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밖에서 너절한 친구를 사귀고 있는데 집을 팔거나 사기를 당할까 봐...”유강후는 그녀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다연이가 지금 나를 따라온 이상, 이런 일은 형수님이 관여할 수 없어요. 나중에 서류를 보내줘요. 제가 가서 대신 명의 변경을 해 줄게요.”심미진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자성를 힘껏 잡아당겼다.유자성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집 한 채는 안중에도 없었기에 덤덤하게 한마디 했다. “이왕이면 빨리 돌려줘.”그는 어조를 좀 누그러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강후야, 우리는 친형제이니 너무 따지지는 말아라.”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그들 옆을 지나 소파에 앉았다.찻상 위에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는데 서서히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어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고, 그는 한참 뒤에야 덤덤하게 물었다. “형님은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어요?”유자성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있겠어. 며칠 동안 집에 안 왔잖아. 아빠가 와서 널 보라고 했어. 서주랑 하령이의 약혼에 대해 상의할 겸 왔어.”유강후는 탁자 위의 담뱃갑을 가져다가 한 개 꺼내 불을 붙였지만 피우지 않고 냉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의 아들딸이에요. 결혼 같은 일은 나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요.”유자성는 그 속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소파에 앉아 한 마디씩 늘어놓았다.방안에서 집사가 온다연의 가정복을 가져와서 갈아입혀 주고는 따뜻한 우유를 들고 그녀가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우유를 다 마시자 컵을 받아들고 막 방을 나서려는데 온다연이 작은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장 집사님, 아저씨 아직도 얘기해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직 얘기 중이세요.”온다연은 다시 얼굴이 창백해지며 낮게 말했다.“이모가 절 아저씨한테 보내는 거예요?”며칠을 함께 지낸 집사는 그녀의 사정을 딱하게 생각하며 걱정스러운 듯 조용히 말했다. “다연 아가씨는 이미 스무
방에 들어선 유하령은 비싼 가구들의 우아한 기풍에 질투가 났다.유강후가 사는 곳은 장식이 언제나 고급스럽고 품격이 있었다.예를 들어 이곳 말이다. 발밑에 흰색의 순수한 수제 캐시미어 카펫을 현관에서 침대 옆까지 깔았는데, 밟으면 두툼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매우 비싸다는 것을 보여줬다.비싸다고 소문난 수작업으로 만든 페르시아 융단이었는데, 그녀의 방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이 없었다.그리고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인 온다연은 카펫 끝에 있는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부드러운 불빛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물들였다.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유하령은 온다연의 촘촘한 속눈썹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연약하고 정교해서 사람을 잘 끄는 모습이었다.‘바로 이런 모습으로 아저씨를 꼬신 건가? 나도 아직 이 집에 발을 들이지 못했는데 이 천한 년이 먼저 들어왔다니! 무슨 근거로? 그럴 자격이 없어!’유하령가 질투 나서 미칠 것 같았다.그녀는 달려들어 온다연에게 뺨을 한 대 때리고 이를 악물었다. “온다연, 감히 내 아저씨에게 눈독을 들여?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그녀가 들어오자 온다연은 상대방이 집사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유하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심미진인 줄 알았다.실망했지만 이내 유하령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했다.하지만 여기는 유씨 가문이 아니니 그녀도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그녀는 방금 맞은 곳을 더듬었는데, 그곳은 불타고 있는 것처럼 따끔했다. 얼얼하게 부어오른 그녀는 혀로 까진 입안을 헤치고 있었는데 초점 없는 두 눈이 차가워 보였다.“유하령, 뺏긴 기분은 어때? ”유하령은 몸을 부르르 떨며 온다연의 머리채를 잡고 흉악하게 말했다.“너 역시 일부러 그랬구나. 일부러 내 아저씨에게 접근해서 그의 동정을 이용하며 권세에 빌붙은 건 너에게 높은 가문의 자제를 소개해 달라고 하려고? 잘 들어, 너 그거 그냥 꿈이야!”“얼마나 오랫동안 동정해 줄 것 같아? 아저씨는 내년에 약혼을 앞두고 있어. 지금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연기였고, 그녀는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 본 적이 없는 그녀는 갑자기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더러운 년, 감히 나를 모함하다니!”그녀는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힘껏 그녀를 걷어찼다.