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영, 너 뭐 돼? 스스로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이수호 없이 네가 과연 회사 자금난을 해결할 것 같아?’그 시각, 이경 그룹.이수호는 오늘 실검 1위에 뜬 기사를 보았는데 [이경 그룹 오너, 도원 그룹 따님과 극적인 화해.]라는 타이틀이었다.앞에 있는 안지원은 수중의 서류를 보다가 이수호에게 말했다.“대표님, 이제 이경 그룹과 도원 그룹에서 다시 정략결혼을 하게 된 걸 모두가 알아버렸어요. 그렇다면 전에 우리가 도원 그룹의 투자를 철회한 건...”“이미 다 철회한 거 아니었어?”이수호가 차갑게 되묻자 안 비서는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왕 투자 철회했으면 더 이상 재투자할 이유는 없어.”“하지만 도원 그룹에 자금이 없다면 3일 이내로 무너질 게 뻔합니다. 그때 가서 대표님이 아영 씨와 결혼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이수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피식 웃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아영이가 내게 와서 사정할 거 아니야?”“그렇지만...”“너도 봤지? 이번에 이나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아영이가 아무리 내 앞에서 거만을 떨어도 결국 다 도씨 일가에서 뒷받침해주기 때문이야. 이번에 가문 전체가 무너지면 도아영은 분명 내게 와서 무릎 꿇게 돼 있어!”이수호의 말을 들으면서 안지원은 깊은 침묵에 빠져버렸다.“다만 제가 듣기로 아영 씨는 이미 회사를 직접 운영하고 있대요. 현재 도씨 일가의 모든 산업을 아영 씨가 책임지고 있다고 합니다.”“종일 먹고 놀기만 하던 부잣집 딸내미가 뭘 안다고 회사를 운영하겠어?”이수호는 여전히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일단 며칠 내버려 둬. 걔가 과연 어떻게 도원 그룹 자금난을 해결할지 어디 한번 지켜봐야겠어.”다음날 강이나가 손목을 그은 척한 에피소드도 잇달아 실검에 올랐다.그녀에게 순식간에 [연약한 척하는 여자]라는 타이틀이 붙고 말았다.댓글 창에도 죄다 도아영을 편들어주는 내용들이었다.[손목을 긋지도 않았는데 붕대는 왜 감는대? 행여나 남들이 손
유하영은 분노에 찬 눈길로 도아영을 째려보더니 손을 번쩍 들어서 그녀에게 귀싸대기를 날렸다.이를 본 강이나가 재빨리 유하영을 말렸다.“하영아, 이러지 마.”“이나 넌 상관 마.”유하영은 그런 강이나를 내팽개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도아영을 힘껏 노려봤다.“너 맞지? 댓글 알바 구해서 우리 이나 악플 테러 당하게 한 거?!”주변 사람들도 요란스러운 인기척에 이쪽으로 시선이 쏠렸고 순간 도아영과 강이나 일행은 식당의 화제 인물로 변해버렸다.유하영의 물음에 도아영이 머리를 들고 낯선 두 여자를 번갈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명품 옷, 명품 시계를 둘렀지만 왠지 고급지다는 느낌은 없었다. 집에 돈은 좀 있는데 매달 수입이 아무래도 천만 원대를 초과하지 못할 듯싶었다.두 여자는 이틀 전 강이나의 생일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안 가고 싶은 게 아니라 그녀들이 자격 미달이니까.드디어 도아영이 되물었다.“누구?”“그건 알 바 없고! 넌 그냥 도원 그룹 딸이란 백만 믿고 날뛰는 거잖아! 잘 들어. 이수호 대표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 이나야. 절대 너일 리가 없다고! 너야말로 남들 사이에 끼어든 내연녀야!”유하영의 당당한 모습에 도아영은 실소를 터트렸다.“이봐, 학생. 정략결혼이 뭔지 아직 모르나 본데. 아니 한성대생이 어떻게 이토록 무식한 말을 내뱉을 수가 있지?”순간 유하영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뭐라고?!”“한성대에 들어온 학생들 중에 집안 형편이 안 좋은 애들은 없어. 또한 이경 그룹과 도원 그룹의 정략결혼은 양측 회사가 서로 이득을 보는 성인들 사이의 거래야. 신분을 따져도 나야말로 이수호 씨 약혼녀 아닌가? 장차 수호 씨의 합법적인 아내가 될 사람인데 대체 누가 누구더러 내연녀라고 하는 거야?!”“너! 하여튼 입만 살아서!”유하영은 말로 안 되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이 대표님 할머니가 우리 이나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너 같은 건 대표님 곁에 얼씬거릴 자격도 없어. 뻔뻔스럽게 어디서 함부로 입을 나불거려?”“그래, 맞아.
