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문제가 조금은 생길 거예요.”원철수는 손가락으로 손짓하며 싱글벙글 웃었다.김서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 없이 물었다.“그 실험 기지의 책임자는 오랫동안 소란을 피웠으니, 지금은 갇혀 있겠죠.”김서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들어만 봤다고 말했다. 김서진 같은 기술자는 그런 걸 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담당자...”김서진은 무슨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구치소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침울한 분위기는 엄숙하고 억압적이었다. 주현철는 딱딱한 침대에 다리를 웅크린 채 앉아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직도 기억나지 않았다.‘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멀쩡한 백신 기지가 아직 대박을 이루기도 전에 감옥에 먼저 간 거지?’처음엔 소리를 지르며 안간힘을 쓰다가 가둬놓고는 태도도 쌀쌀맞은 것을 보고 나서야 잠잠해졌다.이곳은 너무 춥고 무서웠다. 주현철은 평생 이런 고생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곳에 앉아 벌벌 떨며 잠을 전혀 이루지 못했다.밖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지만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들어온 이후로 줄곧 누군가가 말하고 있고, 벽에 부딪히고, 문을 두드리는 등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이곳에 계속 머무른다면 미쳐버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그러나 곧 바깥 문이 열렸고, 이번에는 환각이 아닌 것 같은 발소리가 들렸다.발소리가 자기 앞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나는 것을 듣고서야, 주현철는 머뭇머뭇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다가온 사람을 확인한 후 주현철은 눈빛을 반짝이며 눈을 힘껏 비볐다. 꿈이 아닌 것이 확실하지 침대에서 벌떡 뛰어내려 철장 앞으로 달려가 큰소리로 외쳤다.“형부, 형부 살려주세요! 형부”주현철은 한 손을 필사적으로 철창에서 내밀어 진정기의 옷을 잡으려 했지만 거리가 떨어져 있어 잡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옷자락도 닿지 않았다.“형부, 영문도 모른 채 잡혀 왔어요. 여기 너무 춥고 무서워요. 빨리 저를 구해 주세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왜 백신 기지가 불법이라고
“그런데 왜 왔어요? 날 놀려주려고요?”철창을 잡은 손을 천천히 풀고, 주현철은 스르륵 미끄러져 땅바닥에 앉아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말 이해가 안 돼요.”그대로 서서 주현철을 바라보는 진정기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진정기는 자신의 아내를 매우 사랑한다. 아내 때문에 처남에게 많은 것을 포용했다. 설령 주현철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가능한 한 도와주고 이끌어주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공적인 일에서는 결코 양보한 적이 없다. 자신의 한 걸음 양보하는 것이 만장의 심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자신을 영원히 되돌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현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우연한 사고였다!당시 주효영의 약물에 의해 통제되었는데 결국 주현철이 손에 넣기 위해 조금씩... 그 조금으로 모든 것이 흐트러졌고 차츰 백신 기지가 주효영에 의해 불법 실험의 은신처로 이용되었으니 주현철이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프로젝트를 따낸 이후로 여기저기 돈을 벌었다.주현철은 사실 비즈니스에 그다지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장기적인 안목도 없고, 충분하고 냉철한 두뇌와 논리도 없었으니 말이다.진정기는 김서진과 잘 아는 사이이고, 이야기를 오래 나누다 보니 주현철과 김서진의 차이가 조금만 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터놓고 말하면 김서진이 주씨 가문을 망하게 하려면 손가락 한 번 까딱하면 되는 일이었다.단지 독점할 마음이 없어서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 설령 주현철이 잔꾀를 부려도 못 본 척 그냥 지나쳐 버리곤 했다.“백신 기지 사업은 원래 네가 따내지 말았어야 했어.”방에는 그들 두 사람뿐이라 진정기는 담담하게 말했다.“지금까지 네가 관여한 것은 금융 관련 불법 행위뿐, 아직 심각하지 않아. 이제 백신 기지에 대해 네가 얼마나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달렸어.”진정기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주현철은 어리둥절했다.“무
