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수작일 뿐이야.”이수호가 말했다.“날 후회하게 하려고 구연준을 만나는 거거든. 이런 형편없는 수작은 나한테 전혀 안 통해.”“도아영 씨 대기실은 저쪽입니다.”문밖, 한 스태프의 목소리가 이수호의 귀에 들려왔다.도아영은 검은 스커트를 입고 웨이브 머리를 풀어헤쳤다. 메이크업을 옅게 했는데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스태프는 저도 모르게 도아영을 여러 번 힐끗거렸다. 도아영이 스태프에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냥 시작하시죠.”“네. 그럼 바로 시작할게요.”그때 대기실 문이 열렸다. 도아영이 고개를 돌렸는데 마침 나오는 강이나와 마주쳤다. 강이나는 샤넬풍의 하얀색 세트를 입고 있었다. 보수적이면서도 단아해 보였다.“아영 씨, 어제 일은 정말 미안했어요.”강이나는 사과하면서 일부러 대기실에 있는 이수호를 보여주었다.‘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주도권을 잡겠다고 이러는 거야? 참 부질없어.’“나도 수호 씨를 설득해봤지만...”강이나는 잠깐 멈칫하면서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수호 씨를 탓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그러더니 도아영의 손까지 덥석 잡았다. 도아영은 강이나의 손을 힐끗 내려다보고는 다시 빼낸 다음 웃으면서 말했다.“강이나 씨, 괜한 생각 하지 말아요. 나랑 대표님 아무런 관계도 아니에요. 파혼도 내가 원한 건데 대표님을 탓할 리가 있겠어요?”도아영이 이수호에게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 같아 보이자 강이나도 그제야 웃었다.“그럼 다행이고요.”“도아영 씨, 무대 위로 올라가시죠.”그때 스태프가 도아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태프와 함께 무대 위로 걸어갔다.“대표님, 준비 다 됐습니다.”“알았어.”이수호도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로 올라갔다.강이나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해명하러 올라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마음 한구석이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이번에 파혼하면 좋을 텐데...’도아영과 이수호가 나란히 앉았고 카메라 플래시가 두 사람을 환하게 비췄다.“이 대표님,
도아영이 씩 웃었다.“당연히...”“당연히 가짜죠.”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회의실 문 쪽으로 향했다. 회의실 문이 열렸고 남현숙이 화를 내면서 들어왔다.남현숙을 본 순간 도아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자주 외출하지 않는 분이 오늘 왜 갑자기 여기에 오셨지? 설마 내가 이수호랑 파혼한다는 소식을 누가 흘렸나?’그때 무대 뒤에 있던 강이나도 남현숙을 보자마자 표정이 급변했다.남현숙이 가장 예뻐하는 손주며느리가 도아영이라는 걸 강주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스포트라이트가 남현숙에게 향했고 기자들은 끊임없이 셔터를 눌렀다.“할머니...”이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남현숙은 이수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두 사람의 가운데 자리로 걸어갔다.눈치 빠른 스태프가 남현숙에게 의자를 가져다주었다.남현숙은 자애로운 얼굴로 도아영을 보면서 손을 꼭 잡았다.“오늘 이 기자회견은 지난번에 약혼식에서 있었던 일을 해명하는 자리입니다.”그녀가 계속하여 말했다.“두 사람 약혼식 날에 제가 갑자기 중병이 발작해서 수호가 저를 병원에 데려가느라 약혼식이 중단된 거예요. 근데 어떤 언론사에서 악의적인 추측을 늘어놓으면서 파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렸더라고요. 파혼한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오늘 파혼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해명하려고 기자회견을 열었어요.”남현숙의 말에 기자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도아영이 뭐라 얘기하려는데 남현숙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카메라 앞에서 남현숙은 미소를 잃지 않았고 도아영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남현숙의 체면을 세워주기 싫은 게 아니라 이수호와 파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한 기자가 질문을 건넸다.“소문에 약혼식에서 이수호 대표님이 도망간 이유가 첫사랑인 강이나 씨가 손목을 그어서라던데. 이 소문은 사실입니까?”“당연히 아니죠.”남현숙이 차갑게 대답했다.“수호랑 강이나 씨는 그냥 친구 사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게... 전...”강이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이수호를 쳐다보았다. 