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도아영! 너 이런 취향이었어? 도원 그룹 딸이나 돼서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퉤!”도아영은 그런 이수호를 빤히 쳐다봤다.“취향은 개뿔!”그녀는 곧이어 이수호의 방안의 불을 환하게 켰다.하지만 이미 개조한 조명이라 전보다 더 빨갛게 변해버릴 따름이었다.눈앞의 광경에 그녀는 표정이 굳어버렸다.이수호가 아찔한 눈빛으로 쳐다보니 더 깊게 오해한 게 분명했다.다만 도아영도 이제 더는 짙은 향기를 감당할 수가 없어 얼른 그 향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곧이어 향초를 발견했고 가차 없이 물을 뿌려서 불을 끈 후 베란다로 달려가 모든 창문을 열어놓았다.차가운 바람이 방안에 불어와 공기 속의 향기를 모조리 집어삼켰다.도아영은 신선한 공기를 맡고 나서야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이수호도 좀 전보다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었다.그녀는 침대에 있는 이수호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잘 들어요. 이번 일은 나랑 아무 상관없어요. 그리고 또! 이 방 안의 물건들 내가 손댄 거 아니에요!”잠자코 듣고 있던 이수호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지금 끈을 풀어줄 테니 일단 가서 찬물에 샤워해요. 만에 하나 또 나한테 몹쓸 짓 한다면 그땐 확!”그녀는 목을 그어버리겠다는 시늉을 했다.이수호도 방금 그녀에게 걷어차인 장면을 되새기며 안색이 점점 짙어졌다.“내 말 제대로 이해했으면 풀어줄게요. 끝까지 이해 못 했다면 내일 아침 안 비서가 와서 풀어줄 때까지 기다리든가요!”“일단... 이거 풀어줘.”이수호는 아까보단 이성을 되찾은 모습이었다.그제야 도아영도 앞으로 다가가서 끈을 풀어주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서자마자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이수호는 그녀의 옆모습을 힐긋 보았는데 볼이 살짝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약물 작용인지 아니면 진짜 예뻐서인지 왠지 모르게 도아영한테서 매혹적인 분위기가 흘러넘쳤다.“다 됐어요.”그녀가 풀어주자마자 이수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덥석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도아영은 눈앞이 빙 도는 것
그러고는 바짝 긴장한 채 문 앞을 주시했다.한편 문밖의 발걸음 소리도 멈췄는데 아무래도 문에 기대 안의 인기척을 엿듣는 모양이다.이수호는 고개를 들고 도아영의 갸름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저도 몰래 시선이 흘러내려 그녀의 쇄골과 새하얀 속살의 가슴 라인까지 보게 됐다.도아영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흔한 향수 냄새도 아니고 화장품 냄새도 아닌 깔끔하고 자연스러운 체취인지라 저도 몰래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졌다.이때 갑자기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 지금?!”이어서 재빨리 제 옷을 꼭 잡았고 단추가 안 풀린 걸 확인하고 나서야 이수호의 셔츠를 마구 헐뜯었다.쓱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남자의 안색도 어둡게 돌변했다.“도아영, 너...”“이수호 씨! 제발 정신 좀 차려요! 강이나 씨 생각은 안 해요? 이거 놓으라고요!”그녀는 이수호를 빤히 쳐다보며 엄청 화내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말투는 교태가 차 넘쳤다.그는 도아영의 원맨쇼를 지켜보면서 실소를 터트리곤 단번에 그녀를 침대에 깔아 눕혔다.갑작스러운 반격에 도아영이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주도권은 또다시 이수호에게 돌아갔다.도아영은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말했다.“이수호! 이거 안 놔?”“연기는 너부터 시작했잖아. 할 바엔 제대로 해야지.”그는 말하면서 도아영의 허리를 확 비틀었다.너무 아픈 나머지 그녀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신음을 냈다.심지어 차오르는 고통에 눈물까지 맺히고 말았다.이수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이제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는데 또다시 울화가 치밀어오르는 기분이었다.그 시각 문밖에서 듣고 있던 사람은 몰래 웃으면서 살금살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온 어르신께 신나게 보고를 드렸다.“어르신, 걱정 마세요. 제가 방금 엿들었는데 두 분 아주 잘 지내고 계십니다.”가정부는 더 상세하게 설명하진 않고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그제야 어르신도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큰마음 먹고 오늘만을 위해서 준비해왔는데 드디어 성과를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그래. 오늘 일은 너랑 상관없다고 쳐. 그렇다고 네가 정말 나를 해칠 마음이 없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아니요. 난 수호 씨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요.”도아영은 이 남자와 대화하는 게 너무 유치해서 옆으로 확 밀치곤 침대에서 일어났다.“너 지금 나가면 우리 방금 연기였다는 걸 할머니께서 바로 눈치채실 거야.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도 더 할 분이잖아.”“그럼 어쩌라고요? 