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은 도아영에게 시선을 돌렸다.“아영아, 그냥 아무거나 대충하면 돼. 난 볼일 있어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어르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을 나서기 전에 이수호에게 따끔하게 눈치를 주기까지 했다.곧이어 집안에 도아영과 이수호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언제까지 서 있을 거야? 얼른 가서 밥해.”그녀를 바라보는 이수호의 눈가에 존중과 배려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집에 아무도 없는데 왜 끝까지 연기해요?”도아영은 그를 바라보며 시큰둥하게 물었다.“정말 배고프면 배달시켜요!”“뭐?”그녀는 홀로 주방에 들어가 손을 씻고 음식 준비에 나섰다.이를 본 이수호가 쓴웃음을 지었다.“어쭈? 나보고 배달시키라더니 또 밥을 하는 거야? 진짜 가고 싶으면 할머니 안 계실 때 그냥 나가버리면 되잖아.”“수호 씨, 정말 바보예요?”도아영이 무덤덤하게 물었다.“할머니는 지금 우리 둘만 집에 남겨둬서 서로 좀 더 친해지라고 하는 건데 내가 어떻게 이 집을 나가요? 아마 밖으로 문이 잠겨서 열리지도 않을걸요.”이수호는 반신반의하며 대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손잡이를 잡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밖으로 잠겨서 도통 열리지 않았다.도아영은 손을 씻고 냉장고에서 식자재를 대충 짚이는 대로 꺼냈다.“지금 배달시키면 문을 열 수도 있어요.”이에 이수호가 휴대폰을 꺼내 배달음식을 주문하려고 했다. 하지만 휴대폰에 신호가 전혀 안 잡히고 집안 전체에 와이파이가 꺼진 상태였다.순간 이수호의 안색이 확 짙어졌다.도아영은 그런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난 그저 내가 먹을 만큼만 해요. 수호 씨 배고프면 직접 하시든가요.”“지금 장난해?”그가 미간을 찌푸렸다.어르신이 집안 도우미들까지 싹 다 빼돌렸으니 이제 정말 그를 위해 밥을 해줄 사람이 없다.도아영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간단한 계란말이를 했다. 주방에서 간간이 풍미로운 음식 향이 감돌았다.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이수호는 그 냄새에 곧장 신경이 쏠렸다.“뭐해, 지금?”“어떤 거
“적당히 해라, 도아영.”이수호가 정색하며 쏘아붙였다.“내가 진짜 먹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그럼 편한 대로 하세요, 수호 씨.”그럼에도 도아영은 도발하듯이 그를 앞에 두고 맛있게 밥을 먹었다.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라온 이수호는 영락없는 요알못이다.그녀가 일부러 약 올리자 이수호가 화내긴커녕 피식 웃었다.‘이 여자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이제 점점 날뛰네?!’그는 주방에 들어가 라면을 꺼내더니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이를 본 도아영은 더 크게 웃어댔다.‘네가 과연 뭘 할 수 있을까?’아니나 다를까 주방에 인기척이 점점 더 커지더니 이수호가 달랑 라면 한 그릇을 들고 나왔다.이미 밥을 다 먹은 도아영은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며 라면을 힐긋 살피다가 경멸의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에 이수호는 마침내 분노가 폭발했다.“방금 웃었어?”“아니에요, 아무것도. 괜한 생각 마세요, 수호 씨.”도아영은 그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답했다.“그냥 설거지하러 들어온 것뿐이에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경멸에 찬 미소가 모든 걸 의미했다. 성인 남자가 돼서 밥도 제대로 못 하냐고 비아냥거리고 있었으니까.그 순간 이수호는 입맛이 싹 다 가셨다.그는 와인장에서 와인 한 병 꺼내 잔에 따른 후 벌컥벌컥 마셨다.이 남자는 위가 나빠서 저녁을 안 먹으면 속이 엄청 쓰리다. 그럼에도 이수호는 매일 밤 습관처럼 와인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한다.도아영은 문득 전생에 자신이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이런 인간을 위해 술을 끊게 하려고 모진 애를 썼으니 말이다.그렇게 남 걱정을 할 바에 차라리 본인이나 더 챙기는 게 훨씬 나을 법했다.그녀는 더 이상 이수호를 쳐다보지 않았다.‘그래, 마셔. 마시고 죽어도 내가 알 바 아니야.’시간이 일분일초 흐르고 거실 분위기가 점점 더 이상하게 변해갔다.도아영은 줄곧 시간을 쟀는데 11시가 다 됐어도 어르신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한편 이수호는 계속 소파에 기대 신문을 읽고 있었다.참다못한 그녀
