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의 안색이 철저하게 짙어졌다.다만 도아영은 다시 의자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수호 씨, 그럼 이만.”“도아영, 생각 잘하고 말해라!”“이미 충분히 생각 마쳤어요.”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수호 씨도 말했듯이 오늘은 밸런타인데이라 연인들이 함께 보내는 날이잖아요. 얼른 가서 이나 씨랑 데이트해야지 뭣 하러 나 데리고 집에 돌아간다고 그래요? 강이나 씨가 오해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좋아. 지금 한 말 딱 기억해!”말을 마친 이수호는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레스토랑을 나섰다.밖에서 대기하던 안지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대표님, 아영 씨가 거부하시면 이제 어떡하죠? 어르신께서 물으신다면...”“가서 똑똑히 조사해와. 아영이 얼굴에 난 상처가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이야.”이에 이수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방금 그 두 여자애가 아영 씨한테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의심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두 분은 강이나 씨랑 친한 사이인 것 같던데, 만에 하나 제가 캐물었다가...”“그럼 식당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든가.”이수호가 싸늘하게 말했다.“이런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야 해?”“아... 네, 대표님.”이수호는 레스토랑 안에서 신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도아영과 구연준을 마지막으로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미간이 더 구겨졌다.‘밸런타인데이를 구연준과 함께 보내고 싶어? 꿈 깨, 도아영!’그는 옆에 있는 안지원에게 분부했다.“유정연한테 전화해서 딸 단속 잘하라고 전해!”“네...”그날 오후 도아영은 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그녀를 본 유정연은 울화가 치밀어 다짜고짜 삿대질하면서 욕했다.“도아영! 너 점심에 어디 갔다 왔어?”“아줌마는 오지랖도 참 넓으시네요. 내가 어디 갔다 오든 아줌마랑 뭔 상관인데요?”그녀가 말대꾸하자 유정연이 두 눈을 부릅떴다.“왜 상관이 없어? 수호가 집에까지 연락이 왔단 말이야!”“그래요?”이에 도아영이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래서요?”“뭐가 그
“아영 씨가 함께 돌아가겠다고 하시니 다행입니다.”안지원이 예의 바르게 웃으며 답했다.“그럼 이쪽으로 모실게요, 아영 씨.”도아영은 지금 유정연이 얼마나 초조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내일이 회사 마감 기한이라 이수호가 끝까지 투자하지 않으면 도원 그룹은 철저히 무너져버린다.물론 이수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알았어요. 갈게요 그럼.”도아영은 이 말을 끝으로 안지원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유정연은 그녀가 차에 올라탄 후에야 아양을 떨던 표정이 싹 사라지고 하찮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잘난 척은! 어차피 수호 차에 올라탈 거면서.”20분 후, 이씨 저택.안지원이 그녀를 대문 앞까지 직접 모셨다.도아영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분위기가 몸을 확 감쌌다.전생에 그녀는 이씨 저택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뻔뻔스럽게 이 집안으로 이사 와서 이수호와 남현숙 어르신을 위해 모든 시중을 들어주었다.하지만 결국 그녀에게 차려진 건 처참한 결말이었다.이 집안 곳곳에 그녀의 비천했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도아영은 무표정하게 안으로 들어갔지만 식탁에 저녁 식사가 차려지진 않았다.한편 어르신은 거실에서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이수호도 그녀가 올 걸 확신한 듯 야유에 찬 미소를 지었다.낮에는 구연준에게 아부하고 저녁엔 또 어르신께 잘 보이려고 하니 그야말로 욕심 많은 여자였다.“우리 아영이 드디어 왔네.”어르신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네가 없는 동안 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옷도 대충 입고 다녔어. 나뿐만 아니라 수호도 마찬가지야.”맞은편에 있던 이수호가 미간을 구겼다.보다시피 어르신의 말에 썩 내키지 않은 눈치였다.도아영도 이수호가 자신이 돌아오길 바랐다고는 믿지 않았다.그녀는 웃으며 할머니께 말씀드렸다.“할머니, 오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어요?”“수호가 얼마 전에 도미찜 먹고 싶다고 했잖아. 집안 도우미들이 어떻게 차려줘도 마음에 안 든다면서 꼭 네가 한 걸 먹고 싶다는 거야. 오늘 저녁은... 네가 한번 차
