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널 탓할 생각은 없어.”이수호는 강이나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안 비서더러 집에 데려다주라고 할게.”이수호가 직접 데려다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강이나는 저도 모르게 당황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요구할 수 없는 걸 알고는 고개를 숙였다.“수호 씨가 날 탓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됐어요. 수호 씨... 난 진짜 수호 씨가 없으면 안 돼요.”그러고는 안지원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도아영도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돌아서자마자 이수호가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이수호 씨!”도아영은 반항하려 했지만 이수호가 팔을 꽉 잡은 바람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가 서늘하게 말했다.“도아영, 뭘 그렇게 급히 가려고 그래?”“가서 강이나 씨를 달래주지 않고 왜 날 찾아온 거죠?”이수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도아영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수호는 도아영을 풀어주고 차갑게 말했다.“도아영, 나랑 파혼하지 못해서 실망했어?”그는 그녀의 두 눈에 스친 불만을 놓치지 않았다.도아영이 코웃음을 쳤다.“뻔히 알면서 왜 묻는 거죠? 이번에 파혼하지 못한 바람에 당당하게 구씨 일가 사모님 자리에 앉을 수 없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지금 엄청 짜증이 나니까 가까이 오지 말아요. 대표님한테 화풀이할 수도 있어요.”그녀의 말에 이수호는 화를 내지 않고 되레 웃었다.“구연준이 진짜 너랑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순진하긴. 네가 나의 약혼녀가 아니었더라면 너한테 접근했을 것 같아?”도아영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대표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요. 내가 대표님 약혼녀인 걸 알고 구 대표님이 복수하려고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근데 난 믿지 않아요. 어찌 됐든 나랑 구 대표님의 관계는 남이 왈가왈부할 그런 관계는 아니니까요.”남이라는 소리에 이수호는 분노가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다.“이것 참 아쉽게 됐어. 넌 지금 아직 나의 약혼녀라서 구연준한테 시집가지 못해. 구씨 일가 사모님이 되지 못한다고.”“이 얘기를 하
도아영이 오후에 도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유정연은 기자회견 때문에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유정연은 도아영을 보자마자 바로 반갑게 맞이했다.“우리 아영이 드디어 왔구나. 이렇게 좋은 소식을 왜 미리 얘기 안 했어? 그럼 나도 걱정하지 않았을 텐데.”입을 다물지 못하는 유정연의 모습에 도아영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아줌마, 날 허씨 일가에 팔아넘기려던 거 아니었어요?”“안 팔아. 안 팔아.”유정연이 연신 손을 내저었다.“허씨 일가 같은 작은 집안을 어떻게 수호랑 비교해?”도아영이 소파에 앉자 유정연도 가까이 다가갔다.“아영아, 지금 이수호랑 구연준이 다 널 좋아하는데 누굴 선택할 거야?”대놓고 던진 유정연의 질문에 도아영은 소파에 기대어 물었다.“아줌마는 내가 누굴 선택했으면 좋겠어요?”“구씨 일가도 재산이 많긴 하지만 강주에서의 우두머리는 이경 그룹이야. 선택한다면 당연히 수호를 선택해야지. 게다가 이경 그룹이 지금 우리 회사에 압력을 가하고 있잖아. 수호를 선택한다면 압력을 가하던 것도 멈출 거 아니야.”유정연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아부하는 말투로 말했다.“근데 구연준도 너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퇴로를 마련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지...”“아줌마 말은 구 대표님을 어장에 두라는 뜻인가요?”“어장에 두는 거라니.”유정연이 계속하여 말했다.“우린 단지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하려는 것뿐이야. 구연준이 널 좋아하니까 널 위해 돈이라도 쓰면서 도원 그룹의 사업을 도와주는 것도 좋잖아. 안 그래?”도아영이 피식 웃었다. 유정연의 꿍꿍이를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아줌마, 비록 이 대표님과 파혼하진 않았지만 이경 그룹에서 압력을 멈추겠다고 하지 않았는데요?”그러자 유정연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졌다.“그게 무슨 말이야?”“대표님과 파혼하진 않았지만 대표님이 아직 우리를 가만둘 생각이 없다고요. 이미 철회한 자금은 다시 받아내기 어려워요.”도아영이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자 유정연은 애가 타기 시작했다.“그건 안 되지. 아영아, 수호가 우릴
