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 7시 정각 소희는 전위 호텔 앞에 나타났다.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리자 소희는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아빠 소정인이었다. [소희야, 아빠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차가 좀 막히네. 먼저 들어가있어.]소희는 발걸음을 늦추며 이따 임구택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까 생각하고 있었다.결혼 3년 동안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임구택이 이 결혼을 동의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부한다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그렇다고 임구택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과거 소씨 가문의 회사가 위기를 맞자 뻔뻔하게 임씨 가문을 찾아가 혼인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였고, 당시 임씨 가문의 장남은 이미 결혼을 한 터라 자연스레 그 약속은 차남 임구택이 이행하게 되었다. 그가 내키지 않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임씨 가문은 당연히 소씨 가문에 좌지우지 당하지만은 않았다. 예물로 50억 원을 건네어 소씨 가문이 난관을 이겨내게 도우면서도 조건을 제시했다. 3년 뒤에 이 혼사가 자동 해지되는 것으로.3년 전, 그녀는 아직 법정 결혼 연령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대리인이 가서 혼인신고를 마쳤다. 결혼하자마자 임구택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결혼 해지를 석 달 앞두고 돌아왔다. 결혼을 거부한다는 태도가 너무나도 뚜렷했다.하필이면 오늘,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 때문에 그녀를 앞세워 다시 한번 그를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소희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생각하였다. “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 아내에요!”그가 그녀를 거들떠보기나 할까?듣건대 임구택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강성의 유명한 악질이었다고 한다. 강성의 흑과 백을 모두 통솔하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매섭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지만 며칠 전 TV의 경제 채널에서 임구택을 본 적이 있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명품 양복을 입고, 거만하면서도 우아하고 듬직해 보였다.그녀는
그의 손에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일을 마친 후 돈을 지불하다니. 그녀는 그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남자가 냉담한 얼굴을 하고 발코니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과연 창문이 열려 있었다.여기는 층고가 높아서 3층이 4층 높이일 텐데 그녀는 어떻게 뛰어내렸을까?그가 그렇게 무서웠나?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칠 만큼?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물을 끼얹은 듯 청량한 바람이지만 남자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화는 식히지 못하였다. 이 여인은 만 원으로 그를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일이 끝난 후에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잡히기만 해봐! ......택시에 앉은 소희가 재채기를 하자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괜찮아요?”이렇게 예쁘게 생겨서 홀딱 젖어있다니, 딱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소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학생이죠? 밖에 혼자 다닐 때 각별히 조심해야 되요.”“네, 감사합니다. 기사님.”소희는 대답하고 휴대폰을 꺼내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천위 호텔의 7시와 9시경에 내가 찍힌 CCTV 기록은 모두 없애!”“ok!” 상대방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남자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려 퍼졌다. 소희는 오늘 임구택과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따위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다만 임구택이 그녀가 왔었다는 사실을 모르게만 하고 싶었다.운해로에서 내리면서 소희는 뒷좌석을 적신 대가로 택시비를 두 배로 지불했다.별장으로 돌아오자 하인은 소희의 젖은 옷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작은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일이 좀 있었어요, 일단 올라가서 샤워부터 할게요.”소희는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목욕물 준비해 드릴게요.”하녀는 더 묻지 못한 채 위층으로 올라가 준비했다.몇 분 후 소희는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긴장했던 몸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머릿속이 복잡해서 머리까지 물속에 파묻고 오늘 밤에 있