어르신은 도아영에게 시선을 돌렸다.“아영아, 그냥 아무거나 대충하면 돼. 난 볼일 있어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어르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을 나서기 전에 이수호에게 따끔하게 눈치를 주기까지 했다.곧이어 집안에 도아영과 이수호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언제까지 서 있을 거야? 얼른 가서 밥해.”그녀를 바라보는 이수호의 눈가에 존중과 배려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집에 아무도 없는데 왜 끝까지 연기해요?”도아영은 그를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물었다.“정말 배고프면 배달시켜요!”“뭐?”그녀는 홀로 주방에 들어가 손을 씻고 음식 준비에 나섰다.이를 본 이수호가 쓴웃음을 지었다.“어쭈? 나보고 배달시키라더니 또 밥을 하는 거야? 진짜 가고 싶으면 할머니 안 계실 때 그냥 나가버리면 되잖아.”“수호 씨, 정말 바보예요?”도아영이 무덤덤하게 물었다.“할머니는 지금 우리 둘만 집에 남겨둬서 서로 좀 더 친해지라고 하는 건데 내가 어떻게 이 집을 나가요? 아마 밖으로 문이 잠겨서 열리지도 않을걸요.”이수호는 반신반의하며 대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손잡이를 잡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밖으로 잠겨서 도통 열리지 않았다.도아영은 손을 씻고 냉장고에서 식자재를 대충 짚이는 대로 꺼냈다.“지금 배달시키면 문을 열 수도 있어요.”이에 이수호가 휴대폰을 꺼내 배달음식을 주문하려고 했다. 하지만 휴대폰에 신호가 전혀 안 잡히고 집안 전체에 와이파이가 꺼진 상태였다.순간 이수호의 안색이 확 짙어졌다.도아영은 그런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난 그저 내가 먹을 만큼만 해요. 수호 씨 배고프면 직접 하시든가요.”“지금 장난해?”그가 미간을 찌푸렸다.어르신이 집안 도우미들까지 싹 다 빼돌렸으니 이제 정말 그를 위해 밥을 해줄 사람이 없다.도아영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간단한 계란말이를 했다. 주방에서 간간이 풍미로운 음식 향이 감돌았다.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이수호는 그 냄새에 곧장 신경이 쏠렸다.“뭐해, 지금?”“어떤 거
“적당히 해라, 도아영.”이수호가 정색하며 쏘아붙였다.“내가 진짜 먹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그럼 편한 대로 하세요, 수호 씨.”그럼에도 도아영은 도발하듯이 그를 앞에 두고 맛있게 밥을 먹었다.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라온 이수호는 영락없는 요알못이다.그녀가 일부러 약 올리자 이수호가 화내긴커녕 피식 웃었다.‘이 여자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이제 점점 날뛰네?!’그는 주방에 들어가 라면을 꺼내더니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이를 본 도아영은 더 크게 웃어댔다.‘네가 과연 뭘 할 수 있을까?’아니나 다를까 주방에 인기척이 점점 더 커지더니 이수호가 달랑 라면 한 그릇을 들고 나왔다.이미 밥을 다 먹은 도아영은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며 라면을 힐긋 살피다가 경멸의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에 이수호는 마침내 분노가 폭발했다.“방금 웃었어?”“아니에요, 아무것도. 괜한 생각 마세요, 수호 씨.”도아영은 그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답했다.“그냥 설거지하러 들어온 것뿐이에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경멸에 찬 미소가 모든 걸 의미했다. 성인 남자가 돼서 밥도 제대로 못 하냐고 비아냥거리고 있었으니까.그 순간 이수호는 입맛이 싹 다 가셨다.그는 와인장에서 와인 한 병 꺼내 잔에 따른 후 벌컥벌컥 마셨다.이 남자는 위가 나빠서 저녁을 안 먹으면 속이 엄청 쓰리다. 그럼에도 이수호는 매일 밤 습관처럼 와인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한다.도아영은 문득 전생에 자신이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이런 인간을 위해 술을 끊게 하려고 모진 애를 썼으니 말이다.그렇게 남 걱정을 할 바에 차라리 본인이나 더 챙기는 게 훨씬 나을 법했다.그녀는 더 이상 이수호를 쳐다보지 않았다.‘그래, 마셔. 마시고 죽어도 내가 알 바 아니야.’시간이 일분일초 흐르고 거실 분위기가 점점 더 이상하게 변해갔다.도아영은 줄곧 시간을 쟀는데 11시가 다 됐어도 어르신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한편 이수호는 계속 소파에 기대 신문을 읽고 있었다.참다못한 그녀
방안의 구조는 변한 것 없지만 그녀의 물건들만 쏙 빠졌다.그 모습을 본 도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아영아, 넌 정말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었네?’그녀가 방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옆 방에서 갑자기 덜컥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도아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이수호의 방으로 걸어갔다.코를 찌를 듯한 짙은 향기가 방안에 진동했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도아영은 멍하니 넋을 놓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수호가 어느새 그녀를 방으로 끌어왔다.“도아영, 너 진짜 대단해!”그는 두 눈에 싸늘한 한기를 내뿜으면서 도아영에게 쏘아붙였다.거친 숨소리와 빨갛게 물든 얼굴의 홍조, 게슴츠레한 눈빛까지 어느 하나 정상인 게 없었다.이 남자는 도아영의 목을 꽉 졸랐다. 곧 질식할 것만 같은 그녀가 몸부림치며 말했다.“수호 씨, 일단 이것부터 놓고 얘기해요!”“너랑 할머니가 짠 시나리오야? 