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연이 두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도아영! 그게 무슨 뜻이지?”사람들은 일제히 도아영을 쳐다봤다.안용준이 서둘러 나서서 말했다.“아영 씨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사모님도 도원 그룹의 발전을 위해서 그러는 거니까...”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아영이 불쑥 끼어들었다.“이 자리에서 아줌마의 편을 들어주면 안 되는 사람이 바로 안 상무이죠.”“그, 그게 무슨 뜻이죠?”안용준은 당최 짐작이 안 갔다.도아영이 웃으면서 말했다.“원래 집안 망신은 시키지 않는 법이라 아줌마의 체면을 봐서라도 참을 생각이었죠. 다만 하나같이 뻔뻔스러운 사람들이 내가 눈 감아 준 것도 모르고 오히려 점점 더 기고만장해져서 염치없이 회사를 빼앗으려고 들잖아요.”“도아영!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유정연이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도아영은 비서에게 눈짓을 보냈다.비서가 노트북을 빠르게 만지자 화면에 곧바로 사무실 CCTV 영상이 나타났다.대표이사실에서 안용준과 유정연은 책상에 걸터앉아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이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안색이 돌변했다.회의실에 있는 임원들은 대부분 도석진의 심복으로서 돌아간 상사의 와이프가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모습을 보니 얼굴빛이 썩 좋지 않았다.유정연과 안용준의 사이는 회사 내부에서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아직 임원진만 모를 뿐 직원들은 거의 다 알고 있었다.영상을 확인하는 순간 유정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화가 나서 손가락질하면서 말까지 더듬었다.“감, 감히...!”“아줌마,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데 그동안 우리 아빠는 잘못을 저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지 않나요? 만약 이혼하고 사모님 자리를 내려놓고 싶다면 말을 하지 굳이 이런 추잡한 짓거리는 왜 해요?”도아영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유정연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안용준은 질겁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아영 씨! 그때 잠깐 귀신에 씌웠나 봐요. 단지 실수였을 뿐이에요.”“실수? 두 분이 무슨 사이인지는 회사에 이미 소문이 파
“꺼져!”여자는 미친 사람처럼 유정연을 윽박지르며 협박했다.유정연의 얼굴은 손톱에 할퀴어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비명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도아영은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며 속이 후련하기 그지없었다.한편, 도원 그룹의 위기가 해소되면서 도아영이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이 이수호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이수호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수심이 더욱 깊어졌다.“도원 그룹이 위기를 극복했다니? 무슨 방법으로?”“그건 저도 잘... 하지만 아영 씨가 해결했다고 들었어요.”“도아영?”도원 그룹이 도아영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는 말을 듣자 이수호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이를 본 안지원이 잽싸게 말을 보탰다.“대표님, 도원 그룹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시겠어요?”“어제 내 앞에서 열연을 펼치며 이나의 의심을 사게 하더니 할머니랑 거래가 오간 게 분명해. 괜히 오해한 줄 알고 미안해했네.”이수호가 냉소를 지었다.어쩌면 도아영을 정말 과소평가했을지도 모른다.도원 그룹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곧이어 이수호는 말을 보탰다.“도아영이 어디서 4천억이나 얻어 왔는지 알아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남자를 보고 물었다.“대표님, 어디 가시는...?”“도씨 일가에 가보려고.”이수호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뻔한 사실 앞에서 무슨 수로 빠져나갈지 두고 볼 거야.”30분 후.도씨 일가.집에 도착한 도아영의 뒤로 유정연이 쫓아오며 악랄한 욕설을 퍼부었다.“도아영! 대단한데? 감히 내 뒤통수를 쳐?”이내 손찌검하려고 했지만 도아영의 발걸음이 워낙 빨라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허탕을 쳤다.도아영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처참한 몰골의 유정연을 바라보았다.“아줌마, 체면은 이미 충분히 봐줬다고 생각하는데 더 이상 뭘 바라는 거죠?”“뭐?!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하지?”유정연은 도아영을 손가락질하며 길길이 날뛰었다.“네가 안용준의 와이프한테 얘기하는
