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 놓인 요리들은 대부분 온다연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플레이팅은 요리사가 한 것처럼 화려하지 않았지만 맛은 훌륭했다.유강후는 양념을 걷어내고 가장 좋은 부분만 골라 온다연의 그릇에 담아주었다.온다연은 전혀 사양하지 않고 다 먹었다.요 며칠 가끔 메스껍기도 했지만 3년 전 임신했을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그녀는 아이가 영양이 부족할까 봐 매번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넣었다.게다가 이제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만 고집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요리라도 신선하고 건강해 보이면 무조건 조금씩 먹었다.그녀가 먹기 싫은 데 억지로 먹는 것을 보고 유강후는 그녀의 그릇을 치웠다.“그만 먹어. 이따가 속이 안 좋으면 또 토하겠어.”그는 갓 짜낸 수박 주스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았다.“주스를 좀 마셔.”온다연은 한 모금 마시더니 약간 달다고 느껴져서 말했다.“다음에는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어요.”유강후는 살짝 놀랐다. 갓 짜낸 오렌지 주스는 약간 쓴맛이 나는데, 온다연은 쓴맛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곧 깨달았다. 그녀가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억지로 입맛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채소를 많이 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유강후는 그런 그녀가 약간 안쓰러웠다.“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먹어도 돼.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그가 공을 들여 이 작은 주방을 조성하고, 채소와 양식 기지를 세운 이유는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그가 있는 한, 그녀는 편식해도 되고 원하는 것을 마음껏 먹어도 된다.의사에게 물어보니, 편식이 지나치지만 않으면 아이에게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했다.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유강후는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떴다.꽤 먼 거리였지만, 온다연은 대략적인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입덧과 관련된 질문을 하는 것 같았고 태도도 공손한 편이었다.이때 임원식이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꺼냈다.“대표님이 곽 박사님을 모시느라 꽤 고생했어요. 돈만 있으면 모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서
말을 마친 두 사람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지난번에 잃은 아이는 두 사람에게 영원한 아픔이었고 언급하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만약 이 두 아이에게도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구도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유강후는 호박석 구슬을 살짝 건드리며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배 속에 아이가 있으니 너무 흥분하면 안 돼.”온다연도 마음이 무거웠다. 한참 후에야 일어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병원으로 향했다.염지훈은 상태가 많이 좋아져 유동식을 먹을 수 있었다.권예진이 빨대로 그에게 유동식을 먹이고 있었다.온다연이 들어오는 것을 본 염지훈의 눈빛이 밝아졌다.“밖에 비가 쏟아지는데, 왜 왔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온다연이 오지 않은 이틀간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 생각을 하니 염지훈은 마음이 너무 쓰라렸다.그는 권예진이 들고 있는 컵을 밀어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예진아, 잠깐 밖에 나가 있어. 다연과 할 말이 있어.”권예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고, 결국에는 컵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온다연은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통을 그녀에게 건넸다.“폭우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어서 요 며칠 제대로 먹지 못했을 거예요. 이건 집에서 준비한 거니까 먼저 대충 드세요. 이따 비가 그치면 맛있는 걸 사줄게요.”권예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언니.”권예진이 나간 후, 온다연은 침대를 조금 올리고 푹신한 베개를 가져와 편안하게 해주었다.두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분위기가 약간 어색했다.한참 후 염지훈이 말을 꺼냈다.“너의 부모님이 오신다며?”온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틀 후예요.”염지훈은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나지막이 물었다.“그분들은 내가 이렇게 된 거 알아?”온다연이 고개를 저었다.“아직 몰라요. 하지만 지훈 씨가 운전하다가 기둥에 부딪혔다고 말할 거예요.”염지훈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울먹이며 말했다.“다