이수호의 표정도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를 난감한 상황에 빠뜨릴 수 없어 이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저와 강이나는 그냥 친구입니다.”“누가 너한테 말하라고 했어?”남현숙은 강이나를 보면서 싸늘하게 말했다.“강이나 씨더러 직접 말하라고 해.”“저와 이 대표님은 그냥 친구예요.”“강이나 씨가 수호 때문에 손목을 그었다는 소문이 돈다고 했죠?”남현숙이 강이나의 왼쪽 손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강이나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손목에 하얀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다친 듯했다.남현숙은 그녀가 손목에 감고 있던 붕대를 가차 없이 잡아당겼다. 강이나는 반항하려 했지만 남현숙은 뜻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붕대가 순식간에 풀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이나의 손목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강이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현장에 있던 기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남현숙이 싸늘하게 웃었다.“봤죠? 손목을 그었다는 건 그냥 해프닝일 뿐입니다. 강이나 씨 손목은 상처 하나 없이 아주 깔끔해요.”그때 이수호도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강이나는 피하기에 급급했고 당장이라도 내려가고 싶었다.도아영마저도 순간 멍해졌다. 강이나가 손목을 그었다는 게 거짓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수호가 다른 여자와 약혼한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강이나 성격에 진짜 손목을 그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에 대한 이수호의 마음을 증명하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결국 강이나는 울면서 무대를 뛰쳐나갔다. 이수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갑게 말했다.“오늘 기자회견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그러고는 안지원에게 눈짓했다. 눈치 빠른 안지원은 재빨리 기자들을 돌려보냈다.“죄송하지만 오늘 기자회견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선물을 준비했으니까 저 따라오세요.”안지원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기자들을 전부 데리고 나갔다.도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현숙이 말했다.“아영아
남현숙의 질문에 강이나가 다급하게 대답했다.“아니에요... 할머니. 오해하셨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할머니, 이나는 저한테 도아영이랑 화해하라고 설득했고 진심으로 우릴 축복해줬어요. 할머니가 오해하셨어요. 이경 그룹의 사모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이나는 한 적이 없어요.”이수호가 아직도 강이나의 편을 들자 남현숙이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우리 손자는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저 여자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다 믿어? 아영이가 왜 너랑 파혼하겠다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어. 강이나 씨, 정말 대단해.”“할머니, 저한테 오해가 있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전 아영 씨와 수호 씨 사이를 갈라놓지 않았어요... 만약 할머니가 계속 절 오해한다면 앞으로 수호 씨를 떠나겠습니다.”강이나는 마치 큰 결심이라도 내린 듯 말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남현숙이 바로 그러라고 했다.“그래. 그럼 지금 당장 이나 씨가 해외로 나갈 수 있게 티켓을 알아보라고 할게. 해외에서의 의식주는 우리가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이나 씨가 귀국하지만 않는다면 전폭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어.”그 순간 강이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남현숙이 진짜로 동의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할머니!”이수호의 표정이 서늘해졌다.“이나는 계속 여기서 지내서 해외로 나갈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그러고는 강이나의 팔을 잡고 대기실을 나섰다.손자가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과 맞서자 남현숙은 화가 나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남현숙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옆에 있는 도아영을 쳐다보았다.“아영아, 네가 많이 속상한 거 알아. 근데 할머니는 네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해.”“할머니, 저랑 대표님은 정말 어울리지 않아요. 오늘 파혼하겠다고 한 것도 진심이에요.”도아영의 말에 남현숙이 얼굴을 찌푸렸다.“아영아, 사실 너도 알겠지만 이번에 온 건 다 수호 때문이야.”남현숙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수호가 신문을 남기고 안 비서까지 남겨두고 갔다는 건