설마 나더러 여기서 밤을 지새우란 말이에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말은 이렇게 하지만 도아영도 썩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이수호의 말대로 지금 나가면 어르신이 바로 눈치채실 테니까.그렇게 되면 좀전의 열연은 수포가 되어버린다.이때 이수호가 침대를 가볍게 내리치며 그녀에게 말했다.“이리 와.”도아영도 이번엔 순순히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얌전히 옆에 누워서 잘 줄 알았는데 그녀가 갑자기 씩 웃더니 이수호가 덮고 있는 이불과 베개를 모조리 빼가는 것이었다.순간 이수호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고마워요. 방이 워낙 커서 대충 바닥에서 자면 될 것 같아요.”곧이어 그녀는 이불을 바닥에 펴기 시작했다.이 광경을 본 이수호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너 정말...”“굿나잇.”도아영은 그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빨간 LED 조명까지 싹 다 꺼버렸다.방안에는 오직 흐릿한 빨간색 스탠드만 켜져 있었고 이수호는 갑갑해서 질식해버릴 것만 같았다.전에는 도아영이 들러붙어도 싫다고 거부했는데 이젠 선뜻 기회를 줘도 이 여자가 손절하고 있다니...‘좋아! 두 번은 없어! 평생 없다고!’그는 스탠드까지 확 꺼버렸다.그 시각 가정부는 뒷마당에서 이수호의 방안에 불이 다 꺼지자 얼른 어르신께 말씀드렸다.어르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내일 아침에 바로 가서 강이나 씨 불러와.”가정부는 순간 어르신의 뜻을 알아채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어르신.”다음날 이른 아침.도아영이 어렴풋이 눈을 떴는데
도아영의 옷은 어젯밤에 둘이서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탓에 주름이 가득 잡혔다.이수호는 대충 흰 셔츠를 한 장 집어서 그녀에게 내던졌다.곧이어 그녀는 셔츠를 챙기고 욕실로 향했다.욕실 문이 닫히자 반투명한 유리로 그녀의 섹시한 실루엣이 드러났는데 이를 본 이수호는 다 식었던 마음이 또다시 뜨겁게 불타올랐다.욕실에서 물소리가 흘러나왔다.이수호는 아무리 정신을 다잡아보려고 해도 물소리 때문에 진정할 수가 없었다.그녀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이수호는 한창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바디워시 다 썼어요. 새로 하나 사줘야 해요?”“내가 고작 바디워시로 너랑 따지고 들까 봐?”이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쳐다봤는데 방금 건넨 흰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 너무 매혹적이었다.도아영은 원래 늘씬한 몸매에 매끈한 다리를 지녔고 셔츠가 마침 허벅지까지 닿아서 새하얀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위로 시선을 올리면 축축이 젖은 긴 머리가 어깨에 드리워지고 셔츠가 넉넉한 탓에 쇄골이 선명하게 보였다.전엔 몰랐는데 도아영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이제 그만 내려가 볼까요?”도아영은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일단 아래층에 내려가서 어젯밤엔 둘이 함께 한 방에서 보냈다는 걸 증명하기만 한다면 할머니도 만족해하실 테고 그녀도 순조롭게 집에 돌아갈 수 있다.이수호는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그녀를 보더니 야유 조로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그럼 설마 나랑 계속 한방에서 지내고 싶으세요?!”도아영은 이 말을 내던지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 이수호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녀의 몸에서 나는 바디워시의 향기가 코를 찔렀는데 본인 몸에서 나는 냄새와 똑같은 향이었다.이것 참 묘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수호는 끝내 멍하니 넋 놓고 있었고 보다 못한 도아영이 질문을 건넸다.“안 가요?”그녀가 침실 문을 열자 이수호도 나지막이 말했다.“알았어.”그는 방금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얼른 시선을 거둬들이고 싶었지만 자꾸만
그녀가 입을 열고 이제 막 뭐라 해명하려 했지만 어르신이 어느덧 손짓하고 있었다.“아영아, 얼른 우리 집에 증손주를 안겨줘야지.”그 순간 강이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고 그대로 집 밖을 뛰쳐나갔다.이수호도 재빨리 그녀를 쫓아갔다.“이나야!”이수호는 달려가면서도 고개를 홱 돌리고 도아영을 째려봤다.이에 도아영은 가슴이 움찔거렸다.이 남자가 오해하는 건 대수롭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모함을 당한 기분이 실로 말이 아니었으니까.한편 어르신은 이수호가 강이나를 쫓아갈 걸 짐작이라도 한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앉아, 아영아.”“할머니, 아까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그녀가 질책하는 투로 물었지만 어르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너희 두 사람 약혼도 했겠다, 장차 우리 이씨 일가의 손주며느리가 될 사람이잖니. 걱정 말아라. 강이나는 절대 네 자리를 뺏을 수 없어.”‘뺏을 수 없다고? 할머니 이번 건은 진짜 치명적이시네.’말 한마디에 이수호의 의심을 샀으니 도아영은 앞으로 이씨 일가의 손주며느리가 될뿐더러 평생 할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그녀는 전생에 줄곧 강이나를 따라 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다 지켜봐 왔지만 단 한 번도 말린 적이 없다.왜냐하면 그녀가 아무리 똑같게 따라 한다고 해도 절대 이수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셨으니까.