도아영은 눈웃음을 지으며 더없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녀의 말을 들은 강이나는 안색이 더 일그러졌다.“하영아, 나린아, 우리 이만 돌아가!”“거기 서!”문득 도아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세 사람을 불러세웠다.“내가 가라고 한 적 없는데?”“야, 도아영, 우리 이나가 너랑 더 따져 묻지도 않겠다는데 뭘 더 어쩔 셈이야?”도아영은 바닥에 널브러진 음식을 바라보다가 그녀들에게 말했다.“누가 함부로 음식 낭비하래?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쳤어?”보다 못한 조나린이 앞으로 다가서며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우리가 정말 모를 것 같아? 너희 도원 그룹은 이제 궁지에 몰렸어. 이씨 일가랑 결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겨우 이 대표님 의지하면서 버텨가는 도원 그룹 아가씨가 지금 어디서 잘난 척이야?”조나린은 주위 사람들을 쭉 둘러보더니 일부러 오버하며 말했다.“설마 우리 도아영 씨가 돈이 너무 궁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건 아니지? 애초에 이 대표님한테 대시할 땐 그렇게 비천하게 굴었다면서? 무릎 꿇고 대표님 신발을 닦아주는 건 물론이고 하는 짓이 가정부가 따로 없었다던데? 종일 할머니께 잘 보이려고 아양 떨다가 끝내 이경 그룹 미래 사모님 자리를 꿰찬 거잖아.”여기까지 말한 조나린은 더욱 도발하는 듯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오늘도 그때처럼 무릎 꿇고 우리한테 빌어봐봐. 그럼 이 한 끼는 우리가 쏠게.”“그래. 우리 학교 식비가 얼마나 비싼지 여기 모르는 사람 있어? 아영이 네 식판엔 죄다 야채만 들어있네. 육류는 돈 없어서 못 먹는 거야?”방금 제대로 한 방 먹은 유하영은 금세 어깨를 펴고 의기양양하게 도아영을 쳐다봤다. 마치 그녀의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밖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다들 여기 봐봐요. 도아영이 글쎄 밥 한 끼 얻어먹으려고 우리한테 무릎 꿇고 구걸하고 있어요!”순간 식당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은 모양이다.한편 강이나는 말리는 척하며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속삭
이때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인파들 속에서 울려 퍼졌다. 뭇사람들은 구연준을 보더니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서며 길을 내주었다.그가 한성대에 자주 초청받는 교수란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게다가 그는 또 한성대 최대 투자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구연준은 매년 학교에 몇천만 원가량의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걸 좋아하는 관계로 학교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게 그를 초청하고 있다.한성대에서 구연준은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이 학교를 벗어나면 그에겐 또 구호 그룹 오너라는 신분이 따라붙는다.이 아이들이 아니라 얘네들 아빠가 와도 구연준 앞에선 대표님이라고 깍듯이 인사해야 할 판이다.유하영은 구연준을 보더니 표정이 굳어버렸다.“선... 선생님.”한편 구연준은 고개를 숙이고 엎어진 식판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희 집안 먹성이 아주 좋은가 봐? 내 밥그릇까지 엎어버리고 말이야?”“아, 아니에요 그런 거!”유하영은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저는 또... 아영이 식판인 줄 알고...”이에 구연준이 옆에 있는 도아영을 힐긋 살펴봤는데 반쪽 얼굴이 빨갛게 부었고 선명한 손자국까지 나 있었다.그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누구 짓이야?”“저... 저요. 제가 부주의로...”유하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돌려줘.”구연준은 시선도 올리지 않은 채 도아영에게 손짓했다.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에 빠져들었다.도아영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가차 없이 귀싸대기를 날렸다. 힘이 어찌 센지 유하영의 얼굴이 다 비뚤어질 지경이었다.“하영아!”강이나는 사색이 되었고 조나린도 겁에 질렸다.구연준은 강이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건넸다.“이나야, 나랑 아영이가 어떤 사이인지 애들한테 아직 안 알렸어?”강이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조심스럽게 답했다.“대표님, 제 친구가 결례를 범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학교에선 선생님이라고 불러.”“네, 선생님...”강이나는 지금 이 순
