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 쪽으로 향했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진짜 빠르네!”문을 열자, 여진구가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방연하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연하가 먼저 활짝 웃으며 말했다.“유진, 새집 입주 축하해!”유진은 꽃을 받아 들며 미소 지었다.“고마워!”연하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효성이 출장 가 있어서, 나중에 돌아오면 따로 축하해 준대.”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전화 왔었어.”진구는 들고 온 상자를 현관 앞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뭘 사야 할지 몰라서, 집에 어울릴 만한 장식품 하나 골라 봤어. 어디에 둘지 한번 봐봐.”이에 유진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나 그냥 한 달 동안만 여기 있을 건데. 다들 이러니까, 마치 내가 여기서 영원히 사는 것 같잖아!”셋은 웃으며 거실로 이동했다. 그때, 소희가 있는 것을 본 진구는 순간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으며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안녕하세요!”연하도 따라서 인사했다. 연하는 온라인에서나 임유진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통해눈앞의 여성이 어떤 전설적인 인물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지난번 유진의 생일날, 멀리서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구택과 함께 있어 더욱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였다.그러나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소희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기품이 넘쳤다.성격이 쾌활한 편인 연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조금 긴장되는 기분이었다.그러나 소희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들 모두 유진이 친구잖아요. 그러니 이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유진은 소희의 팔짱을 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렇지? 소희는 엄청 친절해. 우리 삼촌처럼 엄격한 스타일이 아니니까, 둘도 편하게 있어!”소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부엌에 과일 좀 가져올게. 너희들은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어.”소희가 주방으로 향하자, 유민이 벌떡 일어나 따라갔다.“숙모, 나도 같이 갈래요!”연하는 소희의 뒷모습을 보며 작은 목소
방연하는 즉시 찬성하며 말했다.“샤브샤브 좋죠! 시작되는 번영이라는 의미가 있대요. 그러니 새집 입주 축하 자리로 딱 맞아!”여진구가 물었다.“어디로 갈까?”성연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아는 곳이 있어. 유명한 프랜차이즈는 아니지만, 맛은 정말 정통 그 자체야.”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어디?”연희는 유진을 바라보며 천천히 이름을 말했다.“샤브샤브 가게.”그 순간 유진의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뭔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살짝 아프고, 뭔가가 꽉 차오르는 듯한 이질감.유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거기, 가본 적 있는 것 같아요.”연희는 깊은 의미를 담은 미소를 지었다.“그럴 거야. 그 가게, 영화 촬영지 근처에서 꽤 유명하거든. 매일 손님들로 가득 차.”진구는 표정을 약간 굳히며 말했다.“너무 먼 거 아닌가요?”그러나 연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맛만 있으면 됐죠! 멀면 어때요? 연희 씨가 추천하는 곳이라면, 틀림없을 맛집이죠 나는 찬성이요!”진구는 그녀를 힐끗 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너 아부하는 실력이 점점 초고속으로 늘고 있는 것 같은데?”연하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뭘 잘못 말했는지 몰라 당황했다.‘장난으로 한 말 아니었나?’연희는 결정을 내렸다.“그럼 이렇게 하죠. 거리가 머니까, 지금 바로 출발해요.”그러나, 유진은 한 가지가 걸렸다.“근데 우리 삼촌 아직 안 왔는데?”소희는 잠시 손목시계를 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굳이 기다릴 필요 없어. 내가 메시지 보내서 바로 가게에서 만나자고 할게.”다들 동의했고, 진구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차량 배치가 결정되었다. 유진과 연하는 진구의 차를 타고, 소희와 요요는 청아와 함께 연희의 차를 탔다.차 안에서, 청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갑자기 유진이를 가게로 데려가는 거, 괜찮을까? 너무 충격받지 않을까?”연희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유진이는