결국 도아영은 할머니의 환심을 사는 방식으로 이수호의 약혼녀가 되었다.전에는 할머니가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주는 거라고 여겼는데...이 집안 사람들의 수완은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었다.“할머니, 별다른 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도아영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자리를 떠났다.그 모습을 본 어르신은 인상을 살짝 구겼다.옆에 있던 가정부도 한마디 덧붙였다.“어르신, 아영 씨가 점점 공제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전에는 그토록 얌전하고 말을 잘 듣더니 이젠...”이에 어르신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적어도 강이나보단 나으니 대충 살지 뭐.”그
뻔뻔스러운 유정연의 몰골에 도아영은 눈빛이 점점 더 싸늘하게 식어갔다.“그런 거라면 아줌마가 잘못 짚었어요. 수호 씨는 지금 날 미워해도 모자랄 판이니 도원 그룹을 도와줄 일은 절대 없어요.”순간 유정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야?”도아영은 더이상 지루한 물음에 대꾸하기 귀찮아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결국 유정연만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이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주주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사모님! 회사가 이제 정말 다 망하게 생겼다고요! 대체 자금을 모을 수 있긴 한 거예요?”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또 다른 전화가 들어왔다.유정연은 하는 수 없이 새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협력업체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도원 그룹 지금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 프로젝트는 언제쯤 다시 진행할 수 있냐고요? 제발 확답을 주세요. 안 그러면 다른 데로 옮깁니다!”유정연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저희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조 대표님, 일단 진정하시고 며칠만 더 시간을 주세요!”“제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잘 들어요! 오늘 오후까지 확답을 내놓지 못하면 이번 일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겁니다!”상대가 가차 없이 전화를 꺼버렸다.유정연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도아영, 네 이년, 대체 일을 어떻게 한 거야?’그날 점심 유정연은 마지못해 옷을 차려입고 직접 운전하여 도원 그룹으로 출발했다.회사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내부가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고 뭇사람들은 유정연을 보더니 기세등등하게 달려왔다.“자자, 다들 일단 진정하시고. 사모님께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돌아오신 거잖아요!”안용준 상무가 유정연을 지켜주면서 회사 안으로 모셨다.뭇사람들은 회의실에 앉아서 그녀의 확답만 기다렸다.한편 유정연은 오늘 회사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줄 몰라서 마냥 심란할 따름이었다.회의실에는 담배 연기가 진동했고 주주들 중 한 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가 지
...유정연은 회의실을 가득 메운 원성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도원 그룹이 파산당하면 이 회사의 모든 채무는 반드시 그녀 스스로 갚아야 한다던 말...유정연은 순간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정말이에요! 이제 정말 회사를 아영이한테 넘겼다니까요!”유정연은 말하면서 계약서를 꺼내 보였다.“우린 이미 계약서까지 체결했어요! 며칠 전부터 아영이가 전적으로 회사를 관리하고 있었어요.”유정연은 가방에 있던 물건들을 전부 쏟아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전에 도아영과 체결했던 계약서를 찾아냈다.그때 두 부로 나뉘어서 한 부는 도아영이, 다른 한 부는 유정연이 챙겼었다.뭇사람들은 유정연의 손에 든 계약서가 진짜인 걸 확인하더니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 시작했다.“망했어... 도원 그룹이 진짜 망하게 생겼다고!”누가 이런 말을 내뱉을 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곧이어 도아영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뭇사람들은 도아영을 보자 멍하니 넋을 놓고 말았다.다만 유정연은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잡은 것처럼 재빨리 그녀에게 달려갔다.“너 드디어 왔네! 얼른 말해. 네가 바로 이 회사 책임자라고 말이야!”도아영은 안달이 난 유정연을 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래서 이렇게 왔잖아요, 아줌마.”“아영 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회사가 왜 아영 씨한테 넘어간 거예요?”몇몇 사람들은 도아영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그도 그럴 것이 도아영은 전에 오직 이수호의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회사 일은 일절 관심이 없었으니까.