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건...”한정민이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이런 선례가 없었으니까.“왜? 문제 있어요?”이수호가 쏘아붙이자 한정민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그가 이 학교의 돈줄이니까.이수호가 명령한 이상 한정민은 마지못해 시험감독 교사에게 분부하여 도아영을 옆 시험장으로 나오게 했다.순간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뭐야?’그녀가 도착한 후 선생님이 자리에 앉으라고 분부했고 문밖에서 이수호가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도아영 학생은 문제를 보고 생각난 답안을 말로 하면 돼요. 제가 대신 적어줄게요.”선생님의 태도가 유독 상냥했다. 도아영은 이런 식의 혜택이 차려질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선생님, 저는 계속 가서 문제를 풀면 돼요.”“이건 이사회 결정입니다. 아영 학생의 손이 불편하니 졸업시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잖아요.”선생님은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그녀가 이미 시험지를 절반이나 채운 걸 보더니 입이 쩍 벌어졌다.어느새 문제의 절반을 풀어버린 도아영이었다.선생님은 놀란 눈길로 도아영을 쳐다봤다.‘이걸 다 혼자 쓴 거야? 이런 학생한테 굳이 혜택을?’“선생님, 그럼 저는 계속 문제를 풀어볼게요.”도아영이 곧바로 이어진 문제의 답안을 말했다.선생님은 머리를 푹 숙이고 대신 시험지에 써 내려갔는데 점점 뒤로 가면서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올해 졸업시험 난도가 유난히 높아서 문제를 다 푸는 학생이 많지 않았고 게다가 엉뚱한 출제가 몇 개 있는데 도아영은 놀랍게도 유창하게 답안을 말했다.문밖의 이수호도 그런 그녀를 보면서 미간을 구겼다.옆에서 지켜보던 한정민은 그의 생각을 꿰뚫을 수 없어서 가까이 다가갔다.“대표님...”“시험지 있어요? 이리 줘봐요.”“네.”한정민은 곧장 시험지를 구해왔다.이수호는 시험지를 대충 훑어보았는데 출제가 상당히 전문적이고 한성대 역대 수능보다 난도가 훨씬 높았다.하지만 정작 도아영은 누구보다 유창하게 대답하고 있었다.“무슨 문제라도 있나요?”한정민이 떠보듯이 물었다.그는 시험지를 확인하지 못해서
한정민은 멍하니 넋 놓은 시험감독 교사를 보더니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왜 그래요? 도아영 학생 문제 잘 풀었나요?”시험감독 교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수중의 시험지를 바로 교장에게 건넸다.빼곡히 적은 답안은 전문지식이 뛰어나고 매우 체계적으로 구성되었다.한정민은 못 믿겠다는 듯이 뒤 문제도 더 봤지만 역시 완벽한 답안이었다.“혹시 시험지 유출했어요?”교장의 질문에 시험감독 교사가 재빨리 손사래 쳤다.“아니요. 절대 그런 적 없습니다.”교사가 진지하게 대답했다.“방금 도아영 학생을 도와준 적도 없어요. 이건 전부 도아영 학생이 직접 말한 답안입니다!”그 말을 들은 한정민은 입이 쩍 벌어졌다.‘도아영 오랫동안 휴학한 거 아니었어? 뭐지? 왜 이렇게 잘해?’같은 시각, 시험장 밖의 학생들은 저마다 도아영을 살펴보았다.“쟤가 뭔데 독방을 써?”“손목 다쳐서 그랬다잖아.”“칫! 이 대표님 인맥으로 혜택받은 거야.”...주위에 의심의 소리가 점점 커졌지만 도아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이때 주민서가 부랴부랴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아영아, 방금 끌려나가서 아무 일 없었어? 이수호가 일부러 괴롭힌 거 아니야? 정말 괜찮은 거 맞아?”그녀는 행여나 도아영이 괴롭힘을 당했을까 봐 걱정투성이였다.이에 도아영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무 일 없어. 정상적으로 시험을 봤을 뿐이야.”“다행이네!”주민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난 또 이수호가 널 괴롭히려는 줄 알았지. 방금 시험장에서 애들이 얼마나 험한 말을 나불거린 줄 알아?”“뭐라고 했는데?”“뭐긴 뭐겠어? 네가 인맥 동원해서 특혜를 받았다고 하지.”주민서가 씩씩거렸다.“요즘 힘들게 왼손잡이 연습을 했는데 이게 뭐야? 특혜받았다는 얘기나 듣고 있잖아. 이수호는 정말 도움이 안 돼.”도아영도 오늘 그의 등장이 좋은 일은 없을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그래도 일단 순조롭게 첫날을 마무리했으니 내일, 모레 두 날만 더 열심히 하면 된다.이수호가 부디 그 두 날은 더 오지 말