그때 인파들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저분 이 대표님 아니야? 대표님이 여긴 어쩐 일로?”“진짜네! 경호원까지 따라왔어.”...식당에 있던 대부분 사람들은 구경하러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갔다.그 시각 이수호가 정장 차림에 이씨 가문 휘장을 달고 이리로 다가왔다. 완벽한 이목구비와 짙은 눈매는 금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온몸에서 내뿜는 카리스마에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유하영과 조나린은 이수호를 보더니 두 눈이 반짝거렸다.“진짜 이 대표님이네! 우리 이나 보러 온 거 맞지? 틀림없어!”“당연하지. 그럼 설마 도아영이겠어?”이수호가 도아영을 싫어하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평상시에도 거들떠보지 않는데 굳이 학교까지 찾아올 리가 있을까?이때 강이나가 입을 열었다.“여기 사람들 너무 많아. 일단 내가 한번 가볼게.”유하영과 조나린도 그녀를 따라갔다.강이나는 이수호 앞에 도착해 넌지시 물었다.“수호 씨가 학교엔 어쩐 일이에요?”그녀를 본 순간 이수호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도아영을 찾으러 온 건데 여기서 강이나와 마주칠 줄은 몰랐으니까.“대표님, 우리 이나 만나러 온 거 맞으시죠? 저희가 얼른 자리 내드릴게요.”조나린은 그가 강이나를 찾아온 거로 확신하며 유하영과 함께 자리를 뜨려 했는데 이때 이수호가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아니고. 할머니가 아영이랑 함께 집에 와서 밥 먹으라고 해서 데리러 왔어.”그는 말하면서 주위를 쭉 둘러보다가 경호원에게 분부했다.“저쪽 가서 찾아봐.”“네, 대표님.”이수호가 도아영을 찾으러 왔다는 말에 강이나는 얼굴에 어린 미소가 그대로 굳어버렸다.한편 조나린과 유하영도 난감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유하영은 행여나 강이나가 기분이 언짢을까 봐 재빨리 이수호에게 말했다.“아 네, 그러시군요. 도아영 씨 찾으시려면 학교 밖으로 나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이수호가 눈썹을 살짝 치켰다.“아영이 어디 있는지 알아?”“알죠!”유하영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우리 구연준
이수호가 화내자 유하영과 조나린은 목적을 이뤘다는 듯 서로를 마주 봤다.이 남자가 아무리 약혼녀를 싫어해도 제 여자가 딴 남자랑 얽히고설키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도아영,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렸어. 계속 우리 앞에서 잘난 척 해봐 어디!’한편 강이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수호를 쳐다봤다.그는 단 한 번도 도아영을 찾으러 학교까지 나온 적이 없다.게다가 이렇게 경호원까지 붙이면서 도아영을 찾아다닐 리는 없다.그렇다면 설마 그가... 진짜...강이나는 입술을 꼭 깨물고 감히 더는 생각할 엄두가 안 났다.‘괜한 생각 하지 말자!’그 시각 학교 밖의 어느 한 레스토랑에서.도아영은 값비싼 음식들을 바라보며 구연준에게 물었다.“대표님, 걔네가 대표님 식판을 엎었는데 왜 나더러 밥을 사라는 거예요?”구연준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나 다 봤어.”“뭘요?”“네가 일부러 식판 엎게 했잖아.”도아영은 스테이크를 한 조각 먹으며 그에게 되물었다.“대표님, 말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내가 무슨 수로 걔네가 식판 엎을 줄 알았겠어요?”“너 방금 식당 입구 옆 싱크대 거울 앞에서 강이나랑 나머지 애들을 다 지켜봤잖아. 이 사달을 내려고 일부러 걔네 눈에 띈 거 아니야? 너한테 꼬치꼬치 캐묻고 일을 더 크게 벌이려는 수작을 내가 모를 것 같아?”“그렇게 해야 전교생들에게 네가 더 이상 이수호 앞에서 비굴하게 무릎 꿇는 도아영이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겠지. 또한 너야말로 이경 그룹 약혼녀라는 신분도 밝히고 주도권을 내세운 거잖아.”구연준의 추측에 도아영은 제법 그럴싸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나름 일리 있네요. 계속해봐요.”“학교 식당은 교내에서 소문이 가장 빨리 퍼지는 곳이야. 여긴 점심시간에 학생들이 제일 많이 몰려서 소문도 빨리 전파되지. 너도 참 똑똑하단 말이야.”구연준은 말하면서 그녀에게 건배하는 식으로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그렇지만 판을 이렇게 크게 짠 이유가 고작 사람들에게 ‘나는 이수호 안 사
“네, 대표님!”뭇사람들은 이수호를 따라 브루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순간 교문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뭐야? 무슨 상황이지?”“그것도 몰라? 이수호 대표님이 약혼녀 찾으러 학교까지 오셨어! 상대가 바로 도원 그룹 따님 도아영이래. 근데 정작 도아영은 구연준 교수님이랑 함께 데이트한다나 봐.”“헐, 대박! 이씨 일가 가훈이 엄청 엄격한 거로 아는데 도아영 이번에 제대로 걸렸네.”...브루노 레스토랑 안.도아영이 탄산음료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밖에서 느닷없이 경호원들이 뛰쳐 들어와서 다른 손님들을 전부 내쫓았다.이에 그녀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이수호의 뒤에는 경호원 6명이 따라 들어왔는데 이 광경을 본 도아영은 감탄을 연발했다.브루노 레스토랑이 꽤 컸으니 망정이지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들어설 공간도 없었을 테니까.이수호는 구연준을 힐긋 보다가 여유 넘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댄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더니 결국 테이블에 놓인 하트 모양 디저트에 시선이 꽂혔다.아직 디저트에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인데 레스토랑 벽에 광고가 보란 듯이 붙어 있었다. 밸런타인데이 선물로 커플마다 뜨거운 사랑이라는 타이틀의 디저트를 선물하고 있다고 했다.