염지훈의 목소리는 마치 고통에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다연아, 기억해. 네가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는 변함없이 널 사랑할 거야. 내 사랑이 결코 유강후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유강후가 줄 수 있는 건 나도 얼마든지 줄 수 있어.”“그냥 타이밍이 안 맞았던 거야. 우리가 좀 더 일찍 서로를 알게 되었다면 결말이 달라졌을지도 몰라.”“만약 어느 날, 유강후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나 그 사람이 너한테 상처를 줬다면 뒤를 돌아봐. 난 항상 이 자리에서 널 기다릴게.”염지훈은 손을 들어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었다.“다연아, 알겠지만 나랑 유강후는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라. 나는 네가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보란 듯이 잘 지내. 울지 말고. 나는 다연이가 울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라서 싫어.”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차가운 손끝에서는 깊은 그리움이 묻어났다.“만약 한발 앞서서 널 알게 되었다면 그때는 날 선택할 거야?”눈이 시큰해진 온다연은 차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모르겠어요.”이 모든 게 유강후만의 잘못이 아니라 그녀 역시 유강후를 놓지 못했다는 사실을 차마 염지훈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염지훈은 손을 내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거면 됐어. 적어도 바로 거절하지는 않았잖아.”온다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미안해요.”어느새 염지훈은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았으니까 표정 좀 풀어. 내가 널 놔주면 기뻐해야지. 회장님이랑 사모님 오시면 내가 직접 약혼 취소하겠다고 얘기할게. 난처해하지 않아도 돼.”지난 3년 동안 있었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떠오른 온다연은 아직도 자신을 아끼고 있는 연약한 남자를 보며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염지훈은 그녀의 슬픔을 알아차린 듯 애써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슬퍼하지 마. 나도 그냥 포기하는 건 아니니까.”“원하는 게 뭐예요
온다연은 할 말이 있는 듯 문을 힐끗 쳐다보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권예진은 의사와 간호사를 동행하여 안으로 들어왔다.정기 검진을 하고 상처를 치료한 후, 의사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얘기해주고선 걸음을 옮겼다.권예진은 염지훈을 정성껏 보살피며 약을 챙겨줬다.조용히 옆으로 비켜선 온다연은 권예진의 애틋한 표정을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수십억 인구가 있는 이 세상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이라고 한다. 다들 미련을 품은 채 아쉬운 마음을 숨기고 물 흘러가듯 태연하게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온다연은 떠날 준비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염지훈이 권예진에게 물었다.“밖에 아직도 비와?”권예진은 재빨리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아직도 오네요. 소나기가 내리는 걸 보니 곧 멈출 거예요.”이때 염지훈이 말했다.“며칠 동안 챙겨줘서 고마워.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사줄게.”권예진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속으로 기뻐했다.“괜찮아요. 그냥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병간호하는 거예요. 신경 쓰지 마요.”염지훈은 병상 옆 탁자에서 카드를 꺼내 온다연에게 건넸다.“부탁 하나만 들어줘. 예진을 데리고 쇼핑몰에 가서 선물 하나 사줘. 아니, 여러 개도 괜찮아. 가격 보지 말고 마음에 드는 게 있다고 하면 전부 다 사. 한도 제한이 없는 카드니까 실컷 써.”온다연은 카드를 받고 권예진을 쳐다봤다. 수줍은 미소와 놀라움으로 가득한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하지만 이 상황을 해결한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임원식에게 염지훈을 부탁한 후 권예진과 함께 쇼핑몰로 향했다.그들이 간 쇼핑몰은 세계 최고의 브랜드와 시즌 신제품을 모아둔 곳이었다.반짝이는 주얼리, 최신 한정판 가방, 옷, 신발로 가득한 이곳은 그야말로 여자들의 지상 천국이다.눈이 반짝인 온다연과 권예진은 제일 먼저 쥬얼리 샵으로 걸음을 옮겼다.보석 디자인이 세련되고 독