“됐어. 널 탓할 생각은 없어.”이수호는 강이나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안 비서더러 집에 데려다주라고 할게.”이수호가 직접 데려다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강이나는 저도 모르게 당황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요구할 수 없는 걸 알고는 고개를 숙였다.“수호 씨가 날 탓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됐어요. 수호 씨... 난 진짜 수호 씨가 없으면 안 돼요.”그러고는 안지원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도아영도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돌아서자마자 이수호가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이수호 씨!”도아영은 반항하려 했지만 이수호가 팔을 꽉 잡은 바람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가 서늘하게 말했다.“도아영, 뭘 그렇게 급히 가려고 그래?”“가서 강이나 씨를 달래주지 않고 왜 날 찾아온 거죠?”이수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도아영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수호는 도아영을 풀어주고 차갑게 말했다.“도아영, 나랑 파혼하지 못해서 실망했어?”그는 그녀의 두 눈에 스친 불만을 놓치지 않았다.도아영이 코웃음을 쳤다.“뻔히 알면서 왜 묻는 거죠? 이번에 파혼하지 못한 바람에 당당하게 구씨 일가 사모님 자리에 앉을 수 없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지금 엄청 짜증이 나니까 가까이 오지 말아요. 대표님한테 화풀이할 수도 있어요.”그녀의 말에 이수호는 화를 내지 않고 되레 웃었다.“구연준이 진짜 너랑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순진하긴. 네가 나의 약혼녀가 아니었더라면 너한테 접근했을 것 같아?”도아영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대표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요. 내가 대표님 약혼녀인 걸 알고 구 대표님이 복수하려고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근데 난 믿지 않아요. 어찌 됐든 나랑 구 대표님의 관계는 남이 왈가왈부할 그런 관계는 아니니까요.”남이라는 소리에 이수호는 분노가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다.“이것 참 아쉽게 됐어. 넌 지금 아직 나의 약혼녀라서 구연준한테 시집가지 못해. 구씨 일가 사모님이 되지 못한다고.”“이 얘기를 하
도아영이 오후에 도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유정연은 기자회견 때문에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유정연은 도아영을 보자마자 바로 반갑게 맞이했다.“우리 아영이 드디어 왔구나. 이렇게 좋은 소식을 왜 미리 얘기 안 했어? 그럼 나도 걱정하지 않았을 텐데.”입을 다물지 못하는 유정연의 모습에 도아영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아줌마, 날 허씨 일가에 팔아넘기려던 거 아니었어요?”“안 팔아. 안 팔아.”유정연이 연신 손을 내저었다.“허씨 일가 같은 작은 집안을 어떻게 수호랑 비교해?”도아영이 소파에 앉자 유정연도 가까이 다가갔다.“아영아, 지금 이수호랑 구연준이 다 널 좋아하는데 누굴 선택할 거야?”대놓고 던진 유정연의 질문에 도아영은 소파에 기대어 물었다.“아줌마는 내가 누굴 선택했으면 좋겠어요?”“구씨 일가도 재산이 많긴 하지만 강주에서의 우두머리는 이경 그룹이야. 선택한다면 당연히 수호를 선택해야지. 게다가 이경 그룹이 지금 우리 회사에 압력을 가하고 있잖아. 수호를 선택한다면 압력을 가하던 것도 멈출 거 아니야.”유정연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아부하는 말투로 말했다.“근데 구연준도 너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퇴로를 마련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지...”“아줌마 말은 구 대표님을 어장에 두라는 뜻인가요?”“어장에 두는 거라니.”유정연이 계속하여 말했다.“우린 단지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하려는 것뿐이야. 구연준이 널 좋아하니까 널 위해 돈이라도 쓰면서 도원 그룹의 사업을 도와주는 것도 좋잖아. 안 그래?”도아영이 피식 웃었다. 유정연의 꿍꿍이를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아줌마, 비록 이 대표님과 파혼하진 않았지만 이경 그룹에서 압력을 멈추겠다고 하지 않았는데요?”그러자 유정연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졌다.“그게 무슨 말이야?”“대표님과 파혼하진 않았지만 대표님이 아직 우리를 가만둘 생각이 없다고요. 이미 철회한 자금은 다시 받아내기 어려워요.”도아영이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자 유정연은 애가 타기 시작했다.“그건 안 되지. 아영아, 수호가 우릴
