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비서는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온다연이 부드럽게 말했다.“강후 씨가 예전에 너무 엄격하게 관리해서 직원들이 회사에서 말도 제대로 못 하던데요. 그래서 내가 조금 자유롭게 지내도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유강후는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알겠어. 우리 와이프 말을 들어야지.”온다연은 두 비서를 돌아보며 말했다.“너무 구속받지 말고 자유롭게 지내라고 했지, 그렇다고 상사 말을 엿들어도 된다고 한 적은 없어요. 오늘 밤 안에 최근 며칠 치 재무 보고서를 전부 정리해요.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전까진 퇴근하지 못해요!”두 사람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네! 반드시 완벽하게 정리하겠습니다!”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서고 한참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세상에, 대표님이 사적으로 저렇게 다정할 줄이야. 진 대표님 앞에서 거의 꼼짝 못 하던데, 혹시 머리를 다치신 거 아냐?”“그러니까! 염라대왕이라고 불리던 대표님이 실은 아내 바보였다니. 진짜 진 대표님 말은 다 들으실 것 같았어!”“근데 솔직히 나라도 저렇게 할 것 같아. 생각해 봐. 아내가 저렇게 아름다운 데다가 능력까지 출중한데, 그리고 몇 달 사이 미래 그룹을 완벽하게 관리하면서 배신자까지 다 쳐냈잖아. 너무 대단해. 인정할 수밖에 없어!”“맞아. 나도 처음엔 그냥 철없는 재벌가 아가씨인 줄 알았어. 근데 막상 일하는 거 보니까 유 대표님 판박이더라. 진짜 다행이야. 그때 라이벌 회사 제안을 안 받아서. 그랬으면 지금쯤 감옥에서 밥 먹고 있었겠지!”...그런데 이 모든 말이 유강후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가고 말았다.그는 온다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내가 없는 동안 다연이가 포스 넘치는 여사장이 됐네?”온다연은 그의 목을 감싸며 투덜거렸다.“무슨 여사장이에요. 내가 경영하는 거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 다 억지로 한 거예요! 강후 씨가 안 깨어나고 계속 자고만 있어서!”유강후는 그녀의 눈 밑에 드리운 다
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뇨, 난 강후 씨가 예전에 유하령한테 줬던 것만 원해요. 그리고 다음 내 생일엔 거실 벽을 가득 채울 만큼의 선물을 줘야 해요!”그녀는 손으로 크기를 가늠하며 말했다.“예전 유씨 가문 저택의 거실 벽만큼 커야 해요.”그러자 유강후는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선물이 그렇게 갖고 싶었어?”온다연은 눈가가 살짝 붉어졌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는 몰랐겠지만 내 생일은 유하령 생일 바로 다음 날이에요. 유하령 생일 때마다 강후 씨는 엄청난 선물을 보냈고 유하령은 그걸 자랑하느라 SNS에 사진을 올렸었어요. 그리고 내 앞에서 뽐내면서 날 비웃었죠. 난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는 불쌍한 아이라고 하면서요. 한 마디 축하도 받을 수 없는.”유강후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나도 네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어. 매년 선물도 준비했었고. 그런데 그걸 네 이모한테 전하라고 했는데 그 여자가 네게 주지 않고 가로챈 거야. 그리고 그때 난 너에게 너무 값비싼 선물을 줄 수 없었어.”“넌 너무 어렸고 괜한 소문이 돌면 네가 감당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그래서 눈에 띄지 않지만 실용적인 선물만 골랐어. 정말 신중하게 고른 선물들인데 네 이모가 그걸 한 번도 너에게 전하지 않았을 줄은 몰랐어.”온다연은 유강후를 빤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말이 진실인지 가늠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강후는 진지하게 말했다.“내 말 못 믿겠어?”그러자 온다연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사실 완전히 믿진 못하겠어요. 강후 씨처럼 바쁜 사람이 내 생일까지 기억했을까 싶어서.”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하지만 유하령의 말이 완전히 맞진 않아요. 그래도 내 생일을 축하해 준 사람이 있었거든요. 주한이가 매년 내 생일 선물을 챙겨줬었어요. 그러니 나는 축하받지 못하는 아이가 아니었어요.”“또 주한이야?”유강후는 질투했다.“나도 선물을 준비했었다고! 네가 못 받았을 뿐이야! 그리고 앞으로 내 앞에서 주한 얘기 절대 하지 마. 우리 둘 얘