뾰족한 하이힐이 온다연의 복부를 걷어차자 온다연은 심한 통증을 느끼며 피를 토해냈다.그런데도 유하령은 화가 풀리지 않아 발을 들고 또 걷어차려 했지만 손을 쓰기도 전에 갑자기 유강후가 목을 졸라왔다.그는 안색이 한껏 어두워진 채 유하령을 살의를 띤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그뿐이 아니었다. 유강후는 거의 죽을힘을 다했는데, 그 힘은 그녀를 그대로 목 졸라 죽이려는 것과 같았다.유하령은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쉬었지만 얼굴이 조금씩 새빨개지며 쉰 목소리로 간신히 뱉었다.“아저씨...”그러나 유강후는 못 들은 듯 눈초리가 매섭고 살의가 짙어졌다. 잠시 후 유하령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눈앞이 캄캄해졌다.그녀는 순간 아저씨가 정말로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필사적으로 유강후의 손을 내리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눈앞이 캄캄해지며 곧 질식하여 기절할 것 같았다.그때 유자성이 달려들어 유강후의 손을 잡아끌며 호통쳤다. “강후야, 뭐 하는 거야? 놔! 네 친조카야!”유강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힘껏 뒤로 젖히자 유하령의 몸이 순식간에 날아가 벽에 세게 내동댕이치고는 땅바닥에 떨어졌다.거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하령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기침을 계속했고 목이 끊어질 듯 아팠다.그녀는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아저씨를 쳐다보았다.그녀는 아저씨가 방금 그녀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것도 외부인을 위해서 말이다!그러나 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허리를 숙혀 온다연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채 피를 토하고 있었는데 하얀 카펫이 젖어 있어 그 모습이 섬뜩했다.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진 채 손을 뻗어 그녀를 안으려고 했지만, 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
온다연은 몸을 떨며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았다.유강후는 갑자기 몸을 돌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심미진을 향해 소리쳤다. “나가요.”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조금도 인정사정이 없었다.“세 사람, 내 집에서 나가요. 여기는 여러분을 환영하지 않아요!”유자성는 안색이 변하며 나지막하게 호통쳤다.“강후야, 말도 안 돼. 난 네 형님이야. 친형님이라고!”유강후는 손을 떼고 문을 향해 가리키며 소리쳤다. “당장 나가요!”유자성은 화가 나서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동생은 비록 성격이 냉담하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두 사람은 그래도 화목한 편이었다. 그들은 심한 말 한마디도 약간의 다툼도 없었다.뜻밖에도 오늘 외부인을 위해 여러 차례 비꼬았을 뿐만 아니라, 방금 실수로 유하령을 다치게 할 뻔했다.지금은 더욱이 이 외부인을 위해서 그를 내쫓고 있다.형님으로서의 체면과 위엄은 앞으로 어디에 둬야 한단 말인가.그는 온다연을 가리키며 화를 냈다.“쟤를 위해서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유강후는 얼굴빛이 매우 차가웠다.“형, 잊지 말아요. 두 분이 버린 거예요. 두 분이 버린 걸 제가 주우면 당연히 내 사람이고, 내 사람은 아무도 괴롭힐 수 없어요!”유자성은 지금까지 누군가 이렇게 대든 적이 없었던 터라 화가 나서 손가락질하며 말을 하지 못하고 얼굴이 지지 벌게졌다.심미진은 형제가 싸울 것 같아지자 급히 유자성을 말리며 말했다.“자성 씨, 우리 먼저 가요. 도련님도 잠시 저러는 거지 나중에 깨달으면 자연히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그러더니 한 손으로는 유하령을 부축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유자성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온다연이 갑자기 머리를 들었다.“이모! ”목소리가 잠긴 것이 마치 우는 것 같다.심미진은 못 들은 듯 빠른 걸음으로 갔다.그녀가 가는 것을 들은 온다연은 땅에서 일어나 더듬거리며 밖으로 나갔고, 유강후는 그녀를 잡아끌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를 확 밀어버렸다.그녀
“망가지지, 망가지면 안 아플 텐데!”그러더니, 자기 가슴을 후려갈겼다.유강후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찢기듯 아팠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다연아, 나 있잖아. 나 여기 있어.”온다연은 그를 피하며 목에 힘을 줘 소리쳤다.“아저씨가 필요 없어요. 난 아저씨를 원하지 않아요. 이모, 난 단지 내 이모를 원해요!”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문밖으로 뛰어갔다.그러나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는 문에 기대어 목청껏 소리쳤다.“이모!”“이모!"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바람 부는 소리와 돌 위에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그녀는 몇 번 불렀으나 대답을 듣지 못하고,문 앞에 서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그 작고 연약한 모습에 유강후는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차가운 바람이 심장에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잠시 후 온다연은 처량한 목소리로 또 한 번 불렀다.