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호의 실력으로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단지 시간문제였다.만약 선뜻 나서서 주도권을 차지하지 않고 그에게 들킬 때까지 지체한다면 도아영과 위너 그룹 모두 위기에 처할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한 도아영은 힘겹게 대답했다.“노력해볼게요.”“노력이 아니라 무조건 해내야 해.”구연준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성공할지 실패할지는 그 파티에 걸렸어. 잘 생각해봐.”“알았어요. 절대 수호 씨한테 들키는 일 없어요.”구연준은 알겠다며 대답했다.그녀가 계속 사무실을 구경할 때 구연준이 불쑥 입을 열었다.“아 참.”“또 왜요?”그녀는 의아한 눈길로 구연준을 쳐다봤다.‘이 인간 오늘 왜 이렇게 수상해?’“나 오늘 학교에서 꽤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는데, 궁금해?”“아니요...”굳이 안 말해도 그녀와 관련된 내용일 게 뻔했다.어쩌면 이수호, 임규리까지 연루될 것 같았다.“아쉽네.”구연준은 일부러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야심 많은 네 사촌 동생이 학생들 앞에서 본인이 이경 그룹 사모님으로 내정되었다고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걸 알려주고 싶었는데 관심 없다니까 관둘게.”“잠깐만요. 헛소문이라니요?”팩트가 아니었단 말인가?“관심 없다며?”“...”구연준은 인심 쓰듯 그녀에게 말했다.“아영이 너는 주위 사람들을 조심해야겠다. 시골에서 올라온 네 동생은 상상 그 이상으로 야심이 많더라고.”“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저도 다 알고 있어요.”“그럼 다행이고.”구연준이 말했다.“회사 구경도 다 했겠다, 함께 가서 밥 먹자. 다 먹고 집까지 데려다줄게.”“괜찮아요. 이제 막 새집으로 이사해서 물건 정리도 못 했어요.”도아영이 고개를 내저었다.그제야 구연준은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돈이 많이 부족한가 봐. 그런 집에 다 살고 말이야.”“...”그녀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한성대 근처에 집 구하기가 원래 어렵잖아요. 전에 수호 씨가 찾아준 고급 아파트도 이제 다 빠지고 없어요. 이번에 또 급하게 이사하다 보니 제대
심지어 캐리어까지 열어놓은 상태였다.이 광경을 본 도아영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지금 뭐 하는 거죠?”그녀가 돌아왔지만 상대는 여전히 기고만장한 태도였다.“계약 취소해요. 이 집에서 나가라고요!”도아영은 순간 실소를 터트렸다.“돈을 다 냈는데 나가라니요?”“내가 이 집 주인이야. 나가라고 하면 그냥 나가!”그 여자는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여긴 너 따위 계집애들이 머무는 곳이 아니야. 널 계속 내버려 뒀다가 다음 세입자가 들어와서 말 못 할 병이라도 걸리면 어떡해? 우리 집에 폐 끼치지 말고 당장 나가!”“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병이라니?”“끝까지 발뺌하네! 네 일은 온 동네에 소문이 쫙 퍼졌어! 이사 온 지 하루만에 뭐가 그리 성급해서 남자를 세 명이나 만나? 나중에 또 어떤 더러운 인간들까지 우리 집에 들일지 누가 알겠어?”집주인의 말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도아영은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뚫린 입이라고 말 함부로 내뱉지 말아요!”“어쭈? 불만 있어? 안 내켜? 잔말 말고 오늘 당장 이 집에서 나가!”“나갈 순 있지만 방금 아줌마가 내 물건에 손댔어요. 이것부터 제대로 짚고 넘어가죠.”도아영은 아수라장이 된 방 안으로 들어갔다.“이것들 전부 내 개인 물품이에요. 또한 아줌마는 아무 이유 없이 날 내쫓았으니까 충분히 범법행위에 속하죠. 마땅한 이유를 내놓지 못하면 경찰에 신고하는 수밖에 없어요.”“뭐? 지금 날 협박해! 누가 겁먹을 줄 아나? 신고해! 하라고!”집주인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문 앞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낡은 동네에 엘리베이터도 없으니 위층 사람들도 하나둘씩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바로 이때 짐을 가지러 온 임규리가 마침 이 광경을 맞닥뜨렸다.그녀는 바로 아래층에 사니까.도아영이 집주인에게 쫓겨나고 경찰에 신고하려고 하자 임규리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낮에 그녀가 동네에서 도아영의 소문을 퍼뜨렸는데 경찰이 오면 도아영의 정체를 바로 알아낼 것이다.왜냐하