도아영은 싸늘해진 분위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 무슨 일로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찾아오셨어요?”이수호가 한없이 차가운 말투로 되물었다.“나한테 할 말 없어?”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구 대표님이랑 밥 먹으러 나왔어요. 설마 이런 것까지 다 간섭하려는 건 아니죠?”“밥 먹으러 가는데 손은 왜 잡아? 내가 진짜 호구로 보여? 그냥 밥 먹는 건지 데이트인지 굳이 더 확실하게 말해줘야 해?”“수호 씨, 난 그냥 구 대표님이랑 밥 먹으러 왔을 뿐이에요. 수호 씨도 평소에 약속 많잖아요? 내가 언제 거래처가 여자라고 밥 먹는 것까지 데이트한다고 오해한 적 있었나요?”도아영이 일부러 이 화제까지 꺼냈다.“아 참, 수호 씨 평상시에 강이나 씨랑 자주 함께 밥 먹던데. 언제는 일부러 강이나
전생에 처음 이수호와 강이나의 애틋한 장면을 목격했을 때 이수호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내 약혼녀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면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어야지. 앞으로 내 일에 대해서 최대한 묻지 마. 네가 할 일은 참고 용납하는 것뿐이야.”지금 도아영은 이 말들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이수호에게 돌려주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더 짙어지더니 눈가에 분노가 차올랐다.“야, 도아영, 아무리 연준 씨랑 애틋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도 장소는 가려가야지! 남한테 손찌검이나 하고 전교생들 보는 앞에서 이나 체면을 짓밟아버리면 어떡해? 너무하단 생각 안 들어?”이에 도아영이 답했다.“이미 다 벌어진 일이에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건데요?”“전교생들 앞에서 이나랑 걔 친구들한테 사과해야지. 이런 일도 일일이 알려줘야 해?”그야말로 일방적으로 강이나를 편드는 이수호였다.“수호 씨는 앞뒤 사정도 안 묻고 다짜고짜 경호원들까지 데려오더니 나한테 한다는 말이 고작 이거예요? 내가 왜 손찌검을 했는지는 왜 안 물어보는 거죠?”“뭘 더 물어? 그 루머들 때문이잖아. 이나가 악플 테러를 당한 것만으로 만족 못 하겠어? 대체 어디까지 갈 셈이야?”듣다 못한 구연준이 끝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저기요, 끼어들어서 죄송한데 이 대표님 눈은 장식이에요?”그는 도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켰다.“아영이 얼굴 좀 보고 말씀하시죠. 이렇게 선명한 손자국이 이래도 안 보여요? 네?”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구겼다.그는 다짜고짜 화내느라 도아영의 얼굴에 난 손자국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빨간 자국은 흐릿한 불빛 아래 너무 선명하게 알리진 않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뺨을 맞은 자국이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아예 눈이 먼 건 아니네요. 그럼 이제 생각 좀 해보세요. 대체 누가 아영이한테 손찌검했을까요?”구연준은 차가운 말투로 계속 말했다.“아영이는 단지 당한 것만큼 똑같이 갚아줬을 뿐이에요.”“그게 대체 무슨 뜻이에요?”“궁
“웃기는 사람이네.”도아영이 말했다.“수호 씨가 날 집으로 데려온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CCTV 영상을 지울 이유가 뭐 있지? 설령 3개월 동안 살았더라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영상 자료의 위치까지 어떻게 알겠어? 따지고 보면 오늘 온종일 집에 혼자 있었던 미소 씨가 더 의심스럽지 않아? 더욱이 도씨 일가 아가씨로서 고작 도우미에게 누명을 씌울 명분도 없잖아.”“저 아니에요. 진짜 오해예요.”김미소는 초조한 얼굴로 이수호를 향해 설명했다.“대표님, 전 억울해요.”“그만!”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렸다.그동안 집안 도우미들이 몰래 도아영을 괴롭힌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단지 매번 나서서 시비를 따지기 귀찮았을 뿐이었다.게다가 도아영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하지만 이번에 김미소는 선을 넘었다.이수호가 싸늘하게 말했다.“우리 집에 너처럼 행실이 나쁜 도우미는 필요 없으니까 이번 달 월급 받고 돌아가. 내일부터 출근 안 해도 돼.”갑작스러운 불호령에 김미소는 사색이 되었다.“대표님! 진짜 저 아니에요. 정말 억울해요.”이수호는 이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김미소는 안지원에게 끌려 밖으로 나갔다.도아영은 몸에 걸친 타월을 정리하며 말했다.“이제 올라가서 옷 갈아입어도 될까요?”팔다리를 훤히 드러낸 그녀를 발견한 이수호는 외투를 벗어 던져주며 싸늘하게 말했다.“옷 입고 내려와. 물어볼 게 있어.”도아영은 손에 든 외투를 힐긋 내려다보더니 다시 이수호를 향해 휙 던졌다.“마음만 받을게요.”얼떨결에 외투를 붙잡은 이수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간덩이가 부었군!’도아영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이내 소파에 앉아 그녀를 잠자코 기다리는 이수호를 발견했다.