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후야, 얘가 왜 네 집에 있어?”유자성은 유강후가자기의 친 동생이 자기 아내의 조카를 안고 있는 것을 보니 어딘가 모르게 찝찝한 감이 들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았으며 그저 이마를 찌푸렸다.“고씨 가문에서 계속 얘를 찾고 있었어. 네가 얘를 숨겨놓은 거야? 그러니까 고씨 가문에서 온갖 곳을 뒤져도 얘를 찾아내지 못했지!”이 말에 온다연은 더욱 부들부들 몸을 떨었으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어 유강후의 손목을 잡았다. 유강후는 그녀의 등을 몇 번 살살 토닥이고는 엄청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괜찮아. 내가 있잖아.”유강후는 자기의 맏형을 보며 눈 밑의 싸늘한 기운이은 더 짙어졌도로 증가했다.“형이 여긴 웬일로 왔어요?”유자성은 아직 유강후의 품에 안겨 있는 온다연을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쟤가 왜 이곳에 있는지부터 말해.”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온다연을 안은 손에 힘을 꼭 주면서 성큼성큼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방 안에 들어온 후, 유강후는 온다연을 소파에 내려놓고 허리를 펴려고 한 순간, 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정교한 얼굴은 혈색 한 점 없이 하얗고 그 잠깐 사이에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귀밑머리를 적셨다.그녀는 말없이 그저 고개를 들어 유강후를 바라보았다. 아직 시력을 회복하지 않은 두 눈에는 선명하게 초조함이 깃들어있었다.유강후는 손을 내밀어 가볍게 그녀 이마의 땀을 닦아 내리고는 손가락으로 가볍게살랑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다연아, 내 영역에서 널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없어.”그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묵직한 것이 사람에게 믿음을 안겨주었다.온다연은 조금 긴장을 푼 것으로 보였지만 여전히 그의 옷깃을 잡은 채 손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초점이 없는 새까만 눈동자로 유강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아저씨는 지금 그 사람들에게 우리의 관계를 말해줄 건가요?”유강후는 온다연을 보며 침착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넌 그들에게
유자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고씨 가문이 무서울 게 뭐가 있어. 난 그저 지금 미래 그룹과 무한테크가 합작 관계이니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고씨 가문에게 밉보일 필요가 없다는 거지.”“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요?”유강후는 휙 고개를 들더니 아까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 나오는 심미진을 보고 눈 밑에는 풍자의 기운이 깃들었다.“그 당시 큰형수가 돌아가신 지 몇 달 안 되었는데, 형은 모든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사코 심미진과 결혼했잖아요. 근데 그 여자의 조카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요? 아니면 심미진이 이미 한물 건너갔다는 거예요?”유자성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강후야, 너 그게 무슨 말이야?”유강후의 눈빛은 지극히 냉랭했다.“형한테 다연이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난 아니에요. 얘가 유씨 가문에서 그렇게 오래 지냈는데, 아무리 고양이를 키워도 10년이면 정이 들었겠어요.”이때 심미진이 어느덧 걸어왔다.배가 살짝 나온 심미진은 여주인 행세를 하면서 아까까지도 두 사용인을 지휘해 유강후네 집 복도에 있는 한 쌍의 골동품 꽃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진정한 집주인이 돌아온 것을 보더니 그녀는 얼른 기세를 줄이고는 형수 행세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강후가 돌아왔구나. 너도 참, 집에 여자가 없으니, 생기가 안 돌아. 내가 볼 땐 너도 하루빨리 은별 씨랑...”그녀의 시선은 갑자기 소파에 있는 온다연에게 떨어졌고 이내 큰소리로 외쳤다.“다연아!”온다연은 일어서서 유강후의 옷깃을 살짝 당기고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저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요.”이때 심미진은 이미 다가와 온다연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너 어디 갔었어? 그렇게 큰 사고를 쳐놓고 어디에 있었던 거야? 너 이 계집애, 온종일 일을 벌일 줄만 알았지. 빨리 나랑 같이 고씨 저택으로 가서 용서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미진의 팔목은 갑자기 커다란 손에 잡혔다.“아, 아파!”고개를 들고 보니 유강후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다들 그가 방금 한 말에 놀라서 어리둥절했다.특히 심미진은 유강후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도련님, 무슨 뜻이에요?”유강후는 표정도 차갑고 목소리도 차가웠다.“말 그대로예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안색이 더 쌀쌀하게 변했다.