그리고 찻잔을 들어 올리는 찰나 손목이 덥석 붙잡혔다.이내 옆으로 탁 쳐내자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지독한 여자 같으니라고, 어젯밤에 자칫 속아 넘어갈 뻔했네.”“그게 무슨 소리죠? 이해가 잘 안 가네요.”도아영은 순진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이수호의 목소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4천억을 빌리려고 할머니의 연기에 가담한 거지? 일부러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어 이나한테 보여줘서 우리 사이를 오해하게 하다니!”이수호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가 남현숙이 준 돈으로 회사의 위기를 모면한 줄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헛다리 짚었네요.”도아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수호를 쳐다보았다.“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나랑 전혀 무관하죠. 그리고 4천억 원은 내가 직접 마련한 것으로 할머니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어요.”“이제 거짓말까지 하는 거야?”이수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그동안 허영심만 강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사람이었네?”말을 마치고 나서 도아영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할머니가 대체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으면 날 골탕 먹이려고 이렇게 혈안이 되었을까?”한 뼘 거리까지 다가온 이수호를 보자 도아영은 무의식중으로 뒤로 물러났다.“이수호 씨, 어느 대목에서 그런 시나리오가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난 사실대로 얘기했어요. 그래도 여전히 납득이 안 간다면 어쩔 수 없네요.”대수롭지 않은 도아영의 표정을 보자 이수호는 왠지 모르게 화가 나서 냉소를 지었다.“정녕 내가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자신만만해?”“자기애가 너무 강하네요. 이수호 씨한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거든요? 그때 본인이 파혼하지 않으려고 할머니에게 훼방 놓으라고 한 탓에 이 지경까지 왔을 뿐, 아니면 우리는 진작에 남남이 되었을 거예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수호의 안색이 싸늘해졌다.도아영이 한마디 보탰다.“제 생각에는 서로 각자의 길을 걷는 게 좋을 듯싶어요. 어차피 나중에 우리 둘에 대한 소
이수호는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구연준이 널 한 번은 도와줄 수 있어도 평생 지켜줄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내 약혼녀이자 미래의 이경 그룹 안주인으로서 본분을 지키도록 해.”“뜻인즉슨 매일같이 집안일하고 강아지처럼 이수호 씨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동네방네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길 바라는 건가요?”도아영이 피식 웃었다.“그건 도우미나 할 법한 일이죠. 이미 바보짓을 한 적이 있으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예요.”이 말을 듣자 이수호의 표정이 점점 싸늘해졌다.한편, 위층에서 짐을 정리하던 사람이 캐리어를 들고 우르르 내려왔다.안지원이 이수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대표님, 다 됐습니다.”“도아영을 데려가.”이수호가 소파에서 일어서자 뒤에 있던 경호원 두 명이 도아영의 앞으로 걸어갔다.“아영 씨, 가시죠.”도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지금 이 상황에서 이수호의 말에 토를 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갔다. 자신을 죽도록 미워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집착하는 이유는 뭐지?이씨 일가로 향하는 길에 도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집에 도착하자 경호원들은 그녀의 짐을 한동안 머물렀던 2층 방으로 옮겼다.도아영은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고 도통 움직일 기미가 안 보였다.“왜? 그동안 살았던 곳도 까먹은 거야?”이수호가 비아냥거렸다.“내가 데려다줘?”눈에 익은 집안을 둘러보자 저도 모르게 혐오감을 느꼈다.“필요 없어요. 어딘지 저도 알거든요?”지금은 그녀가 집에 머물러 있은 지 단지 3개월밖에 안 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전생에 무려 3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그동안 마치 가정부처럼 이수호를 위해서라면 닥치는 대로 모든 일을 도맡았다.한 번은 이수호가 전염성이 강한 중병에 걸렸는데 3일 동안 쉬지 않고 곁을 지켜주는 바람에 결국 체력이 바닥 나서 쓰러지게 되었다.당시만 해도 그녀에게 잘해주겠다고, 이경 그룹의 유일한 안주인이 될 거라며 호언장담했다.하지만 강이나가 귀국하고 나서는 모
안지원이 잽싸게 말을 보탰다.“대표님,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이유는 뭘까요?”현재의 도아영은 예전과 전혀 달랐다.아까만 해도 내키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는데 이제 와서 고분고분 주방으로 달려가 요리하고 있다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뭐가 불길한데?”이수호가 무심하게 말했다.“도아영 같은 여자를 상대할 때는 자금과 수완으로 협박하면 얌전히 꼬리를 내리게 되어 있어.”저녁 8시가 다가오자 이수호는 2층에서 내려왔다.도아영은 마지막 요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허리에 두른 앞치마를 풀었다.이수호가 말했다.“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다시 내려와.”그의 말투는 명령과 다름없었고 도아영이 물었다.“무슨 옷이요?”“아영 씨, 이거 입으시면 돼요.”도우미가 유니폼 한 벌을 건네주었다.