전화를 끊은 뒤, 성연희가 돌아보며 말했다.“또 네가 내 방패막이가 되어줬네!”소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괜찮아. 어쨌든, 다 해결됐어!”연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만약 언젠가 서인과 유진이가 정말 함께하게 된다면, 꼭 네게 술 한잔 올려야 할 거야!”이에 우청아가 장난스럽게 물었다.“차를 올릴 때 뭐라고 불러야 할까?”연희는 눈을 깜빡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숙모님이라고 불러야지! 이 정도로 힘을 실어줬으면, 이제 호칭을 바꿔야지 않겠어?”소희는 난감한 듯 웃었다.“서인은 결혼을 결심했다가도, 네 이 요구 때문에 바로 파혼할걸?”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고, 요요도 덩달아 까르르 웃었다. 소희가 요요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요요야, 뭐가 그렇게 웃겨?”요요는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말했다.“또 왕자님과 공주님이 결혼하는 거예요?”연희가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맞아! 이번에도 네가 화동이 되는 거야! 기분 좋아?”요요는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연희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우리 결혼할 때, 요요에게 작은 티아라를 만들어 줬었잖아. 그거 잘 보관해 둬야 해! 그게 바로 역사적인 증거니까!”청아는 웃으며 말했다.“시원 오빠가 이미 신경 썼어. 그 티아라랑 요요가 결혼식에서 입었던 드레스도전용 보관함에 넣어 놨어.”그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각자의 행복을 증명하는 소중한 기억이었다. 그리고, 요요의 성장을 기록하는 하나의 시간의 조각이기도 했다.연희는 감탄하며 말했다.“역시 시원 오빠는 세심해!”청아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날렸다. 그 모습이 더욱 우아하고 고요하게 빛났다.샤브샤브 가게에 도착했다. 임유진은 차에서 내리며 눈앞의 간판을 보고 순간 멍해졌다.‘샤브샤브 가게.’깨끗하고 밝은 유리문, 전통적인 느낌의 벽돌 장식, 그리고 옆쪽에 있는 고풍스러운 나
현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희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어요.”“그러면 저희는 재료랑 육수를 준비할게요.”현빈은 사람들이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당부한 후, 이문 등과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방연하는 가게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환경 괜찮네요. 그런데 이런 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려면 경쟁이 엄청 치열하다고 들었어요. 배경 없으면 버티기 어렵다던데요?”성연희는 눈꼬리를 살짝 올려 임유진을 바라보며 웃었다.“맞아. 이 가게 처음 문 열었을 땐 말도 못 하게 시비 거는 사람들이 많았어. 싸움도 몇 번이나 났지.”“우리 사장님, 혼자서 그놈들 한 무리를 상대했는데, 그 자리에서 다들 기가 죽어버렸잖아!”이에 연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대단하네요!”임유진은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여기, 나 예전에 온 적 있는 것 같아요.”마치 꿈속에서 본 듯한 희미한 그림자. 그런데도 모든 것이 낯설지 않았다.연희가 곧바로 물었다.“유진아, 너 여기 와본 적 있어?”유진은 고개를 저었다.“잘 기억이 안 나요.”연희는 아쉬운 듯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띠었다.“그럼 그냥 잊어버려. 오늘은 샤브샤브 먹으러 온 거잖아.”주방에서, 이문이 채소를 다듬으며 현빈에게 물었다.“유진이 우리를 진짜로 잊은 거예요?”현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런 것 같아.”이문은 미간을 찌푸렸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유진이 저렇게 있는 거 보니까, 마음이 너무 아프네.”“형님이 우리보다 더 힘들 거야. 조금 있다가 형님 오면, 이 얘기는 꺼내지 마.”현빈이 단호하게 말했고, 이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움직였다.홀에서 요요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자꾸 밖으로 나가 놀고 싶어 했다. 이에 유진이 무심코 말했다.“내가 후원에 데려가 줄게.”그러자 연하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후원도 있어?”말을 꺼내고서야 유진은 스스로도 멈칫했다. 그래, 유진은 어떻게 여기 후원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지?“후원에 뭐 있어?