“전 오늘 두 분에게 통지하는 것이지 두 분의 의견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형과 형수님께서 이해해주길 바라요.”그러자 뒤에 있던 온다연이 그의 옷을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아직 내 이모예요.”유강후는 두 눈에 피어난 차가움이 더 짙어진 채 그곳에서 차를 끓이고 있는 집사를 바라보며 말했다.“화연아, 온다연이 좀 불편해 보이니 방으로 데리고 가서 쉬도록 해.”집사가 다가와 온다연을 이끌고 갔다. 유자성과 심미진은 그제야 온다연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심미진은 안색이 좋지 않은 채 온다연 앞을 막아 나서려 했지만 유자성이 붙잡았다.온다연의 모습이 복도로 사라지자 유자성는 비로소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눈이 안 보이는 거야?”유강후는 시선을 거두며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네, 스트레스가 심해서 실명했어요.”그는 심미진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두 달 전 온다연이 버스에 치여 멀리 날아갈 정도였는데 일어나자마자 도망갔어요.”심미진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3일 후 한 오래된 동네에서 찾았는데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고 그중 한 개가 간을 뚫었더라고요. 찾아갔을 때 이미 배가 부어서 거의 죽을 뻔했어요.”그때를 생각하면 유강후는 아직도 살을 에는 듯한 그 한기를 느낄 수 있다. 바로 그때 그는 마음을 정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온다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심미진을 노려보며 그의 두 눈엔 한기가 더욱 짙어졌다. “온다연이 사고를 당했을 때부터 찾아낼 때까지 사흘 동안 형수님은 온다연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거잖아요. 하지만 형수님은 한 마디도 묻지 않은 것 같았고, 지난 두세 달 동안에도 온다연에 대해 아
“그런데 밖에서 너절한 친구를 사귀고 있는데 집을 팔거나 사기를 당할까 봐...”유강후는 그녀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다연이가 지금 나를 따라온 이상, 이런 일은 형수님이 관여할 수 없어요. 나중에 서류를 보내줘요. 제가 가서 대신 명의 변경을 해 줄게요.”심미진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자성를 힘껏 잡아당겼다.유자성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집 한 채는 안중에도 없었기에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 “이왕이면 빨리 돌려줘.”그는 어조를 좀 누그러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강후야, 우리는 친형제이니 너무 따지지는 말아라.”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그들 옆을 지나 소파에 앉았다.찻상 위에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는데 서서히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어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고, 그는 한참 뒤에야 덤덤하게 물었다. “형님은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어요?”유자성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있겠어. 며칠 동안 집에 안 왔잖아. 아빠가 와서 널 보라고 했어. 서주랑 하령이의 약혼에 대해 상의할 겸 왔어.”유강후는 탁자 위의 담뱃갑을 가져다가 한 개 꺼내 불을 붙였지만 피우지 않고 냉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의 아들딸이에요. 결혼 같은 일은 나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요.”유자성는 그 속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소파에 앉아 한 마디씩 늘어놓았다.방안에서 집사가 온다연의 가정복을 가져와서 갈아입혀 주고는 따뜻한 우유를 들고 그녀가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우유를 다 마시자 컵을 받아들고 막 방을 나서려는데 온다연이 작은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장 집사님, 아저씨 아직도 얘기해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직 얘기 중이세요.”온다연은 다시 얼굴이 창백해지며 낮게 말했다.“이모가 절 아저씨한테 보내는 거예요?”며칠을 함께 지낸 집사는 그녀의 사정을 딱하게 생각하며 걱정스러운 듯 조용히 말했다. “다연 아가씨는 이미 스무
