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둥글게 부푼 배를 살며시 어루만졌고 눈빛엔 한없이 부드러운 온기가 가득했다.“조금 힘들긴 해요. 이제는 잠을 잘 때 뒤척이기도 어려워요. 그래도 이 아이들이 있으니까 어떤 것도 다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온다연의 목소리는 따뜻하고도 부드러웠고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그런데 유강후는 괜히 질투가 났다. 그녀가 저런 표정과 저런 목소리로 자신에게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그래서 괜히 시샘 어린 어조로 물었다.“아이들이 그렇게 좋아? 애들이 태어나면 난 완전히 뒷전 아니야?”온다연은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도 있죠.”유강후는 더욱 시무룩해졌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선 바로 입술을 덮쳤다.온다연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고 입술이 살짝 아파서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쳤다.“아야! 아파요!”그러나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다연아, 나야말로 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야!”온다연은 기가 차서 웃음이 터졌다.“이 아이들은 강후 씨 자식들이거든요? 그런데도 질투하는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살짝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 자식들이 맞지만 그래도 넌 나만 봐야 해. 아이들한테만 신경 쓰고 나를 소홀히 하면 난 못 견딜 거야.”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예전엔 이렇게 질투가 많지 않았잖아요? 내 기억 속의 강후 씨는 말수도 적고 일할 때도 철두철미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 됐어요?”유강후는 그녀를 더욱 꽉 안았다.“그럼 넌 예전의 나랑 지금의 나 중에 누구를 더 좋아해?”온다연은 살짝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홱 돌렸다.“누가 강후 씨를 좋아한다고 그래요. 나 강후 씨 안 좋아하는데요?”그녀는 애초에 감정을 쉽게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부부 사이에 이런 말을 일일이 주고받을 필요가 있을까? 이미 아이까지
“강후 씨가 내 앞에서 단 두 마디만 남기고 쓰러졌을 때 난 정말... 강후 씨가 죽은 줄 알았어요.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요...”온다연은 유강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그의 옷깃을 적셨다.“그땐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유강후가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온다연은 마치 심장이 뽑혀 나가는 것 같았었다. 그녀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고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그가 죽는다면 그녀도 살아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그리고 그때 온다연은 뭐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포기해도 좋으니 유강후가 살아만 있어 준다면... 심지어 배 속의 아이들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살아 있기만 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괜찮았다.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그건 마치 현실이 아닌 악몽처럼 느껴졌다. 온다연은 매일 아침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눈을 뜨면 그 끔찍한 총격 현장 속에 다시 갇힐까 봐.온다연은 유강후의 옷을 꼭 움켜쥐었다.“다시는... 다시는 그렇게 나를 놔두고 가면 안 돼요. 정말 죽을 것 같았다고요.”유강후는 그녀를 꼭 안았다. 마치 영원히 그녀를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서약하듯 진지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을 거야. 두 번 다시는.”두 사람은 서로를 꽉 끌어안은 채 살아남았다는 기적을 온전히 느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다연은 그의 가슴에 깊게 남은 흉터를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흉터 수술 받아요. 그럼 예전처럼 깨끗이 없어질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상처 위에 단단히 눌렀다.“안 돼. 그대로 둘 거야.”“보기 안 좋아요.”“난 남자야. 굳이 좋게 보일 필요 없어. 이 상처를 남겨 두고 싶어. 그래야 네가 볼 때마다 기억할 거잖아. 넌 절대 나 없이 살 수 없다는 걸.”온다연은 코끝이 시큰해졌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흉터가 없어도 난 강후 씨 없이 못 살아요.”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 웅얼거리는 듯했지