소희는 멍해졌다.남자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왜 절 따라오시는 거예요? 강성대 학생이신가요?”그는 오는 길에서부터 이 여자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멈추면 그녀도 무슨 일이 있는 척 멈추더니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다.소희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내 다시 냉정을 되찾고 반문했다. “여기가 당신 집으로 가는 길인가요?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을 왜 제가 따라다닌다고 하는 거죠?”남자의 눈동자의 싸늘한 빛이 스치더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소희에게 올라오라고 눈짓했다.소희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비꼬듯 말했다. “됐어요, 오해받을 만한 행동 안할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돌아서서 계단으로 걸어갔다.그녀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며 남자의 가늘게 뜬 눈을 가렸다.소희는 임구택과 다시 마주칠까 봐 아예 계단으로 9층까지 올라갔다.회의실에 도착하니 조교가 학과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교는 그녀를 보자 잠시 기다리라고 눈짓했다.그 옆에는 몇몇 학생들도 자료를 제출하러 왔는데, 그중 한 명은 따가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소희는 못 본 척 휴대폰을 꺼내 스도쿠를 했다.5분도 안 돼 한 판을 풀고 나니 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돌아온 지 얼마 안 됐죠? 출국한지 오래됐으니 돌아올 때 됐구나 싶었는데”교장선생님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교장선생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임구택도 소희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 머물지 않고 바로 지나갔다.학과장은 급히 마중 나가 교장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다.방 교장은 그에게 소개하였다. “이 분은 LS그룹의 대표이사님이십니다. 예전에 우리 학교 학생이었지요. 참, 우리 학교 여러 항목의 장학금도 임 회장님이 후원한 것입니다.”그러자 학과장은 냉큼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임구택과 악수를 나누었다. “오늘 마침 학생들에게 장학금 신청 서류를 제출
임구택은 그날 창문에서 뛰어내린 여자를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명우는 제일 먼저 천위 호텔의 CCTV를 조사했다.이상하게도 7시와 9시 두 시간대 모두 공백 상태였고 천위 호텔의 보안요원조차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당시 인터넷이 끊겼을 것이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그래도 명우는 한 사람을 찾았다. 서이연.서이연은 B급 배우로 청순하고 러블리한 이미지의 노선을 걷고 있으나 줄곧 뜨지 못했다. 어제 저녁 6시 50분쯤 그녀가 천위 호텔에 들어가 연풍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CCTV에서 볼 수 있었다. 이후 CCTV 기록에는 공백이 있어 그녀가 어느 방으로 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9시 5분경 서이연의 매니저가 그녀를 부축하고 연풍관 밖에 나타났는데, 그녀는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그 뒤로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명우는 서이연이 어떤 차를 타고 떠났는지 몰라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알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젯밤 그녀는 왼쪽 다리를 수술했다.명우는 이미 차트를 확인했는데 낙상이었다.그날 밤, 강성의대 부속병원.VIP706호. 병상에 누워있는 여인은 두 손을 맞잡고 불안한 표정으로 맞은 켠 소파에 앉은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임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다리 어떻게 다쳤어요?” 임구택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서이연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반쯤 늘어뜨린 눈꺼풀 아래 눈물을 반짝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 대표님과 관련이 있나요?”“숨길 필요 없어요, 사람을 시켜 이미 CCTV를 확인했으니까. 어젯밤 9시쯤 매니저가 당신을 부축해서 차를 타고 떠날 때 다리는 이미 부러져 있었죠. 그날 밤 제 방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맞나요?” 임구택의 어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손님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천위 호텔은 카메라가 객실 창문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이연이 어디서 뛰어내렸는지는 볼 수 없지만,
