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청아는 보고서를 빠르게 작성했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 완료한 뒤, 다시 한번 꼼꼼히 검토해 송미현의 이메일로 발송했다.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장시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시원 오빠, 나 퇴근했어. 기다릴게.]시원의 답장은 곧바로 왔다.[곧 도착해.]시원을 기다리는 동안, 청아는 오늘 공사 현장을 다녀오며 떠올린 아이디어들을 간단히 정리해 두었다.잠시 후, 시원이 도착해 전화가 걸려 왔다. 이에 청아는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긴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갔다.차에 올라탄 청아의 얼굴은 땀과 더위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3분 컷이야! 빠르지?”시원은 청아의 귀여운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뺨을 살짝 만지려 했다.“피곤하지 않아? 오늘은 이경숙 아주머니에게 요요 밥 먹이게 하고, 우리 둘이 맛있는 저녁 먹으러 갈까?”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주말에요! 오늘은 요요가 보고 싶어요.”시원은 청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알았어, 그러면 집에 가자.”차가 출발한 뒤, 청아는 긴장이 풀린 듯 차 안에서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그녀는 어제 밤을 새우다시피 했고, 오늘도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무척 지쳤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청아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잠들었다.시원은 청아가 잠든 모습을 보며 뒷좌석에서 자기 재킷을 꺼내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 청아의 피곤한 얼굴을 바라보며 시언은 깊게 미간을 찌푸렸다.차는 저택인 어정에 도착했다. 청아는 깊이 잠들어 있었고, 시원은 잠시 그녀를 깨우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다 조수석 문을 열고 청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청아가 잠에서 깨어나려 하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괜찮아. 계속 자. 내가 방까지 데려다줄게.”청아는 시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다시 눈을 감았다.저택 안에 들어서자, 이경숙 아주머니가 다가와 인사하려 했다. 하지만 시원은 먼저 손짓하며
우청아는 자연스럽게 몸을 기울여 장시원의 손가락을 잡고 손안에서 장난스레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들어 웃었다.“오빠, 내가 방금 무슨 생각 했는지 맞혀봐?”시원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내 남편 참 잘생겼다, 이런 거?”청아는 시원의 허리 쪽에 얼굴을 묻고 웃음을 터뜨렸다.“장시원 사장님, 언제쯤 그렇게 자아도취 하는 걸 멈추실 건가요?”시원은 태연하게 말했다.“자아도취가 아니라 사실인데 어쩌겠어.”청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더 크게 웃었고, 시원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그래도 아직 말 안 했잖아. 무슨 생각 했는데?”청아는 고개를 돌리며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 빛났고, 얼굴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투명하고 고왔다.“내가 정말 행운아 같다는 생각. 장시원을 만난 게 내 인생 최고의 복인 것 같아서.”시원의 눈빛은 깊고 따뜻하게 변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여 청아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이어 청아의 부드러운 뺨을 따라가며 한 번 더 입을 맞췄다.“청아야, 넌 더 행운아가 될 수도 있어.”“예를 들어서 말이지, 이 장시원이라는 사람은 자기 아내를 충분히 먹여 살릴 능력이 있으니, 넌 힘들게 일 안 해도 돼. 그냥 행복하게 즐기기만 하면 되거든.”청아는 시원의 입맞춤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지만, 정신을 차리고 작게 속삭였다.“시원 오빠.”“응?” 시원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 그는 그녀의 턱 끝을 따라 입맞춤을 이어갔다. 청아는 고개를 들어 시원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며 말했다.“난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만약 내가 무언가 하지 않고 그저 편하게만 지낸다면, 그 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그녀는 한숨을 쉬듯 덧붙였다.“지금은 비록 힘들지만, 정말 보람을 느끼고 있어.”“내가 오랫동안 공부한 걸 바탕으로 내 꿈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건 내 선택이니까요. 이런 일들은 전혀 괴롭지 않아요.”시원은 잠시 청아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눈 뒤 각자 자리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여송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시간을 정하며 만날 장소를 알려주었고, 청아는 필요한 준비를 마친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이번에도 심하 회사의 건설 현장이었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상태였지만, 공사 중이라 현장은 여전히 어수선했다.여송안은 청아에게 말했다.“나만 따라다녀요. 여기선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요.”그는 현장의 책임자를 찾아가 설계 도면을 받아 청아에게 건넸다.“이 도면을 직접 보면서 살펴봐요.”6월의 태양은 무척 뜨거웠다. 잠깐만 햇볕 아래 서 있어도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청아는 그늘진 곳을 찾아 앉아, 진지하게 도면과 현장을 비교하며 검토했다.30분쯤 지나자, 여송안이 흰 셔츠를 입은 중년 남성과 함께 다가왔다. 