온다연은 둥글게 부푼 배를 살며시 어루만졌고 눈빛엔 한없이 부드러운 온기가 가득했다.“조금 힘들긴 해요. 이제는 잠을 잘 때 뒤척이기도 어려워요. 그래도 이 아이들이 있으니까 어떤 것도 다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온다연의 목소리는 따뜻하고도 부드러웠고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그런데 유강후는 괜히 질투가 났다. 그녀가 저런 표정과 저런 목소리로 자신에게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그래서 괜히 시샘 어린 어조로 물었다.“아이들이 그렇게 좋아? 애들이 태어나면 난 완전히 뒷전 아니야?”온다연은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도 있죠.”유강후는 더욱 시무룩해졌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선 바로 입술을 덮쳤다.온다연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고 입술이 살짝 아파서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쳤다.“아야! 아파요!”그러나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다연아, 나야말로 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야!”온다연은 기가 차서 웃음이 터졌다.“이 아이들은 강후 씨 자식들이거든요? 그런데도 질투하는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살짝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 자식들이 맞지만 그래도 넌 나만 봐야 해. 아이들한테만 신경 쓰고 나를 소홀히 하면 난 못 견딜 거야.”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예전엔 이렇게 질투가 많지 않았잖아요? 내 기억 속의 강후 씨는 말수도 적고 일할 때도 철두철미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 됐어요?”유강후는 그녀를 더욱 꽉 안았다.“그럼 넌 예전의 나랑 지금의 나 중에 누구를 더 좋아해?”온다연은 살짝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홱 돌렸다.“누가 강후 씨를 좋아한다고 그래요. 나 강후 씨 안 좋아하는데요?”그녀는 애초에 감정을 쉽게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부부 사이에 이런 말을 일일이 주고받을 필요가 있을까? 이미 아이까지
“강후 씨가 내 앞에서 단 두 마디만 남기고 쓰러졌을 때 난 정말... 강후 씨가 죽은 줄 알았어요.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요...”온다연은 유강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그의 옷깃을 적셨다.“그땐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유강후가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온다연은 마치 심장이 뽑혀 나가는 것 같았었다. 그녀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고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그가 죽는다면 그녀도 살아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그리고 그때 온다연은 뭐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포기해도 좋으니 유강후가 살아만 있어 준다면... 심지어 배 속의 아이들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살아 있기만 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괜찮았다.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그건 마치 현실이 아닌 악몽처럼 느껴졌다. 온다연은 매일 아침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눈을 뜨면 그 끔찍한 총격 현장 속에 다시 갇힐까 봐.온다연은 유강후의 옷을 꼭 움켜쥐었다.“다시는... 다시는 그렇게 나를 놔두고 가면 안 돼요. 정말 죽을 것 같았다고요.”유강후는 그녀를 꼭 안았다. 마치 영원히 그녀를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서약하듯 진지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을 거야. 두 번 다시는.”두 사람은 서로를 꽉 끌어안은 채 살아남았다는 기적을 온전히 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다연은 그의 가슴에 깊게 남은 흉터를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흉터 수술 받아요. 그럼 예전처럼 깨끗이 없어질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상처 위에 단단히 눌렀다.“안 돼. 그대로 둘 거야.”“보기 안 좋아요.”“난 남자야. 굳이 좋게 보일 필요 없어. 이 상처를 남겨 두고 싶어. 그래야 네가 볼 때마다 기억할 거잖아. 넌 절대 나 없이 살 수 없다는 걸.”온다연은 코끝이 시큰해졌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흉터가 없어도 난 강후 씨 없이 못 살아요.”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 웅얼거리는 듯했지
유강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에 네 어린 시절이 나왔어.”그건 아주 이상한 꿈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마치 평행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았는데 그곳에서 그는 어린 온다연을 만났다. 작고 여린 아이, 항상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아이.유강후는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신이 그에게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꿈에서만큼은 그는 어린 온다연을 구할 수 있었다.꿈속에서 유강후는 열여섯 살이었고 온다연은 겨우 여덟 살이었다. 그녀가 유씨 가문에 들어가기까지 아직 2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2년은 온다연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유강후는 꿈속에서 직접 봤다. 온준용이 아내와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모습을. 