방안의 구조는 변한 것 없지만 그녀의 물건들만 쏙 빠졌다.그 모습을 본 도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아영아, 넌 정말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었네?’그녀가 방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옆 방에서 갑자기 덜컥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도아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이수호의 방으로 걸어갔다.코를 찌를 듯한 짙은 향기가 방안에 진동했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도아영은 멍하니 넋을 놓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수호가 어느새 그녀를 방으로 끌어왔다.“도아영, 너 진짜 대단해!”그는 두 눈에 싸늘한 한기를 내뿜으면서 도아영에게 쏘아붙였다.거친 숨소리와 빨갛게 물든 얼굴의 홍조, 게슴츠레한 눈빛까지 어느 하나 정상인 게 없었다.이 남자는 도아영의 목을 꽉 졸랐다. 곧 질식할 것만 같은 그녀가 몸부림치며 말했다.“수호 씨, 일단 이것부터 놓고 얘기해요!”“너랑 할머니가 짠 시나리오야? 참 대단해!”“이거 놓으란 말이야!”그녀는 온몸의 힘을 다해 이수호를 밀치고 기침을 해댔는데 짙은 향기가 기도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느낌이었다.도아영은 사색이 된 채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그제야 이수호의 방에 빨간 커튼을 치고 조명도 누가 미리 손을 썼는지 야시시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이런 게 바로 네가 원하던 거야? 더러워 진짜!”그는 엄청난 힘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도아영을 침대에 깔아 눕혔다.꼼짝달싹할 수 없게 된 도아영이 그에게 큰소리로 외쳤다.“정신 차려, 이수호!”어떻게든 밀쳐내려고 힘껏 몸부림쳤지만 곧바로 이수호에게 다시 깔리고 말았다.이수호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그녀도 이 남자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최대한 숨을 들이마시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향기가 어느새 코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이거 놔!”도아영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고 이수호는 그녀가 발악할수록 더 흥분하며 아예 위에 올라탔다.“놔달라고? 대체 언제까지 고고한 척할래? 응?”그가 중저
“야, 도아영! 너 이런 취향이었어? 도원 그룹 딸이나 돼서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퉤!”도아영은 그런 이수호를 빤히 쳐다봤다.“취향은 개뿔!”그녀는 곧이어 이수호의 방안의 불을 환하게 켰다.하지만 이미 개조한 조명이라 전보다 더 빨갛게 변해버릴 따름이었다.눈앞의 광경에 그녀는 표정이 굳어버렸다.이수호가 아찔한 눈빛으로 쳐다보니 더 깊게 오해한 게 분명했다.다만 도아영도 이제 더는 짙은 향기를 감당할 수가 없어 얼른 그 향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곧이어 향초를 발견했고 가차 없이 물을 뿌려서 불을 끈 후 베란다로 달려가 모든 창문을 열어놓았다.차가운 바람이 방안에 불어와 공기 속의 향기를 모조리 집어삼켰다.도아영은 신선한 공기를 맡고 나서야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이수호도 좀 전보다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었다.그녀는 침대에 있는 이수호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잘 들어요. 이번 일은 나랑 아무 상관없어요. 그리고 또! 이 방 안의 물건들 내가 손댄 거 아니에요!”잠자코 듣고 있던 이수호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지금 끈을 풀어줄 테니 일단 가서 찬물에 샤워해요. 만에 하나 또 나한테 몹쓸 짓 한다면 그땐 확!”그녀는 목을 그어버리겠다는 시늉을 했다.이수호도 방금 그녀에게 걷어차인 장면을 되새기며 안색이 점점 짙어졌다.“내 말 제대로 이해했으면 풀어줄게요. 끝까지 이해 못 했다면 내일 아침 안 비서가 와서 풀어줄 때까지 기다리든가요!”“일단... 이거 풀어줘.”이수호는 아까보단 이성을 되찾은 모습이었다.그제야 도아영도 앞으로 다가가서 끈을 풀어주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서자마자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이수호는 그녀의 옆모습을 힐긋 보았는데 볼이 살짝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약물 작용인지 아니면 진짜 예뻐서인지 왠지 모르게 도아영한테서 매혹적인 분위기가 흘러넘쳤다.“다 됐어요.”그녀가 풀어주자마자 이수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덥석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도아영은 눈앞이 빙 도는 것