참 대단해!”“이거 놓으란 말이야!”그녀는 온몸의 힘을 다해 이수호를 밀치고 기침을 해댔는데 짙은 향기가 기도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느낌이었다.도아영은 사색이 된 채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그제야 이수호의 방에 빨간 커튼을 치고 조명도 누가 미리 손을 썼는지 야시시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이런 게 바로 네가 원하던 거야? 더러워 진짜!”그는 엄청난 힘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도아영을 침대에 깔아 눕혔다.꼼짝달싹할 수 없게 된 도아영이 그에게 큰소리로 외쳤다.“정신 차려, 이수호!”어떻게든 밀쳐내려고 힘껏 몸부림쳤지만 곧바로 이수호에게 다시 깔리고 말았다.이수호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그녀도 이 남자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최대한 숨을 들이마시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향기가 어느새 코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이거 놔!”도아영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고 이수호는 그녀가 발악할수록 더 흥분하며 아예 위에 올라탔다.“놔달라고? 대체 언제까지 고고한 척할래? 응?”그가 중저
“야, 도아영! 너 이런 취향이었어? 도원 그룹 딸이나 돼서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퉤!”도아영은 그런 이수호를 빤히 쳐다봤다.“취향은 개뿔!”그녀는 곧이어 이수호의 방안의 불을 환하게 켰다.하지만 이미 개조한 조명이라 전보다 더 빨갛게 변해버릴 따름이었다.눈앞의 광경에 그녀는 표정이 굳어버렸다.이수호가 아찔한 눈빛으로 쳐다보니 더 깊게 오해한 게 분명했다.다만 도아영도 이제 더는 짙은 향기를 감당할 수가 없어 얼른 그 향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곧이어 향초를 발견했고 가차 없이 물을 뿌려서 불을 끈 후 베란다로 달려가 모든 창문을 열어놓았다.차가운 바람이 방안에 불어와 공기 속의 향기를 모조리 집어삼켰다.도아영은 신선한 공기를 맡고 나서야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이수호도 좀 전보다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었다.그녀는 침대에 있는 이수호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잘 들어요. 이번 일은 나랑 아무 상관없어요. 그리고 또! 이 방 안의 물건들 내가 손댄 거 아니에요!”잠자코 듣고 있던 이수호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지금 끈을 풀어줄 테니 일단 가서 찬물에 샤워해요. 만에 하나 또 나한테 몹쓸 짓 한다면 그땐 확!”그녀는 목을 그어버리겠다는 시늉을 했다.이수호도 방금 그녀에게 걷어차인 장면을 되새기며 안색이 점점 짙어졌다.“내 말 제대로 이해했으면 풀어줄게요. 끝까지 이해 못 했다면 내일 아침 안 비서가 와서 풀어줄 때까지 기다리든가요!”“일단... 이거 풀어줘.”이수호는 아까보단 이성을 되찾은 모습이었다.그제야 도아영도 앞으로 다가가서 끈을 풀어주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서자마자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이수호는 그녀의 옆모습을 힐긋 보았는데 볼이 살짝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약물 작용인지 아니면 진짜 예뻐서인지 왠지 모르게 도아영한테서 매혹적인 분위기가 흘러넘쳤다.“다 됐어요.”그녀가 풀어주자마자 이수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덥석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도아영은 눈앞이 빙 도는 것
그러고는 바짝 긴장한 채 문 앞을 주시했다.한편 문밖의 발걸음 소리도 멈췄는데 아무래도 문에 기대 안의 인기척을 엿듣는 모양이다.이수호는 고개를 들고 도아영의 갸름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저도 몰래 시선이 흘러내려 그녀의 쇄골과 새하얀 속살의 가슴 라인까지 보게 됐다.도아영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흔한 향수 냄새도 아니고 화장품 냄새도 아닌 깔끔하고 자연스러운 체취인지라 저도 몰래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졌다.이때 갑자기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 지금?!”이어서 재빨리 제 옷을 꼭 잡았고 단추가 안 풀린 걸 확인하고 나서야 이수호의 셔츠를 마구 헐뜯었다.쓱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남자의 안색도 어둡게 돌변했다.“도아영, 너...”“이수호 씨! 제발 정신 좀 차려요! 강이나 씨 생각은 안 해요? 이거 놓으라고요!”그녀는 이수호를 빤히 쳐다보며 엄청 화내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말투는 교태가 차 넘쳤다.그는 도아영의 원맨쇼를 지켜보면서 실소를 터트리곤 단번에 그녀를 침대에 깔아 눕혔다.갑작스러운 반격에 도아영이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주도권은 또다시 이수호에게 돌아갔다.도아영은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말했다.“이수호! 이거 안 놔?”“연기는 너부터 시작했잖아. 할 바엔 제대로 해야지.”그는 말하면서 도아영의 허리를 확 비틀었다.