‘도아영, 너 뭐 돼? 스스로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이수호 없이 네가 과연 회사 자금난을 해결할 것 같아?’그 시각, 이경 그룹.이수호는 오늘 실검 1위에 뜬 기사를 보았는데 [이경 그룹 오너, 도원 그룹 따님과 극적인 화해.]라는 타이틀이었다.앞에 있는 안지원은 수중의 서류를 보다가 이수호에게 말했다.“대표님, 이제 이경 그룹과 도원 그룹에서 다시 정략결혼을 하게 된 걸 모두가 알아버렸어요. 그렇다면 전에 우리가 도원 그룹의 투자를 철회한 건...”“이미 다 철회한 거 아니었어?”이수호가 차갑게 되묻자 안 비서는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왕 투자 철회했으면 더 이상 재투자할 이유는 없어.”“하지만 도원 그룹에 자금이 없다면 3일 이내로 무너질 게 뻔합니다. 그때 가서 대표님이 아영 씨와 결혼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이수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피식 웃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아영이가 내게 와서 사정할 거 아니야?”“그렇지만...”“너도 봤지? 이번에 이나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아영이가 아무리 내 앞에서 거만을 떨어도 결국 다 도씨 일가에서 뒷받침해주기 때문이야. 이번에 가문 전체가 무너지면 도아영은 분명 내게 와서 무릎 꿇게 돼 있어!”이수호의 말을 들으면서 안지원은 깊은 침묵에 빠져버렸다.“다만 제가 듣기로 아영 씨는 이미 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대요. 현재 도씨 일가의 모든 산업을 아영 씨가 책임지고 있다고 합니다.”“종일 먹고 놀기만 하던 부잣집 딸내미가 뭘 안다고 회사를 운영하겠어?”이수호는 여전히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일단 며칠 내버려 둬. 걔가 과연 어떻게 도원 그룹 자금난을 해결할지 어디 한번 지켜봐야겠어.”다음날 강이나가 손목을 그은 척한 에피소드도 잇달아 실검에 올랐다.그녀에게 순식간에 [연약한 척하는 여자]라는 타이틀이 붙고 말았다.댓글 창에도 죄다 도아영을 편들어주는 내용들이었다.[손목을 긋지도 않았는데 붕대는 왜 감는대? 행여나 남들이 손
유하영은 분노에 찬 눈길로 도아영을 째려보더니 손을 번쩍 들어서 그녀에게 귀싸대기를 날렸다.이를 본 강이나가 재빨리 유하영을 말렸다.“하영아, 이러지 마.”“이나 넌 상관 마.”유하영은 그런 강이나를 내팽개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도아영을 힘껏 노려봤다.“너 맞지? 댓글 알바 구해서 우리 이나 악플 테러 당하게 한 거?!”주변 사람들도 요란스러운 인기척에 이쪽으로 시선이 쏠렸고 순간 도아영과 강이나 일행은 식당의 화제 인물로 변해버렸다.유하영의 물음에 도아영이 머리를 들고 낯선 두 여자를 번갈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명품 옷, 명품 시계를 둘렀지만 왠지 고급지다는 느낌은 없었다. 집에 돈은 좀 있는데 매달 수입이 아무래도 천만 원대를 초과하지 못할 듯싶었다.두 여자는 이틀 전 강이나의 생일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안 가고 싶은 게 아니라 그녀들이 자격 미달이니까.드디어 도아영이 되물었다.“누구?”“그건 알 바 없고! 넌 그냥 도원 그룹 딸이란 백만 믿고 날뛰는 거잖아! 잘 들어. 이수호 대표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 이나야. 절대 너일 리가 없다고! 너야말로 남들 사이에 끼어든 내연녀야!”유하영의 당당한 모습에 도아영은 실소를 터트렸다.“이봐, 학생. 정략결혼이 뭔지 아직 모르나 본데. 아니 한성대생이 어떻게 이토록 무식한 말을 내뱉을 수가 있지?”순간 유하영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뭐라고?!”“한성대에 들어온 학생들 중에 집안 형편이 안 좋은 애들은 없어. 또한 이경 그룹과 도원 그룹의 정략결혼은 양측 회사가 서로 이득을 보는 성인들 사이의 거래야. 신분을 따져도 나야말로 이수호 씨 약혼녀 아닌가? 장차 수호 씨의 합법적인 아내가 될 사람인데 대체 누가 누구더러 내연녀라고 하는 거야?!”“너! 하여튼 입만 살아서!”유하영은 말로 안 되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이 대표님 할머니가 우리 이나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너 같은 건 대표님 곁에 얼씬거릴 자격도 없어. 뻔뻔스럽게 어디서 함부로 입을 나불거려?”“그래, 맞아.