“진정기, 네가 가난했을 때 우리 누나가 싫어하지 않고 결혼까지 했는데, 지금 출세했다고 누나의 당부를 다 잊어버리고 지금 나를 죽이려는 거야? 죽는다고 해도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진정기의 말을 오해한 주현철은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주혜영은 죽지 않았어.”간단한 한 마디로 욕설을 퍼붓던 주현철을 달랬다.주현철은 미처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뭐, 뭐라고요?”“주효영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잠시 뜸을 들이던 진정기가 말을 이었다.“제수씨도 알 거야.”“그럴 리가!”주현철은 믿어지지 않았다.“주효영은 폭사했어요. 경찰에서 발급한 증명서랑 부검 보고서도 있어요. 당시 화장한 후에 매장된 것을 형부도 보셨잖아요. 그때 효영의 엄마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형부 못 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주현철은 진정기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효영이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 자신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진정기는 냉랭한 표정으로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믿거나 말거나, 이건 더는 중요하지 않아. 너의 딸은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많이 했어. 너 지금 여기에 있고, 이것들을 감당해야 하는 건 주효영이 한 짓거리 때문이야.”진정기의 말이 그에게 주는 충격은 너무나 커서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주현철은 땅바닥에 앉아 멍하니 앞을 내다보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주효영이 안 죽었다고요? 효영이가, 효영이가 안 죽었다고요?”기쁜지 화가 난 건지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딸이 죽지 않은 것은 주현철에게 있어 매우 좋은 소식일 것이다. 하지만 진정기는 주현철이 여기에 있는 것이 모두 주효영 때문이라고 말했다.‘이건 또 무슨 뜻이지?’“저... 모르겠어요.”미간을 찌푸리고 나서, 주현철은 망설이며 말했다.“효영이 걔, 뭐 했어요?”진정기는 몇 초 동안 침묵
하지만 진가연임을 발견한 유해나는 안색이 달라졌다.“왜 왔어!”유해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외숙모.”진가연은 가볍게 인사하고 나서 방으로 들어가 집안의 어지러운 곳을 힐끗 보았다.이미 들어서 집안이 난장판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이런 꼴 보려고 일부러 왔지?”냉소를 지으며 유해나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외숙모, 제가 왜 그러겠어요.”여전히 옅은 목소리로 말하는 진가연은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외삼촌은 주요 책임자가 아니니 죄가 무겁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도 가능한 한 형량이 가벼워질 수 있도록 방법을 찾는댔어요.”이 말을 들은 유해나는 갑자기 뭔가 떠올라 표정을 바꾸었다.“너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니?”“아니, 지금 아버지 집에 계시냐는 말이야.”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 유해나는 이내 말을 바꿨다.“아버지는 안 계시지만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외숙모 걱정하지 말아요.”진가연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유해나는 눈빛을 반짝이며 대답했다.“그럼, 당연히 걱정 안 하지! 네 아버지는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이구나. 지금 가장 견디기 힘든 사람은 바로 네 그 비운의 외삼촌이야!”“외삼촌이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누나랑 자랐는데, 누나도 사라졌으니 형부가 어느 정도 봐줄 줄 알았는데 네 아버지 성격이... 휴!”긴 한숨을 내쉬고 난 유해나는 눈가의 눈물을 훔치더니 매우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됐어, 과거의 일은 말하지 말자. 네 외삼촌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면회를 하러 가고 싶은데 면회도 못 하게 해. 사건은 아직 수사 중이라나 뭐라나.”“수사래, 뭘 수사한다는 거지? 네 외삼촌이 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손뼉을 치며 유해나는 억울하다고 호소했다.“삼촌이 법을 어겼는지는 법원이 결정할 일이에요. 사실 외삼촌이 왜 들어갔는지 외숙모님도 모르세요?”진가연은 부드럽게 말하며 외숙모의 손목을 잡아당겨 소파 쪽으로 가더니 어지러운 물건을 걷어내고 그대로 앉았다.유해나