청아한 외모에 피부도 하얗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타고난 권예진이 쥬얼리를 착용하자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온다연은 웃으며 물었다.“예쁘죠? 마음에 들어요?”권예진도 물론 마음에 들었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싼 것 같아요. 일단 나가서 다른 곳도 구경해봐요.”그러자 온다연이 말했다.“마음에 드는 건 맞죠? 이렇게 영롱한 쥬얼리는 예진 씨처럼 아름다운 사람에게 어울려요. 그럼 이걸로 살게요.”권예진은 쥬얼리를 빼내면서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너무 비싸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심 아쉬운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온다연은 고민도 없이 카드를 직원에게 건넸다.“이 세트는 저희가 살게요.”이때 매니큐어를 한 가느다란 손이 나타나 권예진이 들고 있던 목걸이를 가로챘다.“예쁜데? 우리 집 강아지한테 딱이네.”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든 온다연은 화려한 외모의 여성을 마주했다.전형적인 혼혈인 얼굴인데,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건방짐이 가득했다.그 여자는 온다연이 자신을 바라보는 걸 눈치채고선 경멸 섞인 눈빛을 보냈다. 그 후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꺼내더니 중지에 낀 분홍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어루만지며 살 돈이 없으면 빨리 꺼지라는 표정을 지었다.온다연은 단호하고 정중하게 말했다.“저기요. 이 세트는 저희가 먼저 사겠다고 했어요.”여자는 목걸이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힐끗 보더니 온다연과 권예진이 입고 있는 옷을 훑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여기에 있는 쥬얼리들이 엄청 비싼 건 알아?”여자는 아주 당연하게 온다연을 돈 없는 사람으로 단정 지었다.지난 며칠 동안 온다연은 줄곧 호텔에 머물렀고, 병원을 오가며 병간호만 했으니 당연히 그 어떤 액세서리도 하지 않았다.입고 있는 옷은 유강후가 맞춤 제작한 옷이기에 그 어떤 로고도 박혀 있지 않았지만 품질과 디자인은 흠잡을데 없이 완벽했다.당연히 권예진도 아무런 액세서리를 착용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도 임시로 산 것이기에 아주 평범했다.두 사람은 얼
온다연은 비웃었다.“뻔뻔하네요. CCTV가 없을 것 같아요?”마크 부인은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난 여기의 지분을 갖고 있어. 내가 CCTV 고장 났다고 하면 그냥 그런 거야. 너같은 동양인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우리랑 급이 달라. 가난한 주제에 설치기는.”온다연은 몸을 숙여 바닥에 놓인 목걸이를 집어 들더니 마크 부인의 얼굴에 세게 내리치며 차갑게 말했다.“마크 가문의 사모님이 이렇게 무례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인종차별이 취미예요? 이렇게 하시는 목적이 뭐죠? 득이 될 게 아무것도 없을텐데?”“마크 가문은 아시아 쪽 사업 범위를 확장할 생각이 없나 봐요?”“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마크 그룹에서 추진하는 사업의 70%가 아시아 지역을 점유하고 있는데 참 아이러니하네요.”“사모님은 혼혈 아니신가요? 본인도 동양인의 피를 지녔으면서 이렇게 자기 폄하를 한다는 게 놀랍네요.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던 건가?”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마크 부인은 온다연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그러나 온다연이 단번에 막았고 그녀의 손을 뒤로 밀어내며 말했다.“사모님이 이렇게 무례하고 거만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마크 가문과의 협력에 대해 다른 가문들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 있도록 오늘 하신 행동에 대해서는 널리 퍼뜨려드릴게요.”길고 가는 하이힐을 신고 있던 마크 부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려고 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재빨리 부축했다.이때 키가 큰 남자가 다가왔다.“무슨 일이야?”건장한 남자의 모습에 불이익을 당할까 봐 걱정되었던 온다연은 곧바로 권예진에게 밖에 있는 경호원을 불러오라고 했다.그런데 뜻밖에도 그 남자는 온다연을 힐끗 쳐다보더니 표정이 금세 바뀌었고 서툰 한국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강씨 가문의 사모님 맞으시죠?”그는 온다연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저는 마크라고 합니다. 어제 연회에서도 마주쳤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온다연은 악수를 하지 않고 그저 냉담하게
온다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경호원을 불러왔다.“매장 CCTV 영상을 받을 방법이 있는지 찾아봐요. 소리가 있는 걸로요.”그러자 경호원이 답했다.“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여기 최대 주주가 대표님의 친구거든요.”“그럼 지금 바로 구해줘요.”경호원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모님, 대표님이 지금 염지훈 씨의 병실에 계십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하셔서 무슨 사고라도 생길까 봐 너무 걱정됩니다. 그쪽으로 가보시는 게...”온다연은 표정이 어두워진 채 곧바로 차에 올랐다.“빨리 병원으로 가요.”...병실 안.유강후와 염지훈은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두 사람의 눈에는 상대를 죽이고 싶어 하는 듯한 분노와 적대감이 담겨 있었다.한참 후 염지훈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비웃으려고 찾아왔어요? 여기에 누워있는 걸 보니까 속이 후련하죠?”유강후의 목소리도 차가웠다.“아쉽네.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하는데...”유강후는 말끝을 흐리더니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오늘은 싸우려고 찾아온 게 아니야.”“염지훈, 너는 내가 성격이 유해진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 몇 년 전의 나였다면 너랑 박씨 가문은 진작에 끝났어. 다연 때문에 참는 거야.”염지훈의 눈에는 분노가 엿보였다.