너무 아픈 나머지 그녀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신음을 냈다.심지어 차오르는 고통에 눈물까지 맺히고 말았다.이수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이제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는데 또다시 울화가 치밀어오르는 기분이었다.그 시각 문밖에서 듣고 있던 사람은 몰래 웃으면서 살금살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온 어르신께 신나게 보고를 드렸다.“어르신, 걱정 마세요. 제가 방금 엿들었는데 두 분 아주 잘 지내고 계십니다.”가정부는 더 상세하게 설명하진 않고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그제야 어르신도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큰마음 먹고 오늘만을 위해서 준비해왔는데 드디어 성과를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그래. 오늘 일은 너랑 상관없다고 쳐. 그렇다고 네가 정말 나를 해칠 마음이 없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아니요. 난 수호 씨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요.”도아영은 이 남자와 대화하는 게 너무 유치해서 옆으로 확 밀치곤 침대에서 일어났다.“너 지금 나가면 우리 방금 연기였다는 걸 할머니께서 바로 눈치채실 거야.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도 더 할 분이잖아.”“그럼 어쩌라고요? 설마 나더러 여기서 밤을 지새우란 말이에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말은 이렇게 하지만 도아영도 썩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이수호의 말대로 지금 나가면 어르신이 바로 눈치채실 테니까.그렇게 되면 좀전의 열연은 수포가 되어버린다.이때 이수호가 침대를 가볍게 내리치며 그녀에게 말했다.“이리 와.”도아영도 이번엔 순순히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얌전히 옆에 누워서 잘 줄 알았는데 그녀가 갑자기 씩 웃더니 이수호가 덮고 있는 이불과 베개를 모조리 빼가는 것이었다.순간 이수호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고마워요. 방이 워낙 커서 대충 바닥에서 자면 될 것 같아요.”곧이어 그녀는 이불을 바닥에 펴기 시작했다.이 광경을 본 이수호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너 정말...”“굿나잇.”도아영은 그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빨간 LED 조명까지 싹 다 꺼버렸다.방안에는 오직 흐릿한 빨간색 스탠드만 켜져 있었고 이수호는 갑갑해서 질식해버릴 것만 같았다.전에는 도아영이 들러붙어도 싫다고 거부했는데 이젠 선뜻 기회를 줘도 이 여자가 손절하고 있다니...‘좋아! 두 번은 없어! 평생 없다고!’그는 스탠드까지 확 꺼버렸다.그 시각 가정부는 뒷마당에서 이수호의 방안에 불이 다 꺼지자 얼른 어르신께 말씀드렸다.어르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내일 아침에 바로 가서 강이나 씨 불러와.”가정부는 순간 어르신의 뜻을 알아채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어르신.”다음날 이른 아침.도아영이 어렴풋이 눈을 떴는데
“웃기는 사람이네.”도아영이 말했다.“수호 씨가 날 집으로 데려온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CCTV 영상을 지울 이유가 뭐 있지? 설령 3개월 동안 살았더라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영상 자료의 위치까지 어떻게 알겠어? 따지고 보면 오늘 온종일 집에 혼자 있었던 미소 씨가 더 의심스럽지 않아? 더욱이 도씨 일가 아가씨로서 고작 도우미에게 누명을 씌울 명분도 없잖아.”“저 아니에요. 진짜 오해예요.”김미소는 초조한 얼굴로 이수호를 향해 설명했다.“대표님, 전 억울해요.”“그만!”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렸다.그동안 집안 도우미들이 몰래 도아영을 괴롭힌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단지 매번 나서서 시비를 따지기 귀찮았을 뿐이었다.게다가 도아영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하지만 이번에 김미소는 선을 넘었다.이수호가 싸늘하게 말했다.“우리 집에 너처럼 행실이 나쁜 도우미는 필요 없으니까 이번 달 월급 받고 돌아가. 내일부터 출근 안 해도 돼.”갑작스러운 불호령에 김미소는 사색이 되었다.“대표님! 진짜 저 아니에요. 정말 억울해요.”이수호는 이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김미소는 안지원에게 끌려 밖으로 나갔다.도아영은 몸에 걸친 타월을 정리하며 말했다.“이제 올라가서 옷 갈아입어도 될까요?”팔다리를 훤히 드러낸 그녀를 발견한 이수호는 외투를 벗어 던져주며 싸늘하게 말했다.“옷 입고 내려와. 물어볼 게 있어.”도아영은 손에 든 외투를 힐긋 내려다보더니 다시 이수호를 향해 휙 던졌다.“마음만 받을게요.”얼떨결에 외투를 붙잡은 이수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간덩이가 부었군!’도아영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이내 소파에 앉아 그녀를 잠자코 기다리는 이수호를 발견했다.그러다 문득 전생에 멀리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워낙 그녀에 대한 적대감이 강해서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항상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랑하는 감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도아영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앞의 이수호를 바라보았다.