작은 몸집의 온다연이 어둡고 축축한 방에 갇힌 모습을. 비 내리는 거리에서 홀로 울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낯선 소년이 나타나 그녀의 어깨에 우비를 살포시 걸쳐 주는 모습을.온다연과 그 소년은 서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처음에 유강후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끼어들 수 없었다.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는 그 세계에 직접 개입할 수 있게 되었고 몇 가지 방법을 써서 온다연의 이웃이 되었다.그리고 온준용이 또다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날 유강후는 그를 처참하게 두들겨 패고 경찰에 넘겼다. 그 후 여러 수단을 동원해 어린 온다연을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그 순간부터 유강후는 그녀의 보호자가 되었다. 온다연은 그의 곁에서 자유롭게 자랐고 그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처럼 보살폈다. 마치 어린 공주처럼.온다연이 처음으로 1등을 했을 때,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 연설을 했을 때, 처음으로 학원에 갔을 때, 처음으로 부모님 호출을 받았을 때, 그리고 심지어 처음으로 생리를 했을 때조차... 그 모든 순간에 유강후가 있었다.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들며 온다연이 낯선 소년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너무 화가 나서 그녀를 혼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실 이 모든 일은 강후 씨의 큰 형님이 벌인 거예요. 강후 씨 아버님과는 크게 관련이 없었는데 괜히 그분에게 분풀이했던 것 같아요. 강후 씨 아버님은 권력이 높고 바쁘신 분이잖아요.”“국가 대사만으로도 너무 바쁘셔서 친아들인 강후 씨조차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셨는데 하물며 나 같은 어린 여자애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어디 있었겠어요?”온다연은 몸을 바로 세우고 유강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강후 씨 아버님은 강후 씨를 키우는 데 있어서만큼은 정말 성공하신 것 같아요. 강후 씨도 아버님처럼 지혜롭고 결단력이 있어요. 위기 앞에서도 침착하고 멀리 내다보는 시야도 가졌고요. 정말로 그분과 연락을 끊은 거예요?”유강후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내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야?”온다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강후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가끔 좀 덜 소심하기만 하면 더 좋겠지만.”유강후는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이를 악물었다.“방금까지 날 대범한 사람처럼 말하더니, 이제 와서 소심하다고?”온다연은 그의 손을 툭 쳐내며 웃었다.“요즘 집사님한테 들었는데 강후 씨 아버님께서 매년 강씨 가문에 여러 번 찾아가신대요. 하지만 늘 대문 앞에서 기다리기만 하셨고 강후 씨 어머님은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왜 어머님은 아직도 아버님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거예요?”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 유강후는 표정이 싸늘해졌다.“유자성은 내 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야. 아버지가 군대에 있을 때 함께 복무하던 선임의 아들이었어. 아버지는 그 선임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하지만 그 대가로 선임은 전장에서 죽었어. 아버지는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고 유자성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어. 그래서 유자성을 위해 뭐든 해주려고 했지.”“아버지가 그동안 유자성에게 베푼 건 나에게 준 것보다 훨씬 많았어. 사실 난 물질적인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유씨 가문의 재산 따위
강씨 가문 저택에 돌아와 보니 이미 환영회 준비가 성대하게 되어 있었다.강씨 가문의 모든 친척들이 모였고 길게 놓인 테이블 앞은 수십 명의 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는데 강씨 가문은 단결력이 강하고 쉽게 내부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집안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회사의 주가가 빠르게 회복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심지어 유강후가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순간에도 그를 배신하거나 등에 칼을 꽂은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온다연은 유강후가 왜 이토록 강씨 가문을 위해 애써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가장 상석에는 강양호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유강후와 온다연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온다연의 맞은편에는 강현미와 안심이 앉았는데 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유강후와 온다연이 자리에 앉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제 사람들이 모두 모였고 음식도 거의 다 차려진 상태였다. 