌다.“이번엔 유강후 씨라고 안 부르는 거야?”느껴지는 고통에 온다연은 숨을 들이쉬면서 작게 말했다.“예의가 없어 보이면 안 되잖아요.”유강후가 코웃음을 쳤다.“흥, 이제 와서 예의를 찾는다고?”“아저씨,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사이를 숨기면 안 될까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아주 담담한 표정이었다.“우리가 어떤 사이인데?”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애초에 그녀를 대중들 앞에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심지어 그녀의 이름을 바꿔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면 그녀가 완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온다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소 당황스러웠다.‘그렇네, 우리가 무슨 사이이지?'‘연인? 내연 관계? 둘 다 아니잖아!'두 사람은 오히려 서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 더 맞았다. 그녀는 그의 힘을 이용해 복수할 생각이었고 그는 그녀의 젊음과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새로움을 느끼려 하고 있었다.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였으니 당연히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사이를 공개해서는 안 되었다.더구나 유강후에겐 약혼녀가 있었다.온다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강후는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떼며 작은 그녀의 턱을 잡았다.
온다연은 대문 앞에 멍하니 서서 유강후가 내민 손을 보았다.그는 검은색 양털 코트를 입고 있었음에도 기품이 흘러넘쳤다. 눈이 내려도 그는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아 어깨에 눈꽃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고귀하던 그에게도 인간미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그 순간, 그녀의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다연아, 이리와.”몇 년 전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남자도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그녀는 유강후를 빤히 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빠르게 뛰면서 아프기도 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갔다.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잡더니 그대로 얼굴을 그의 코트에 파묻으며 중얼거렸다.“보고 싶었어요.”‘너무도!'차가운 눈꽃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져 녹아버렸다. 그 탓에 눈가가 촉촉해져 꼭 그녀가 울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주한아, 보여? 첫눈이 내리고 있어.'유강후는 고분고분한 그녀의 모습에 아주 흡족해하고 있었다.그녀가 입고 나온 옷도 검은색 양털 코트였다. 머리를 올려 묶은 탓에 하얀 그녀의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연약하면서도 활력이 있는 모습이었다.유강후는 그녀를 안고 있다가 몸을 돌려 차 안에서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쇼핑백을 꺼내 안에서 두 개의 체크 무늬 목도리를 꺼냈다.그중 조금 짧은 것은 그녀의 목에 따듯하게 둘러주었고, 남은 하나는 자신의 목에 둘렀다.두 사람은 분명 체형 차이가 있었지만, 나란히 서 있으니 이상하게도 어울렸다.꼭 다른 사람은 끼어들 수가 없는 그런 분위기도 흘러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이권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미 서로에게 얽히고 얽혀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이 없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 더 깊이 얽혀들 것이 분명했다.온다연은 부드러운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아저씨, 왜 자꾸 나한테 이렇게 좋은 걸 줘요. 난 아저씨한테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유강후는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나한테 선물 아니었어?
온다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확 들었다. 그리고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유강후의 눈빛도 부드러워졌다.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이따가 내 옆에 앉아. 다른 데 앉지 말고. 그리고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면 너랑 함께 물건 가지러 가줄게.”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지나가는 사람의 눈에는 그저 유강후가 갈 곳이 없는 온다연을 불쌍히 여겨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이라 여겼을 것이었고 온다연과 나이가 비슷한 여자들은 질투에 휩싸였다.다만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유강후의 관심과 편애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특히 유하령은 질투에 휩싸여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원래 오늘 그녀는 유강후와 오해를 풀고 다시 전처럼 친하게 지낼 생각이었고 그 김에 유강후에게 온다연을 내쫓으라고 설득할 생각이었다.그녀는 유강후가 온다연을 본가로 데리고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다정하게 대하며 온다연을 챙겨주고 있었다.