순간 강이나의 표정이 확 얼어붙었다.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수호의 손에 있을 줄이야.“교장이 너 요즘 성적이 쭉쭉 떨어진다길래 시험지 보러 갔다가 시험감독 교사가 바닥에서 이걸 주웠대. 딱 보니까 네 글씨체더라. 이래도 계속 반박할 거야?”이수호는 명백한 증거를 그녀 앞에 내놓았다.“수호 씨,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봐요...”강이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해명하려 했지만 이수호가 거부했다.“우리 사이에 더 할 얘기 없을 것 같은데?”그는 커닝 페이퍼를 강이나에게 건네고는 차에 올라탔다.“수호 씨!”강이나가 아무리 외쳐봐도 이 남자는 눈길 한번 안 줬다.“대표님, 이러시는 거 이나 씨한테 너무 매정한 거 아닐까요?”“내가 얼마나 더 관대해야 하지? 이나가 한 짓 좀 봐. 대체 어떻게 더 감싸줘야 하는 건데?”이전의 강이나는 커닝에 관심조차 없었고 졸업시험이라는 이토록 중요한 시험에서는 더더욱 커닝할 리가 없었다.안지원도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이수호는 피곤기 가득한 얼굴에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대표님, 그럼 아영 씨는 어떡할까요?”오늘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도아영을 다른 방으로 데려갔으니 그녀가 특혜를 받았다고 쉬쉬거리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이는 도아영의 명성에 누가 될 게 뻔하다.“걔는 억울할 것 없어.”구연준과 서현우가 모두 도아영의 커닝을 도와줄 거라곤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그녀가 아픈 몸을 이끌고 정정당당하게 수능을 볼 줄 알았는데 괜한 생각뿐이었다.이 바닥에 그런 인물은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까.같은 시각.도아영이 학교를 나서자마자 한정판 마이바흐에 앉아있는 서현우가 보였다.검은색 차창이 열리고 그 남자의 날렵한 턱선이 드러났다.서현우가 이리로 쳐다보자 도아영은 곧장 아무것도 못 본 척 시선을 피했다.‘난 몰라. 모르는 사람이야. 저 차는 나랑 아무 상관 없다고.’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한빈아.”이때 차 안에 서현우의 목소리가 울렸다.김한빈은 곧장 눈치채고 차 문을 열더니 도아영에게 다가갔다.
차 안.도아영은 이를 악물고 차 문을 열었다.그녀의 매서운 눈매를 바라보며 서현우가 느긋하게 말했다.“우리 아영이 진짜 배은망덕하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날 선생님이라고 부르더니 왜 피하는 거야?”“대표님 차가 비싼 수입차라는 건 알겠는데 번마다 학교 앞에 세워주지 말래요? 나만 피해받는다고요.”“무슨 피해?”“애들이 날 이상하게 보잖아요.”서현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난 항상 나만 고려해. 다른 사람의 명성 따위 관심 없어.”“대표님...”누가 전생에 이수호와 치열하게 싸운 인간 아니랄까 봐.도아영은 꾹 참았다.‘안 참으면 뭐? 맞장 떠? 그래봤자 죽는 건 나잖아.’그녀는 머릿속으로 죽는 방법 백 가지를 연상하다가 끝내 울분을 참았다.이때 서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시험은 잘 봤어?”“덕분에 아주 잘 봤어요.”“그래.”서현우가 말했다.“왼손 봐봐.”“네?”도아영은 자연스럽게 왼손을 내밀었다.서현우가 연고를 건넸는데 왠지 어디서 본 것처럼 눈에 익었다.그녀는 곧이어 이 연고가 전에 이수호가 특별 제작한 연고라는 걸 알아챘다.“어디서 구했어요?”이건 이수호가 그녀의 흉터에 맞게 연구 제작한 연고라 시중에서 구매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연고였다.“윤재가 줬어.”“네.”서현우가 담담하게 대답했다.‘하긴, 현우 씨처럼 차가운 인간은 절대 먼저 선물을 건넬 사람이 아니지.’“하루에 세 번씩 한 달 동안 꾸준히 바르면 거의 다 나을 거야.”“정말요? 그럼 전에 수호 씨가 준 것보다 효과가 더 좋다는 말씀이네요?”도아영은 작은 연고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서현우가 그런 그녀를 보더니 넌지시 입을 열었다.“내가 준 걸 걔랑 비교하지 마.”도아영은 흠칫 놀라며 서현우를 바라봤다.‘비교하지 말라고? 이 두 사람도 앙숙이네.’도아영은 연고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윤재 씨 참 좋은 의사예요. 시간 될 때 제대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어요.”“오늘이면 돼.”“네?”도아영