유진은 돌아서서 유민을 바라보며 웃었다.“여기에 이렇게 예쁜 마당이 있을 줄 몰랐네.”유민은 살짝 안도하며 다시 특유의 느긋한 태도로 돌아갔다.“샤브샤브 가게랑은 좀 안 어울리긴 하네.”유민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마당을 보자마자 누가 만들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유진이 여기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요요는 유진의 품에서 내려와 고양이 집 앞에 다가갔다. 조그만 머리를 집 안으로 들이밀고 여기저기 둘러보며 말했다.“여기 고양이 있어? 어디 있지?”그래, 유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고양이 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아마도 하얀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요요는 손발을 사용해 고양이 집 안으로 기어들어 가려 했다. 그대로 들어갈 것 같아 보이자, 유민이 서둘러 다가가 요요를 들어 올렸다.“고양이 없어, 요요! 이제 그만 찾아!”요요는 팔을 뻗어 담장 위의 장미꽃을 따려고 했다. 그러자 유민이 그녀를 어깨 위에 올려 가장 크고 활짝 핀 꽃을 따도록 도왔다.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벌써 아이 돌보는 연습하는 거야? 이거 삼촌이 보면 더 조급해지겠는데?”“삼촌이 조급해한다고 뭐가 달라져? 결국 이건 숙모한테 달린 거지.”유민은 늘 임구택을 존경했지만, 이 문제만큼은 그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그때, 허스키한 저음이 유진을 불렀다.“임유진!”그 목소리에 유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윽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구은정이 그녀를 깊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움켜쥐어져 있었고, 관절이 희미하게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안에는 어딘가 불안한 감정이 스며 있었다.이 순간, 그는 정말로 유진이 모든 걸 기억해 낸 줄 알았다. 마치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더 두려워지는 것 같은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유진도 은정을 바라보았고, 어렴풋한 형체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을 붙잡기도 전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잠깐의 정적이
임구택이 들어서자,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타고난 아우라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한다.오늘 구택이 편안한 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분위기는 마치 임유진의 새집을 축하하는 자리라기보다, 차라리 비즈니스 모임 같았다. 구택도 이를 느꼈는지, 전화를 핑계 삼아 자리를 떠났다. 방연하는 저도 모르게 가볍게 숨을 내쉬었고, 성연희가 소희에게 농담을 던졌다.“다들 널 부러워할 거야!”소희는 익힌 소고기 완자를 연희와 자신의 그릇에 나눠 담으며 물었다.“뭐가?”“다들 생각할걸? 임구택 와이프가 될 정도에, 매일 함께 지내는 사람이 평범한 여자는 아닐 거라고!”연희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소희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사실, 사적인 자리에서는 굉장히 편한 사람이야.”그렇지 않았다면 친구도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건 그냥 우리가 사는 세계가 다른 거겠지.”연희는 소고기 완자를 한입 베어 물다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고 휴지로 뱉어냈다. 그리고는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청아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왜 그래?”소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요요 좀 봐줘. 가서 확인해 볼게.”화장실에 들어가자 연희는 세면대를 붙잡고 헛구역질하며 괴로워 보였다. 소희는 돌아서서 오현빈에게 물 한 잔을 부탁한 뒤, 다시 화장실로 돌아와 건넸다.“몸이 안 좋아?”연희는 물을 받아 입을 헹구고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소고기 완자가 좀 비린 것 같아.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네.”소희는 눈썹을 찌푸렸다.“나도 먹었는데, 하나도 비리진 않던데?”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연희, 혹시 임신한 거 아니야?”얼마 전, 노정순이 그녀에게 말했었다. 헛구역질이 나거나 식욕이 갑자기 떨어지면 바로 알려달라고. 그때는 그냥 넘겼지만, 나중에 찾아보니 초기 임신 증상이었다.연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말도 안 돼. 며칠 전에 테스트해 봤는데, 임신 아니었어.”소희는 의아한 표