‘도아영, 너 뭐 돼? 스스로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이수호 없이 네가 과연 회사 자금난을 해결할 것 같아?’그 시각, 이경 그룹.이수호는 오늘 실검 1위에 뜬 기사를 보았는데 [이경 그룹 오너, 도원 그룹 따님과 극적인 화해.]라는 타이틀이었다.앞에 있는 안지원은 수중의 서류를 보다가 이수호에게 말했다.“대표님, 이제 이경 그룹과 도원 그룹에서 다시 정략결혼을 하게 된 걸 모두가 알아버렸어요. 그렇다면 전에 우리가 도원 그룹의 투자를 철회한 건...”“이미 다 철회한 거 아니었어?”이수호가 차갑게 되묻자 안 비서는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왕 투자 철회했으면 더 이상 재투자할 이유는 없어.”“하지만 도원 그룹에 자금이 없다면 3일 이내로 무너질 게 뻔합니다. 그때 가서 대표님이 아영 씨와 결혼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이수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피식 웃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아영이가 내게 와서 사정할 거 아니야?”“그렇지만...”“너도 봤지? 이번에 이나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아영이가 아무리 내 앞에서 거만을 떨어도 결국 다 도씨 일가에서 뒷받침해주기 때문이야. 이번에 가문 전체가 무너지면 도아영은 분명 내게 와서 무릎 꿇게 돼 있어!”이수호의 말을 들으면서 안지원은 깊은 침묵에 빠져버렸다.“다만 제가 듣기로 아영 씨는 이미 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대요. 현재 도씨 일가의 모든 산업을 아영 씨가 책임지고 있다고 합니다.”“종일 먹고 놀기만 하던 부잣집 딸내미가 뭘 안다고 회사를 운영하겠어?”이수호는 여전히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일단 며칠 내버려 둬. 걔가 과연 어떻게 도원 그룹 자금난을 해결할지 어디 한번 지켜봐야겠어.”다음날 강이나가 손목을 그은 척한 에피소드도 잇달아 실검에 올랐다.그녀에게 순식간에 [연약한 척하는 여자]라는 타이틀이 붙고 말았다.댓글 창에도 죄다 도아영을 편들어주는 내용들이었다.[손목을 긋지도 않았는데 붕대는 왜 감는대? 행여나 남들이 손
유하영은 분노에 찬 눈길로 도아영을 째려보더니 손을 번쩍 들어서 그녀에게 귀싸대기를 날렸다.이를 본 강이나가 재빨리 유하영을 말렸다.“하영아, 이러지 마.”“이나 넌 상관 마.”유하영은 그런 강이나를 내팽개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도아영을 힘껏 노려봤다.“너 맞지? 댓글 알바 구해서 우리 이나 악플 테러 당하게 한 거?!”주변 사람들도 요란스러운 인기척에 이쪽으로 시선이 쏠렸고 순간 도아영과 강이나 일행은 식당의 화제 인물로 변해버렸다.유하영의 물음에 도아영이 머리를 들고 낯선 두 여자를 번갈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명품 옷, 명품 시계를 둘렀지만 왠지 고급지다는 느낌은 없었다. 집에 돈은 좀 있는데 매달 수입이 아무래도 천만 원대를 초과하지 못할 듯싶었다.두 여자는 이틀 전 강이나의 생일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안 가고 싶은 게 아니라 그녀들이 자격 미달이니까.드디어 도아영이 되물었다.“누구?”“그건 알 바 없고! 넌 그냥 도원 그룹 딸이란 백만 믿고 날뛰는 거잖아! 잘 들어. 이수호 대표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 이나야. 절대 너일 리가 없다고! 너야말로 남들 사이에 끼어든 내연녀야!”유하영의 당당한 모습에 도아영은 실소를 터트렸다.“이봐, 학생. 정략결혼이 뭔지 아직 모르나 본데. 아니 한성대생이 어떻게 이토록 무식한 말을 내뱉을 수가 있지?”순간 유하영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뭐라고?!”“한성대에 들어온 학생들 중에 집안 형편이 안 좋은 애들은 없어. 또한 이경 그룹과 도원 그룹의 정략결혼은 양측 회사가 서로 이득을 보는 성인들 사이의 거래야. 신분을 따져도 나야말로 이수호 씨 약혼녀 아닌가? 장차 수호 씨의 합법적인 아내가 될 사람인데 대체 누가 누구더러 내연녀라고 하는 거야?!”“너! 하여튼 입만 살아서!”유하영은 말로 안 되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이 대표님 할머니가 우리 이나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너 같은 건 대표님 곁에 얼씬거릴 자격도 없어. 뻔뻔스럽게 어디서 함부로 입을 나불거려?”“그래, 맞아.