“뭐야? 뭔데?”변윤재는 어리둥절해졌다.서현우와 김한빈, 두 짠돌이와 함께 있는 한 저녁을 맛있게 먹는 게 가능한 일일까?그는 요즘 서현우네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변윤재는 하마터면 이 말을 입 밖에 꺼낼 뻔했다.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김한빈을 쳐다봤다.“뭐야? 저녁 뭐 있어?”“아영 씨가 윤재 씨한테 고마움을 표하려고 저녁을 차리신대요.”“나한테? 뭐가?”“연고를 구해줘서 고맙대요.”김한빈의 말을 들은 변윤재는 흠칫 놀랐다.“그건 현우한테 고마워해야지. 왜 나한테 그래? 돈은 현우가 냈잖아.”연고를 연구 제작한 비용은 서현우가 전액 부담했다.그는 본인에게 검소해도 다른 사람들에겐 전혀 돈을 아끼지 않는다.이번에 도아영의 연고를 제작하는 것도 기꺼이 2조 원을 썼다.그 덕에 연구소는 파티 현장이 되었다.“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아영 씨 인사만 잘 받으시면 돼요.”“이름도 안 남기고 선행을 한다? 천사가 따로 없네!”변윤재는 이제 막 서현우를 위해 박수를 치려다가 주방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도아영을 발견했다.“뭐해, 아영아?”“배달시켜요.”“뭐?”“이 근처에 식자재 마트가 없어서 대형마트에 주문해야 할 것 같아요.”그녀의 말을 들은 변윤재는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여기 주소는 알고 주문하는 거니?”“몰라요. 참 이상하네요. 위치가 도통 안 잡혀요.”“여긴 현우네 집이니까 당연히 안 잡히지...”서현우에게 원한이 맺힌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들 호시탐탐 그의 목숨만 노리고 있다.무릇 서현우가 지내는 곳은 신호 방해 장치가 설치되어 있기 마련이다.위치는 안 잡혀도 와이파이는 정상으로 사용할 수 있다.“뭐 필요한지 나한테 말해. 가까운 데 있으니까 내가 가서 사 올게.”“오케이!”도아영도 흔쾌히 그에게 식자재 리스트를 보내줬다.“윤재 씨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렇게만 준비해봤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더 말씀하세요.”변윤재는 리스트를 보더니 풍성한 식자재에 두 눈이 반짝였다.“아니야
그는 서현우를 보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그는 차 키를 챙기고 우성 별장을 나섰다.“뭐야? 벌써 갔어요?”도아영이 고개를 기웃거리자 서현우는 그녀의 시선을 가로막았다.“아까 준 연고는?”“옷 주머니에 있죠.”서현우는 그녀가 꺼낸 연고를 가져갔다.“따라와.”도아영은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 서현우는 그녀를 소파에 앉히더니 손등에 연고를 발라주었다.“스읍...”도아영이 너무 아파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서현우는 참 한결같이 힘 조절이 엉망진창이었다.그는 도아영을 올려다보더니 좀 전보다 부드럽게 연고를 발랐다.누군가에게 약을 발라준 적이 없어서 힘 조절에 실패한 모양이다.여자는 원래 연약한 존재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법이다.“지금은 어때?”서현우의 질문에 그녀가 대답했다.“안 아파요. 살짝 간지럽네요.”그녀는 손을 빼내려고 했다.“제가 할게요.”다만 서현우가 손목을 놓아주질 않았다.“한 손으로 되겠어?”“사실... 뭐 그렇게 어렵지도 않아요.”전에 홀로 아파트에서 지낼 때 줄곧 혼자 약을 발랐으니까. 뚜껑을 여닫는 일이 조금 힘들었을 뿐이다.약을 발라주는 서현우를 보고 있자니 날렵한 턱선이 너무 완벽했다.그는 자주 웃지도 않고 늘 차갑고 도도한 표정이지만 연고를 발라주는 모습은 한없이 자상하고 온화했다.도아영이 한창 넋 놓고 있을 때 서현우가 갑자기 손을 내려놓았다.“다른데 더 바를 부위 없어?”“거의 온몸이 상처투성이라고 보시면 돼요.”도아영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이렇게 말했지만 온몸에 멍 자국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전에 경찰서에서 여죄수들에게 얻어맞은 흉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니까.그 여죄수들은 대체 사회에서 얼마나 혹독한 시련을 겪었는지 도아영을 때릴 때 그야말로 죽일 듯이 패버렸다.손목, 허벅지, 얼굴, 거의 모든 곳이 멍들었고 입가에도 은은한 멍 자국이 남아있었다.“바지 걷어봐.”“...”그의 무례한 요구에 미처 반응하기도 전