“내가 그쪽을 무서워할 것 같아요?”유강후는 그와 논쟁하고 싶지 않아 바로 본론을 꺼냈다.“그동안 막아뒀던 건 전부 다 해제했으니까 부상이 나으면 스스로 물러나.”염지훈은 피식 웃었다.“왜요? 두려워요?”“내가 목숨으로 다연을 협박하면 강 대표님의 곁을 떠날까요? 알다시피 다연은 모든 기억을 되찾았어요. 그쪽이랑 유씨 가문이 과거에 저질렀던 일까지 기억하는데 과연 강 대표님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유강후는 숨을 들이마시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염지훈. 너랑 싸우려고 온 게 아니야. 그런 거라면 지금 당장 죽였겠지.”그는 한층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다연한테 아이가 생겼어. 그리고 나도 더 이상 내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유강후는 애써 감춰왔던 살기를 조금씩 드러냈다.“너한테 주는 마지막 경고야.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야.”염지훈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차분하게 말했다.“권씨 가문에 대한 통제를 취소해요. 안 그러면 계속 옆에 맴돌면서 괴롭힐 거예요.”유강후는 몹시 단호했다.“네가 우리 사이에서 사라진다면 못 할 건 없지.”염지훈은 답답했다.“아직도 모르겠어요? 난 강 대표님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다연이가 괴로워하는 게 싫어서 물러나는 거예요. 혹시나 또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걱정되어서.”“다연이가 그동안 어떻게 버텨왔는지 알긴 해요?”“아무도 믿지 못하고 매번 자신을 부정하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어요. 자기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고, 좋은 것들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며 수천 번 자책하면서요. 심지어 이중인격 증상도 보였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모든 기억을 잊게 해주기로 선택했어요.”“이 모든게 그쪽이랑 유씨 가문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다시 찾아올 낯짝이 있다는 게 참 대단하네요. 비련의 남주인공 행세 좀 그만해요. 그럴 자격조차 없잖아요. 다연은 강 대표님한테 과분한 사람이에요.”말을 이어가던 염지훈은 눈시울을 붉혔다.“그럼에도 다연은 강 대표님을 선택했네요. 참 운 좋은 사람이야. 좋은 일들은 강 대표님한테만 일어나잖아요. 그렇게 상처를 줬는데도 잊지 못했다는 게 나로서 얼마나 비참한지 알아요?”“난 이 싸움에서 진 게 아니라 다연이가 괴로워하는 게 싫어서 물러나는 거예요. 우리 두 사람 때문에 이리저리 치이는 다연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거든요.”“나중에라도 강 대표님이 다연을 힘들게 하면 바로 찾아와서 데려갈 거예요.”감정이 격해지자 움직임도 커졌고 어느새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예요. 앞으로 행동 똑바로 하세요.”“상처가 터진 것 같네요. 의사 좀 불러와요.”유강후가 일어나자마자 문이 열렸다.온다연은 긴장한 채로 달려와 염지훈에게 물렀다.“괜찮아요?”시선은 어느새 피로 물든 거즈에 향했고 순간
봉현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너도 요즘 아이랑 마누라 돌봐야 하니 시간도 없을 거잖아. 내가 알아서 방법 구해볼게.”말을 마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송지원도 뒤따라 나와 봉현수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이번에 지예솔 씨가 진짜 큰맘 먹고 멀리 가버린 거 같은데 현수는 아직도 경원시 근처에서만 찾고 있어. 어쩌면 출국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을 해줄 수가 없네.”“현수 지금 상태가 매우 위험해. 마치 밧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정도로 한계에 도달한 거 같아. 저러다 큰일이 일어날까 봐 두렵네.”두 사람은 한마디씩 하고는 침묵하였다.한참 지나 유강후가 먼저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일은 우리도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어. 본인이 스스로 해결하게 해야 해. 요 며칠은 내가 아내와 아이들을 돌봐야 하니 네가 옆에서 좀 더 신경 써줘.”송지원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한이준은 며칠 동안 보이지도 않고 전화도 안 통하던데. 내가 사무실에 전화했더니 비서가 그러는데 걔가 섬에 집을 사서 지금 장식을 하고 있고 외부 사람들과 거의 연락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고. 이 자식 또 무슨 미친 짓을 벌이는지 모르겠어.”이때 방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유강후는 곧바로 방으로 향했다.“들어가. 현수랑 이준의 일은 네가 좀 더 신경 써줘. 내 쪽에 사람들은 필요하면 네가 알아서 조정해서 데리고 가면 돼.”들어가 보니 동생이 울면서 손발을 자꾸 흔들어 옆에 자고 있던 오빠도 깨웠다.오빠는 오히려 깜깜한 눈을 뜨고 조용하게 누워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고 있는듯 하였다.유강후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간호사가 아이를 안으며 말했다.“아이들이 배가 고픈가 봐요. 나와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말하면서 침대에 누워있는 온다연을 한 번 보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장화연은 간호사의 뜻을 눈치채고 말했다.“분유로 먹여요. 사모님은 지금 몸이 편찮으셔서요.”이때 온다연도 놀라 잠에서 깼다.