방에 들어선 유하령은 비싼 가구들의 우아한 기풍에 질투가 났다.유강후가 사는 곳은 장식이 언제나 고급스럽고 품격이 있었다.예를 들어 이곳 말이다. 발밑에 흰색의 순수한 수제 캐시미어 카펫을 현관에서 침대 옆까지 깔았는데, 밟으면 두툼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매우 비싸다는 것을 보여줬다.비싸다고 소문난 수작업으로 만든 페르시아 융단이었는데, 그녀의 방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이 없었다.그리고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인 온다연은 카펫 끝에 있는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부드러운 불빛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물들였다.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유하령은 온다연의 촘촘한 속눈썹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연약하고 정교해서 사람을 잘 끄는 모습이었다.‘바로 이런 모습으로 아저씨를 꼬신 건가? 나도 아직 이 집에 발을 들이지 못했는데 이 천한 년이 먼저 들어왔다니! 무슨 근거로? 그럴 자격이 없어!’유하령가 질투 나서 미칠 것 같았다.그녀는 달려들어 온다연에게 뺨을 한 대 때리고 이를 악물었다. “온다연, 감히 내 아저씨에게 눈독을 들여?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그녀가 들어오자 온다연은 상대방이 집사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유하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심미진인 줄 알았다.실망했지만 이내 유하령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했다.하지만 여기는 유씨 가문이 아니니 그녀도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그녀는 방금 맞은 곳을 더듬었는데, 그곳은 불타고 있는 것처럼 따끔했다. 얼얼하게 부어오른 그녀는 혀로 까진 입안을 헤치고 있었는데 초점 없는 두 눈이 차가워 보였다.“유하령, 뺏긴 기분은 어때? ”유하령은 몸을 부르르 떨며 온다연의 머리채를 잡고 흉악하게 말했다.“너 역시 일부러 그랬구나. 일부러 내 아저씨에게 접근해서 그의 동정을 이용하며 권세에 빌붙은 건 너에게 높은 가문의 자제를 소개해 달라고 하려고? 잘 들어, 너 그거 그냥 꿈이야!”“얼마나 오랫동안 동정해 줄 것 같아? 아저씨는 내년에 약혼을 앞두고 있어. 지금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연기였고, 그녀는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 본 적이 없는 그녀는 갑자기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더러운 년, 감히 나를 모함하다니!”그녀는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힘껏 그녀를 걷어찼다.뾰족한 하이힐이 온다연의 복부를 걷어차자 온다연은 심한 통증을 느끼며 피를 토해냈다.그런데도 유하령은 화가 풀리지 않아 발을 들고 또 걷어차려 했지만 손을 쓰기도 전에 갑자기 유강후가 목을 졸라왔다.그는 안색이 한껏 어두워진 채 유하령을 살의를 띤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그뿐이 아니었다. 유강후는 거의 죽을힘을 다했는데, 그 힘은 그녀를 그대로 목 졸라 죽이려는 것과 같았다.유하령은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쉬었지만 얼굴이 조금씩 새빨개지며 쉰 목소리로 간신히 뱉었다.“아저씨...”그러나 유강후는 못 들은 듯 눈초리가 매섭고 살의가 짙어졌다. 잠시 후 유하령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눈앞이 캄캄해졌다.그녀는 순간 아저씨가 정말로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필사적으로 유강후의 손을 내리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눈앞이 캄캄해지며 곧 질식하여 기절할 것 같았다.그때 유자성이 달려들어 유강후의 손을 잡아끌며 호통쳤다. “강후야, 뭐 하는 거야? 놔! 네 친조카야!”유강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힘껏 뒤로 젖히자 유하령의 몸이 순식간에 날아가 벽에 세게 내동댕이치고는 땅바닥에 떨어졌다.거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하령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기침을 계속했고 목이 끊어질 듯 아팠다.그녀는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아저씨를 쳐다보았다.그녀는 아저씨가 방금 그녀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것도 외부인을 위해서 말이다!그러나 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허리를 숙혀 온다연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채 피를 토하고 있었는데 하얀 카펫이 젖어 있어 그 모습이 섬뜩했다.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진 채 손을 뻗어 그녀를 안으려고 했지만, 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
온다연은 몸을 떨며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았다.유강후는 갑자기 몸을 돌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심미진을 향해 소리쳤다. “나가요.”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조금도 인정사정이 없었다.“세 사람, 내 집에서 나가요. 여기는 여러분을 환영하지 않아요!”유자성는 안색이 변하며 나지막하게 호통쳤다.“강후야, 말도 안 돼. 난 네 형님이야. 친형님이라고!”유강후는 손을 떼고 문을 향해 가리키며 소리쳤다. “당장 나가요!”유자성은 화가 나서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동생은 비록 성격이 냉담하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두 사람은 그래도 화목한 편이었다. 그들은 심한 말 한마디도 약간의 다툼도 없었다.뜻밖에도 오늘 외부인을 위해 여러 차례 비꼬았을 뿐만 아니라, 방금 실수로 유하령을 다치게 할 뻔했다.지금은 더욱이 이 외부인을 위해서 그를 내쫓고 있다.형님으로서의 체면과 위엄은 앞으로 어디에 둬야 한단 말인가.그는 온다연을 가리키며 화를 냈다.