그러다 문득 전생에 멀리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워낙 그녀에 대한 적대감이 강해서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항상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랑하는 감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도아영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앞의 이수호를 바라보았다.“한창 샤워 중인데 본인이 갑자기 들이닥치고 왜 제 탓하는 거죠?”“이...!”이수호의 시선이 도아영한테서 떠나지 않았다.타월로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그녀는 매끈하고 하얀 다리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게다가 쇄골에 맺힌 물방울까지 더해 유난히 매혹적으로 느껴졌다.적나라한 이수호의 눈빛에 도아영은 타월을 위로 끌어올렸다.“그래서 제 방에는 왜 왔어요?”“누가 너 보고 유니폼을 자르래?”그녀는 이수호의 추궁에도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제가요? 언제요? 당최 무슨 말인지...”“어디서 발뺌이야!”이수호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옷을 잘라버린 의도가 뭐지? 나한테 반항하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관심이라도 끌려는 거야?”“수호 씨, 무슨 얘기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가네요.”도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니폼을 본 적이 없는데 설령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해도 그럴싸한 핑계를 대야지 않겠어요?”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는 그녀를 보자 이수호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따라 와.”이내 저벅저벅 걸어가 도아영의 팔을 붙잡고 아래층으로 끌고 갔다.손목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도아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1층에 도착하자 김미소는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진 천 쪼가리를 치우고 있었다.유니폼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다. 도아영은 옷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가 자른 거 아니에요.”“거짓말! 분명 아영 씨가 잘랐잖아요.”시치미를 떼는 도아영을 보자 김미소는 이수호를 향해 말했다.“아영 씨가 제 앞에서 가위로 옷을 싹둑싹둑 잘랐죠. 증언해드릴 수도 있어요!”“증언이라니? 날 고발한 사람이 미소 씨인데 어떻게 믿음이 가겠어?”도아영이 느긋하게 받아쳤다.“설령 범인이 나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도 다른 증인이 한 명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건...”김미소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짝!우렁찬 따귀 소리와 함께 도우미는 별안간 뺨을 얻어맞았다.이내 볼을 감쌌고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도아영은 싸늘한 시선으로 눈앞의 젊고 아리따운 여자를 쳐다보았다.“미소 씨 맞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그동안 존칭을 썼을 텐데 함부로 반말하면 되겠어?”“이...!”김미소는 이씨 저택에서 일을 오래 하고 얼굴이 예쁘장하다는 이유로 도아영이 늘 안중에도 없었다.또한, 전생에 그녀가 이 집안에서 얼마나 비굴했는지 똑똑히 지켜봐 온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심지어 엉뚱한 조언을 해준 탓에 이수호 앞에서 망신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거로 기억했다.따라서 이번 생에는 얼굴만 믿고 건방지게 구는 김미소를 절대로 봐줄 생각이 없었다.“아영 씨, 한낱 도우미라고 해도 엄연히 이씨 일가의 직원이거든요? 저한테 손찌검하는 건 대표님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셈이죠. 지금 당장 보고할 테니까 대표님이 준비한 유니폼을 잘라버린 이상 이 집에서 쫓겨나도 뭐라 하지 마세요.”김미소는 도아영을 노려보더니 너덜너덜해진 옷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저녁 무렵, 이수호는 유태범이 돌연 구연준과 손을 잡게 된 일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이내 집에 도착하자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울고 있는 김미소를 발견했다.이수호는 눈살을 찌푸렸고, 옆에 있던 안지원이 다가가서 물었다.“저녁 준비는 끝났어요? 왜 울어요?”“대표님, 아영 씨가 글쎄 대표님이 준비한 유니폼을 가위로 잘라버렸어요.”말을 마치고 나서 너덜너덜해진 옷을 내밀었다.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이수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낮에 도아영이 강이나와 그를 두고 홀연히 떠나가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는데 엉망이 된 옷을 보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지금 어디 있어?”이수호의 화를 돋우는 데 성공하자 김미소는 속으로 의기양양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2층이요! 옷을 자르자마자 올라가서 잠을 자더라고요. 대표님이 안중에 없는 게 분명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수호는 굳은 얼굴로 2