두 사람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고, 친근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는 걸로 보아 오랜 친구 사이임을 알 수 있었다.여송안은 웃으며 청아를 불렀다.“청아 씨, 여기 와서 인사 좀 해요.”그는 청아를 중년 남성에게 소개하며 말했다.“이분은 부승관 씨야. 이 공사장의 책임자고, 여기서 모든 걸 총괄하고 있어요. 현장을 조사하러 올 때 이분이 계시면 언제든 도움을 청하면 돼요.”청아는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안녕하세요.”부승관은 둥글둥글한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어디서 일하고 있죠?”청아는 솔직히 대답했다.“콜드스프링 건축회사에서요.”부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콜드스프링이라, 들어본 적 있어요.”그때 여송안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날씨가 너무 덥네요. 우리 어디 가서 앉아서 얘기나 하죠.”그 말에 부승관은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그럼 내 사무실로 가죠.”그들은 임시로 설치된 간이 사무실로 이동했다. 사무실은 매우 간단한 구조였지만, 에어컨이 있어 안에 들어가자 금세 시원해졌다.부승관은 직원들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지시한 뒤, 여송안과 함께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
“아직도 장시원 사장이랑 만나나?”“네, 그렇죠.”“고등학교 동문이자 친구로서 말하는 거야. 네 남자친구가 누가 됐든 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연락해.”“그럴게요!” 청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바쁠 텐데, 얼른 가봐요. 저도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태형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가봐.”청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가 식당의 룸으로 들어갔다. 태형은 그녀가 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지우림 디자이너님. 저 고태형이에요.”예전에 그는 건축 설계를 의뢰하려다 지우림과 몇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적당히 친분을 쌓아둔 상태였다.지림은 반갑게 대답했다.[아, 고태형 사장님!]고태형은 몇 마디 인사를 나눈 뒤 본론을 꺼냈다.“요즘 우청아 씨 회사 생활은 어떤가요?”우림은 사무실에서 주변을 살피고는 조용한 곳으로 이동해 말했다.[사장님, 혹시 청아 씨를 만나셨나요? 사실, 요즘 청아 씨가 회사에서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태형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무슨 일이 있었나요?”우림은 청아가 회사에서 송미현에게 견제와 압박을 받는 상황을 설명했다.[저는 개인적으로 청아 씨를 많이 아끼고 높게 평가해요.][그리고 고태형 사장님도 청아 씨의 친한 관계라면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이건 절대 제가 말했다고 하지 마세요.]태형은 이마를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고마워요.”[별말씀을요.]전화를 끊은 고태형의 얼굴은 더 굳어졌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발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향했다....그 후 이틀 동안 청아는 여송안을 따라 여러 건설 현장을 돌아다녔다. 다른 단지들의 설계와 배치를 살피고, 여송안이 설명해 주는 풍수의 원리와 건축적인 통찰을 배웠다.처음에는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청아는 풍수 또한 고도의 학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여송안
우청아는 낮에는 여송안을 따라다니며 여러 단지를 견학하고 그에게서 사업 노하우를 배우고, 밤에는 회사로 돌아와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면, 청아는 낮에 배운 내용을 정리하며 심하 회사의 설계 도면을 다시 작업했다.이 모든 일로 인해 방치당한 장시원은 점점 더 서운함과 우울감을 드러냈다.그는 자주 한밤중에 서재 문 앞에 서서 청아를 바라보곤 했다. 그의 얼굴에는 억울함과 서운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열심히 일하는 것과 목숨 걸고 일하는 건 다른 거야.”청아가 고개를 들어보니, 시원은 문틀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그의 키 큰 몸은 은은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잘생긴 얼굴은 살짝 어두운 기색이 감돌았다. 깊고 진지한 눈빛에는 청아를 걱정하는 마음과 속상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청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금만 더 하면 돼. 지금 머릿속에 있는 걸 얼른 도면으로 옮겨야 해. 안 그러면 내일이면 다 잊어버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오빠 먼저 자요.”시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벌써 사흘이나 같이 시간을 못 보냈어.”스탠드 불빛 아래, 청아의 부드럽고 단아한 얼굴은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더욱 순수하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10분만 더. 그리고 나서 씻으러 갈게.”시원은 드디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가 보내주신 삼계탕이 냉장고에 있어. 내가 데워줄 테니, 씻고 나면 먹어.”청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씻고 나면 먹을 시간이 있을까? 글쎄...’시원이 그렇게 자신을 달래며 바쁘게 움직이면, 그 10분도 그에게는 꽤 긴 시간일 터였다....목요일, 여송안이 개인 사정으로 일을 보러 간 사이, 청아는 혼자서 여러 단지를 돌아다녔다. 햇볕은 뜨거웠고,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공원 안 작은 정자에 앉아 자료를 검토했다. 더위에 지쳐 식욕도 없었지만, 가방에서 꺼낸 빵을 뜯어 점심 대신 먹었다.청아는 벤치에 다리를 올려 무릎 위에서 빵을