“한창 샤워 중인데 본인이 갑자기 들이닥치고 왜 제 탓하는 거죠?”“이...!”이수호의 시선이 도아영한테서 떠나지 않았다.타월로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그녀는 매끈하고 하얀 다리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게다가 쇄골에 맺힌 물방울까지 더해 유난히 매혹적으로 느껴졌다.적나라한 이수호의 눈빛에 도아영은 타월을 위로 끌어올렸다.“그래서 제 방에는 왜 왔어요?”“누가 너 보고 유니폼을 자르래?”그녀는 이수호의 추궁에도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제가요? 언제요? 당최 무슨 말인지...”“어디서 발뺌이야!”이수호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옷을 잘라버린 의도가 뭐지? 나한테 반항하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관심이라도 끌려는 거야?”“수호 씨, 무슨 얘기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가네요.”도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니폼을 본 적이 없는데 설령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해도 그럴싸한 핑계를 대야지 않겠어요?”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는 그녀를 보자 이수호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따라 와.”이내 저벅저벅 걸어가 도아영의 팔을 붙잡고 아래층으로 끌고 갔다.손목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도아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1층에 도착하자 김미소는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진 천 쪼가리를 치우고 있었다.유니폼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다. 도아영은 옷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가 자른 거 아니에요.”“거짓말! 분명 아영 씨가 잘랐잖아요.”시치미를 떼는 도아영을 보자 김미소는 이수호를 향해 말했다.“아영 씨가 제 앞에서 가위로 옷을 싹둑싹둑 잘랐죠. 증언해드릴 수도 있어요!”“증언이라니? 날 고발한 사람이 미소 씨인데 어떻게 믿음이 가겠어?”도아영이 느긋하게 받아쳤다.“설령 범인이 나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도 다른 증인이 한 명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건...”김미소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짝!우렁찬 따귀 소리와 함께 도우미는 별안간 뺨을 얻어맞았다.이내 볼을 감쌌고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도아영은 싸늘한 시선으로 눈앞의 젊고 아리따운 여자를 쳐다보았다.“미소 씨 맞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그동안 존칭을 썼을 텐데 함부로 반말하면 되겠어?”“이...!”김미소는 이씨 저택에서 일을 오래 하고 얼굴이 예쁘장하다는 이유로 도아영이 늘 안중에도 없었다.또한, 전생에 그녀가 이 집안에서 얼마나 비굴했는지 똑똑히 지켜봐 온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심지어 엉뚱한 조언을 해준 탓에 이수호 앞에서 망신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거로 기억했다.따라서 이번 생에는 얼굴만 믿고 건방지게 구는 김미소를 절대로 봐줄 생각이 없었다.“아영 씨, 한낱 도우미라고 해도 엄연히 이씨 일가의 직원이거든요? 저한테 손찌검하는 건 대표님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셈이죠. 지금 당장 보고할 테니까 대표님이 준비한 유니폼을 잘라버린 이상 이 집에서 쫓겨나도 뭐라 하지 마세요.”김미소는 도아영을 노려보더니 너덜너덜해진 옷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저녁 무렵, 이수호는 유태범이 돌연 구연준과 손을 잡게 된 일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이내 집에 도착하자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울고 있는 김미소를 발견했다.이수호는 눈살을 찌푸렸고, 옆에 있던 안지원이 다가가서 물었다.“저녁 준비는 끝났어요? 왜 울어요?”“대표님, 아영 씨가 글쎄 대표님이 준비한 유니폼을 가위로 잘라버렸어요.”말을 마치고 나서 너덜너덜해진 옷을 내밀었다.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이수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낮에 도아영이 강이나와 그를 두고 홀연히 떠나가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는데 엉망이 된 옷을 보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지금 어디 있어?”이수호의 화를 돋우는 데 성공하자 김미소는 속으로 의기양양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2층이요! 옷을 자르자마자 올라가서 잠을 자더라고요. 대표님이 안중에 없는 게 분명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수호는 굳은 얼굴로 2