이때 도아영의 변호사도 안으로 들어왔다.도아영은 회의실 메인석에 앉으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도원 그룹은 아빠가 제게 남겨주신 산업이니 마땅히 제가 상속받아야 할 자산입니다. 변호사님, 시작하시죠.”“네.”최지수 변호사는 앞으로 나서며 서류 한 부를 꺼냈다.“이건 도 회장님께서 생전에 작성한 유언장입니다. 따님 도아영 씨는 도원 그룹을 물려받게 될 것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도아영을 지지하는 주주는 단 한 명도 없었고, 다들 회사를 매각해서 투자금을 돌려주기를 바랄 뿐이었다.물론 이런 상황은 도아영도 이미 예상했다.그녀가 변호사를 힐끔 쳐다보자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노트북을 꺼냈다.이내 엔터키를 누르는 순간 회사 계좌에 4천억이 입금되었다.“여러분, 보셨죠? 4천억 입금 완료했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4천억이라니? 이렇게 많은 돈을 무슨 수로 마련했단 말인가?이에 유정연도 깜짝 놀랐다.도아영한테 언제 4천억이 생긴 거지?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드는 주주들을 보자 도아영은 미소를 살짝 지었다.“돈은 이미 들어왔고, 혹시 또 궁금한 점이 있나요?”“4천억 맞아요?”“설마 우리를 붙잡아두기 위한 눈속임은 아니겠죠?”“대체 어디서 난 돈이죠?”...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도아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대답했다.“지금 돈의 출처보다 회사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해야 하는 게 여러분의 급선무이지 않나요?”“그게...”다들 멋쩍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며 잠시 말문이 막혔다.이때, 옆에 있던 유정연이 펄쩍 뛰면서 끼어들었다.“도아영! 4천억이 있었으면 진작에 내놓아야지, 대체 무슨 속셈으로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모습을 마냥 지켜본 거야?”유정연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도아영이라면 회사의 실권을 빼앗아 가기 위해 일부러 덫을 놓고도 남았을 가능성이 컸다.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도아영은 유정연을 향해 활짝 웃었다.“아줌마, 내가 이 돈을 마련하려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알아요? 정작 본인은 기여한 게 없으면서 오히려 타박만 하면 너무했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아니...”유정연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는 무려 회사의 경영권이 달린 문제이지 않은가?원래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했던 회사를 도아영이 날름 가로채게 생겼다.이내 화를 꾹 참고 옆에 있는 안용준을 힐끗 쳐다보았고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모두가 구연준이 강이나의 유학 문제로 찾아왔을 거라 여길 때 이 남자는 매우 차분하게 조나린을 가리켰다.“조나린.”불현듯 지명을 당한 조나린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네...”그녀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연준이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문밖의 경호원이 긴급하게 프린트한 통지서를 그에게 건넸다.구연준은 통지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예 조나린에게 내던졌다.“넌 오늘부로 퇴학이야.”통지서가 조나린의 발끝에 떨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말도 안 돼!”허겁지겁 통지서를 주워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퇴학 조치 서류였다.퇴학이란 두 글자를 본 조나린은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럴 수가? 내가 왜? 대체 왜?’그녀는 옆에 있는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한편 강이나도 안색이 어두웠다.두 여자가 절친 사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구연준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모든 학생들 앞에서 퇴학 통지서를 내던졌다는 건 대놓고 조나린의 뺨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대표님,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조나린이 횡설수설하면서 해명하려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에 구연준이 차분한 얼굴로 되물었다.“오해? 도서관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상이 모조리 녹화됐어. 병원에서 부상 진단서까지 받았는데 오해라고? 이번 사건은 범법 행위에 속하니 넌 고의상해죄 및 학교 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 이제 모두가 성인이라 법적 상식을 갖고 본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뭇사람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느새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조나린 씨 맞죠? 저희와 함께 서에 가시죠.”경찰 한 명이 입을 열자 조나린은 사색이 되었다.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이라니, 게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갈 신세가 되었다.