“쟤를 위해서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유강후는 얼굴빛이 매우 차가웠다.“형, 잊지 말아요. 두 분이 버린 거예요. 두 분이 버린 걸 제가 주우면 당연히 내 사람이고, 내 사람은 아무도 괴롭힐 수 없어요!”유자성은 지금까지 누군가 이렇게 대든 적이 없었던 터라 화가 나서 손가락질하며 말을 하지 못하고 얼굴이 지지 벌게졌다.심미진은 형제가 싸울 것 같아지자 급히 유자성을 말리며 말했다.“자성 씨, 우리 먼저 가요. 도련님도 잠시 저러는 거지 나중에 깨달으면 자연히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그러더니 한 손으로는 유하령을 부축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유자성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온다연이 갑자기 머리를 들었다.“이모! ”목소리가 잠긴 것이 마치 우는 것 같다.심미진은 못 들은 듯 빠른 걸음으로 갔다.그녀가 가는 것을 들은 온다연은 땅에서 일어나 더듬거리며 밖으로 나갔고, 유강후는 그녀를 잡아끌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를 확 밀어버렸다.그녀
“망가지지, 망가지면 안 아플 텐데!”그러더니, 자기 가슴을 후려갈겼다.유강후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찢기듯 아팠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다연아, 나 있잖아. 나 여기 있어.”온다연은 그를 피하며 목에 힘을 줘 소리쳤다.“아저씨가 필요 없어요. 난 아저씨를 원하지 않아요. 이모, 난 단지 내 이모를 원해요!”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문밖으로 뛰어갔다.그러나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는 문에 기대어 목청껏 소리쳤다.“이모!”“이모!"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바람 부는 소리와 돌 위에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그녀는 몇 번 불렀으나 대답을 듣지 못하고,문 앞에 서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그 작고 연약한 모습에 유강후는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차가운 바람이 심장에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잠시 후 온다연은 처량한 목소리로 또 한 번 불렀다.“이모!”역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려 손에 닿는 것을 전부 땅에 쓸었다.“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야!”곧 입구 현관에 있던 물건들이 엄청나게 값비싼 도자기와 골동품을 포함하여 땅바닥에 널려 있었다.집사가 나서서 막으려고 했지만 유강후가 저지했다.그는 그녀가 물건을 아무렇게나 부수는 것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냥 놔둬.”집사는 아무 말 없이 산산조각이 난 명품 도자기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만 지었다.한참 후, 온다연은 지쳐서 깨진 도자기 조각 더미에 그대로 드러누웠다.도자기 파편이 그녀의 피부에 박혔지만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유강후는 다가가서 그녀를 안아 올리고 그녀의 몸에서 작은 파편을 털어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됐어?”온다연은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힘들어요. 살고 싶지 않아요.”그녀를 꼭 껴안고 있는 유강후의 손은 무서울 정도로 힘이 세지만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살아야 해. 그것도 잘살아야 해.”온다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혼잣말을 했
“지훈 씨, 미안해요.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훈 씨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요. 솔직히 약혼 날짜를 미룰까도 고민해 봤는데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훈 씨는 그저 저한테 가족이나 오빠 같은 사람...”“듣기 싫으니까 그만해.”염지훈은 거칠게 말을 자르고선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온다연, 너 진짜 잔인하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 널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왜 유강후는 등장만으로도 마음을 사로잡는 건데? 왜 그 사람 말 한마디에 흔들리냐고. 도대체 왜?”온다연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박씨 가문과 진씨 가문의 약혼은 깬 건 그녀가 맞았기에 배신자라고 비난하고 질책해도 말없이 그걸 견뎌야만 했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내 마음을 통제할 수가 없었어요...”“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다야?”고통을 이기지 못한 염지훈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불과 몇 초 만에 그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다.온다연은 재빨리 그를 말렸다.“지훈 씨, 이러지 마요.”그러자 염지훈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흐느꼈다.“그냥 잠깐 자리를 비운 것뿐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어? 