유강후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챙겨주고 아껴주는 모습을 본 적 없었다. 심지어 나은별한테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었다.그녀가 어릴 때부터 우러러보던 작은 아빠는 의자를 빼내며 온다연에게 앉으라고 했다. 그 모습과 태도는 너무나도 다정했고 그녀조차도 받지 못한 대우였다.그런데 그 대우를 온다연 같은 천박한 사람이 받고 있다고 하니 어떻게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한참 지켜보던 유하령의 안색이 점차 보기 흉하게 구겨졌다.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내려던 순간 옆에 있던 사람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작게 말했다.“하령아, 참아.”말을 꺼낸 사람은 이화평의 손녀 이효진이었다. 지금은 유민준의 약혼 상대이기도 했다.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힐끗 보곤 소곤거렸다.“저런 사람 하나 때문에 네 작은 아빠랑 사이가 틀어질 필요는 없잖아.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참아.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어. 이따가 우리 함께 시도해보자.”비록 유하령과 이효진은 온다연의 사선 방
“지훈 씨, 미안해요.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훈 씨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요. 솔직히 약혼 날짜를 미룰까도 고민해 봤는데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훈 씨는 그저 저한테 가족이나 오빠 같은 사람...”“듣기 싫으니까 그만해.”염지훈은 거칠게 말을 자르고선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온다연, 너 진짜 잔인하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 널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왜 유강후는 등장만으로도 마음을 사로잡는 건데? 왜 그 사람 말 한마디에 흔들리냐고. 도대체 왜?”온다연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박씨 가문과 진씨 가문의 약혼은 깬 건 그녀가 맞았기에 배신자라고 비난하고 질책해도 말없이 그걸 견뎌야만 했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내 마음을 통제할 수가 없었어요...”“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다야?”고통을 이기지 못한 염지훈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불과 몇 초 만에 그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다.온다연은 재빨리 그를 말렸다.“지훈 씨, 이러지 마요.”그러자 염지훈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흐느꼈다.“그냥 잠깐 자리를 비운 것뿐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어? 예전의 온다연은 어디 갔냐고. 돌려내. 돌려내라고.”“내가 아는 말 잘 듣고 착한 온다연은 다른 사람과 쉽게 사랑에 빠질 그런 여자가 아니야.”그는 힘껏 온다연을 밀쳤다.“넌 온다연이 아니야. 나가.”“나가라고.”뒤로 밀려난 온다연은 문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고 곧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새빨간 피가 그녀의 하얀 뺨을 적시고 나서야 염지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는 온다연을 안아서 소파에 앉힌 뒤 약상자를 찾아와 지혈해 주려고 애썼다.그런데 온다연이 그를 제지했다.“됐어요. 지훈 씨가 더 심하게 다쳤잖아요. 제가 해줄게요.”온다연은 연고와 붕대를 집어들고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과 몸에 난 상처에 약을 발랐다.피투성이 된 손을
유강후는 주먹으로 문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꺼져.”가장 소중한 걸 잃은 듯한 괴로운 느낌이 또다시 밀려왔고 그는 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경호원들은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멀지 않은 곳에서 유강후를 지키고 있었다.그들의 눈에 비친 유강후는 우리에 갇힌 짐승이 따로 없었다. 평소 단호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미래 그룹의 대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이때 유강후가 대뜸 물었다.“두 사람...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경호원이 입을 열었다.“저희가 알고 있는 사모님은 선을 지키는 분입니다. 아마 염 대표님과의 약혼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을 겁니다.”유강후의 곁에서 오랜 세월 일하면서 그들은 두 사람이 어떤 풍파를 겪었는지 전부 지켜봤다. 더욱이 지난 3년 동안 유강후가 보낸 힘든 시간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그러기에 그에게 온다연이 어떤 존재인지는 더없이 잘 알고 있다.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으니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편하게 지내지 못할 테니까.그 시각 별장 안.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염지훈은 온다연을 덥석 끌어안았다.온다연은 몸부림치지 않고 그가 자신을 껴안도록 내버려두었다.하지만 염지훈의 힘은 점점 더 세졌고 마치 그녀를 몸속으로 밀어 넣을 듯 꽉 껴안고 놓지 않았다.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숨쉬기 힘들 정도가 되어서야 온다연은 입을 열었다.“이제 됐어요?”염지훈은 그녀를 놓아주더니 잔뜩 지쳐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연아, 기억이 돌아온 거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예전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염지훈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기억이 돌아온 것도 아닌데 왜 유강후를 만나는 거야?”염지훈은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 계속하여 현실을 부정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느껴질 정도였다.“말도 안 돼. 내가 떠난 지 얼마 됐다고 유강후를 만나는 거야? 심지어 저 사람 하나 믿고 여기까지 왔어?”온다연