유강후는 당황했던 마음이 그제야 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예전에 그 아이는 힘들게 임신했고 유강후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지켜내지 못했다.하지만 이번에는 안전하게 출산까지 했고 아이도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가장 걱정되는 건 바로 온다연의 건강 상태였다.“주 선생님, 앞으로 제 아내의 건강을 잘 부탁드릴게요. 두 아이도 만약 두통이나 열이 있다 해도 많이 신경 써주셔야 해요.”주 선생님은 급하게 대답했다.“괜찮아요, 큰일은 아니에요. 두 아이도 지금 봐선 건강 상태가 아주 좋으니 잘 키우실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유 대표님.”주 선생님을 보낸 후 유강후는 정성스럽게 온다연을 보살피며 약도 먹이고 재우기도 하였다.한참 뒤에 송지원과 봉현수가 아이들 보러 병원에 찾아왔다.송지원은 작업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시정 쪽에서 방금 온 것이 분명했다.봉현수는 비록 깔끔하게 차려입었지만 이전의 의기양양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유강후는 보자마자 그의 정신이 극도로 쇠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봉현수는 아이들의 선물을 유강후에게 건네고 나서 소파에 앉아 넋 놓고 있었다.반면 송지원은 두 아이에게 관심을 쏠리며 간호사에게 아이를 안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송지원은 아이를 안고 웃으며 말했다.“넌 아들딸을 한꺼번에 얻었지만 우리 몇 명에서 한재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독한 사람들이네. 이 아이의 행운을 빌어 나도 나중에 쌍둥이가 생길 거야.”유강후는 얼른 아이를 뺏어 안고는 말했다.“저리 비켜, 누가 너더러 내 아들의 행운을 빌라 했어. 그렇게 행운을 갖고 싶으면 너 절로 절에 가서 빌던지.”송지원은 두 녀석을 매우 귀하게 여기며 또 손을 뻗어 여동생을 안았다.“핑크 팔찌를 차고 있는 걸 보니 여자아이겠지? 너무 귀여워, 나도 딸이 욕심나네.”송지원은 여동생의 작은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난 이 두 아이의 양 아빠가 될 거야. 앞으로 날 송 아빠라고 부르라고 해.”유강후는 송지원이 딸을 안고 놓지 않는 것을 보고
유강후는 온다연의 상처가 아플까 봐 번갈아 가며 아이를 안아 보여줬다.조용하고 작은 아이의 얼굴을 보자 온다연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다 건강하게 태어났어요. 이번에는 보온 실에 들어갈 필요가 없네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요?”유강후는 속상한 마음으로 온다연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말했다.“보온 실은 필요 없어. 의사가 아이들이 모두 정상이라고 말해줬어. 하지만 그래도 그웬을 와서 산후조리가 끝날 때까지만 우리 집에 있으라 했어.”“우리 아들을 데리고 와봐요, 한번 보게요.”유강후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 온다연의 옆에 눕혔다.온다연은 감히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머리만 옆으로 돌려 쳐다보면서 이 아이가 꿈속의 그 아이를 닮았는지 궁금했다.안타깝게도 아이는 아직 너무 작아 이목구비가 모두 주름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온다연이 실망하는 모습을 본 유강후는 웃으며 말했다.“아들은 날 닮았고 딸은 널 닮았어.”온다연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아이가 이목구비도 잘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알 수 있어요?”유강후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난 보이거든.”유강후는 몇 시간 동안 작은 침대 옆에 붙어 서서 아이의 이목구비와 윤곽을 수없이 분석한 결과 아들은 그를 닮았고 딸은 온다연을 닮았다는 결론을 내렸다.유강후는 희망컨대 두 아이가 모두 온다연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더니 남자아이는 좀 강하게 생기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두 아이를 모두 온다연의 곁에 눕혀두고 팔을 뻗어 그들 세 모녀를 품에 안으며 아주 정성스럽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이젠 너희들은 내 인생의 전부야.”유강후는 앞으로 약점이지만 보호막이 될, 그한테는 세상 전부인 이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분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온다연은 유강후의 턱에 나온 수염을 만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신 요즘 많이 피곤했죠? 안색이 너무 안 좋으니 이제 좀 쉬어