예전의 온다연은 어디 갔냐고. 돌려내. 돌려내라고.”“내가 아는 말 잘 듣고 착한 온다연은 다른 사람과 쉽게 사랑에 빠질 그런 여자가 아니야.”그는 힘껏 온다연을 밀쳤다.“넌 온다연이 아니야. 나가.”“나가라고.”뒤로 밀려난 온다연은 문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고 곧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새빨간 피가 그녀의 하얀 뺨을 적시고 나서야 염지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는 온다연을 안아서 소파에 앉힌 뒤 약상자를 찾아와 지혈해 주려고 애썼다.그런데 온다연이 그를 제지했다.“됐어요. 지훈 씨가 더 심하게 다쳤잖아요. 제가 해줄게요.”온다연은 연고와 붕대를 집어들고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과 몸에 난 상처에 약을 발랐다.피투성이 된 손을
유강후는 주먹으로 문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꺼져.”가장 소중한 걸 잃은 듯한 괴로운 느낌이 또다시 밀려왔고 그는 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경호원들은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멀지 않은 곳에서 유강후를 지키고 있었다.그들의 눈에 비친 유강후는 우리에 갇힌 짐승이 따로 없었다. 평소 단호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미래 그룹의 대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이때 유강후가 대뜸 물었다.“두 사람...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경호원이 입을 열었다.“저희가 알고 있는 사모님은 선을 지키는 분입니다. 아마 염 대표님과의 약혼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을 겁니다.”유강후의 곁에서 오랜 세월 일하면서 그들은 두 사람이 어떤 풍파를 겪었는지 전부 지켜봤다. 더욱이 지난 3년 동안 유강후가 보낸 힘든 시간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그러기에 그에게 온다연이 어떤 존재인지는 더없이 잘 알고 있다.하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으니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편하게 지내지 못할 테니까.그 시각 별장 안.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염지훈은 온다연을 덥석 끌어안았다.온다연은 몸부림치지 않고 그가 자신을 껴안도록 내버려두었다.하지만 염지훈의 힘은 점점 더 세졌고 마치 그녀를 몸속으로 밀어 넣을 듯 꽉 껴안고 놓지 않았다.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숨쉬기 힘들 정도가 되어서야 온다연은 입을 열었다.“이제 됐어요?”염지훈은 그녀를 놓아주더니 잔뜩 지쳐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연아, 기억이 돌아온 거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예전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염지훈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기억이 돌아온 것도 아닌데 왜 유강후를 만나는 거야?”염지훈은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 계속하여 현실을 부정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느껴질 정도였다.“말도 안 돼. 내가 떠난 지 얼마 됐다고 유강후를 만나는 거야? 심지어 저 사람 하나 믿고 여기까지 왔어?”온다연
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염지훈은 믿기지 않았다.“기억이 떠오른 게 아니라면 유 대표랑은...”“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잠깐 자리를 옮겨서 얘기할까요?”그러자 염지훈이 답했다.“나 근처에 사니까 그쪽으로 가자.”염지훈이 지내는 곳은 불과 이곳에서 몇백 미터 떨어져 있었고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앞장선 염지훈의 뒤에는 온다연이 있었고 유강후는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유강후가 온다연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염지훈은 돌아서서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곤 했다.극도로 어색한 분위기나 한참이나 이어졌다.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두 사람과 비슷한 거리를 두었다.별장에 다다르자 염지훈은 유강후를 가로막았다.“그쪽은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라서...”그러자 유강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염 대표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대화를 할 수 있게 허락한 거예요. 잊지 마요. 우리 사이에 끼어든 건 그쪽이니까.”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염지훈의 손에서는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고 당장이라도 유강후를 갈기갈기 찢을 기세였다.“무슨 낯짝으로 다연이의 곁에 있는 거죠? 그럴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다연이를 어떻게 찾았는지 알려줄까요?”“강 대표님이 바꿔치기...”“닥쳐.”분노를 이기지 못한 유강후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염지훈의 손목을 잡았다.“상황을 이용한 비열한 놈이 누군데 감히 날 탓해?”“나랑 다연이 사이에 아무리 큰 문제가 있더라도 그건 우리 둘이 해결할 거야. 너 같은 제 3자가 끼어들 곳은 없어.”제 3자라는 말은 염지훈의 분노 버튼을 눌러버렸다. 결국 그는 또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쓰레기 같은 놈. 너랑 네 가족들이 다연이한테 했던 짓을 생각해 봐. 넌 평생 용서받지 못할 거야.”온다연이 그의 팔을 잡으며 말린 덕분에 주먹은 유강후에게 떨어지지 않았다.“지훈 씨, 얘기할 생각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염지훈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저 인간