“이모!”역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려 손에 닿는 것을 전부 땅에 쓸었다.“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야!”곧 입구 현관에 있던 물건들이 엄청나게 값비싼 도자기와 골동품을 포함하여 땅바닥에 널려 있었다.집사가 나서서 막으려고 했지만 유강후가 저지했다.그는 그녀가 물건을 아무렇게나 부수는 것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냥 놔둬.”집사는 아무 말 없이 산산조각이 난 명품 도자기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만 지었다.한참 후, 온다연은 지쳐서 깨진 도자기 조각 더미에 그대로 드러누웠다.도자기 파편이 그녀의 피부에 박혔지만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유강후는 다가가서 그녀를 안아 올리고 그녀의 몸에서 작은 파편을 털어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됐어?”온다연은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힘들어요. 살고 싶지 않아요.”그녀를 꼭 껴안고 있는 유강후의 손은 무서울 정도로 힘이 세지만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살아야 해. 그것도 잘살아야 해.”온다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혼잣말을 했
“아파요, 아파 죽을 것 같아요.”온다연은 아프다고 호소하며 손으로 명치를 꽉 움켜쥐고 몇 번을 두드렸다. 그러자 하얀 허리선이 살짝 드러났고 주 의사는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유강후는 순간 그녀의 허우적대는 손을 잡고 담요를 그녀의 몸에 걸치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움직이지 마. 선생님 보셔야지.”온다연은 정말 괴로운지 가슴을 잡으려고 했지만 유강후가 막았다.다시 한번 자세히 검사한 후, 주 의사는 신경을 진정시키는 약을 처방했다.가기 전에 온다연이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걸 보니 몸이 너무 약해 보였고, 기본적인 기운마저 사라진 듯 초점 없는 눈은 더욱 막막하고 무기력해 보였다.주 의사는 고개를 저었지만 어쩔 수 없어 다시 온다연에게 안정 주사를 놓고 강제로 잠을 자게 하는 약을 처방했다.온다연은 약을 먹고 곧 잠이 들었다.하지만 잠이 들어도 땀과 잠꼬대를 멈추지 않을 정도로 불안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새까만 머리카락이 새하얀 목에 닿아 점점 예쁘게 보였고 입술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유강후는 그녀가 잠든 모습을 침울하게 바라보았다.사실 오늘 일부러 그랬다. 온다연이 심미진에 관한 생각을 완전히 끊었으면 하는 마음에 오늘 이 극약을 먹여야 했다.그는 결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이 많은 그의 모든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되어 있다.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말 한마디, 모든 일의 시작은 모두 그의 통제 안에 있었다.유일한 사고는 온다연이 너무 자극받은 것 같다는 것이다.온다연의 심미진에 대한 애정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것 같았다.그녀가 바닥에 누워서 가슴을 쥐어짜면서 가슴이 아프다고 하는 모습에 그의 심장도 덩달아 아팠다.그의 손은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천천히 쓰다듬다가 그 위에서 부드럽게 멈췄다.잠든 얼굴은 희미한 불빛에 애꿎고 앳돼 보였고,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있는 모습은 키스를 기다리는 듯했다.유강후는 잠시 바라보다가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몸을 숙여 그녀의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손에서 그녀가 이렇게 자랄 줄은 몰랐다.천천히 눈을 가늘게 뜨는 그의 눈 속 서리가 점점 더 두터워졌다.‘그 사람들은 전부 다 죽어야 한다!’온다연은 이번에 병이 심해서 정신이 조금 흐릿해졌다.처음에는 계속 열이 나서 이모를 부르기도 하고 하는지를 부르기도 했는데 강후의 손을 놓으려고 하지도 않았다.2, 3일 동안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한의사의 약이 효과가 있었고 4일째에는 점차 깨어났는데 시력도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하지만 이전보다 더 말이 없었고, 이번에는 고양이를 안고 마루 앞에 서서 정원의 큰 나무를 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엷은 햇빛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창백하고 정교한 얼굴을 비추자 온다연은 마치 생기가 없는 조각상처럼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이권이 들어오자마자 유강후가 사무실을 거실로 옮긴 것을 보았다.오늘 유강후는 트윌 무늬의 고정 흰색 셔츠와 철회색 양복바지를 입었는데 깨끗하고 차갑고 존귀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머리를 숙이고 서류를 검토하는 동안 사람을 보지 않았지만 그 상위자의 강한 기세는 여전히 얼굴에 띠고 있었다.