물론 자신을 노골적으로 모욕하기 위해 꾸민 꿍꿍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렸다.당연히 발끈할 거라는 이수호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유니폼을 들고 곧장 2층으로 향했다.“대표님...”안지원이 불쑥 끼어들었다.“아무리 할머님께서 부재중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망신 주다가 나중에 돌아오셔서 알게 되신다면...”“그러든지 말든지.”이수호가 싸늘하게 말했다.“도원 그룹은 기껏해야 이경 그룹의 발판일 뿐이야. 파산 직전의 기업 후계자에게 자존심 따위는 사치에 불과해.”말을 마치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곧이어 이수호가 초대한 손님이 도착했다.도아영은 줄곧 2층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경 그룹과 협력 예정인 외국 기업 재벌 유태범이었다.그동안 구연준과 이수호가 유태범을 두고 끊임없이 경쟁했던 거로 기억했는데 누가 거래를 성사하느냐에 따라 해외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전생에도 이수호는 오늘에 유태범을 집으로 초대해서 만찬을 가졌다. 목적은 다름 아닌 사업을 따내서 구연준을 짓밟는 것이었다.당시 그녀는 유태범의 까다로운 입맛을 사로잡기
“아영아.”이때, 이수호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도아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이어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발견했고 능글맞은 말투에는 장난기가 묻어났다.“이리 와.”구연준은 제자리에 서서 유니폼 차림의 도아영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그제야 도아영도 이수호가 일부러 구연준을 불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아마도 대놓고 망신을 주려는 작정인 듯싶었다.“연준 씨, 앉으시죠.”이수호는 도아영을 바라보며 명령조로 말했다.“아영아, 어서 의자 좀 빼줘.”도아영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이수호가 말을 이어갔다.“얼른 손님 모시지 않고 서서 뭐 해?”도아영은 구연준의 곁으로 다가가 의자를 빼주었다.“구 대표님, 앉으세요.”그녀의 말투는 무덤덤했다.구연준은 굳이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유태범의 시선이 도아영으로 향해더니 한마디 보탰다.“이 분은 도아영 씨 아닌가요? 전에 뵌 적이 있는데 역시나 미인이시네요.”도아영은 옆에 서서 미소만 지을 뿐 묵묵부답했다.“집에서 귀한 자식 취급받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한낱 도우미에 불과하죠.”이수호는 말을 이어가면서 구연준을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아영아, 연준 씨와 유 대표님께 술 한 잔 따라드려.”도아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남한테 모욕감을 주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지라 이번에 제대로 망신당하게 할 작정인 듯싶었다.“네, 대표님.”도아영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이내 유태범의 앞에 다가가 술을 따르고 나서 구연준의 자리로 걸어가 한 잔 따라주었다.“이리 와.”이수호의 말을 듣자 마지못해 그의 곁으로 돌아갔다.그리고 식탁 위의 술잔을 톡톡 건드리는 남자를 보고 눈치껏 술을 따랐다.대놓고 소유욕을 드러내는 모습을 구연준이 모를 리 없었다.잠자코 지켜보던 유태범이 얼른 말을 보탰다.“이 대표님은 역시 대단하시네요. 도씨 일가 자제분마저 대표님 앞에서는 허드렛일이나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니.”이수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도아영은 시종일관 입을 꾹
따라서 도미가 아닌 것쯤은 쉽게 보아냈다.묵묵부답하는 유태범을 보자 도아영은 팔보채를 앞접시에 덜어서 건네주었다.“팔보채도 드셔보세요.”하지만 온갖 희귀한 식자재를 발견하고 젓가락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전부 거래 금지 품목에 속하는지라 부자들의 식탁에서 볼까 말까 했다.게다가 유태범은 희귀 동물 보호 홍보대사로서 멸종위기 생물을 살리기 위해 꾸준히 기부를 해왔기에 이런 음식을 좋아할 리 없다.요리를 입에 대지도 않는 유태범을 바라보며 이수호가 물었다.“혹시 입맛에 안 맞으시나요?”“이 대표님도 알다시피 젊었을 때 전 해산물 사업을 했죠.”유태범의 안색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래서 식자재에 대해 누구보다 훤하죠.”아리송한 말에 이수호는 아직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지 못했다.이때, 유태범이 쐐기를 박았다.“저는 속임수를 쓰는 사람을 가장 혐오해요. 더군다나 불법적인 거래는 절대로 안 하죠. 제 생각에 이번 협력 건은 없던 일로 하는 게 좋을 듯싶어요.”이수호는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유 대표님, 마침 저희 집에서도 정갈한 가정식을 준비했는데 혹시 자리 옮길 의향은 있으신가요?”구연준이 불쑥 끼어들자 유태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수호를 향해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그러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구연준과 함께 집을 나섰다.유태범은 이수호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대표님?”입구에 있던 안지원이 서둘러 다가와서 쫓아가야 하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이수호의 눈빛이 점차 싸늘해졌다.강주를 통틀어 감히 그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도아영,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이수호는 도아영에게 화살을 돌렸다.그녀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대답했다.“유 대표님이 돌아간다고 하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조금 전까지 이수호 씨를 위해 비위를 맞춰주기 급급했잖아요. 혹시 본인이 실수한 건 아니에요?”이수호는 눈살을 찌푸렸다.물론 그녀가 줄곧 잘 보이려고 애를 쓴 건 사실이었고 딱히 수작을 부린