여인이 달려들며 손에 들고 있던 꽃들은 소희의 몸에 던져졌다. 힘껏 소희를 뒤로 밀치고는 소연을 품에 끌어안았다.진원은 긴장한 채 소연의 몸을 살펴보며 물었다. “다친 거야? 혹시 피났어? 어디 아프니?”이슬을 머금은 꽃잎이 온 바닥에 흩어지고 꽃의 가시가 소희의 목덜미를 찔러 따끔거렸다. 그녀는 여인의 긴장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소정인은 이내 다가와 소희에게 물었다.“안 다쳤니?”진원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무서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소연이를 죽이려는 거니?”소희는 여인의 눈에 비친 혐오와 원한을 보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소연은 소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급히 진원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엄마, 오해예요. 제가 언니한테 머리 좀 잘라달라고 했어요. 언니는 절 다치게 하지 않았어요.”“그렇구나!”소정인은 ‘하하’하고 웃으며 진원을 원망했다. “당신은 항상 너무 급해서 문제야.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화부터 낸단 말이야. 당신 때문에 소희 옷이 다 더러워졌잖아.”진원은 자신이 소희를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무안해하며 변명했다. “들어오자마자 소희가 가위를 소연이의 목에 대고 있길래... 머리를 자르는 건줄도 모르고...”“그만 해!”소정인은 진원에게 눈짓을 하고는 소연에게 말했다. “언니 데려고 가서 옷 좀 갈아입혀. 옷이 다 더러워졌네.”“언니, 이리 와!”소연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희는 어깨의 꽃잎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2층 침실로 들어가자 소연이 사과했다. “언니, 정말 미안해, 엄마가 이 시간에 돌아올 줄 몰랐어. 나 때문에 언니가 다쳤네.”“너 때문이 아니야!”소희의 순수한 얼굴에는 한 줄기 미소를 띠고 있었다.소연은 옷방에 가서 흰색 티셔츠를 가져와 소파에 놓았다. “언니, 이건 새거야, 한 번도 안 입었어. 옷 갈아입어, 난 내려가서 기다릴게.”“응.”소연이 문을 닫자 소희는 소파 위의 옷을 보며 안색이 흐려졌다. 한쪽에서는 머리를 잘라달라
임구택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손에든 서류를 보고 있었다.임유림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 “소희야, 과외하러 온 거야?”그녀는 소희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곳이 부자동네여서 당연히 과외 하려 온 줄 알았다.소희는 웃어 보였다.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그녀는 임유림이 임구택 형의 딸, 즉 그의 조카라는 걸 어떻게 잊었단 말인가?거의 3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최근에만 일주일에 3번을 만났다. 그들을 주선해 준 중매쟁이가 드디어 깨어난 건가요?임유림은 돌아보며 소희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분은 내 둘째 삼촌이야!”소희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임구택은 목소리가 익숙한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또 있어 눈을 가늘게 떴다.소희는 손에 들고 있는 우산 손잡이를 꽉 쥔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임유림은 열정적으로 소희와 대화를 나눴다. “주경이가 고석 좋아하는 거 아니야?”소희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답하였다. “그런 것 같아!”소희는 무의식적으로 임구택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나와 고석은 그냥 친구야, 그가 누구와 함께 있는 나랑 상관없어.임유림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눈치를 보내니 소희의 마음속이 불안해졌다. 그녀가 결혼을 합의 때문에 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그녀는 결혼한 신분이다.시내로 들어서자 앞쪽에 사고가 나 차가 막혔다. 임유림은 고픈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길 언제 뚫리지, 배고픈데 먼저 밥 먹으러 갈까?”소희는 답혔다. “나 여기서 내릴게 나 학교 가야 해.”“학교는 무슨, 점심인데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임유림은 이미 스스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던 임구택은 시계를 보고 명우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세 사람은 프렌치 레스토랑에 들어가 앉았다. 임유림은 소희가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와본 적이 없을까 봐 소희에게 물어본 뒤 대신 주문해 주었다.임유림이 음식을 주문하고 화장실에 가자 자리에는 임구택과 소희 둘만 남았다.소