강양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그는 많은 말을 했지만 요지는 단순했다. 이번 위기 속에서 강씨 가문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공로는 온다연에게 있으며 그가 강씨 가문을 대표해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오늘부터 온다연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경제적 권한을 전적으로 맡게 된다는 공식적인 발표도 덧붙였다.그 후 자연스럽게 유강후와 온다연의 결혼식 이야기가 나왔다. 이것은 강씨 가문의 큰 행사였고 사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몇 달 전에 이미 치러졌어야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건이 겹치면서 미뤄진 것이다.강씨 가문 사람들은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를 생각이었고 초청할 하객 명단까지 이미 준비해 둔 상태였다.하지만 온다연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녀는 현재 쌍둥이를 임신 중이었고 최근 산전 검진을 받으면서 아이들의 몸이 평균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곧 조산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지금 그녀는 임신 5개월 차였고 설령 8개월까지 무사히 버
유강후는 바로 게를 집어 들고 정성스럽게 속살을 발라 온다연의 그릇에 담아 주었다.강씨 가문의 사람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유강후는 언제나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그는 가문의 모든 이들이 의지하는 거목이었다.그런데 지금 유강후가 온다연 앞에서 한없이 다정한 남편이자 다가올 아이들의 좋은 아버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생경하기도 했지만 지난 몇 년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이 모든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졌다.환영회가 끝난 후 안심이 온다연을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그런데 안심이 입을 떼기도 전에 온다연이 먼저 물었다.“아빠는 아직도 강후 씨를 만나려 하지 않으세요?”안심은 한숨을 내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유씨 가문에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아는데 그 얘기를 듣고도 네 아버지가 강후를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양보를 한 거야. 조금만 더 시간을 줘.”온다연은 고개를 떨궜다.“전 정말 나쁜 딸이에요. 부모님께 걱정만 끼쳐 드리고...”안심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잘못한 건 우리야. 어릴 때 우리가 널 잃어버려서 결국 네 인생을 힘들게 만들었어. 그 오랜 시간 동안 넌 혼자서 너무 많은 걸 감당해야 했고.”온다연은 다가가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하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었잖아요. 그동안의 고생이 이 순간을 위한 거라면 저는 괜찮아요. 엄마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님이세요.”안심은 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눈시울을 붉혔다.“내일이면 난 신국으로 돌아가야 해. 네 아빠가 집에 혼자 있는데 늘 네 걱정을 하니 곁에 있어 줘야지. 그래도 강씨 가문이 널 잘 대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여.”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정말 H국에서 출산할 생각이야? 신국에서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네 아빠랑 나는 네가 집에서 아이를 낳길 바라고 있어
음식점에서 나오자마자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버블티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음식점 입구까지 이어져 있었다.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너도 구경하러 온 거야? 나도야! 누가 미래그룹 대표 유강후가 여기서 아내한테 버블티를 사주려고 줄 서 있는 걸 봤대. 학교 게시판에서 완전 난리 났어!”“진짜야! 봐봐, 저기 앞에 세번째에 있는 사람! 곧 유강후 차례가 올 거야!”“키가 엄청 크네. 아쉽게도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은 안 보여.”“와! 혹시 그 옆에 검은색 롱패딩 입은 사람, 저 사람이 부인이야?”“맞아. 내가 듣기론 우리 학교 학생이었다가 몇 년 전에 휴학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오늘 여기서 다시 보게 된다니! 화양대 역사상 10대 여신 중 한 명이라고 하던데, 진짜 예쁘다. 그냥 학교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도 난리 난 거 봐!”“저 사람 유강후 옆에 서 있으니까 엄청 작아 보여! 키가 겨우 그의 턱선 정도밖에 안 닿네. 근데 진짜 잘 어울린다. 