하성연은 우청아에게 커피를 따라주며 말했다.“너처럼 재능 있는 사람이 왜 아직도 남 밑에서 일하고 있어? 혹시 네 작업실을 차릴 생각은 안 해봤어?”청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예전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어요. 하지만 스스로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서요.”“특히 요즘 다양한 사람들과 일을 하면서 더 많이 배웠거든요. 게다가 지금은 자금을 마련할 여력도 없고요.”성연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나도 한때 비슷한 고민을 했었어. 해외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한국의 취업 환경이 너무 안 맞아서 많이 방황했거든.”“결국 내 취미를 살려 이 카페를 열었지. 그런데 요즘 들어서야 내가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그렇게 오래 공부했는데,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으니 너무 아쉽더라고.”청아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으며 디저트를 한 입 먹었다. 성연은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말이야, 네가 작업실을 열 생각이 있다면, 나도 함께 하고 싶어.”“우리 둘이라면 강성에서 충분히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야. 나아가 크게 성장할 수도 있을 테고.”청아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러면 카페는 접는 거예요?”성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 카페는 그대로 둘 거야. 이미 단골손님도 많아서 내가 매일 지킬 필요는 없거든. 둘 다 병행할 수 있어.”청아는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역시 선배, 여전한 능력자네요.”성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사실 나는 내가 배운 걸 포기하고 싶지 않아. 너는 어때? 진지하게 생각해 봐.”청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작업실을 열려면 초기 자금이 최소 1억2천만원은 필요할 텐데요. 제가 지금 당장은 그렇게 큰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성연은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둘이 합자해서 시작하면 돼. 내가 8천만 원을 낼 테니, 너는 4천만 원만 준비하면 돼.”“4천만 원이라면...”청아는 그
고태형은 회색빛이 도는 블루 셔츠를 입고 있었고, 소매의 사파이어 커프스 버튼이 햇빛 아래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세련된 디테일은 그의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그는 앞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요즘 너무 바쁘게 지내더라. 몇 번 동창 모임에서 너를 초대했는데, 네가 안 와서 이제는 아무도 너한테 연락을 못 하겠어. 방해될까 봐 말이야.”우청아는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요즘 좀 많이 바빴어요. 다음에 제가 한 번 제대로 모임 주최할게요.”태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모두 네 상황을 이해하고 있어. 너무 마음 쓰지 마.”그는 청아를 한 번 흘긋 보고는 이어 말했다.“너 시카고에 있을 때, 알바를 세 개나 하더라. 그때는 유학 와서 학비 벌고 요요까지 돌봐야 해서 그런 거 이해했지.”“하지만 이제는 안정된 자리도 잡았는데, 왜 여전히 이렇게 바빠? 너도 여자잖아. 청춘이 몇 년이나 된다고 이렇게 달리니?”청아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웃었다.“나중에 선배한테 들었어요. 제가 알바했던 것 중 일부를 소개해 주셨다면서요?”“심지어 제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신경 써주셨다던데, 정말 감사해요.”태형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뭘 그런 걸 가지고. 그때 우리 다 유학생이었잖아. 서로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청아의 눈빛은 맑고 부드러웠다.“그래도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아요. 항상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요.”태형은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건 네가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기 때문이야. 진심은 진심을 끌어당기거든.”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우산 없는 아이는 더 빨리 뛰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 하지만 지금 너에겐 장시원이라는 우산이 있잖아.”“그런데 왜 아직도 비를 맞으며 뛰고 있어? 혹시 장시원이 너에게 큰 부담을 주는 거야?”청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저한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아요. 오히려 그 사람의 존재가 저에게 큰
이전에 이지현이 우청아와 함께 야근했던 적이 있어, 오늘은 청아가 지현의 일을 돕기로 했다.시원은 청아가 또다시 야근을 한다는 말에 분명히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이렇게 말했다.[그럼 파티가 끝난 뒤에 내가 데리러 갈게.]“미안해, 오빠.” 청아가 조심스레 말했고, 시원은 한결같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나한테 뭐가 미안해. 먼저 네 일부터 끝내.]“응.”청아는 작게 대답했다.장씨 그룹 본사시원은 전화를 끊고 잠시 휴대폰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청아가 계속 바쁘게 지내며 두 사람의 만남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불만이었다. 이제는 이게 정말 연애를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거리감이 느껴졌다.보통 다른 커플들은 남자친구가 바빠서 여자친구가 애가 타는데, 자신의 경우에는 정반대 상황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자조했다.‘나도 이런 날이 오네.’...청아는 전화를 끊고 잠시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퇴근 시간이 되기 전, 그녀는 지현을 찾아갔다.“지현 씨, 나 먼저 가볼게. 프로젝트 자료 앞부분 10페이지까지는 정리해 놓았어요. 