소희는 성연희가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너무 엄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명성이랑 상의해. 그는 분명 네 입장을 이해해 줄 거야. 하지만 두 사람의 문제를 혼자 결정하면 안 돼.”이에 연희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냥 한 번 철없이 굴어본 거야.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요는 어디 갔어?”소희가 묻자, 청아가 대답했다.“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해서, 유민이가 데리고 맞은편 가게에 사러 갔어.”연희는 돌아보다가 마침 임유민이 요요를 안고 길을 건너오는 모습을 보았다. 한 손에는 여러 개의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요요를 가볍게 안아 올리고 있었다.곧게 뻗은 키에 단정한 이목구비,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걸음걸이까지. 연희는 감탄하며 말했다.“몇 년 후면 우리 유민이한테 빠지는 여자애들이 엄청나게 많아지겠네!”소희는 웃으며 말했다.“그럴 필요도 없어. 이미 지금도 매일 책가방에 러브레터가 잔뜩 들어있다니까?”소희는 주말마다 유민에게 수업을 해주러 갔다. 그때마다 책을 펼치면 어디선가 향기 나는 분홍색 편지가 툭 떨어졌다.그러나 정작 본인은 언제 어떻게 들어온 건지도 모를 정도였다.“러브레터?”연희가 혀를 차며 말했다.“요즘 애들은 정말 감성적이네.”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와 아이스크림을 나눠 주었다. 연하와 다른 사람들은 연신 고마워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소희에게 건넨 것은 소희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카라멜 맛이었다. 그러자 연희는 더욱 감탄하며 말했다.“잘생긴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세심하기까지 하다니.”“소희야, 나 지금 딸부터 낳아서 유민이를 사위로 예약해 놓을까? 지금이라도 가능할까?”청아가 곧바로 말했다.“그럼 서둘러야겠네!”소희도 장난스럽게 맞장구쳤다.“내가 감시할게. 네 딸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연애 금지!”연희가 소희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구택이 전화를 마치고 돌아오려던 찰나, 은정이 다가와 말했
오랜 침묵 끝에, 구은정이 구택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엔, 내가 장담할게. 다시는 임유진을 상처 입히지 않겠다고.”구택은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그건 유진이가 다시 너한테 상처받을 기회를 줄지 말지에 달렸겠지?”은정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만약 어느 날 소희가 널 잊어버린다면, 그래서 소희가 널 잊은 후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거라고 생각해?”구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정은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약간 미간을 좁혔다. 마치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소희가 너랑 함께 임무에 다녀온 후, 나에게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그 말에 구택이 즉시 은정을 바라보았다.이에 은정은 말을 이었다.“소희가 원래 말수가 적은 건 알지? 하지만 나한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속마음을 터놓곤 했어. 내가 반쯤은 소희의 스승이었으니까.”구택은 무심한 듯 물었다.“그때 무슨 얘길 했는데?”그러나 은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고, 구택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유진이 일은 걔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둘 거야. 난 간섭하지 않을 거니까.”은정은 혀끝으로 어금니를 밀며 씁쓸하게 웃었다.“소희가 부상을 입고 두 달 동안 치료했잖아. 그 후 훈련소로 돌아갔을 때, 한 번은 대화 중에 그 임무 이야기가 나왔어.”“그때 소희가 말하더라. 그 임무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구택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리고?”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더 있었을 거 같은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나. 기억나면 나중에 말해줄게.”구택이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혹시 소희의 과거 이야기를 흘려주면서 나한테 압박을 넣으려는 거 아니야? 결혼식 때 날 상대로 복수라도 하려고?”은정은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말했다.“이제 유진이를 쫓아다닐 건데, 그런 거 신경이나 쓰겠어?”구택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무심히 물었다.“왜 이제서야 깨달은 거지?”은정은 장미 덩굴을 바라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장효성이 출장 갔다가 돌아왔거든요. 오늘 우리 집에 들른다고 했어요.”여진구는 오늘 일정을 확인하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도 저녁에 갈게. 술이랑 음료, 저녁까지 내가 다 챙길게!”유진은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그럼 연하랑 효성한테 단톡방에서 말할게요.”진구는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그런데 요즘 그 이웃, 또 널 귀찮게 하진 않았어? 남자야, 여자야? 얼굴은 봤어?”“그 사람은...”