“웃기는 사람이네.”도아영이 말했다.“수호 씨가 날 집으로 데려온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CCTV 영상을 지울 이유가 뭐 있지? 설령 3개월 동안 살았더라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영상 자료의 위치까지 어떻게 알겠어? 따지고 보면 오늘 온종일 집에 혼자 있었던 미소 씨가 더 의심스럽지 않아? 더욱이 도씨 일가 아가씨로서 고작 도우미에게 누명을 씌울 명분도 없잖아.”“저 아니에요. 진짜 오해예요.”김미소는 초조한 얼굴로 이수호를 향해 설명했다.“대표님, 전 억울해요.”“그만!”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렸다.그동안 집안 도우미들이 몰래 도아영을 괴롭힌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단지 매번 나서서 시비를 따지기 귀찮았을 뿐이었다.게다가 도아영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하지만 이번에 김미소는 선을 넘었다.이수호가 싸늘하게 말했다.“우리 집에 너처럼 행실이 나쁜 도우미는 필요 없으니까 이번 달 월급 받고 돌아가. 내일부터 출근 안 해도 돼.”갑작스러운 불호령에 김미소는 사색이 되었다.“대표님! 진짜 저 아니에요. 정말 억울해요.”이수호는 이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김미소는 안지원에게 끌려 밖으로 나갔다.도아영은 몸에 걸친 타월을 정리하며 말했다.“이제 올라가서 옷 갈아입어도 될까요?”팔다리를 훤히 드러낸 그녀를 발견한 이수호는 외투를 벗어 던져주며 싸늘하게 말했다.“옷 입고 내려와. 물어볼 게 있어.”도아영은 손에 든 외투를 힐긋 내려다보더니 다시 이수호를 향해 휙 던졌다.“마음만 받을게요.”얼떨결에 외투를 붙잡은 이수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간덩이가 부었군!’도아영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이내 소파에 앉아 그녀를 잠자코 기다리는 이수호를 발견했다.그러다 문득 전생에 멀리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워낙 그녀에 대한 적대감이 강해서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항상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랑하는 감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도아영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앞의 이수호를 바라보았다.“한창 샤워 중인데 본인이 갑자기 들이닥치고 왜 제 탓하는 거죠?”“이...!”이수호의 시선이 도아영한테서 떠나지 않았다.타월로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그녀는 매끈하고 하얀 다리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게다가 쇄골에 맺힌 물방울까지 더해 유난히 매혹적으로 느껴졌다.적나라한 이수호의 눈빛에 도아영은 타월을 위로 끌어올렸다.“그래서 제 방에는 왜 왔어요?”“누가 너 보고 유니폼을 자르래?”그녀는 이수호의 추궁에도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제가요? 언제요? 당최 무슨 말인지...”“어디서 발뺌이야!”이수호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옷을 잘라버린 의도가 뭐지? 나한테 반항하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관심이라도 끌려는 거야?”“수호 씨, 무슨 얘기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가네요.”도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니폼을 본 적이 없는데 설령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해도 그럴싸한 핑계를 대야지 않겠어요?”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는 그녀를 보자 이수호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따라 와.”이내 저벅저벅 걸어가 도아영의 팔을 붙잡고 아래층으로 끌고 갔다.손목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도아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1층에 도착하자 김미소는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진 천 쪼가리를 치우고 있었다.유니폼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다. 도아영은 옷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가 자른 거 아니에요.”“거짓말! 분명 아영 씨가 잘랐잖아요.”시치미를 떼는 도아영을 보자 김미소는 이수호를 향해 말했다.“아영 씨가 제 앞에서 가위로 옷을 싹둑싹둑 잘랐죠. 증언해드릴 수도 있어요!”“증언이라니? 날 고발한 사람이 미소 씨인데 어떻게 믿음이 가겠어?”도아영이 느긋하게 받아쳤다.“설령 범인이 나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도 다른 증인이 한 명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건...”김미소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짝!우렁찬 따귀 소리와 함께 도우미는 별안간 뺨을 얻어맞았다.이내 볼을 감쌌고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도아영은 싸늘한 시선으로 눈앞의 젊고 아리따운 여자를 쳐다보았다.“미소 씨 맞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그동안 존칭을 썼을 텐데 함부로 반말하면 되겠어?”“이...!”김미소는 이씨 저택에서 일을 오래 하고 얼굴이 예쁘장하다는 이유로 도아영이 늘 안중에도 없었다.또한, 전생에 그녀가 이 집안에서 얼마나 비굴했는지 똑똑히 지켜봐 온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심지어 엉뚱한 조언을 해준 탓에 이수호 앞에서 망신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거로 기억했다.따라서 이번 생에는 얼굴만 믿고 건방지게 구는 김미소를 절대로 봐줄 생각이 없었다.