이권은 만약 그가 유강후를 이렇게 오랫동안 따르지 않았다면, 외모로만 봤을 때 유강후가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뼛속까지 차가운 도련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사실 유강후라는 사람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인내심을 보일 땐 부처님 같지만, 일 처리는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게 하며, 독할 때는 순식간에 마귀로 변신해 상대방을 지옥에 떨어뜨린다..며칠 후에 일어날 일을 떠올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고는 손에 든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지막하게 말했다.“도련님, 물건은 다 준비됐습니다.”유강후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올려다보고는 옆에 있는 온다연에게 말했다.“다연아, 약 식어.”방에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온다연은 흰 긴 소매의 원피스만 입고 창가 쪽 카운터에 엎드려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유강후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유강후는 눈
유강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옅은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여기로 오라고 했어?”이남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거의 다 와서 저한테 연락했어요. 이쪽 마당을 보고 싶다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도련님이 환영하지 않으니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말하는 사이에 염지호가 이미 걸어 들어왔다.그는 30대 중반의 잘생긴 젊은 남자로 올백 머리를 하고 검은색 정장 위에 같은 색의 코트를 입었는데, 키가 크고 침착해 보였으며 눈빛에 장사꾼 특유의 총명함이 배어 있었다.그리고 그 뒤에 철회색 양복에 외투를 걸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는데, 유강후도 최근에야 만났던 염씨 집안의 염지훈이었다.유강후의 눈빛은 조금 어두워 보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냉담했다.“지호 씨 왔어요? 저기 탕비실에 가서 기다려요.”염지호는 코트를 벗어 마중 나온 직원에게 건네주더니 웃으며 말했다. “최근에 좋은 차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둘째를 데리고 와서 마셔보려고요.”그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옆에 있는 염지훈을 향해 말했다.“지훈아, 이분은 내가 자주 언급하던 유씨 가문 도련님이자 미래 그룹 현 대표님이쇼. 어때? 기품 있지? 사실 예전에 두 사람 만난 적이 있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니 다시 인사해.”염지훈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유강후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도련님, 또 뵙네요.”유강후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벼운 악수로 인사를 대신했다.그런 다음 그는 온다연을 돌아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다연아, 할 말이 있으니 방에 가서 쉬거나 꽃방을 둘러봐.”염지호는 그제야 소파에 앉아 있는 한 소녀가 연백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뽀얀 피부를 하고 있었고 눈썹과 눈이 매우 정교해 보였다.염지호처럼 많은 여자를 만나 미인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도 지금은 살짝 놀란 채 눈을 떼지 못했다.그 소녀는 품에 아주 작은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베이지색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는데, 표정이
병원에서.며칠간의 치료와 정성 어린 간호 끝에 나은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그녀는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며 소이섭이 깎아준 사과를 받아들었다.“그 사람은 어떻게 처리했어요?”소이섭은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죽었어. 너무 많은 걸 아는 사람은 살려둘 수 없지.”나은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그 사람... 강후 씨 비서였잖아요. 갑자기 죽으면 의심을 사지 않을까요?”그러자 소이섭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강후는 지금 온다연이라는 여자애를 찾느라 온 세상을 뒤지고 있어. 이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야.”곧 나은별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이번 수는 제대로 먹혔네요. 비서를 이용해 강후 씨의 말을 왜곡해서 아래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하고 강후 씨가 온준휘를 구하지 않으려 한다는 오해를 만들었잖아요. 그 결과 온준휘는 골든타임을 놓쳐 죽게 됐고 지금 온다연의 눈에는 강후 씨가 살인범이나 다름없겠죠.”“온다연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했어요. 