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염지훈은 믿기지 않았다.“기억이 떠오른 게 아니라면 유 대표랑은...”“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잠깐 자리를 옮겨서 얘기할까요?”그러자 염지훈이 답했다.“나 근처에 사니까 그쪽으로 가자.”염지훈이 지내는 곳은 불과 이곳에서 몇백 미터 떨어져 있었고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앞장선 염지훈의 뒤에는 온다연이 있었고 유강후는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유강후가 온다연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염지훈은 돌아서서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곤 했다.극도로 어색한 분위기나 한참이나 이어졌다.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두 사람과 비슷한 거리를 두었다.별장에 다다르자 염지훈은 유강후를 가로막았다.“그쪽은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라서...”그러자 유강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염 대표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대화를 할 수 있게 허락한 거예요. 잊지 마요. 우리 사이에 끼어든 건 그쪽이니까.”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염지훈의 손에서는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고 당장이라도 유강후를 갈기갈기 찢을 기세였다.“무슨 낯짝으로 다연이의 곁에 있는 거죠? 그럴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다연이를 어떻게 찾았는지 알려줄까요?”“강 대표님이 바꿔치기...”“닥쳐.”분노를 이기지 못한 유강후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염지훈의 손목을 잡았다.“상황을 이용한 비열한 놈이 누군데 감히 날 탓해?”“나랑 다연이 사이에 아무리 큰 문제가 있더라도 그건 우리 둘이 해결할 거야. 너 같은 제 3자가 끼어들 곳은 없어.”제 3자라는 말은 염지훈의 분노 버튼을 눌러버렸다. 결국 그는 또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쓰레기 같은 놈. 너랑 네 가족들이 다연이한테 했던 짓을 생각해 봐. 넌 평생 용서받지 못할 거야.”온다연이 그의 팔을 잡으며 말린 덕분에 주먹은 유강후에게 떨어지지 않았다.“지훈 씨, 얘기할 생각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염지훈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저 인간
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차갑게 입을 열었다.“염 대표?”‘염지훈이 왜 여기에 있지?’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비꼬는듯한 어조로 말했다.“레스토랑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새로운 부인과 오붓한 데이트라도 하고 계셨나?”유강후의 시선은 그를 넘어 온다연에게 향했다.온다연도 염지훈을 본 게 분명하다.그녀는 일어나서 가볍게 입을 열었다.“지훈 씨.”부드러운 목소리에 염지훈은 날벼락을 맞은 듯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다가 갑자기 돌아섰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앞의 사람을 바라봤다.“다연이?”온다연은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맞아요.”염지훈은 시선은 오랫동안 그녀에게 머물렀고 여전히 이곳에서 온다연을 만나게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정말 다연이야?”온다연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러자 유강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쪽으로 와요.”염지훈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몸을 홱 돌리더니 사나운 눈빛으로 유강후를 매섭게 노려봤다.“또 그쪽이네요. 어떻게 찾았어요?”유강후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눈에 적의가 번쩍였다.“다연이는 처음부터 내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염 대표님이 제멋대로 숨겼잖아요. 어떻게 감히...”말이 끝나기도 전에 염지훈은 분노하며 달려들더니 유강후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짐승만도 못한 게 무슨 낯짝으로 다연이를 찾아와?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넌 다연이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유강후는 일부러 고개를 기울여 주먹을 맞았다.그러고선 달려드는 경호원들에게 소리쳤다.“물러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절대 움직이지 마. 이건 우리 둘 사이의 원한이야.”그 말에 경호원들은 할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유강후는 외투를 벗어 차에 던지더니 곧바로 주먹을 날렸고 염지훈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냈다.두 남자는 실력이 엇비슷해서 싸우기만 하면 목숨을 걸었고 잠깐 사이에 모두 부상을 입었다.온다연은 싸움이 점점 심해지자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달려들었지만 곧바로 경호원에게 붙잡혔다.