임구택은 의아한 듯 그녀를 한 번 더 보았다.때마침 임유림이 돌아오자 그녀는 소희 옆에 앉아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동창 만나서 잠시 얘기하다 왔어.”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고 나서 세 사람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임유림은 소희와 함께 학교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었다.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이 출발할 때 성연희 일행을 만났다. 성연희도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나오다가 문 앞에서 마주쳤지만 두 사람은 모르는 척하며 스쳐 지나갔다.두 명의 사장님은 임구택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밖은 이미 비가 그치고 길도 뚫린 상태였다. 명우가 차를 몰고 세 사람을 태웠다.“소희야, 어디로 가?” 조수석에 앉아 있던 임유림이 물었다.“가는 길이면 강성대 앞에 세워주면 돼.”“가는 길이라 문제없을 거예요.” “우리 삼촌은 말도 참 예쁘게 하네.” 임유림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소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전에 했던 독설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 단순하게 믿었을 것이다.학교에서 잠시 떨어진 곳에서 임유림과 소희는 잡담을 나누고 임구택은 옆에 앉아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오늘 두 명의 부부는 같은 차에 동승했고 소희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차는 학교 입구 앞에서 멈추었고 소희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유림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유림아.”“뭘, 다음에 밀크티 한잔 사줘.” 임유림은 눈매가 날렵하면서 귀여웠다.소희는 웃으며 동의했고 자신의 우산과 가방을 들고 내렸다. “감사합니다, 임 선생님.”임구택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네.”소희는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며 임유림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소희는 버스정류장으로 가 버스를 기다렸다.차에서 유림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돌아서며 임구택에게 말했다. “삼촌, 저 소희에게 유민이의 가정교사를 맡기고 싶어요.”그녀의 부모님은 자주 집을 비우셨다. 며칠 전에는 런던 경제 세미나에 참석하러 갔고, 이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가셨다. 유민이의 가정교사는 핑계를 대고
임구택은 그녀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희고 부드러우며, 붉은빛이 돌았다. 마치 구름이 노을빛을 머금은 것 같았고 붉은빛은 그녀를 더욱 앳되게 보이게 해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처럼 보였다.그는 데이비드를 물러나게 한 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떨어져도 좋아요.”소희는 일단 한 번 돌아보고 나서야 그에게서 떨어졌고 바로 남자 뒤에 숨어서 강아지에 눈을 떼지 못했다.남자는 가볍게 웃은 뒤 데이비드에게 걸어갔다.그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남자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는 게 마치 봄에 내리는 가랑비의 냄새 같았다.남자는 데이비드에게 다가가 목을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데이비드는 보통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소희는 남자의 말에 속뜻을 헤아렸다. 무슨 뜻이야?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그녀는 그 개를 보고나니 그제야 셰퍼드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셰퍼드보다 더 커서 사람을 놀래키기엔 충분해 보였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그의 담담한 태도를 흉내 내며 말했다. “익숙한 말이네요, 애꿎은 행인이 개한테 물렸다는 소식은 뉴스에서 많이 접했어요.”임구택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나이가 어릴 땐 이가 아주 날카롭죠!”소희가 막 말을 하려고 할 때 임유림이 웃음을 띠며 내려왔다. “소희야 너 왔구나!”그녀는 연한 화장을 한 채 내려와 소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부모님은 안 계시고 평소엔 집에 거의 사람이 없어. 여긴 우리 삼촌 어제 봤지?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소희는 임구택을 바라보며 파리를 먹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오므렸다.임구택은 아까의 일을 복수하듯 담담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어른을 만났는데 인사도 안하나요? 인사예의도 모르면서 가정교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임유림은 임구택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른 채 임구택에게 눈치를 줬고 임구택은 못 본 척했다.소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이빨 사이로 두 글자를 짜내는 듯했다. “삼...촌!”임구택은 폼을 잡으며 데이비드를 데리고 소파에 앉았