도아영은 눈웃음을 지으며 더없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강이나는 안색이 더 일그러졌다.“하영아, 나린아, 우리 이만 돌아가!”“거기 서!”문득 도아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세 사람을 불러세웠다.“내가 가라고 한 적 없는데?”“야, 도아영, 우리 이나가 너랑 더 따져 묻지도 않겠다는데 뭘 더 어쩔 셈이야?”도아영은 바닥에 널브러진 음식을 바라보다가 그녀들에게 말했다.“누가 함부로 음식 낭비하래?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쳤어?”보다 못한 조나린이 앞으로 다가서며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우리가 정말 모를 것 같아? 너희 도원 그룹은 이제 궁지에 몰렸어. 이씨 일가랑 결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겨우 이 대표님 의지하면서 버텨가는 도원 그룹 아가씨가 지금 어디서 잘난 척이야?”조나린은 주위 사람들을 쭉 둘러보더니 일부러 오버하며 말했다.“설마 우리 도아영 씨가 돈이 너무 궁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건 아니지? 애초에 이 대표님한테 대시할 땐 그렇게 비천하게 굴었다면서? 무릎 꿇고 대표님 신발을 닦아주는 건 물론이고 하는 짓이 가정부가 따로 없었다던데? 종일 할머니께 잘 보이려고 아양 떨다가 끝내 이경 그룹 미래 사모님 자리를 꿰찬 거잖아.”여기까지 말한 조나린은 더욱 도발하는 듯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오늘도 그때처럼 무릎 꿇고 우리한테 빌어봐봐. 그럼 이 한 끼는 우리가 쏠게.”“그래. 우리 학교 식비가 얼마나 비싼지 여기 모르는 사람 있어? 아영이 네 식판엔 죄다 야채만 들어있네. 육류는 돈 없어서 못 먹는 거야?”방금 제대로 한 방 먹은 유하영은 금세 어깨를 펴고 의기양양하게 도아영을 쳐다봤다. 마치 그녀의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밖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다들 여기 봐봐요. 도아영이 글쎄 밥 한 끼 얻어먹으려고 우리한테 무릎 꿇고 구걸하고 있어요!”순간 식당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은 모양이다.한편 강이나는 말리는 척하며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속삭
이때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인파들 속에서 울려 퍼졌다. 뭇사람들은 구연준을 보더니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서며 길을 내주었다.그가 한성대에 자주 초청받는 교수란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게다가 그는 또 한성대 최대 투자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구연준은 매년 학교에 몇천만 원가량의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걸 좋아하는 관계로 학교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게 그를 초청하고 있다.한성대에서 구연준은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이 학교를 벗어나면 그에겐 또 구호 그룹 오너라는 신분이 따라붙는다.이 아이들이 아니라 얘네들 아빠가 와도 구연준 앞에선 대표님이라고 깍듯이 인사해야 할 판이다.유하영은 구연준을 보더니 표정이 굳어버렸다.“선... 선생님.”한편 구연준은 고개를 숙이고 엎어진 식판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희 집안 먹성이 아주 좋은가 봐? 내 밥그릇까지 엎어버리고 말이야?”“아, 아니에요 그런 거!”유하영은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저는 또... 아영이 식판인 줄 알고...”이에 구연준이 옆에 있는 도아영을 힐긋 살펴봤는데 반쪽 얼굴이 빨갛게 부었고 선명한 손자국까지 나 있었다.그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누구 짓이야?”“저... 저요. 제가 부주의로...”유하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돌려줘.”구연준은 시선도 올리지 않은 채 도아영에게 손짓했다.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에 빠져들었다.도아영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가차 없이 귀싸대기를 날렸다. 힘이 어찌 센지 유하영의 얼굴이 다 비뚤어질 지경이었다.“하영아!”강이나는 사색이 되었고 조나린도 겁에 질렸다.구연준은 강이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건넸다.“이나야, 나랑 아영이가 어떤 사이인지 애들한테 아직 안 알렸어?”강이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조심스럽게 답했다.“대표님, 제 친구가 결례를 범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학교에선 선생님이라고 불러.”“네, 선생님...”강이나는 지금 이 순
그때 인파들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저분 이 대표님 아니야? 대표님이 여긴 어쩐 일로?”“진짜네! 경호원까지 따라왔어.”...식당에 있던 대부분 사람들은 구경하러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갔다.그 시각 이수호가 정장 차림에 이씨 가문 휘장을 달고 이리로 다가왔다. 완벽한 이목구비와 짙은 눈매는 금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온몸에서 내뿜는 카리스마에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유하영과 조나린은 이수호를 보더니 두 눈이 반짝거렸다.“진짜 이 대표님이네! 우리 이나 보러 온 거 맞지? 틀림없어!”“당연하지. 그럼 설마 도아영이겠어?”이수호가 도아영을 싫어하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평상시에도 거들떠보지 않는데 굳이 학교까지 찾아올 리가 있을까?이때 강이나가 입을 열었다.