나머지는 집에 가서 마저 하고, 오늘 밤 자기 전에 이메일로 보낼게요.”지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고마워요, 청아 씨.”“우린 서로 돕는 사이잖아요.” 청아도 웃으며 말했다.“그럼 난 먼저 갈게요!”“잘 가요! 내일 봐요!” 지현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청아는 간단히 짐을 챙기고 퇴근길에 나섰다.그날 오후, 요요는 할아버지 댁으로 보내졌고, 이경숙 아주머니도 집에 없었다. 청아는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친 뒤 옷장을 열었다. 옷장에는 각종 드레스가 가지런히 걸려 있었는데, 모두 시원이 직접 고른 것들이었다.청아는 단정한 파스텔 블루 롱드레스를 골랐다. 과도한 장식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디자인에, 넥라인에는 순백의 진주가 박혀 있었다. 단아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드레스를 입고 나서
마심호가 앞으로 나서서 설명했다.“의사 말로는, 회장님께서 저녁에 술을 드셨다고 해요. 게다가 두 종류의 술을 함께 마셨고, 이번 심장 발작도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요.”서선영은 즉시 말했다. “회장님께서 직접 술을 마시겠다고 하셨어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회장님 성격상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도 말릴 수 없어요.”“제가 말릴수록 더 화를 내시니까요.”구은서는 서선영의 팔을 붙잡으며 냉정하게 말했다.“엄마, 굳이 변명할 필요 없어요. 매일 아빠를 돌보며 고생하는 건 엄마잖아요. 엄마는 늘 집안을 위해 애쓰고 있고, 그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게 최소한의 효심도 보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빠를 걱정시키고 속상하게 만들죠.”“지금 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딴청 피우는 사람 아닌가요?”마심호는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아가씨, 그렇게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니에요. 도련님께서 집을 떠나 계셨던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죠.”은서는 그의 말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쏘아붙였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씀 속에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차라리 대놓고 말해보시죠. 오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게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제 어머니가 계모라는 이유로요?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오빠를 차별한 적 없어요. 오히려 저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이든 다 맞춰주려 하셨죠.”“그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계모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그렇게 애쓰고도, 결국 오해받아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은서의 날카로운 공격에 마심호는 더 이상 말다툼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묵직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너무 깊이 생각하신 것 같군요.”하지만 은서는 물러서지 않았다.“제가 생각이 많은 건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한 걸 제가 말한 건가요?”은서
소희는 어린 시절의 서인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삼각주에서 함께 지냈던 그 시절,서인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그렇게 무기력하지도 않았고, 이처럼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여 있지도 않았다. 말수가 적다는 점은 같았지만, 그때의 서인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그때의 서인이 임유진을 만났다면, 분명 그런 복잡한 집안과 신분 문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유진을 깊이 사랑하고, 망설임 없이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임무가 실패한 순간부터, 서인은 변했다.서인은 과거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둬 버렸다. 빛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행복을 허락하지도 않았다.모든 것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소희는 서인을 이해했기에 그래서 안타까웠다.서인은 말하는 것처럼 유진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감정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구택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어깨뼈를 감싸 쥔 채, 천천히 얼굴을 숙여 소희의 뺨에 입을 맞췄다.“그만 생각해. 유진이는 서인을 잊을 거야. 그게 운명이야.”소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쩌면, 어떤 일들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유진이가 정말 영원히 서인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둘의 결말일 것이다.구택의 가운이 풀어지면서, 튼튼한 몸이 드러났다. 구택의 피부는 탄탄하고 섹시했으며, 몸을 숙여 소희의 어깨를 입맞출 때, 그의 손은 아래로, 그리고 앞으로 움직였다.소희는 구택의 손을 붙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자기야, 아까는 씻고 나면 바로 잘 수 있다고 했잖아.”구택은 낮고 흐린 목소리로 대꾸했다.“아직 열 시야.”“그렇지만 나 졸려.”구택은 소희가 요즘 바쁘고, 유진이 걱정으로 지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구택은 소희를 부드럽게 품에 안고, 침대 머리맡의 조명을 어둡게 조절했다.“같이 자자.”소희는 구택의 품에 기대면서도, 머릿속이 서인과 유진이의 일로 가득 차 있었다. 혼란스러웠지만 구택의