유진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온 사람은 기획팀 부장이었고, 업무 보고를 하러 온 참이었다.유진은 잡담을 멈추고, 진구에게 먼저 일 보라고 한 뒤, 자리를 나섰다. 사장실에서 나와 걸으면서 유진은 속으로 생각했다.‘이웃이 구은정 삼촌이라는 걸 선배가 알면 어떤 반응일까?’오후.은정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 약속이 생겨서 좀 늦게 들어간다며, 애옹이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은정은 예전부터 애옹이를 돌보던 도우미 아주머니를 그만두게 했고, 그 뒤로는 그가 자리를 비우면 애옹이를 돌보는 일은 자연스럽게 유진의 몫이 되었다.마침 오늘은 집에 친구들이 오기로 되어 있어 은정에게 수업할 시간도 없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유진은 메시지를 보냈다.[퇴근하고 애옹이 우리 집으로 데려갈게요. 집에 올 때 데리러 오세요.]은정이 보냈다.[응. 저녁은 밖에서 먹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유진은 은정이 보낸 메시지를 보며, 다시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곧 누가 다가와 업무 얘기를 꺼냈고,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은정에게 답장하는 것도 잊어버렸다.퇴근 후, 진구를 포함한 몇 명이 유진의 집에서 모였다. 해외에서 돌아온 효성이 모두에게 선물을 준비해 왔고, 진구까지 빠짐없이 챙겼다.유진은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앉아 있으라 하고, 옆집에서 애옹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먼저 간식을 먹이며 애옹이를 달랬다.“고양이 너무 귀여워! 어디서 데려온 거야?”고양이를 좋아하는 연하가 애옹이
“열나는 거 아니야?”구은정이 손을 들어 임유진의 이마에 닿으려 했다. 유진은 고개를 저으려다, 따뜻한 손바닥이 이마에 닿는 순간 겁이 나서 몸을 멈췄다.“괜찮아. 열은 없네.”은정은 손을 거두며, 자연스럽게 덧붙였다.“내일이나 모레 비 온대. 날도 추워질 테니까 출근할 땐 따뜻하게 입고.”“네.”유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들어가.”은정은 유진의 얼굴빛이 아직도 어두워 보이자,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재채기라는 건 누군가에게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제어할 수 없는 거니까, 굳이 미안해할 필요 없어.”그는 자기 책을 정리하면서 툭 던지듯 물었다.“내일 아침엔 뭐 먹고 싶어?”은정의 담담한 태도 덕분에 유진도 점차 긴장이 풀렸다. 조금 전의 상황도 잊은 듯 웃으며 말했다.“건너편 가게의 호떡이랑, 만두요! 치즈 들어간 거로!”은정은 잔잔하게 웃었다.“알겠어. 일찍 자. 내일 아침에 내가 사다 줄게.”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 삼촌도 일찍 쉬세요!”애옹이는 눈을 반쯤 뜬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가 나가는 걸 보고 아쉬운 듯 두어 번 울었다.“착하지, 얼른 자. 내일 보자!”유진은 애옹이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유진의 표정은 생기 있었고, 목소리는 맑고 귀에 감겼다.애옹이를 달랜 후, 유진은 은정에게 미소로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집으로 돌아갔다.이번엔 은정이 현관까지 배웅하지 않았다. 앉아 있을 때야 그나마 괜찮지만, 함께 일어나면 서로 민망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괜히 유진이 다음에 또 오기 꺼려질 수도 있었으니까.문이 닫히고 나서야, 은정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얼음물 병을 들어 반쯤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조금 전 유진이 당황하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웃음이 났다. 애옹이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와 하품하며 몸을 늘어뜨렸다. 그는 애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유진의 생각뿐이었다.조금 전 그녀가 나갔을 뿐인데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도 유진의 귀 끝은 여전히 붉었다.마침 은정이 자연산 농어를 쪄서 내왔는데, 아까 유진에게 다가왔던 것도 이걸 간장조림으로 할지, 찜으로 할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유진은 찜으로 조리된 생선을 한 입 먹어보았다. 살점이 부드럽고 신선해서 비린내 하나 없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생선 냄새 너무 좋아요!”은정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애옹이 간식보다 더 맛있어?”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이 부풀 정도로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애옹이 간식이 더 맛있거든요!”은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다음엔 애옹이 간식 살 때, 두 봉지 사야겠네.”얼굴에 철판 깐 지 오래라고 생각한 유진도 결국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개를 든 은정은, 조금 전까지 웃음이 어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며,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식사가 끝나고 나자, 은정이 식탁을 치우고, 유진도 자청해서 거들었다. 