보기만 해도 달달해.”“헐, 빨리 봐봐! 그녀가 그의 손가락을 살짝 건드렸다고 유강후가 바로 꽉 잡는 거 있지! 신이시여... 저 또다시 사랑을 믿고 싶어졌어요. 안 돼, 안 돼! 연애 바보로 변하지 않으려면 오늘 밤 아내 살해 사건 다큐를 두 편은 봐야겠어!”“잠깐, 나 방금 저 여자가 몸을 살짝 돌리는 걸 봤는데 배가 좀 나온 것 같더라. 임신한 것 같아! 근데 패딩이 너무 커서 확실하진 않아.”“뭔 상관이야. 우리는 그냥 이 커플 덕질만 하면 돼! 너 그거 들었어? 작년에 미래그룹에 입사 지원한 사람이 유강후와 그의 부인 팬이라고 하면서, 몇 년 전 두 사람이 같이 버블티 사는 걸 몰래 찍은 사진을 보여줬대.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채용됐대!”“헐, 나도 사진 좀 많이 찍어둬야겠어. 혹시 몰라? 나한테 그런 행운이 올지?”“아 맞다. 유강후가 이 근처에 사합원 몇 채를 샀대. 아내가 학교 다니기 편하라고.”“몇 채나? 거짓말 아냐? 여기가 어디인데? 사합원
그러자 갑자기 서른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그들을 불러세웠다.“혹시 봉현수랑 지예솔?”그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맞네! 나 아직도 너희들 기억하고 있어. 너희 그때 ‘경원시 10대 캠퍼스 커플’ 1위를 차지했잖아. 당시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 너희들 사진과 게시글이 엄청 많았어.”“나중에 두 사람이 헤어졌다고 들었을 때 모두 안타까워했어. 그런데 그 소문이 거짓이었네! 아직도 함께 있다니!”“혹시 결혼은 했어? 아이는 몇 살이야?”두 사람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그때 봉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드물게 부드러운 어조였다.“우리 결혼했어. 아이는...”봉현수는 남자 옆에 서 있는 아이를 흘깃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략 네 살 정도?”남자도 웃으며 말했다.“정말 뜻밖이야. 여기서 옛 동창을 만나다니. 그런데 나는 너희랑 같은 반이 아니어서 날 모를 수도 있겠다. 너희들 수업도 자주 안 나와서 같은 반 친구들도 잘 모르겠지?”봉현수는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우리 여기를 좀 돌아보려고. 혹시 우리랑 같이 갈래?”남자는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니야, 나 애 데리고 도서관에 가려고. 두 사람 즐거운 시간 보내! 그리고 행복하길 바란다!”말을 마친 남자는 아이를 안고 후문 쪽으로 향해 걸어갔다.봉현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분식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너 저 가게에 있는 만둣국 엄청나게 좋아했었잖아. 다시 한번 먹고 갈래?”지예솔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이것은 그녀가 오랜만에 하는 외출하는 것이었고 화양대에 온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이곳을 떠나기 전 예전에 가고 싶었던 곳을 한 번씩 들러보는 것도 그녀의 계획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실현될 줄은 몰랐다.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은 그들을 알아보았다.“어? 너희들!”지예솔이 웃으며 말했다.“저희를 기억하시네요.”주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그야 당연하
차 안에서는 다시 한번 정적이 흘렀다.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해 서로에게 남긴 상처는 몇 마디 사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오해가 있었다는 걸 안다 해도 마음속에 생긴 상처는 너무 깊었다. 설사 그 오해가 풀린다고 해도 두 사람의 관계가 크게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특히 지예솔은 마치 저승사자가 목을 조르는 듯한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다.그녀는 지쳤다. 모든 것이 버거웠다. 이제는 다 내려놓고 싶었다.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할 거 그냥 조용한 곳을 찾아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다.이번이 그녀가 스스로를 위해 쟁취하는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남은 힘을 다해 동생 지현우를 이곳에서 떠나게 할 것이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해도 그것만은 반드시 해낼 작정이었다.지예솔은 운이 좋으면 동생과 함께 떠날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봉씨 가문과는 무관한 곳에서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봉현수의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걸었다.“이제 서로를 그만 괴롭히자, 응?”봉현수의 눈이 붉어졌다. 순간 목이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나를 미워하지 않는 거야? 예전엔 그토록 내가 죽길 바랐잖아.”지예솔은 고개를 저었다.“이제 지쳤어. 미워하는 것도 힘들어. 현수야 우리 그냥 며칠 만이라도 조용히 지내면 안 될까?”봉현수의 몸은 한참이나 굳어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예솔에게 물었다.“예솔아,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속았는데. 