유강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에 네 어린 시절이 나왔어.”그건 아주 이상한 꿈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마치 평행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았는데 그곳에서 그는 어린 온다연을 만났다. 작고 여린 아이, 항상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아이.유강후는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신이 그에게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꿈에서만큼은 그는 어린 온다연을 구할 수 있었다.꿈속에서 유강후는 열여섯 살이었고 온다연은 겨우 여덟 살이었다. 그녀가 유씨 가문에 들어가기까지 아직 2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2년은 온다연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유강후는 꿈속에서 직접 봤다. 온준용이 아내와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모습을. 작은 몸집의 온다연이 어둡고 축축한 방에 갇힌 모습을. 비 내리는 거리에서 홀로 울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낯선 소년이 나타나 그녀의 어깨에 우비를 살포시 걸쳐 주는 모습을.온다연과 그 소년은 서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처음에 유강후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끼어들 수 없었다.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는 그 세계에 직접 개입할 수 있게 되었고 몇 가지 방법을 써서 온다연의 이웃이 되었다.그리고 온준용이 또다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날 유강후는 그를 처참하게 두들겨 패고 경찰에 넘겼다. 그 후 여러 수단을 동원해 어린 온다연을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그 순간부터 유강후는 그녀의 보호자가 되었다. 온다연은 그의 곁에서 자유롭게 자랐고 그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처럼 보살폈다. 마치 어린 공주처럼.온다연이 처음으로 1등을 했을 때,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 연설을 했을 때, 처음으로 학원에 갔을 때, 처음으로 부모님 호출을 받았을 때, 그리고 심지어 처음으로 생리를 했을 때조차... 그 모든 순간에 유강후가 있었다.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들며 온다연이 낯선 소년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너무 화가 나서 그녀를 혼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실 이 모든 일은 강후 씨의 큰 형님이 벌인 거예요. 강후 씨 아버님과는 크게 관련이 없었는데 괜히 그분에게 분풀이했던 것 같아요. 강후 씨 아버님은 권력이 높고 바쁘신 분이잖아요.”“국가 대사만으로도 너무 바쁘셔서 친아들인 강후 씨조차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셨는데 하물며 나 같은 어린 여자애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어디 있었겠어요?”온다연은 몸을 바로 세우고 유강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강후 씨 아버님은 강후 씨를 키우는 데 있어서만큼은 정말 성공하신 것 같아요. 강후 씨도 아버님처럼 지혜롭고 결단력이 있어요. 위기 앞에서도 침착하고 멀리 내다보는 시야도 가졌고요. 정말로 그분과 연락을 끊은 거예요?”유강후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내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야?”온다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강후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가끔 좀 덜 소심하기만 하면 더 좋겠지만.”유강후는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이를 악물었다.“방금까지 날 대범한 사람처럼 말하더니, 이제 와서 소심하다고?”온다연은 그의 손을 툭 쳐내며 웃었다.“요즘 집사님한테 들었는데 강후 씨 아버님께서 매년 강씨 가문에 여러 번 찾아가신대요. 하지만 늘 대문 앞에서 기다리기만 하셨고 강후 씨 어머님은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왜 어머님은 아직도 아버님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거예요?”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 유강후는 표정이 싸늘해졌다.“유자성은 내 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야. 아버지가 군대에 있을 때 함께 복무하던 선임의 아들이었어. 아버지는 그 선임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 하지만 그 대가로 선임은 전장에서 죽었어. 아버지는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고 유자성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어. 그래서 유자성을 위해 뭐든 해주려고 했지.”“아버지가 그동안 유자성에게 베푼 건 나에게 준 것보다 훨씬 많았어. 사실 난 물질적인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유씨 가문의 재산 따위