수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사실, 나도 당신을 좋아하긴 해요. 하지만 당신이 집안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이 가게에서 살겠다는 거예요?”그러나 서인의 마음은 이미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더욱 냉정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그 문제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함께할 수 없어요.”수아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듯,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다시 생각해 봐요. 당신은 구씨 집안의 장남이야. 당연히 돌아가서 그룹을 이끌어야죠.”“이 작은 샤부샤부 가게에 머물러서 무슨 미래가 있겠어요? 난 다 당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서인은 수아를 바라보며, 불현듯 소희의 말이 떠올랐다.“앞으로 순수하게 좋아해 줄 유진이 같은 아이는 다시 못 만날 거야. 한 번 놓치면, 영영 없는 거야.”서인의 가슴이 죄어들 듯 아팠고, 차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진수아 씨, 더 이상 여기 오지 마세요.”그 말과 함께 서인은 주저 없이 돌아서 걸어 나갔다. 수아는 서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화가 난 듯 핸드백을 탁자 위에 내던졌다.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서인은 구씨 집안으로 돌아가 왕처럼 살 수 있는 기회를 뿌리치고, 이런 작은 샤부샤부 가게에서 지내려 하는 걸까?수아가 꿈꿨던 재벌가 사모님의 꿈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서인은 후원으로 돌아왔다. 마당에는 장미 덩굴이 늘어서 있고, 계화나무가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고양이 집, 새로 바뀐 나무 테이블...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서인의 마음을 찔러댔다.이곳의 모든 것이 유진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유진은 이 모든 기억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작은 고양이 애옹이는 불안한 듯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며 약한 울음소리를 냈다.야옹이조차도 초조한 듯,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서인은 묵묵히 의자
유진의 다리는 아직 움직일 수 없었기에, 침대에 누워 있거나 침대 머리를 높여 반쯤 기대는 상태로 있어야 했다.그녀는 리모컨 버튼을 눌러 침대 머리를 살짝 올린 뒤, 소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구은정 삼촌이 여기 와서 이상한 말을 많이 했어. 그리고 자기가 날 친 거라고 했어!”소희는 조용히 물었다.“아무런 기억도 안 나?”유진은 잠시 생각하려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는데, 고개를 저었다.“정말 기억이 안 나. 내가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아!”소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기억이 안 나면 그냥 두는 게 좋겠어. 너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너무 애쓰지 마.”유진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소희, 엄마도 갔고, 이제 우리 둘뿐이잖아!”소희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그래서?”유진은 더욱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맛있는 거 좀 먹자!”그녀는 밀크티를 마시고 싶었고, 치킨을 먹고 싶었으며,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었다.이에 소희도 웃으며 말했다.“좋아!”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을 두 바퀴쯤 뛰어다닌 뒤, 소희에게 커다란 포옹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었기에, 대신 눈빛으로 기쁨을 표현했다.소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기 전에 의사에게 먼저 문의하여, 유진이가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확인한 뒤, 철저히 지시를 따르며 간식을 골랐다....유진의 머릿속에서 서인과 관련된 기억은 마치 흐릿한 공백이 된 듯했다. 그와 연관된 오현빈 같은 사람들조차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끔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 유진은 침대 곁에서 말을 걸던 구은정 삼촌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그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었고, 머리도 아팠다.그래서 유진은 본능적으로 서인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한편, 서인은 샤부샤부 가게로 돌아왔는데, 마침 진수아도 와 있었다.수아는 자리에서 일
유진은 찡그리며 눈을 떴다. 눈앞에 서인이 있는 것을 보자,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고, 이내 놀란 기색과 함께 경계심이 스며들었다.서인은 푸른 기운이 감도는 눈 밑과 덥수룩한 수염, 깊고 어두운 시선으로 인해 영락없이 위협적인 인상으로 보였다.“구은정, 삼촌?”유진은 낮게 중얼거리며 본능적으로 거실 쪽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정숙이 어디 갔는지 궁금해하는 듯했다.왜 낯선 이상한 아저씨가 자신의 침대 곁에 앉아 있는 걸까?서인은 유진을 바라보며 깊은 상처를 숨긴 채, 갈라진 목소리로 묻듯이 말했다.“너, 정말 날 잊었어?”유진은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니, 기억하는데요. 어릴 때 한 번 본 적 있어요.”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기억 속 모습과는 꽤 많이 달랐지만, 그의 깊고도 아픈 시선 속에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이 녹아 있었다.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낯설고도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잊어버린 게 차라리 잘된 거야.”