이제는 네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조차 안가.”지예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는 한 번도 널 속인 적 없어. 날 믿지 않는 건 항상 너였어.”봉현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말을 의심했다. 그녀에게 당한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난 못 믿어. 예솔아, 나한테 맹세해. 네가 정말 이번만큼은 도망치려는 수작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와 잘 지내고 싶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것은 오늘 지예솔이 직접 봉현수에게 그 사건의 진실을 말해줬다.그는 믿을 수 없었고, 믿어서도 안 됐었다.“지예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이렇게까지 빨리 내 곁에서 도망치고 싶어?잘 들어, 내가 죽기 전까지 넌 절대 봉씨 가문을 떠날 수 없어!”“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너도 나와 함께 죽어야 해.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널 내 손으로 먼저 죽일 거니까!”지예솔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그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걸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수야, 나 이젠 너무 지쳤어. 계속 이 상태로 있다간 나 미쳐버릴 것 같아. 네가 믿든 말든 상관없어. 난 절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거 너한테 증명해 보일 거야. 내 마음속엔 언제나 너 하나밖에 없었어.”봉현수의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이 작은 행동은 예전에 두 사람이 행복했던 시절, 그녀가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그가 화가 났을 때,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새끼손가락을 걸며 그를 달래곤 했다. 그렇게 그는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많은 일들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 작은 행동 하나에 또다시 마음이 약해질 줄이야.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네 말이 사실이라고 쳐. 그런데 넌 왜 자꾸 내 곁에서 도망치려고만 하는 거야?”지예솔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우리 아이를 죽였으니까. 그때 난 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어.”그 아이를 떠올리는 순간, 봉현수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졌다.그때 그는 생각했었다. 아이가 생겼으니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은 나아지겠지. 하지만 지예솔은 그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몰래 병원에 가서 낙태를 시도했다.화를 참지 못한 그는 그녀와 격렬하게 다퉜고, 그 과정에서 지예솔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렇게 그 아이는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악화되었다.그녀에게 벌을 주기 위해 그는 그녀가 소
소년의 사랑은 뜨겁고도 아름다웠다.그들의 눈에는 오직 서로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무나도 어렸기에 감히 공개하지 못했다. 공개하는 순간, 신분 차이가 극명한 그들의 사랑은 절대로 부모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지나치게 탐닉했고 상대의 숨결마저도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들었다.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구석에서, 어두운 작은 방에서, 깊은 밤 적막한 후원에서, 그들은 주저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고 서로를 껴안았다.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그녀가 그에게 다가간 것은 목적이 있어서였다.그녀가 원했던 것은 오직 그의 신분과 봉씨 가문의 젊은 안주인으로서 누릴 영광과 부귀. 더 치욕적인 것은, 그녀가 감히 그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몸을 섞었다는 것!그녀가 다른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 있던 모습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일은 꿈속에서조차 목을 조이는 밧줄이 되어 그를 숨 막히게 했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그가 불행하다면, 그녀 또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녀를 지옥 끝까지 끌고 가야만 했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다시 예전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그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망할. 대체 또 무슨 속임수를 쓰려는 거지?’봉현수는 몸이 몇초간 굳어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닥쳐. 