“네가 정치일에 개입도 하지 않았고 나도 이제 곧 은퇴할 것인데 만약 본가에서 나쁜 기사라도 터지면 우린 경원시에서 설 자리도 없게 돼. 그럼 우주 그룹이나 본가나 다 영향받을 수 있잖아.”유강후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그럼 유연서는요? 연서의 일은 어떻게 말씀하실 건데요? 은혜를 갚고 싶으면 알아서 갚으세요. 아무도 당신을 막지 않겠지만 누나의 목숨으로, 또 저의 행복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답하려 하지 마세요.”“그리고 제 아이들은 유씨 성을 안 가질 거고 본적에도 넣지 않을 거예요. 아이들은 이미 이름이 있어요. 하나는 강 씨 이고 하나는 진 씨 에요. 본가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 괜히 여기 와서 다연이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세요. 다연이는 본가 사람이라면 이제 치를 떨어요.”유재성은 급해하며 말했다.“괜찮아, 나 그렇게 보수적이지 않아. 아이들이 유 씨가 아니라도 내 손 군들이야. 다연이가 날 싫다 그러면 앞에 나타나지 않고 아이들만 잠깐 만나볼게. 그래도 할아버지인데 아이들에게 선물도 준비하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통화를 끊어버렸다.이때 이권이 걸어오더니 말했다.“대표님, 아이들의 출생증명서에 이름을 써야 하는데 작은 도련님이랑 아가씨 이름은 준비하셨죠?”유강후는 이권의 손에 쥐어져 있던 종이를 받아 그 위에 아이들의 이름을 적었다.그러자 이권은 웃으며 말했다.“역시 이미 생각해 놓으셨군요.”“남자아이는 다연이랑 같은 성씨로 진 강남으로 했고 이건 다연의 아버지가 지어주신 거고 여자아이는 강아름으로 나랑 어르신이 같이 지은 거야.”이권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작은 도련님이 진씨 가문의 성을 따르게 되면 어르신이 화 안 내실까요?”유강후는 종잇장을 건네주며 말했다.“어르신은 해외에서 평생을 살아 이런 일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실 거야. 그럼 아이의 성이 둘 다 진 씨라면 강씨 가문의 자손이 아닌 거야? 다연이가 목숨을 걸고 낳은 아이들인데 하나는 진 씨 성을 가지면 또 어때? 둘 다 진 씨 성을 따른
유강후가 가장 세게 흔들고 있는 작은 손을 건드렸더니 녀석은 바로 그의 엄지손가락을 잡았다.이상하게도 녀석은 곧 칭얼거리지 않았고 작은 입을 쩝쩝대더니 조용해졌다.유강후는 갑자기 멍해지며 신기하면서도 행복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이것이 내 아이와 실제로 접촉하는 느낌인 건가?’분명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얼굴인데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유강후가 막 아이를 안으려 할 때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입원실에 가서 안아봐요. 산모도 곧 나올 테니 여기 막아서면 안 돼요.”유강후는 몹시 아쉬워하며 장화연과 이권 더러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고 자신은 문 앞에서 온다연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온다연도 나왔다.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은 온다연은 아직 자고 있었고 유강후는 그녀를 받아 입원실로 옮겼다.입원실은 예전 온다연이 쓰던 큰 방으로 이미 모두 정리정돈이 되어 있었고 두 꼬마 녀석은 침대 옆의 작은 침대에 두었다.두 아이와 온다연은 모두 조용히 자고 있었고 유강후는 그들 모자 셋을 옆에서 지켜보았다.잠깐 사이에 유강후는 많은 사진을 찍었고 한장 한장 들여다보면서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모멘트도 일 년에 한 번쯤 업데이트하는 유강후가 오늘은 연속으로 세 개의 게시물을 올렸다.그것도 모자라 다시 작은 그룹 채팅을 만들어 잘 아는 몇몇 친구들을 그룹에 끌어들이고 그중에는 염지훈도 포함되어 있었다.그러고는 제목에 쌍둥이 남매가 부럽지 않냐고 그래도 소용없다고 계속 부러워하라는 글을 덧붙여 20장이 넘는 아기의 사진을 연이어 보냈다.얼마 안 되자 답글들이 올라왔다.송지원: 아이들이 태어난 거야? 축하해, 내일 보러 갈게.봉현수: 금방 태어난 거야? 난 선물까지 미리 준비해 뒀어. 내일 지원이랑 같이 갈게.그 밑에는 붉은색으로 된 부동산 증명서 두 권의 사진이 첨부되었다.한재민: 축하해. 선물은 지금 오는 길에 있어. 설쯤에 제수와 아이들 보러 갈게.그웬: 벌써? 내가 아직 가지도 않
