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밤이 드디어 지나갔다. 소희는 지쳐 있었고, 주옥은 소희에게 잠시 쉬라고 말했다. 백양은 자기 옷을 벗어 소희에게 덮어주고, 머리를 만지며 피로 얼룩진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잠시 자, 날이 밝으면 우리가 깨워줄게!”소희는 금방 잠에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서희!”“일어나!”“우리 이제 가야 해!”소희는 꿈속에서 몸부림쳤다. “가지 마!”소희는 눈을 떴고, 흐릿하게 백양, 영자, 홍복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소희 앞에 서서 소희를 부르고 있었다.“일어나, 새로운 임무가 있어!”“우리가 바로 출발해야 해!”“서희, 할 수 있겠어?”소희는 꿈에서 깨어나려고 애썼지만, 여전히 눈앞의 모든 것이 흐릿했다. 백양과 그들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소희는 마침내 꿈의 장벽을 뚫고 눈을 떴다.“소희!”남궁민이 놀라며 소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희는 눈을 크게 뜨고 천장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백양.”“뭐라고요?” 남궁민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무슨 백양?”소희는 남궁민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말했다. “그들이 죽지 않았어. 그들이 날 기다리고 있어!”남궁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희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소희, 무슨 일이에요?”남궁민의 손이 소희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소희는 남궁민의 손목을 잡아 세게 침대 위로 던졌다.“아!” 남궁민은 등에 통증을 느끼며 소리쳤다. “소희, 이건 너무 거칠잖아요!”소희는 남궁민을 내치다가 약간 정신이 들었고 앉아서 멍하니 남궁민을 바라보았다. 남궁민은 일어나지 않고 소희의 침대에 누워 우울한 표정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등이 아프고 허리도 아파요. 날 적으로 착각했어요?”소희는 머리가 아팠다. 창밖을 보니 이미 날이 밝아 있었고 마치 밤새 싸움을 치른 것처럼 피곤했다. 이에 소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방금 좀 정신이 없었어요.”남궁민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괜
남궁민이 나가자, 소희는 두통이 심해져서 침대에 다시 누웠다. 소희는 고개를 돌려 베개 옆에 놓인 목걸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목걸이를 들어 올려 목에 걸고, 피부에 꼭 붙였다. 그러자 바로 임구택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소희야, 좋은 아침!]소희는 요하네스버그의 떠오르는 태양 사진을 찍어 보내자 구택의 답장이 왔다.[나 8시에 출발하니까 언제나 연락 유지해. 금방 돌아올게.][걱정하지 마. 어쩌면 내가 먼저 너를 찾아갈지도 몰라!][나 찾으러 오지 마. 네 일이 빨리 끝나면 어제 그 저택에서 기다려.][알겠어!][사랑해!]소희는 화면에 있는 세 글자를 보며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핑 돌았는데 최근 감정이 쉽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소희는 깊게 숨을 쉬고 진지하게 답했다.[나도, 정말 사랑해!]...소희가 아래로 내려왔을 때, 남궁민은 식탁에서 소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희 내려오자, 남궁민은 일어나 의자를 빼주고 식기를 준비해 주었다.“고마워요.”소희는 조용히 말하자 남궁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천만에요. 그럼 먹죠.”두 사람은 조용히 아침을 먹었다. 남궁민은 가끔 농담을 던졌지만, 소희는 웃지 않았고, 오히려 하인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곤 했다. 식사를 마친 후, 소희는 시간을 확인하고 남궁민에게 말했다. “서두르지 말고, 두 시간 후에 출발해요. 떠날 때 양재아와 임예현도 데려가요. 가능하다면 같이 데려가고요.”“재아 씨는 문제없지만, 예현 씨는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찾을 수 있다면 데려가겠지만.”남궁민은 아직도 예현이 소희의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그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양재아만 먼저 데리고 가요. 가서 잘 챙겨주고요.”“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죠?”“나중에 말해줄게요.”“알겠어요.”남궁민은 소희의 말을 자연스럽게 따르며,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두 시간 후, 간미연이 소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레이든이 헬리콥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총을 겨눈 채 여자를 침대에 앉게 했다. 