“여기 사람들 너무 많아. 일단 내가 한번 가볼게.”유하영과 조나린도 그녀를 따라갔다.강이나는 이수호 앞에 도착해 넌지시 물었다.“수호 씨가 학교엔 어쩐 일이에요?”그녀를 본 순간 이수호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도아영을 찾으러 온 건데 여기서 강이나와 마주칠 줄은 몰랐으니까.“대표님, 우리 이나 만나러 온 거 맞으시죠? 저희가 얼른 자리 내드릴게요.”조나린은 그가 강이나를 찾아온 거로 확신하며 유하영과 함께 자리를 뜨려 했는데 이때 이수호가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아니고. 할머니가 아영이랑 함께 집에 와서 밥 먹으라고 해서 데리러 왔어.”그는 말하면서 주위를 쭉 둘러보다가 경호원에게 분부했다.“저쪽 가서 찾아봐.”“네, 대표님.”이수호가 도아영을 찾으러 왔다는 말에 강이나는 얼굴에 어린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한편 조나린과 유하영도 난감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유하영은 행여나 강이나가 기분이 언짢을까 봐 재빨리 이수호에게 말했다.“아 네, 그러시군요. 도아영 씨 찾으시려면 학교 밖으로 나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이수호가 눈썹을 살짝 치켰다.“아영이 어디 있는지 알아?”“알죠!”유하영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우리 구연준
이수호가 화내자 유하영과 조나린은 목적을 이뤘다는 듯 서로를 마주 봤다.이 남자가 아무리 약혼녀를 싫어해도 제 여자가 딴 남자랑 얽히고설키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도아영,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렸어. 계속 우리 앞에서 잘난 척 해봐 어디!’한편 강이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수호를 쳐다봤다.그는 단 한 번도 도아영을 찾으러 학교까지 나온 적이 없다.게다가 이렇게 경호원까지 붙이면서 도아영을 찾아다닐 리는 없다.그렇다면 설마 그가... 진짜...강이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감히 더는 생각할 엄두가 안 났다.‘괜한 생각 하지 말자!’그 시각 학교 밖의 어느 한 레스토랑에서.도아영은 값비싼 음식들을 바라보며 구연준에게 물었다.“대표님, 걔네가 대표님 식판을 엎었는데 왜 나더러 밥을 사라는 거예요?”구연준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나 다 봤어.”“뭘요?”“네가 일부러 식판 엎게 했잖아.”도아영은 스테이크를 한 조각 먹으며 그에게 되물었다.“대표님, 말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내가 무슨 수로 걔네가 식판 엎을 줄 알았겠어요?”“너 방금 식당 입구 옆 싱크대 거울 앞에서 강이나랑 나머지 애들을 다 지켜봤잖아. 이 사달을 내려고 일부러 걔네 눈에 띈 거 아니야? 너한테 꼬치꼬치 캐묻고 일을 더 크게 벌이려는 수작을 내가 모를 것 같아?”“그렇게 해야 전교생들에게 네가 더 이상 이수호 앞에서 비굴하게 무릎 꿇는 도아영이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겠지. 또한 너야말로 이경 그룹 약혼녀라는 신분도 밝히고 주도권을 내세운 거잖아.”구연준의 추측에 도아영은 제법 그럴싸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나름 일리 있네요. 계속해봐요.”“학교 식당은 교내에서 소문이 가장 빨리 퍼지는 곳이야. 여긴 점심시간에 학생들이 제일 많이 몰려서 소문도 빨리 전파되지. 너도 참 똑똑하단 말이야.”구연준은 말하면서 그녀에게 건배하는 식으로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그렇지만 판을 이렇게 크게 짠 이유가 고작 사람들에게 ‘나는 이수호 안 사
모두가 구연준이 강이나의 유학 문제로 찾아왔을 거라 여길 때 이 남자는 매우 차분하게 조나린을 가리켰다.“조나린.”불현듯 지명을 당한 조나린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네...”그녀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연준이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문밖의 경호원이 긴급하게 프린트한 통지서를 그에게 건넸다.구연준은 통지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예 조나린에게 내던졌다.“넌 오늘부로 퇴학이야.”통지서가 조나린의 발끝에 떨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말도 안 돼!”허겁지겁 통지서를 주워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퇴학 조치 서류였다.퇴학이란 두 글자를 본 조나린은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럴 수가? 내가 왜? 대체 왜?’그녀는 옆에 있는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한편 강이나도 안색이 어두웠다.두 여자가 절친 사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구연준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모든 학생들 앞에서 퇴학 통지서를 내던졌다는 건 대놓고 조나린의 뺨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대표님,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조나린이 횡설수설하면서 해명하려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에 구연준이 차분한 얼굴로 되물었다.“오해? 도서관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상이 모조리 녹화됐어. 병원에서 부상 진단서까지 받았는데 오해라고? 이번 사건은 범법 행위에 속하니 넌 고의상해죄 및 학교 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 이제 모두가 성인이라 법적 상식을 갖고 본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뭇사람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느새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조나린 씨 맞죠? 