간호사가 수술실 문을 빼꼼히 열고 머리를 내밀며 말했다.“한 명은 태어났고 지금 다른 한 명도 나오는 중이니 가족들 진정하고 조용히 해주세요.”말을 하고 있는데 반쯤 열린 문에서 또 다른 한 명의 나긋나긋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안에 있는 의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2.6킬로가 되는 여자아기예요. 아기 상태도 아주 좋아요.”“산모 상태도 좋아요. 이제 봉합 수술을 시작하죠.”유강후는 기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 제 자리에서 굳어 있는 채로 꼼짝도 못 했다.간호사는 그 표정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들으셨죠? 동생도 나왔다네요.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합니다.”“유 대표님, 수술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협조해 주시고 더는 문을 잡아당기지 말아주세요.”유강후는 바로 손을 놓고 부들부들 떨며 담배를 가지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는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었다.옆에 서 있던 이권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축하해요. 작은 아가씨가 2.6킬로나 되는 걸 보니 도련님은 더 건장할 거예요.”유강후는 기쁜 나머지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수 없었고 신이 나서 말했다.“다연이가 무사히 수술실에서 나오면 바로 통지해. 우리 회사 직원들 전부 3일 동안 휴가를 내줄 것이고 이번 달은 두 배의 급여를 발급할 거야.”그 말에 이권은 너무 좋아 웃으며 말했다.“그럼 직원들은 아마 좋아 죽을걸요? 대표님은 참 통쾌하시다니까요.”장화연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가득했다.“도련님, 제가 가서 작은 도련님과 아가씨의 옷을 가져올게요. 방금 급하게 나서다 보니 챙기는 걸 까먹었어요.”그러자 유강후가 바로 말했다.“다른 사람 보낼 테니 장 집사는 가지 말고 여기서 다연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내가 혼자서 서툴까 봐 그래.”“그리고 앞으로 날 도련님이라 부르지 말고 회장님이라 불러. 나도 이제 아버지가 되었으니 좀 무게감 있는 호칭으로 바꿔야지.”장화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선생님이라 부를게요. 무게감 있고 더 뜻깊어 보이잖아요?”“집안의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말에 긴장된 온다연은 의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빨리 수술해야 해요? 혹시 아이가 어떻게 된 건가요?”지난번의 임신 사건 후 온다연은 이제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두려웠고 지금은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말에 긴장되는 것이 당연했다.그러자 의사는 긴장을 풀어주려고 급해하며 말했다.“아이를 낳는 일은 누구도 장담 못 해요. 앞당겨 수술해야 하는 상황은 종종 많이 생겨요. 지금은 양수가 터져서 자궁 상태가 안전하지 못하니 빨리 수술해야 해요. 아직 만삭이 안 되었지만 이 두 아이는 온다연 씨의 몸에 비해 작지 않은 편이라 일찍 출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에요.”온다연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난다면 저는 괜찮아요.”온다연은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을 집도한 사람은 비록 그웬은 아니지만 경원시 최고의 산부인과 의사이며 심지어 옆에서 수술에 도움을 주는 사람도 국내 유명한 산부인과 전문의였다.그런데도 유강후는 긴장한 나머지 수술실 밖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마저 바닥에 열 번 넘게 떨어뜨렸다.30분이 넘게 지났는데도 수술실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유강후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말했다.“장화연, 혹시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야? 나도 수술실에 들어가 봐야겠어.”그렇게 말하고 바로 수술실 문을 잡아당기자 옆에 있던 간호사들이 그를 가로막으며 말했다.“유 대표님, 지금은 수술 중이라 여기서 이렇게 소란 피우시면 안 됩니다.”장화연도 재빨리 달려가 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도련님, 아이를 낳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은 건강 상태가 아주 좋고 아기도 뱃속에서 건강한 상태였어요. 게다가 많은 전문가가 수술실에 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니 내심이 기다려요.”유강후는 처음으로 초조하고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수술 시작한 지 한 시간이 되어가는데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거야?”그러자 호사가 황급히 대답했