강씨 가문 저택에 돌아와 보니 이미 환영회 준비가 성대하게 되어 있었다.강씨 가문의 모든 친척들이 모였고 길게 놓인 테이블 앞은 수십 명의 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는데 강씨 가문은 단결력이 강하고 쉽게 내부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집안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회사의 주가가 빠르게 회복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심지어 유강후가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순간에도 그를 배신하거나 등에 칼을 꽂은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온다연은 유강후가 왜 이토록 강씨 가문을 위해 애써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가장 상석에는 강양호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유강후와 온다연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온다연의 맞은편에는 강현미와 안심이 앉았는데 두 사람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유강후와 온다연이 자리에 앉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제 사람들이 모두 모였고 음식도 거의 다 차려진 상태였다. 강양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그는 많은 말을 했지만 요지는 단순했다. 이번 위기 속에서 강씨 가문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공로는 온다연에게 있으며 그가 강씨 가문을 대표해 감사의 뜻을 전한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오늘부터 온다연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경제적 권한을 전적으로 맡게 된다는 공식적인 발표도 덧붙였다.그 후 자연스럽게 유강후와 온다연의 결혼식 이야기가 나왔다. 이것은 강씨 가문의 큰 행사였고 사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몇 달 전에 이미 치러졌어야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건이 겹치면서 미뤄진 것이다.강씨 가문 사람들은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를 생각이었고 초청할 하객 명단까지 이미 준비해 둔 상태였다.하지만 온다연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녀는 현재 쌍둥이를 임신 중이었고 최근 산전 검진을 받으면서 아이들의 몸이 평균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곧 조산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지금 그녀는 임신 5개월 차였고 설령 8개월까지 무사히 버
유강후는 바로 게를 집어 들고 정성스럽게 속살을 발라 온다연의 그릇에 담아 주었다.강씨 가문의 사람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유강후는 언제나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그는 가문의 모든 이들이 의지하는 거목이었다.그런데 지금 유강후가 온다연 앞에서 한없이 다정한 남편이자 다가올 아이들의 좋은 아버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생경하기도 했지만 지난 몇 년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이 모든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졌다.환영회가 끝난 후 안심이 온다연을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그런데 안심이 입을 떼기도 전에 온다연이 먼저 물었다.“아빠는 아직도 강후 씨를 만나려 하지 않으세요?”안심은 한숨을 내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유씨 가문에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아는데 그 얘기를 듣고도 네 아버지가 강후를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양보를 한 거야. 조금만 더 시간을 줘.”온다연은 고개를 떨궜다.“전 정말 나쁜 딸이에요. 부모님께 걱정만 끼쳐 드리고...”안심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잘못한 건 우리야. 어릴 때 우리가 널 잃어버려서 결국 네 인생을 힘들게 만들었어. 그 오랜 시간 동안 넌 혼자서 너무 많은 걸 감당해야 했고.”온다연은 다가가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하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었잖아요. 그동안의 고생이 이 순간을 위한 거라면 저는 괜찮아요. 엄마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님이세요.”안심은 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눈시울을 붉혔다.“내일이면 난 신국으로 돌아가야 해. 네 아빠가 집에 혼자 있는데 늘 네 걱정을 하니 곁에 있어 줘야지. 그래도 강씨 가문이 널 잘 대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여.”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정말 H국에서 출산할 생각이야? 신국에서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네 아빠랑 나는 네가 집에서 아이를 낳길 바라고 있어