자신이 잠깐 돌봐줬다는 이유만으로 심미진이 온다연을 학대하고 유하령이 괴롭히게 놔뒀는데도 아직도 심미진을 잊지 못하더라고요. 그런 애가 가장 중시하는 건 가족이에요. 그런데 온준휘가 강후 씨의 무관심으로 죽었다고 믿고 있으니... 온다연이 강후 씨를 용서할 리 없겠죠.”“게다가 온다연은 강후 씨가 자기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버렸다고 믿고 있어요. 이제 강후 씨를 더더욱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근데 정말 보고 싶어요. 그 여자가 자기 아이가 사실 이미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해!”소이섭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차갑게 말했다.“지금은 온다연이 그 사실을 알게 하면 안 돼. 김원도와 계획한 대로 모든 걸 진행해야 해. 하지만 걱정 마. 온다연이 너한테 그런 짓을 했던 만큼 내가 온다연한테 그보다 더한 고통을 줄 거니까.”나은별은 이를 드러내며 비웃었다.“온다연 따위가 감히 나와 경쟁
유강후는 온다연이 다른 남자를 위해 애원하는 모습을 보며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만약 내가 안 된다고 하면?”온다연은 침묵했다.그녀의 손에는 지금 그를 위협할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유강후가 지금 신경 쓰는 건 아마 그녀의 목숨뿐일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유강후는 아직 온다연을 완전히 가지고 놀지 못했다.한참을 망설인 끝에 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나쁜 소식을 들으면 나는 이곳에서 뛰어내릴 거예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까. 정말로... 너무 지쳤어요.”그녀의 눈에 가득한 피로감은 거짓이 아니었다.유강후는 가슴 한가운데가 쥐어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녀가 또다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그를 위협하니 말이다.며칠 동안 그녀를 찾기 위해 유강후는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다.염지훈과 그녀가 한 방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그럼에도 온다연이 김원도의 사람들에게 노출될까 봐 그는 끊임없이 조바심을 냈다.몇 차례 그녀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강후는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그런 상황 속에서 아무도 그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몰랐다.사실 유강후는 한 번도 이렇게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어린 시절 임씨 가문의 미치광이가 유강후를 방 안에 가둬두고 불을 지를 때도, 납치되어 피를 뽑히고 총구가 이마에 겨눠졌을 때도, 심지어 고층 건물에서 떠밀려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도 그는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았다.하지만 온다연이 어딘가에서 고통받거나 모욕당할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심지어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거짓 소식을 들었을 때는 순간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릴 뻔했다.이런 이유로 그는 염지훈을 죽이지 않았다.그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염지훈은 이미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비록 온다연을 데리고 갔지만 염지훈은 그녀를 김원도의 광기에서 철저히 보호했다.그런 점에서 염지훈을 죽이는 대신 단지 한 번 심하게 때리는 것으로 끝낸 것이다.물론 유강후는 여전히 염지훈을
그 대답을 들은 유강후는 애써 참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그는 천천히 온다연의 목에 감긴 붕대를 쓰다듬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참 안됐군. 너는 평생 나와 함께할 수밖에 없어. 죽어도 내 무덤에 묻혀야 하고 묘비에는 내 이름이 새겨질 거야.”이내 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낮게 물었다.“온다연, 네가 내 곁을 떠나 있었던 날들이 며칠인지 기억이라도 나?”온다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답했다.“기억도 안 나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저씨 곁에 없는 동안 훨씬 자유로웠다는 거예요.”유강후는 그 말에 가슴이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었지만 차분히 온다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절대 날 떠나지 않겠다고.”그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고 그 눈빛 속의 감정은 더없이 서늘해 그녀의 숨을 막히게 했다.온다연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런 말 다 잊어버리세요.”그 순간, 유강후는 갑자기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며 말했다.“온다연,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그는 한 단어 한 단어를 곱씹어가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만약 이 일이 10년 전이었다면 난 염지훈을 내 손으로 죽였을 거고 너도 직접 목을 졸라 끝냈을 거야.”