그러고는 바짝 긴장한 채 문 앞을 주시했다.한편 문밖의 발걸음 소리도 멈췄는데 아무래도 문에 기대 안의 인기척을 엿듣는 모양이다.이수호는 고개를 들고 도아영의 갸름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저도 몰래 시선이 흘러내려 그녀의 쇄골과 새하얀 속살의 가슴 라인까지 보게 됐다.도아영의 몸에서 나는 향기는 흔한 향수 냄새도 아니고 화장품 냄새도 아닌 깔끔하고 자연스러운 체취인지라 저도 몰래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졌다.이때 갑자기 그녀가 버럭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 지금?!”이어서 재빨리 제 옷을 꼭 잡았고 단추가 안 풀린 걸 확인하고 나서야 이수호의 셔츠를 마구 헐뜯었다.쓱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남자의 안색도 어둡게 돌변했다.“도아영, 너...”“이수호 씨! 제발 정신 좀 차려요! 강이나 씨 생각은 안 해요? 이거 놓으라고요!”그녀는 이수호를 빤히 쳐다보며 엄청 화내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말투는 교태가 차 넘쳤다.그는 도아영의 원맨쇼를 지켜보면서 실소를 터트리곤 단번에 그녀를 침대에 깔아 눕혔다.갑작스러운 반격에 도아영이 본능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주도권은 또다시 이수호에게 돌아갔다.도아영은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말했다.“이수호! 이거 안 놔?”“연기는 너부터 시작했잖아. 할 바엔 제대로 해야지.”그는 말하면서 도아영의 허리를 확 비틀었다.너무 아픈 나머지 그녀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신음을 냈다.심지어 차오르는 고통에 눈물까지 맺히고 말았다.이수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이제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는데 또다시 울화가 치밀어오르는 기분이었다.그 시각 문밖에서 듣고 있던 사람은 몰래 웃으면서 살금살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온 어르신께 신나게 보고를 드렸다.“어르신, 걱정 마세요. 제가 방금 엿들었는데 두 분 아주 잘 지내고 계십니다.”가정부는 더 상세하게 설명하진 않고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그제야 어르신도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큰마음 먹고 오늘만을 위해서 준비해왔는데 드디어 성과를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그래. 오늘 일은 너랑 상관없다고 쳐. 그렇다고 네가 정말 나를 해칠 마음이 없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아니요. 난 수호 씨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요.”도아영은 이 남자와 대화하는 게 너무 유치해서 옆으로 확 밀치곤 침대에서 일어났다.“너 지금 나가면 우리 방금 연기였다는 걸 할머니께서 바로 눈치채실 거야.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세 번도 더 할 분이잖아.”“그럼 어쩌라고요? 설마 나더러 여기서 밤을 지새우란 말이에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말은 이렇게 하지만 도아영도 썩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이수호의 말대로 지금 나가면 어르신이 바로 눈치채실 테니까.그렇게 되면 좀전의 열연은 수포가 되어버린다.이때 이수호가 침대를 가볍게 내리치며 그녀에게 말했다.“이리 와.”도아영도 이번엔 순순히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얌전히 옆에 누워서 잘 줄 알았는데 그녀가 갑자기 씩 웃더니 이수호가 덮고 있는 이불과 베개를 모조리 빼가는 것이었다.순간 이수호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고마워요. 방이 워낙 커서 대충 바닥에서 자면 될 것 같아요.”곧이어 그녀는 이불을 바닥에 펴기 시작했다.이 광경을 본 이수호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너 정말...”“굿나잇.”도아영은 그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빨간 LED 조명까지 싹 다 꺼버렸다.방안에는 오직 흐릿한 빨간색 스탠드만 켜져 있었고 이수호는 갑갑해서 질식해버릴 것만 같았다.전에는 도아영이 들러붙어도 싫다고 거부했는데 이젠 선뜻 기회를 줘도 이 여자가 손절하고 있다니...‘좋아! 두 번은 없어! 평생 없다고!’그는 스탠드까지 확 꺼버렸다.그 시각 가정부는 뒷마당에서 이수호의 방안에 불이 다 꺼지자 얼른 어르신께 말씀드렸다.어르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내일 아침에 바로 가서 강이나 씨 불러와.”가정부는 순간 어르신의 뜻을 알아채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어르신.”다음날 이른 아침.도아영이 어렴풋이 눈을 떴는데