여자는 두려움에 떨며 소희를 바라보며 침대 가장자리에 순순히 앉았다. 잠시 후, 라펠트가 서둘러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자기야, 무슨 일이야?”여자가 대답할 틈도 없이 라펠트의 뒤에 있는 소희가 목을 세게 쳐서 기절시켰고 침대에 앉아 있던 여자는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희는 기절한 라펠트를 바라보았고 귀에 간미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재로 데려가. 본인만이 마우스를 만질 수 있어. 컴퓨터를 켜면 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소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라펠트를 들어 올려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소희는 뒤에 있는 여자를 한 번 바라보며 여전히 총을 겨누며 말했다. “따라와!”여자는 떨며 소희를 따라갔고 서재에 도착하자, 소희는 기절한 라펠트를 의자에 앉히고 오른손을 마우스에 올려놓고 컴퓨터를 켰다. 경보가 울리지 않았지만, 검은 마우스 안에서 무언가가 순간적으로 깜빡였다가 사라졌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미세한 빛이었다.컴퓨터가 부팅되기 시작했지만, 부팅 속도는 매우 느렸는데 정상적인 컴퓨터보다 몇 배는 느린 속도였다. 마침내 컴퓨터가 켜지고 미연이 비밀번호를 해제했다. 소희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시스템에 접속했다.컴퓨터 화면이 깜빡이며 대화창이 나타났고 대화창 안에서 코드가 빠르게 움직였는데 무슨 프로그램에 접속하는 것 같았다. 이에 소희는 찡그리며 물었다. “자료실에 접속하는 건가?”미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어. 비정상적인 프로그램 코드라서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어!”약 30초 후, 코드가 멈추고 대화 상자가 사라지며 새로운 시스템이 컴퓨터에 나타났고 미연은 갑자기 긴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희야, 컴퓨터를 꺼! 지금 당장!”하지만 이미 늦었다. 새로운 시스템이 켜지자, 무수한 화면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모든 장면이 한순간에 소희의 눈에 들어왔다. 그 화면들은 점
라펠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공포에 떨며 뒷걸음질 쳤다. “날 죽이지 마! 제발! 나는 어쩔 수 없이 삼각용에게 협박당한 거야. 우리 가족 전부가 삼각용의 손에 있어!”땅! 하는 소리와 함께 라펠트의 공포스러운 목소리가 끊겼다. 동시에, 여자가 라펠트를 밀쳐내려고 달려들었다. 총알이 여자의 팔을 스쳐 라펠트의 가슴에 박혔다. 라펠트는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을 움켜쥔 채 뒷걸음질 쳤고 피가 라펠트의 손가락을 통해 흘러나와 옷에 물들였다.라펠트는 옆에 있는 책장에 기대며 죽어가는 눈빛으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여자는 다친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소희를 돌아보았고 손가락으로 컴퓨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서희, 네 동료들이 모두 죽어가고 있어!”서희라는 이름을 들은 소희의 머리는 다시 한번 아프기 시작했고 소희는 고통을 억누르며 총을 들어 여자를 겨누었다. 그러자 여자는 조용히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서희, 넌 날 죽이지 않을 거야. 날 죽일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죽으면 너의 동료를 만나러 갈 사람이 없어. 너의 임무를 잊지 마!”서희, 동료, 임무! 소희의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온몸에 피가 역류하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소희는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넌 누구야?”“나는 널 데리러 온 사람이야!” 여자는 말했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은 가짜야. 넌 빨리 돌아가야 해!”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눈에 망설임이 가득했고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때 갑자기, 무언가에 부딪혔고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삐용삐용! 소리가 울리며 소희의 머리를 더욱 아프게 했다. 마치 수많은 칼이 소희의 혈관을 자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여자는 표정이 변하며 소희에게 카드를 하나 건네주었다. “여기서 나가. 가장 왼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동료들을 찾아가. 빨리!”소희는 카드를 단단히 쥐고 비틀거리며 떠났다. 소희는 의식이 희미해졌지만, 아까 여자가 말한 말을 기억했다. ‘여기서 나가야 해. 당장 나가야 해!’복도에서도 경보가 울리고 있었고, 실험실의 연