네가 그렇게 부를 자격이나 있어? 다시 한번만 더 지껄여봐. 내가 가만두나 봐.”지예솔은 창백한 얼굴로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저 좀 놔주세요. 저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요즘 계속 옛날 꿈을 꿔요. 그때의 우린 참 좋았죠.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네요.”봉현수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옛날’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 지예솔, 또 도망칠 속셈이냐? 다시 가두어 놓아야 정신 차리겠어?”지예솔은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눈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사실 눈치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지예솔과 그 남자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봉현수는 그 일을 철석같이 믿었고, 그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예솔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고 여러 가지 감정이 겹치면서 그가 지예솔한테의 태도는 점점 더 무서워졌다.유강후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그들의 일에 우리가 끼어드는 건 좋지 않아. 두 사람이 모두 마음을 열고 과거를 내려놓지 않는 한, 이 일은 쉽게 끝나지 않을 거야.”온다연은 차갑게 말했다.“아무리 큰 원한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예솔 씨를 괴롭히는 건 옳지 않아요. 그러다가 예솔 씨 잘못되기라고 하면 어쩔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예솔 씨를 도와주고 싶은 거야? 다연아, 제발 이 일에 끼어들지 마. 현수 씨가 그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너무 복잡해서 우리가 끼어들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도와주려는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역시 우리 다연이가 제일 말 잘 듣지. 정말 예솔 씨가 좋다면 둘이서 약속이라도 자주 잡아서 얘기를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내 체면을 봐서라도 현수 씨가 거절하진 않을 거야.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야.”온다연은 인츰 말을 돌리었다.“맞다, 로운 씨는 어디 있어요? 진 씨 가문 쪽에 일이 좀 있어 그러는데 그에게 맡기려고요.”유강후가 대답했다.“무슨 일이든 나한테 말하면 돼.”온다연은 입을 삐쭉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 거예요. 무능한 건 싫거든요?”유강후는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알겠어, 알겠어. 화내지 마. 로운이더러 당신한테 연락하라고 할 테니까, 무슨 일이든 편하게 지시하면 돼.”봉현수는 차에 오르자마자 지예솔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심하게 굳어 있었다.“내가 너한테 덜어준 반찬, 왜 안 먹었어?”지예솔은 조용히
온다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이틀만 시간을 줘요. 그동안 예솔 씨는 일단 계속해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모든 일을 그의 뜻에 따르면서 경계를 풀게 만들어요. 저는 예솔 씨가 여기서 나갈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볼게요.”그때 봉현수의 부하가 들어왔다.“예솔 씨, 약 먹을 시간입니다.”그는 미리 준비한 약을 지예솔 앞에 내밀었다.지예솔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말했다.“먹을 테니까 먼저 나가주세요. 친구와 잠시 이야기하고 싶어요.”그 사람이 대꾸했다.“주인님께서 예솔 씨가 약 드시는 걸 직접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버린다고 하더라고요.”온다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나가세요. 제가 예솔 씨 약 먹는 걸 볼 테니. 여기서 저희 두 사람 방해하지 마세요.”온다연이 나서자 그는 마지못해 문가로 물러났다.“예솔 씨, 모두 다 예솔 씨 좋아지라고 준비해 둔 약이에요. 버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주인님께서 화를 내실 겁니다.”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집사가 다가와 다실의 문을 닫았다.지예솔은 약을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보고는 전부 쓰레기통에 던졌다.온다연이 물었다.“무슨 약이에요?”지예솔의 표정이 싸늘해졌다.“우울증 치료제와 수면제예요. 3년째 먹고 있어요. 이제는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아요.”온다연이 말했다.“그래도 약은 먹어야죠. 아프면 치료도 하고. 예솔 씨에겐 동생도 있잖아요. 쉽게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죠.”지예솔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다연이 다시 물었다.“여길 나가면 무슨 계획이에요?”지예솔은 담담하게 말했다.“다 생각해 놓았어요. 일단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빌려서 온라인에서 일감을 받을 거예요. 제 디자인 스타일이면 먹고사는 건 문제없을 거예요.”온다연이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계획이 있다니 참 다행이네요. 저는 예솔 씨가 여길 벗어나는 것 까지만 도와줄 수 있지, 그 뒤에 일은 예솔 씨가 알아서 해야