현금을 본 순간 집주인은 마침내 태도가 변했다.“그럼 딱 오늘 밤까지야. 내일은 뭐가 됐든 짐 빼야 해. 여기가 개나 소나 다 들이는 곳도 아니고, 재수 없게 굴지 마. 알겠어?”이웃 주민들도 도아영이 문란하다면서 삿대질을 해댔다.이 광경을 본 도아영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이수호가 준 고급 아파트도 마다한 그녀인데 고작 이런 낡은 동네를 탐할 리가 있을까?그녀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집주인은 그런 그녀를 보자 분노가 다시 치솟았다.“이년이 정말! 신고는 내가 먼저 했어야지, 창녀 주제에 하룻밤 더 묵게 해줬더니 뭐가 억울하다고 신고질이야? 다들 얘 좀 봐봐요. 진짜 한심한 년이라니까요!”“언니! 언니!”임규리가 재빨리 그녀에게 달려왔다.“일 더 크게 만들지 말고 나를 봐서라도 그냥 넘어가요. 이대로 신고하면 언니한테도 좋을 건 없잖아요...”임규리가 이런 식으로 말하니 다들 도아영이 더러운 여자라고 더욱 확신했다.그녀의 손이 닿으려 할 때 도아영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언니라니?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는데 어디서 아는 척이야?”도아영이 가차 없이 쏘아붙이자 뭇사람들은 더더욱 임규리의 편을 들어주었다.“어머, 쟤 좀 봐. 돈까지 써가면서 기꺼이 도와줬더니 말하는 꼬락서니가 왜 저 모양이야?”“그러게 말이야. 부잣집 딸도 아니면서 누가 보면 재벌 출신인 줄 알겠어. 규리가 먼저 사촌지간이라고 밝히니 더 그럴싸해 보이잖아.”“진짜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니까. 도와주는 사람을 저렇게 외면하면 안 되지! 당장 쫓아내요. 길바닥에 나앉아봐야 정신을 차리지.”...주위 사람들은 도아영을 집어삼킬 듯이 삿대질을 해댔다.바로 이때 통화가 연결되고 전화기 너머로 경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112 신고센터입니다.”“누가 집에 쳐들어와서 제 물건을 다 뒤지고 명예훼손까지 해대네요. 지금 당장 출동해주세요. 아, 그리고 서장 바꿔주세요.”도아영이 서장을 바꿔 달라는 말에 경찰은
...사람들은 의논이 분분했고 집주인도 코웃음을 쳤다.“쟤가 정말 서장한테 연락이 닿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뭐라도 된 줄 아나 봐? 진짜 큰 인물이었다면 뭣 하러 이런 동네에 살겠어? 누굴 바보로 아나?”다들 그녀가 허풍을 치는 거라고 굳게 믿었다.하지만 임규리는 잘 알고 있다. 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따님이고 이수호의 전 약혼녀였으니 경찰 서장에게 연락이 닿는 건 너무 흔한 일이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이수호가 직접 경찰서에 가서 그녀를 구했으니...“언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서장님께 연락하지 말아요. 오늘 일은 집주인이 잘못했어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그녀는 얼른 이 상황을 수습하고 싶었다.하지만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도아영이 아니었다.함부로 본인 물건에 손을 대고 뭇사람들 앞에서 능멸하더니 계약서까지 무시한 채 그녀를 내쫓는 집주인은 절대 그냥 봐줄 리가 없었다.이대로 물러서면 진짜 만만한 사람이 될 테니까.도아영은 뭇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휴대폰을 꺼내서 경찰 서장에게 전화했다.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고 서장이 아주 깍듯한 태도로 임했다.도아영도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현주소를 불렀다.“20분 이내로 와주세요.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하거든요!”“20분이라니요. 아영 씨 호출이니 15분 이내로 달려가겠습니다!”두 사람은 통화를 마쳤다.그녀가 일부러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여 모두가 대화 내용을 엿들었다.진짜 경찰 서장에게 연락할 줄이야.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집주인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진짜 서장인지 누가 알아? 아무나 서장이라고 속일 수도 있잖아. 너무 흔한 일이야. 당황할 거 없다고.”“경찰 서장이 이런 애한테 깍듯이 대할 이유가 없지. 누굴 바보로 아나!”다만 임규리의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이따가 서장이 진짜 찾아오면 도아영의 신분도 낱낱이 드러나게 된다.오늘 도아영의 헛소문을 퍼뜨린 일만 떠올리면 그녀는 다리에 힘이 다 풀렸다.“진짜인지 아닌지는 지켜보면 알겠죠.”도