“외숙모, 방금 우리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셨는지 물으셨잖아요.”진가연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유해나는 말문이 막혔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않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눈알을 굴리며 생각해 본 후 유해나는 갑자기 몸을 돌려 진가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가연아, 나 알아. 효영이가 너와 네 아버지를 다치게 한 건 잘못한 짓이야. 하지만 효영이는 너의 친사촌 언니이고, 너희들은 혈연관계가 있잖아. 효영이도 아직 어린애일 뿐이고, 아직 젊어서 잘못을 저지른 거야. 이미 잘못을 알고 있어.”“가연아, 효영이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유해나는 말을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너 효영이를 용서해줘. 게다가 효영이는 지금 김씨 가문 사람에게 끌려갔고,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살았는지도 죽었는지도 모른 다고... 너한테 효영이를 살려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집에 이렇게 큰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유해나는 눈물 콧물 쥐어짰다. 진가연이 기억할 수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외숙모가 이렇게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기억속에서 외숙모는 항상 환하게 웃으시고 자신에게도 상냥하시며, 늘 귀부인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가 헝클어지고 눈이 벌겋게 부어올랐으며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외숙모...”진가연은 한숨을 내쉬며 외숙모를 가볍게 부르고 나서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사촌 언니는 나를 해치고, 나에게 독을 주입했어요. 언니는 그때 우리가 친사촌 자매이며, 가장 가까운 혈연관계라는 걸 개의치 않은 것 같아요.”“...”말문이 막힌 유해나는 아연했다.망설이다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참으며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그건... 효영이가 그때 나이가 어려서 나쁜 사람의 유혹을 받았어. 전혀 몰랐고 효영이도 피해자였어!”“어쨌거나 효영이는 여전히 너와 혈육 관계야. 여전히 가족애가 있다고. 그렇지 않았다면, 너는 이미 죽었을 거야. 이렇게 커서 여기에 서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진가연은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다. 외숙모가 자기한테 정말 잘해줬다고 생각했었다. 이제야 친자식과 조카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외숙모가 잘해 주는 건 다 아빠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것이었다. 더 많은 걸 얻으려고 말이다.사촌 언니는 자기 엄마가 자기보다 더 잘 대해준다고 생각하며 질투했겠지만 진가연만 알고 있다. 어릴 때 진가연이 넘어지면 외숙모가 제일 먼저 일으켜 세운 다음, 땅이 울퉁불퉁해서 우리 꼬마 아가씨를 넘어뜨렸다고 땅을 치며 말했다.하지만 주효영이 넘어져서 무릎이라도 까지면 외숙모는 마음이 아파서 한밤중까지 울었다.어렸을 때 진가연은 설탕을 좋아했다. 분명히 그때 이미 살이 찌기 시작해서 섭취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먹고 싶다는 한마디에 외숙모는 다 사주었다. 그러나 주효영은 매운 쫀드기를 좋아하지만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이라며 먹지 말라고 했고, 거절한 후 주방에 맛은 비슷하지만 비교적 건강한 대체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어렸을 때는 몰라서 모든 것을 잘해 주는 것이 좋은 것인 줄 알았다. 커서야 깨달았다. 진정한 사랑은 허락도 있고 절제도 있는 것이라는 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아낌이라는 걸 말이다.예를 들어, 지금 주효영이 그렇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외숙모는 여전히 자신의 딸이 매우 좋다고 생각할 것이고, 틀리지도 않고 그저 어린애라고 생각할 것이며, 어떻게든 숨기려고 할 것이다.물론, 외숙모는 주효영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유해나는 자신의 딸을 한 번도 알지 못했다. 늘 무시당하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유해나는 지금 잘못을 저지르고 극구 보상하는 어머니처럼, 무슨 일이든 딸이 용서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할 것으로 생각했다.“외숙모!”가냘프게 한숨을 내쉬고 난 진가연은 피곤함을 느꼈다.“사촌 언니의 잘못은 이미 외숙모가 대신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더는 숨길 수 없어요. 외삼촌은...”잠시 머뭇거리던 진가연이 입을 열었다.“외삼촌의 지금 상황도 사촌 언니가 저지른 일 때문이에요. 사