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차갑게 입을 열었다.“염 대표?”‘염지훈이 왜 여기에 있지?’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비꼬는듯한 어조로 말했다.“레스토랑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새로운 부인과 오붓한 데이트라도 하고 계셨나?”유강후의 시선은 그를 넘어 온다연에게 향했다.온다연도 염지훈을 본 게 분명하다.그녀는 일어나서 가볍게 입을 열었다.“지훈 씨.”부드러운 목소리에 염지훈은 날벼락을 맞은 듯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다가 갑자기 돌아섰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앞의 사람을 바라봤다.“다연이?”온다연은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맞아요.”염지훈은 시선은 오랫동안 그녀에게 머물렀고 여전히 이곳에서 온다연을 만나게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정말 다연이야?”온다연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러자 유강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쪽으로 와요.”염지훈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몸을 홱 돌리더니 사나운 눈빛으로 유강후를 매섭게 노려봤다.“또 그쪽이네요. 어떻게 찾았어요?”유강후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눈에 적의가 번쩍였다.“다연이는 처음부터 내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염 대표님이 제멋대로 숨겼잖아요. 어떻게 감히...”말이 끝나기도 전에 염지훈은 분노하며 달려들더니 유강후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짐승만도 못한 게 무슨 낯짝으로 다연이를 찾아와?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넌 다연이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유강후는 일부러 고개를 기울여 주먹을 맞았다.그러고선 달려드는 경호원들에게 소리쳤다.“물러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절대 움직이지 마. 이건 우리 둘 사이의 원한이야.”그 말에 경호원들은 할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유강후는 외투를 벗어 차에 던지더니 곧바로 주먹을 날렸고 염지훈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냈다.두 남자는 실력이 엇비슷해서 싸우기만 하면 목숨을 걸었고 잠깐 사이에 모두 부상을 입었다.온다연은 싸움이 점점 심해지자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달려들었지만 곧바로 경호원에게 붙잡혔다.
어느새 온다연의 뒤에는 건장한 경호원들이 나타났다.한눈에 봐도 굉장히 강하고 전문적인 티가 났기에 남자들은 당황한 듯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욕설을 퍼부었다.“우리가 누군지 알아? 경고하는데 한국인이면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우리 배후에는 어마어마한 인물이 있거든.”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물었다.“여기서 사람 때려도 돼요? 강 대표님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겠죠?”경호원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당장 이곳에서 죽이지 않는 한 문제 될 건 없습니다.”그러자 온다연은 차분하게 말했다.“그럼 저 인간들이 다시는 누굴 괴롭히지 못하게 불구로 만들어줘요.”“알겠습니다. 사모님.”곧 주차장 전체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조명이 어두워서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아무도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온다연은 시끄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입 막아버려요.”“알겠습니다.”곧 그들은 숨이 간신히 붙어있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치 부서진 장난감처럼 바닥에서 꼼짝하지 못했다.온다연은 앞으로 나서서 그중 한 명을 걷어찼다.“앞으로 또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거예요?”남자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아니요.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온다연은 여전히 싸늘했다.“경찰서로 가서 자수해요. 