이수호는 콧방귀를 뀌었다.“할머니로 날 협박하려는 건가? 수법이 너무 뻔하지 않아?”“그게 뭐 어때서요? 효과가 있으면 장땡이죠.”뒤돌아서는 그녀를 보자 이수호는 손을 뻗어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도아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뭐 하는 거예요!”“도아영, 본인의 신분을 똑똑히 기억해. 넌 내 약혼녀야. 어차피 오늘은 구연준에게 남의 여자를 함부로 탐내지 말라고 경고하는 게 목적이었어.”도아영은 이수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내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만약 할머니가 돌아오실까 봐 걱정된다면 안심해. 할머니한테 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정을 쌓고 싶다고 했더니 기쁜 마음으로 이미 짐을 다 빼셨어.”“이...!”도아영의 낯색이 흙빛으로 변했다.이수호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말했다.“그리고 할머니 앞에서 쓸데 없는 소리라도 지껄였다는 사실을 들키는 순간 결혼식 날짜를 앞당길 거야. 너도 구연준이라는 대어를 너무 일찍 포기하고 싶지는 않잖아?”도아영은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모든 사람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나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수호는 도아영을 놓아주며 쌀쌀맞게 대답했다.“이나에게 덫을 놔서 우리 사이를 오해하게 할 때는 언제이고, 나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거든?”“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잖아요.”“내가 믿을 것 같아?”이수호가 말을 이어갔다.“이나랑 같은 학교 다니는 거 알아. 앞으로 학교에서 얌전히 지내. 이제 모든 사람이 네가 내 약혼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구연준이랑 집적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끝장일 테니까.”그러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이수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건 도아영도 눈치챘다.어쨌거나 유태범이라는 파트너를 잃게 되었으니 손실이 엄청났을뿐더러 구연준만 이득을 본 셈이었다.도아영은 방금 이수호에게 붙잡혔던 손목을 문질렀다.‘두고 봐, 어차피 날 집에 남겨둔 이상 본인만 점점 불행해질 테니까.’그리고 유
모두가 구연준이 강이나의 유학 문제로 찾아왔을 거라 여길 때 이 남자는 매우 차분하게 조나린을 가리켰다.“조나린.”불현듯 지명을 당한 조나린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네...”그녀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연준이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문밖의 경호원이 긴급하게 프린트한 통지서를 그에게 건넸다.구연준은 통지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예 조나린에게 내던졌다.“넌 오늘부로 퇴학이야.”통지서가 조나린의 발끝에 떨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말도 안 돼!”허겁지겁 통지서를 주워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퇴학 조치 서류였다.퇴학이란 두 글자를 본 조나린은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럴 수가? 내가 왜? 대체 왜?’그녀는 옆에 있는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한편 강이나도 안색이 어두웠다.두 여자가 절친 사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구연준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모든 학생들 앞에서 퇴학 통지서를 내던졌다는 건 대놓고 조나린의 뺨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대표님,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조나린이 횡설수설하면서 해명하려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에 구연준이 차분한 얼굴로 되물었다.“오해? 도서관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상이 모조리 녹화됐어. 병원에서 부상 진단서까지 받았는데 오해라고? 이번 사건은 범법 행위에 속하니 넌 고의상해죄 및 학교 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 이제 모두가 성인이라 법적 상식을 갖고 본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뭇사람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느새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조나린 씨 맞죠? 저희와 함께 서에 가시죠.”경찰 한 명이 입을 열자 조나린은 사색이 되었다.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이라니, 게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갈 신세가 되었다.