“지난번에 침대에 내던져서 허리가...”“아니요! 허리 멀쩡해요!”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정색하며 말했다.‘이봐,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내 허리에 약을 발라주겠다고?’거부하는 그녀의 눈빛에 서현우가 미간을 구겼다.이 여자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도통 이해가 안 됐다.서현우는 연고를 바름에 있어서 남녀 구분 없이 똑같이 해줘야 한다고 믿는데 정작 도아영은 아닌 듯싶었다.연고를 발라줄 순 있지만 남녀 구분은 정확히 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대표님, 윤재 씨가 방금 전화 와서 야채도 필요한지 여쭸어요. 오늘 저녁 메뉴가 육류 위주라서요.”“필요 없어. 네가 정한 대로 하면 돼.”“네.”변윤재는 전에 그녀에게 서현우가 육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서현우가 호텔에서 지낼 때, 또한 요즘 집에서 해 먹던 음식들까지 떠올리자 도아영은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다.“대표님, 혹시 마조히즘이세요?”불현듯 서현우가 그녀를 노려봤다. 도아영은 절대 그런 뜻이 아니라고 재빨리 한마디 덧붙였다.“대표님처럼 성공한 사람들은 산해진미를 즐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제가 본 대표님은 이렇게 검소하신지...”검소하다는 단어는 이미 충분히 함축적인 표현이었다.그녀는 이 남자가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건 아닌지 대놓고 묻고 싶었다.지금 사는 우성 별장은 심플하다 못해 가구가 몇 개 없고 냉장고에는 즉석식품과 라면이 전부였다. 방마다 침대 한 장 제외하고 별다른 가구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별장 평수가 그리 큰 건 아니지만 가구가 얼마 없다 보니 괜히 널찍해 보였다.아마도 이 별장 주인이 도저히 집이 안 팔려서 초저가에 서현우에게 팔아치운 모양이다.심지어 그녀는 서현우가 이 별장이 은밀하고 가격도 저렴해서 구입한 거라고 여겼다.하지만 2조억을 들여서 흔쾌히 땅을 사는 서현우가 몇조 원의 별장을 사는 건 큰 문제가 아닐 텐데 굳이 이런 낡은 별장을 택한 이유가 따로 있을까?“난 물욕이 없는 편이야.”서현우는 그녀의 뜻을 오
“손을 다쳤는데 요리할 수 있겠어?”변윤재가 물었다.“의사로서 당부하는데 채 써는 사람 따로 찾는 게 나을 거야. 자칫하다 손을 썰면 어떡해?”도아영은 좀 전까지 이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변윤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문득 채 써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변윤재를 바라봤다.이에 변윤재가 곧바로 대답했다.“나보단 현우가 나아. 지금 바로 불러올게.”그는 곧장 위층에 올라갔다. 일 초라도 주방에 머물고 싶지 않았으니까.서현우의 방 문을 두드렸지만 좀처럼 인기척이 없었다.“나와, 현우야. 아영이 도와서 채 좀 썰어야지.”변윤재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너한테 기회 주는 거야! 얼른 나오라니까.”이때 김한빈이 맞은편 방에서 나오더니 문에 바짝 달라붙은 변윤재를 보면서 물었다.“뭐 하세요, 윤재 씨?”“현우 부르는 중이잖아.”변윤재가 대답했다.“내가 간만에 우리 현우 잘 보일 기회를 만들어줬거든. 아영이 앞에서 실컷 매력 발산할 기회 말이야! 아영이가 손을 다쳐서 칼질이 불편하니 현우가 도와주면...”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귀청이 째질듯한 소리에 서현우가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뛰쳐나오더니 계단을 내려갔다.변윤재도 그제야 눈치채고 소리쳤다.“큰일 났다!”몇 사람들이 아래층에 내려오자 도아영이 한창 허리를 숙이고 바닥에 떨어진 칼을 줍고 있었다.그녀는 세 사람을 보더니 허리도 못 펴고 그대로 해명했다.“아직 칼을 제대로 잡지 못하겠어요...”“...”세 남자 모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변윤재는 그녀가 정말 손이라도 다쳤을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때 서현우가 먼저 칼을 줍고 도마 옆으로 다가갔다. 도아영이 어느새 식자재를 깨끗이 씻어서 도마 옆에 놓아둔 걸 보더니 두말없이 고기와 야채를 썰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여태껏 혼자 음식을 만들었고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준 적이 없다. 오늘도 횡설수설하면서 요리할 줄 알았는데 서현우가 일사천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