소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픔을 느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그렇다면 가서 그들을 구해. 널 기다리고 있잖아. 네가 가지 않으면 그들은 죽을 거야!” 레이든이 말하자 소희는 당황했고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가야겠어. 그들을 구하러 갈게!”“어서 가. 그렇지 않으면 정말 늦을 거야!” 소희는 초조한 표정으로 총을 잡고, 폐허가 된 공장을 향해 매우 빠르게 달렸다. 얼굴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고, 오직 동료들과 함께 죽을 각오만이 있었다.그리고 소희의 뒤에서, 레이든은 무표정하게 소희가 건물의 가장자리로 달려가는 모습을 차갑게 지켜보았다. 이때 하늘에는 한 대의 헬리콥터가 접근하고 있었고, 장명원이 헬리콥터에 서서 갑자기 기뻐하며 말했다.“보스를 봤어! 지금 건물 옥상에 있어!”말을 마치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근데 뭘 하려는 거지?”간미연은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옥상에서 미친 듯이 달리는 소희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소희가 조종당하고 있어!”이에 명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옥상으로 접근해! 빨리 접근해!”헬리콥터는 급속도로 다가갔고 소희는 이미 가장자리까지 달려가 망설임 없이 50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보스!” 명원이 외쳤고 낙하산을 챙길 새도 없이 밧줄을 잡고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렸고 빠르게 소희에게 다가갔다. 바람은 매섭게 불었고, 소희의 몸을 감싸며 빠르게 떨어졌다. 명원은 소희에게 점점 가까워졌고, 밧줄을 휘둘러 소희의 몸에 감자 두 사람은 헬리콥터에 매달려 있었다. 미연은 극도로 긴박한 상황을 바라보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조종사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즉시 요하네스버그를 떠나!”헬리콥터는 위로 치솟아 요하네스버그의 서북쪽으로 날아갔다. 레이든은 옥상 가장자리에 서서 구출된 여자를 올려다보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서희는 절대 도망칠 수 없어!’레이든은 손을 들어 요하네스버그의 방어 시스템을 작동시키자 헬리콥터와 옥상에 숨어 있던 저격수들은 소희
장명원과 소희는 약 천 미터 높이에서 숲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밧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밧줄이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떨어지는 속도와 중력 때문에 밧줄이 여러 나뭇가지를 끊었고, 결국 두 사람은 굵은 나무줄기에 걸렸다.두 사람은 몇 분 동안 그 줄기에 매달려 있었고, 흔들리던 끝에 점차 의식을 되찾았다. 소희는 고개를 흔들고 밧줄을 잡아 나무줄기를 안았다. 명원도 힘을 빌려 안정적으로 나무에 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목숨을 구한 기쁨을 나누고, 밧줄을 풀고 나무에서 내려왔다.팍팍! 두 번의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차례로 땅에 떨어졌다. 명원은 온몸의 통증을 무시하고 곧바로 일어나 소희에게 달려갔다. “보스! 보스, 괜찮아요?”소희는 일어나서 완전히 정신을 차렸지만, 머리가 여전히 터질 것 같았다. 이에 소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자신을 진정시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명원은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간신히 진정하며 말했다. “보스, 아까 뛰어내리는 거 보고 심장이 터질 뻔했어요. 왜 옥상에서 뛰어내렸어요?”하지만 소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까의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조종당한 것 같아!”“누가 그런 거죠?” 명원이 묻자 소희는 대답했다.“레이든!”“요하네스버그를 장악한 레이든?”명원이 놀라며 묻자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든은 요하네스버그를 떠나지 않았어. 떠난 사람은 웰로드였어. 그 사람이 레이든으로 변장한 거고 나는 속았어!”‘근데 레이든이 왜 삼각용을 돕지 않았지? 그 일곱 개의 코발트 폭탄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게 아니었나?’‘레이든이 남은 이유는 나를 상대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나의 목적을 알고 라펠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까?소희의 머릿속은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안개만 걷어내면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직도 그 안개를 뚫고 나갈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명원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레이든이 일부러 보스를 노리는