남자가 바람 피우는 건 지극히 정상이고, 여자는 욕심이 과하면 안 된다니?이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는가?“오늘 일은 못 본 척해줄 테니까 알아서 잘 처리해.”말을 마치고 나서 무언가를 떠올린 듯 한 마디 보탰다.“참, 전에 휴학했다고 하지 않았어?”“네.”“그렇다면 학교는 굳이 안 나가도 돼.”남현숙이 말을 이어갔다.“우리 집 손자며느리로 들어온 이상 설령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졸업증은 받을 거야.”“할머니...”“이만 가 봐. 지금은 오로지 수호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지 고민하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마. 게다가 곧 결혼할 새댁이 아직도 학교에 다니면 남들이 비웃을지도 몰라.”남현숙은 명령조로 말했다.도아영은 못마땅했지만 당장 거절할 입장이 안 되었다.만약 남현숙과 등을 돌리는 순간 도원 그룹이 이수호의 공격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녀는 끌려다니기 마련이다.결국 아무 말 없이 묵인했다.그제야 고분고분해진 도아영을 보자 남현숙이 흡족하게 말했다.“우리 아영이 착하네.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도 말을 잘 듣기 때문이지. 수호가 한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던데 아주 긍정적인 신호야.”남현숙은 도아영의 손을 토닥였다.“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입맛부터 공략해야 해. 너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요리 솜씨잖아. 수호는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으니까 제대로 만족만 시켜준다면 널 떠날 걱정은 안 해도 돼.”의미심장한 말투에 도아영은 그녀가 언급한 ‘만족’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보아하니 이수호와 이미 관계를 가졌기에 같이 살게 된 거로 단단히 오해한 듯싶었다.도아영이 피식 웃었다.“알겠어요. 할머니.”“알면 다행이고.”남현숙은 작은 병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앞으로 자기 전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무슨 효능이 있는지는 차차 알게 될 거야.”도아영은 갈색 병을 흘긋 내려다보았다.남현숙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는데 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지난번 이수호의 방에서
“어르신!”장서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동안 남현숙을 모시면서 말실수한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해고를 운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이 주둥이가 방정이네요. 전 단지...”“끌고 가.”남현숙은 장서남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곧이어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더니 자리를 떠났다.도아영은 남현숙의 친숙한 면만 봐왔던 지라 이렇게 무자비하게 누군가를 내치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어쩌면 이게 바로 그녀의 본모습일지 모른다. 아마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너그러운 척 선의를 베풀었을 수도 있다.심성이 원래 착하신 분이라면 고작 말실수를 한 번 했다고 몇 년 동안 따라다니던 직원을 가차 없이 자르지는 않을 테니까.“아영아, 혹시 기사 내용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오늘 널 불렀어.”“무슨 기사요?”도아영은 모르는 척 남현숙을 바라보았다.남현숙이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에 그녀가 도원 그룹의 후계자로서 구호 그룹과 손을 잡았다는 내용이 떡하니 나타났다.“구연준이 4천억을 빌려준 거야?”남현숙은 못마땅한 말투로 물었다.언젠간 물어볼 거로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녀의 귀에 흘러 들어갈 줄은 몰랐다.“할머니, 소문이 와전된 것 같은데 구호 그룹과 도원 그룹은 평범한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에요.”“평범하든 말든 둘째치고, 적어도 수호의 약혼녀로서 구연준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라고 봐.”남현숙의 말투가 어느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게다가 이미 임자도 있는 사람이 무슨 회사를 운영한다고 그래? 이참에 남동생에게 넘겨줘. 서남의 말에 많이 불쾌하겠지만 일부는 맞다고 생각해. 어쨌거나 자기 약혼자한테 신경을 써야지 회사 일은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마. 여자는 기가 너무 세도 남자가 싫어해.”남현숙의 말에 도아영은 헛웃음이 났다.“할머니, 회사는 아빠가 물려준 유산이라 남한테 넘길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수호 씨의 마음은 애초에 딴 데 있는지라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되돌리기는 힘들걸요? 저를 설득하는 것보다 차라리