서인은 시선을 떨구며, 굳게 다문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애초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로 알아서는 안 됐어.”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었다.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짙은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고, 목소리는 더욱 잠겨 있었다.“유진아, 미안해.”유진은 눈썹을 찌푸리며 서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문득 놀란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설마, 삼촌이 날 친 건 아니죠?”서인은 유진을 바라보며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웃음은 울음보다도 더 아프고 쓸쓸했다.“내가 직접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나와 관련이 있어.”유진은 아, 하고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이상했다. 이에 유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삼촌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닐 거라고 믿어요. 난 괜찮아요
“전에는 그랬지만, 나중에는 이미 회복됐어. 의사도 유진이가 잘 회복했다고 했고!”소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우리, 의사에게 한번 물어보자!”두 사람은 임유진의 담당 주치의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자 의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이런 사례가 있긴 해요. 환자의 신체가 자체적으로 보이는 일종의 스트레스 반응이죠.”“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뇌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줬던 기억을 지워버리고요.”“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고, 심리적 장애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죠.”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물었다.“그럼, 다시 기억할 수 있나요?”의사는 고개를 저었다.“확신할 수 없어요. 서서히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고, 영영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고요.”서인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충격과 당혹감이 그의 눈에 가득했다.‘유진이가 나를 잊었다고?’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깊숙이 퍼져나가며 그의 심장을 온통 뒤덮었다.유진이는 중상을 입고 깨어난 후 모든 사람을 기억했으며, 심지어 구은태도 알아봤다. 그런데, 유독 서인만 잊어버렸다.이윽고 갑자기 그날 밤을 떠올렸다. 유진이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울기만 했던 그녀.그 슬프고 억눌린 흐느낌이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랬다. 유진이는 언제나 서인을 향해 밝고 용감하게 다가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응답을 주지 않았다. 늘 차갑게 대하고, 때로는 조롱하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서인이 유진에게 준 건 오직 고통뿐이었고, 그랬기에 유진은 결국 그를 잊어버렸다.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자기 삶에서 서인을 내쫓아 버린 것이다.서인은 늘 유진이가 자신을 잊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왔지만, 정말 그렇게 되니, 왜 이토록 허망하고 아플까?소희는 불안에 휩싸인 서인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의사가 다시 기억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어.”그러나 소희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여진구는 순간 굳어버렸다. 그저 멍한 눈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더욱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무슨 일을 엄마한테 말했다는 거예요?”진구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떠봤다.“서인, 너 정말 모르는 사람이야?”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네, 모르는 사람이에요.”그 대답에 진구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침착한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아, 내가 착각했네. 내 친구인데, 네가 본 적 없는 사람이야.”그러나 유진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이었고, 그녀는 다시 진구를 추궁했다.“그런데 아까는 나와 그 사람 얘기를 엄마한테 말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었는데요?”이에 진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급히 변명을 지어냈다.“아, 그게 그 친구가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네가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해서 이모께 한번 여쭤봤던 거지.”“아직 너한테 얘기하기도 전에 그냥 조언을 구한 거야.”유진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런 거였어요? 일하는 문제인데 우리 엄마한테 왜 물어보려고 했어요?선배 친구라면 괜찮아요.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어요.”진구는 유진의 얼굴에서 조금의 위화감도 찾을 수 없었다. 유진은 정말로 서인이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표정은 철저하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진구는 마음속에서 수많은 의문이 밀려왔지만, 그것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결국, 그는 별말 없이 다 깎은 사과를 유진에게 건네주며 화제를 돌렸다.