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다인!”“슬기야, 화내지 마.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도 거짓말일 뿐만 아니라 그날 난 정우한테 가던 길도 아니었어. 그냥 그런 판을 짠 거야. 네가 감방에 들어갈 수 있게 말이야. 설령 이곳에서 나온다고 해도 어차피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해.”연다인은 몸을 굽히며 임슬기의 머리채를 잡은 후 기괴하게 웃었다.“하하하, 어때? 막 고통스럽고 그래?”“연다인!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임슬기를 소리를 지르며 있는 힘껏 반항했다. 곧이어 고개를 숙이더니 연다인의 팔을 깨물었다.“아악! 임슬기. 너 개띠야?”연다인은
말을 마친 연다인은 임슬기를 밀쳐 쓰러뜨리더니 새빨간 하이힐로 임슬기의 얇고 가느다란 손을 밟았다.임슬기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고 있었지만 자신의 손을 밟는 연다인에 움직일 수가 없어 남은 한 손으로 연다인의 새빨간 하이힐을 잡았다.연다인은 임슬기의 다른 한 손도 밟으려고 했지만 임슬기가 그녀의 발목을 잡으며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기에 그만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얇고 가느다란 왼손은 이미 피범벅이 되었다.“임슬기, 똑똑히 봐. 내가 이긴 거야. 넌 이 판에서도 졌다고! 네가 제일 아끼던 손도 망가졌으니 이젠
권민은 룸미러로 배정우를 힐끗 보곤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결국 간단한 대답만 했다.임슬기를 향한 배정우의 오해는 날이 갈면 살수록 늘어갔고 점차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어갔다. 그는 당연히 임슬기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면 배정우의 미움만 살 것이 뻔했기에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병원에 도착한 배정우는 임슬기를 응급실로 데리고 갔고 마침 전에 치료해주었던 의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피범벅이 된 임슬기를 본 의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도련님, 사모님이 죽는 걸 원하신
임슬기는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너무도 다정한 배정우의 모습에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고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정우야, 이제 나 안 미워하는 거야? 이제 원망 안 해?”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슬기야, 우리 이제 그만 싸우자. 응?”“그럼... 연다인은? 연다인을 조강지처로 만들 거라고 했잖아...”“안 그럴 거야. 슬기야, 우리 마지막 남은 시간까지 둘만 행복하게 보내자. 아기도 지우자. 아기가 있으면 네 몸 상태가 더 나빠질 거잖아.”그
‘폐암'이라는 두 글자에 배정우의 손에는 힘이 더 세게 들어갔고 임슬기의 목이 거의 으스러질 정도로 조르고 있었다.“애초에 시한부도 아니었어!”연다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며 깁스한 오른손을 들고는 걱정스럽게 말했다.“하지만 방금 간호사님이 분명 나한테...”“하, 전부 이 여자가 사람을 매수해서 거짓말을 한 거야. 동정심 유발이라도 하려고!”배정우는 임슬기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간 뒤 이를 빠득 갈며 말했다.“임슬기.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너를 향한 내 증오가 커진다는 거 몰라?!”연다인은 얼른 다가가 배정우를
임슬기는 화가 나 몸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연다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증거가 없었다.“연다인, 네가 직접 나한테 말했잖아. 교통사고도 거짓말이라는 거 네가 오전에 감방에서 말해준 거잖아!”“난 그런 적 없어...”연다인은 바로 배정우의 품으로 숨으며 눈치를 살피곤 입을 열었다.“정우야, 난 오전에 감방에 간 적 없어...”“하, 거짓말하지 마. 너 분명 왔잖아. 너 때문에...”임슬기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배정우가 소리를 지르며 잘라버렸다.“그만! 임슬기, 아직도 부족해서 이러는 거야? 간호사를
‘17년이라니?'연다인을 안고 있던 배정우의 손이 경직되었다. 그와 임슬기는 알고 지낸 지 4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17년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하, 정말 갈수록 뻔뻔해지네. 17년이라고? 그딴 시간은 대체 어떻게 계산한 거지?”임슬기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지만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자꾸만 찬 공기만 들어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그는 잊은 것이다... 그와 다시 만나게 된 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었다. 그저 이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해 하늘이 그와 그녀를 이어준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에야 알게 되
임슬기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녀는 그저 자신의 주치의에게만 폐렴이라고 검사 결과를 고쳐달라고만 했다. 그런데 연다인이 이 일과 연관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임슬기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그러니까 누가 병원 사람들을 매수해 제 검사 결과를 조작했다는 건가요?”“네, 간호사까지 전부 매수했어요. 그러면서 저는 임슬기 시가 매수한 사람이라고,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소문까지 냈더라고요. 그래서 임슬기 씨 남편도 그렇게 믿고 있는 거예요.”‘그런 거였다니...'임슬기는 픽 웃었다. 연다인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서우가 대뜸 다가와 임슬기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짝!임슬기의 고개가 홱 돌아가고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화면이 켜지면서 진승윤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떴고 이어 전화기 너머로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슬기야? 무슨 일이야?”그 목소리에 기름을 부은 듯 김서우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고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더니 임슬기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이 더러운 년,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승윤 씨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그럼 이건 뭐야! 다인이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어. 넌 그