“5년 전이었다면 네 존재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웠겠지. 그리고 널 평생 감옥 같은 곳에 가둬뒀을 거야.”“하지만 지금은 내가 좀 나이를 먹었으니 참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 너 때문에 물러나 주는 거야. 이번 한 번만. 단 한 번뿐이야.”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널 새장 속에 가둬둘 거야. 내 말 하나하나 다 진짜니까 의심하지 마.”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온다연은 그의 말에서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차가움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유강후의 손을 피해버렸다.그가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유강후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그러자 이내 수화기 너머에서 염지호의 잔뜩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뭐라고?”유강후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장 이난과 연락하고 직접 와서 확인하세요.”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전화를 끊고 온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전화했어. 그러니까 이제 칼 내려놔.”온다연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칼을 내려놓았다.칼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유강후 또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재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상처를 확인했다.칼날은 매우 날카로웠고 그로 인해 생긴 상처는 생각보다 많이 깊었다. 만약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다.유강후는 그녀를 재빨리 안아 들고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차에 오르자마자 유강후는 경호원이 건넨 붕대를 건네받더니 온다연의 상처를 간단히 응급으로 처치를 해줬다. 그리고는 곧바로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상처는 꽤 깊어서 열 몇 바늘을 꿰매고 지혈제를 맞은 후에야 겨우 피가 멈췄다.그제야 유강후는 안도하며 온다연의 손에 시선을 돌렸고 그제야 아까 자신에게 밟힌 손가락 중 하나가 부어오른 것을 발견했다.그것은 바로 예전에 문에 끼어 부러졌던 그녀의 새끼손가락이었다.온다연의 손가락을 본 유강후의 심장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낮게 물었다.“아프지? 왜 안 말했어?”온다연은 그런 유강후를 조롱하듯 대답했다.“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말하면 아저씨가 절 걱정이라도 해줄 것 같았어요?”“게다가 이 손가락도 아저씨가 부러뜨린 거잖아요. 한 번 더 부러진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눈에 깃든 증오의 감정을 보고 마음이 저려오는 듯했고 마치 누군가 그의 가슴을 쥐어뜯는 기분이 들었다.이내 그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온다연, 말 그런 식으로 하지 마.”하지만 온다연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연기는 그만하죠. 구역질 나니까.”유강후는 그녀가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알고 더 이상 대응하지 않고 곧바로 의사를 불러 검사를 요청했다.결국 예
온다연은 옆에서 모든 장면을 보고 있었고 겁에 잔뜩 질려 얼어붙은 채로 유강후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그만해요! 제발 그만두세요!”하지만 그녀는 곧 경호원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염지훈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유강후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혹시 당신이 신이라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른 사람의 생사까지 결정할 수 있는 줄 아시나 본데 그건 틀렸습니다. 유강후 씨가 이럴수록 온다연은 당신을 더 증오할 겁니다. 다연이를 보세요. 당신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하지 않나요?”“유강후 씨가 아무리 다연이를 억지로 데려가도 쟤는 어떻게든 당신을 떠날 방법만 찾을 겁니다!”“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 사람의 진심 어린 마음을 얻을 자격이 없거든요.”그 말에 유강후의 눈빛은 더욱 살기를 띠었고 그는 발을 들어 다시 염지훈을 거세게 찼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무자비했다.염지훈은 거친 기침을 하며 피를 미친 듯이 뱉어냈고 온다연은 깜짝 놀라 경호원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철저히 제압당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 순간, 유강후는 온다연의 눈에 핏빛으로 물든 악마처럼 보였다. 그의 통제 불가능한 모습은 마치 염지훈을 죽일 작정인 것 같았다.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반드시 막아야 했다. 순간, 온다연의 시야에 방금 테이블 위에 놓였던 과도가 들어왔다.