남자가 바람 피우는 건 지극히 정상이고, 여자는 욕심이 과하면 안 된다니?이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는가?“오늘 일은 못 본 척해줄 테니까 알아서 잘 처리해.”말을 마치고 나서 무언가를 떠올린 듯 한 마디 보탰다.“참, 전에 휴학했다고 하지 않았어?”“네.”“그렇다면 학교는 굳이 안 나가도 돼.”남현숙이 말을 이어갔다.“우리 집 손자며느리로 들어온 이상 설령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졸업증은 받을 거야.”“할머니...”“이만 가 봐. 지금은 오로지 수호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지 고민하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마. 게다가 곧 결혼할 새댁이 아직도 학교에 다니면 남들이 비웃을지도 몰라.”남현숙은 명령조로 말했다.도아영은 못마땅했지만 당장 거절할 입장이 안 되었다.만약 남현숙과 등을 돌리는 순간 도원 그룹이 이수호의 공격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녀는 끌려다니기 마련이다.결국 아무 말 없이 묵인했다.그제야 고분고분해진 도아영을 보자 남현숙이 흡족하게 말했다.“우리 아영이 착하네.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도 말을 잘 듣기 때문이지. 수호가 한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던데 아주 긍정적인 신호야.”남현숙은 도아영의 손을 토닥였다.“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입맛부터 공략해야 해. 너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요리 솜씨잖아. 수호는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으니까 제대로 만족만 시켜준다면 널 떠날 걱정은 안 해도 돼.”의미심장한 말투에 도아영은 그녀가 언급한 ‘만족’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보아하니 이수호와 이미 관계를 가졌기에 같이 살게 된 거로 단단히 오해한 듯싶었다.도아영이 피식 웃었다.“알겠어요. 할머니.”“알면 다행이고.”남현숙은 작은 병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앞으로 자기 전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무슨 효능이 있는지는 차차 알게 될 거야.”도아영은 갈색 병을 흘긋 내려다보았다.남현숙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는데 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지난번 이수호의 방에서
“어르신!”장서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동안 남현숙을 모시면서 말실수한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해고를 운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이 주둥이가 방정이네요. 전 단지...”“끌고 가.”남현숙은 장서남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곧이어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더니 자리를 떠났다.도아영은 남현숙의 친숙한 면만 봐왔던 지라 이렇게 무자비하게 누군가를 내치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어쩌면 이게 바로 그녀의 본모습일지 모른다. 아마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너그러운 척 선의를 베풀었을 수도 있다.심성이 원래 착하신 분이라면 고작 말실수를 한 번 했다고 몇 년 동안 따라다니던 직원을 가차 없이 자르지는 않을 테니까.“아영아, 혹시 기사 내용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오늘 널 불렀어.”“무슨 기사요?”도아영은 모르는 척 남현숙을 바라보았다.남현숙이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에 그녀가 도원 그룹의 후계자로서 구호 그룹과 손을 잡았다는 내용이 떡하니 나타났다.“구연준이 4천억을 빌려준 거야?”남현숙은 못마땅한 말투로 물었다.언젠간 물어볼 거로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녀의 귀에 흘러 들어갈 줄은 몰랐다.“할머니, 소문이 와전된 것 같은데 구호 그룹과 도원 그룹은 평범한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에요.”“평범하든 말든 둘째치고, 적어도 수호의 약혼녀로서 구연준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라고 봐.”남현숙의 말투가 어느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게다가 이미 임자도 있는 사람이 무슨 회사를 운영한다고 그래? 이참에 남동생에게 넘겨줘. 서남의 말에 많이 불쾌하겠지만 일부는 맞다고 생각해. 어쨌거나 자기 약혼자한테 신경을 써야지 회사 일은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마. 여자는 기가 너무 세도 남자가 싫어해.”남현숙의 말에 도아영은 헛웃음이 났다.“할머니, 회사는 아빠가 물려준 유산이라 남한테 넘길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수호 씨의 마음은 애초에 딴 데 있는지라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되돌리기는 힘들걸요? 저를 설득하는 것보다 차라리