우청아는 이틀 동안 야근하며 거의 두 번의 밤을 꼬박 새웠다. 그로 인해 장시원이 또다시 화를 낼 뻔했지만, 결국 월요일 출근 전까지 도면을 완성해 냈다.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고명기가 먼저 도면을 검토했다. 그러고는 점점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틀 만에 초안을 이 정도로 완성하다니, 청아 씨, 정말 대단한데요!”청아는 눈가의 핏줄이 드러난 것을 가리키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이게 어디 이틀 만에 한 거예요. 어젯밤엔 새벽 네 시까지 작업했어요.”청아는 겨우 세 시간만 잠을 잤다. 이에 시원은 화가 나서 배강에게 전화를 걸어, 콜드스프링 건축회사를 통째로 인수하겠다고 했었다.그래서 청아는 한참 동안 그를 달래야 겨우 막을 수 있었다. 그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났다.고명기는 고개를 들며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그런 남자친구가 있으면 여자들은 굳이 열심히 살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요.”청아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입꼬리를 올리자. 그녀의 미소 속에는 깊은 보조개가 살짝 드러났다.“모두가 자기만의 이상과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거죠. 사랑이 전부는 아니잖아요.”명기는 청아의 냉철하고 깔끔한 태도를 보며 감탄했다. 그는 도면을 청아에게 돌려주며 말했다.“내가 보기엔 괜찮아. 우선 심하 회사 쪽 사람들에게 보여줘. 설령 수정할 게 있어도 많진 않을 거야.”청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먼저 돌아가서 세부 사항을 조금 더 손보며 심하 회사 쪽 사람들을 기다릴게요.”도면을 들고 돌아온 지 약 30분 후, 송미현의 비서가 그녀를 찾아와 회의를 소집한다고 했다. 이에 청아는 심하 프로젝트의 도면을 가지고 회의실로 향했다.청아는 회의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세부 사항을 다시 확인했다. 그때 이지현이 커피 한 잔을 들고 와서 그녀에게 건네며 투덜댔다.“어젯밤에 남친이랑 심야 영화를 보고, 야식까지 먹었더니 집에 돌아간 게 거의 새벽 세 시였어요.”“지금 너무 졸려서 눈도 제대로 안 떠져요. 내 이 판
이문이 옆에서 낄낄대며 말했다.“형님, 혹시 고양이 무서워하시는 거 아니에요? 형님 표정이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은데요?”다른 사람들도 폭소를 터뜨렸고, 서인은 이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이 고양이, 그냥 집으로 데려가면 될 걸 굳이 여기까지 왜 가져온 거야?”유진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여기가 이 고양이의 집이에요! 아직 오빠들을 본 적이 없잖아요!”서인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임유진, 여기 동물원인 줄 아는 거야?”예전에도 유진이 길에서 야옹이를 데려오더니, 이번엔 또 애옹이를 들고 왔다. 자신은 이제 동물원장이라도 되는 걸까?유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도 이러고 싶진 않았어요. 근데 임유민이 그러잖아요. 소희랑 임신 준비 중이라서 새로 애완동물을 못 키운대요.”“그렇다고 제가 이 고양이를 계속 동물병원에 둘 수도 없고요.”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기 어린 빛을 띄운 눈길로 서인을 바라봤다.“그리고, 소희의 절친이자 동료로서, 사장님이 소희 언니를 위해서라면 조금 희생해야 하지 않을까요?”서인은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남의 힘 빌리는 기술까지 배운 거야?”유진은 그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고양이를 안은 채 뒷마당으로 향하며 말했다.“저는 야옹이를 만나게 해주러 가요!”서인이 고개를 돌리자, 이문과 현빈을 비롯한 몇몇 직원들이 그 장면을 보고 몰래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아침부터 뭐 하는 거야! 각자 맡은 일이나 하러 가!”그 말에 직원들은 서둘러 흩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려동물 가게 직원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3층짜리 나무로 된 고양이 집과 함께 고양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모든 도구와 사료, 모래, 장난감을 가져왔다.유진은 직원들에게 고양이 집을 야옹이가 있는 자리 맞은편에 설치하도록 지시했다.3층으로 된 나무 고양이 집은 유진의 키와 비슷할 정도로 높았다.