도아영의 옷은 어젯밤에 둘이서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탓에 주름이 가득 잡혔다.이수호는 대충 흰 셔츠를 한 장 집어서 그녀에게 내던졌다.곧이어 그녀는 셔츠를 챙기고 욕실로 향했다.욕실 문이 닫히자 반투명한 유리로 그녀의 섹시한 실루엣이 드러났는데 이를 본 이수호는 다 식었던 마음이 또다시 뜨겁게 불타올랐다.욕실에서 물소리가 흘러나왔다.이수호는 아무리 정신을 다잡아보려고 해도 물소리 때문에 진정할 수가 없었다.그녀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이수호는 한창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바디워시 다 썼어요. 새로 하나 사줘야 해요?”“내가 고작 바디워시로 너랑 따지고 들까 봐?”이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쳐다봤는데 방금 건넨 흰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 너무 매혹적이었다.도아영은 원래 늘씬한 몸매에 매끈한 다리를 지녔고 셔츠가 마침 허벅지까지 닿아서 새하얀 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위로 시선을 올리면 축축이 젖은 긴 머리가 어깨에 드리워지고 셔츠가 넉넉한 탓에 쇄골이 선명하게 보였다.전엔 몰랐는데 도아영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이제 그만 내려가 볼까요?”도아영은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일단 아래층에 내려가서 어젯밤엔 둘이 함께 한 방에서 보냈다는 걸 증명하기만 한다면 할머니도 만족해하실 테고 그녀도 순조롭게 집에 돌아갈 수 있다.이수호는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그녀를 보더니 야유 조로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그럼 설마 나랑 계속 한방에서 지내고 싶으세요?!”도아영은 이 말을 내던지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 이수호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녀의 몸에서 나는 바디워시의 향기가 코를 찔렀는데 본인 몸에서 나는 냄새와 똑같은 향이었다.이것 참 묘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수호는 끝내 멍하니 넋 놓고 있었고 보다 못한 도아영이 질문을 건넸다.“안 가요?”그녀가 침실 문을 열자 이수호도 나지막이 말했다.“알았어.”그는 방금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얼른 시선을 거둬들이고 싶었지만 자꾸만
그녀가 입을 열고 이제 막 뭐라 해명하려 했지만 어르신이 어느덧 손짓하고 있었다.“아영아, 얼른 우리 집에 증손주를 안겨줘야지.”그 순간 강이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고 그대로 집 밖을 뛰쳐나갔다.이수호도 재빨리 그녀를 쫓아갔다.“이나야!”이수호는 달려가면서도 고개를 홱 돌리고 도아영을 째려봤다.이에 도아영은 가슴이 움찔거렸다.이 남자가 오해하는 건 대수롭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모함을 당한 기분이 실로 말이 아니었으니까.한편 어르신은 이수호가 강이나를 쫓아갈 걸 짐작이라도 한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앉아, 아영아.”“할머니, 아까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그녀가 질책하는 투로 물었지만 어르신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너희 두 사람 약혼도 했겠다, 장차 우리 이씨 일가의 손주며느리가 될 사람이잖니. 걱정 말아라. 강이나는 절대 네 자리를 뺏을 수 없어.”‘뺏을 수 없다고? 할머니 이번 건은 진짜 치명적이시네.’말 한마디에 이수호의 의심을 샀으니 도아영은 앞으로 이씨 일가의 손주며느리가 될뿐더러 평생 할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그녀는 전생에 줄곧 강이나를 따라 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다 지켜봐 왔지만 단 한 번도 말린 적이 없다.왜냐하면 그녀가 아무리 똑같게 따라 한다고 해도 절대 이수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셨으니까.결국 도아영은 할머니의 환심을 사는 방식으로 이수호의 약혼녀가 되었다.전에는 할머니가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주는 거라고 여겼는데...이 집안 사람들의 수완은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었다.“할머니, 별다른 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도아영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자리를 떠났다.그 모습을 본 어르신은 인상을 살짝 구겼다.옆에 있던 가정부도 한마디 덧붙였다.“어르신, 아영 씨가 점점 공제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전에는 그토록 얌전하고 말을 잘 듣더니 이젠...”이에 어르신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적어도 강이나보단 나으니 대충 살지 뭐.”그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그는 전에 도아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토록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다니.도아영은 진작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손을 빼냈다.“고마워요.”그제야 이수호는 방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전에 이경 그룹에서 도원 그룹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들 이 두 집안이 사이가 안 좋은 거로 여기며 선뜻 도원 그룹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수호와 도아영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으니 도원 그룹에 손 내밀 협력사도 슬슬 많아질 것이다.