그녀는 강이나에게 거의 애원하듯 소리쳤다.“이나야, 강이나! 살려줘! 나 좀 구해달란 말이야.”다만 강이나도 감히 꿈쩍하지 못했다.구연준에게 겁먹은 것도 있고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무조건 퇴학 조처를 해야 합니다!”“저도 같은 의견입니다!”...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그 시각 학교 통보를 기다리는 조나린은 너무 긴장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조나린은 교실 안에서 강이나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이나야, 나 퇴학당하는 거 아니겠지? 뭐라고 말 좀 해봐.”유하영은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더니 얼른 다가가서 위로했다.“괜찮아, 나린아. 부주의로 손을 밟은 것뿐인데 어떻게 퇴학까지 가겠어? 게다가 이나도 이미 이 대표님께 말했을 거야. 이번 일은 꼭 잘 해결될 테니까 너무 걱정 마.”말을 마친 그녀는 줄곧 함구하는 강이나를 바라봤다.“이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이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조나린을 위해 사정한 적이 없는데 이 사실을 아직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알리지 못했다.어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호에게 의심을 받았던 터라 본인 문제도 해결 못 한 마당에 조나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었을까?하지만 이건 단지 도아영의 손등을 밟은 간단한 문제이니 너무 심각한 조처는 없을 것 같았다. 강이나는 결국 모든 공로를 본인에게 돌렸다.“그래, 맞아. 어제 수호 씨한테 다 얘기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린아.”조나린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됐다.‘하긴, 도아영이 대체 뭐라고? 이수호랑 파혼까지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대단해?’그도 그럴 것이 한성대는 실력과 배경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손등만 밟았을 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도아영, 넌 이제 뒤 봐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도 이번 사건을 그냥 스쳐 지날 거야.’조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다. 강이나만 나서면 그녀는 무조건 무사할 테니까.이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할 때 교실 밖에서 웅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구연준이 어느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안경까지 착용하니 고귀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
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뭐라고?”“대표님, 나 같은 여자애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어요. 게다가 그 땅은 내가 사려던 게 아니라 연준 씨가 사겠다고 해서 낙찰받은 거예요.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때 도씨 일가의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천억을 구하겠어요? 그 땅이 정 그렇게 욕심난다면 구 대표님을 찾아가 보세요. 팔지 말지는 구 대표님께 걸렸거든요.”도아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수호는 그녀의 말투에서 선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 장난해? 그 땅은 분명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이렇게 쉽게 줘버렸다고?”“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당시 연준 씨가 돈을 대줬고 이제 와서 거둬가겠다고 하니 제가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연준 씨한테 돌려줘야죠.”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저도 후회해요. 이 땅이 이렇게까지 값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눈 딱 감고 사버리는 건데! 괜히 좋다 말았네요.”“너...”이수호는 그녀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하늘에서 떨어진 횡재를 이토록 홀가분하게 구연준에게 넘겨주다니.구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줄곧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이 땅을 구연준에게 줬다는 건 이경 그룹 하반기 온천리조트 계획이 백 퍼센트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이수호가 떠나가려 하자 그녀는 일부러 목을 내빼면서 말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으시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수호가 침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도아영도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쉬었다.이수호는 그녀가 아빠가 주신 혼수를 전부 끌어모아 남원 교외의 땅을 산 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참, 모르길 천만다행이지,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원 그룹을 압박하여 그녀의 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이 땅을 뺏어갔을 것이다.‘연준 씨, 미안하게 됐네요. 또 연준 씨를 내세우고 말았어요.’그 시각, 한성대 캠퍼스.“에취!”구연준은 난생처음 학교에서 이미지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학생들이 전부 쳐다보자