다음 날 오후, 온다연은 안심을 배웅한 뒤 H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한 손으로 배를 살며시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도우미들에게 이것저것 짐을 싸라고 지시했다.그 모습을 보던 장화연은 진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했다. 평소에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는 다급하게 온다연의 팔을 붙잡고 소파로 데려갔다.“사모님, 제발 좀 쉬세요. 며칠 동안 피곤하셨잖아요. 이런 건 제가 알아서 챙기면 됩니다. 그리고 집에 필요한 물건은 다 있어요. 예전에 쓰셨던 것들도 전부 그대로 보관되어 있어서 새 거랑 다름없어요.”“지금 겨울이라 돌아가시면 영운산 별장에서 지내시겠죠? 거기에 천연 온천이 있어서 출산 후 몸조리하기도 좋아요. 거긴 원래 신혼집으로 지내려고 준비한 곳이라 하루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사모님께서 떠나신 후에도 매일 관리인을 보내 청소해 왔으니 따로 뭘 챙겨 가실 필요 없어요.”하지만 그 말을 듣고 온다연은 표정이 굳어졌다.“전 영운산 별장이 싫어요.”그곳에 가기만 하면 그해 겨울 유강후와 나은별이 다정하게 지내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장화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사모님께서는 그 별장이 나은별 씨를 위해 지어진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은 아니에요. 그 집은 처음부터 사모님을 위해 준비된 곳이고 내부 인테리어도 사모님께 맞춰 설계된 거예요. 그때 사모님께서 H국에 계셨을 때부터 말이에요.”“나은별 씨와는 정말 아무 관계도 없어요. 나은별 씨가 거길 두어 번 구경하러 갔던 게 전부예요.”잠시 말을 멈췄던 장화연은 다시 덧붙였다.“게다가 나은별 씨도 이제 끝난 거나 마찬가지예요.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날 수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제발 그 일로 사모님께서 도련님과 다투시지 않길 바라요.”그녀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유강후와 온다연 두 사람은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극단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이제야 가까스로 안정을 찾았는데 장화연은 다시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다.“왜 나은별 씨
유강후는 무심하게 말했다.“그건 네 형이 결정한 일이야.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난 그냥 임혜린한테 집 키 하나 줬을 뿐이야. 네가 무능해서 못 찾은 걸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 내 집이 그렇게 찾기 어려웠어?”한이준은 폭발 직전이었다.“그래! 너 딱 기다려. 나 나은별에 관한 소식 들었거든? 이따가 온다연에게 말해 줄 거야. 그럼 넌 평생 버림받겠지!”하지만 유강후는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끊고는 표정이 굳은 채 이권에게 전화를 걸었다.“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은별이가 새어나갈 구멍을 끊으라고 했는데 왜 아직도 은별이에 대한 소식이 흘러나오는 거냐고?”이권은 잽싸게 답했다.“도련님, 제가 바로 그 문제를 보고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전화를 주셨네요. 나은별 씨가 그곳에서도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았는데 여러 번 도망치려 했고 마지막에는 창문을 통해 탈출하려다 아래 있는 대나무에 찔렸습니다.”“하지만 그쪽 사람들은 나은별 씨를 구해 주지 않았어요. 그러다 피가 한 시간 넘게 흘렀고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했습니다. 그쪽에서 시신을 수습할지 묻더군요.”유강후의 목소리는 싸늘했다.“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나씨 가문과 소씨 가문에게 이 소식을 흘려서 양쪽에서 더 심하게 싸우도록 만들어. 그리고 다연이 앞에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마. 다연이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으니까. 알아들었지?”“네, 곧바로 처리하겠습니다!”“그리고 당분간 한이준의 전화는 전부 차단해. 나한테도 다연이에게도 연락 못 하게 말이야. 문자도 못 보내게 해.”“알겠습니다, 도련님!”성당 근처에서 임혜린은 선배 정연석과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산책하고 있었다.오랜만의 재회였다. 서로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지만 임혜린은 이사 온 지 이틀 만에 동네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정연석은 이제 국제적으로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고 그의 집은 임혜린이 사는 건물의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과거 두 사람은 꽤 친한 사이였지만 한이준이 의도적으로 둘 사이에 오해를 만들면서 연락이 끊겼던 것이