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둘 사이 정말로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지예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눈에는 냉담한 기색이 가득했다.“현수 씨 어머니가 저희 어머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저희 둘 사이에는 그 어떤 가능성도 사라졌어요. 그는 단지 저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제가 비참할수록 그는 더 기쁘겠죠.”“이 몇 년 동안, 그는 제 모든 디자인 도면을 자신의 소꿉친구에게 넘겨줬고 그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었어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지씨 가문의 가정부일 뿐이에요. 그는 제 영광과 미래를 모조리 빼앗아 갔어요. 7년 동안이면 목숨 하나에 대한 대가로 충분하지 않나요.”이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마치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온다연은 그녀의 테이블 아래에 숨겨져 있는 두 손이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지난달, 현수 씨가 제가 동생이랑 다시 연락을 주고받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다시 저를 감금하기 시작했어요. 어디를 가든 저를 무조건 데리고 다니면서 제가 어디로 도망칠까 봐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더라고요. 제가 없으면 장난감도, 화풀이할 대상도 없어지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절 데리고 나온 거예요. 저는 한 달 동안 그 방을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온다연의 표정이 심하게 찡그러졌다.“아직도 쇠사슬로 예솔 씨를 묶어놔요?”그녀는 지예솔의 몸에 남아 있던 끔찍한 상처들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지예솔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 아이가 죽은 후로는 더 이상 쇠사슬을 쓰지 않았어요. 조금이나마 자유를 얻은 게 제 아이의 목숨과 맞바꾼 거라니, 믿기지 않네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지예솔은 갑자기 온다연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다연씨, 저 좀 도와주세요. 저 경원시를 떠나고 싶고 봉현수 씨 곁에서도 떠나고 싶어요. 다연씨라면 절 도와주
유강후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들은 금방 크니깐 명품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직접 골랐다는 거야. 엄마의 사랑이야말로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거니까.”“내가 보니까 옷들 다 품질 좋고 디자인도 예쁘던데? 당신 안목이 틀릴 리 없지.”온다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말은 참 예쁘게도 한다니까.”그녀는 알지 못했다. 비록 마트는 완전히 통제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오기 전에 마트는 모든 안전 검사를 마쳤고, 진열된 상품들도 전부 점검을 마쳤으며, 생활용품과 유아용품 코너의 제품들은 전부 최고급 브랜드의 상품으로 교체되었다는 것을.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강후 씨, 미리 말해두지만, 아이들은 무조건 제 곁에서 키울 거예요. 우리 아이들을 우림이를 훈련하듯이 키우는 건 절대 용납 못 해요.”유강후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알겠어.”하지만 훗날 강씨 가문의 후계자가 될 텐데 훈련을 시키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아들이라면 우림이 못지않은 강도 높은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 말은 지금 해서는 안 된다. 괜히 말을 꺼냈다간 온다연이 출산할 때까지 그와 끝없는 싸움을 벌일 게 뻔하니까.온다연은 단호하게 말했다.“강후 씨는 어릴 때 어머니 곁에서 크지 못해서 지금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렇게 서먹한 거잖아요.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키울 수 없어요. 무조건 사랑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커서 강후 씨처럼 성격이 까칠해질 게 뻔해요!”유강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성격이 까칠하다고?”온다연이 코웃음을 쳤다.“아닌가요?”유강후는 그녀가 볼이 잔뜩 부풀어 오른 채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귀여워서 다시 한번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그래, 나 성격 까칠해. 고칠게.”온다연이 보상이라도 하듯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줄 아는 사람은 무조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