어느새 온다연의 뒤에는 건장한 경호원들이 나타났다.한눈에 봐도 굉장히 강하고 전문적인 티가 났기에 남자들은 당황한 듯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욕설을 퍼부었다.“우리가 누군지 알아? 경고하는데 한국인이면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우리 배후에는 어마어마한 인물이 있거든.”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물었다.“여기서 사람 때려도 돼요? 강 대표님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겠죠?”경호원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당장 이곳에서 죽이지 않는 한 문제 될 건 없습니다.”그러자 온다연은 차분하게 말했다.“그럼 저 인간들이 다시는 누굴 괴롭히지 못하게 불구로 만들어줘요.”“알겠습니다. 사모님.”곧 주차장 전체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조명이 어두워서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아무도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온다연은 시끄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입 막아버려요.”“알겠습니다.”곧 그들은 숨이 간신히 붙어있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치 부서진 장난감처럼 바닥에서 꼼짝하지 못했다.온다연은 앞으로 나서서 그중 한 명을 걷어찼다.“앞으로 또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거예요?”남자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아니요.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온다연은 여전히 싸늘했다.“경찰서로 가서 자수해요. 지금까지 괴롭혔던 사람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털어놓아요. 안 그러면 내가 당신들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온다연이 손짓하자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왔다.“저 사람들을 경찰서 입구에 버려줘요.”“알겠습니다.”그 후 온다연은 여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했다.“괜찮아요? 어디 아픈 곳 없어요?”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기력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런 건 익숙하니까... 고마워요.”온다연은 두통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어쩌면 이런 장면이 너무 익숙해 자신이 예전에 겪은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른다.“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거예
하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고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염지훈은 허탈한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여긴 북아메리카잖아. 다연이가 있을 리가 없지...”출국이 금지되어 온다연과 약혼할 수조차 없는 현실을 생각하니 권예진에 대한 미움이 더 커졌다.염지훈은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권예진을 바라봤다.“출국 금지된 건 너랑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성큼성큼 떠났다.염지훈의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온다연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그녀는 염지훈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넋을 잃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강후도 나왔다.그는 멍해 있는 온다연을 보고선 눈살을 찌푸렸다.“왜 그래요?”온다연은 마음을 가다듬고 담담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요.”이때 권예진이 룸에서 나왔고 그녀는 유강후를 보고선 흠칫했다.‘낯이 익은데... 누구지? 오늘 아침에 봤던 잡지 표지의 인물이랑 비슷해 보이는데...’‘옆에 있는 여자도 낯이 익네?’권예진이 생각에 잠긴 찰나 유강후는 이미 온다연과 함께 떠났다.그녀는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고 나서야 온다연이 누군지 알아차렸다.염지훈 사무실에 놓인 사진 속의 그 여자다.재빨리 뒤쫓아가려고 했지만 엘리베이터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아래층에 도착해 막 차를 타려던 찰나 유강후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발신자 번호를 보며 온다연에게 말했다.“전화 받고 갈 테니까 차에서 기다려요.”온다연이 차에 오르자마자 옆에 있던 차에서 남자 세 명이 내렸고 그들은 어떤 여자를 끌어내리더니 무차별적인 폭행을 저질렀다.여자는 간절하게 용서를 빌었지만 그들은 들리지 않는 듯 계속하여 주먹과 발길질을 했다.한국어로 말했기에 온다연은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파악했다.세 남자는 다른 사람의 돈을 받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 같았다. 그들은 누군가의 장난감이라며 여자를 모욕했고 듣기 거북한 말을 끊임없이 퍼부었다.이런 장면들이 꿈
염지훈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권예진, 너 왜 이렇게 뻔뻔해? 귀찮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잖아. 꼭 이래야만 속이 후련하니?”권예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염지훈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끌어다가 태연하게 먹었다.“먹을 땐 언제고 배부르니까 버리려고요?”그 말에 표정이 싸늘해진 염지훈은 경고하듯 나지막이 말했다.“약 탄 사람 너지? 권예진, 기회 줄 때 솔직하게 말해. 약 탔지?”권예진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염지훈을 쳐다봤다.“내가 그렇게 추잡스러운 인간으로 보여요?”염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에는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맞잖아.”