‘이 인간도 알고 있었네!’도아영은 무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부의 결책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요? 미리 알다니, 말도 안 돼!”“그래? 그럼 이건 뭔데?”이수호는 또다시 신문 기사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남원 교외에서 샘물을 파냈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 거야?”“정말요?”그녀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에이, 설마. 나 그냥 대충 한번 땅을 낙찰받은 건데 그럼 이제 부자 되는 거예요?”“도아영!”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었다.이에 이수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이 땅은 우리 이경 그룹에서 가져갈 거야. 추후에 계약서 보낼 테니 넌 사인만 하면 돼.”“죄송하지만 나 아직 허락한다고 안 했는데요?”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자 이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하반기에 온천리조트를 개발할 계획이란 걸 너도 다 알고 있잖아!”“이경 그룹 향후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도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지금 이 땅이 곧 개발된다고 하니까 나한테서 뺏는 거예요?”“뺏는다고 안 했어. 마땅한 금액으로 보상해줄 거야.”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너무 커서 네가 조종할만한 사이즈가 아니야. 지금 바로 돈도 챙기고 좋잖아?”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거만했다.다만 그가 이토록 이 땅에 집착하는 걸 보아 도아영도 한 번쯤 떠보고 싶었다.“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열 배로 쳐줄게.”이수호가 답했다.“애초에 네가 천억으로 샀으니 열 배로 갚을게. 그 땅 이경 그룹에 넘겨.”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장사꾼은 역시 장사꾼이라니까.’이 땅은 정부의 보상과 지지를 받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 지지하는 중점 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으며 거기에 샘물까지 파냈으니 미래 가치는 가늠할 수가 없다.1조 원이 아니라 지금
다음날 이수호는 가정부와 기사를 시켜서 도아영을 집으로 보낸 후 회의하러 회사에 나갔다.그는 회의내용 따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도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생각만 해도 웃겼다. 그는 저도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광경을 본 회의실의 뭇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대표님이 왜 이러시지?’“에헴!”옆에 있던 안지원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이수호에게 눈치를 줬다.그제야 이수호도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이 방안대로 해요.”“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이때 매니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남원 교외의 땅을 며칠째 파고 있는데 어제 그 땅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하반기 온천리조트 사업과 충돌하니 이 땅을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남원 교외가 우리 회사의 미래 산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또한 우리도 그 땅을 이용해서 온천리조트 계획을 확장할 수 있고요.”이수호는 처음에 그다지 새겨듣지 않았는데 남원 교외라는 네 글자가 어딘가 익숙했다.“대표님, 남원 교외는 도아영 씨가...”안지원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그에게 말했다.도아영을 언급하는 순간 이수호는 경매장에서 그녀가 천억을 주고 남원 교외의 땅을 낙찰받은 일이 떠올랐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자 뭇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회의 끝!”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회의를 마무리하자 안지원이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나섰다.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대표님이 요즘 왜 이러실까?’그가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안지원은 겨우 따라잡았다.차에 탄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조사해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운전하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경 그룹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