남은 재료들을 냉장고에 정리한 뒤, 유진은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는 주방 쪽으로 돌아섰다.유진은 등을 조리대에 기대고 애옹이를 품에 안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은정이 소매를 걷은 채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은은한 회색 셔츠의 소매가 팔꿈치까지 올라가 있었고, 전완근이 드러났다. 그의 동작은 느긋하면서도 단정했고, 어딘가 나른한 멋이 묻어났다.맞춤형 정장 바지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단정하면서도 날렵했다. 은정의 길고 탄탄한 다리와 넓은 어깨, 단단한 상체가 균형을 이룬 체형이 눈에 띄었다.예전에 유진은 방연하에게 왜 그렇게 구은정을 좋아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방연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거칠고 야성미가 넘치면서도 퇴폐적인 페로몬이 있다며 능글맞게 웃었다.유진은 그 말을 듣고 비웃었었다. 페로몬은 무슨, 그냥 몸이 좋은 거라고 하자 연하는 유진이 잘 몰라서 그렇다며 웃
“그러니까, 넌 왜 받은 거야?”은정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한 번 받으면, 그 뜻을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계속 오해하게 만들겠다는 거지?”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이제 알았어요. 다음에 여진구 선배한테 확실히 말하고, 더는 안 받을게요.”은정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칼을 들어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그래. 그럼 이제 나가서 놀아.”유진은 주방을 나가려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췄다.“잠깐만요, 삼촌, 그러면 삼촌은요?”은정은 손을 멈추고 천천히 유진을 돌아보았다.“뭐?”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나한테 잘해주는 이유는 뭐예요? 삼촌도 나한테 무슨 목적 있는 거 아니죠?”은정은 잠시 말이 없다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네가 나한테 수업해 주니까.”이에 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와, 진짜 솔직하네.”은정은 단호하게 말했다.“너한테는 가식 떨 필요 없으니까.”유진은 은정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애써 웃으며 넘겼다.‘아냐, 원래 저 사람 성격이 저런 거야.’그러고는 애옹이를 꼭 안고 거실로 돌아갔다.유진은 퇴근길에 들른 펫숍에서 애옹이의 새 옷과 장난감을 몇 개 사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애옹이에게 한 벌씩 입혀 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애옹이는 무척 순순히 유진에게 협조했다.마지막으로 핑크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혔을 때, 은정이 부엌에서 접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애옹이의 차림을 보고, 한순간 멈칫했다.유진은 애옹이를 들어 올려 은정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어때요? 예쁘죠?”은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좋으면 됐어.”그러자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이건 철저히 삼촌 같은 빠꾸 없는 상남자의 취향에 맞춘 코디예요.” 그러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빠꾸 없는 상남자 취향?”“그렇죠! 핑크색, 반짝이, 공주풍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유진이 장난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평소처럼 임진은 부서 동료들과 함께 야근했다. 유진은 자기 일을 사랑했고, 늦게까지 일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시간을 확인하게 되었다.창밖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유난히 지루하게 느껴졌다.‘이거 혹시 애옹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걸까?’마침내 모든 업무를 마치고 퇴근할 시간이 되자,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짐을 챙겼다.그때, 여진구가 다가와 삼계탕이 담긴 보온 용기를 건넸다.“우리 엄마가 오후에 보내주신 거야. 저녁에 가서 먹어.”그러나 유진은 얼른 손을 저었다.“아니요, 선배 어머니가 주신 건데 제가 어떻게 받아요?”“뭐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해?”진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농담이야. 두 개 보내주셨거든. 하나는 너 주려고 한 거야. 오후에 너무 바빠서 이제야 전해주네.”그 말에 유진은 그제야 받아들었다.“그럼, 이모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줘요!”“무슨 새삼스럽게.”진구는 일할 때 끼는 얇은 금테 안경을 썼는데, 더 똑똑하고 멋있어 보였다.“집에 가서 따뜻하게 먹어.”“알겠어요!”