소희와 장명원은 몇백 미터를 걸어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고 각각 다른 방향으로 몸을 숨겼다. 뒤따라온 첫 번째 무리는 열댓 명의 경비원들로, 손에는 기관총을 들고 사방을 수색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소희는 나무에서 소리 없이 내려와 한 경비원의 목에 올라타서 입을 막고 힘껏 비틀었다. 소희는 아무 소리 없이 무소음으로 죽이고, 기관총을 빼앗아 풀숲에 숨겼다. 어두운 숲속에서 앞서가던 경비원들은 뒤에 있던 동료가 죽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몇 걸음 더 앞으로 가던 중, 명원이 나무 위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며 총을 쐈다.“죽어버려!” 그 소리에 경비원들은 깜짝 놀라 총을 들고 반격했다. 명원이 주의를 끌며 총을 쏘자, 소희는 뒤에서 기관총으로 경비원들을 일제히 쏘았다. 불과 1분도 되지 않아 열댓 명의 경비원이 모두 땅에 쓰러졌다. “멋졌어요!” 명원이 소희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달려왔다. “빨리 가자. 총소리 때문에 더 많은 경비원들이 올 거야!” 소희는 땅에서 또 다른 총을 주워 들고 명원을 데리고 빠르게 떠났다. 두 사람은 10여 분을 걸어갔다가 또다시 경비원들을 만났다. 이번에는 약 서른 명이 숲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고 명원은 소희에게 눈짓하며 물었다.“처리할까요?”소희는 풀숲에 몸을 숨기고 앞에 있는 경비원들을 보며 약간 찡그렸다. “아니, 이번에는 따라가자!”명원은 즉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소희와 명원은 한 명씩 마지막에 있는 경비원들을 처리하고, 풀숲에 끌어들인 후 경비원의 옷을 입고 얼굴에 풀즙과 흙을 바르며 위장했다. 명원의 체형이 경비원과 더 비슷했기에, 소희는 명원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마지막으로 따라갔다.하지만 소희의 예감대로 이번 경비원들은 이전과 달랐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소희와 명원은 무리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갔다. 약 30분
장명원 뒤따라온 사람은 위험을 감지하고 가까이 오지 않았고 비행기 문 근처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 명원이 조종사를 기절시키자 명원에게 다가와 총을 들어 조종사를 죽이려 했다. 이때 명원은 몸을 돌려막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살려둬야 할지도 몰라!”그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끌어내.”명원은 조종사를 어깨에 메고 비행기를 한 번 더 점검했다.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두 사람은 비행기에서 내려왔다. 소대장은 명원이 조종사를 끌고 나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얼든 데리고 빨리 가!”명원은 응답하며 조종사를 업고 무리의 뒤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여전히 소희의 모습을 가리고 있었다. 조종사를 데리고 있으니 무리와 함께 걷는 것이 더 쉬워졌다. 명원은 계속해서 조종사를 업고 있었고 조금 뒤처진 순간, 소희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죽지 않았고 내가 기절시켰어요!”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업고 갈게!”“괜찮아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명원은 소희에게 안심시키는 제스처를 취하며 무리를 따라갔다. 앞쪽의 작은 우두머리는 이어폰으로 지시를 받으며, 나무와 덤불을 헤치며 걸어갔다. 중간에 나무에서 떨어진 독사에게 어깨를 물린 사람이 있었다. 이에 소대장은 주저 없이 총을 쏴 죽였고, 자기 사람들에게 엄격하게 말했다.“안전 주의해. 누구든 짐이 되면 내가 직접 처리할 거야!”무리의 사람들은 긴장하며 주변을 경계했고 이렇게 다시 30분을 걸어갔다. 앞쪽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자, 소대장은 걸음을 재촉하며 맞은편 사람과 암호를 교환하고 두 무리가 합류했다.명원과 소희는 무리의 맨 뒤에 있었는데 앞쪽 빈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며 두 사람은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상대 무리가 간미연을 붙잡고 있었다.’미연은 손발이 묶인 채 땅에 쓰러져 있었고, 주변에는 약 서른 명의 사람이 최신식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들에게 희소식이기도 했다.