장서남은 도아영을 쫓아가기 위해 얼른 차에 올라탔다.부리나케 뒤따라오는 장서남을 보자 도아영은 냉소를 지었다.성격이 물러터진 고용주 때문에 일개 직원 따위가 감히 건방지게 구는 것이다.엄연히 도씨 일가 아가씨로서 어떻게 보면 손님인 셈인데 고작 운전기사가 주인 행세를 하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건 납득이 불가했다.예전에는 화가 나도 참았지만 이제는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잠시 후 택시는 이씨 별장 앞에 멈추어 섰다.남현숙은 본가에서 이사한 이후로 별장에서 지냈다.창문 너머로 택시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자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뭐지? 서남한테 데리러 가라고 하지 않았어? 왜 혼자 왔대?”“글쎄요...”옆에 있던 도우미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분명 장서남이 픽업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지금 장난해? 동네방네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할 작정이야?”남현숙은 씩씩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리고 거실로 들어선 도아영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아영아, 왜 혼자 왔어? 서남이가 데리러 안 갔어?”“아니요. 픽업하러 오셨던데 저보다 강이나 씨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냥 택시 타고 왔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서남이 현관문을 열고 허둥지둥 뛰어왔다.남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아영을 픽업하러 보냈더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어, 어르신...”장서남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그냥 잡담을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아영 씨가 화를 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게다가 어르신의 체면이 구겨지게 택시를 타다니! 이게 다 제 탓입니다. 괜히 허튼소리를 해서 말이에요. 단지 대표님에게 신경을 좀 더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정색하며 차에서 내릴 줄이야... 만약 다른 사람의 귀에 흘러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텐데 정말 큰 일이네요.”남현숙을 오랫동안 모셔 온 사람으로서 성격 또한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체면을 가장 중요시했다.손님이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일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따라서 도아영이
그제야 장서남은 도아영의 눈에 웃음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이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도씨 일가 아가씨라고 해도 두려울 게 뭐 있나 싶었다. 그래봤자 이수호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신세이지 않은가?그리고 말을 이어갔다.“아영 씨, 어르신에게 잘 보이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에요. 대표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성질이 고약한 여자이죠. 그에 비해 강이나 씨는 여성스러움과 착함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사모님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지도 몰라요.”장서남은 도아영에게 이수호의 아내, 더욱이 강이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아니면 애초에 강이나를 따라 하며 환심을 사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도아영의 콧대를 꺾었다는 생각에 장서남은 의기양양했다. 곧이어 싸늘한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차 세워요!”갑작스러운 명령에 깜짝 놀란 나머지 브레이크를 밟았다.“아영 씨...”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아영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이를 본 장서남은 겁에 질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그리고 운전석을 허둥지둥 벗어나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씨 일가에 어떻게 이런 무례한 직원이 다 있죠? 방금 그런 말은 대체 누가 해도 된다고 했는지 궁금하네요.”진지한 모습은 절대로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장서남의 안색이 순식간에 돌변했다.도아영은 워낙 성격이 순하고 소심한 탓에 방금 내뱉은 말은커녕 설령 수위가 훨씬 더 높아도 여태껏 화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이게 다 아영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은혜도 모르고 뭐 하는 짓이죠? 만약 강이나 씨였더라면 고참 직원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거예요.”그는 일부러 ‘고참’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도아영은 장서남이 남현숙의 최측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지라 신뢰가 두둑했다.따라서