지금까지 괴롭혔던 사람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털어놓아요. 안 그러면 내가 당신들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온다연이 손짓하자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왔다.“저 사람들을 경찰서 입구에 버려줘요.”“알겠습니다.”그 후 온다연은 여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했다.“괜찮아요? 어디 아픈 곳 없어요?”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기력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런 건 익숙하니까... 고마워요.”온다연은 두통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어쩌면 이런 장면이 너무 익숙해 자신이 예전에 겪은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른다.“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거예
하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고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염지훈은 허탈한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여긴 북아메리카잖아. 다연이가 있을 리가 없지...”출국이 금지되어 온다연과 약혼할 수조차 없는 현실을 생각하니 권예진에 대한 미움이 더 커졌다.염지훈은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권예진을 바라봤다.“출국 금지된 건 너랑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성큼성큼 떠났다.염지훈의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온다연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그녀는 염지훈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넋을 잃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강후도 나왔다.그는 멍해 있는 온다연을 보고선 눈살을 찌푸렸다.“왜 그래요?”온다연은 마음을 가다듬고 담담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요.”이때 권예진이 룸에서 나왔고 그녀는 유강후를 보고선 흠칫했다.‘낯이 익은데... 누구지? 오늘 아침에 봤던 잡지 표지의 인물이랑 비슷해 보이는데...’‘옆에 있는 여자도 낯이 익네?’권예진이 생각에 잠긴 찰나 유강후는 이미 온다연과 함께 떠났다.그녀는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가고 나서야 온다연이 누군지 알아차렸다.염지훈 사무실에 놓인 사진 속의 그 여자다.재빨리 뒤쫓아가려고 했지만 엘리베이터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아래층에 도착해 막 차를 타려던 찰나 유강후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발신자 번호를 보며 온다연에게 말했다.“전화 받고 갈 테니까 차에서 기다려요.”온다연이 차에 오르자마자 옆에 있던 차에서 남자 세 명이 내렸고 그들은 어떤 여자를 끌어내리더니 무차별적인 폭행을 저질렀다.여자는 간절하게 용서를 빌었지만 그들은 들리지 않는 듯 계속하여 주먹과 발길질을 했다.한국어로 말했기에 온다연은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파악했다.세 남자는 다른 사람의 돈을 받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 같았다. 그들은 누군가의 장난감이라며 여자를 모욕했고 듣기 거북한 말을 끊임없이 퍼부었다.이런 장면들이 꿈
염지훈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권예진, 너 왜 이렇게 뻔뻔해? 귀찮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했잖아. 꼭 이래야만 속이 후련하니?”권예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염지훈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끌어다가 태연하게 먹었다.“먹을 땐 언제고 배부르니까 버리려고요?”그 말에 표정이 싸늘해진 염지훈은 경고하듯 나지막이 말했다.“약 탄 사람 너지? 권예진, 기회 줄 때 솔직하게 말해. 약 탔지?”권예진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염지훈을 쳐다봤다.“내가 그렇게 추잡스러운 인간으로 보여요?”염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에는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맞잖아.”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내려놓은 권예진은 고개를 숙인 채 애써 감정을 숨겼다.“아빠가 지훈 씨를 잡으라고 한 건 솔직하게 인정할게요. 하지만 절대 약을 타지는 않았어요. 누군가 어젯밤에 저한테도 약을 탔다면 믿으실래요?”염지훈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그러고선 수표 한 장을 꺼내 권예진에게 던졌다.“하룻밤에 20억이면 충분하지? 부족하면 말해.”권예진은 테이블 모서리를 꽉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격 떨어지는 행동은 그만해줄래요? 박씨 가문보다 못한 건 맞지만 이깟 돈으로 모욕당할 만큼 부족하지는 않으니까.”“그 일에 대해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늘 밥 먹자고 한 거예요. 책임지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3개월 동안 회사에서 일 배우기로 아빠랑 약속했어요. 3개월이 되면 귀찮게 하지 않고 바로 떠날게요.”염지훈은 여전히 싸늘했다.“아니. 내일 당장 돌아가. 능력이 뛰어나서 돌려보냈다고 내가 직접 연락해서 설명할게.”권예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엄마가 남겨준 물건을 돌려받으려면 무조건 3개월을 채워야 해요. 안 그러면 전부 다 내연녀한테 준다고요.”권예진은 눈물을 머금은채로 고개를 들었다.“이렇게 빌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절대 눈에 띄지 않