소년의 사랑은 뜨겁고도 아름다웠다.그들의 눈에는 오직 서로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무나도 어렸기에 감히 공개하지 못했다. 공개하는 순간, 신분 차이가 극명한 그들의 사랑은 절대로 부모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지나치게 탐닉했고 상대의 숨결마저도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들었다.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구석에서, 어두운 작은 방에서, 깊은 밤 적막한 후원에서, 그들은 주저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고 서로를 껴안았다.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그녀가 그에게 다가간 것은 목적이 있어서였다.그녀가 원했던 것은 오직 그의 신분과 봉씨 가문의 젊은 안주인으로서 누릴 영광과 부귀. 더 치욕적인 것은, 그녀가 감히 그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몸을 섞었다는 것!그녀가 다른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 있던 모습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일은 꿈속에서조차 목을 조이는 밧줄이 되어 그를 숨 막히게 했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그가 불행하다면, 그녀 또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녀를 지옥 끝까지 끌고 가야만 했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다시 예전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그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망할. 대체 또 무슨 속임수를 쓰려는 거지?’봉현수는 몸이 몇초간 굳어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닥쳐. 네가 그렇게 부를 자격이나 있어? 다시 한번만 더 지껄여봐. 내가 가만두나 봐.”지예솔은 창백한 얼굴로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저 좀 놔주세요. 저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요즘 계속 옛날 꿈을 꿔요. 그때의 우린 참 좋았죠.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네요.”봉현수는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옛날’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 지예솔, 또 도망칠 속셈이냐? 다시 가두어 놓아야 정신 차리겠어?”지예솔은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눈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사실 눈치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지예솔과 그 남자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봉현수는 그 일을 철석같이 믿었고, 그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예솔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고 여러 가지 감정이 겹치면서 그가 지예솔한테의 태도는 점점 더 무서워졌다.유강후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그들의 일에 우리가 끼어드는 건 좋지 않아. 두 사람이 모두 마음을 열고 과거를 내려놓지 않는 한, 이 일은 쉽게 끝나지 않을 거야.”온다연은 차갑게 말했다.“아무리 큰 원한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예솔 씨를 괴롭히는 건 옳지 않아요. 그러다가 예솔 씨 잘못되기라고 하면 어쩔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예솔 씨를 도와주고 싶은 거야? 다연아, 제발 이 일에 끼어들지 마. 현수 씨가 그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너무 복잡해서 우리가 끼어들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도와주려는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역시 우리 다연이가 제일 말 잘 듣지. 정말 예솔 씨가 좋다면 둘이서 약속이라도 자주 잡아서 얘기를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내 체면을 봐서라도 현수 씨가 거절하진 않을 거야.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야.”온다연은 인츰 말을 돌리었다.“맞다, 로운 씨는 어디 있어요? 진 씨 가문 쪽에 일이 좀 있어 그러는데 그에게 맡기려고요.”유강후가 대답했다.“무슨 일이든 나한테 말하면 돼.”온다연은 입을 삐쭉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 거예요. 무능한 건 싫거든요?”유강후는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알겠어, 알겠어. 화내지 마. 로운이더러 당신한테 연락하라고 할 테니까, 무슨 일이든 편하게 지시하면 돼.”봉현수는 차에 오르자마자 지예솔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심하게 굳어 있었다.“내가 너한테 덜어준 반찬, 왜 안 먹었어?”지예솔은 조용히