저희와 함께 서에 가시죠.”경찰 한 명이 입을 열자 조나린은 사색이 되었다.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이라니, 게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갈 신세가 되었다.그녀는 강이나에게 거의 애원하듯 소리쳤다.“이나야, 강이나! 살려줘! 나 좀 구해달란 말이야.”다만 강이나도 감히 꿈쩍하지 못했다.구연준에게 겁먹은 것도 있고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무조건 퇴학 조처를 해야 합니다!”“저도 같은 의견입니다!”...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그 시각 학교 통보를 기다리는 조나린은 너무 긴장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조나린은 교실 안에서 강이나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이나야, 나 퇴학당하는 거 아니겠지? 뭐라고 말 좀 해봐.”유하영은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더니 얼른 다가가서 위로했다.“괜찮아, 나린아. 부주의로 손을 밟은 것뿐인데 어떻게 퇴학까지 가겠어? 게다가 이나도 이미 이 대표님께 말했을 거야. 이번 일은 꼭 잘 해결될 테니까 너무 걱정 마.”말을 마친 그녀는 줄곧 함구하는 강이나를 바라봤다.“이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이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조나린을 위해 사정한 적이 없는데 이 사실을 아직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알리지 못했다.어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호에게 의심을 받았던 터라 본인 문제도 해결 못 한 마당에 조나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었을까?하지만 이건 단지 도아영의 손등을 밟은 간단한 문제이니 너무 심각한 조처는 없을 것 같았다. 강이나는 결국 모든 공로를 본인에게 돌렸다.“그래, 맞아. 어제 수호 씨한테 다 얘기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린아.”조나린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됐다.‘하긴, 도아영이 대체 뭐라고? 이수호랑 파혼까지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대단해?’그도 그럴 것이 한성대는 실력과 배경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손등만 밟았을 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도아영, 넌 이제 뒤 봐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도 이번 사건을 그냥 스쳐 지날 거야.’조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다. 강이나만 나서면 그녀는 무조건 무사할 테니까.이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할 때 교실 밖에서 웅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구연준이 어느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안경까지 착용하니 고귀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
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뭐라고?”“대표님, 나 같은 여자애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어요. 게다가 그 땅은 내가 사려던 게 아니라 연준 씨가 사겠다고 해서 낙찰받은 거예요.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때 도씨 일가의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천억을 구하겠어요? 그 땅이 정 그렇게 욕심난다면 구 대표님을 찾아가 보세요. 팔지 말지는 구 대표님께 걸렸거든요.”도아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수호는 그녀의 말투에서 선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 장난해? 그 땅은 분명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이렇게 쉽게 줘버렸다고?”“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당시 연준 씨가 돈을 대줬고 이제 와서 거둬가겠다고 하니 제가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연준 씨한테 돌려줘야죠.”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저도 후회해요. 이 땅이 이렇게까지 값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눈 딱 감고 사버리는 건데! 괜히 좋다 말았네요.”“너...”이수호는 그녀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하늘에서 떨어진 횡재를 이토록 홀가분하게 구연준에게 넘겨주다니.구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줄곧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이 땅을 구연준에게 줬다는 건 이경 그룹 하반기 온천리조트 계획이 백 퍼센트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이수호가 떠나가려 하자 그녀는 일부러 목을 내빼면서 말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으시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수호가 침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도아영도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쉬었다.이수호는 그녀가 아빠가 주신 혼수를 전부 끌어모아 남원 교외의 땅을 산 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참, 모르길 천만다행이지,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원 그룹을 압박하여 그녀의 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이 땅을 뺏어갔을 것이다.‘연준 씨, 미안하게 됐네요. 또 연준 씨를 내세우고 말았어요.’그 시각, 한성대 캠퍼스.“에취!”구연준은 난생처음 학교에서 이미지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학생들이 전부 쳐다보자