“아영 씨, 한낱 도우미라고 해도 엄연히 이씨 일가의 직원이거든요? 저한테 손찌검하는 건 대표님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셈이죠. 지금 당장 보고할 테니까 대표님이 준비한 유니폼을 잘라버린 이상 이 집에서 쫓겨나도 뭐라 하지 마세요.”김미소는 도아영을 노려보더니 너덜너덜해진 옷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저녁 무렵, 이수호는 유태범이 돌연 구연준과 손을 잡게 된 일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이내 집에 도착하자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울고 있는 김미소를 발견했다.이수호는 눈살을 찌푸렸고, 옆에 있던 안지원이 다가가서 물었다.“저녁 준비는 끝났어요? 왜 울어요?”“대표님, 아영 씨가 글쎄 대표님이 준비한 유니폼을 가위로 잘라버렸어요.”말을 마치고 나서 너덜너덜해진 옷을 내밀었다.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이수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낮에 도아영이 강이나와 그를 두고 홀연히 떠나가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는데 엉망이 된 옷을 보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지금 어디 있어?”이수호의 화를 돋우는 데 성공하자 김미소는 속으로 의기양양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2층이요! 옷을 자르자마자 올라가서 잠을 자더라고요. 대표님이 안중에 없는 게 분명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수호는 굳은 얼굴로 2
남자가 바람 피우는 건 지극히 정상이고, 여자는 욕심이 과하면 안 된다니?이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는가?“오늘 일은 못 본 척해줄 테니까 알아서 잘 처리해.”말을 마치고 나서 무언가를 떠올린 듯 한 마디 보탰다.“참, 전에 휴학했다고 하지 않았어?”“네.”“그렇다면 학교는 굳이 안 나가도 돼.”남현숙이 말을 이어갔다.“우리 집 손자며느리로 들어온 이상 설령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졸업증은 받을 거야.”“할머니...”“이만 가 봐. 지금은 오로지 수호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지 고민하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마. 게다가 곧 결혼할 새댁이 아직도 학교에 다니면 남들이 비웃을지도 몰라.”남현숙은 명령조로 말했다.도아영은 못마땅했지만 당장 거절할 입장이 안 되었다.만약 남현숙과 등을 돌리는 순간 도원 그룹이 이수호의 공격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녀는 끌려다니기 마련이다.결국 아무 말 없이 묵인했다.그제야 고분고분해진 도아영을 보자 남현숙이 흡족하게 말했다.“우리 아영이 착하네.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도 말을 잘 듣기 때문이지. 수호가 한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던데 아주 긍정적인 신호야.”남현숙은 도아영의 손을 토닥였다.“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입맛부터 공략해야 해. 너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요리 솜씨잖아. 수호는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으니까 제대로 만족만 시켜준다면 널 떠날 걱정은 안 해도 돼.”의미심장한 말투에 도아영은 그녀가 언급한 ‘만족’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보아하니 이수호와 이미 관계를 가졌기에 같이 살게 된 거로 단단히 오해한 듯싶었다.도아영이 피식 웃었다.“알겠어요. 할머니.”“알면 다행이고.”남현숙은 작은 병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앞으로 자기 전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무슨 효능이 있는지는 차차 알게 될 거야.”도아영은 갈색 병을 흘긋 내려다보았다.남현숙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는데 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지난번 이수호의 방에서
“어르신!”장서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동안 남현숙을 모시면서 말실수한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해고를 운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이 주둥이가 방정이네요. 전 단지...”“끌고 가.”남현숙은 장서남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곧이어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더니 자리를 떠났다.도아영은 남현숙의 친숙한 면만 봐왔던 지라 이렇게 무자비하게 누군가를 내치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어쩌면 이게 바로 그녀의 본모습일지 모른다. 아마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너그러운 척 선의를 베풀었을 수도 있다.심성이 원래 착하신 분이라면 고작 말실수를 한 번 했다고 몇 년 동안 따라다니던 직원을 가차 없이 자르지는 않을 테니까.“아영아, 혹시 기사 내용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오늘 널 불렀어.”“무슨 기사요?”도아영은 모르는 척 남현숙을 바라보았다.남현숙이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에 그녀가 도원 그룹의 후계자로서 구호 그룹과 손을 잡았다는 내용이 떡하니 나타났다.“구연준이 4천억을 빌려준 거야?”남현숙은 못마땅한 말투로 물었다.언젠간 물어볼 거로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녀의 귀에 흘러 들어갈 줄은 몰랐다.“할머니, 소문이 와전된 것 같은데 구호 그룹과 도원 그룹은 평범한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에요.”