장서남은 도아영을 쫓아가기 위해 얼른 차에 올라탔다.부리나케 뒤따라오는 장서남을 보자 도아영은 냉소를 지었다.성격이 물러터진 고용주 때문에 일개 직원 따위가 감히 건방지게 구는 것이다.엄연히 도씨 일가 아가씨로서 어떻게 보면 손님인 셈인데 고작 운전기사가 주인 행세를 하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건 납득이 불가했다.예전에는 화가 나도 참았지만 이제는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잠시 후 택시는 이씨 별장 앞에 멈추어 섰다.남현숙은 본가에서 이사한 이후로 별장에서 지냈다.창문 너머로 택시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자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뭐지? 서남한테 데리러 가라고 하지 않았어? 왜 혼자 왔대?”“글쎄요...”옆에 있던 도우미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분명 장서남이 픽업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지금 장난해? 동네방네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할 작정이야?”남현숙은 씩씩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리고 거실로 들어선 도아영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아영아, 왜 혼자 왔어? 서남이가 데리러 안 갔어?”“아니요. 픽업하러 오셨던데 저보다 강이나 씨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냥 택시 타고 왔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서남이 현관문을 열고 허둥지둥 뛰어왔다.남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아영을 픽업하러 보냈더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어, 어르신...”장서남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그냥 잡담을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아영 씨가 화를 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게다가 어르신의 체면이 구겨지게 택시를 타다니! 이게 다 제 탓입니다. 괜히 허튼소리를 해서 말이에요. 단지 대표님에게 신경을 좀 더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정색하며 차에서 내릴 줄이야... 만약 다른 사람의 귀에 흘러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텐데 정말 큰 일이네요.”남현숙을 오랫동안 모셔 온 사람으로서 성격 또한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체면을 가장 중요시했다.손님이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일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따라서 도아영이
그제야 장서남은 도아영의 눈에 웃음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이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도씨 일가 아가씨라고 해도 두려울 게 뭐 있나 싶었다. 그래봤자 이수호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신세이지 않은가?그리고 말을 이어갔다.“아영 씨, 어르신에게 잘 보이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에요. 대표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성질이 고약한 여자이죠. 그에 비해 강이나 씨는 여성스러움과 착함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사모님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지도 몰라요.”장서남은 도아영에게 이수호의 아내, 더욱이 강이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아니면 애초에 강이나를 따라 하며 환심을 사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도아영의 콧대를 꺾었다는 생각에 장서남은 의기양양했다. 곧이어 싸늘한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차 세워요!”갑작스러운 명령에 깜짝 놀란 나머지 브레이크를 밟았다.“아영 씨...”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아영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이를 본 장서남은 겁에 질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그리고 운전석을 허둥지둥 벗어나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씨 일가에 어떻게 이런 무례한 직원이 다 있죠? 방금 그런 말은 대체 누가 해도 된다고 했는지 궁금하네요.”진지한 모습은 절대로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장서남의 안색이 순식간에 돌변했다.도아영은 워낙 성격이 순하고 소심한 탓에 방금 내뱉은 말은커녕 설령 수위가 훨씬 더 높아도 여태껏 화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이게 다 아영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은혜도 모르고 뭐 하는 짓이죠? 만약 강이나 씨였더라면 고참 직원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거예요.”그는 일부러 ‘고참’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도아영은 장서남이 남현숙의 최측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지라 신뢰가 두둑했다.따라서