재아는 권수영의 손을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알아요. 제가 지승현 씨와 결혼할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이 아이는 낳을 거고, 제가 혼자 키울 거예요.”“그리고 그동안 받은 돈과 물건들은 돌려드리지 않을 거예요. 그건, 당신네 집안이 아이의 양육비로 준 걸로 알테니까.”권수영은 격분하며 소리쳤다.“우리 집 아이를 품에 안다니, 네 따위가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재아는 눈을 붉히며 차갑게 응수했다.“자격 없죠. 하지만 이건 당신이 직접 만든 결과잖아요. 처음에 저를 접근시킨 것도 권수영 씨 아닌가요? 우리 둘 다 목적이 있었고, 아무도 무죄라고 할 수 없죠.”권수영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네가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지 않았다면, 아심이와 승현이가 헤어질 일은 없었어!”재아는 비웃으며 말했다.“처음부터 아심 씨의 출신을 무시한 건 당신이잖아요. 저한테 책임을 떠넘기지 마세요!”“그리고, 아심 씨가 정말 승현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아니죠. 아심 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강시언이예요. 당신도 봤잖아요.”권수영은 손을 불끈 쥐고, 다시 한번 재아의 뺨을 때리려는 충동을 억누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재아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더 이상 당신네 집안과 얽히지 않을 거예요. 이 아이의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러니 앞으로 절 찾지 마세요.”그렇게 말한 뒤, 재아는 뒤돌아 걸어 나갔다. 임신한 그녀의 눈치 본 도우미들은 그저 문을 열어줄 뿐, 아무도 막으려 하지 않았다.권수영은 거실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서 재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녀는 분노로 몸을 떨며 스스로 결심했다.‘절대 이 아이를 세상에 나오게 해서는 안 돼. 나중에 아이를 핑계로 집안을 흔들겠다고 하면 어쩌려고!’권수영은 마음속의 두려움을 억누르고, 집안의 운전기사를 불러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오늘 안에 처리해. 돈은 5천만 원을 줄 테니, 실패하면 책임질 줄 알아!”운전기사는 그 말을 듣고 겁에 질렸다.“사모님, 이건 위험해요. 잘못
아심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우리는 이미 만난 적이 있잖아요. 다시 만날 필요는 없어요. 권수영 씨, 무슨 일로 오셨나요?”권수영은 바로 얼굴을 찌푸리더니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심 씨, 나는 너를 항상 좋아했어. 모두 그 양재아라는 애가 승현이를 꼬드기고 둘 사이를 이간질해서 이런 오해가 생긴 거예요.”“이건 다 내 잘못이에요. 내가 어리석었으니 제발 나 좀 용서해 줘요.”그러나 강아심은 담담하게 말했다.“진짜로 알고 싶었던 사람은 언제나 도씨 집안의 손녀였을 뿐이에요. 이건 오해가 아니라 그저 본질의 문제일 뿐이죠.”권수영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래,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요. 하지만 승현이는 잘못한 게 없잖아요. 걔는 항상 지키려 했으니까요.”“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사람들한테 속지 말아야 해요. 내가 너한테 진심으로 사과할 테니, 제발 승현이도 용서해 줘.”그러나 아심은 냉정하게 답했다.“저와 승현의 일은 이미 다 정리됐어요.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아드님께 물어보세요.”그녀는 손목시계를 힐끗 본 뒤 말했다.“저는 이제 가봐야겠어요.”“아심 씨, 가지 마요!” 권수영은 아심을 따라가며 가방에서 유명 브랜드의 보석 상자를 꺼내 아심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려 했다.“이건 내가 진심으로 주는 거예요.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줘요.”아심은 단호하게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필요 없어요.”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며 떠났다. 아심의 단호한 거절에 권수영은 그 자리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잿빛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결국 모든 원망은 재아에게 쏟아졌다.이윽고 권수영은 사람을 보내 재아를 찾아내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오게 했다.재아는 도씨 저택을 떠난 후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최근 호텔에서 지내며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도경수가 재아에게