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내려놓은 권예진은 고개를 숙인 채 애써 감정을 숨겼다.“아빠가 지훈 씨를 잡으라고 한 건 솔직하게 인정할게요. 하지만 절대 약을 타지는 않았어요. 누군가 어젯밤에 저한테도 약을 탔다면 믿으실래요?”염지훈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그러고선 수표 한 장을 꺼내 권예진에게 던졌다.“하룻밤에 20억이면 충분하지? 부족하면 말해.”권예진은 테이블 모서리를 꽉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격 떨어지는 행동은 그만해줄래요? 박씨 가문보다 못한 건 맞지만 이깟 돈으로 모욕당할 만큼 부족하지는 않으니까.”“그 일에 대해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늘 밥 먹자고 한 거예요. 책임지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3개월 동안 회사에서 일 배우기로 아빠랑 약속했어요. 3개월이 되면 귀찮게 하지 않고 바로 떠날게요.”염지훈은 여전히 싸늘했다.“아니. 내일 당장 돌아가. 능력이 뛰어나서 돌려보냈다고 내가 직접 연락해서 설명할게.”권예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엄마가 남겨준 물건을 돌려받으려면 무조건 3개월을 채워야 해요. 안 그러면 전부 다 내연녀한테 준다고요.”권예진은 눈물을 머금은채로 고개를 들었다.“이렇게 빌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절대 눈에 띄지 않
빛을 등지고 앉은 탓에 유강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의 일을 알게 되면 더 고통스러울지도 몰라요. 지금도 이렇게 괴롭잖아요. 그러니까 그만 생각해요.”온다연은 투덜거렸다.“강 대표님이 온 이후로 매일 안 좋은 꿈을 꿔요. 예전에 무슨 일 있었죠? H국에서 지낼 때 제가 많이 힘들었어요? 알려줘요.”“전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감이 넘쳤거든요. 그 꿈들이 진짜라고 생각할 때마다 아프고 괴로워요.”유강후는 그녀를 안은 채 말없이 등을 토닥였다.그 침묵은 마치 꿈속의 일들이 현실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불안함을 느끼며 진지하게 물었다.“그러니까 전부 다 사실이라는 거죠?”애써 괴로움을 감춘 유강후는 무덤덤하게 말했다.“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유나 씨의 곁에는 제가 있었거든요. 우린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유강후는 온다연이 평생 기억을 되찾지 못하기를 바랐고 상처입힌 일들은 그저 과거 속에서 썩어가도록 내버려두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무리 나쁜 기억이라도 그건 추억이잖아요. 강 대표님의 말대로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냈다면 더 잊어서는 안 되죠.”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두 손으로 유강후의 얼굴을 감싸고 지그시 눈을 바라봤다.“솔직하게 말해봐요. 우린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게 맞죠? 거짓말하면 안 돼요.”유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큰손으로 온다연의 머리를 잡더니 곧바로 입을 맞췄다.유강후의 키스는 더 이상 예전처럼 강압적이지 않았고 마치 그녀를 달래듯 부드럽게 입술과 얼굴, 그리고 귓볼에 입을 맞췄다.유강후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입맞춤하면서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마치 작은 고양이를 달래듯 조심스러운 그의 행동은 스트레스받은 감정과 과거의 고통을 어루만졌다.그의 차분한 감정과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온다연의 초조한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았다.숨 막힐듯한 키스가 이어지
“괴롭힘당하는 꿈을 꿔요. 그것도 매일. 정말 나한테 있었던 일인가요? 방금 저 남자... 어떤 사람이에요?”유강후는 온다연을 꼭 껴안고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은 조금씩 닦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 먹었으면 이만 돌아갈까요?”온다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았다.“싫어요. 강 대표님은 왜 매번 피하기만 해요? 이런 질문할 때마다 어떻게서든 자리를 뜨려고 하잖아요.” 온다연의 유강후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누군지 알려줘요. 내 마음이 왜 이렇게 괴로운지 알아야 하잖아요.”하지만 유강후는 그녀를 안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지금은 유나 씨의 컨디션이 별로인 것 같네요. 나중에 기분이 풀리면 알려줄게요.”“싫다고요.”온다연은 몸부림치며 그에게서 벗어났고 다시 그 광고를 보려고 창가로 달려갔다.광고비가 엄청나게 높은 터라 아무리 유명한 브랜드라도 장시간 반복적으로 홍보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극심한 두통이 밀려온 온다연은 광고 한두 개를 보더니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곧바로 유강후를 향해 돌진했다.“왜 가만히 있어요? 누군지 알려달라고요. 누구냐고요.”그 남자는 온다연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인듯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다연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기억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분명히 진실이 눈앞에 있는 대로 알 권리조차 없는 현실에 그녀는 점점 통제 불능의 작은 짐승처럼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온다연은 유강후의 팔을 붙잡고 단호하게 말했다.“강 대표님은 다 알고 있잖아요. 모른다는 건 누가 봐도 거짓말이에요. 제발 알려줘요. 저 남자가 누군지 알려달라고요.”눈물 범벅된 채로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위로해야만 했다.“아는 사람은 아니에요. 유나 씨한테 저 사람과 매우 닮은 친구가 있었어요. 둘은 다른 사람이에요.”유강후는 그 남자가 주희인걸 알아봤다.얼굴에 손을 댔는지 이제는 주한과 매우 비슷해졌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이곳에 데려온 걸 후회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