빛을 등지고 앉은 탓에 유강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의 일을 알게 되면 더 고통스러울지도 몰라요. 지금도 이렇게 괴롭잖아요. 그러니까 그만 생각해요.”온다연은 투덜거렸다.“강 대표님이 온 이후로 매일 안 좋은 꿈을 꿔요. 예전에 무슨 일 있었죠? H국에서 지낼 때 제가 많이 힘들었어요? 알려줘요.”“전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현실감이 넘쳤거든요. 그 꿈들이 진짜라고 생각할 때마다 아프고 괴로워요.”유강후는 그녀를 안은 채 말없이 등을 토닥였다.그 침묵은 마치 꿈속의 일들이 현실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불안함을 느끼며 진지하게 물었다.“그러니까 전부 다 사실이라는 거죠?”애써 괴로움을 감춘 유강후는 무덤덤하게 말했다.“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유나 씨의 곁에는 제가 있었거든요. 우린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유강후는 온다연이 평생 기억을 되찾지 못하기를 바랐고 상처입힌 일들은 그저 과거 속에서 썩어가도록 내버려두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무리 나쁜 기억이라도 그건 추억이잖아요. 강 대표님의 말대로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냈다면 더 잊어서는 안 되죠.”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두 손으로 유강후의 얼굴을 감싸고 지그시 눈을 바라봤다.“솔직하게 말해봐요. 우린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게 맞죠? 거짓말하면 안 돼요.”유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큰손으로 온다연의 머리를 잡더니 곧바로 입을 맞췄다.유강후의 키스는 더 이상 예전처럼 강압적이지 않았고 마치 그녀를 달래듯 부드럽게 입술과 얼굴, 그리고 귓볼에 입을 맞췄다.유강후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입맞춤하면서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마치 작은 고양이를 달래듯 조심스러운 그의 행동은 스트레스받은 감정과 과거의 고통을 어루만졌다.그의 차분한 감정과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온다연의 초조한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았다.숨 막힐듯한 키스가 이어지
“괴롭힘당하는 꿈을 꿔요. 그것도 매일. 정말 나한테 있었던 일인가요? 방금 저 남자... 어떤 사람이에요?”유강후는 온다연을 꼭 껴안고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은 조금씩 닦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 먹었으면 이만 돌아갈까요?”온다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았다.“싫어요. 강 대표님은 왜 매번 피하기만 해요? 이런 질문할 때마다 어떻게서든 자리를 뜨려고 하잖아요.” 온다연의 유강후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누군지 알려줘요. 내 마음이 왜 이렇게 괴로운지 알아야 하잖아요.”하지만 유강후는 그녀를 안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지금은 유나 씨의 컨디션이 별로인 것 같네요. 나중에 기분이 풀리면 알려줄게요.”“싫다고요.”온다연은 몸부림치며 그에게서 벗어났고 다시 그 광고를 보려고 창가로 달려갔다.광고비가 엄청나게 높은 터라 아무리 유명한 브랜드라도 장시간 반복적으로 홍보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극심한 두통이 밀려온 온다연은 광고 한두 개를 보더니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곧바로 유강후를 향해 돌진했다.“왜 가만히 있어요? 누군지 알려달라고요. 누구냐고요.”그 남자는 온다연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인듯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다연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기억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분명히 진실이 눈앞에 있는 대로 알 권리조차 없는 현실에 그녀는 점점 통제 불능의 작은 짐승처럼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온다연은 유강후의 팔을 붙잡고 단호하게 말했다.“강 대표님은 다 알고 있잖아요. 모른다는 건 누가 봐도 거짓말이에요. 제발 알려줘요. 저 남자가 누군지 알려달라고요.”눈물 범벅된 채로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위로해야만 했다.“아는 사람은 아니에요. 유나 씨한테 저 사람과 매우 닮은 친구가 있었어요. 둘은 다른 사람이에요.”유강후는 그 남자가 주희인걸 알아봤다.얼굴에 손을 댔는지 이제는 주한과 매우 비슷해졌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이곳에 데려온 걸 후회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