온다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이틀만 시간을 줘요. 그동안 예솔 씨는 일단 계속해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모든 일을 그의 뜻에 따르면서 경계를 풀게 만들어요. 저는 예솔 씨가 여기서 나갈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볼게요.”그때 봉현수의 부하가 들어왔다.“예솔 씨, 약 먹을 시간입니다.”그는 미리 준비한 약을 지예솔 앞에 내밀었다.지예솔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말했다.“먹을 테니까 먼저 나가주세요. 친구와 잠시 이야기하고 싶어요.”그 사람이 대꾸했다.“주인님께서 예솔 씨가 약 드시는 걸 직접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버린다고 하더라고요.”온다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나가세요. 제가 예솔 씨 약 먹는 걸 볼 테니. 여기서 저희 두 사람 방해하지 마세요.”온다연이 나서자 그는 마지못해 문가로 물러났다.“예솔 씨, 모두 다 예솔 씨 좋아지라고 준비해 둔 약이에요. 버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주인님께서 화를 내실 겁니다.”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집사가 다가와 다실의 문을 닫았다.지예솔은 약을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보고는 전부 쓰레기통에 던졌다.온다연이 물었다.“무슨 약이에요?”지예솔의 표정이 싸늘해졌다.“우울증 치료제와 수면제예요. 3년째 먹고 있어요. 이제는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아요.”온다연이 말했다.“그래도 약은 먹어야죠. 아프면 치료도 하고. 예솔 씨에겐 동생도 있잖아요. 쉽게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죠.”지예솔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다연이 다시 물었다.“여길 나가면 무슨 계획이에요?”지예솔은 담담하게 말했다.“다 생각해 놓았어요. 일단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을 빌려서 온라인에서 일감을 받을 거예요. 제 디자인 스타일이면 먹고사는 건 문제없을 거예요.”온다연이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계획이 있다니 참 다행이네요. 저는 예솔 씨가 여길 벗어나는 것 까지만 도와줄 수 있지, 그 뒤에 일은 예솔 씨가 알아서 해야
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둘 사이 정말로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지예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눈에는 냉담한 기색이 가득했다.“현수 씨 어머니가 저희 어머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저희 둘 사이에는 그 어떤 가능성도 사라졌어요. 그는 단지 저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제가 비참할수록 그는 더 기쁘겠죠.”“이 몇 년 동안, 그는 제 모든 디자인 도면을 자신의 소꿉친구에게 넘겨줬고 그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주얼리 디자이너가 되었어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지씨 가문의 가정부일 뿐이에요. 그는 제 영광과 미래를 모조리 빼앗아 갔어요. 7년 동안이면 목숨 하나에 대한 대가로 충분하지 않나요.”이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마치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온다연은 그녀의 테이블 아래에 숨겨져 있는 두 손이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지난달, 현수 씨가 제가 동생이랑 다시 연락을 주고받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다시 저를 감금하기 시작했어요. 어디를 가든 저를 무조건 데리고 다니면서 제가 어디로 도망칠까 봐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더라고요. 제가 없으면 장난감도, 화풀이할 대상도 없어지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절 데리고 나온 거예요. 저는 한 달 동안 그 방을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온다연의 표정이 심하게 찡그러졌다.“아직도 쇠사슬로 예솔 씨를 묶어놔요?”그녀는 지예솔의 몸에 남아 있던 끔찍한 상처들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지예솔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 아이가 죽은 후로는 더 이상 쇠사슬을 쓰지 않았어요. 조금이나마 자유를 얻은 게 제 아이의 목숨과 맞바꾼 거라니, 믿기지 않네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지예솔은 갑자기 온다연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다연씨, 저 좀 도와주세요. 저 경원시를 떠나고 싶고 봉현수 씨 곁에서도 떠나고 싶어요. 다연씨라면 절 도와주
유강후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들은 금방 크니깐 명품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직접 골랐다는 거야. 엄마의 사랑이야말로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거니까.”“내가 보니까 옷들 다 품질 좋고 디자인도 예쁘던데? 당신 안목이 틀릴 리 없지.”온다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말은 참 예쁘게도 한다니까.”그녀는 알지 못했다. 비록 마트는 완전히 통제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오기 전에 마트는 모든 안전 검사를 마쳤고, 진열된 상품들도 전부 점검을 마쳤으며, 생활용품과 유아용품 코너의 제품들은 전부 최고급 브랜드의 상품으로 교체되었다는 것을.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강후 씨, 미리 말해두지만, 아이들은 무조건 제 곁에서 키울 거예요. 우리 아이들을 우림이를 훈련하듯이 키우는 건 절대 용납 못 해요.”