그러자 온다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집어 자신의 목에 갖다 댔고 경호원들은 깜짝 놀라 달려들며 외쳤다.“사모님, 안 됩니다!”“사모님, 칼 내려놓으세요!”온다연은 한 발짝 물러섰고 손에 힘을 주어 칼끝을 목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다가오지 마세요!”유강후는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온다연을 보고는 충격에 몸이 굳었다.하지만 온다연의 목에는 이미 날카로운 칼날이 깊이 박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온다연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본 유강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칼 내려놔. 온다연.”그러나 온다연은 벽 쪽으로 물러서며 단호하게 말했다.“다가오지 마
온다연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뒤에 있는 소파 천을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그녀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간신히 유강후에게 물었다.“어...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셨어요?”유강후의 시선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더 말랐네. 잠을 못 잤는지 눈 밑도 시커멓군.’ 그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고 이내 유강후는 온다연이 입고 있는 헐렁한 티셔츠를 보았다. 그 셔츠는 마치 마트에서 2만 원도 안 하는 싼 물건 같았다.그걸 본 유강후의 눈에는 분노의 감정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온다연이 이런 곳에서 살면서도 자신과 함께 돌아가길 거부하다니?자신을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건가?이런저런 의문이 든 유강후는 손을 쭉 뻗어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붙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또 도망갈 거야? 왜 안 도망치지?”유강후의 힘은 상당했고 온다연은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외쳤다.“전 당신과 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그 순간, 부엌에서 소란을 들은 염지훈이 급히 달려 나왔다.이내 유강후를 발견한 염지훈은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유강후 씨, 당장 그 손 치우시죠!”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그가 앞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유강후의 경호원들이 곧바로 그를 가로막았다.염지훈 또한 싸움실력이 강한 편이었지만 오늘 유강후가 데려온 사람들은 모두 최정예 경호원들이었다.몇 명이 그를 꽉 붙들자 그는 도저히 그 사람들을 뚫고 나갈 수 없었다.분노와 무력감에 사로잡힌 염지훈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유강후 씨, 어린 여자를 억지로 끌고 가는 게 그렇게 잘난 짓입니까!”하지만 유강후는 염지훈을 쳐다도 보지도 않고 여전히 온다연을 주시한 채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염지훈, 이건 우리 부부 사이의 문제야. 네가 낄 자리는 없어.”그 말을 들은 염지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더 크게 외쳤다.“헛소리하지 마세요. 유강후 씨가 저지른 비열한 짓들을 다들 모를 줄 아세요? 당신이 바깥에서...”“그만. 이제
두 사람이 먹을 저녁은 간단하게 준비되었다.하지만 온다연이 직접 만든 음식은 솔직히 말해 맛이 있는 게 아니었다.소금을 과하게 넣어 음식이 너무 짜거나 아니면 반찬이 다 타버려 먹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너무 짠 반찬을 뜨거운 물에 헹궈가면서까지 입에 넣었다.염지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예전에 혼자 있을 때도 이렇게 먹었어?”온다연은 젓가락으로 채소를 집어 뜨거운 물에 헹군 뒤 대답했다.“그런 좋은 반찬을 먹었다고 생각하세요? 꿈도 크시네요. 전부 마트에서 세일해서 남은 것들이었어요. 정말 맛이 없었죠.”그녀는 담담히 웃으며 계속 말했다.“지훈 씨는 귀공자처럼 살아온 사람이니까 이런 걸 이해 못 하겠죠. 제가 만든 게 마음에 안 들면 직접 하세요. 전 이 정도밖에 못 하니까.”염지훈은 그녀의 손등에 뜨거운 기름에 데어 생긴 물집들을 보며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괜찮아? 약이라도 바를래?”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괜찮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그러자 염지훈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잠시 후 색깔과 향, 그리고 맛까지 모두 완벽한 세 가지 반찬과 국 한 그릇이 테이블에 올려졌다.그걸 본 온다연의 눈이 반짝이더니 신이 난 듯 말했다.“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여요.”염지훈은 그런 온다연을 보며 미소 짓더니 반찬을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먹어. 아니면 차라리 가정부라도 부를까?”“필요 없어요. 여기 며칠밖에 안 있을 거니까. 게다가 가정부 부를 돈도 없고요.”그녀의 대답에 염지훈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다연, 하여간 참 고집도 세다니까.”며칠 동안 함께 지내면서 지켜본 온다연의 학습 능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며칠간 밀렸던 수업도 다 따라잡고 앞으로 한 달 동안 배워야 할 내용까지 스스로 공부했다.심지어 학교 사이트에서 시험지를 다운로드해 풀었는데도 점수는 매우 높았다.하지만 생활 능력은 정말 최악