순간 도지호는 표정이 굳어버렸다.“엄마! 이 사람들 대체 뭐라는 거예요? 빚이라니? 180억 원은 다 뭐냐고요?”유정연은 아들에게 빚진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사채업자들이 집까지 찾아오니 하는 수 없이 고백했다.“지호야, 엄마가 결혼비용으로 준 돈 얼른 내놔봐!”“네? 그건 나더러 신혼집 차리라고 준 돈이잖아요?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요?”도지호가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된 아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가차 없이 뺨을 후려쳤다.“죽을래 돈 갚을래? 얼른 가서 돈 가져와!”유정연이 도석진에게 시집온 이후로 매년 도지호의 명의로 목돈을 마련했는데 어느덧 십여 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60억 가까이 됐을 것이다.빚을 다 갚을 순 없지만 이 돈으로 시간을 좀 더 벌어들일 순 있다.도지호는 기세등등한 사채업자들을 보더니 마지못해 은행카드를 건넸다.카드를 본 우두머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이것 봐. 돈 있잖아. 어디서 불쌍한 척이야! X발 년, 아직 80억 남았어. 못 갚으면 이 녀석 두 다리를 확 잘라버릴 거야!”“이미 60억 드렸고 방금 드린 60억까지 더하면 120억이잖아요! 더는 없으니까 가서 사장님께 전하세요. 3일만 더 시간을 주면 나머지 80억 무조건 갚을게요!”유정연이 간곡하게 부탁했다. 팔아치울 수 있는 건 전부 다 팔아서 온몸을 다 털어도 돈이 나올 구멍이 없었다.아들의 결혼비용까지 다 내놨으니 이제 정말 빈털터리 신세였다.“3일, 3일, 대체 얼마나 더 기한을 늘여줘야 해? 오늘 또 미루면 80억이 아니라 100억으로 불어날 거야!”사채업자가 거만을 떠는 모습에 도지호는 주먹을 휘날리려고 했지만 방망이가 앞섰다.그는 가차 없이 방망이에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자식이, 감히 나한테 덤비려고?”앞장선 사채업자가 도지호에게 비아냥거렸다.아들이 한 방 맞으니 유정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줄게요! 10억 줄게요! 집에 남은 액세서리랑 집문서까지 다 합치면 80억은 될 거예요. 다 드릴게요! 전부 드린
이번엔 아무도 유정연을 지켜줄 수 없다.그 시각, 도씨 일가.도지호가 저녁 무렵 집에 돌아왔을 때 유정연은 초조한 얼굴로 거실을 서성거렸다.“엄마, 왜 그래요?”“지호야? 너 왜 왔어?”“돈 다 떨어졌어요. 문자를 해도 대답이 없으니 돈 가지러 왔죠.”유정연은 울화가 치밀었다.“돈돈돈! 넌 돈밖에 몰라? 우리 이제 다 망했어! 돈 없다고!”“뭐라고요? 장난도 참.”도지호는 집에 돈이 없다는 말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돈 걱정 없이 살아와서 한 달 용돈 1억 원도 모자랄 지경이니까.도씨 일가가 아무리 망해도 도지호의 용돈이 끊긴 적은 없으니 집에 돈이 없다는 말은 농담과도 같았다.“너 이 자식...”유정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격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사채업자들이 또다시 찾아왔으니까.상황파악이 안 된 도지호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누구야? 누가 이딴 식으로 문 두드려?”그는 얼른 문을 열고 상대에게 겁줄 기세였지만 유정연이 발 빠르게 가로챘다.“안돼, 지호야!”“왜요? 누군데 그래요?”도지호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도씨 일가 도련님 도지호는 학교에서도 위풍당당한 인물이라 아무도 감히 그를 건드릴 자가 없었다.지금 이토록 무례하게 문을 두드리는데 가만히 지켜볼 도지호가 아니었다.하지만 유정연은 그를 의자에 앉히고 진정시켰다.“여기 가만히 있어! 절대 문 열면 안 돼!”도지호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넋을 놓았다.문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그중 한 명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X발 년!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문 열어! 집 다 부숴버리기 전에!”“누구야 X발!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네?”도지호가 버럭 화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때 상대가 이미 문을 부수고 들어와 버렸다.덩치 큰 체구의 남자들이 방망이를 들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건달이었다.유정연은 그들이 문까지 부수고 쳐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도지호도 상대의 기세에 짓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