유강후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알겠어.”하지만 훗날 강씨 가문의 후계자가 될 텐데 훈련을 시키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아들이라면 우림이 못지않은 강도 높은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 말은 지금 해서는 안 된다. 괜히 말을 꺼냈다간 온다연이 출산할 때까지 그와 끝없는 싸움을 벌일 게 뻔하니까.온다연은 단호하게 말했다.“강후 씨는 어릴 때 어머니 곁에서 크지 못해서 지금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렇게 서먹한 거잖아요.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키울 수 없어요. 무조건 사랑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커서 강후 씨처럼 성격이 까칠해질 게 뻔해요!”유강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성격이 까칠하다고?”온다연이 코웃음을 쳤다.“아닌가요?”유강후는 그녀가 볼이 잔뜩 부풀어 오른 채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귀여워서 다시 한번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그래, 나 성격 까칠해. 고칠게.”온다연이 보상이라도 하듯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줄 아는 사람은 무조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
이번에 유강후는 아무런 의견 없이 그저 조용히 옆에서 그녀가 물건 고르기를 내심이 기다렸다.그녀가 두 가지 선택지 앞에서 고민할 때, 유강후는 두 가지 스타일 모두 카트에 담았다.온다연은 속옷을 고를 때 얼굴이 빨개지었다. 그러고는 몇 장의 팬티를 눈에 뜨이는 족족 무심코 카트에 던졌다.이 모습에 유강후는 불만을 느끼고 그 팬티들을 꺼내며 말했다.“다연아, 좀 제대로 골라주면 안 돼? 나 이 색깔 별로고 게다가 사이즈도 작아.”온다연은 그의 허리 쪽을 슥 쳐다보고는 조용히 말했다.“어느 사이즈인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알아서 골라요!”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다 너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지.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색깔로 골라봐. 너한테 입어 보여 줄게.”“넌 남편 사이즈도 몰라? 제일 큰 사이즈로 골라!”온다연의 얼굴은 더 빨개지였다.그러고는 말을 더듬었다.“누, 누가 강후 씨 입는 거 보고 싶댔어요! 알아서 골라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쥔 것처럼 속옷을 휙 던져 버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는 둘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안되지, 내 속옷은 원래 네가 골라줘야 맞는 거지. 남편의 속옷을 네가 관리하지 않으면 누가 관리해?”유강후는 온다연의 귀에 숨을 살짝 불어넣었다.“다연이가 골라준 거로 하자. 그러면 내 컨디션도 따라서 좋아질 거야.”온다연의 얼굴은 너무나도 빨개서 금세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고는 이를 꽉 악물고 말했다.“강후 씨, 이런 말 애들이 다 듣는단 말이에요! 나중에 애들한테 변태 취급 받고 싶어요?”유강후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감히 나한테 그렇게 말한다고? 엉덩이를 때려서라도 교육해야지. ”온다연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강후 씨 애들 때리기만 해봐. 나 가만 안 있어!”유강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빨리 골라, 이건 네가 해야 할 일이야. 아니면 여기서 내가 너한테 뽀뽀할까? 아까 애들이 뒤에서 계속 우릴
마트는 엄청 크고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온다연은 생활용품 구역으로 갔다.여기에는 특별히 비싼 브랜드는 없지만 상품이 다양하고 품목이 잘 갖춰져 있다. 그 상품들의 색상과 디자인은 꽤 잘 되어 있고 질감도 대형 브랜드와 비교할 바 있다.그녀는 매우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다.치약, 컵, 칫솔, 수건 모두 커플용으로 골랐다. 색상과 패턴이 귀여워 보였고 아기자기해서 다소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그런데 유강후는 컵과 수건에 있는 딸기 그림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이거 너무 핑크색 아니야?”온다연은 기분 좋게 고르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 기분이 나빠졌다.그녀는 아까 고른 남자용 커플 아이템을 선반 위에 다시 돌려놓았다.“각자 알아서 고르는 거로 하죠.”유강후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그녀가 돌려놓은 컵과 수건을 다시 가져와서는 카트에 넣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못생겼다고 한 건 아니야. 그냥 너무 핑크색이라서.”온다연은 차갑게 대답했다.“다른 색을 고르세요. 이건 강후씨한테 어울리지 않아요.”그러면서 그녀는 로봇 컵을 카트에 던졌다.“이거 강후씨한테 완전 찰떡이네요. 보는 눈은 없으면서 말은 많다니깐.”유강후는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그는 ‘유치한’ 컵을 집어 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성격이 점점 더 나빠지네. 내가 핑크색이 너무 많다고 한마디 했다고 그렇게 화를 내야 해?”