“지예솔이 며칠 전에 갑자기 사라졌대. 봉현수가 경원시의 땅 전체를 파헤칠 정도로 찾았지만 사람은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어. 게다가 봉현수의 회사에 일이 좀 생겨 그걸 도와 처리하느라 좀 늦었어.”유강후의 말에 온다연은 당황했지만 일부러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예솔 씨가 또 집 나갔어요? 이런 일도 이젠 한두 번이 아닌데, 며칠 더 찾아보면 찾을 수 있겠죠.”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이번엔 좀 다른 거 같아. 지예솔이 봉현수와 함께 썼던 물건들을 모두 불태우고 사진이랑 다 삭제했어. 십여 년 전의 편지조차 다 버려버린 걸 보니 아주 철저하게 돌아선 거 같아. 이번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온다연은 냉정하게 말했다.“봉현수가 예솔 씨를 그렇게 대하는데 어떤 여자가 옆에 남아 있겠어요? 찾지 못한다 해도 자업자득이죠 뭐.”“봉현수가 지금 미친 사람처럼 날뛰고 있어. 게다가 쓰레기 처리 센터까지 가서 뒤지면서 몇 통의 편지와 망가진 장난감 몇 개를 되찾아왔어.”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지예솔이 너랑은 좀 친해 보이던데 혹시 너한테 메시지라도 보낸 건 없어?”온다연은 다시 냉정하게 말했다.“그렇게 친한 정도도 아닌데 저한테 뭐 하러 연락하겠어요? 이미 떠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니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을 거예요.”그러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근데 저는 지예솔 씨의 소식을 들었다 하더라도 말 안 해줄 거예요.”“됐어요. 남의 집안일은 집에서까지 논하지 말아요. 장 집사님이 맛있는 걸 해놨어요.”말을 마친 후 온다연은 유강후를 밀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겨우 두 걸음을 걷던 온다연은 배가 처지는 느낌을 받아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저는 배가 너무 무거워서 걷기도 힘드니 강후 씨 혼자 내려가서 먹어요.”유강후는 갑자기 긴장해 하며 말했다.“낳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온다연은 그가 긴장해 하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아직도 이틀 더 있어야 겨우 8개월이
또 어느 큰 눈이 내린 날, 날씨도 엄청 추웠다.온다연은 오후에 잠깐 집을 나서 좀 먼 곳에 있는 작은 여관에 갔다.여관방에서 온다연은 주머니 하나를 지예솔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건 사람 찾아 만든 새 등록증이에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만든 거니 일단 받아요.”“참, 그리고 안에 카드 한 장 있어요. 천만 원이 들어 있으니 저의 성의라 생각하고 그쪽에 가서 잘 살아요.”온다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어 말했다.“확인해 보니 라현쪽에 유강후의 지사가 있었어요. 제가 이미 이유를 대서 그 지사를 대진 그룹 명의로 옮겼어요. 그쪽 사람들한테도 이미 인사를 했고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지금 예솔 씨의 이름으로 경리를 찾아가면 돼요. 이름은 임진혁이라 해요. 하지만 그쪽은 외진 곳이라 제가 많은 도움은 줄 수 없을 거 같으니 이후의 일은 예솔 씨가 스스로 해결해야 해요.”지예솔은 등록증과 은행 카드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 받아들이고 자그마한 짐가방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온다연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건 저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물건이니 이거라도 받아주세요.”그녀가 건넨 물건은 너무 투명하여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옥팔찌로 비록 최고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천만은 되는 듯해 보였다.온다연이 거절하려고 하기 전에 지예솔이 한마디 덧붙였다.“이거라도 받지 않으면 제 마음이 안 편해서 그래요. 다연 씨가 갖고 있는 액세서리 하나도 이것보다 더 비싸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지금 제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물건이에요.”온다연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옥팔찌를 받아들였다.“차가 도착했어요. 우리도 이제 내려가요.”지예솔은 남성복으로 갈아입고 자그마한 짐가방을 메고 온다연과 함께 내려갔다.밖에는 검은색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고 지예솔은 바로 그 차에 타고 창문을 내리며 온다연에게 손을 흔들었다.차가 떠나간 후 온다연도 옆에 있던 차량에 탔고 기사는 유강후가 제일 믿는 장 아저씨였다.온다연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장 아저씨, 아드님이 경대에 입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