‘이 인간도 알고 있었네!’도아영은 무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부의 결책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요? 미리 알다니, 말도 안 돼!”“그래? 그럼 이건 뭔데?”이수호는 또다시 신문 기사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남원 교외에서 샘물을 파냈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 거야?”“정말요?”그녀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에이, 설마. 나 그냥 대충 한번 땅을 낙찰받은 건데 그럼 이제 부자 되는 거예요?”“도아영!”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었다.이에 이수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이 땅은 우리 이경 그룹에서 가져갈 거야. 추후에 계약서 보낼 테니 넌 사인만 하면 돼.”“죄송하지만 나 아직 허락한다고 안 했는데요?”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자 이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하반기에 온천리조트를 개발할 계획이란 걸 너도 다 알고 있잖아!”“이경 그룹 향후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도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지금 이 땅이 곧 개발된다고 하니까 나한테서 뺏는 거예요?”“뺏는다고 안 했어. 마땅한 금액으로 보상해줄 거야.”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너무 커서 네가 조종할만한 사이즈가 아니야. 지금 바로 돈도 챙기고 좋잖아?”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거만했다.다만 그가 이토록 이 땅에 집착하는 걸 보아 도아영도 한 번쯤 떠보고 싶었다.“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열 배로 쳐줄게.”이수호가 답했다.“애초에 네가 천억으로 샀으니 열 배로 갚을게. 그 땅 이경 그룹에 넘겨.”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장사꾼은 역시 장사꾼이라니까.’이 땅은 정부의 보상과 지지를 받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 지지하는 중점 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으며 거기에 샘물까지 파냈으니 미래 가치는 가늠할 수가 없다.1조 원이 아니라 지금
다음날 이수호는 가정부와 기사를 시켜서 도아영을 집으로 보낸 후 회의하러 회사에 나갔다.그는 회의내용 따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도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생각만 해도 웃겼다. 그는 저도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광경을 본 회의실의 뭇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대표님이 왜 이러시지?’“에헴!”옆에 있던 안지원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이수호에게 눈치를 줬다.그제야 이수호도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이 방안대로 해요.”“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이때 매니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남원 교외의 땅을 며칠째 파고 있는데 어제 그 땅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하반기 온천리조트 사업과 충돌하니 이 땅을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남원 교외가 우리 회사의 미래 산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또한 우리도 그 땅을 이용해서 온천리조트 계획을 확장할 수 있고요.”이수호는 처음에 그다지 새겨듣지 않았는데 남원 교외라는 네 글자가 어딘가 익숙했다.“대표님, 남원 교외는 도아영 씨가...”안지원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그에게 말했다.도아영을 언급하는 순간 이수호는 경매장에서 그녀가 천억을 주고 남원 교외의 땅을 낙찰받은 일이 떠올랐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자 뭇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회의 끝!”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회의를 마무리하자 안지원이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나섰다.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대표님이 요즘 왜 이러실까?’그가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안지원은 겨우 따라잡았다.차에 탄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조사해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운전하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경 그룹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