온다연은 몸을 돌리더니 다른 물건을 고르러 갔다.“임신한 사람은 원래 평소보다 더 예민하단 말이에요!”유강후는 실눈을 뜨더니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온다연은 그의 다리를 차면서 말했다.“뭐 하는 거예요, 나 내려놔요!”마트에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고 옆에 있는 어린이들은 호기심의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봤다.유강후는 그녀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더 꽉 안았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손이 닿지 않잖아. 내가 안아줄게!”옆에 있는 어린이는 4, 5살쯤 되어 보였고 그들이 함께 안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재빨리 손으로
수건도 너무 오래되어 이미 무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온다연은 자기가 떠나기 전에 사용했던 것임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아줌마는 다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사모님이 떠나신 후 대표님은 우리가 이 물건들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신국에 가기 전 대표님은 3년 동안 계속 이 물건들을 사용하셨어요. 그때 사모님이 쓰시던 수건 두 장도 3년 동안 쓰셔서 정말 더는 쓸 수 없을 정도예요. 저희는 감히 버리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될지 말만 해주세요.”이 물건들을 3년 동안이나 계속 사용했다고?온다연은 코끝이 찡해나며 눈물이 나오려 하자 급히 고개를 돌려 다른 것을 보는 척했다.“이 물건들을 가지고 가서 소독한 후 박스에 넣어 밀봉하여 다락방에 올려놓아 주세요. 바꿀 물건들은 제가 챙길 테니 상관하지 않으셔도 돼요.”“네, 사모님.”아줌마가 간 후 온다연은 다시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수건이든 컵이든 전부 전에 그녀가 사용했던 것이었고 욕조 옆에 놓인 빈 바디워시병조차도 낡고 오래된 것이었다.온다연은 아직도 그 병을 기억하고 있었다.그것은 전에 온다연이 인터넷에서 구매한 상큼한 향의 바디워시였다.온다연은 그 바디워시병을 코끝에 대고 향기를 맡아보더니 역시 그 향기가 틀림없었다.그녀는 욕실에 잠깐 머무르다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서 직접 홍차를 끓였다.아줌마가 주방으로 들어오면서 곰돌이의 얼굴이 그려진 물컵을 건네주었는데 위에 페인트는 반 이상 떨어져 있었고 그것을 본 온다연이 어리둥절해하자 아줌마가 재빨리 말했다.“이 컵은 대표님이 제일 아끼시는 컵이에요. 지금 3년째 쓰고 계시고 바꾸지도 못하게 해요.”온다연은 다시 눈시울을 붉히더니 결국 눈물이 떨어지고 말았다.그녀는 얼굴을 돌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 컵은 이제 사용할 수 없어요. 욕실에 있던 물건이랑 함께 소독하여 넣고 다른 컵을 가지고 오세요.”아줌마는 대답을 건네고 다시 돌아갔다.차를 다 끓인 후 온다연은 찻잔을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찻잔을 책상 위에 놓
온다연은 장화연을 식탁으로 데리고 가서 포장된 만두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일단 따뜻한 아침 식사라도 하세요. 집사님도 이 가게 만두 좋아하실 거예요.”장화연은 만두를 한 입 먹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맛있네요. 밀가루 반죽이 잘된 거 같아요. 제가 만든 것보다 훨씬 더 맛있는데요.”온다연은 득의양양해 하며 말했다.“좋아하실 줄 알고 집사님을 위해 포장해 온 것이니 이거 다 드셔야 해요.”장화연은 먹으면서 말했다.“사모님, 점심에는 뭘 드시고 싶으세요? 미리 말해주면 제가 준비할게요. 근데 아직 배달되지 않은 음식 재료들이 있어서 만들 수 없는 요리도 있을 거예요.”“오늘 금방 집에 도착하여 다들 피곤하실 테니 먼저 쉬세요. 쉬고 오후에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 봐도 돼요. 제 기억으로 은행 반점의 생선찜이 맛있었는데 그 가게 요리사를 집으로 부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니 집사님은 오늘 푹 쉬세요. 제가 다 안배할게요.”장화연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그냥 제가 안배할게요. 사모님 거동도 불편하실 텐데 많이 쉬셔야죠.”온다연은 배를 만지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저는 너무 많이 잤어요. 비행기에서 오는 내내 잠만 자서. 지금은 상태가 엄청 좋아요. 집사님은 여태 쉬지도 못하셨잖아요. 일단 아침 드시고 나면 들어가서 좀 쉬어요. 집에 부족한 음식 재료들이 있는지 제가 한번 보고 사람 시켜 사 오라 하면 돼요.”그때 유강후가 들어오더니 온다연과 장화연이 사이좋게 얘기 나누는 것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점심은 다 준비됐어?”온다연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그저 먹을 줄만 알지? 오늘 점심은 하지 않고 모두 쉬는 거로 하고 다 쉬고 나서 은행 반점의 요리사를 불러 저녁 식사를 준비하게 할 거예요. 그 가게 생선찜도 엄청 맛있어요.”“왜요? 내가 주인 노릇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틋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되지. 마누라가 말한 건 다 맞는 말이지. 이 집에서는 네 마음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