유진은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진구는 유진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한편, 옆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진소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가방을 챙겨 다가왔다.“사장님, 오늘 차 안 가져왔어요. 혹시 태워다 주실 수 있을까요?”그러자 진구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회사 근처에 집 구한다고 하지 않았나요?”그 말에 소혜는 잠시 당황했지만, 빠르게 대답했다.“어머니가 오늘은 집으로 오라고 하셨어요!”진구의 태도는 이미 냉대하는 태도였다.“난 아직 볼 일이 있어서요. 오늘 택시비 회사에서 처리해 줄 테니까 그렇게 가요.”진구는 말을 끝내고 곧장 사무실로 돌아갔다.소혜는 주변을 지나가는 동료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걸 보며 민망한 듯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유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옆집 문이 열렸
은정은 안으로 들어오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양치 끝내고 와서 아침 먹어.”임유진은 그의 짙은 색 운동복 차림을 보고, 칫솔을 문 채로 웅얼거렸다.“조깅 갔다 왔어요?”“응.”은정은 식탁 쪽으로 걸어가며 무심히 물었다.“내일 같이 갈래? 천천히 걸어도 돼.”그러나 유진은 단호하게 거부했다.“싫어요! 난 더 자야 한단 말이에요.”유진이 이 동네로 이사 온 이유는 출근 시간을 줄이고 아침잠을 더 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새벽부터 조깅이라니? 그건 차라리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이에 은정이 낮게 웃었다.“게으름뱅이.”은정의 목소리는 어딘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에 유진은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았다.‘이거 뭐야?’유진은 그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돌려 애옹이를 쓰다듬고는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 앞에서 거울을 보며 양치하다 말고 생각했다.‘뭔가 이상한데?’하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양치와 세수를 마친 후, 유진은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식탁으로 나왔다.은정은 마치 자기 집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고, 유진은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유진이 좋아하는 샌드위치와 군만두였다.“오! 아침 메뉴 마음에 드네요!”애옹이는 테이블 위로 올라와 유진을 바라보자, 유진은 샌드위치에서 햄을 꺼내 애옹이에게 건넸다. 그리고 은정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든 공간에서, 유진이 밝은 얼굴로 애옹이를 쓰다듬으며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은정은 문득 상상했다.‘만약 우리가 가족이 되어 아이가 있었다면?’이런 맑은 아침, 자신이 아침을 사 오면 유진이 똑같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그러다가 유진이 은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왜요? 애옹이한테 주면 안 돼요?”이에 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담담하게 말했다.“아니야. 괜찮아.”유진은 샌드위치를 조금 더 먹인 후,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한 모금 마
은정은 유진의 행동을 지켜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네가 가끔 애옹이를 돌봐줘. 퇴근하고 일찍 들어오면 밥도 챙겨주고. 이따가 출입문 비밀번호를 네 폰으로 보내줄게.”유진은 애옹이를 너무 좋아해서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좋아요!”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렇게 하자.”사실 은정은 유진과 같은 날 이 집을 계약했다. 원래는 유진이 혹시라도 좋지 않은 이웃을 만나면 곤란할까 봐 옆집을 함께 구매했던 것이다. 애초에 이곳에 살 계획은 없었다.하지만 가족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구은태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돌아온 이상, 회사를 제대로 맡고 가족 곁에 머물겠다고.그러나 서선영 모녀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은정의 인내심을 시험했고, 그는 결국 이곳으로 나오는 명분을 얻었다.식사가 끝난 후, 유진은 스스로 식탁을 정리하고는 말했다.“그럼 전 이제 가볼게요.”은정은 시계를 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서 일찍 자.”“알겠어요!”유진은 해맑게 웃으며 애옹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애옹아, 잘 있어!”하지만 애옹이는 유진의 다리를 끌어안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이에 유진은 웃으며 말했다.“너 정말 애교가 많구나!”은정은 몸을 숙여 애옹이를 들어 올렸다. 그의 깊은 눈빛이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얘는 원래 낯을 많이 가려. 한 번 상처받은 적이 있어서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아. 그런데 너한테만 이렇게 굴어. 넌 예외야.”유진은 기뻐하며 말했다.“봐요, 역시 우리 궁합이 잘 맞는다니까요!”그 말에 은정은 살짝 웃었다.“그래, 너희는 특별한 인연이 있나 봐.”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득 애옹이가 혹시 은정의 여자친구가 키우던 고양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성격을 봤을 때, 스스로 고양이를 키울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냥, 어떤 상처도 들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럼 전 진짜 가볼게요!”유진은 노트북과