“제가요.”도아영이 대답한 순간 경찰들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뭐죠? 본인이 본인을 신고한 거예요?”“이 아줌마가 내게 원조교제라는 누명을 씌우고 제멋대로 우리 집에 쳐들어와서 물건들을 한바탕 뒤집어놓았어요. 개인 물품을 싹 다 들추어내더니 날 이 집에서 내쫓으려고 했어요. 전에 분명 계약서를 썼는데 이러는 건 엄연한 범법행위잖아요. 내 권리를 지키는 차원에서 경찰에 신고했어요.”도아영이 조리 밝게 설명했다.하지만 집주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어갔다.“얘가 바로 세입자예요. 세입자가 내 집에서 원조교제나 하는데 그냥 놔둘 순 없죠. 당연히 내쫓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경찰관님?”경찰은 집주인의 말에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이웃 주민들 사이의 갈등 문제가 가장 귀찮은 문제였으니까.이치가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쩔도리가 없다.“정말 원조 교제했어요?”경찰이 도아영에게 물었다.“아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거짓말이에요! 오늘 남자 세 명이나 만나는 걸 직접 봤다고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 사람들도 다 지켜봤어요. 수입차가 줄줄이 이 동네로 들어왔어요. 오후엔 두 남자랑 나가더니 저녁엔 또 다른 남자가 찾아왔는데 이게 원조교제가 아니면 뭐예요?”집주인은 마치 도아영이 천벌 받을 짓을 한 것처럼 쐐기를 박았다.옆에 있던 주민들도 불난 집에 부채질해댔다.“맞아요. 저도 봤어요.”“저도요! 이 동네에 언제 그런 수입차들이 드나들겠어요? 얘가 풍기 문란해서 나쁜 짓을 벌인 거예요. 요즘 대학생들은 반반한 얼굴만 믿고 돈 많은 남자들한테 들러붙잖아요. 에이, 재수 털려!”“얼굴도 예쁘장하니 원조교제가 아니면 뭐겠어요? 얼른 잡아가세요! 더는 동네 분위기 흐리지 말고요.”점점 더 많은 주민들이 구경에 나섰다.경찰은 이런 말들을 듣더니 짜증 섞인 얼굴로 쏘아붙였다.“정말 그런 거라면 저희랑 함께 서에 가주시죠. 제대로 조사해봐야겠네요.”“저는 지금 명예훼손과 사생활 침범죄로 경찰에 신고했는데 오히려 저를 잡아간다고요?”도아영은
장윤기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소리쳤다.경찰은 서장을 보더니 사색이 되었다.“서... 서장님?”“내 말 안 들려? 당장 풀어드리라고!”“서장님, 부하 직원들 참 잘 두셨네요. 내가 신고했는데 되레 나를 체포하네요? 웃겨 정말!”도아영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녀의 심드렁한 말투에 장윤기는 땀을 뻘뻘 흘렸다.“네, 다 제 잘못입니다. 직원 단속을 잘 못 해서 아영 씨한테 폐 끼쳐드렸네요.”늘 엄숙하던 장윤기가 한낱 여자애에게 이토록 공손한 태도로 나오니 경찰관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서장님, 이분은...”“도아영 씨잖아! 누가 너희더러 아영 씨 체포하래? 대체 왜 아영 씨한테 수갑을 채운 거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 죽겠으면 혼자 죽어. 난 좀 내버려 두란 말이야! 당장 수갑 풀어!”“서장님, 진정하세요. 저도 방금 경찰관한테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제 말을 새겨듣지 않더라고요.”도아영이 차가운 표정으로 이 말을 내뱉을 때 장윤기는 이마에 난 식은땀을 닦으면서 대답했다.“얘네들 전부 신입사원이라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어요. 제가 나중에 따끔하게 혼낼 테니 아영 씨도 그만 화 푸세요!”이웃 주민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도아영은 대체 정체가 뭘까?경찰 서장이 왜 그녀에게 이토록 굽신거리는 걸까?“알았으니까 이제 좀 제 얘기 들어주실래요?”도아영의 시선이 집주인 아줌마에게 쏠렸다.집주인은 경찰 서장까지 불려온 광경은 처음인지라 기고만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물쭈물하면서 말까지 더듬거렸다.“이 여자가... 이 여자가 우리 집에서 원조교제를 했어요! 저는 단지 집을 깨끗이 치우고 싶은 차원에서 그런 건데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좀 전보다 훨씬 주눅이 든 상태였다.“허튼소리! 이 여자라니요? 이분은 도씨 일가의 따님 도아영 씨인데 원조교제가 웬 말이에요? 머리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뭐, 뭐라고요? 그런 분이 왜 이런 동네에 와서 월세방을 구하는 거죠? 서장님, 농담하지 마세요.”