출국을 결심한 강아심은 회사의 업무를 차근차근 인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출국해 학업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로 회사를 신뢰할 수 있는,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에게 넘겼다. 그리고 정아현은 여전히 아심의 비서로 남아 매일 화상 회의를 통해 회사 상황을 보고하기로 했다.월요일 아침 회의에서, 아심은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할당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 아현과 추가로 몇 가지 업무를 인계했다.아현은 눈물이 고인 채로 물었다.“사장님, 얼마나 오래 가시는 거예요?”그러자 아심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정해진 건 없어요. 그래도 우리 매일 화상으로 통화할 수 있으니까, 매일 얼굴 볼 수 있잖아요.”아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화상으로 보는 거랑 직접 보는 건 완전히 다르죠!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사장님이 맡기신 일들, 제가 최선을 다해서 잘 챙길게요.”“회사도 잘 보고 있을 테니까, 빨리 돌아오세요.”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해야죠. 기운 내고, 열심히 일해요.”아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심은 짐을 정리하며 물었다.“남자친구랑은 어떻게 됐어요?”아현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헤어지자고 했어요. 아직 동의는 안 했지만, 동의하지 않아도 제 결정은 바뀌지 않아요.”갓 남자친구와 헤어진 데다 사장님까지 떠난다는 소식은 아현에게 이중으로 큰 충격이었다.아심은 서류를 들고 아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스스로 내린 결정이면 후회하지 말고 자신을 믿어요.”아현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갑자기 느낀 건데, 일하는 게 제일 믿음직스러워요. 사장님이 출국해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관계잖아요.”“그런데 남자친구가 출국하면, 그 관계가 계속될지 장담할 수 없잖아요.”강아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관점, 정말 독특하네요.”아현은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사장님, 사장님 떠나면 미스터 강은요?”아심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강성에 오래 머무를 사람은 아니야.”그의 신분과
늦은 저녁, 도도희는 도경수에게 Y국으로 이주할 계획을 전했다. 그녀는 자기 생각을 솔직히 밝혔다. 자신과 아심이 Y국으로 떠날 예정이니, 가능하다면 도경수도 함께 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강성에 남겨둔 모든 것을 쉽게 정리할 수 없다면, 그녀와 아심이 자주 방문해 뵙겠다고 덧붙였다.이야기를 마친 후, 도도희는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반대할 것을 각오했다. 그러나 도경수는 잠시 깊은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도 너희와 함께 가겠다.”도도희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저희랑 같이 가실 거예요?”도경수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강해, 예전에는 공무 외에 해외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정착까지 하겠다고 하니 그녀로서는 의외였다.도경수는 마당을 한 번 둘러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떤 것도 가족과 함께 있는 것만큼 소중하진 않지.”그날 밤, 도경수는 강재석과 다시 이 이야기를 나눴다.강재석은 약간 놀란 듯 물었다.“드디어 생각이 바뀌었나 보군.”도경수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너를 두고 떠나는 게 아쉬운 거지. 내가 없으면 누가 너랑 싸워주겠어?”그 말에 강재석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매일 너랑 싸우고 싶어서?”도경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해서 싸우는 거니까 됐어!”강재석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그럼 어서 가.”도경수는 수염을 불쾌하게 부르르 떨며 말했다.“이봐, 이 노인네! 정이란 게 없어!”그러나 강재석은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웃었다.“걱정하지 마. 너 거기 오래 못 있을 거야. 한 달도 안 돼서 울며불며 돌아오겠지.”도경수도 웃으며 맞받아쳤다.“내가 세 살짜리 아이로 보여?”강재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세 살짜리보다 나은 점도 없잖아.”두 사람은 잠시 조용히 있었다. 분위기는 차분했지만 약간 무거웠다. 잠시 후, 도경수가 입을 열었다.“사실 나도 떠나기 싫어. 하지만 도도희도, 아
권수영은 파티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지승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승현아, 큰일 났어!”지승현은 그 시각 고객과의 모임을 마치고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전화를 받으며 여유롭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권수영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강아심이야! 강아심이 도경수의 손녀딸, 그러니까 도씨 집안의 진짜 손녀란 말이야! 그리고 양재아는 가짜였어. 아무것도 아니라고!”지승현도 놀란 기색이었다.[도경수 어르신의 손녀가 아심이라고요?]“맞다니까! 나 방금 도씨 집안의 파티에서 직접 도경수 어르신이 말하는 걸 들었어. 이번엔 틀림없어!”권수영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충격이 서려 있었다.“우리가 그 양재아한테 완전히 속아 넘어간 거야. 그 작은 계집애가 우리를 완전히 기만했어!”승현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아니죠, 어머니만 속으셨겠죠.]“내가 왜 이렇게 어리석었을까?” 권수영은 땅을 칠 듯 후회하며 말했다.“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당장 강아심을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빌어야 해. 