오후가 되자 온다연의 열은 다행히 떨어졌지만 여전히 기운이 없어 보였고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손에 든 핸드폰을 계속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저녁 무렵, 염지훈이 밖에서 돌아왔지만 그의 표정은 다소 무거워 보였다. “우리는 지금 경원시로 돌아가야 해. 유강후 그 미친놈이 내가 소유한 모든 부동산을 뒤지고 있어. 아마 곧 평진 쪽까지 알아냈을 거야. 지금 상황에서는 경원시가 오히려 가장 안전해.” 온다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지금 바로 떠나는 거예요?” 염지훈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며 망설였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차로 이끌었다. 그렇게 차가 한참을 달린 뒤, 침묵하던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 “아까 무슨 말 하려고 했어요?” 염지훈은 대답 대신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넸다. 핸드폰 화면에는 염지훈의 비서가 보낸 사진과 정보가 담겨 있었고 사진 속에는 유강후와 한 여자의 모습이 있었다.여자의 얼굴은 멀리서 찍혀 흐릿했지만 유강후만큼은 온다연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둘의 모습은 지나치게 다정했고 게다가 유강후가 병원에서 나은별을 방문하는 사진도 몇 장 포함되어 있었다. 온다연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두 손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러자 옆에 있던 염지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최근 3~4일 사이에 찍힌 사진이야. 그런데도 그 아이는 한 번도 찍히지 않았어. 유강후 씨가 그 아이를 너무 철저히 보호하고 있어서 거의 데리고 나오질 않아.”그는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유강후 씨는 요즘 거의 매일 밤 그 집에서 머물고 있어. 어젯밤도 포함해서.” 그 말을 들은 온다연의 가슴 깊은 곳에서 서서히 묵직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마음 한구석이 커다랗게 도려내진 듯 아픔이 반복되었고 무감각해지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온다연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핸드폰을 염지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되겠죠.” 경원시에 도착한
그 말에 염지훈은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네. 좋아! 네 말대로 해보자.” 그는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렸다.“준철아, 놈들을 다른 길로 유인해. 최대한 멀리 끌고 가.”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준철의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좋습니다! 운전은 제 전문이니까요!” 잠시 후, 흰색 차량은 천천히 출발했다.온다연의 예상대로 검문은 철수되어 있었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순조롭게 경원시를 빠져나왔다.그렇게 깊은 밤이 지나고 차는 한 저택 앞에 멈췄는데 문 앞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이 내리자 한 사람이 급히 나와 인사했다. “도련님, 도착하셨군요!” 이 저택은 전통적인 중식 건축 양식을 띠고 있었으며 유강후의 전통 한옥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파초 나무와 연못이 조화를 이루며 운치 있는 풍경을 자랑했다. 그러나 온다연은 이 모든 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고 방 한쪽에 기대어 휴대폰 화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화면에는 임정아와 관련된 더 많은 부정적인 소식이 떠오르고 있었다.‘아저씨는 내 주변 사람들까지 가만두지 않는데 내가 그 사람한테 잡히면 정말 감옥처럼 갇혀 살다 쓸쓸히 죽게 되는 걸까?’ ‘내 아들은 지금 그 여자 품에서 편히 잠들어 있을까? 그녀는 아이를 잘 보살피고 있는 걸까?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걸까?’ 온다연은 순간적으로 우림도 떠올랐다. 비록 친아들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 아이에게서 많은 정을 느꼈었다.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온다연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천천히 흘러내리는 눈물은 밤이 깊어질수록 멈출 줄 몰랐다. 동이 틀 무렵, 온다연은 탁자에 엎드린 채 잠들었다.염지훈이 방에 들어섰을 때 이미 온다연은 창가의 탁자에 엎드린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가 그녀를 침대로 옮기려 했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온도가 이상하리만치 뜨거웠다. 이상한 느낌에 염지훈은 온다연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