장시원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하루 종일 쌓였던 우청아의 피로를 단숨에 사라지게 했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아!”시원은 차를 출발시키며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가만히 감쌌다. 그러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오늘 밤은 어머니 댁에서 묵자. 내일은 주말이니까, 요요를 데리고 바다로 나가서 낚시하자.” 지난번에 요요가 제대로 못 놀아서 아쉬웠잖아. 이번에는 실컷 즐기게 해 주자.”요즘 청아는 회사 일로 바쁘게 지냈기에. 시원은 그녀에게 잠시라도 여유를 찾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청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를 바라보았다.“내일은 같이 못 가. 회사에 나가서 일해야 해.”시원의 이마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내일도 출근해야 해? 대체 얼마나 일을 하는 거야? 이렇게 바빠?”청아는 차분히 설명했다.“갑자기 들어온 프로젝트가 있어. 월요일까지 도면을 완성해야 해.”시원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청아는 시원의 손을 뒤집어 꼭 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청아의 맑은 눈동자가 애틋하게 그를 응시했다.“화났어? 화내지 마. 다음 주에는 큰일이 없을 거야. 그때 다시 바다에 나가자, 응?”시원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화난 거 아니야.”차가 신호 대기 중에 멈추자, 시원은 손을 들어 청아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냥 네가 너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그래. 나도 너랑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야.”청아의 눈이 반짝이며 촉촉해졌다.“알아.”시원의 눈빛이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걱정하지 마. 내 와이프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걸 어떻게 안 도와줄 수 있겠어?”시원의 와이프라는 말에 청아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 그녀는 시원의 손을 툭 치며 돌아섰지만, 마음속에는 따뜻함이 가득 찼다. 세상 그 무엇도 그의 지지만큼 청아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것은 없었다.시원은 청아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힘이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를 깊이 바라봤다.“그
“좋죠!”성우준을 배웅한 뒤, 고명기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에 송미현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청아 씨, 정말 고생 많았어요. 내가 미리 알아봤는데, 성우준 대표님 프로젝트는 일정이 굉장히 빠듯하더라고요.”“우리가 시간에서 우위를 점해야 이 협업을 따낼 수 있었어요.”“청아 씨가 하고 있는 일은 잠시 멈추고, 시간을 비워서 성우준 사장님 설계안을 우선적으로 진행해줘요. 이지현 씨와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게요.”그 말에 명기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내일은 토요일이에요. 사전에 준비도 없었고, 설령 청아 씨가 주말에 쉬지 않고 일한다고 해도, 도면을 하루 만에 완성하는 건 불가능해요.”“게다가 다른 직원들까지 함께 야근하게 한다면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고요.”그러나 미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그럼 어쩌죠? 이미 제가 성우준 사장님께 약속을 드렸는데요!”그 말에 명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송미현 팀장님, 약속하시기 전에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셨던 건가요?”이에 미현은 차갑게 응수했다.“저도 회사 이익을 위해서 한 거예요. 성우준 사장님 같은 고객을 붙잡아 두고 싶어서요.”옆에 있던 고급 디자이너인 동영배가 중재하며 말했다.“저는 내일 일정이 없으니까, 청아 씨와 함께 야근해서 데이터 작업을 도와드리죠.”청아는 명기가 자신 때문에 미현과 다투는 걸 원치 않았기에 차분하게 말했다.“회사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죠. 이미 성우준 사장님께 약속을 드렸으니 월요일까지 설계안을 완성해서 드리죠.”미현은 곧장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청아 씨. 청아 씨가 회사에 헌신한 건 제가 잊지 않을게요.”청아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감사드려요, 송미현 팀장님.”회의실을 나선 뒤, 명기는 청아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송미현 팀장, 저건 일부러 그런 거예요.”이에 청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요즘 팀장님이 제가 스승님과 어떤 관계인지 파악한 뒤로 일부러 저를
이지현은 잠시 멍해 있다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당연히 청아 씨가 더 적합하죠. 저보다 실력이 뛰어나니까요.”송미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지현 씨는 회사에 더 오래 있었고, 경력도 많아 더 안정적이고 믿음직해 보이네요. 나는 그런 사람이 좋아요.”그 말에 지현의 얼굴에 기쁜 표정이 떠올랐다.“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해요!”미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일에 대해 부팀장님의 의견을 듣고 있어요. 아마도 그분은 청아 씨를 더 신뢰할 가능성이 있겠죠.”지현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금세 미소를 띠며 말했다.“괜찮아요. 저는 아직 젊고 기회도 많으니 더 노력할게요.”이에 미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도와줄게요.”