김현정을 제대로 쉬게 하려고 임슬기는 식사를 마친 후 일부러 그녀에게 더 자라고 말했다. 처음엔 김현정이 완강히 거절했지만 결국 임슬기를 이기지 못하고 얌전히 다시 눕게 되었다.병실로 돌아가던 길, 임슬기는 계단 입구 근처를 지나다가 우연히 차희라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내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거 알잖아. 꼭 살아서... 그 애를 만나야 해.”“사모님, 벌써 스무 해가 넘었잖아요. 이제 그만 포기하시는 게... 김서아 씨도 계시고, 충분하지 않나요?”하지만 차희라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야, 달라. 그 애
밤새 울었던 탓에, 아침에 눈을 뜨자 임슬기의 눈은 또 퉁퉁 부어 있었다.부기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 따뜻한 수건으로 찜질까지 하고 나서야 간신히 외출할 얼굴이 되었다.몸단장을 마치고 김현정을 보러 가려던 참에 문을 나서자 문 앞에 놓인 영양제들과 보온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임슬기는 영양제를 방 안에 들여놓고 보온 가방을 열어보았다.안에는 보온 도시락 두 개가 들어 있었고 흔들어보니 안에 국물이 담긴 듯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어디에도 쪽지는 없었고 누가 두고 간 건지도 알 수 없었다.찜찜한 기분에 임슬기는 잠시 눈
‘얼마나 기억하고 있냐고?’배정우는 조심스레 기억을 더듬었다. 떠오르는 건 임슬기의 배신, 차가움 같은 상처뿐이었고 좋은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흐릿했다.그런데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엔 여전히 임슬기에 대한 강렬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게 증오든, 사랑이든.예전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나서야 그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아직도 임슬기를 사랑하고 있다는걸. 다만 미움까지 놓기엔 아직 어렵다는 것도.갑자기 배정우가 고통스럽게 머리를 부여잡았다.“으윽!”권민은 그 소리에 놀라 서류를 던지고 황급히 달려갔다.
육문주는 막 귀국한 터라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알진 못했다. 하지만 임슬기의 말투와 눈빛에서 어쩐지 깊은 쓸쓸함이 느껴졌다.“형수님, 사실 정우 형... 아직도 형수님을 신경 쓰고 있어요.”그 말에 임슬기는 쓴웃음을 지었다.“아니요, 그 사람의 신경 쓰는 방식은 아마 웬만한 사람은 버티지 못할걸요.”감금, 모욕, 배신이 신경 쓰는 거라면 말이다.“형수님...”육문주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임슬기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아까 그 남자 경찰 쪽에 연락해서 그냥 풀어달라고 해 주세요. 현정이도 심하게 다친 건 아
방금 전 그 칼은 사실 임슬기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자기 자신을 찌르려 했던 것이다.빚에 쫓겨 더는 물러설 곳도 없던 그는 누군가 동생을 살려줄 수 있다면 목숨을 걸고 판을 벌여서라도 절대 물러서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건 임슬기가 그걸 간파했고 심지어 자신의 몸으로 그를 막으려 했다는 사실이었다.남자는 병상에 누워 있는 김현정을 바라보며 한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만약 누군가 임슬기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끔찍한 결과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임슬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옆에 있던 간호사까지 놀라 그녀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당겼다.“사모님, 진정하세요.”하지만 임슬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남자에게 다가갔다. 두 눈에는 연약함과 단단한 의지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저 알아요. 당신 그냥 동생을 살리고 싶은 거죠?”그녀는 차희라를 돌아보며 말했다.“이분만 놓아주신다면 제가 약속드릴게요. 이분이 입원비를 대신 내드릴 거고 곧 도착할 육 선생님이 당신 동생을 진료하실 겁니다. 지금 이 기회를 정말로 놓치고 싶으세요?”그 말에 차희라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임슬기가 눈짓을
연다인을 떠올리자, 임슬기는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배정우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연다인의 죄를 벗겨줄까?’문득 드는 생각에 그녀는 스스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참, 나는 이런 생각을 왜 하는 거야?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지는 말자.’임슬기는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털어 버리며 햇볕을 쬐러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임슬기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다음날 산책을 나온 임슬기는 다시 차희라와 마주쳤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임슬기는 말다툼을 피하려고 일부러 못 본 척 시선을 돌린 채 차희라가
“누군가 했더니? 그 더러운 손 치워요!”임슬기가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강한 힘에 밀려 휘청거렸다.중심을 잡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금 임슬기의 앞에서 넘어진 사람은 다름 아닌 차희라였다.“여사님, 괜찮으세요?”“좀 착한 척 그만 해요. 정말 착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약혼자 주변에서 맴돌지나 말든가.”역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임슬기를 바라보는 차희라의 모습에 임슬기는 눈썹을 찡그리고 대꾸하려는 찰나,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임슬기는 허리를 굽혀 종이를 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