한참 후에야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저 아니에요. 저도 다른 사람한테서 전해 들은 거예요.”“저도 아니에요. 낮에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다들 똑같은 얘기만 하더라고요!”“이분이 도씨 일가 따님일 줄은 몰랐어요. 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건지 양심도 없네요, 정말.”...주민들은 하나둘씩 이 사건에서 빠지려고 애를 썼다.“걱정 마세요, 아영 씨. 이번 일은 제가 반드시 조사해낼 겁니다. 3일.. 아니 2일만 시간을 주세요. 제가 꼭 해결해드리겠습니다!”장윤기가 단호하게 말했다.이때 도아영이 임규리를 지그시 바라봤다.그녀의 따가운 시선에 임규리는 온몸이 불편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범인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거든요.”도아영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한 순간 임규리는 바짝 긴장했다.“정말요? 그게 누구죠? 말만 하세요. 당장 체포하겠습니다!”주위 사람들도 범인이 누구인지 무척 궁금했다. 오늘 도아영에게 실질적인 해를 끼치지 않기를 다행이지 하마터면 그들도 연루될 뻔했다.“아줌마, 나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별안간 도아영이 집주인에게 물었다.집주인은 도아영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로 멍하니 넋을 놓고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그녀가 단지 사과만 원하자 집주인이 곧바로 말했다.“다 제 잘못입니다. 미안해요, 아영 씨! 제가 정말 아영 씨 정체를 몰라서 그랬어요. 미리 알았다면 절대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텐데... 죽을죄를 지었어요. 지금 바로 물건들 다시 정리해드릴게요!”도아영은 무려 부잣집 딸이다.오늘처럼 대놓고 능멸했으니 처벌을 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한다.집주인은 감히 그녀 앞에서 거만을 떨 수가 없었다.곧이어 한바탕 널어놨던 도아영의 물건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옷장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아영 씨, 시간도 늦었고 여기 환경도 별로이니 오늘 밤은 제가 호텔 스위트룸으로 예약해드릴까요? 여기서 지내시는 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장윤기도 아주 상냥하게 말했다.전에 그녀를 대하던 모습과 아예 딴판
집주인은 임규리에 대한 호감이 뚝 떨어졌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나가는 집주인을 바라보며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분명 이수호랑 파혼까지 했는데 대체 왜 아직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아영을 도와주는 걸까?이건 너무 불공평했다.다음 날 아침, 도아영이 부잣집 딸이라는 소문이 온 동네에 쫙 퍼졌다. 또한 부잣집 딸이 이 동네에서 지낸다는 말도 주민들의 토크 소재가 되었다.다들 전설 속의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궁금했다.결국 도아영은 다음날 이른 아침 집에서 내려오며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했다.그녀는 끝내 참지 못하고 구연준에게 연락했다.“어제 집 구해준다는 말 진짜죠?”“당연하지. 이미 다 구했어. 마침 연락하려던 참인데.”“너무 잘됐어요. 지금! 당장! 이사해야겠어요.”“뭐가 그렇게 급해? 누가 심기 건드렸어?”구연준은 곧바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그녀는 시시각각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게 너무 싫었다.“맞아요.”“지금 제자리에서 꼼짝 말고 기다려. 사람 바로 보낼 테니까 짐 싸서 나오면 돼.”말을 마친 구연준이 전화를 끊었다.단지 입구에서 잠시 기다렸더니 구연준이 보낸 차가 금세 도착했다.정장 차림의 경호원들이 차에서 내려와 먼저 도아영에게 인사를 건넸다.“아영 씨!”“물건들 다 위층에 있어요.”“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6명의 경호원들은 곧바로 위층에 올라갔다.여전히 그녀가 부잣집 딸인 걸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본 순간 입이 쩍 벌어졌다.이런 경우는 처음이니까.도아영이 근처 공원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사이에 경호원들이 어느덧 짐을 싸서 내려왔다.잠시 후 그들은 짐을 전부 차에 싣고 도아영에게 다가갔다.“다 됐습니다. 대표님께서 친히 또 다른 차량을 보내셨어요.”“네.”도아영도 그제야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어젯밤 일로 이 동네를 떠났다는 얘기에 뭇사람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부잣집 딸을 처음 보는 건데 누가 헛소문을 퍼뜨린 바람에 그냥 떠나가 버릴 줄이야.유일한 부자를 놓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