내가 직접 찾아가 사과해도 괜찮으니까, 너희 둘이 다시 화해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그녀는 도씨 집안과의 혼사를 성사하기 위해 온갖 수를 쓰며 애썼다. 하지만 정작 도씨 집안의 진짜 손녀딸인 아심과 승현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린 꼴이었다. 결국엔 가짜인 재아를 집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권수영은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하며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승현은 냉랭하게 말했다.[어머니, 제발 체면이라는 걸 좀 생각하세요.]그렇게 말하며 승현은 전화를 끊었다.승현은 호텔 복도에 서서 어머니의 말을 되새기며 여전히 믿기 어려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심이 도씨 집안의 손녀라는 사실은 예상 밖이었다. 아심에게 가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도씨 집안이라는 막강한 가문과 연결될 줄은 몰랐다.그는 휴대폰을 들어 아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축하해, 아심아.]잠시 뒤 아심에게서 답장이 왔다.[고마워요.]승현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우리 엄마가 아마 또 귀찮게 할
술잔을 나누며 웃음꽃이 피었던 파티장의 분위기는 이제 절정에 다다랐다.강시언은 사람들이 둘러싼 강아심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깊고,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흔들리지 않는 표정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시언은 오래도록 아심을 응시하다가, 점차 많은 사람이 그녀 곁으로 모여들어 자신의 시선이 가려지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조용히 파티장을 떠났다.강재석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아심의 말에서 뭔가 어긋남을 직감한 그는 자연스레 시언을 찾았지만, 보이는 건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뿐이었다.아심 역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마음은 갑작스러운 아픔으로 꽉 차오른 듯했다.시언과의 관계는 온두리에서의 만남으로 더 가까워졌지만, 어딘가 모르게 운명처럼 다시 멀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파티가 끝날 때까지 소희는 시언을 다시 볼 수 없었고, 소희가 전화를 걸자 그는 짧게 대답했다.[일이 생겨 먼저 떠났어. 할아버지랑 잘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파티가 끝난 후, 손님들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심은 일부러 강재석을 찾아갔다. 도도희와 함께 Y국으로 떠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였다.그 말에 강재석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도도희와 함께 떠나겠다고?”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죄송해요, 할아버지.”강재석의 마음은 당연히 무거워졌다. 파티장에서 느꼈던 이상한 기운이 이제야 명확해졌다. 떠나는 결정을 시언이 이미 알고 있었다.며칠간 내리던 비가 멈추고, 아침이 되자 하늘은 맑게 갰다. 빗물에 젖은 정원의 나무와 꽃들은 더욱 푸르고 싱그러워 보였다.강재석은 아심과 함께 정원의 오솔길을 걸으며 말했다.“미안하다고 할 필요 없어.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그건 너의 권리야. 다른 사람의 기분을 이유로 네 인생을 좌우하지 마.”“그리고 너와 도도희가 이제 막 재회했으니,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아심은 천
강시언은 여전히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 큰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힘 있게 끄덕이며 말했다.“잘 생각했다면 됐어. 네가 무엇을 하든, 나는 항상 너를 지지할 거야.”“고마워요.”아심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눈앞이 흐릿해졌다. 마치 눈물이 고인 듯했고, 목소리도 약간 잠겼다.그때 누군가가 아심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는 소리에 응하며 파티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발짝쯤 걸어가던 아심은 갑자기 돌아서서 물었다.“아까 저한테 무슨 말 하려고 했어요?”시언은 그녀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천천히 말했다.“별거 아니야. 네가 말했잖아. 이제 너는 더 이상 넘버세븐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앞으로 네 마음대로 살아. 나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아도 돼.”아심의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오히려 텅 빈 것 같았다.“당신이 저를 위해 해준 일들은, 평생 잊지 않을게요.”시언은 등을 돌렸고, 키 큰 그의 뒷모습은 나무 그늘에 가려져 더 고독해 보였다.‘이미 멀리 떠나기로 했다면,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려. 무거운 짐 없이 네가 더 멀리 날아오를 수 있기를.’아심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층 빌딩들 사이로 보이는 작은 네모난 하늘. 하지만 그 하늘 너머에는 더 넓고 광활한 세상이 있겠지.아심은 마음속 결심을 다지며 파티장으로 돌아가자, 마침 도도희가 아심을 찾으러 나왔다. 아심을 발견하자 도도희는 미소를 띠며 물었다.“누구랑 얘기하고 있었어? 시언이?”아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방금 우리 Y국에 간다고 말했어요.”도도희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곧 떠날 거라면, 얘기해야 했지.”잠시 망설이던 도도희가 물었다.“시언인 뭐라고 했어?”아심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도도희는 미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미소를 되찾고 아심의 손을 잡아 파티장으로 이끌었다.“할아버지가 네게 몇 마디 하라고 하셔.”아심은 웃으며