지현은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해요!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미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가서 열심히 일하세요. 앞으로 함께 즐겁게 일해 봐요.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세요.”지현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알겠어요. 앞으로 최선을 다해 팀장님을 따를게요.”미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지현이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미현이 그녀를 불렀다.“지현 씨, 잠깐만요.”지현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고, 미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현 씨, 내가 오기 전에 회사가 고명기 부팀장님을 팀장님으로 승진시키려 했던 건 사실인가요?”그리고 지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런 얘기가 있긴 했어요.”미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그런가 보군요. 근데 제가 갑자기 내려와서 고명기 부팀장님의 자리를 차지했으니,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지현은 당황한 듯 급히 말했다.“다들 팀장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어요. 아무 문제 없고요.”미현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청아 씨는요? 청아
“이렇게 C국 본사로 돌아와 여러분과 함께 일하게 되어 정말 기뻐요. 처음 뵙게 되었으니 잘 부탁드려요.”송미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직원들은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이어 황대헌이 덧붙였다.“송미현 팀장님은 뛰어난 업무 능력을 가지고 계세요. 앞으로 회사의 실적과 명성을 한층 더 끌어올리실 분이니, 여러분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길 바랄게요.”사람들은 일제히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회의가 끝난 뒤, 직원들은 회의실을 떠나면서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이는 고소한 표정을 지으며 고명기를 지나쳤고, 어떤 이는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물론 새로운 팀장인 미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앞다투어 접근하는 사람도 있었다.청아는 자리에 돌아가기 전에 명기의 사무실로 먼저 향했다. 명기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웃으며 말했다.“위로는 필요 없어요. 난 괜찮으니까. 사실 팀장 자리는 탐나지 않았거든요. 부팀장으로 있는 게 훨씬 편해요.”“설계만 신경 쓰면 되고, 굳이 다른 일들에 신경 쓸 필요 없으니 더 좋죠.”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스승님이 괜찮으시다면 다행이에요.”그녀는 준비해 둔 선물을 꺼내며 말했다.“원래는 승진 축하 선물로 드리려고 준비한 건데,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가 있었네요. 그래도 스승님께 드릴게요. 스승님께서 평소처럼 마음 편하게 계셨으면 좋겠어요.”명기는 크게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청아 씨 말이 맞아요. 이런 일이 뭐 대수겠어요 예전처럼 지내면 되는 거죠. 고마워요.”그는 청아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가서 할 일 봐요. 난 조금 이따가 새로운 팀장님과 업무를 조율하러 갈 거라서요.”청아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스승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청아가 사무실 문을 열자 마침 미현이 문 앞에 서 있었고, 그녀는 문을 두드리려던 참이었다. 청아는 그녀를 보며 환하게 인사했다.“팀장님!”미현은 어딘지 모르게 탐색하는 눈빛을 띠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청아는 자리를 양보하며
다음 날, 장시원은 우청아와 함께 고명기를 위한 선물을 고르고는, 두 사람은 요요를 데리고 요양원으로 향했다.점심시간, 세 사람은 우임승과 함께 식사를 했다. 우임승의 얼굴빛과 기력은 훨씬 나아져 있었고, 특히 요요를 볼 때는 눈이 기쁨으로 반달처럼 휘어졌다.식사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던 중 우임승이 물었다.“네 새언니,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지?”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런 것 같아요.”청아는 한동안 우씨 집안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깊게 신경 쓰진 않았다.오후에 요양원을 떠난 뒤, 시원은 요요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청아가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다음 날 월요일, 청아는 회사로 출근했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에 동료들이 연달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청아 씨, 좋은 아침이에요!”“청아 씨, 이틀 못 봤더니 더 예뻐졌네요!”“청아 씨, 오늘 점심 내가 쏠게. 꼭 와요!”...청아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한 명씩 답례한 뒤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장씨 그룹 빌딩 설계를 성공적으로 완성한 후, 청아는 업계에서 이미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청아를 찾는 고객들은 대부분 그녀의 명성을 듣고 직접 찾아오는 이들이었다.게다가 스승인 고명기가 청아를 크게 신뢰하며 지지해 준 덕분에, 회사에서도 동료들 사이에서 청아는 매우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자리에 앉자마자, 동료들인 이지현과 몇몇 사람들이 청아 자리로 몰려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청아 씨, 오늘 아침 회의에서 고명기 부팀장님 승진 소식이 발표된다면서요? 축하해요!”청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진하시는 건 제 스승님인데, 다들 스승님께 축하를 전해야죠.”지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저희 부서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부팀장님께서 제일 아끼는 제자가 청아 씨인 건 다들 알잖아요.”“부팀장님 승진이면 청아 씨도 바로 뒤를 따라 승진할 것 같은데요?”다른 동료가 맞장구를 쳤다.“스승님 인맥이고 뭐고, 청아 씨 실력이면 이번 연말에 고급 디자