순간 도지호는 표정이 굳어버렸다.“엄마! 이 사람들 대체 뭐라는 거예요? 빚이라니? 180억 원은 다 뭐냐고요?”유정연은 아들에게 빚진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사채업자들이 집까지 찾아오니 하는 수 없이 고백했다.“지호야, 엄마가 결혼비용으로 준 돈 얼른 내놔봐!”“네? 그건 나더러 신혼집 차리라고 준 돈이잖아요?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요?”도지호가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된 아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가차 없이 뺨을 후려쳤다.“죽을래 돈 갚을래? 얼른 가서 돈 가져와!”유정연이 도석진에게 시집온 이후로 매년 도지호의 명의로 목돈을 마련했는데 어느덧 십여 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60억 가까이 됐을 것이다.빚을 다 갚을 순 없지만 이 돈으로 시간을 좀 더 벌어들일 순 있다.도지호는 기세등등한 사채업자들을 보더니 마지못해 은행카드를 건넸다.카드를 본 우두머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이것 봐. 돈 있잖아. 어디서 불쌍한 척이야! X발 년, 아직 80억 남았어. 못 갚으면 이 녀석 두 다리를 확 잘라버릴 거야!”“이미 60억 드렸고 방금 드린 60억까지 더하면 120억이잖아요! 더는 없으니까 가서 사장님께 전하세요. 3일만 더 시간을 주면 나머지 80억 무조건 갚을게요!”유정연이 간곡하게 부탁했다. 팔아치울 수 있는 건 전부 다 팔아서 온몸을 다 털어도 돈이 나올 구멍이 없었다.아들의 결혼비용까지 다 내놨으니 이제 정말 빈털터리 신세였다.“3일, 3일, 대체 얼마나 더 기한을 늘여줘야 해? 오늘 또 미루면 80억이 아니라 100억으로 불어날 거야!”사채업자가 거만을 떠는 모습에 도지호는 주먹을 휘날리려고 했지만 방망이가 앞섰다.그는 가차 없이 방망이에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자식이, 감히 나한테 덤비려고?”앞장선 사채업자가 도지호에게 비아냥거렸다.아들이 한 방 맞으니 유정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줄게요! 10억 줄게요! 집에 남은 액세서리랑 집문서까지 다 합치면 80억은 될 거예요. 다 드릴게요! 전부 드린
이번엔 아무도 유정연을 지켜줄 수 없다.그 시각, 도씨 일가.도지호가 저녁 무렵 집에 돌아왔을 때 유정연은 초조한 얼굴로 거실을 서성거렸다.“엄마, 왜 그래요?”“지호야? 너 왜 왔어?”“돈 다 떨어졌어요. 문자를 해도 대답이 없으니 돈 가지러 왔죠.”유정연은 울화가 치밀었다.“돈돈돈! 넌 돈밖에 몰라? 우리 이제 다 망했어! 돈 없다고!”“뭐라고요? 장난도 참.”도지호는 집에 돈이 없다는 말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돈 걱정 없이 살아와서 한 달 용돈 1억 원도 모자랄 지경이니까.도씨 일가가 아무리 망해도 도지호의 용돈이 끊긴 적은 없으니 집에 돈이 없다는 말은 농담과도 같았다.“너 이 자식...”유정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격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사채업자들이 또다시 찾아왔으니까.상황파악이 안 된 도지호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누구야? 누가 이딴 식으로 문 두드려?”그는 얼른 문을 열고 상대에게 겁줄 기세였지만 유정연이 발 빠르게 가로챘다.“안돼, 지호야!”“왜요? 누군데 그래요?”도지호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도씨 일가 도련님 도지호는 학교에서도 위풍당당한 인물이라 아무도 감히 그를 건드릴 자가 없었다.지금 이토록 무례하게 문을 두드리는데 가만히 지켜볼 도지호가 아니었다.하지만 유정연은 그를 의자에 앉히고 진정시켰다.“여기 가만히 있어! 절대 문 열면 안 돼!”도지호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넋을 놓았다.문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그중 한 명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X발 년!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문 열어! 집 다 부숴버리기 전에!”“누구야 X발!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네?”도지호가 버럭 화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때 상대가 이미 문을 부수고 들어와 버렸다.덩치 큰 체구의 남자들이 방망이를 들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건달이었다.유정연은 그들이 문까지 부수고 쳐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도지호도 상대의 기세에 짓눌려