슬프고 힘들었다. 진가연의 마음속에서는 외삼촌과 외숙모 모두 가족이었으니 말이다.사촌 언니가 자신에게 독을 먹인 일을 알았다고 해도, 이 일을 외삼촌과 외숙모는 몰랐고 두 분과도 상관없었다. 외숙모가 몇 년 동안 자신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약을 처방한 것을 생각하면 두 분을 미워할 수 없다.물론, 자기한테 잘 보이려는 목적이 있는 건 사실이고, 자기한테 잘해 주는 것도 단순한 건 아니지만, 사람은 다 사심이 조금씩은 있으니 그것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이기심이 있는 게 무슨 잘못이겠는가. 두분 역시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결점이 있고 문제가 있더라도 확실히 자신의 가족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외숙모의 이 몇 마디 말은 진가연의 마음속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완전히 망쳐버렸다.지금 이 상황에 이르렀어도 외숙모는 모든 죄를 진가연의 머리 위에, 그리고 진가연아버지의 머리 위에 뒤집어씌우려 하며 주효영이 저지른 잘못된 일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실망이 극에 달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진가연은 일어서서 조용히 외숙모를 바라보았다.“외숙모, 전 할 말은 다 했어요, 몸 잘 챙기세요, 갈게요.”말을 마친 진가연은 밖으로 나갔다.유해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진가연이 아무런 반응도 없을 줄은 몰랐다.‘미안함도 마음도 불안도 없이 가버리다니.’“가면 안 돼!”쫓아간 유해나는 진가연의 팔을 잡았다.“가연아. 이제 오직 너만이 네 외삼촌과 사촌 언니를 구할 수 있어. 그래, 사촌 언니는 그렇다 치더라도 네 외삼촌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잖아?”“백신 기지는 외삼촌이 맡고 있고, 안에서 누군가가 불법 실험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외삼촌이 잘못한 게 없다고요?”진가연은 또박또박 말했다.진가연은 사실 자세한 건 잘 몰랐다. 아버지한테 대충 들은 얘기지만 외삼촌이 전혀 책임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불법 실험이라니, 무슨 소리야? 너 설마 외삼촌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건 아니겠지?”유해나는 주효영이 한 일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는데 주효
사실 그녀가 붙잡고 있다고 해도 진가연이 정말 못 나오는 건 아니다. 그녀가 혼자 온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진가연은 너무 난처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차에 올라타 고개를 돌려 텅 빈 집을 바라보니 한밤중이라 더 쓸쓸해 보였다.모든 추억이 머릿속에 밀려와 그녀가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즐거웠던 일도 기쁘지 않았던 일도 모두 그녀의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다.“좀 더 볼 거야?”옆에 앉으며 진정기가 물었다.“아니요.”진가연은 고개를 저었다. 추억은 머릿속에 있고, 여기에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결코 돌아갈 수 없다.“운전해.”진정기가 입을 열었다.차가 서서히 움직이며 집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진가연은 끝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왜, 왜, 왜 이렇게 된 걸까요?”한 손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진정기는 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딸의 감정을 고려했기 때문에, 주현철 부부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들 부부가 가연에게 잘해줬던 것을 생각해서 자비를 베풀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유해나는 지금 집에 안전히 있을 리가 없다. 아마 주현철과 함께 구치소의 차갑고 습한 작은 방에 있어야 할 것이다.“인간성일 뿐이야.”진정기가 조용히 말했다.“인간성이 다 그런 것이라고 믿지 않아요.”고개를 든 진가연은 눈물이 글썽했다.“외삼촌과 외숙모가 나를 어릴 때부터 키웠는데, 나에게 진심이 조금도 없을까요? 진짜 다 이용하려는 것뿐인가요?”유심히 바라보던 진정기는 진가연의 잔머리를 부드럽게 빗어 넘긴 뒤 대답했다.“진심이 하나도 없을 수는 없어. 하지만 때로는 엄청난 이익 앞에서 그 진심을 감추고,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들기도 하지.”“네 외삼촌과 외숙모도 너를 진심으로 아낄 때가 있어. 그들이 너를 잘 대해주는 것도 어쩌면 일부는 나에게 잘 보이고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 혈연관계도 있어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