장시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우청아, 내가 널 이렇게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청아는 시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발끝을 살짝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알아. 한 시간 안에 끝낼게. 당신 먼저 자.”시원은 청아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네가 항상 말하던 개인 작업실 열겠다는 계획, 생각은 정리됐어?”청아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아직은 내가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타이밍도 좀 이른 것 같고. 지금은 그냥 스승님 밑에서 배우는 게 훨씬 즐겁고 보람차.”청아의 스승님은 고명기였다. 처음엔 농담처럼 시작된 관계였다. 고명기가 일과 디자인에 대해 그녀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자, 청아가 감사의 뜻으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때 고명기는 웃으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나를 스승님이라고 부르면 명분이 생기는 거죠.”청아는 장난삼아 스승님이라고 불렀고, 그 호칭은 그대로 굳어졌다. 지금은 회사에서도 모두가 두 사람을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알고 있었다.“그럼 빨리 끝낼게!”청아는 시원을 안심시키려는 듯 가볍게 그를 안아주고는 욕실로 들어가 대충 씻었다. 이후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시원은 청아가 연일 이어지는 과중한 업무에 지쳐 있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주말만큼은 쉬게 하고 싶었지만, 청아는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시원은 주방으로 가서 우유를 데운 후 서재로 들어갔다.“이거 마시고 일해. 너무 늦지 않게 자. 난 기다릴 테니까.”시원은 우유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청아의 이마에 입 맞추며 말했다. 청아는 시원의 배려에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문까지 닫는 모습에 마음이 아릿해졌다.청아는 데운 우유를 손에 들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컴퓨터를 끄기로 결심했다....시원이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친 채 방으로 들어왔다.침대 옆 테이블에서 자료를 집어 들고 읽으려다, 이불 속에서 삐죽 나온 작은 머리 하나를 발견했다.청아가 하얀 얼굴에 장난기 어
간미연의 임신 소식에 방 안은 금세 축하의 물결로 넘쳐났고, 그녀는 단숨에 모두의 사랑을 받는 중심이 되었다. 이 기쁜 소식 덕분에 분위기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미연이 소희, 성연희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장명원이 형인 장시원 곁으로 다가갔다.시원이 물었다.“아직도 너희 둘이 밖에서 따로 살고 있어? 미연인 누가 돌봐?”장명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가 미연이 임신했다고 하니까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시긴 했어요.”“그런데 미연이 이달 말에 대회가 있어서 끝날 때까진 집에서 따로 지내기로 했고요. 그동안은 내가 미연일 돌볼 거예요.”시원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대회? 임신했는데도?”명원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미연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말했다.“나도 말리긴 했죠. 근데 미연이 화날까 봐 강하게 말은 못 하겠더라고. 그냥 잘 챙겨주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요.”그는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사실 아침마다 속이 안 좋아서 토하니까 보는 내가 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임신하면 살이 찐다는데, 미연인 오히려 더 말랐거든요.”시원이 물었다.“입덧인가 보네?”“그렇겠죠. 병원에도 가봤는데 의사 말로는 정상적인 증상이래요. 그냥 견딜 수밖에 없다더라고요.”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더 신경 써서 잘 챙겨줘야겠네.”명원은 결연하게 대답했다.“그럴 거예요!”...이날 모임은 시언과 아심의 결혼 소식을 시작으로, 장명원과 간미연의 임신 소식으로 마무리되며 새벽 전까지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이윽고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너무 늦은 시간이라, 시언과 아심은 가까운 아심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심이 시언을 꼭 끌어안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꼭 작은 고양이처럼 애정을 구하는 모습이었다.시언은 아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몸이 안 좋아?”그는 오늘 밤 아심이 술을 꽤 많이 마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심은 고개를 저으며, 반쯤 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