“평범하든 말든 둘째치고, 적어도 수호의 약혼녀로서 구연준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라고 봐.”남현숙의 말투가 어느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게다가 이미 임자도 있는 사람이 무슨 회사를 운영한다고 그래? 이참에 남동생에게 넘겨줘. 서남의 말에 많이 불쾌하겠지만 일부는 맞다고 생각해. 어쨌거나 자기 약혼자한테 신경을 써야지 회사 일은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마. 여자는 기가 너무 세도 남자가 싫어해.”남현숙의 말에 도아영은 헛웃음이 났다.“할머니, 회사는 아빠가 물려준 유산이라 남한테 넘길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수호 씨의 마음은 애초에 딴 데 있는지라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되돌리기는 힘들걸요? 저를 설득하는 것보다 차라리
장서남은 도아영을 쫓아가기 위해 얼른 차에 올라탔다.부리나케 뒤따라오는 장서남을 보자 도아영은 냉소를 지었다.성격이 물러터진 고용주 때문에 일개 직원 따위가 감히 건방지게 구는 것이다.엄연히 도씨 일가 아가씨로서 어떻게 보면 손님인 셈인데 고작 운전기사가 주인 행세를 하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건 납득이 불가했다.예전에는 화가 나도 참았지만 이제는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잠시 후 택시는 이씨 별장 앞에 멈추어 섰다.남현숙은 본가에서 이사한 이후로 별장에서 지냈다.창문 너머로 택시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자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뭐지? 서남한테 데리러 가라고 하지 않았어? 왜 혼자 왔대?”“글쎄요...”옆에 있던 도우미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분명 장서남이 픽업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지금 장난해? 동네방네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할 작정이야?”남현숙은 씩씩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리고 거실로 들어선 도아영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아영아, 왜 혼자 왔어? 서남이가 데리러 안 갔어?”“아니요. 픽업하러 오셨던데 저보다 강이나 씨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냥 택시 타고 왔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서남이 현관문을 열고 허둥지둥 뛰어왔다.남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아영을 픽업하러 보냈더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어, 어르신...”장서남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그냥 잡담을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아영 씨가 화를 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게다가 어르신의 체면이 구겨지게 택시를 타다니! 이게 다 제 탓입니다. 괜히 허튼소리를 해서 말이에요. 단지 대표님에게 신경을 좀 더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정색하며 차에서 내릴 줄이야... 만약 다른 사람의 귀에 흘러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텐데 정말 큰 일이네요.”남현숙을 오랫동안 모셔 온 사람으로서 성격 또한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체면을 가장 중요시했다.손님이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일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따라서 도아영이
그제야 장서남은 도아영의 눈에 웃음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이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도씨 일가 아가씨라고 해도 두려울 게 뭐 있나 싶었다. 그래봤자 이수호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신세이지 않은가?그리고 말을 이어갔다.“아영 씨, 어르신에게 잘 보이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에요. 대표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성질이 고약한 여자이죠. 그에 비해 강이나 씨는 여성스러움과 착함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사모님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지도 몰라요.”장서남은 도아영에게 이수호의 아내, 더욱이 강이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아니면 애초에 강이나를 따라 하며 환심을 사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도아영의 콧대를 꺾었다는 생각에 장서남은 의기양양했다. 곧이어 싸늘한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차 세워요!”갑작스러운 명령에 깜짝 놀란 나머지 브레이크를 밟았다.“아영 씨...”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아영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이를 본 장서남은 겁에 질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그리고 운전석을 허둥지둥 벗어나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씨 일가에 어떻게 이런 무례한 직원이 다 있죠? 방금 그런 말은 대체 누가 해도 된다고 했는지 궁금하네요.”진지한 모습은 절대로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장서남의 안색이 순식간에 돌변했다.도아영은 워낙 성격이 순하고 소심한 탓에 방금 내뱉은 말은커녕 설령 수위가 훨씬 더 높아도 여태껏 화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이게 다 아영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은혜도 모르고 뭐 하는 짓이죠? 만약 강이나 씨였더라면 고참 직원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거예요.”그는 일부러 ‘고참’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도아영은 장서남이 남현숙의 최측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지라 신뢰가 두둑했다.따라서