도아영의 편을 들어주는 이수호 때문에 강이나는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동안 원수를 대하는 듯 냉정한 모습만 지켜봐 왔기에 모욕은 일상이며, 더욱이 감싸주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이지?설마 도아영과 정말 결혼할 생각인가?한편, 주민서는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다행히 따돌렸나 봐. 이수호 장난 아닌데? 설마 경호원을 총동원한 거야?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영화라도 찍는 줄 알겠어.”그러고 나서 도아영을 돌아보며 툴툴거렸다.“너도 참, 쓸데없이 이수호는 왜 도와줘? 그냥 둘이 지지고 볶게 놔두지. 결국 너만 남의 흉내를 내서 남자나 꼬시러 다니는 여우 년이 되어버렸잖아. 본전도 못 찾았네.”“이수호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거든?”전생에 이미 교훈을 얻은 만큼 다시는 이수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답이었다.게다가 강이나라면 죽고 못 사는 남자이니 이번 생에는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서 비운의 커플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이때, 도아영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전화한 걸까?곧이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 휴대폰 너머로 남현숙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영아, 이따가 기사님을 보낼게. 물어볼 게 있어.”왠지 모르게 딱딱한 말투에 도아영이 재빨리 대답했다.“할머니, 저 아직 학교라서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교장 선생님께 이미 말씀드렸으니 그냥 가도 돼. 기사님이 곧 도착할 거야.”말을 마치고 나서 전화를 뚝 끊었다.끊임없이 이어지는 통화 종료음을 들으면서 도아영은 조소를 머금었다.그리고 속으로 바보 같은 자신을 비웃었다.그동안 이수호가 무슨 짓을 하든 남현숙만큼은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태어나고 나서야 이씨 가문 사람은 한통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미래의 시할머니에게 진심을 바라는 자체가 사치였다.결국 모든 건 이익으로 귀결되었다.곧이어 도아영
그러고 나서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둘러싸인 채 강의실로 걸어갔다.내부는 이경 그룹의 경호원들로 가득했다.유하영은 이수호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대표님!”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고 멀지 않은 곳에서 강이나의 모습을 발견했다.한편, 강이나는 이수호의 맞은편에 있는 도아영을 바라보았다.게다가 도아영의 팔을 잡은 이수호 때문에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아영 씨가 여긴 왜...”유하영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조나린과 시선을 주고받았다.이수호가 강이나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도아영한테 볼 일이 있을 줄이야.결국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태까지 이르렀다.“수호 씨, 이게 무슨 상황이죠?”강이나는 불만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도아영이 이수호의 손을 뿌리치며 불쑥 끼어들었다.“이나 씨를 찾으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제 만나게 되었으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말을 마치고 나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주민서를 데리고 도망쳤다.이수호는 굳은 얼굴로 따라가려고 했지만 강이나가 그를 불렀다.“수호 씨!”이내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유하영이 불쑥 끼어들었다.“내가 뭐랬어? 대표님은 널 보러 왔다고 했지? 이게 다 뻔뻔스러운 도아영 탓이야. 예전부터 너만 따라 하기 급급하더니 어쩌면 지금도 변함이 없을까? 누가 봐도 대표님을 유혹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잖아. 흥!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유하영의 말을 듣고 있던 이수호는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강이나는 이수호에게 다가가 물었다.“수호 씨, 하영 말이 맞아요?”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강주에서 이수호가 강이나를 사랑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반면, 도아영은 예전부터 강이나의 스타일을 따라 하며 흡사한 외모를 무기 삼아 이수호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다.“당연하지 않겠어? 대표님은 사람을 잘못 본 게 확실해.”조나린이 맞장구를 쳤다.죽이 척척 맞는 두 여자 때문에 도아영은 본의 아니게 이수호를 유혹하기 위해 갖은 꿍꿍이를 꾸미는 여자가 되어버렸다.“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