“감히 날 이용해?”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계략이 많은 줄은 몰랐다.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딸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라면서요?”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전에 이수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이용했고 이제 와서 전세가 역전됐을 뿐이다.“오늘 파티에 왜 날 초대했는지 모를까 봐요? 도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잖아요. 썩 쉽지만은 않을걸요.”도아영이 완전히 오해하자 이수호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뭐라고? 집어삼켜?”생각도 참 야무진 그녀였다.할머니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지녔지만 이수호는 절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영 씨. 대표님은...”“대표님은 뭐요? 도원 그룹을 넘본 게 아니라고요? 말도 안 돼!”오늘 이경 그룹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죄다 강주의 유명 인사들이다. 게다가 언론사까지 불러왔는데 도아영과 이수호의 관계를 널리 떠벌릴 목적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도아영은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이수호까지 남현숙과 같은 생각일 줄이야.“잘 들어! 난 절대 너희 집안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 따위 없어!”이수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요즘 그는 줄곧 도아영을 향한 솔직한 감정을 마주했다.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뒤로
도아영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도원 그룹에 유리한 일이니까.“의외네요, 대표님. 할머니 말 한마디에 선뜻 저를 만나주시네요?”도아영이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녀는 이수호가 마냥 귀찮을 따름이었다.꼭 마치 이전에 이수호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이제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다들 눈치챈 상황을 도아영이 모를 리가 있을까?그는 도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오늘 그녀는 금빛 롱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옆모습을 본 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녀의 모습과 전에 봤던 제니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으니까.그의 따가운 시선에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다들 지켜보는데 뭐 하는 거예요?”“조용히 해.”이수호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한시라도 빨리 본인의 추측을 인증받고 싶은 모양이다.제니는 차갑고 도도한 미인상이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외모도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어여쁜 도화안은 강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비쥬얼이었다.제니를 처음 볼 때부터 도아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제니의 모든 제스처가 도아영과 달랐으니까.이수호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성대 졸업시험에서 도아영의 성적 때문에 또다시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반년 가까이 휴학한 학생이 기말고사에서 이토록 높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까?그녀가 적은 답안은 명확한 사고와 충분한 이론을 지녔다. 이건 비즈니스 베테랑만이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었다.제니의 학력까지 떠올리자 이수호는 눈앞의 도아영을 더더욱 의심하게 됐다. 그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위너 그룹 CEO 제니가 아닐까?“다 봤어요?”도아영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도도한 제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이수호는 미간을 구겼다.“왜 그렇게 봐요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