도아영의 편을 들어주는 이수호 때문에 강이나는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동안 원수를 대하는 듯 냉정한 모습만 지켜봐 왔기에 모욕은 일상이며, 더욱이 감싸주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이지?설마 도아영과 정말 결혼할 생각인가?한편, 주민서는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다행히 따돌렸나 봐. 이수호 장난 아닌데? 설마 경호원을 총동원한 거야?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영화라도 찍는 줄 알겠어.”그러고 나서 도아영을 돌아보며 툴툴거렸다.“너도 참, 쓸데없이 이수호는 왜 도와줘? 그냥 둘이 지지고 볶게 놔두지. 결국 너만 남의 흉내를 내서 남자나 꼬시러 다니는 여우 년이 되어버렸잖아. 본전도 못 찾았네.”“이수호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거든?”전생에 이미 교훈을 얻은 만큼 다시는 이수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답이었다.게다가 강이나라면 죽고 못 사는 남자이니 이번 생에는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서 비운의 커플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이때, 도아영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전화한 걸까?곧이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 휴대폰 너머로 남현숙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영아, 이따가 기사님을 보낼게. 물어볼 게 있어.”왠지 모르게 딱딱한 말투에 도아영이 재빨리 대답했다.“할머니, 저 아직 학교라서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교장 선생님께 이미 말씀드렸으니 그냥 가도 돼. 기사님이 곧 도착할 거야.”말을 마치고 나서 전화를 뚝 끊었다.끊임없이 이어지는 통화 종료음을 들으면서 도아영은 조소를 머금었다.그리고 속으로 바보 같은 자신을 비웃었다.그동안 이수호가 무슨 짓을 하든 남현숙만큼은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태어나고 나서야 이씨 가문 사람은 한통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미래의 시할머니에게 진심을 바라는 자체가 사치였다.결국 모든 건 이익으로 귀결되었다.곧이어 도아영
그러고 나서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둘러싸인 채 강의실로 걸어갔다.내부는 이경 그룹의 경호원들로 가득했다.유하영은 이수호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대표님!”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고 멀지 않은 곳에서 강이나의 모습을 발견했다.한편, 강이나는 이수호의 맞은편에 있는 도아영을 바라보았다.게다가 도아영의 팔을 잡은 이수호 때문에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아영 씨가 여긴 왜...”유하영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조나린과 시선을 주고받았다.이수호가 강이나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도아영한테 볼 일이 있을 줄이야.결국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태까지 이르렀다.“수호 씨, 이게 무슨 상황이죠?”강이나는 불만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도아영이 이수호의 손을 뿌리치며 불쑥 끼어들었다.“이나 씨를 찾으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제 만나게 되었으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말을 마치고 나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주민서를 데리고 도망쳤다.이수호는 굳은 얼굴로 따라가려고 했지만 강이나가 그를 불렀다.“수호 씨!”이내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유하영이 불쑥 끼어들었다.“내가 뭐랬어? 대표님은 널 보러 왔다고 했지? 이게 다 뻔뻔스러운 도아영 탓이야. 예전부터 너만 따라 하기 급급하더니 어쩌면 지금도 변함이 없을까? 누가 봐도 대표님을 유혹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잖아. 흥!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유하영의 말을 듣고 있던 이수호는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강이나는 이수호에게 다가가 물었다.“수호 씨, 하영 말이 맞아요?”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강주에서 이수호가 강이나를 사랑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반면, 도아영은 예전부터 강이나의 스타일을 따라 하며 흡사한 외모를 무기 삼아 이수호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다.“당연하지 않겠어? 대표님은 사람을 잘못 본 게 확실해.”조나린이 맞장구를 쳤다.죽이 척척 맞는 두 여자 때문에 도아영은 본의 아니게 이수호를 유혹하기 위해 갖은 꿍꿍이를 꾸미는 여자가 되어버렸다.“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