그녀는 강이나에게 거의 애원하듯 소리쳤다.“이나야, 강이나! 살려줘! 나 좀 구해달란 말이야.”다만 강이나도 감히 꿈쩍하지 못했다.구연준에게 겁먹은 것도 있고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무조건 퇴학 조처를 해야 합니다!”“저도 같은 의견입니다!”...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그 시각 학교 통보를 기다리는 조나린은 너무 긴장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조나린은 교실 안에서 강이나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이나야, 나 퇴학당하는 거 아니겠지? 뭐라고 말 좀 해봐.”유하영은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더니 얼른 다가가서 위로했다.“괜찮아, 나린아. 부주의로 손을 밟은 것뿐인데 어떻게 퇴학까지 가겠어? 게다가 이나도 이미 이 대표님께 말했을 거야. 이번 일은 꼭 잘 해결될 테니까 너무 걱정 마.”말을 마친 그녀는 줄곧 함구하는 강이나를 바라봤다.“이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이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조나린을 위해 사정한 적이 없는데 이 사실을 아직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알리지 못했다.어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호에게 의심을 받았던 터라 본인 문제도 해결 못 한 마당에 조나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었을까?하지만 이건 단지 도아영의 손등을 밟은 간단한 문제이니 너무 심각한 조처는 없을 것 같았다. 강이나는 결국 모든 공로를 본인에게 돌렸다.“그래, 맞아. 어제 수호 씨한테 다 얘기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린아.”조나린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됐다.‘하긴, 도아영이 대체 뭐라고? 이수호랑 파혼까지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대단해?’그도 그럴 것이 한성대는 실력과 배경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손등만 밟았을 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도아영, 넌 이제 뒤 봐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도 이번 사건을 그냥 스쳐 지날 거야.’조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다. 강이나만 나서면 그녀는 무조건 무사할 테니까.이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할 때 교실 밖에서 웅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구연준이 어느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안경까지 착용하니 고귀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
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뭐라고?”“대표님, 나 같은 여자애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어요. 게다가 그 땅은 내가 사려던 게 아니라 연준 씨가 사겠다고 해서 낙찰받은 거예요.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때 도씨 일가의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천억을 구하겠어요? 그 땅이 정 그렇게 욕심난다면 구 대표님을 찾아가 보세요. 팔지 말지는 구 대표님께 걸렸거든요.”도아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수호는 그녀의 말투에서 선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 장난해? 그 땅은 분명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이렇게 쉽게 줘버렸다고?”“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당시 연준 씨가 돈을 대줬고 이제 와서 거둬가겠다고 하니 제가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연준 씨한테 돌려줘야죠.”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저도 후회해요. 이 땅이 이렇게까지 값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눈 딱 감고 사버리는 건데! 괜히 좋다 말았네요.”“너...”이수호는 그녀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하늘에서 떨어진 횡재를 이토록 홀가분하게 구연준에게 넘겨주다니.구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줄곧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이 땅을 구연준에게 줬다는 건 이경 그룹 하반기 온천리조트 계획이 백 퍼센트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이수호가 떠나가려 하자 그녀는 일부러 목을 내빼면서 말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으시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수호가 침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도아영도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쉬었다.이수호는 그녀가 아빠가 주신 혼수를 전부 끌어모아 남원 교외의 땅을 산 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참, 모르길 천만다행이지,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원 그룹을 압박하여 그녀의 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이 땅을 뺏어갔을 것이다.‘연준 씨, 미안하게 됐네요. 또 연준 씨를 내세우고 말았어요.’그 시각, 한성대 캠퍼스.“에취!”구연준은 난생처음 학교에서 이미지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학생들이 전부 쳐다보자