진구는 이 사실을 우정숙에게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조차도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틀 후 임씨 집안 사람들은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그날 아침, 구은태가 오랜만에 유진을 병문안 가고 싶다고 했다. 이제 유진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으니 병원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임구택은 바로 간병인을 시켜 의사를 호출했다.“유진아, 유진아!”우정숙이 조용히 그녀를 부르자, 유진은 힘겹게 눈을 떴다. 유진의 눈동자는 완전히 흐려져 있었다.그리고 눈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유진아!”노정순이 유진의 손을 꼭 잡았는데,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할머니 여기 있어. 우리 모두 네 곁에 있어. 어때? 어디 많이 아프니?”하지만,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듯 주변을 둘러봤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팔과 다리는 이미 고정된 상태였다.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유진은 눈을 크게 뜨고, 고통에 겨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그 모습에 모두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괜찮아. 괜찮아, 유진아.”노정순이 유진의 손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달랬다.곧, 의사가 도착했고, 그는 간단한 검사를 마친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뇌 손상의 영향이고, 환자는 지금 막 깨어난 상태이니,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조용히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우정숙은 다급히 물었다.“만약 최악의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되나요?”의사는 잠시 말을 아끼다가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지금으로서는 확실히 예측하기 어려워요.”그 대답에 모두의 가슴이 무거워졌다.유진은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의사는 그 모습을 보며 긍정적으로 말했다.“환자는 지금 극도로 쇠약한 상태라, 수면을 통해 회복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이건 오히려 좋은 신호예요.”유진이 다시 잠에 든 후 소희는 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진이가 깨어났어.”그러고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유진의 몸이 너무 약하니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을 전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서인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부탁할게. 잘 돌봐 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줘.”“알겠어.”서인이 돌아가고, 소희의 마음도 마치 우중충한 날씨처럼 무겁
어둑한 조명이 드리운 긴 벤치에 서인이 앉아 있었다. 서늘하고 적막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서인의 앞에 멈춰 섰는데, 임유민이었다. 유민은 미간을 좁히고 냉정하게 말했다.“이제 가세요.”서인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저었다.“난 유진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그러자 유민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차가운 기운이 스며든 눈빛으로 그는 조용히 말했다.“전 삼촌을 원망하지 않아요. 누나가 삼촌을 혼자 좋아한 거, 그건 우리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번 일은 누나와의 마지막 정리라고 생각하세요.”“이제 누나는 삼촌을 찾지 않을 거니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마세요.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다시 찾아오지도 마세요.”유민의 말은 칼날처럼 서인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머리가 더 깊이 숙여졌고, 눈동자는 공허했다.유민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조용히 등을 돌려 병실로 돌아갔다.새벽녘이 되자, 임지언이 병원에 도착했다. 평소 침착하고 냉정한 그도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임지언은 병실로 향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유진이는? 상태가 어때?”상황을 전해 들은 뒤에야, 그는 비로소 깊게 숨을 내쉬었다.임지언은 곧장 병상으로 다가가 딸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리고, 유진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한없이 애틋한 눈빛을 드리웠다.그러고는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유진아, 아빠가 너를 잘 지켜주지 못했구나. 그러니까, 제발 어서 일어나거라.”우정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겨우 가라앉혔던 감정이 다시 북받쳐 올라 참을 새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날 밤, 임지언과 우정숙은 잠도 자지 않고 유진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밤에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서인은 그 비를 피하지 않았다. 마치 조각상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서인은 온몸이 흠뻑 젖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해가 떠오를 무렵 소희가 서인을 찾았다. 소희는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