“공공장소에서 사람을 때리면 어떡해요?”“경찰에 신고하세요!”권수영은 마지막으로 양재아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돌아서서 떠났다. 보안 직원이 와서 재아를 부축했고,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눈물을 훔쳤다. 그 눈빛에는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단호함이 번졌다....파티장 내부.강시언은 정원에 나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끊은 뒤 바로 들어가지 않고, 정원에서 담배를 피웠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그는 담배를 끄고 뒤돌아섰다. 걸어오는 이는 강아심이었다.정원에는 나무 울타리가 있었고, 울타리 너머로는 인공 호수가 있었다. 호수는 폭포를 따라 물이 흘러내리며 다른 정원으로 이어졌다.폭포의 물소리와 그늘진 나무들이 어우러져, 한여름에도 이곳은 시원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아심은 울타리에 기대어 서더니 옆에 놓여 있던 물고기 먹이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먹이를 호수에 뿌리자, 비단잉어들이 먹이를 차지하려고 물 위로 몰려들었다.“많은 사람이 건배를 청하더라고요. 제가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잠깐 피해 나온 거예요.”시언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거절해도 괜찮아. 그럴 권리는 충분히 있으니까.”아심은 시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허형진 씨 회사 말이에요. 한 번 검토해 보세요. 그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고, 회사도 꽤 실력 있어요. 제가 그분이랑 오래 일해봐서 잘 알아요.”그 말에 시언은 짧게 대답했다.“이미 사람을 보냈어.”아심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제가 도와준 셈이네요.”시언은 그녀를 흘깃 쳐다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저, 할 말이 있어요.”“강아심.”둘 다 멈칫하더니 시언이 먼저 말했다.“먼저 말해. 무슨 일이야?”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은은히 들렸고, 주위는 물안개로 가득했다. 파티장의 소음은 방음 유리로 차단되어 정원은 더욱 고요했다.아심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Y국에 가려고 해요.”그 말에 시언의
도경수는 잔을 높이 들며 웃음 지었다.“강재석, 사실 이 잔은 너한테 가장 먼저 돌려야지. 우리 재희를 찾게 된 것은 시언이 정말 큰 공을 세운 덕이니까.”강재석은 도경수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그걸 알면 앞으로 우리 시언이에게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나 말고.”도경수는 바로 맞받아쳤다.“내가 언제 그랬다고! 하지만 시언이 우리 아심이를 괴롭히기라도 한다면? 얼굴을 붉히는 건 기본이고, 나도 몇 마디 거세게 한 소리 할 수도 있지 않겠나?”아심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시언 씨는 한 번도 저를 괴롭힌 적 없어요.”시언은 아심을 향해 짧게 고개를 들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한 번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띠었다.도경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뭘 시언 씨라고 부르니? 그건 너무 생소하고 딱딱한 느낌이잖아. 걔는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 오빠라고 불러야지.”아심은 시선을 들어 시언과 마주쳤다. 그의 짙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을 열어보려 했던 아심은 결국 그 말을 삼키고야 말았다.도도희는 곧장 분위기를 풀어주며 웃음을 지었다.“아버지, 그리고 아저씨, 두 분 서로 주거니 받거니 잔을 들지 말고, 다 같이 한잔하세요. 가족끼리 뭘 그렇게 따지세요.”“오늘 같은 날엔 말로 다 하지 못할 감정을 이 잔에 담아 나누시죠.”모두 함께 잔을 들었다. 다른 연회 손님들도 동시에 잔을 들어 축하의 마음을 멀리서나마 보냈다.아심은 잔을 들어 술을 마시려 했으나, 시언이 다가오는 시선을 느꼈다. 그의 눈매가 살짝 좁혀져 있었는데, 분명히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잔을 내려놓더니 대신 과일주스를 선택했다....파티장 밖에서는 권수영과 함께 있던 다른 부인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권수영 씨, 도대체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이런 꼴을 당하려고 우리가 여기 온 건 아니잖아요!”“맞아요. 평생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데, 오늘 완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