‘이 인간도 알고 있었네!’도아영은 무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부의 결책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요? 미리 알다니, 말도 안 돼!”“그래? 그럼 이건 뭔데?”이수호는 또다시 신문 기사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남원 교외에서 샘물을 파냈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 거야?”“정말요?”그녀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에이, 설마. 나 그냥 대충 한번 땅을 낙찰받은 건데 그럼 이제 부자 되는 거예요?”“도아영!”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었다.이에 이수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이 땅은 우리 이경 그룹에서 가져갈 거야. 추후에 계약서 보낼 테니 넌 사인만 하면 돼.”“죄송하지만 나 아직 허락한다고 안 했는데요?”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자 이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하반기에 온천리조트를 개발할 계획이란 걸 너도 다 알고 있잖아!”“이경 그룹 향후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도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지금 이 땅이 곧 개발된다고 하니까 나한테서 뺏는 거예요?”“뺏는다고 안 했어. 마땅한 금액으로 보상해줄 거야.”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너무 커서 네가 조종할만한 사이즈가 아니야. 지금 바로 돈도 챙기고 좋잖아?”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거만했다.다만 그가 이토록 이 땅에 집착하는 걸 보아 도아영도 한 번쯤 떠보고 싶었다.“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열 배로 쳐줄게.”이수호가 답했다.“애초에 네가 천억으로 샀으니 열 배로 갚을게. 그 땅 이경 그룹에 넘겨.”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장사꾼은 역시 장사꾼이라니까.’이 땅은 정부의 보상과 지지를 받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 지지하는 중점 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으며 거기에 샘물까지 파냈으니 미래 가치는 가늠할 수가 없다.1조 원이 아니라 지금
다음날 이수호는 가정부와 기사를 시켜서 도아영을 집으로 보낸 후 회의하러 회사에 나갔다.그는 회의내용 따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도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생각만 해도 웃겼다. 그는 저도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광경을 본 회의실의 뭇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대표님이 왜 이러시지?’“에헴!”옆에 있던 안지원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이수호에게 눈치를 줬다.그제야 이수호도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이 방안대로 해요.”“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이때 매니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남원 교외의 땅을 며칠째 파고 있는데 어제 그 땅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하반기 온천리조트 사업과 충돌하니 이 땅을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남원 교외가 우리 회사의 미래 산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또한 우리도 그 땅을 이용해서 온천리조트 계획을 확장할 수 있고요.”이수호는 처음에 그다지 새겨듣지 않았는데 남원 교외라는 네 글자가 어딘가 익숙했다.“대표님, 남원 교외는 도아영 씨가...”안지원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그에게 말했다.도아영을 언급하는 순간 이수호는 경매장에서 그녀가 천억을 주고 남원 교외의 땅을 낙찰받은 일이 떠올랐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자 뭇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회의 끝!”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회의를 마무리하자 안지원이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나섰다.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대표님이 요즘 왜 이러실까?’그가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안지원은 겨우 따라잡았다.차에 탄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조사해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운전하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경 그룹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