임유진은 손을 뻗어 저녁을 집어 들었다.“괜찮아요. 집에 가서 데워 먹으면 돼요!”하지만 구은정이 유진의 손을 막아섰다.“차가워진 건 그냥 먹지 마. 내가 뭐 좀 만들어 줄게.”“그럴 필요까지야!”유진은 조심스럽게 거절했지만, 은정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걸어갔다.“괜찮아. 나도 아직 저녁 안 먹었어. 그리고 너 오늘 하루 종일 애옹이를 봐줬잖아. 그 정도는 고맙다고 해야지.”유진은 따라가면서 무심결에 물었다.“구은정 아니, 삼촌! 요리도 할 줄 알아요?”말을 내뱉고 나서야 유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은정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저녁을 가져다줬을 때, 유진은 그걸 별 의심 없이 먹었었다. 이제야 문득 궁금해졌다. 유진은 은정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처음부터 옆집에 내가 이사 온 거 알고 있었던 거예요?”은정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딱 잘라 말했다.“아니.”“그런데 왜 저녁을 챙겨 줬어요?”은정의 냉장고 문을 여는 손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유진을 돌아보며 대답했다.“그날 관리사무소 직원이 와서 새 이웃이 이사 왔다고 하더라고. 이웃 관계 잘 만들어 놓으려고 챙긴 거지.”“아, 그런 거였구나!”유진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가 준 디저트는 봤어요?”“응. 먹었어.”유진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즉흥적으로 집을 사기로 결심했는데, 옆집이 알고 보니 은정이었다. 그것도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로 음식까지 주고받았다는 게 이상하면서도 묘했다.은정이 냉장고를 뒤지는 모습을 보며 유진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뭐 만들어 줄 건데요?”유진이 처음으로 이사 온 첫날부터, 은정은 유진이 스스로 밥을 해 먹을 줄 모를 거라고 예상하여, 미리 준비해서 보냈다. 그리고서는 은정은 며칠동안 스스로 밥을 해 먹지 않아, 주방에는 계란 몇 개와 토마토 2개 그리고 냉동된 인스턴트 식품들이 있었다.은정은 고개를 돌려 유진에게 물었다.“요 며칠 뭐 먹
애옹이는 밥을 다 먹고도 임유진을 방해하지 않았다. 카펫 위에서 공을 가지고 놀다가, 한참 후에는 유진의 무릎 위에 올라와 셔츠 단추를 장난스럽게 건드렸다.한 시간이 지나, 유진은 작업을 마쳤지만 애옹이의 주인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졸음에 취해 있던 애옹이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크고 동그란 눈망울이 간절한 듯 유진을 올려다보았다.‘이런 눈빛을 보면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잖아.’결국, 유진은 다시 자리에 앉아 애옹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안 가. 네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러니까 얌전히 자.”...한 시간 후, 구은정은 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엘리베이터가 27층에 멈추자, 그는 걸음을 느리게 했다. 곧 마주할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면서.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현관에 놓인 크림색 하이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이내 그의 짙은 눈빛이 순간 부드러워졌다.은정은 재킷을 벗고, 손을 들어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실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살짝 멈춰 섰다.방 안은 은은한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소파 한쪽에 기댄 채, 유진이 곤히 잠들어 있었고, 품에는 애옹이를 꼭 안고 있었다.냉방이 잘 되어 있어 그런지, 유진은 몸을 움츠리고 작은 체구로 고양이를 품에 감쌌다.은정은 조용히 다가가 소파 앞에 앉아 유진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얼굴, 살짝 벌어진 연한 핑크빛 입술. 가슴 한편이 묘하게 간질거렸다.‘얘는 대체 얼마나 경계심이 없는 거야? 남의 집에서 이렇게 깊이 잠들다니! 당장 깨워서 한 소리 해야겠네.’그 순간, 아마도 은정의 기운을 감지했는지 유진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살짝 흐릿한 눈동자가 천천히 초점을 맞추더니,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은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났어?”유진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