도아영의 편을 들어주는 이수호 때문에 강이나는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동안 원수를 대하는 듯 냉정한 모습만 지켜봐 왔기에 모욕은 일상이며, 더욱이 감싸주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이지?설마 도아영과 정말 결혼할 생각인가?한편, 주민서는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다행히 따돌렸나 봐. 이수호 장난 아닌데? 설마 경호원을 총동원한 거야?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영화라도 찍는 줄 알겠어.”그러고 나서 도아영을 돌아보며 툴툴거렸다.“너도 참, 쓸데없이 이수호는 왜 도와줘? 그냥 둘이 지지고 볶게 놔두지. 결국 너만 남의 흉내를 내서 남자나 꼬시러 다니는 여우 년이 되어버렸잖아. 본전도 못 찾았네.”“이수호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거든?”전생에 이미 교훈을 얻은 만큼 다시는 이수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답이었다.게다가 강이나라면 죽고 못 사는 남자이니 이번 생에는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서 비운의 커플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이때, 도아영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전화한 걸까?곧이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 휴대폰 너머로 남현숙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영아, 이따가 기사님을 보낼게. 물어볼 게 있어.”왠지 모르게 딱딱한 말투에 도아영이 재빨리 대답했다.“할머니, 저 아직 학교라서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교장 선생님께 이미 말씀드렸으니 그냥 가도 돼. 기사님이 곧 도착할 거야.”말을 마치고 나서 전화를 뚝 끊었다.끊임없이 이어지는 통화 종료음을 들으면서 도아영은 조소를 머금었다.그리고 속으로 바보 같은 자신을 비웃었다.그동안 이수호가 무슨 짓을 하든 남현숙만큼은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태어나고 나서야 이씨 가문 사람은 한통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미래의 시할머니에게 진심을 바라는 자체가 사치였다.결국 모든 건 이익으로 귀결되었다.곧이어 도아영
그러고 나서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둘러싸인 채 강의실로 걸어갔다.내부는 이경 그룹의 경호원들로 가득했다.유하영은 이수호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대표님!”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고 멀지 않은 곳에서 강이나의 모습을 발견했다.한편, 강이나는 이수호의 맞은편에 있는 도아영을 바라보았다.게다가 도아영의 팔을 잡은 이수호 때문에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아영 씨가 여긴 왜...”유하영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조나린과 시선을 주고받았다.이수호가 강이나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도아영한테 볼 일이 있을 줄이야.결국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태까지 이르렀다.“수호 씨, 이게 무슨 상황이죠?”강이나는 불만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도아영이 이수호의 손을 뿌리치며 불쑥 끼어들었다.“이나 씨를 찾으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제 만나게 되었으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말을 마치고 나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주민서를 데리고 도망쳤다.이수호는 굳은 얼굴로 따라가려고 했지만 강이나가 그를 불렀다.“수호 씨!”이내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유하영이 불쑥 끼어들었다.“내가 뭐랬어? 대표님은 널 보러 왔다고 했지? 이게 다 뻔뻔스러운 도아영 탓이야. 예전부터 너만 따라 하기 급급하더니 어쩌면 지금도 변함이 없을까? 누가 봐도 대표님을 유혹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잖아. 흥!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유하영의 말을 듣고 있던 이수호는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강이나는 이수호에게 다가가 물었다.“수호 씨, 하영 말이 맞아요?”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강주에서 이수호가 강이나를 사랑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반면, 도아영은 예전부터 강이나의 스타일을 따라 하며 흡사한 외모를 무기 삼아 이수호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다.“당연하지 않겠어? 대표님은 사람을 잘못 본 게 확실해.”조나린이 맞장구를 쳤다.죽이 척척 맞는 두 여자 때문에 도아영은 본의 아니게 이수호를 유혹하기 위해 갖은 꿍꿍이를 꾸미는 여자가 되어버렸다.“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